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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세계정복 Scene #1

2010.01.20 13:53

미에링 조회 수:538

세계정복 Scene #1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검은 빛의 소녀였다.
그가 그녀를 본 감상이었다.

처음 본 것은 북방에서 가졌던 옛 전장의 동료들과의 모임 사이에서.
그리고 전부터 절친한 사이였던 남방의 수호자 「빌 엔시스」를 만나러 온 지금,
그는 그녀를 두 번째로 마주하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과거의 동료들은 북방에 위치한 수도 「셀 오를레스」나 그 근처에 있었지만,
빌 엔시스는 전란의 최후반부에 다른 동료들과 얼굴만 마주한 정도였던데다가 맡고 있는
지역도 최남단에 위치한 대도시 「푸스 사넬」이었기 때문에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고,
그래서 며칠 후 별도로 시간을 내어 따로 얼굴을 보러 갔던 것이다.

그런데 마침 이 소녀, 「소아」도 볼일이 있다며 마침 푸스 사넬에 와 있었고,
마침 시간이 맞았는지 빌 엔시스와 그의 만남에 함께 하게 되어 그 날 저녁 빌 엔시스의 성에서
함께 하루를 묵게 된 것이었다.

사실 얼굴을 본 것은 이번이 두번째였지만 간접적으로라면 이미 그녀를 몇차례 접해 왔고,
그랬기에 서로가 낯설기만 한 자리는 아니었다. 그래서 모처럼의 한가한 저녁 식사에서도
나름 자연스러운 분위기였던 것 같았다.

아니, 자연스러웠는지 어땠는지 확신은 못하겠지만…




적어도 지금보다는 328배쯤 자연스러웠을 것이라고, 그는 뼈가 저릴 정도로 느끼고 있었다.
-이 순간의 당황스러움을.

"…가만히 있어."

무얼 말할지 몰라 살짝 벌어지기만 한 그의 입술에 그녀의 손가락이 닿았다.
약 2분 전까지는 애매하게 얕은 꿈을 반쯤 깨는 듯 마는 듯 하며 '빌의 성은 넓다' 같은 별
의미 없는 생각을 틈틈히 끼워넣고 있던 중이었다. 그렇게 잠이 들었을 터였다.

그의 감각을 건드리지 않고 그가 있는 방에 들어왔다는 것만 해도 놀랄 일이었는데,
아예 그의 바로 옆에 와서 눕도록 그는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아무리 깊은 잠에 빠져도 극도로 단련된 그의 예민한 감각은 그의 주변 수십미터 이내의
모든 움직임을 빠짐없이 감지하고 있을 터였는데도, 그 감각을 속이고 다가온 것이다.

게다가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그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당해 버린 후였다.

…촉촉한 입술을 가져다 댄 것으로 끝이 아닌,
혀까지 집어넣어 그의 입 속을 훑어 나간 것이었다.

그녀의 입술이 닿은 순간 눈이 뜨였지만,
곧바로 그의 입을 열고 미끄러져 들어온 혀의 감촉에 그는 그 상태로 굳어 있었다.

아무리 그가 처음 겪는일이라고 해도,
그는 이제까지 어떤 상황에도 당황하지 않았고, 침착하게 대처해 왔다.
고작 이 정도의 일, 충분히 차분하게 대처할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전장의 붉은 사신도, 역대 최강의 마력의 소유자도, 「후계자」로서 가장 유력한 기사도 아닌,

그냥 첫키스에 놀라 얼어붙은 총각일 뿐이었다.



"그럼…"

까아만 옷자락을 어둠에 녹이듯 살랑이며 그녀는 사라졌다.
질문도, 설명도, 다른 말도 없다.
난데없이 들어와서 진한 키스로 잠을 깨워 놓고는, 홀연히 돌아간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전장의 붉은 사신은 당황스러운 첫키스에 밤을 설친다.




아니, 설치는 중이다.

샤아아아 하는 바람소리가 방 안에 녹아들었다.
창은 열려 있지 않았는데도 커튼이 흔들렸다. 곧이어 방안에 돌연 기척이 나타나고, 목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방 안을 은은히 채우는 검은 기운.

『너의 욕망이 나를 불렀다』

화악, 하며 공기가 흔들리고 방의 한 가운데에 검은 기운이 모여든다.
그리고 모여든 기운은 형태를 이루었다.
불길할 정도로 아름다운 붉은 눈동자, 하지만 눈동자 주변은 흰자위가 아닌 검은 빛이었다.
누구라도 빠져들 것 같은 미소를 띈 자색의 입술과 칠흑같은 머리칼,
남성 뿐만 아니라 여성까지도 빠져들 것 같은 아찔한 곡선의 나신이 완전히 나타나고,
방 안의 어둠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은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이 느낌, 너는 보통이 아니군? 후후… 어때, 네가 바라는』

입술이 움직이지 않는데도 방 안을 울리는 것 같은 목소리. 하지만 그것은 그에게만 들리는
목소리였…지만 어쨌든 그런 것에는 놀라지도 않는 듯 그는 인상을 살짝 찌푸리더니 이윽고
나신의 여성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깊은 한숨 소리로 방 안의 울림소리를 다 몰아낼 듯 한숨을 토해냈다.

"하아……"

놀라거나, 기뻐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는 반응들은 많이 보았지만 한숨은 처음이다,
나신의 여성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침대 위의 그를 바라보았다.

『너는,』

"아아, 제 실수입니다. 실수입니다."

『하아?』

여성이 좀 더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서려 하자 그는 손을 들어 여성을 멈추게 한다.

"잠깐 흔들려서 저도 모르게 「힘」을 조절하지 못했군요.
  하지만 어차피 새벽에 하나쯤 불러 낼 생각이었으니 마침 잘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마를 짚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여성의 몸에는 시선 한 번 주지 않은 채 침대에 걸터 앉아 다시 한 번 한숨을 쉰다.

"하… 예, 그럼 어디…
  계약에 필요한 요구사항, 그 대신 해주실 수 있는 일,
  그리고 행여 말장난으로 넘어가거나 묻지 않을땐 말해주지 않는 일들을 포함한
  계약외 관련된 모든 것들을 제가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도록 모두 설명하…"

…야.

여성은 어이없다는 표정 심도 3단계에 들어서며 슬슬 짜증스러운 미간 구기기와 함께 뭔가 말하려 했지만
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짜증을 멈추게 하며 말을 마무리 지었다.

"…하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울림소리 대신 결국 자색의 입술을 열고야 말았다.

"…씹새끼."

그는 그런 그녀의 반응에 이마를 짚고 숙였던 고개를 들며 무표정한 눈으로도 짜증을 넘어 화가 나기 직전이라는 것을
충분히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그의 눈빛 탓일까, 마주하지도 않은 그의 눈빛이었지만 여성은 알 수 없는 느낌에 위축되어
방금 뱉은 욕이 무색하게 한 걸음 물러나고 만다.

"거친 입 자랑하실 것 없습니다.
  당신같이 이른바 「심상치 않은, 잘 이용하면 대단히 쓸만할 것 같은 기운」을 느끼고 나타나신
  중상위급 악마를 보는 것도 한두번도 아니고, 수십번은 넘어 수백번까진 안 될 것 같습니다만.
  아무튼 오셨으니 일을 좀 부탁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여성은 눈의 붉은 빛을 빛내며 피식, 하고 웃었다.

"너, 내가 누구인지는 알고 하는 소리냐? 보아하니 어중간한 악마들을 꽤 접해 본 모양이다만,"

그 말과 함꼐 여성의 몸 주변에 피어 오르기 시작하는 검은 기운.
방 안은 순식간에 다른 장소인 것 처럼 암흑에 뒤덮였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뿐인 공간에
여성의 모습과 그의 모습만이 유일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한숨을 쉬었고, 여성은 다시 어이없는 표정이 되고야 만다.

"하아… 자주 있습니다만. 능력 좀 있으신 분들은 가끔 한번씩 이런 반응을 보여주시죠.
  예, 능력은 좀 있으신 것 같군요. 보자, 서열로 치면 127위 쯤?"

꽤나 구체적인 그의 짐작에 여성은 그제야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고 움직임을 멈춘다.
서열은 정확했다. 어떻게 맞춘 것인지 물어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이 세계의 존재의 수만큼은 있을 듯한, 아니 그 존재들의 욕망의 수만큼은 있을 듯한
수많은 악마들 사이에서 이 정도라면 꽤나 대단한 힘의 소유자였다.
그만큼 이 여성 악마가 이끌려 나타난 그의 기운은 평범한 것이 아니었지만…
좀 더 뒤쳐지는 악마는 이 힘에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고, 훨씬 강한- 서열 50위 이내쯤 들만한
악마들은 이런 형태로 자신의 모습을 먼저 드러내는 것 자체를 자존심 문제라던가 하는 이유로
꺼리는 편이었다.

여성은 다시 한 걸음을 물러섰다.

"넌, 무엇이냐."

그의 눈이 여성을 마주했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끝이 없을 정도로 검은 빛이었다.
무엇이라도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무한의 어둠이었다.

"…아"

여성은 거기에 매료라도 된 듯이 멍한 표정으로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설명하자면 길지만, 쉽게 말하자면 그런 겁니다. 당신들이 흔히 말하는…
  「어둠의 정점에 선 자」…와 관계가 있다고만 해 두지요. 이 이상 설명을 요구하지
  말아 주십시오, 엘리시아."

그제서야 여성 악마, 서열 127위의 「엘리시아 미크리엘」은 그에게서 느껴지던 힘의 정체를 눈치챘다.

"알았다. …원하는 것이 뭐지?"

어설픈 입놀림으로 속이거나 이용할만한 대상이 아니다. 엘리시아는 재미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우선, 옷부터 좀 입으시지요."

엘리시아는 왠지 모르게 살짝 자존심이 상하는 기분이었지만,
함부로 반박하지도 못한 채, 묵묵히 적당한 옷을 만들어 냈다.

"일을 끝내 주신다면 대가로 한동안 만족할 정도의 마력을 드릴 것입니다.  해 주실 일은,
  새벽 이후 셀 오를레스의 펜타 포인트에 접근하는 자를 적당히 좋으실대로 구워삶아 드셔 달라는 겁니다."

"알았다. 그게 누구든, 좋을대로 해도 된다는 말이지?"

"주변에 영향이 없는 범위 내에서는 마음대로 하십시오."

지금 이 자리에서 태도를 숙여야 하는 것은 영 유쾌한 것이 아니었지만, 일 자체는 마음에 드는 것이었다.
주변에 영향이 없는 범위라면 좀 더 가지고 놀 수 없는 점은 아쉽겠지만, 그 밖에도 얼마든지
인간을 즐겁게 구워삶을 방법은 많다. 게다가 그것이 계약에 의해 지불된 대가에 의한 것이라면
그 대가에 상응하는 한도까지는 악마의 행위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없었다.
-그보다 강한 힘의 소유자가 방해를 한다면 모를 일이지만.

"좋아… 후후. 일을 끝낸 후라는 건,"

"예, 일을 해 주신 만큼 대가는 더 커질 수도 있습니다."

주변을 둘러싼 검은 기운이 점점 옅어지기 시작했다.

『계약은 성립되었다. 나, 엘리시아 미크리엘은 그대, 카르 유네일과의 계약을 이행한다』

다른 대상이었다면 좀 더 그럴듯한 말을 남기고 사라졌겠지만,
실컷 바닥까지 다 까발려진듯한 이 자리에서 그를 상대로 폼을 잡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엘리시아는 짧은 한 마디만을 남기고 방 안의 어둠과 함께 그의 앞에서 사라졌다.



"후…"

허탈함과 자괴감이 4:6 정도의 비율로 섞인 한숨.
당황도 보통 당황을 했던 것이 아닌 모양이다.
평소엔 깔끔하게 갈무리되고 있을 그의 마력이 새어나가 악마를 끌어들이고 말다니.
마침 새벽즈음 적당한 녀석을 끌어들여 일을 시킬 생각이긴 했지만서도…
결과적으로야 그렇다고 해도, 그 자신의 흔들림으로…
-조금 더 솔직히, 걷잡을 수 없이 당황해서,
-그것보다 더 솔직히,

얼굴을 마주한 것으로는 두번째일 뿐인데다가 아무리 실제 나이는 알 수 없다지만 10대 중후반정도의
외모를 하고 있는 소녀에게 키스를 당한 것 만으로 성적인 흥분을 느껴서,


…그래, 그런 감정에 휩싸였으니 그 상태에서 새어 나간 마력에 악마가 꼬이지.
말 그대로 욕망에 가득찬 기운 아닌가.

"하아…"

그다지 금욕생활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성스럽고 순결하게 살자거나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그였지만,
이건…

"하아아…"

다시 잠을 이룰 수가 없다.
그는 깊이 고개를 숙인 채, 아직도 가라앉지 않는 얼굴의 화끈거림을 아침까지 식히게 되었다.


엘리시아라고 했던가.
그 여악마의 나신을 보고도 전혀 흥분하지 않을 수 있었던 그였다.
-소녀로 인해 달아오른 모습을 감추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한 탓도 물론 조금은 있겠지만.
정말로 조금은 있겠지만.

다른 때라도 전혀 동요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 그가,

아무리 첫키스라고는 하지만.
그것도 진한 딥키스였다고는 하지만.

한번에 잠을 이루지 못해 밤을 새리라고는.

아무도, 그 자신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그렇게 침대에 걸터 앉은 채로 아침은 밝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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