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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그린슬리브스(Greensleeves) 下

2010.02.09 14:48

세리카 조회 수:728

 

 

 

 

그날, 영업 시작이 두어 시간 정도 남은 시각, 나는 바에서 필요한 쥬스와 과일등을 사기 위해 근처의 백화점의 식품관에 들렀다. 때로는 그저 장식품에 지나지 않을 뿐이지만, 칵테일에서 과일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화사함''싱그러움'의 연출. 그 분위기를 즐기기 위해서 사람들은비싼 가격을 치르면서 바를 바로 찾아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에는 보기 힘든 무엇인가를 준비해 두어야 사람들을 만족 시킬 수가 있다. 누구나 특별하게 대접 받는 것을 좋아하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동네의 슈퍼마켓으로는 안 된다. 바의 입장에서도비싼 가격을 치르고서라도철이 아닌 과일을 준비 해 둘 필요가 있다. 문명의 발달 덕분에 세계 각국, 지구의 반대편에서는 끊임없이 여름의 과일을 실어서 겨울의 백화점으로 날라다 주고 있다. 물론 비싼 가격으로 말이다. 누군가 말했던가, 소비는 자본주의 사회의 최고의 미덕이라고. 그리고 우리는 그 미덕을 정말 쉽게 누릴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경기가 좋지 않다 어쩐다 해도 언제나 연말을 즐기는 사람은 있는 것이다. 빨간 옷을 입고 있는 흰 수염의 뚱보 할아버지, 사람들의 손마다 들려있는 선물 상자, 흘러나오는 캐롤송, 가로수에 걸려서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는 장식들. 이 순간만큼은 모두가 크리스마스를 눈 앞에 두고 행복해하고 있는 듯 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공원을 가로 질러 바로 돌아가던 도중 벤치에 앉아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

 

 그녀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장기없는 얼굴에, 연두색의 스웨터, 그리고 하얀 바지에 녹색의 구두를 신고있었는데, 영하의 날씨에 재킷조차 걸치지 않은 채였다. 그리고 내가 멀찌감치서부터 다가가도 전연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왜 그 때 그녀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었는지는 모르겠다. 바의 단골 손님이었다고는 해도, 나는 그 때까지 그녀와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은 없었다. 항상 바 테이블에 별 다른 이야기 없이 앉아있었을 뿐, 그녀와 나는 서로 이름조차 모르는 사이였던 것이다. (나는 바에서 사용하는테리라는 예명의 명찰을 달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그 이름은 알고 있다) 아마도, 모두가 행복해 하고 있는 크리스마스 분위기와는 홀로 동떨어져 있는 듯한 그 모습이 나의 시선에 들어오지 않을 수가 없었던게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을 해 보지만, 지금도 확신을 할 수가 없다.

 

저기요...”

 

두어번을 나지막히 불러보았지만 여전히 반응은 없었다. 이럴 때는 뭐라고 해야하는 걸까. 그런데 그 때 내 머릿속에 영 엉뚱한 생각이 떠 올랐던 것이다. ‘미도리 소다 항상 드시는 분이시지요?’ 하고 말이다. 아마도 마스터가미도리 아가씨라는 호칭을 사용해서 였겠지만,  다시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다.

 

저기, 미도리...”

 

...?”

 

내가 다시금 그녀에게 말을 걸려고 하자 그녀는 뒤늦게 눈 앞에 있는 나의 존재를 깨닫고 나를 쳐다보았다. 아까까지의 하늘을 바라보면 멍한 눈망울이 아니다.

 

아니 그러니까... ... 바에서 항상... 그 미도리...소다 드시는 분 맞죠? 요즘 안 오신다 싶어서...”

 

횡설수설하는 나의 모습을 그녀는 깜짝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다가 이윽고 혼자서 마구 웃어대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나의 민망함은 배가 되었지만 그녀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잠시동안 웃어대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리씨죠? 바에 가시는 길인가요?”

 

기억해 주시네요?”

 

물론이죠. 바로 앞에 앉아 있었는 걸요. 그리고 말씀하신 것처럼항상찾아갔었으니까.”

 

그녀는 생긋 웃었지만, 그 웃음은 아까와는 다른 느낌의 그것이었다.

 

 

그녀는 그대로 나를 따라서 바로 함께 돌아왔다. 아직 영업시간이 되지 않은 시각이었기에 마스터는 뜻하지 않은 손님의 뜻하지 않은 모습으로의 방문에 잠시 놀란 듯 했지만, 별로 개의치 않아했다. 그리고 그녀는 언제나의 자리에 앉아서 언제나의 주문을 했다.

 

오늘은 제가 첫 손님이네요? 그거 주세요, ‘미도리 소다’.”

 

나는 글라스에 얼음을 채워 넣은 후 병이 진열되어 있는 데크에서 미도리를 꺼내어 부어 넣고, 다시 그 위에 소다수를 채워넣었다. 그리고는 하얀 빨대를 꽂아서 그녀의 앞에 내놓았다. 간단한 일인 것이다.

 

미도리 소다 나왔습니다.”

 

흐음~”

 

그녀는 신기하다는 듯이 눈으로 나와 칵테일을 번갈아 바라보고는 글라스를 자신의 앞으로 끌고가서 빨대를 물고는 미도리 소다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묘한 아름다움이었다. 글라스 안의 밝은 녹색의 액체는 하얀 빨대를 지나며 그것을 자신의 색깔로 물들이고는 그녀의 목을 타고 넘어간다. 꿀꺽, 꿀꺽. 그리고 새하얀 목덜미의 아래로부터는 다시 밝은 녹색의 스웨터가 이어진다. 하얀 색과 녹색. 마치 그녀는 처음부터 그 색깔에 어울리기 위해서 존재했던 것 처럼 내 앞에 앉아 있었다. 녹색 옷이 어울리는 여자가 언제나처럼 녹색의 칵테일을 마시고 있다. 우연일까, 아니면 그 누군가가 일부러 그렇게 맞추어 놓은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그것이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었을 것이라고 믿기로 했다.

 

지금 나오는 이 음악, 참 좋네요. 무슨 곡이죠?”

 

그녀는 어디에서부터 음악이 흘러나오는 것인지 찾겠다는 것처럼 시선을 좌우로 돌려보더니 내게 물었다.

 

그린슬리브스(Greensleeves)라는 곡입니다. 영국민요일겁니다, 아마. 푸른 옷소매, 라는 뜻인데요... 손님이 입고 계시는 것 처럼 말이에요. 손님하고 굉장히 잘 어울리십니다.”

 

나의 대답에 그녀는 자신의 팔을 눈앞에 들어 보이고는 살짝 웃었다.

 

녹색 옷을 입고, 녹색 술을 마시고 있어서요?”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흐음~?”

 

그녀는 첫 번째 잔을 비우고는 바로 두 번째를 주문했다. 주문은 똑같은 미도리 소다였다. 그리고 손님들이 계속해서 바를 드나드는 동안 그녀는 잔을 비우고 세 번째 잔을 주문해서 묵묵히, 그리고 천천히 마셨다.

 

저기요, 테리씨.”

 

?”

 

한 무리의 손님들이 자리를 떠나고, 바가 잠시 조용해지자 그녀는 다시금 나를 불렀다.

 

내 이름 알고 싶어요?”

 

그녀는 왼쪽 손으로 글라스 안에 들어있던 빨대의 한 쪽 끝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그것을 뱅글뱅글 돌리면서, 나를 바라보고는 물어보았다.

 

이럴 때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할까? 알고 싶다고 하면 공연한 오해를 사게 될 것 같지만, 그렇다고 아니라고 대답하기도 난감했다.  내가 잠시간 대답을 못 하고 당황해하자 그녀는 혀를 살짝 내밀어 보이고는 말 했다.

 

어차피 안 가르쳐 줄 거에요.”

 

“...그럼, 미도리 씨라고 멋대로 부르겠습니다.”

 

그녀는 대답없이 웃고는 새로이 칵테일을 주문 했다.

 

벌써 세 잔 드셨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아까부터 그렇게 천천히 마셔왔는데, 전혀 취할리 없는걸요. 하지만 똑같은걸 자꾸 마셔서 재미가 없으니까 조금 다른 걸로 부탁할께요. 하지만 미도리로.”

 

나는 튤립 글라스에 얼음을 채운 후, 미도리와 코코넛 럼을 붓고 파인애플 쥬스를 채워 넣었다. 그리고는 맨 위에 크림을 띄운 후 파인애플 한 조각을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컵에 장식으로 끼워 넣었다. 맛 이상의 산뜻함을 살려내는 것, 그것이 장식으로서의 과일의 역활이다.

 

그녀는 한 모금 맛 보더니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또 다시 바에 손님들이 들어오는 동안 그녀는 조용히 자신의 칵테일을 비우고는 잠시간 조용해진 틈마다 새로운 잔을 주문하고는 했다. 그리고 영업시간이 끝나는 시간까지 그녀는 모두 합쳐서 8잔의 칵테일을 마시면서 나를 기다렸다. 아마도 그랬다고 생각된다. 마스터가 먼저 퇴근을 하고, 영업후의 뒷정리를 하는 동안에도 혼자 바 테이블에 앉아 있던 그녀는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라고.

 

 

그리고 우리 둘은 호텔로 향했다. 새벽 시간이었기 때문에 차가 끊겨서 집에 돌아갈 수 없다던가 하는 이유는 아니었다. 그녀가 나에게 권한 것도, 내가 그녀를 이끈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당연한 일처럼 일어났다. 방에 들어가자 그녀는 팔을 뻗어 나의 목에 감싸안으며 가만히 입술을 포개어왔다. 그녀의 입술에서 희미한 멜론의 향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내 품에 안기어 있다가 샤워를 하겠다며 일어났다. 그녀가 샤워실로 들어간 후 나는 혼자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오늘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평소에 그녀와 자고 싶다고 생각하기는 커녕 특별하게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물론 오늘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그녀는 확실히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녀와의 잠자리도 즐거웠다. 하지만 그녀를 사랑하고 있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딱 잘라서 대답하기가 애매하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처음 만나는 여자와 그 날 잠자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넉살 좋은 녀석도 아니다. 이런 경우를 뭐라고 하면 좋을까. 아마도 마스터였다면 (물론 마스터에게그녀와 자고 왔습니다.”라고 말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알고 있을거다. 그리고 아무 말도 안 할거다.) 아무려면 어떠냐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항상 이것이 정답입니다, 라는 느낌으로 이름표를 붙여놓을 필요는 없겠지.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무렵 그녀는 샤워실에서 다시 나왔다.

 

샤워를 마치기에는 너무 빠른 시간이었다고 생각했는데, 과연 그녀는 샤워를 하지 않은 채였다. 그녀는 발가벗은 몸 그대로 다가와서는 마치 행진을 하듯이 방을 왼쪽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한 바퀴 돌고는 다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돌더니 방의 한 가운데 정도 되는 위치에 멈추어 섰다. 그리고 제자리에서 천천히 한바퀴를 돌더니 양 손을 허리에 얹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앙상하게 마른 몸매였지만, 당당하게 보여지는 그녀의 창백해 보이기까지 하는 새하얀 특히나 더 아름답게 보였다.

 

예뻐요.”

 

나는 잠시간 그녀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고마워요.”

 

그녀는 생긋 웃고는 내가 앉아 있는 쪽으로 다가오더니 나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테리씨는 나한테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네요?”

 

어디서부터 뭘 물어봐야할지 모르겠는걸요. 아니, 그보다 이름도 안 가르쳐주는 걸 보면 대답을 안 해 줄것 같기도 하고요...”

 

나는 농담처럼 그녀의 말을 받았지만 반쯤은 진심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반은, 아무려면 어떠냐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손을 내밀어 내 머리를 당기어 자신의 가슴께로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그리고는 우리는 잠시간 말없이 그대로 있었다. 얼굴에 닿아있는 그녀의 가슴에서 그녀의 심장이 뛰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천천히, 두근- 그리고 또 두근-. 그리고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 항상 바에 같이 오던 사람이 있었는데요, 기억하나요?”

 

물론 기억하고 있다. 나는 그녀에게 안겨있는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이, 얼마전에 죽었어요. 교통사고로. 내 눈 앞에서요. 처음에는 아무래도 믿기지가 않고, 실감이 나지 않아서... 그래서 눈물도 안 났어요... 근데 그게, 장례식이 끝나고 나니까 한꺼번에 밀려들더라구요, 감정이라는게. 집에 돌아가서야 혼자서 울고 쓰러지고 울고 하는 일을 반복 했어여.”

 

기분탓일까, 그녀의 몸이 떨리는 듯 했다. 나를 끌어안고 있는 그녀의 팔에 조금 힘이 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태어났을 때 부터 고아원에 버려져서, 주욱 혼자인 채 지내왔어요. 그 사람을 만난 얼마 전 까지는 말이에요. 그 사람도 나하고 비슷한 환경이었구요... 근데, 그 사람이 없어지고 나니까, 정말로, 이제 나는 외톨이다, 세상에 날 사랑해 주는 사람은, 또 다시 아무도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버리는거에요. 그래서, 또 혼자서 울다가 며칠간 고민을 한 끝에죽어야겠다라고 결심을 하고 다시 밖에 나온거에요. 어떻게 죽어야 좋을까. 그래, 이대로 공원에서 기다리다가 잠이들면 편안하게 떠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에요. 근데 그 때 테리씨가 온거에요.”

 

그녀는 한 손으로 내 뒷머리를 천천히 어루만지면서 말을 이었다.

 

근데 그게 좀 우스웠어요. , 나 이 사람 아는데, 라고 생각을 했더니 덜컥 나를 보면서 하는 말이미도리 소다 드시던 분이죠라는거에요. 뭐야, 나는 죽을만큼 괴로웠는데, 죽으려고 하는데 이 사람은 무슨 엉뚱한 소리야 하는 생각에 처음엔 화가 나더니 그게 너무 웃긴거에요. 그래서 생각했어요, 그래 어차피 죽을거라면, 마지막으로 한 잔 맛있게 마시고 죽자. 그 사람과 함께 가던 그 곳에서 말이야, 라는 생각으로.”

 

지금도 죽으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아니요.”

 

그녀는 내 머리를 감싸 안은 손을 풀고는 침대에 걸터 앉아서는 다시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나도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테리씨가, 녹색이 어울린다는 이야기를 해 주니까.... , 그린슬립스? 그 곡을 듣고 있으면서 혼자 웃긴 생각을 한거에요. 그리고 또 생각을 했죠, 아 조금 더 살아보자, 라고.”

 

무슨 생각을 했죠?”

 

“...테리씨가 듣기에는 이상할지 모르겠지만, 아이를 낳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엄마가 없었지만, 그래서 이런 옷이 어울린다던가 이런 색깔이 예쁘다던가 하는 칭찬은 들어본 기억이 없었는데요... , 그 사람 무뚝뚝한 사람이었거든요... 하지만 나도 나중에, 언젠가 아이를 낳으면, 딸을 낳으면 말이에요, 그 아이가 술을 마셔도 될 나이가 된다면 그 때에는 함께 이 술을 마시면서, ‘옛날에 엄마가 녹색 스웨터를 입고 이 술을 마시고 있을 때, 색깔이 굉장히 잘 어울린다고 칭찬을 들었어라고 하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우습죠?”

 

그녀의 눈동자는 살짝 흔들리고 있었지만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죽지 않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원래 테리씨하고 이러려고 했던건 아니었는데... 그런데 방금 샤워실에 들어갔을 때,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나니까 왠지 쑥스럽지만 스스로 아, 나 예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요즈음은 제대로 먹지도 않아서, 화장조차 하지도 않아서 분명히 엉망일텐데도, 살아있다고 생각을 하니까 그게 예쁘게 보이는 거에요. 그래서, 테리씨한테서 그 이야기가 다시 한 번 듣고 싶었어요. 제대로 말해줘서 고마워요.”

 

살짝 쑥쓰러워하면서 그녀는 말을 마치더니 다시 나에게 살짝 입맞추었다. 그리고는 나의 귀에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샤워 안 할래요?”

 

 

 

 

아침에 눈을 떳을 때 그녀는 계속 잠들어 있었다. 영화에 나오는 것 처럼 쪽지만 남겨놓고 사라진다던가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녀가 일어났을 때 그 말을 해 주자 그녀는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도 사실은 그렇게 하는게 멋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해 봤는데, , 아침잠이 많단 말이에요...”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아침, 사람들은 아침부터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거리에는 캐롤이 흐르고 있었고, 사람들은 저마다 행복해 보이는 듯한 얼굴로 지나쳐 갔다. 나는 내가 입던 점퍼를 그녀에게 입게하고는 그녀와 함께 가까운 지하철 역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지하철 역에 도착하자 그녀는 점퍼를 벗어 내게 돌려주려고 했다.

 

괜찮아요. 저는 이대로 바(Bar)로 돌아가면 됩니다.”

 

그렇지만...”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유치하지만, 그녀가돌아가는길은 따뜻하게 돌아갔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그리고 돌아간 그 곳에서 그녀는 어디론가 새로이 또 다른 출발을 하겠지. 말은 안 했지만, 서로 다시 만나지 않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녀도 나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지하철 역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나는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 그대로 몸을 돌려 바를 향해 걸어갔다. 이제와서 집에까지 다녀오기에는 너무 귀찮다. 영업시간이 될 때까지 안에서 적당히 시간을 보내면 되겠지. 살짝 추우니까 홍차에 브랜디를 살짝 타서 마시면 좀 괜찮아질까. 아니면, 나도 미도리 소다를 한 번 마셔볼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였다.

 

미도리 소다 만드시는 부-

 

고개를 돌려보니 그녀가 서 있었다. 한참을 뛰어온 듯 거칠게 내쉬는 숨은 차가운 공기 속에서 하얗게 변해서 겨울 속으로 번져갔다.

 

이거 받으세요. 지하철 역 상가에서 보니까 팔고 있더라구요. 하나 사면 하나가 공짜라고 해서 샀어요!”

 

그녀가 녹색의 목도리를 내 목에 둘러주면서 말 했다. 그녀의 목에는 빨간색의 목도리가 메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거 저거 메어보니까, 난 왠지 빨간색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은거에요. 어떻게하죠?”

 

둘 다 잘 어울려요. 마치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 그러고보니까,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테리씨.”

 

?”

 

테리씨도 녹색이 잘 어울려요.”

 

그녀는 손을 흔들고는 다시 뛰어 가기 시작했다. 정말로 안녕.

 

 

 

 

이 후 한 동안 나는 그 녹색 목도리를 메고 다녔다. 아마 지금도 찾아보면 집에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이사를 자주 다녔기 때문에 풀지 않고 넣어두는 짐 속 어딘가에 있겠지만. 딱히미도리가 생각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해의 겨울은 1월달로 접어들면서 특히나 더 추워졌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정말로 나는 녹색이 어울리는 것이었던지, 아니면 메고 있던 그 목도리때문이었던지, 주변사람들은 나를 보면 녹색이 잘 어울린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마치 내가 그녀를 칭찬했던 것이 그녀가 준 목도리와 함께 나에게 옮겨 온 것처럼.

 

 

 

그녀는 지금 행복하게 살고 있을까. 누군가를 만나서 행복 했으면 좋겠다. 어쩌면 원하던것처럼 딸을 낳았을까. 만약 그랬다고 해도 앞으로도 그녀가 원하던 것이 이루어지려면 앞으로도 10년이 넘게 기다려야 할 것이다.

 

 

혼자 옛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에 여자친구에게서 문자가 왔다. 배트맨 영화를 구해 놓았으니 당장 오라는 것이었다. 그래, 그것도 괜찮을거야.  DVD를 보고 함께 죠엘 슈마허의 욕을 실컷 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나서는 그녀를 데리고 옷을 고르러 가야겠다. 그러고보니 여자친구는 옷맵시가 좋아서 어떤 옷이던지 다 잘 어울리는 타입이었다. 오늘은, 그녀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색은 어떤 색인지, 함께 찾아봐야겠다.

 

 

-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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