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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Op.10

2010.03.15 16:36

Lunate_S 조회 수:525

 그녀가 죽었던 날.
 미묘하게 퍼지는 슬픔이 환상처럼 물들었다.
 
「지잉─.
 지이잉──.」

 
 그렇게.
 그렇게 계속.
 
 하지만, 일어서야지.
 일어서서, 걸어야지.
 
 
 여전히, 차가운 한숨이 메아리친다.
 아직도 나는 눈물을 삼키고 있다. 끝이 없는 노력이기도 했고, 끝이 보이지 않는 도전이기도 하다. 항상 옆에 있었던 무언가가 사라진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런 일은 없었으니깐. 단 한번도. 그러니깐 이것이 처음.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잃어버렸다는 것이 처음. 그래서 싫었다. 더더욱, 그렇게 싫다는 마음으로 지치지도 않고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잃는다는 것은 굉장히 쉬운 일로,
 생각하고 있지 않는 것보다도 훨씬 간단한 일이었다.
 
 당연하지. 누구도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지 않으니깐. 단지 잃는다는 것을 잊는 것뿐이다. 잊으면 잊을수록, 마음은 가벼워질 테니깐. 이미 잃어버린 것과 예전부터 잊어오는 것. 그것은 결국 같은 답을 제시한다. 그 답을 인정할 수가 없을 뿐이지만.
 
 화가 나서,
 너무도 화가 나서.
 
 무엇에 화가 나있는지 모르는 자신에게 화가 나서.
 
 
 오늘도, 매서운 한파가 쏟아져 온다.
 재미난 일이지만 나는 이미 잊어버렸다. 무엇을 잊어버린지 모르는데, 막연하게 잊어버렸다는 기억만이 존재한다. 기억이 존재하는데 잊어버렸다고 말할 수 있을지─ 거기 이상으로 생각해 본 일은 없지만. 아무래도 좋은 일이니깐 잊어버렸다고 단정한다. 그건 누군가에게 아주 잔인한 일인데도. 어쩌면 스스로에게 잔혹한 일일지도 모르면서.
 
 잊어버린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로,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도 엄청나게 힘든 일이었다.
 
 무슨 소리인지. 알 게 뭐냐, 그딴 것.
 
 어처구니없었지만 화가 났다.
 언젠가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 기시감이 시야를 장악해서, 정통으로 턱주가리를 맞은 것처럼 뇌리마저 뒤흔든다. 어지럽다. 토할 것 같아서 걸음을 멈추었다. 언제부터 걸었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어지러움이 심해졌을 무렵이었나. 잊어버렸다는 것을 잊어버렸다. 무슨 일이 일어난 지 알아차릴 수도 없을 정도로. 그 순간, 고통은 사라졌다. 전혀 아무런 일도 아니었다는 듯이. 무엇을 잊어버렸는지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아서 포기했다.
 
 그저 갑자기 화가 났을 뿐──.
 
 
 일이랄 것도 없이 산책이나 하면서 니트 생활을 만끽하다가 문득 집에 돌아왔다.
 구직활동은 전혀 하지 않는다. 하지만 방황하지도 않는다. 지치지도 않는다. 그래서 너무나도 고단하다. 이런 오류덩어리. 아닌가? 그냥 모순이라고 부르는 게 빠를까? 아무래도… 좋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힘드니깐. 왜인지 모를 일 때문에 힘들어지니깐.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일을 또 다시 잊어버렸다. 그런 주제에 잊어버렸고, 그걸 또 잊어버렸고, 그걸 또 다시 잊어버렸다는 것만 기억하고 있다. 내 기억력은 올라잇. 아주 잘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기억한다는 행위 자체를 말이지─.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정상이라 불릴 자격이 충분하다. 이제는 아주 미세하게 울리는 감정조차 내게 경고하지 않는다. 슬프지 않다. 고통도 없다. 행복하지는 않다. 기쁨이 없으니깐.
 
 그런데 화는 여전히 났다.
 불쾌하고 울적한 감정이 아니라, 순수하고 격렬한 그런 심정으로.
 
 누구에게 화를 내야지 알 수가 없어서 거울을 비친 스스로에게 욕을 해보았다. 무지 재미가 없었다. 기분은 여전히 깨끗해지지 않는다. 처음부터 깨끗함의 기준을 알 수는 없었지만. 굉장히, 아주 격한 감동이 뒷덜미를 장악한 순간─ 나의 연약한 주먹엔 유리조각이 박혀있었다. 쨍그랑, 이라고 문자로 표시할 소리가 불과 몇 초 전에 귓가에 닿았다는 사실만이 기억으로 남아 굳어버린 두뇌피질에 새겨진다.
 
 빨갛고 진득한 액체가 손등을 타고 내려간다. 얼마간으로 뭉쳐있는 핏방울은 땅으로 추락한다. 색채도, 느낌도 몹시 더럽다. 심심찮은 생각이 들어서 입가로 손을 가져간다. 핥는다. 새빨간 핏물이 붉게 고동치는 혓바닥에 닿는다. 혈액의 구성요소는 잘 알지 못하므로, 찝찝한 철 맛이 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유리를 제거하지 않고 실행한 그 행위 때문에 물렁한 혓바닥마저 찢어졌다는 사실도 알아차렸다. 겪고 나서야 생각하는 일이지만, 이건 정말─ 그러니깐, 몹시 저속하게 표현하여…… 병신 같은 짓이다.
 
 간단하게 치료를 했다.
 크게 보이는 유리는 뽑고, 소독약을 부어버렸다. 알싸하고 진한 알코올 향에 소독제가 벌어진 상처에 쏟아지자 엄청나게 아려왔지만, 어쩐지 모르게 고통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간단한 소독만 하고 약만 바른 채 붕대를 대충 둘러 감는다. 혓바닥은 피만 닦아 내고 연고만 발랐다. 먹는 것에 지장이 있을 지도 모르지만 계속 핏물이 고여 철 맛이 나는 것보다는 낫다.
 
 아── 그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다고 생각된 내게 달려온 생각은, 다시금 주먹질을 할 용기를 줄 그런 성질의 것이었다.
 
 내가 왜 화가 났는가?
 아니, 왜 정말로. 무엇 때문이지?
 
 그런 이상한 질문에, 무의미한 질문에. 기억은 대답한다.
 
 잊어버린 것과, 잊어버렸다는 것을 잊어버린 것과, 잊어버렸다는 것을 잊어버렸다는 것을 잊어버린 것 때문이라고.
 아주 퍼펙트한 대답이다. 게다가 굉장히 짜증나기도 하고. 애초에 무엇을 잊어버렸는지도 모르는데 신경을 끄면 그만이잖아. 근데 기억, 네 놈은 왜 자꾸 속삭이는 건데? 한 번 더 유리와 주먹을 충돌시킬까, 1초 정도 고민했지만 금방 잊어버렸다.

 

 그렇게, 하루를 마감했다.
 
 
 여전히, 차가운 한숨이 메아리친다.
 
 오늘 그녀가 죽었다.
 말할 수 없을 만큼 처참한 죽음은 아니었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는 않았다.
 
「지잉─.
 지이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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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개월 만에 글을 써보려니 이건 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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