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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성계신곡 렉스렉시온5

2010.04.29 17:21

azelight 조회 수:694

대충 옷을 갈아입고 식사를 할 때쯤에 세리네티가 나타났다.

뒷머리를 남기고 양옆으로 묶은 하얀 백발과 홍안이라는 눈에 띄는 외형적 특징. 후드티와 나팔바지에 스니커.

어제에 비하면 심하게 가벼운 차림을 한 그녀는 겉으로 보기에는 병약한 느낌이 들만큼 가냘픈 소녀였지만 본 정체는 바로 용. 현재 성계연합 내의 모든 종족들 중 가장 강력한 육체와 지성을 타고나는 종족이었다.

덕분에 유이스는 심장이 떨어질 뻔 했다.

물론 정문으로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식사를 하고 있는 순간 갑자기 맞은 편 의자에 *출현*이라는 방식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할로. 유이스.”

검지와 중지손가락만 펴서 까닥거리며 세르네티는 밝은 미소와 함께 인사말을 건넸다. 하지만 그 인사를 받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폐가 졸아들 지경이라 인사를 받아줄 여유가 없었다.

“이런. 이런. 요즘 젊은 애들은 참 약하네.”

한심하다는 듯 의자에서 떨어진 유이스를 내려다보며 세르네티는 싱글싱글 웃었다. 말과는 달리 유이스의 반응에 오히려 만족한 듯한 태도였다.

“허억. 허억. 절 죽이시려고 작정하신 겁니까?”

유이스는 가슴을 움켜쥐고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이 사람 은근슬쩍 심장에 나쁨다. 생각해보면 무중력 감옥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랬다. 뭔가 충격적인 사실들을 마구마구 내던지고 말하는 것 하나하나가 직구에다가 절묘하게 약점을 파고든다.

오래 상대하다가는 스트레스성 위천공으로 일찍 생을 마감하게 될지도 모를 정도였다.

“으응. 절대 아니지. 그 정도로 죽을 리가 없잖아. 아직 젊으니까 심장도 튼튼하지 않겠어?”

의자 아래로 비스듬히 몸을 들이민 세르네티는 꾸욱꾸욱 유이스의 왼쪽 가슴을 찌르며 눈웃음을 지었다.

실제 외양만 봐서는 세르네티가 훨씬 어렸지만, 그녀는 종족답게 나이가 유이스보다 훨씬 연상이었다. 적어도 유이스의 10배는 넘게 살았을 것이다. 그녀의 힘과 직위는 아무리 재능을 타더라도 허투루 없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봐. 봐. 두근두근 잘도 뛰네. 그보다 어서 빨리 식사하는 것이 좋을 거야.”

“네?”

“슬슬 올 때가 되었거든. 널 빼냈으니 죽어라 쫓아올지도.”

유이스는 시키는 대로 식사를 속행하며 세르네티의 말이 추적자가 올 것이란 말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게다가 세르네티가 자신을 빼감으로서 그들이 의심하고 있던 유이스의 효용성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게 된다는 말이기도 했다.

만약 잡힌다면 또 다시 무중력 감옥에 갇히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그것만은 사양이었다. 세르네티는 그런 유이스의 감정을 눈치 챈 건지 아닌 건지 속없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렇게 되면 또 무중력 감옥행일지도. 이번에는 아예 해체 당할지도 모르겠네.”

그렇게 말하다가 유이스의 얼굴이 꽤나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고는 오른쪽 다리를 끌어당겨 앉고는,

“걱정마. 지켜줄 테니까. 어쨌든 이제 너는 쿼레스의 요원이니까 말이지.”

안심하라는 듯 말하지만 솔직히 안심할 수가 없었다.

단독으로 임무를 시킬 정도라면 세르네티는 분명이 굉장히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물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군항이었고 순수하게 전투기능만 따지면 뛰어난 능력을 지닌 인재가 많았다. 게다가 진형을 짜고 덤벼오는 다수는 개개의 전투력에서 월등히 압도하는 적을 쓰러뜨리기도 한다.

그런데 세르네티는 여유만만했다. 어쩌면 굉장한 탈출계획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소문처럼 모든 시설에 쿼레스 전용의 비밀 통로가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어지간한 놈들에게 걸렸다, 너도, 아르베이스의 후예들이라면 꽤나 과격파 집단이거든. 사실 3개월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네가 해체당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에 더 감탄했어.”

“일단은 오염체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겠죠.”

씁쓸한 표정으로 유이스는 말했다. 정말 오염된 상태라면 최대한 자극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무중력 감옥에 격리조치 되었다는 것 자체가 그들이 유이스를 가둬두고 싶어 했다는 말과 동일한 것이다.

원래라면 아무리 징계 명목으로라도 24시간 이상 무중력 감옥에 넣어두는 일은 없었다.

대체로 인간이라 절대허공과 어둠 앞에서는 자아를 확인 못하는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들은 유이스를 자극으로부터 때내고 싶어 했단 이야기였다.

“그렇겠지. 그래도 이 일로 궁지에 몰린 것은 사실 그들이야. 아인스트가 그들에 대해 알고만 있는 것과 드러내기로 했다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거든. 어쩌면 아인스트가 직접적인 증거를 수집하기로 했다고 믿을지도 몰라.”

“그렇게 된다면?”

“아아, 이렇게 되겠지.”

세르네티가 대답한 동시에 창을 깨고 둥그스름한 것이 날아들었다. 유이스는 반사적으로 그 날아든 것에 주목했다.

“머리?”

“소장이네.”

세르네티가 보충 설명을 하듯이 말했다. 그 머리는 제 9연구소 소장의 머리였다. 그 소인배적인 시선과 알랑방귀를 뀌던 요정에 대해서 떠올리며 세르네티는 손을 들어 올렸다.

‘시선을 뺏을 수단으로는 효율적이네.’

세르네티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읽힌 상태에선 그런 술책도 의미가 없다. 이미 그녀는 내면에서 현실 재구축하고 사용할 술식을 완성시킨 상태였다. 게다가 이 방자체가 바로 그 술식을 보조하기 위한 보조장치와 마찬가지였다.

어디까지나 이 방은 정보부의 안전가옥. 혹시나 모를 추적을 대비한 준비는 철저하게 되어 있었다.

세르네티는 이미 머리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도 제법 상위급 술식사가 제작한 수제품이라는 것도 순간적으로 알아챘다. 왠만한 수단으로는 막아내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하지만.

“바이 바이.”

머리에 장치된 폭약이 터졌을 때는 이미 세르네티와 유이스는 방에서 사라진 뒤였다.

 

아르베이너스의 후예들.

그들은 혹성 아르베이너스 출신의 생존자들이었다.

공멸 후 인류를 다양한 방식으로 목숨을 보존했지만 당장 그들은 기아와 허덕임과 싸워야 했다. 공멸 후 대부분의 행성은 황무지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기적 같은 구문명의 결실인 보존 플랜트가 존재한다고 해도 행성의 생태계를 재생시키는 일에는 엄청난 시간과 순서가 필요했다. 실제로 공멸 후 574년간 완벽하게 생태계를 회복한 행성은 하나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들 중에서는 공멸 후에도 살아남은 ‘적’의 잔당들과 치열하게 전투하며 살아남은 자들이 있었다.

아르베이너스의 후예들 또한 그런 자들의 집단이었다.

절대방어선에 근접한 아르베이너스 역시 ‘적’과 생존 경쟁을 벌여야 했던 곳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에게는 자부심이 있었다.

싸우고 살아남았다.

그런 자부심이 있기 때문에 아르베이너스의 주민들은 아르베이너스의 후예들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독자적으로 적을 치기 위한 방법을 강구 중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아인스트의 방식은 너무 미적지근 다. 게다가 아인스트는 문명관제라는 명목으로 구세계의 무기기술의 방출을 꺼리고 있기 까지 했다.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아인스트는 현 성계연합의 중추이기 때문에 그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존재였다. 현재 아인스트의 역할을 대리할 수 있는 존재나 조직, 체제가 성계연합 내에 존재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현재의 풍요를 가져온 것은 아인스트. 시민들의 지지도 절대적이다.

그러나 아르베이너스의 후예들에게 이런 풍요는 반석 위가 아닌 모래 위에 세워진 빈약한 평화에 불과했다.

언제까지나 적을 방어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승리할 수 없다.

이번에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절대방어선의 아홉 방어선이 단숨에 뚫려버린 것은 아인스트의 태만한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아인스트에만 맡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들의 속으로 적을 칠 수 있는 수단을 찾아야 했다.

다행히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자들은 군내에 많았다.

성계연합이 결성되고도 300년 동안 이어져온 이 싸움을 끝내기 위해선 더 이상 수비만으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는 자들과 그들이 만들어 놓은 파벌이 존재했던 것이다.

아르베이너스의 후예들은 동일한 목적을 지닌 군내의 파벌들과 손을 잡고 오염체일 가능성이 있으며 사상 초유의 ‘적’에 대한 목격정보를 가지고 있는 유이스를 비밀리에 손에 넣는 것에 성공했던 것이다.

그러고 3개월.

결국 아무런 성과가 없어서 포기하려는 찰나였으나.

“쿼레스 놈들.”

장년의 남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암록빛 장교복을 입은 그는 제 2군항과 그에 소속된 총 34함대의 사령관으로 이제 나이가 세 자리 수가 되는 남자였다.

그의 이름은 코델리우스 보르만. 제 2사령관이지만 동시에 아르베이너스의 후예들의 수장이기도 했다. 아인스트에게 꽤나 불만을 가진 아르베이너스의 후예들에 속한 만큼 쿼레스에게 유이스를 뺏겼다는 이야기를 듣자 냉철한 이미지와는 달리 꽤나 화가 난 상태였다.

하지만 그런 그를 진정시키듯이 이번에는 차분한 목소리가 코르델리우스의 귀에 들려왔다.

“하지만 덕분에 알게 된 것도 있군요. 아무래도 그 자는 확실히 뭔가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제 와서 쿼레스가 끼어들리는 없지요.”

부관인 란돌 세퍼티. 코르넬리우스 이상으로 냉철하다는 평을 듣는 그의 성격을 깔끔하게 뒤로 넘긴 머리모양이 증명해주고 있었다. 게다가 코르넬리우스가 흥분한 것과는 달리 란돌은 여전히 냉정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란돌의 냉정한 면상을 보았기 때문인지 코르넬리우스 또한 자신이 흥분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감정을 수습했다.

“흥. 하지만 놈들. 그 상황에서 탈출하다니 제법 실력이 있는 모양이군. 섣불리 손댈 순 없겠어.”

란돌 또한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적어도 이동술식을 사용해서 시공절리 처리된 공간으로 뛰어 들었으니 예사 실력이 아닌 셈이지요. 방 안에 술식을 보조하도록 조치가 취해져있었다고 합니다만 그걸 고려해도 최상급 술자로군요.”

“아아. 그래. 그게 문제야. 꽤나 유능한 인물을 보낸 모양이군. 어중간한 놈들을 보내봐야 공물이 돼 줄 뿐일 거야. 그렇다고 함부로 상위급 능력자를 투입할 수도 없지. 어느 정돈지 알 수 없으니까. 되려 놓치기라도 하면….”

아인스트에게 역적으로 찍힐 거라는 말은 굳이 안 해도 상관없는 말이었을 것이다. 아인스트가 직접 보낸 사자를 공격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그렇기에는 오염체란 존재는 너무 매력적인 존재였다. 어쩌면 수수께끼에 휩싸여 있던 광체를 두른 괴물들의 정체를 밝혀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성과가 없었을 때는 파기할까 하고 생각하기도 했었지만 지금만큼은 살려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흠, 그렇다면 더 생각할 필요도 없겠지요.”

란돌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빠르게 말을 꺼냈다.

“좀 무식하긴 합니다만 적의 능력을 계측할 수 없다면 한가지 수밖에 없습니다. 각하.”

란돌의 말에 코르넬리우스는 굳이 지적할 필요는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주 당연한 이야기라고 할까.

“강수로 가볼까. 저쪽이 어느 정도인진 모르겠지만 우리 쪽 최강의 병사들과 어느 쪽이 우위인지 한 번 확인해 보자고.”

자비심 없는 미소를 지으며 코르넬리우스는 호출 버튼을 눌렀다.

 

떨어진 장소는 지하였다. 어두운 붉은 색 조명으로 채워진 긴 동공.

그것도 대동공 층.

말하자면 이 제 2군항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장소였다. 시공절리로 보호받고 있는 기관층인 이 장소는 시공절리를 시작으로 막대한 술식으로 보호되고 있었다.

어지간한 능력을 지닌 술식사도 시공절리를 뛰어 넘어 공간도약을 시도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세르네티는 해냈다.

그것도 한 번에.

염술이면 몰라도 술식에는 문외한이 유이스도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아냐면 차원간섭형 유인전투기를 타는 조종사들은 시공절리 술식이 가져다주는 부가적인 방어 효과에 대한 교습 또한 받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런. 아쉽게도 식사는 중단이야. 뭐, 시간은 벌었으니 이틈에 거리를 벌리자.”

세르네티는 천장을 보고 글허게 말하다가 유이스가 손에 접시와 식기를 들고 멍청이 서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싱긋 웃었다.

“그건 다 먹고 가도 좋아.”

세르네티의 말에 얼빠진 표정을 하고 있던 유이스가 그릇과 식기를 손에 놓았다.

“아닙니다. 지금 당장 출발해도 좋습니다.”

“아깝지 않아?”

“괜찮습니다.”

“그렇다면 가지. 아, 그리고 난 매우 유능하니까 이 정도로는 놀라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곧 익숙해지겠지만 애번 그렇게 얼빠진 얼굴을 하면 내가 민망하거든.”

“쿠후~.”하고 작게 웃으며 세르네티는 앞장섰다. 유이스는 세르네티의 말에 기가 막혔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도 그럴 것이 실제로 대단하기 때문이었다.

아마 처음부터 소장의 머리가 창을 통해 날아들 것도 예상하고 있었던 것임에 틀림없었다. 굳이 날아드는 소장의 머리를 막지 않았던 이유는 어차피 버릴 장소였던 데다가 폭발 전에 공간도약을 성공시킬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상사였던 컬린 대령도 상당한 수준의 술식사였지만 세르네티에 비하면 아직 한참 모자란 수준이었다.

그저 단순히 술식사로서의 능력만 따지면 손가락으로 뽑을 만한 존재가 아닐까?

유이스는 그렇게 추측했다.

한동안 유이스와 세르네티는 기관실의 통로를 달렸다. 명백히 세르네티는 유이스의 페이스에 보조를 맞춰주고 있었다. 유이스는 이제 겨우 일반인에 가까운 수준으로 회복한 상태였다. 물론 하루 만에 걷지도 못할 상태에서 그 정도로 회복한 것은 경이로운 일이었지만 지금 당장 발목을 잡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 변하는 것이 아니었다.

무거운 팔과 다리.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고통을 호소해오는 폐.

무력감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지만 눈앞에 저 정도로 앞도적인 비교대상이 있어서야 무력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압도적인 종족 차와 타고난 재능, 긴 시간 동안의 수련이 조화를 이뤄 탄생했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무력감을 생각나게 만들 정도의 격차의 소유자가 바로 세르네티라는 존재였다.

“이런. 이런.”

헐떡이는 유이스와는 달리 멀쩡한 세르네티는 이마를 짚으며 멈춰 섰다. 덕분에 거의 한계에 달해가던 유이스도 덩달아 쉬게 되었지만 다리가 후들후들한 것이 오히려 멈춰선 덕에 쓰러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괜찮냐고 물어주고 쉽지만 그럴 여유가 없을 것 같아 유이스. 추격자가 생각보다 빠르게 붙었다고 해야 할까. 게다가 다 만만치 않은 것이 지켜주지 못할지도.”

제법 심각한 표정이 되었기 때문에 유이스는 실제로 위기 상황에 빠졌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세르네티는 호주머니에서 화상플레이트를 꺼내 조작하더니 화상정보 하나를 꺼내서 유이스에게 건넸다. 유이스는 한 번보고 이게 기관실의 지도라는 사실을 깨닫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 이거랑 이거 받아.”

유이스가 입체지도가 떠올라있는 화상플레이트와 카드를 받아들자 세르네티는 주의를 주는 듯한 태도로 설명했다.

“여기 표시된 위치로 이동해. 그곳에 숨겨진 문이 있어. 쿼레스 관계자만이 볼 수 있자. 즉 이 카드를 가진 사람만 볼 수 있는 문이야. 그 문은 이 카드로만 열 수 있도록 되어 있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엘렌이라는 검은 머리카락에 쓸데없이 가슴만 큰 여자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녀를 따라가도록 해.”

“어, 그렇다면 당신은?”

“나? 난 주인공을 위해 길을 막고 싸우다 죽는 동료쯤 되겠네. 자, 빨리 가.”

그래도 유이스가 머뭇거리자 세르네티는 피식 웃었다. 니가 무슨 생각하는지 다 안다는 득한 표정이었다.

“스스로의 힘에 대해서 알겠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이를 달래는 듯한 그 태도에 유이스는 실소가 나올 것 같았지만 동시에 냉정하게 그녀의 말을 이해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생환을 빌겠습니다.”

유이스가 경례를 하며 말했지만 세르네티는 그런 격식과 상관없는 가벼운 몸짓으로 손을 흔들었다.

“걱정 말도록, 요원. 본관은 약속한 바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돌아갈 테니까. 그 때 일어났던 진실을 알고 싶다고 했지?”

“네.”

“그럼 먼저 가서 기다리도록 해.”

“알겠습니다.”

유이스는 즉각 지친 몸을 이끌고 달려갔다.

잠시 쉬었을 뿐이지만 이미 상당히 체력이 회복된 듯 했다. 저 정도면 회복력만큼은 령 이상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그럼 난 손님을 접대할 준비를 해볼까.”

앞으로 몇 십초 정도 시간이 있었다. 그 정도라면 수백 가지 상황을 대비할 수 있다. 세르네티는 싱긋 미소 지었다.

요란하게 싸우기에 꽤나 좋은 장소였다.

 

자신에게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다만 유별난 게 있다면 지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인물들을 유별나게 쉽게 잃는다는 점이었다.

기억하고 있는 것만 3번이다. 고아시절 함께 고리를 헤매던 아이들. 함께 복지관에서 고육 받은 친구들. 동기로서 전우로서 목숨을 걸고 적에게 맞서던 동료들.

고독에 처한 적은 별로 없었으나 상실의 고통은 여러 번 느꼈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일어섰다.

지금처럼 살아남기 위해서 달린다.

아직 절대방어선은 완벽히 안정된 상태가 아니었다. 드물긴 하지만 최종방어선이 뚫리는 일은 비일비재로 일어난다.

그도 그럴 것이 성계연합군은 절대방어선을 완벽하게 막을 수 있을 만큼 많은 수가 있지 않았다.

일종의 순찰을 돔으로서 그 약점을 메우려고 하지만 그 조차도 완벽하지 않다.

그렇다보니 적들은 그 빈틈을 파고들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공격당하게 된 행성은 말 그대로 지옥이 된다.

유이스는 유년 시절에서부터 청년 시절까지 그런 일을 2번 겪었다.

살아있는 것이 오히려 고통이며 죽음이 사치라고 여겨질 정도의 고통을 그는 2번이나 느꼈다.

가까운 이의 죽음에서 오는 지독한 상실감과 고독, 굶주림 같은 육체적인 고통들까지.

그래도 유이스는 살아남았다. 악착같이 살아남았다.

그것을 행운이라고 불러야 할지 불행이라고 불러야 할지 알 수 없다. 어쨌든 유이스는 살아남았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 지는 유이스 자신에게 달려있는 일이었다.

이렇게 자신이 처한 상황에 유이스는 특별히 평가를 하지 않았다.

그저 최선을 다해서 살았고, 어떤 상처를 입어도 어떻게든 일어섰을 뿐이다.

산다는 것은 고난을 동반하는 일이고, 죽음은 그가 몸담았던 곳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간헐적으로 적들이 공격해오는 최종방어선 근처의 행성과 절대방어선이라고 일컬어지는 적과의 전투영역.

어디도 죽었다고 불평할 수 없는 장소였다.

그렇다고 수동적으로 살진 않았다. 적어도 최선을 다해 살아남았고 때론 감정에 휩쓸려 움직이기도 했다.

군에 들어갔던 일이 바로 그런 감정에 의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겠다.

기억하진 못하지만 그가 천애고아가 된 것도 적들 탓이라고 하면 그들을 최전선에서 적대할 수 있는 군이라는 자리는 그의 천직 같기도 했다.

적어도 그는 적을 적이 아니라 원수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막연히 연합의 위협이 되는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닌, 실제로 가족과 동료, 친구들을 잃은 자로서 분노와 적의를 안고 싸울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또 잃어버리게 되었을 뿐이다.

비참한 이야기지만 사실인 이상 별 수 없다. 더 비참한 것은 결국 또 다시 최후의 생존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유이스는 16함대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 때문에 3개월이나 무중력 독방에서 이유도 모르고 갇혀 있었다.

모르는 사이에 머릿속의 기억을 뒤져졌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더 무서운 것은 그는 그 처사에 저항할 수단조차 하나 없었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못하고 납득하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죽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무서운 일이었다.

적어도 유이스는 그런 상황에 다시는 처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지금 심정이었다.

행운이 끝난 것이 아닌지 유이스는 이번에도 살아남았다.

어째서인지 아인스트 직하 특무기관 쿼레스가 그에게 눈독을 들였기 때문이었다.

군에서 말하는 유용성이 유이스에겐 없다고 쿼레스의 사자인 세르네티는 말했지만 과연 그것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아니, 단순히 아인스트의 규칙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빼내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인스트는 적들에 대한 정보의 우위를 지키기 위해 빼내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세르네티를, 쿼레스를, 아인스트를 얼마나 믿어야 할지 유이스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당장 위협에서 도망치기 위해서 유이스는 쿼레스에게, 아인스트에게 기댈 수밖에 없다.

살기 위해 사는 것이 인생의 목적인양 되어버린 것을 다른 사람들은 서글픈 인생이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그래도 유이스는 살아남아야 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불운인지 행운일지 모를 운으로 계속 해서 살아남은 보람이 없었다.

죽은 동료들을 기억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이 잃은 삶을 위해서라도, 그들이 남긴 유언을 위해서라도 그는 계속 살아야 했다.

유이스는 멈춰섰다.

세르네티가 말한 장소에 도착했지만 문은 보이지 않았다.

‘고장인가?’

한 순간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그렇다면 낭패다. 최악이다. 시간이 지연될수록 자신에게 불리하게 되는 것이야 자명한 일. 게다가 이게 고장 났다면 처음부터 다시 훑어 봐야 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그 때 유이스는 인기척을 느꼈다.

마치 그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척추를 훑고 지나가는 기묘한 감각. 유이스는 그 섬뜩한 감각에 당장 뒤돌아섰다.

어둔 붉은 조명 아래 한 명의 소녀가 서 있었다.

머리에 헤어드레스를 하고 몸에는 프릴이 달린 검은색 원피스를 하고 있고, 양팔로 정확한 형체를 알 수 없는 인형을 안고 있는 소녀.

이런 군항에서는 어울리지 않을 화려한 옷차림의 소녀는 눈가까지 내려온 에지컷의 단정한 머리카락 사이로 유이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안녕, 오빠. 무사한 것 같아서 기뻐.”

스스럼없이 인사하며 다가오는 소녀는 마치 공허 그 자체인 것처럼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직접 얼굴을 보고 싶어서 몰래 빠져 나왔어. 그리 겁먹을 것은 없어. 더 다가가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겁먹은 모습을 보니 슬프네.”

서운한 듯이 일그러지는 얼굴을 보니 유이스로서도 절로 동정심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경계를 늦추진 않았다.

위험을 느끼진 않았지만 묘하게 불길한 존재하는 것은 자명했다.

어떻게 이곳에 존재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존재.

게다가 이 기묘한 감각은 공포 그자체로 뇌리에 각인된 그 때의 일을 연상케 하는 감각이었다.

“무사한 모습을 봐서 만족했어. 어서 쿼레스로 와줘. 기다릴게. 아, 맞다. 에인스티아를 만나거든 감사인사를 전해줘. 부탁할게.”

인형을 건네줬기에 유이스는 엉겁결에 그 인형을 받아 들었다. 그제야 유이스는 인형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오랜 옛날 멸종해버린 생물의 모습이었다. 동글한 머리와 통통한 듯한 몸통이 과장되어 터무니없이 귀엽게 변한 이 동물은 이래봬도 상당히 강력한 포식자였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인형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 소녀는….

유이스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소녀는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깨끗하게 사라져 있었다. 술식의 발동도 느끼지 못했고 염술을 사용한 흔적도 없었다.

말 그래도 깨끗하게 지워진 듯 사라진 것이다.

잠깐 인형에 한 눈 팔린 한순간에.

유이스는 홀린 듯한 표정이 되었지만 손에 쥐고 있는 인형은 소녀가 실존했다는 증거였다. 적어도 착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어라?”

그러다 유이스는 자신이 서있는 벽 바로 옆에 문 하나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느새 문이 나타난 것이다.

‘어떻게?’하는 의문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 문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정말 귀신에 홀린 기분이 된 유이스였다.

여하튼 문을 발견한 이상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카드를 밀어 넣자 문의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나더니 매끄럽게 열렸다. ‘윙.’하는 모터도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왔다. 와~, 난 엘렌이라고 해. 유이스지?”

문이 열리자 밝은 조명과 함께 싹싹한 목소리를 가진 키가 훤칠한 여성이 모습을 드러났다. 검은 흑발을 뒤로 올려 묶은 여성은 가슴을 강조하는 듯 깊게 파인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그게 크기도 크기고 노출도 노출인지라 유이스는 왠지 보기가 민망해서 고개를 돌렸다.

“에게, 그렇게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돼. 어라? 그런데 그 인형은 뭐야? 귀엽네. 비싸 보이는 건데. 설마 그런 취미야?”

그런 취미가 뭔지 묻고 싶은 마음은 나지 않았다. 뭔가 들었다가는 마음의 상처가 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하긴 취미 따위야 어때, 추억의 물건이라면 실례했어. 그런데 감방에 그런거 들고 들어갈 수 있나? 모르겠네. 아아, 맞다. 지금 이런 말 할 때가 아니지. 자,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용.”

엘렌이 끌어당기는 대로 유이스는 안으로 끌려들어갔다.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힘이었다. 이 여성은 겉보기에는 평범한 인간인데 힘이 범상치 않았다. 덕분에 유이스는 그대로 엘렌의 품에 폭 안기게 되었다.

푹신한 감촉이 얼굴을 덮쳐왔다.

“아잉. 덮치는 건 언제라도 O.K지만 지금은 바빠. 그러니 나·중·에.”

오해라고 말하려고 급히 몸을 내냈지만 어느새 닫혀버린 문에 등을 부딪치고 엘렌에게 안기는 처지가 돼야했다.

“이런 아직 몸이 약해서 이런 강한 자극에는 약한 거로구나. 이해 못했네. 그러고 보니 무중력 감옥에 갇혀 있었다고 했지. 잘도 하루 만에 회복했네. 정말 강화조정 수술이란 거 의외로 굉장할지도. 나도 한 번 연구해 볼까. 응? 어때? 내가 조사할 수 있게 해부할 수 있도록 해줬으면 하는데.”

속삭포처럼 조잘조잘 거리는 엘렌의 말에 유이스는 묻혀 버릴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어머, 표정이 안 좋네. 몸이 안 좋아? 그렇게 힘이 없으면 곤란한데. 아직 한참을 더 걸어가야 하거든. 기운 좀 차리게 포도당 주사라도 놔 줄까? 즉효성인데. 좀 반동이 커서 그렇지.”

“괜찮습니다.”

유이스는 엘렌에게서 비켜서며 몸을 추슬렀다.

문에 등에서 얼얼한 느낌이 들었지만 말 그대로 별거 아닌 통증이었기에 무시했다.

“아쉽네. 이래봬도 난 의무관이니가 좀 더 의지하도록 해도 괜찮아. 물론 성적인 의미로도. 그것 있잖아. 양호실 침대위에서 양호선생님과 로맨스. 꺄악. 그런 것에 동경같은 거 하지 않아? 시츄에이션 말이지. 백의의 천사라던가. 좋을 것 같아. 환자와 로맨스 말이지. 일방적으로 보살피고 보살핌 받는 관계가 상호교환적인 관계로 돌변하는 거야. 그런 음란한 관계 말야. 멋지지 않아?”

“아녀, 거절하고 싶습니다만.”

유이스는 냉정히 말했다.

“우린 아쉬움으로 결부된 사이인 것 같아. 하지만 우리 아마 한 배를 탈거니까 말이지. 서로를 좀 더 이해해야한다고 생각해. 육체적으로도 말이야. 그렇지 않아? 솔직히 승무원 전원이 여성이라기에 나 좀 실망했는데 말이지. 남자가 들어온다니 왠지 기쁜 걸.”

앞장서서 걸어가는 엘렌의 뒷모습을 보며 유이스는 ‘직장 성회롱이란 것이 이런 건가.’라는 생각을 하면서 엘렌의 뒤를 따랐다.

그러면서 세르네티와 엘렌 같은 여성들로 구성된 함을 떠올렸다. 그 속에서 남자는 자신 혼자.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런 걱정이 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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