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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습작

2010.02.22 15:58

아시냐르.Wr 조회 수:505

하얀색으로 정갈하게 칠해진 각이 잘 잡힌 사각형의 긴 복도.
굽이 잘든 여성용 구두의 또 각 거리는 소리를 중후함이 느껴지는 남성용 구두소리가
뒤따른다.


"서기 2098년,  우주 항이자, 최초의 우주 조선소 스페이스 스테이션이 완공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지구의 총 통합체인 EARTH 출범했다.
그 후 35년 후인 서기 2123년,화성의 이주정책을 위해서 만들어진 최초의 우주 개척함
 겔데하이스의 출항.
서기 2127년, 화성의 식민화 성공, 그리고 대 이주정책의 발표.......
........서기 2245년, 신 민족전쟁 (Neo Civil War) 발발.
그 후 20년 후, 중력 조정기술의 상용화......
그 후 40년 후, 2305 년 점프엔진 탄생.....
.....그 기술에 의해서 다목적 임무 수행 형 순항함 아스페리아 건조.......
74년 후인 서기 2378년, 지구와 약 290만 광년 떨어진 외 우주 행성 Z-421의 식민화 성공.........
.....그것은, 개척의 시초가 되었고,....
인간이 지구가 아닌 더 나아가, 태양계의 밖에서도 그 문명을 확장 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한 시대의 시작.
이제까지 인간의 문명을 대표하던 신의 시대 서기(Common Era)가 끝나고,
개척자의 시대, 개척 기 (P.E : Pioneer's Era)의 시작되었다."

 

돌연 여성의 목소리가 중후한 구두소리를 멈추게 한다.

 

"뭘 읽고 있는 건가? "

 

남성은 걸음을 멈추고 앞에 서 걸어가던 여성에게 묻는다. 여성이 뒤를 돌아본다.
검고 길은 흑발, 그리고 그와 반대로 새하얀 피부, 보라색 눈동자가 상당히 이국적인
모습을 풍긴다. 그녀는 검은색 정복차림을 하고 있다. 가슴엔 훈장과 약장이 그득하게
 달려있고, 양 어깨엔 무언가 은색 장식 두 개가 하늘을 향해 볼록 튀어나와있다. 그것은
군인의 복장처럼 보였다. 여성은 오른손에 쥐고 있던 책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아, 요즘 사관학교에서 쓰는 교양서적이요. 제가 다녔을 때 하곤 상당히 다르네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화장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상당히 어려 보였다. 잘 봐줘도 한
20살은 넘었을까.

 

"그렇겠지, 이젠 검열 정책 따위는 없으니까. 그렇지만, 그런걸 소리 내어 읽고 있으면 영락없는 학생의 모습이군,
셰르나비에'중령'"

 

남자는 머리에 스친 감상을 그대로 뱉었다.  군대란 계단 같은 계급사회에서 중령이란
 계급은 상당히 높은 신분이다.
게다가 그 위치에 다다르는 데는 엄청난 시간과 공이 필요하다. 그런 사실은 그녀도
충분히 알고 있는지 상당히 복잡한 표정으로 입가에 씁슬 한 웃음을 띄운다.

 

"...하하, 그런 소리하면서 '중령'소리 좀 붙이지 말아주겠어요, 테오도르 중장님."


테오도르라 불린 그는 장군이다. 그러나 그는 백발이 듬성듬성 보이는 중년의
남자였다. 물론 그 나이 직으로는 상당히 다부진 몸을 갖고 있긴 했지만, 얼굴엔 그의
계급에 어울리는 세월의 흐름 그리고 그 이상의 것이 배여 있다.

 

"정말 어색하다고요, 정말 중장님이나, 사령부나 참 곤란한 짓을 한 단말이에요."

 

무언가 그 나이 대에 어울리는 투정을 부리는 그녀를 보며 테오도르는 버릇처럼
일정표를 본다.

 

"뭐ㅡ, 비록 자네는 상당히 어린 편 이지만, 난 자네의 유능함을 높이 사고 있네."

 

빈정거리는 게 아닌 무뚝뚝함이 철철 흘러 넘치는 순수한 진심. 셰르나비에는 그게
 엄청 부담스러웠다. 수상한 분위기를 눈치 챈 그녀는 돌연 방어적 전술을 펼쳤다.

 

"그렇게 말하셔도, 전 이제 막 스물 한 살이 되었습니다만...."

 

"그래, 그리고 열 여덟 살에 유테레나 급 '전함' 레슌브레나의 '임시함장'직을 맡았었지."

 

"윽...그건 전시 중이었고, 함장님이 쓰러지신데다가, 크루들이 귀족신분에 사관학교
 졸업생이라고 억지로 밀어 붙힌 대다가, 그건 제대로 된 절차가...."

 

"그래서 이번엔 제대로 임관식을 치러주고..."

 

"...!!! 잠깐만요, 정말 이번엔 '함장'직은 사절입니다!"

 

가까스로 셰르나비에가 말을 자른다. 그러나 아랑곳없이 테오도르는 일정표만 보고
있다.

 

"...음, 그렇게 싫어할 줄은 몰랐네만."

 

"...그, 제 나이를, 그리고 군 내부의 눈을 좀... 생각해주십시오. "

 

"내 재량권 안에서 생각해 보자면, 중령인 자네에게 군함 한 척 주는 게 문제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네.
 그리고 내가 군 안에서 취하는 정책을 자네가 모르는 건 아니라 보네..."

 

유능한자에게도 무능한자에게도 평등과 기회를.

 

"그건, 엄청 훌륭하신 처사입니다만, 전 아직 그런 자리에 어울리는 인물이...."

 

"아니, 자네는 충분한 인물일세, 10여 년이 넘는 전쟁 기에서 자네만한 인재가 없었어.
그리고 전쟁은 아직도 진행되고 있지. 지금 이순간도 많은 인명이 죽어가고 있네."

 

두 사람의 걸음이 멈춘다. 그들의 옆엔 두터운 유리로 된 창이 있었다. 그 창의 건너편에
칠 흙빛 우주가 비친다.

 

"자네가 거쳐온 전투가 몇 번이었는지, 기억하는가? 난 기억하네. 아흔 일곱 번 이었지. 그리고 그
 전투에서 무수히 많은 함을 잃었네. 무수히 많은 부하를 잃었고, 내가 지휘하던 함은
두 번이나 침몰당했네. 아마 현존하는 영 관급, 아니 장성급들 중에서도 '배를 버리라'는 명령을
나보다 적게 한 이는 드물 걸세."

 

"..."

 

"자네는 열 아홉 번의 전투를 치렀지. 그 전투들에서 자네가 잃은 함은 십 여 척이 조금 넘었던 것으로
알고 있네."

 

"그건, 함대의 모두가 신념을 가졌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아니, 겸손해 하지 말게나. 그건 자네의 지휘 덕에 가능한 일이었네. 모두에게 용기를 북돋아준 자네의
존재 덕 이었네. 지금 우리에겐 중령만한 인재가 없네, 전투는 치열한데, 그런 전투에서 사람들을 이끌어줄
 명장이 없네."


그의 근심으로 깊어진 눈 속에 저 머나먼 우주의 건너편 하늘색 구체가 비친다. 모든 인류의 고향.


"이제 나 같은 늙은이들은 전선에서 오래 머물 수가 없어. 국가도 그걸 알고 있지,
나도 자네 같은 젊은이를 전쟁터로 보내는 건 반대일세 하지만 나라의 존망이 걸렸다면
 군인에겐 선택권한이 없네. 내 바램은 조금이라도 자네 같은 인재가 전쟁터를 지키며
많은 인명을 보호주길 바라는 것 뿐일세."

 

"..."

 

"당장에 전쟁터에 가라는 건 아닐세, 나도 그렇게 철혈 이진 않아. 단지 이번에 사관학교
졸업생들의 졸업수행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신 정책에 참여해줬으면 하네."

 

"...신 정책이요?"

 

셰르나비에는 나중에 이렇게 대답한 것을 크게 후회하고 만다. 틈을 보여서는 안될 상대에게
틈을 보이고 만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대답대신 자신이 이제 것 들고 있던 일정표가 적힌 단말기를 건 냈다.

 

"다음주일세, 잘 부탁하네."

 

이것이 그의 방식이다.

 

 

 

 

 

 

 

 

 


잊고 있었다, 테오도르 중장을, 그의 또 다른 유명한 이름을 말이다. 셰르나비에는
멍하니 기지 내 이동용 무인 차에 앉아서 빠르게 지나쳐가는 천정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무런 저항도 못한 체 임무를 떠안아 버린 것이다. 무뚝뚝하면서도 능청맞다,
그러면서도 자신만만하며 모든 것을 자신의 손안에 두고 관찰하고 예측한다. 그런
 그의 책략에 제대로 말린 것이다. 애초에 그의 부름을 받은 시점부터 그녀는 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중령님? 중령님? 살아계세요?]

 

주머니 속에 넣어둔 단말기에서 앳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셰르나비에는 피곤
함을 애써 감추고 몸을 추슬렀다.

 

"네, 살아있어요ㅡ, 레네이스 무슨 일이죠?"

 

[아, 괜찮으신가 보네요? 들었어요, 이번에 병아리 엄마가 되신다면서요?]

 

"그런 거 같아요 중위."

 

셰르나비에는 피곤한 모습으로 돌아가 의자시트에 몸을 푹 파묻었다.

 

[후후, 중령님도, 테오도르 중장님을 당해내실 수 없나 보네요.]

 

"상대가 될 리가요. 된다면 정말 장군 직이라도 하나 틀어쥐고 싶네요"

 

[어머나, 그거 하극상이랍니다?]

 

"... 농담이에요, 오늘 일정 좀 말해주겠어요?"

 

[아... 어디 보자, 제 7 사관학교 고위간부와 미팅이 1310시에 있습니다. 그 밖엔
주요 일정은 없습니다만...
테오도르 중장님의 추천이 있군요, 이번 임무에 관련된 학생들을 살펴보라고 하시더군요,
괜찮으시다면 지금 그 명단을 전송해 드리겠습니다.]

 

"부탁해요."

 

[어휴... 거의 4000 여명 정도군요. 제 4, 제 6 사관학교에서도 상당히 차출된 모양이에요.
그 중에서 중령님이 맡으실 학생들의 숫자가... 1000 여명이네요.]

 

"...뭐, 이들의 실습장소가 '전함'이니. 그 정도 인원이야 당연한 거겠죠."

 

그렇다, 그가 말한 새로 도입된 졸업 수행은 바로, 사관생도들로 하여금 1 개월 동안 전함을
 운용 하게하는 것이다. 물론 다수의 고위 계급 간부들도 이에 참여하여 감독을 맡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녀는 그런 감독관들 중 일부라는 것이다. 그래도 별 차이는 없겠지만
그나마 위안거리가 될 만 한 사항 중 하나였다.

 

[정말 하나 보군요, 그거. 중령님 괜찮겠어요?]

 

통신기 밖에서도 경탄과 황당함 그리고 질렸다 라는 느낌이 뒤죽박죽으로 섞인 모호함이
전해진다. 셰르나비에도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어쩌겠나, 군대에서 내려오는 고어가 있지
않은가.

 

"위에서 까라고 하면 까야죠... 한다고 말했으면, 하는 남자니까요. 중장님은."

 

 

 

 

 

 

 

 

오후 1시 30분. 점심을 못 먹은 자에게 슬슬 배고픔이란 것이 몰려오는 시각이다. 셰르나비에는
배고픔을 달래려고 회의실 탁상에 놓여져 있는 물을 들이마셨다. 빈속에 마시는 물은 빈속에
술을 들이 붙는 거하고 다름이 없는 기분을 준다. 셰르나비에는 단말기에 표시된 시간을 보았다.
예정된 시간에서 20분이 지났음에도 아무도 회의실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뭐랄까 10분
먼저 온 자신이 바보 같았다. 긴 한숨.

 

"중위 듣고 있어요?"

 

[네, 중령님.]

 

"... 이럴 땐 정말 계급장 달고서 싸우고 싶어지네요."

 

[미안하지만, 대령이리더군요.]

 

".... 방금한 말 취소."

 

그 후 20분 정도가 지났을까, 전혀 꿈쩍도 안 하던 출입문이 유압을 품으면서 열린다. 옅게
깔린 연기위로 엄청난 거만함의 오우라를 풍기는 이가 두 명의 호위 사관들을 이끌고 거침없이
걸어 들어온다. 이리 저리 꼬불꼬불한 금발에 탁하기 그지없는 녹색눈동자, 투박한 이중턱에 거만한
웃음을 늘 띄우는 삐죽한 입술.
상당히 낯익은 얼굴이다. 윌더너크 대령.
테오도르 중장의 상대 세력인 에렘나크 소장의 사람이다. 힘을 숭배하는 무력주의자에 박애정신이라곤
 눈곱만치도 찾아보기 힘든 전형적인 군인이다. 게다가 엄청난 남성주의자인데다가 권력에 대한 탐욕도
엄청나서, 셰르나비에 같은 젊은 령관급 장교를 엄청나게 혐오하는 군인들 중 하나였다.
셰르나비에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린다. 그걸 알 턱이 없는 무신경한 남자는 넉살 좋게 경례를 올린다.

 

"반갑네, '소위' 얼마만인지 모르겠구먼"

 

여군은 비서 직이나 통신병이나 맡는 소위 계급으로 치부하는 전형적인 마초주의. 옆에 있던 호위 사관이
'중령님 이시지 말입니다,' 라고 말하는데도 그는 눈 하나 꿈쩍 않는다. 셰르나비에는 '하하하, 댁이 그럼
 그렇지요.' 라는 눈빛으로 차가운 조소를 날려주며 그의 경례에 깍듯이 답했다.

 

"반갑습니다, 윌더너크 대령님. 지난 '패전'이후 3년만이군요. 그간 징계 없이 평안하셨는지요? "

일그러지는 윌더너크 대령의 얼굴을 보며 셰르나비에는 깨소금이다 란 표정을 숨기며 자리에 착석했다.

 

"...그 버릇없는 말주변은 여전하군 중령."

 

그는 기분 나쁜 눈초리를 전혀 숨기지 않고선 반대쪽 자리에 착석했다.

 

"대령님 만 할까요. 그럼 시작하도록 하죠."

 

"흥. "

 

셰르나비에는 단말기에 적힌 테오도르 중장의 차출 안을 보며 운을 때었다.

 

"이번에 우리 쪽은 저를 포함 두 명의 영 관급의 장교와 마흔 두 명의 위관급 장교를 차출하기로 했습니다.
제 4, 제 6 사관학교는 학생 명단을 이미 제출한 상태입니다. 의회에선 이번 작전 안에 예산을 책정했으며,
사령부 또한 이 제안에 다수찬성 하였습니다.  그런데 에렘나크 소장님 예하의 사단과
제 7사관학교에선 아무런 소식이 없었더군요. 소장님께선 어떻게 하실 건지에 대하여 여쭈라는 중장님의
 전언이 계셨습니다."

 

"우리측은 영 관급 장교는 나뿐이고 위관급 장교는 한 명도 차출해 줄 생각이 없네. 물론 학생들도 마찬가지
일세."

 

"... 그건 중장님의 명령에 반하는 행위임을 모르시는 건 아니시라 생각합니다. 연합 사령부에서 테오도르
중장님의 권한은 에렘나크 소장님의 권한보다 더 우선시 됩니다. 거부권은 사용하신다면 그 후폭풍은 겉잡을
수 없으리라 봅니다."

 

돌연 적정의 기운이 감도는 회의실. 두 명의 호위 사관은 이곳에 발을 들인 것을 엄청 후회하고 있는
눈치였다. 셰르나비에는 뜬금없이 저들의 처지를 동정했다. 한참 후에나 윌더너크는 무거운 숨을 뱉을 수
있었다.

 

"... 역시나 중장의 인물답군. 우리측을 협박하려고 나를 부른 건가?"

 

기분 나쁘다는 감정을 숨기지 않은 체 그녀를 노려본다. 감정을 읽기 쉬운 인물...
 셰르나비에가 그의 단점 여기는 무수히 많은 부분 중 하나였다. 군인으로선 딱히 흠잡을 곳이 없는
인물이지만, 권력에 욕심이 크고 인맥에 의존하여 에렘나크 소장에게 맹목적으로 충성을 바치고 있는
인물 중 하나.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다혈질에 너무나도 외곬 수 기질이 강하다.
확실히 나쁜 군인은 아니지만, 이런 단점이 그의 재능을 가리고 있단 것이 못내 아쉽다.
라고 테오도르 중장은 윌더너크를 그렇게 평가했다.
셰르나비에는 눈을 아래로 깐 뒤 옆으로 눈을 굴리며 노골적으로 그의 시선을 피한다.
그를 화나게 하려는 의도로 말이다.

 

"아뇨, 단지 걱정하는 겁니다. 연합사령부에 반수는 이미 중장님의 편이니까요."

그것이 그의 신경을 제대로 긁었는지 돌연 탁상 위에 올려진 물잔이 거칠게 쓰러진다.

"그분이 네 년 같은 햇병아리의 걱정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보느냐?!"


붉게 상기돼서 폭발 해버린 윌더너크의 노기를 셰르나비에는 냉정하게 흘렸다. 사실을 말하는 것 만으로도
 사람을 궁지에 몰아붙이고, 열 받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엄청나게 신기한 일이다.

 

"당연히 없겠죠. 단지, 기한까지 최소한 학생 차출을 허용하지 않으신다면, 이번 군 의회에 발의될 것임을
알아두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제대로 물먹고 싶지 않다면 말이죠."

 

군 의회 라는 말에 그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테오도르의 권력은 군을 넘어서 의회에까지 퍼질 정도로
강력한 것이어서 만약 의회에 발의돼서 통과된다면, 에렘나크측은 상당히 굴욕적으로 끌려가는 모양새를
피할 수가 없을 것 이다. 그는 욕지거리를 내뱉고는 회의실을 거칠게 박차고 나갔다. 셰르나비에는 탁상 위를
 흐르는 물을 쳐다보며 시선을 흐렸다.

 

"... 역시나 힘든 일이네요."

 

[신념이라는 것은 바뀌기 힘든 것이지]

 

단말기에서 중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별 문제는 없겠지만, 저를 이런 일에도 쓰신다면 내일이라도 귀향해서 농부의 아내가 되고 싶군요"

 

[... , 잘 해주었네.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스륵...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들린다. 아마도 서고에 있는 모양이다. 아무리 상관이라도 그렇지, 이쪽은 점심도
굶어가며 짜증나는 인간에게 빚쟁이 마냥 인원 차출 건으로 실랑이를 벌였는데, 저쪽은 서고 안에서 느긋하게
 책이나 읽고 있나...
셰르나비에는 은근히 분한지 부루퉁한 표정이 되었다.

 

"... 다음일정은 무엇인지 좀 설명해주시겠어요?"

 

스륵, 종이가 스치는 소리가 들린다.

 

[...음, 그건 내 부탁이 아니라, '그녀'의 부탁일세.]

 

그녀...?

 

"...에, 아직 휴식 중 아니었나요.?"

 

스륵.

 

[자네, 내가 건 내준 문서를 아직도 안 읽어본 모양이군. 실습에 이용될 함선의 이름부터 확인해 보게.]


셰르나비에는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단말기에 저장된 문서를 확인해본다. 그리고 그곳에서 낯이 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아크유테레나 급, 전함 레슌브레나'

 

 

셰르나비에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실감하며 탁상 위에 고개를 처박았다.

 

 

 

 

 


시원한 바람, 따사로운 햇살. 우주의 한 가운데에서 느끼기엔 무척 이질감이 느껴지는 날씨다.
프로젝터와 라디에이터, 기압유지기능 그리고 에어컨으로 만들어낸 인공적인 공간. 셰르나비에는
스테이션 안에 있는 공원덱에 나와있었다. 기술의 발전이 이루어낸 인류의 발명품 중 하나이지만
그녀에게는 딱히 맘에 드는 공간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5~6년간 빛이 드문 전함의 브리지에서
 생활한 그녀에게 따사로운 햇살은 고문이다.

 

"오랜만이야"

 

공원덱에 놓여진 몇 안 되는 파라솔이 세워진 테이블 아래에 앉아서 더위를 피하고 있던 셰르나비에에게
약간 높은 톤의 낯이 익은 소녀의 목소리가 등뒤에서 들려왔다. 셰르나비에는 테이블의 차가운 표면에
뺨을 비빈 체 고개를 까딱까딱 흔드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왠지 상대방이 피식하고 웃는 듯 한 느낌이 든다.

 

" 어쩜 함장 석에 앉아있었던 늠름한 소녀가 이렇게 한심한 모습을 하고 있는지 인간이란 참 다이나믹하구나.
약간 실망이야."

 

그렇게 말한 소녀는 키득 웃으며 자연스레 셰르나비에의 반대쪽 자리에 앉는다.
소녀는 이 공원의 날씨에 너무나도 어울리는 챙이 넓은 모자와 하늘하늘 거리는 하얀색 원피스 차림을 하고 있었다.
한 16~17살 정도는 됐을까...  푸른빛이 감도는 금빛 머리카락,
그런 금발 아래는 젖 살이 앙증맞은 어린아이의 모습이지만 저 먼 고향의 바다만큼이나 깊고 푸른 눈동자는
어딘가 이질적이면서 몽환적인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실망시켜서 미안하네요."

 

고개를 들자 만면에 함박웃음이 가득한 소녀의 얼굴이 보였다.

 

"응! 알았으면 됐어."

 

어제 해어졌다, 오늘 다시 만난 것 같은 그 자연스러운 모습에 셰르나비에도 따라 웃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 레나"

 

잠시 골몰히 생각에 빠진듯 손가락을 꼽더니, 무언가 떠올랐는지 양뺨을 손으로 감싸며 꺄 하고 까르르 웃는다.

 

"...응, 글쎄, 할머니 처럼 지낸 거 같아. 유치원에 아이들이 참 귀여워."

 

그 모습이 너무 안어울리게 어울려서(?) 같이 웃고 만다.

 

"정말 어울린다~"

 

"아~ 너무해"

 

씁슬한 웃음을 지으며 혓바닥을 쏙 내민다. 서로 깔깔 웃기도 하고, 서로가 지내온 시간을 추억하기도 했다.
셰르나비에와 레슌브레나는 한참을 주제 없는 대화를 주고 받으며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갑작스레
그 이야기가 꺼내지고 말았다.

 

"루, 나에게 새로운 함이 배정된다고 들었어. 너도 알고 있어?"

 

셰르나비에는 갑작스레 나온 화제에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레슌브레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긍정했다.

 

"...응."

 

푸른색 하늘이 투사되는 오벌을 마치 지구의 하늘인 것 마냥 바라보는 천진난만함, 그러나 왠지 모를 쓸쓸함이
 그녀를 감싸고 있다. 결국 그 쓸쓸함이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서서히 잠식한다.

 

"아, 싫다... 나도 그 늙은 배가 싫었는데, 정말 새로운 배를 받으니까 기뻐야 하는데... "

 

갑자기 모자를 양손으로 꾹 눌러 쓰고선, 고개를 푹 떨군다. 그 모습이 가여워서 셰르나비에는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는다.

 

"만나러 가볼래?"

 

조그마한 머리가 위아래로 끄덕끄덕 흔들린다.

 

 

 

 

 

 

 

스페이스 스테이션은 상당히 큰 원형으로 만들어져 있다. 그곳에는 공원덱 처럼 여가를 위해 만들어진 공간 말고도
주거 공간, 상업 공간, 등등이 있다. 그 중에서 공원덱에서 정 반대쪽엔 군인들의 묘역이 존재한다. 그곳의 잔디는
1 년 내내 푸르게 깔려있으며, 공원덱과는 달리 밤이 없는 하늘은 어두움 없이 언제나 화창하다. 지구의 공동묘지를
연상하게 하지만, 그곳의 분위기는 이상하리 만큼 밝고 정갈하다. 무수히 많은 묘비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렬하게
배치되어 있지만, 그곳을 찾는 이들은 아무런 문제없이 원하는 이를 만나러 찾아온다. 그것은 그녀들도 마찬가지였다.
셰르나비에는 손에 들고 있던 흰색 카네이션을 어느 묘비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 앞에서 몸을 낮추고 묘비와
눈을 맞춘다.

 

'Rear Admiral, James T. R. Walstonsland P.E 113 ~ 181'

 

오랜만에 보는 정겨운 이름에 향수가 짙게 묻어 나온다. 몇 년만일까, 이곳에 찾아온 게. 자신을 이 자리에 있게 만든
은사의 이름은 무수히 많은 추억을 겉잡을 수 없이 꺼내게 만들고 만다. 그렇게 상념에 잠긴 그녀의 옆에 있던
레슌브레나는 어이없다는 듯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 정말, 낭만이 없어, 너무 깨끗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잖아."

 

그렇게 말한 그녀는 묘비에 앉은 먼지를 털어낸다. 그 손길은 조심스러우며 애정이 느껴진다.

 

"나왔어, 팀. 정말 넌 묘비마저도 구닥다리구나. 어쩜 죽기 전에 묘비라도 멋진걸 고르지. 보는 맛이 없잖아."

 

자신의 전 상관에 대한 거침없는 막말에 셰르나비에는 어이가 없어서 풋하고 뿜어져 나오는 웃음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녀의 행동을 아랑곳 하지 않고 레슌브레나는 묘비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알고 있어? 내 배 말이야 이번 달에 폐함 된데. 그런데 이번에 새로운 함을 준다네. 또 부려먹을 속셈인가 봐. 아유 징그러워라."

 

쓰다듬, 쓰다듬...

 

"너 때문에 엄청 고생한 거 생각하면 이젠 더 이상 군함 따위 타고 싶지 않은데, 루가 엄청나게 뛰어나니까 허락한 거야."

 

"레나... 내 전 상관이신데, 조금 예의를 갖추는 게..."

 

그런 셰르나비에의 말은 무시한 체 손에 들고 있던 보드카를 촤악 하고 붓는 그녀.

 

"너하고 40여 년이나 보낸 그 함 정말 징글징글했어."

 

촤악...

 

" 엔진을 오버드라이브 시켜서 우주에 1 주일이나 표류시키질 않나,"

 

촤악...!

 

"웜홀까지 적을 따라가선 같이 웜홀에 갇혀서 2달 만에 구조 되질 않나,"

 

촤악...!

 

"처녀의 '선체'에 두 번이나 구멍을 뚫어놓지 않나! 정말 넌 최악의 함장이었어!"

 

탱그랑...!

 

비어버린 보드카 병을 거칠게 땅바닥에 집어 던지는 그녀는 격앙된 숨을 몰아 쉬며 눈물을 하염없이 쏟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넌 날 소중히 지켜주었잖아...?
그렇게 소중히 여겨줬잖아... 나를, 나의 함을...
그런데... 그렇게 소중히 지켜온 함을 폐함 한데! 박물관에 기증되어 남아있어 주길 바랬는데,
폐함 시켜버린대! 네가 그렇게 소중히 여겨온 함인데... 나와 그렇게 많은 시간을 보내온 함인데!"

 

묘비를 거칠게 손으로 내려친다.

 

"지켜준다고 했잖아! 언제까지고 지켜준다고 했잖아! 이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

 

손이 까질 정도로 내려치는 그녀를 셰르나비에가 말린다. 정말 어쩔수가 없는 일이었다. 너무나도 노후한 군함이어서
보수비용이나 유지비용이 너무 비싸진 것이다. 혁혁한 공을 세운 군함이었으나, 그 전함의 주인은 군안에 너무나도
적이 많은 암울한 영웅이었다. 그런 영웅의 모습을 지우고 싶어하는 이들이 그 함을 가만히 놔둘리는 없었다.
새로운 전함에 레슌브레나의 이름이 다시 사용된 것은 의외였으나, 파워 싸움에서 현장에서 자신의 생을 모두 바친
그에게 승산은 없었다. 게다가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이다.

 

"...그만해, 레나. 소장님도 어쩔 수가 없는 일이야. 오히려.. 내가 나서야 하는데.. 미안해."

 

한참이나 씩씩 거리며 숨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그녀를 대신해 셰르나비에는 조심스레 묘비를 정리했다.

 

"함장님. 저 또다시 레나와 함께 저 우주로 나가게 되었어요. 이번엔 천 여명이나 되는 병아리들하고요. 정말
걱정이에요. 함장님도 저와 함께 하셨을 땐 모두 햇병아리들이라 엄청 고생 하셨었죠? 저도 똑같은 일을
겪게 되네요. 언제나 제게 숙제를 건네 주 셨었죠, 함장님은. 이번에도 함장님이 제게 주신 숙제라 생각하고
열심히 풀어나가겠습니다. "

 

이제야 숨이 조용해진 레슌브레나의 어깨를 감싸 앉으며 묘비 앞에 나란히 선다.

 

"다녀올게요. "

 

그렇게 말하고선 레슌브레나를 쳐다보는 그녀. 레나는 한참을 부루퉁한 표정으로 있다가 못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올게, 팀. 나 없다고 땡강 부리지 말고 잘 지내고 있어."

 

셰르나비에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미소를 띄웠다.

그렇게 그 둘의 항해가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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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4 년 만에 올려보는 소설입니다만...

 

녹이 제대로 슬어서 인지 손가락도 그렇고 머리도 그렇고 다 삐걱거리네요.

 

전부터 써보고 싶던 장르인데 어찌 그 뒷이야기를 쓸수 있을지도 모르것네요.

 

흐엉엉 내 세월이여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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