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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바야흐로 찜통 같은 무더위가 물러가고 날씨가 다소 선선해지기 시작한 그런 계절이었다. 본디 사계절의 구애를 받지 않고 사시사철 따사로운 기후를 지닌 힐로아에서 계절을 나누기란 참으로 애매한 일이었지만, 힐로아 사람들은 나름대로 낮과 밤, 해와 달의 길이에 따라 일년을 세 절기로 나누고 각각 이름을 붙였는데, 지금이 바로 그동안 따뜻하다는 정도를 넘어서 무더운 날씨를 안겨주던 긴 낮의 수호자인 태양신을 밀어내고 달의 여신이 긴 저녁의 미소를 짓기 시작한 가을, 일명 포이베르의 계절이었다.
그러나 날씨가 이전보다 많이 선선해지기 시작했음에도 달에게 완전히 밀려나지 않은 태양의 힘은 아직도 힐로아 구석구석에까지 막강한 힘을 과시하고 있었는데, 이런 늦더위의 절기 속에도 난폭한 태양의 힘이 아직 미치지 못하는 장소가 힐로아에는 몇 군데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조용한 시골마을 샤농에서 서쪽으로 어느 정도 걷다보면 도착할 수 있는 곳. 일명 침묵의 숲이라 불리는 미개간 지역이 바로 그곳이었다.
힐로아가 모험가들에 의해 발견되고 개척되어 사람들이 정착하고 살아온 수백 년 동안 힐로아의 많은 비밀이 밝혀지고 많은 곳에 사람들의 발길이 닿게 되었지만, 그렇게 개간된 곳 만큼이나 그렇지 못한 곳도 많았는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조용한 시골마을 샤농 근교에 위치한 이 침묵의 숲이었다.
물론, 처음에 힐로아 사람들은 국토의 서쪽 대지의 일부를 차지하는 이 넓은 숲을 그냥 둘 생각은 없었다. 힐로아 뿐 아니라 일랜드 전체의 식량수급에 중대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으로 생활을 꾸려가고 있는, 영농을 주 생업으로 하는 힐로아 사람들이 이 넓은 곳을 개간하여 생활의 윤택을 누려가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리 없었기 때문에 샤농 사람을 포함한 인근 마을 사람들이 모여 이 거대한 숲을 정복하기 위해 그때는 아직 침묵의 숲이라 불리지 않았던 이름 없는 이 숲에 발을 디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기세등등하게 숲을 개간하고자 발을 디뎠던 이들은 먼저 무시무시할 정도로 위압적인 숲의 규모에 기세가 꺾이고 말았다. 하늘까지 닿을 것만 같은 아름드리 키다리 나무들로 빽빽하게 채워진 숲은 한여름의 절기에도 햇빛 한줄기조차 허락하지 않아, 불길한 어둠을 품고 있었고, 이 어둠속에서 자생하는 이끼류나 균사류 등이 뿜어내는 안개로 숲은 대낮에도 한치 앞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게다가 숲속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나무 사이사이를 비집고 다니며 유령의 흐느낌을 연상케 하는 괴이한 소리까지 내자, 사람들은 도끼질 한번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채, 겁에 질려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 후에도 사람들은 틈만 나면, 불을 지르자 거나 나무를 죽이는 약을 쓰자는 둥, 숲을 개간하고자 하는 여러 의견이 나왔었지만, 숲의 안개와 소리가 그곳에 들어가 길을 잃고 죽어간 사람들의 원한의 소리이며, 섣부른 짓거리를 했다간 화를 부를 것이라고 강력히 주장하는 마을 원로들의 입김과 힐로아를 심해의 마물로부터 수호하는 성자의 관문을 세우고 종적을 감춘 위대한 성자 성 사르체가 은둔하다가 여생을 마쳤다는 출처모를 소문까지 퍼지기 시작하면서 이 거대한 숲은 잎사귀 하나 다치지 않은 채,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미지의 지역으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숲을 ‘침묵의 숲’ ‘안식의 숲’등으로 부르며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조차 접근을 꺼리는 금기의 영역으로 보존되어 왔던 것이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영원불변의 존재로 남아있는 고대의 숲.
그러나 이 숲의 깊은 안식은 지금 작은 불청객에 의해 깨어지고 있었다.

경험 많은 나무꾼도, 숙련된 산지기도, 노련한 모험자도 깊숙이 들어가게 되면 반드시 길을 잃고 빠져나오기 어려우며, 자칫 잘못하다간 목숨마저 잃게 된다는 무서운 금기의 숲. 침묵의 숲.
들어가는 사람은커녕 근처에 얼씬 조차 하지 않는 이 숲에 지금 무모한 불청객이 금기의 문을 두드리려 하고 있었다.
불청객은 놀랍게도 열 살이 채 되었을까 의심되는 어린 꼬마소녀였다.
작은 노새를 타고 침묵의 숲을 향해 다가오는 소녀는 얼핏 보면 마치 나들이라도 가는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가을이라지만 아직은 따가운 햇살을 가리기위해 작고 앙증맞은 예쁜 리본이 달린 챙 넓은 하얀 모자를 쓰고 하늘하늘한 하얀 프릴이 달린 원피스를 입은 소녀의 모습은 영락없이 근처에 꽃구경이라도 나온 귀족 집 어린숙녀였다.
그러나, 소녀의 목적지는 이른 가을의 소풍으로 즐기기엔 거리가 먼 곳이었다.
그리고 소녀의 표정 역시 소풍을 즐기러 나온 소녀가 지을 법한 그런 표정은 결코 아니었다.
노새가 느릿느릿 한걸음 한걸음 걸을 때마다, 흔들리는 하늘빛 머리카락을 손으로 다듬으며 연신 짜증과 불만 섞인 표정으로 인형 같은 얼굴을 밉상스럽게 찌푸리고 있었는데, 쀼루퉁하게 삐죽이는 입술로는 연신 ‘내가 왜’ ‘다 이게 ... 때문이야’ 같은 불만을 들리지 않게 되뇌이고 있었다.
소녀가 연신 불만을 터뜨리는 것은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어른들조차 가지 않는 위험한 곳을 마을의 금기까지 어겨가며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물론, 소녀 나이또래의 친구들이 한창 호기심이 왕성하며 하지 말라는 일은 골라서하는 개구쟁이 기질이 다분할 나이였고, 소녀 역시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었지만, 지금 노새를 타고 금지된 숲에 다가가는 이 소녀는 그런 것과도 거리가 멀었다.
소녀의 이름은 이디아 폰 페르젠.
대대로 마을 샤농과 성 사르체의 문을 관리하는 유서 깊고 명예로운 기사 페르젠 가문의 무남독녀 외동딸로 소녀의 가문은 작위로만 본다면 결코 지체 높은 귀족은 아니었지만, 오랜 세월동안 촌장과 함께 마을의 대소사를 관장했으며 심해에서 출몰해오는 마인과 마물들을 수도 없이 격퇴해, 마을을 수호한 존경과 신망을 한 몸에 받는 나름 뼈대 있는 집안이었다.
이런 유서 깊은 가문의 딸인 이디아 역시 신분에 걸맞게 조신한 몸가짐과 예의바른 이미지로 단단히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집안에선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는 금지옥엽 외동딸이요, 마을에선 찾아보기 힘든 숙녀이자 모범생으로 정평이 나있었다.
그렇다보니 이디아는 또래의 아이들이 흔히 저지를 법한 사소한 말썽이나 장난은 물론이요 어리광이나 투정 역시 좀처럼 보기 어려운 그런 소녀 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완전무결한 요조숙녀에게도 한 가지 큰 흠이 있었으니, 바로 마을에서 소문난 말썽꾸러기.
동갑내기 개구쟁이 아윈과 어울린다는 점이었다.
이디아가 금기를 어겨가며 이 침묵의 숲 앞에 다가온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많이 갑갑했지? 이제 나와도 돼.”

숲에 다다르자 이디아는 노새에서 내려 쓰고 있는 모자를 살짝 들어 올려 보였다.
그러자 이디아의 말이 마치기가 무섭게 모자 속에 숨어있던 하얀 솜뭉치 같은 무언가가 머리카락을 헤집고 재빠르게 뛰쳐나왔는데, 어깨를 따라 손바닥으로 내려와 기지개를 펴듯 몸을 부르르 떨고는 보석처럼 박힌 초록빛 눈을 반짝이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분명 솜덩어리는 아니었다. 솜뭉치보다는 쥐에 가까웠고, 쥐보단 다람쥐나 청솔모에 가까운 동물이었는데, 이마에 뿔처럼 하얀 털 돌기가 삐죽 삐져나온 것이 특징인 귀여운 동물이었다.
이디아는 갑갑한 모자 속에서 갇혀 있었던 작은 친구를 달래줄 양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엘피르, 엘피르는 사람들 눈에 보이면 안 되잖아. 숲의 대장이 그 정도는 꾹 참아야지. 안 그래?”

그리고 벗은 모자를 노새의 머리에 씌워주며 역시 친구에게 말하듯 속삭였다.

“여기까지 와줘서 고마워 포포. 그럼 그늘에서 쉬고 있어줄래? 금방 나올테니까 걱정하지마.”

노새는 신기하게도 이디아의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곤 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 가만히 주저앉았다.
주변정리가 일단락되자 이디아는 엘피르를 어깨위에 앉히고 다부진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럼 아윈을 찾으러 가자. 안내해줘 엘피르.”

침묵의 숲은 근처에 인가를 두고도 태고의 모습을 간직한 독특한 곳이었다.
십 수 미터는 될 듯한 키다리 나무들이 꼿꼿하게 하늘을 찌른 모습하며, 사람허리까지 오는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라나 숲이 익숙한 사람도 앞으로 나아가는데 애를 먹기 쉬웠다.
어디 그뿐이랴, 바닥엔 축축한 이끼류와 균사류 때문에 까딱하면 미끄러져 발목을 삐끗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어려운 장소를 이디아는 아주 익숙하게 헤쳐 나갔다.
어둑어둑한 숲속에서도 앞장서서 달리는 엘피르의 하얀 몸은 쉽게 눈에 들어왔고, 길을 잃게 하는 안개와 이디아의 키만한 잡풀들은 주문처럼 낭송하는 상냥한 인사말에 스스로 걷혀지며 길을 내주는 것이었다.

“숲의 여러분. 오늘도 제 친구 아윈을 데리러 왔어요. 조금만 도와주세요.”

조금이라도 나가기 어렵다 싶으면 이디아는 주저 없이 숲의 사물들에게 양해를 구했고, 그 목소리에 정체모를 마력이라도 깃든 것처럼 숲은 이디아를 위해 길을 터주었다.
사나운 억새들도 한결 부드러워져 상처를 입히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게 숲과 엘피르의 도움을 받으며 한참을 들어간 이디아는 엘피르가 우뚝 멈춰 서자 그제야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훔치며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나 이 앞에 있구나. 오늘도............. 정말 못 말린다니까.”

키다리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환한 언덕을 보며 이디아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들어온 말썽꾸러기를 데려갈 수 있는 사람은 마을에서 오직 단 한 사람. 이디아 자신뿐이었다.
이디아는 당장이라도 눈앞에 보이는 언덕으로 달려가 이런 곳까지 오게 만든 장본인의 귓불을 끌고 내려오고 싶었지만, 이디아는 지금까지 헤쳐 온 숲보다 훨씬 안전해 보이는 저 언덕을 향해 한걸음도 다가갈 수 없었다.
아윈이 제 멋대로 이름을 붙인 이 언덕. 일명 ‘전망 좋은 언덕’은 이디아에게 개인적으로 금기중의 금기인 곳이었다.

“..........미안하지만 부탁해. 엘피르...”

작은 친구 엘피르도 이디아가 ‘전망 좋은 언덕’에 올라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었기에 순순히 이디아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어떤 불상사를 당할지 알면서도.................................
그리고 잠시 후. 쪼르르 달려 언덕길을 올라갔던 엘피르는 가엽게도 목덜미를 꽉 잡힌 채 팔다리를 바둥거리는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이 고자질쟁이 쥐새끼 같으니! 너 때문에 잔소리꾼이 또 여기까지 올라왔잖아~!”

바둥거리는 엘피르를 얄밉다는 듯이 노려보는 소년.
덥수룩한 금발머리를 아무렇게나 삐죽삐죽 기른 소년은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에 장난기 가득한 입가의 표정까지 어딜 보나 영락없이 천진난만한 개구쟁이 꼬마의 표본이었다.
바로 이 소년이 조용한 샤농을 언제나 소란스럽게 하는 악동이자, 지체 높은 꼬마숙녀가 금기를 어겨가며 이 숲까지 오게 만든 장본인, 아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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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쓰다보니 부족한 점이 곳곳에서 느껴집니다. 다시 열심히 노력해야 겠어요^^;

 

다들 추석잘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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