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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소녀는 울지 않는다 3

2010.04.06 22:25

azelight 조회 수:638

“아고고.”

소녀가 제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아침이었다.

머리를 흔들며 일어선 소녀에게서 처음 가지고 있었던 이세계의 물품들은 남김없이 사라져 있었다. 수능이 끝났다고 새로 장만한 휴대폰을 시작하여 평소 자주 사용하던 MP3와 시계, 점퍼 등등. 가지고 있던 모든 물품이 사라지고 대신 다른 것들이 소녀에게 입혀져 있었다.

재질 불명의 옷. 과연 벗는 것이 가능할지 의문스러운 옷으로 자동 세정은 물론 땀도 완벽하게 흡수해주며 입고 있는 동안 씻을 필요가 없는 궁극의 옷이었다.

소녀는 요정의 대표가 자랑스럽게 이 옷에 관해서 설명하던 것을 떠올렸다.

“그런 것 치고 이 디자인은…”

소녀는 한숨 쉬면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미묘하게 무겁고 단단한 소재. 그럼에도 불구하고 움직일 때 옷을 입고 있다는 감각이 거의 없다는 신개념 요정소재로 만들어진 옷이었다.

어깨를 드러내는 원피스. 손목의 품이 넉넉하지만 금속 느낌의 단단한 소재로 끝이 마감되어 있었다. 그런 주제에 유연해서 손목에 걸리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소녀가 살던 세계에서는 결코 볼 일이 없는 소재의 옷이었다.

이런 신시간 소재로 된 원피스의 치마는 몹시 짧았고 이런저런 장식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단출한 디자인을 선호하는 소녀가 보기에는 지나치게 화사한 옷차림의 복장이었다.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왠지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기분 상 원래 있던 옷을 돌려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제 요정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요정들은 우르를 달려들어 소녀가 입고 있던 옷을 녹여 버리더니 순식간에 지금 복장으로 갈아 입혔다. 그리고 이런 저런 부속품들을 달더니 덮쳐 올 때와 같이 우르르 물러나 ‘뿅’하고 사라져 버렸다.

상상을 초월하는 스케일의 옷 갈아입히기였다. 게임이었다면 분명이 앞에 비기니 오의니 하는 것이 들어갈 것이다.

소녀는 그런 감상을 속으로 늘어놓으며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 보았다. 머리에도 뭔가를 잔뜩 달았던 것 같지만 거울이 없으니 확인할 수 없었다. 때어 볼까하고 생각했지만 옷처럼 복작하기 그지없다면 머릿결에 손상이 갈 것 같아서 그만뒀다. 나중에 거울이라도 발견하면 보면서 벗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게다가 당장 머리가 불편하거나 무겁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기에 소녀는 한동안 이 상태를 고수하기로 결정했다.

이 옷에 분명 뭔가 힘 같은 것이 있을 것이다.

요정의 말에 의하면 자신은 세상의 가능성을 먹어치운다는 어처구니없는 괴물과 싸워야 했다.

지금 소녀 자신이 그런 괴물과 싸울 마음이 있나 없나를 제쳐 놓고 말이다.

그러니 분명 이 옷에도 뭔가 힘이 깃들어 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 괴물과 맞서 싸울 자에게 설마 평범한 것을 주기야 하겠는가?

그것이 소녀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 검 역시.

허리의 버클에 메인 한 자루의 검을 소녀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은색 일색의 단출한 검.

사소한 장식도 없고 심지어 영화 속에서 흔히 보던 검의 형태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검이었다. 자루가 있지만 검집이 없으며 검신에는 날 또한 없었다.

이런 것에 문외한이 소녀가 보기에도 불완전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이것을 요정은 검이라고 칭했다. 날이 없다면 그저 쇠몽둥이인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소녀는 직감적으로 그게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직 소녀의 손에서만 이 검은 힘을 발할 것이다.

오직 그러기 위해서 벼려진 검이었다.

자루를 쥐었을 때 마치 손바닥에 달라붙는 듯 하던 그 감각.

휘두르면 능히 천지를 베어가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겉보기에는 날조차 없는 검인데도 이상하게 그런 느낌이 들었다.

소녀는 자신이 이상해졌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했다. 평소라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생각 따윈 하지 않을 것이다.

‘검을 쥐었다고 천지를 능히 베어? 무협지냐?’

연달아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정말로 미쳐버린 것일까?

이상한 세계. 무거운 공기. 그 속에 다른 세계에서 온 자신에게 환각을 느끼게 하는 물질이 들어 있을 가능성은 없을까?

사실 어제 요정들도 모두 환상이고 지금 자신은 이미 죽었다던가.

실없는 생각이라고 생각하며 소녀는 웃었다. 만약 그렇다고 해도 지금 주어진 시간을 충실히 살 뿐이었다. 일단 멀쩡히 생각은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실시간으로 미쳐가는 중인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덧붙이며 소녀는 실소했다.

이제 서서히 빛을 밝아 오는 대평원.

소녀는 쓱 주변을 훑어보다가 한 방향으로부터 강렬한 예감이 오는 것을 느꼈다. 이번에도 역시 그것은 강렬한 계시와 같은 감각과 함께 찾아왔다.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야.

소녀는 뻣뻣해진 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걷기 시작했다.

연달아 일어나는 일들이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을 빼앗아 가고 있었다. 이세상이 다른 세계라는 것은 지금 당장 정체성에 문제가 생길 것 같은 소녀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소녀는 어재부터 평소에 느낄 수 없던 것을 느낄 수 있게 되었고 지닐 리 없는 감정과 감상을 느끼게 되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변화였다.

사람이란 그렇게 쉽사리 변하지 않는다.

더구나 소녀처럼 태평한 인생을 산 사람은 말이다.

명백히 뭔가 잘못된 것이었다.

소녀는 그것을 절실히 느꼈다.

단지 밤새 보았던 환상과도 같은 광경 속에서 소녀는 그것을 분명히 느꼈다.

물론 지금도 그 환상과도 같은 광경 속에 서 있지만 지금 소녀는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의심하고 있으면서도 이 감각에 의존하고 있는 자신이 있었다.

소녀는 별 수 없다면 한탄했다.

지푸라기라도 잡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자신이 처해 있다는 사실을 소녀는 인정했다.

“하아.”

입에 붙어 버릴 것 같은 한숨을 쉬고 소녀는 울상을 지었다.

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

하지만 그 강렬한 예감도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주진 못했다.

 

****

 

“의외로군요. 친히 찾아오시다니.”

긴 흑발을 드리운 소녀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가무잡잡한 피부에 검게 칠한 입술. 짙은 눈 화장을 한 소녀는 싱글싱글 웃으며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나이는 이제 10대 초반으로 보이지만 그 이상의 품위와 고결함을 갖춘 소녀의 이름은 바로 오르네코.

왕국으로 통하는 첫 번째 문인 낙언의 문을 지키는 자이며 여왕의 아홉 기사들 중 한명이었다.

오르네코는 창가에 서 있는 낫을 든 소녀를 바라보았다.

오르네코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은색 트윈테일의 소녀. 어울리지 않게 거대한 낫을 지닌 소녀는 적색과 황색의 화사한 옷차림의 옷을 입고 있었다. 오르네코의 단출한 백색 가운과는 비교되는 화려하고 풍성한 드레스.

동시에 그것은 두 소녀의 성격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후후후. 호기심이 좀 생겨서 말이야. 아, 걱정하지 마. 순서를 어길 생각은 없거든. 그저 얼굴을 봐두고 싶어서.”

낫을 든 소녀의 말에 오르네코는 의심스러운 눈빛을 드러내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오르네코가 아는 한 저 눈 앞의 소녀는 그저 호기심으로 움직일 사람이 아니었다.

외양이야 자신과 비슷한 소녀 형태이긴 하지만 저 소녀와 말로 기사들의 우두머리.

변혁자와 가장 마지막에 맞서는 존재로 기사들의 맏언니 같은 존재였다. 가장 막내인 오르네코와 겉보기 연령은 비슷하지만 실제로는 천 년이 넘는 나이차가 존재했다.

“믿을 수가 없네요. 그저 얼굴만 보실 거라면 다른 수단이 있잖아요. 굳이 직접 찾아가실 필요가 있나요?”

쓸데없는 호기심이지만 오르네코는 그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오르네코는 자신의 성급함에 금방 후회했다. 이래서야 노골적으로 의심하는 것 같지 않은가? 저 낫을 든 소녀는 감히 오르네코가 의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확실히 그렇긴 하지.”

낫을 든 소녀는 오르네코의 곁으로 다가왔다. 오르네코는 무례함을 꾸짖음 받을까봐 몸을 움츠렸지만 소녀는 그저 오르네코의 옆 자리에 앉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역시 직접 보는 것과는 다르단 말이지. 게다가 아무래도 지금 안내인이 변혁자와 접촉하지 않은 것 같아서 말이야. 일단 내가 대리역을 해볼까 해서.”

“엑? 그런 짓을 해도 되나요?”

낫을 든 소녀의 말에 오르네코가 경악에 찬 외침을 내뱉었다. 그 순간 오르네코의 옆구리를 낫을 든 소녀의 양손 끝이 찔러 들어왔다.

“갸흥!”

오르네코가 기이한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움츠리자 낫을 든 소녀는 배시시 웃으며 오르네코의 의문에 답했다.

“당연히 되지. 규약에 기사가 안내인을 대행해선 안 된다는 규정은 없었거든. 게다가 저러다가 실수로라도 죽게 되면 곤란하고 말이지.”

“으, 요정들이 지켜주지 않겠어요?”

차를 흘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오르네코는 잔을 들지 않은 팔로 허리를 감싸 쥐었다. 차를 마시는데 허리를 찌르다니 정말 너무하다라고 생각하면서.

“요정들이라. 계들은 좀 신뢰가 안가서. 음. 그런데 차향이 좋네.”

낫을 든 소녀는 오르네코의 손에 들린 차의 냄새를 맡았다. 오르네코는 소녀의 머리를 피해 몸을 뒤로 뺐다. 지위가 낮은 오르네코에게 있어 이런 소녀의 변덕은 솔직히 거북스러웠다.

“숲에서 채취한 허브로 끊인 거예요. 메이비르티라는 건데 머리를 맑게 해주고 마음에 안정을 주죠. 한 잔 드시겠어요?”

“응.”

오르네코의 권유를 소녀는 거부 없이 받아들였다. 오르네코는 문 쪽에 지시를 기다리고 있는 고용인에게 지시를 내리고 다시 처음의 화제로 이야기를 돌렸다.

“그런데 안내인은 대체 왜 나타나지 않는 걸까요? 원래라면 요정들과 접촉하기 전에 안내인이 먼저 나타나서 룰을 설명해주도록 되어 있잖아요.”

“뭐, 분명 그렇기 한데.”

소녀는 낫의 손잡이를 손아귀 속에서 빙글빙글 돌리며 대답했다.

“이래저래 문제라는 것이 생기기 마련이라는 거지. 무슨 일이든 말이지. 게다가 이 거 처음도 아니고 말이지.”

“처음이 아닌가요? 일이 끝나면 사건자체가 없었던 걸로 되는 것이 룰이었죠?”

“그랬지. 그에 벗어나는 존재는 안내인과 나 정도지.”

“그렇다면 전번 때의 수습이 아직 다 안 되었다는 이야기인가요? 그런데 이해가 안 되네요.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어째서 변혁자를 소환하거죠?”

“글쎄. 시기 때문이지. 변혁자를 불어들일 수 있는 때는 검은 달이 뜨는 때뿐이니 말이야. 하지만 역시 성급했다는 생각이 들긴 하는군.”

“그냥 단번에 끝장내는 것은 어때요?”

오르네코의 제안에 낫을 든 소녀는 단박에 거절했다.

“안 돼. 그건 불공평하니까. 게다가 룰을 어기면 대가가 너무 커.”

낫을 든 소녀는 이 조약이 이루어질 때를 떠올렸다. 오르네코야 아직 어린 기사다 보니 모르겠지만 중재자의 존재는 그렇게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괜하게 15번에 걸쳐 룰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여흥을 그렇게 간단히 끝내버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 세계는 낙원.

그 말은 사건 사고라는 것이 거의 없는 세계라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최소한의 필요악을 제외하고 이 세계는 다툼이라는 것이 없었다.

한없이 낙원에 가까운 정점에서 변화를 멈춰놓은 세계.

그것이 바로 현재의 세계였다.

변혁자의 등장은 바로 이 지루한 세계에서 몇 안 되는 사건이었다.

세계가 자동적으로 리셋 되면 기억을 소실하는 오르네코에게야 의미 없긴 하겠지만 여전히 기억을 보존하는 소녀에게 있어서 드문 여흥인 것이다.

그랬기에 검은 달이 떠오른 순간 그토록 환호했던 것이었다.

낫을 든 소녀는 검은 달이 떠오르던 그 순간을 다시 떠올렸다. 그때의 흥분과 기쁨.

그 순간을 떠올리는데 문이 열리고 고용인이 소녀를 위한 차를 가져왔다.

낫을 든 소녀는 고용인이 가져다 준 차의 향을 맡으며 빙긋 미소 지었다.

“미이비르티라. 정말 향이 마음에 들어.”

소녀의 감상에 오르네코는 기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취향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났다는 사실이 순순히 기쁜 듯 했다.

“그렇다면 잎을 좀 챙겨 드릴까요? 타 드실 수 있게요.”

낫을 든 소녀는 그것도 좋겠다며 오르네코의 성의를 고맙게 받아 들였다. 아주 화사한 옷차림의 미소와 함께.

그녀의 미소는 오르네코를 즐겁게 만들었지만 낫을 든 소녀는 단지 오르네코의 성의에 기뻐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변혁자가 세상에 옴으로서 일어날 수 있는 변화들.

지금 그 중 하나를 스스로 목도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변혁자가 오지 않았다면 자신은 오르네코를 찾을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녀가 즐기는 미이비르티라는 허브차가 이런 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변혁자는 찾아왔고 소녀는 변혁자를 만나고자 오르네코의 성에 들렀으며 그리고 이 마음에 드는 허브차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런 시시한 일에서부터 변화는 시작되었다.

변혁자가 옴으로서 가능성을 먹는 짐승은 더 이상 예전처럼 세상의 흐름을 집어 삼킬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제 가능성은 변혁자를 통해 구현될 것이며 변혁자는 단지 그 존재를 알리는 것만으로도 세상만물 보든 것에 변화를 가져올 것이었다.

그렇기에 살아가기 위해서 짐승은 변혁자를 이 세상에서 지워내야 했다.

반대로 변혁자는 원래의 땅으로 돌아가기 위해 짐승을 퇴치해야 했다. 아니 본래 세상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다고 한들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저항해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동정심이 들긴 하는데.’

아무 이유도 없이 갑자기 전투를 강요받는다는 점에서 동정의 여지가 있었다. 게다가 그게 자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세상을 위해서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낫을 든 소녀는 일어났다. 오르네코는 일어서는 소녀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정말 가실 건가요?”

“아아, 뭐 결정했으니까. 안내인이 오기 전까지만 뒷바라지 좀 해주지 뭐.”

“적에게 너무 친절한 거 아니에요?”

오르네코가 그렇게 말하며 핀잔하듯이 노려보자 화사한 옷차림의 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 성격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한숨을 쉬고 오르네코는 낫을 든 소녀에게 인사했다.

“그럼. 나중에 뵙도록 해요.”

“응. 나중에 보자.”

낫을 든 소녀는 창문을 열더니 곧 사라졌다.

오르네코는 “하아.”하고 한숨을 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새벽빛이 창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변혁자와 만나게 될 것을 생각하면 긴장되기 시작했다.

아닌 척 하긴 했지만 사실 오르네코 또한 흥분하고 있었다.

적의 존재. 예정된 전투.

심장이 거세게 고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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