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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환상정원 일지(보관용)

2010.03.03 00:21

azelight 조회 수:556

첫째 날

 

특별한 이야기를 적을 생각은 없다.

단지 이 일기를 시작하는 이유는 이브노아가 내게 펜과 잉크, 공책을 주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아마 이브노아가 가져다주지 않았다면 나는 영원히 펜과 잉크, 공책이라는 것을 몰랐을지도 모른다.

이브노아는 이것들을 건네주며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들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모든 잊혀진 것, 영원히 환상이 되어버린 것들만이 존재한다고 주인님이 그러셨다.

그래, 이제는 이곳에는 모든 세상에 존재했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들만 존재하는 곳이라는 것이다. 이제는 필요하지 않은 것들만이 이 세계에 존재한다.

나로서는 이해가지 않지만 아마 주인님이 그렇다고 말하시면 그러신 것일 거다.

아. 왠지 슬픈 기분이 든다. 왠지 슬프다.

어쨌든.

아마 펜과 잉크, 공책이라는 것은 중요한 것인 거겠지.

이렇게 일부러 누군가가 가져다주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하지만 정말이지. 써야 할 특별한 이야기가 없다.

이브노아의 말대로라면 이 일기라는 것은 그날 있었던 특별한 일, 혹은 기억하고 싶은 일들을 기록하는 것이라고 했었다.

안타깝게도 내 일상은 언제나의 반복이다.

그래, 뭔가 특별한 일이 생길 수 있다면 그건 주인님이 돌아오는 것일까?

봐줄 사람 없는 정원을 손질하는 일은 왠지 허무하기도 하다.

물론 가끔 나타나는 불청객들이 내가 가꾼 이 정원에 떨어지고, 이브노아가 가끔 들러서 칭찬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누군가가 항상 함께 있으면서 이 정원이 변하는 모습을 지켜봐줬으면 좋겠다.

그래,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

언제나 돌려보내야 하는 불청객들과 문득 침입해서 쫓아내려면 먼저 사라져버리는 이브노아 따위가 아닌 나의 주인님이 돌아와 주었으면.

어디까지나 바람일 뿐이지만 그랬으면 좋을 텐데.

아아.

뭘 적을지 고민하는 사이에 적은 것들은 푸념들뿐이다.

뭔가 아름다운 것, 특별한 것을 적고 싶었는데 이래서야 어떻게 해야 할까?

손이 생각을 그대로 술술 옮기는 것은 좋은데 이건 그저 한숨을 옮겨 놓은 것에 불과하다.

찢어버릴까?

아니.

내버려두자.

이것도 분명 특별한 기록일 것이다.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무엇을 보았는지.

분명하게 기록해 두자.

지금 생각하는 것 하나하나도 분명 중요한 것일 게 틀림없다.

물론 이 환상정원에 단 하나 뿐이 공책이 아깝기도 하고.

이브노아가 말했다.

나쁜 일도, 슬픈 일도, 기쁜 일도, 부끄러운 일도, 화나는 일도, 괴로운 일도, 아픈 일도 모두 웃으면서 보게 되는 날이 올 거라고.

그 때는 분명 자신에게 감사하게 될 거라고.

그 말에 믿음이 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믿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무엇보다 소일거리가 하나 생긴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심심하고 한가할 때 좋은 유희거리가 되어주지 않을까?

그러니 생각 하나하나, 느낌 하나하나를 꼼꼼히 써두자.

언젠가 웃으면서 보게 될 날이 올 거니까.

그 때는 주인님과 함께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좀 더 적고 싶은 말이 많지만 오늘 남은 일과를 실행해야하는 시간이 와버렸다.

엉글엉글 나무의 잔가지를 잘라야 하는 시간이다.

이맘때면 항상 제멋대로 자라나 다른 나무들을 괴롭히니까.

지금 확실히 정리해두는 편이 낫다.

아악!

계속 손이 움직여.

하나하나 쓰겠다고 생각했더니 손을 멈출 수 없다.

이브노아는 대체 나에게 뭘 준거지?

자, 이제 손을 테야.

이제 여기서 펜을 놓겠어!

 

 

 

정말 힘들었어.

 

 

 

둘째 날

 

안녕, 미래의 나.

있지.

내가 사는 곳은 하늘이 없는 곳이야.

이브노아가 말이지.

언제나 하늘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내게 불평을 해.

이곳은 공허하다고.

말 그대로 말이지.

왜냐면 말이지.

하늘도, 별도, 달도, 구름, 태양도 모두 말이지 사라지지 않는 것이잖아.

그런 것이 이 환상정원에 존재할 수도 없을 거고 말이야.

그런데 이브노아는 매번 그걸로 나에게 뭐라고 한단 말이야.

지금은 어때?

환상정원에 하늘은 생겼어?

그 것은 청명하고 아름답다고 하던데.

어떨까?

어때?

별은 생겼어?

그것은 어둠 속에 점점이 박힌 빛이라고 해.

훨씬 더 좋은 표현이 있는데 환상정원에 있는 것들로는 그 이상 설명할 수 없데.

어때?

구름은 생겼어?

그것은 몽실몽실하고 형체가 없다며?

그리고 비라는 것을 쏟아지게 한다고 해.

어때?

달은 생겼어?

그것은 하늘의 눈이라며?

거대한 어둠 속에 그런게 떠 있으면 왠지 무서울 것 같아.

어때?

태양은 생겼어?

그것은 절대 마주볼 수 것인데, 자기만 굽어 내려 본다며?

미래의 나는 어떠니?

이 공책에 얼마나 많은 것들을 우겨넣어서 너에게 보여줄 수 있을까?

지금의 나는 그런 생각을 해.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처음이지만.

하지만 일기라는 것은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아.

언젠가 돌아본다는 이브노아의 말이 이렇게 머리에서 떨어지지 않을 줄 몰랐어.

있잖아.

낙엽을 쓸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

미래라는 것은 어떨까?

어떤 걸까?

장래라는 거.

어떤 걸까?

볼 수 없지만 나는 분명 그곳에 있을 텐데.

그건 어떤 걸까?

어떤 거니?

미래의 나는 아니?

어떠니?

언젠가 내가 이 일기를 다시 보게 되면 뭐라고 대답할까?

어떠니?

그곳에는 주인님이 계시니?

이브노아는 여전히 함께 있니?

나는 여전히 정원을 돌보고 있을까?

어떨까?

미래의 나?

어떠니?

환상정원에 있는 나는 버림 받은 것이 아니니?

 

 

 

 

하늘은 없어. 구름도 없어. 태양도 없어. 달도 없어. 별도 없어. 주인님도 없어. 미안, 나도 답할 수 없어. 과거의 나.

하지만 렌·렌이 있어. 세티아라는 애도 있어. 하룬도레아 어쩌구라는 긴 이름의 가진 녀석도 있어. 이브노아는 여전히 가끔 정원을 들러.

그리고 말이야. 난 이제 정원을 떠날 거야.

안녕 과거의 나.

 

 

셋째 날

 

긴 어둠이 찾아왔다.

환상정원에는 가끔 긴 어둠이 찾아온다.

나는 손을 뻗어 빛을 가져왔다.

빛은 내 손에서 더욱 커졌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있다.

커다라진 빛 속에서 조용히 차를 마신다.

이브노아가 가끔 가지고 오는 정원 밖의 것들 중에 쓸 만한 것이 제법 많다.

차도 그런 것들 중 하나다.

아침에는 청소를 했다.

긴 어둠이 왔기 때문에 나는 긴 어둠을 옅게 줄여야 했다,

긴 어둠은 나를 노려보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이미 몇 번이나 있었던 일이다.

주인님이 있었을 때부터 아주 오랫동안 나는 긴 어둠을 봤고 긴 어둠도 나를 보았다.

옅어진 긴 어둠 속을 헤치고 나는 성을 청소했다.

정원을 손질하는 것을 내일 해야 할 것 같았다.

긴 어둠이 있는 알은 왠지 우울하고 기분이 나쁘다.

일을 할 기분이 전혀 나지 않는다.

하지만 게을러지기 싫으니 집안 청소라도 해야 했다.

그리고 차를 끓이고 일기를 쓰고.

긴 어둠은 지금도 내 곁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다.

긴 어둠의 강한 시선이 나의 등을 찌른다.

긴 어둠은 이브노아보다 조용하지만 그보다 더 존재감 있다.

하지만 고요는 나의 편이다.

나는 펜을 놓지 않고 일기를 쓴다.

긴 어둠은 곧 어딘가로 가버릴 것이다.

어디로 가버리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가버릴 것이다.

긴 어둠이 내 발목에 그 차가운 얼굴을 가져왔다,

난 긴 어둠을 발로 밀어냈다.

오늘 따라 유난히 끈질기다.

내가 무시해서 그러는 걸까?

나는 긴 어둠을 더욱 옅게 만들었다.

긴 어둠은 나를 노려보았다.

계속 노려보았다.

펜을 잠시 놓고 차 막을 음미하는 동안에도 노려보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긴 어둠을 상대할 마음은 내게 없었다.

주인님은 내게 말했다.

그것에게 말을 걸지 말라고.

나는 침묵을 지켰다.

눈을 떴을 때 긴 어둠은 사라져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빛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긴 어둠은 작고 외로운 아이야. 그러니 이제부터 내가 키우기로 했어. 긴 어둠은 나와 같이 여행을 떠날 거야. 아마도 외롭지 않은 여행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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