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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아라

2010.06.16 08:13

카와이 루나링 조회 수:213

 사람들은 모두들 같은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연주하고 있는 것은 모두 같았다. 너무나 낮고 탁한, 검은 빛의 무거운 선율. 보통 이렇게나 한 목소리로 모두가 함께 그려내는 선은 아름답기만 한데, 어째서 오늘은 이렇게나 듣기가 싫을까?

 사람들을 헤치고 언니에게로 다가간다. 유일하게 이곳에서 노래하고 있지 않은 한 사람. 수많은 꽃 속에 몸을 묻은 채 잠들어 있는 언니의 모습이 어색하다. 깨워보려 했지만 딱딱한 유리에 막혀 손이 닿지 않는다.

 어째서일까?

 언제나와 같이, 하늘도, 구름도, 해님도, 나무도, 꽃도, 새들도 변함없이 노래하고 있는데. 이곳에 있는 사람들만이 평소와 달랐다. 숨이 막힐 정도로, 귀가 아플 정도로 까만 선율. 그 나름대로의 아름다운 느낌은 있었지만 그래도 역시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언니의 음악이 듣고 싶었다. 해님보다도 눈이 부신, 타오르는 빨간 빛이 보고 싶었다. 언니라면 구름처럼 얽혀있는 검은 선율들을 그대로 밀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만의 색으로 채워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언니, 일어나.”

 유리를 통통 두드리며 말을 걸어보지만 언니는 눈을 뜨지 않는다. 어째서일까? 언제나 내가 부르면 금방금방 일어났었는데. 어째서 이렇게나 열심히 부르는데 아무런 말이 없을까?

 “언니, 일어나아. 왕자님 오셨어.”

 언니가 그렇게나 좋아하던 왕자님도 와 계신데, 어째서 자고만 있는 거야? 언니가 시집간다고 했었던 바로 그 왕자님도 와 계신데... 응?

 “언니이...”

 다시 유리를 통통 쳐 보았지만 언니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는다. 왕자님, 그 마법 같은 무지개빛의 선율을 연주하는 단어가 온몸에 감겨도 끝까지 눈을 뜨지 않는다.

 잠에서 깨지 않는다...

 


 “....”

 눈을 뜨지 오늘도 침대에 남아있는 것은 자신뿐이었다. 몸을 반쯤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아도 방 안에는 자신뿐이었다. 익숙해지지 않는 방의 모습. 그리고 익숙해지지 않는 꿈.

 “쳇.”

 그다지 품위 있는 일이라고 하기는 힘들지만, 역시 마음에 들지는 않는 꿈이다. 있는대로 머리를 흔들어 머리속에 떠올라 있는 장면을 지워버린다.

 몸을 일으켜 욕실로 들어간다. 이제 이 이상한 기계의 사용법은 어느 정도 알 것 같기도 했지만 아직도 씻는 것은 익숙하지 않았다. 특히나 옷이 젖지 않도록 하면서 머리를 감는 것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대체 어떻게 하면 머리만 따로 감을 수가 있는 걸까? 하녀들의 도움도 없이 어떻게?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는 물음 앞에서 결국 찾아낸 해결 방법은 하나였다.

 옷을 벗는다.

 샤워기 쪽에 불이 들어와 있는 것을 확인한 뒤에 샤워기를 벽 쪽에 걸어놓는다. 그렇게 한 뒤에 물을 틀면 양손을 이용해 머리를 감을 수 있고, 옷도 젖지 않는다. 대신 몸이 같이 젖어버리기는 하지만 샤워한다고 생각하면 되니까.

 욕실에 있는 것은 여전히 샴푸와 린스뿐이었다. 최소한 트리트먼트 정도는 준비해 놓으라고 그렇게나 말을 했는데도 여전히 저 둘 뿐이었다. 게다가 어느 상표인지 들어본 적도 없는 이상한 제품. 생각 외로 그 향이 좋은 편이었기에 그냥 써주고는 있지만... 처음에는 내가 쓰던 제품 외에는 쓸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뭐 생각보다는 봐줄만한 수준이었다.

 그나저나... 이거 며칠째 머리 관리를 못한건지 모르겠다. 피부 관리도 그렇고. 엔카너 선생은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그 것도 모를 정도로 눈치가 없는 것인지, 괜찮다고만 하고 있지만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제대로 머리를 말리지 못했던 적도 있고, 엔카너 선생이 머리를 말려줄 때 역시 뭔가 엉망이었다. 머리카락이 뽑히기라도 했었던건지 아프기까지 했고.

 확실한 것은 이런 꼴로는 왕자님께서 오신다고 해도 도저히 나가서 보일만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

 “하여튼, 바보라니까. 바보바보바보.”

 여자는 언제 어디서라도 다른 사람 앞에 당당히 나설 수 있도록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는데, 엔카너 선생은 그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면서 박사 학위는 어떻게 딴 것인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집에 가면 아버님께 학위 제도에 대해 전면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았다.

 물을 튼다.

 “꺄아아아악!”

 도저히 품위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진다. 동시에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샤워기의 물소리에 사이로 들려오고 있었다.

 “자, 잠깐. 티아라! 무슨 일이야?”

 문이 부서질 것처럼 세게 열린다.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것은 엔카너 선생.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손에 집히는 것을 아무렇게나 잡아 던진다.

 “문 닫아! 이 바보야!”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것인지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바보 엔카너 선생을 향해 또 하나 집어던진다. 또 빗나간다. 또 하나 집어 던진다. 이번 것 역시 맞지 않았지만 엔카너 선생은 그제야 문을 재빨리 닫는다.

 “이 바보! 변태! 로리콤! 지금 일부러 그런거지?”

 “아니, 이건 어디까지나 고의적이지 않은 실수야. 너야말로 이제 그 레퍼토리 좀 바꿔보면 어떨까?”

 “지금 그게 중요해?”

 “... 아니. 미안. 어쨌든 일부러 그런건 아니야. 갑자기 네가 비명을 지르니까...”

 “그러니까 일부러 그랬다는 거야! 왜 샤워기에서 차가운 물이 나오는데?”

 “...”

 문 뒤에서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역시 생각한 대로 범인은 저 바보 선생이었어!

 “... 그거 설명해 줬잖아! 빨간쪽으로 돌리면 뜨거운 물, 파란쪽으로 돌리면 차가운 물이라고!”

 하지만 그 생각도 잠시, 엔카너 선생은 기가 차다 듯이 그렇게 대꾸했다. 그 말에 샤워기 쪽을 바라보니 확실히 파란쪽으로 있는대로 돌아가 있는 레버가 보였다.

 “... 이거 네가 이쪽으로 돌려 놓은거잖아! 일부러 그런거지?”

 “아니, 내가 왜?”

 “시끄러워! 이 변태! 내 방에서 나가! 한 번만 더 멋대로 굴었다가는 당장 해고야!”

 “... 저기, 여긴 제 방인데요?”

 “... 이젠 내 방이야!”

 생각해보니 확실히, 어제도 엔카너 선생의 방에 와서 잤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그걸 그대로 인정해 주고 싶지는 않으니 대충 대꾸해 버린 뒤 레버를 빨간 쪽으로 돌렸다.

 “... 꺄아아아악!”

 “... 이번엔 또 빨간 쪽 끝까지 돌렸지? 적당히 돌려서 맞추라고! 알아서 하면 안돼?”

 


 한참동안 실갱이를 한 뒤에야 샤워를 마칠 수 있었다. 씻는 중간에 아까 던진 것이 다름아닌 샴푸와 린스라는 것을 깨닫고는 그 것을 다시 받기 위해 엔카너 선생에게 한 번 더 몸을 보인 것 말고는 그나마 무난하게 끝낸 것 같았다. 그 중간 과정이 왠지 마음에 안들기는 했지만...

 그리고 그 덕분에 엔카너 선생은 지금 음식을 다 태워먹어서 새로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무능해.”

 “아니, 그러니까 순수하게 원인 제공자는 그 쪽이라고 생각하는데?”
 
 “시끄러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엔카너 선생이 날 납치한거잖아.”

 “그렇게 나오면 내가 할 말이 없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허락 받은거라니까.”

 “흥.”

 접시를 내려놓으며 대꾸하는 엔카너 선생의 말에 고개를 돌린다. 방금 전에 샤워를 하고 왔는데도 다시 얼굴이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대체 아버님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변태같은 남자에게 날 맡긴다고 했을까? 내가 왕자님께 시집가고 싶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어라? 티아라. 몸이 안좋아?”

 “시끄러워. 신경 꺼. 명령이야.”

 “아니, 그러니까 나한테는 명령 해 봤자 소용없다니까.”

 가볍게 숨을 내쉬며 대꾸한다. 아무래도 오늘 아침부터 그렇고, 몇 번이나 몸을 보였던게 문제였나보다.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라면 없던 일 치고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엔카너 선생은...

 아, 진짜. 아버님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역시 안 되겠어. 아버님께 연락을 좀 해봐야 할 것 같은데.”

 “응? 왜, 무슨 일 있어?”

 “엔카너 선생은 알 필요 없어.”

 최대한 퉁명스럽게 대꾸한 뒤에 빵을 조금 뜯어 입 안에 집어 넣었...

 “아니, 그건 그렇게 먹으면 안에 내용물이 다 흘러내려. 그냥 이렇게 잡고 먹으면 돼.”

 엔카너 선생은 양 손으로 빵을 잡은 뒤에 그대로 입을 벌려 베어 물고 있었다.

 “야만스러워! 뭐야 그게! 입 안이 다 보이잖아!”

 “아니, 그러니까 원래 이렇게 먹는게 맞다니까?”

 “그러니까 이상하다는 거야!”

 “... 설마 샌드위치도 처음 먹어보는거야?”
 
 엔카너 선생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레 빵을 들어올려 보았다. 빵 위에 무언가 이상한 것을 잔뜩 섞어서 올려놓고 그 위에 무언가 이것저것 잔뜩 올려놓은 뒤에 다시 빵으로 덮어 놓은 이상한 음식.

 “게다가 더 이상한건 음식을 왜 이렇게 마구 섞어놓았냐는 거야. 이러면 음식 고유의 맛이 전부 날아가잖아. 이상한 맛이 날 거라고.”

 “먹어보지도 않고 이상하다는 말은 하지 말라고.”

 “게다가 어떻게 다른 사람 앞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먹으라는거야?”

 “아니, 그거 가지고 뭐라고 할 사람 없다니까?”

 “품격이 떨어져! 나중에 왕자님 앞에서 그런 꼴을 어떻게 보이라는거야?”

 “... 그 녀석이라면 그 정도는 신경 안 쓸 테지만.”

 마지막에 엔카너 선생이 뭐라고 한 것 같았지만 잘 들리지는 않았다. 그 녀석 어쩌고 한 것 같은데... 뭐, 나랑은 딱히 상관없는 이야기겠지.

 뭔가 이상한 빵은 더 이상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냥 위에 있는 빵만 조금 떼어 먹을까 했지만 그렇게 하면 안에 있는 이상한 내용물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 것을 굳이 보고 싶지는 않았기에 결국 빵을 접시 위에 내려놓고는 옆에 있던 커피잔을 들어올린다.

 “이 커피는 어떻게 내린거야?”

 “응? 일단 커피 포트를 써서...”

 엔카너 선생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상상하고 있던 것과 하나도 다른 것이 없었다. 아마도 커피콩도 이미 다 갈려있던 것을 썼을테지. 그나마 인스턴트 같은 엉터리 커피를 쓰지 않은 것은 봐줄만 하지만.

 “뭐야, 그런 엉터리는. 커피는 본래 원두를 직접 볶아서 손으로 내려야 하는거야.”
 
 커피라는 녀석은 신기하다. 커피를 볶는 사람에게서는 그 커피와 같은 초콜릿 빛깔의 진한 음악이 들려온다. 저택을 가득 채울 정도로 강하게 풍겨오는 향과 함께 눈과 귀가 즐거워지는 순간엔 몇 번이고 몇 곡이고 그에 맞추어 연주를 해 줄 수 있을 정도로.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알아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전에 왕립 오케스트라단의 지휘자라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 사람조차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었으니까. 엔카너 선생이 그 당연한 것도 몰라서 저렇게 반응하는 것은 내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아쉬움을 달래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있으면야 직접 원두도 볶을 줄 알아. 원한다면 내가 내려줄 수도 있고. 다만 없는 걸 원해봤자 무슨 소용이야?”

 엔카너 선생은 어깨를 으쓱이며 그렇게 말했다. 역시나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 같다. 그러니까, 커피를 마시는 것 뿐이라면 이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니까? 단지 나는...

 “없으면 당연히 구해와야지. 몰라서 그런걸 물어?”

 없으면 구해 와. 그래서 날 위해 그 초콜릿 빛깔의 음악을 연주해줘. 하지만 엔카너 선생은 그 말에 담긴 뜻을 역시나 이해하지 못했는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꾸했다.

 “...어째서요?”

 “... 커피를 마시는 자세가 안 되어있어. 본래 커피는 생원두를 항상 준비해 놓았다가 필요할 때마다 조금씩 꺼내어 볶아서 갈아내야 하는거야. 그 것도 몰랐던거야?”

 “그런 놀리면 홍차도 재배하다가 필요할 떄 조금씩 말려서 내야지, 나참, 드레스는 포기헀으면서 먹고 마시는 것은 포기 못 하는 건가... 어린애로군.”

 단순히 먹고 마시는게 아니거든? 하지만 아버님도, 언니도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엔카너 선생 따위가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당연히 못하겠지. 이 이상한 빵조각도, 커피도 맛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그 뿐이었다. 이것을 만들때만 볼 수 있는 특별한 선율이 내게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도저히 입에 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홍차 잎을 말리는 시간하고, 원두를 준비해서 볶는 시간하고 같을리가 있어? 생원두야 꺼내어 볶으면 되지만 잎을 하루이틀 말려서 차를 마실 수 있을 것 같아?”

 결국 그에 대해 택한 답변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답변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엔카너 선생은 오히려 나에게 언성을 높힌다.

 “오케이, 그럼 생원두는 구해오지, 대신 네가 볶아 볼테야? 얼마 걸리지도 않는 것처럼 말하는데 자신은 있겠지? 응? 티아라 아가씨?”

 이쯤되면 더 이상 상대하기 싫어진다. 이런 바보가!

 “하?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당연히 네가 볶아와야지. 그걸 왜 내가 해야해?”

 “사오는 건 나니까. 아니면 사와. 볶아주지. 뭐, 이래뵈도 선생이다. 볶는 방법을 모른다면 친절하게 하나하나 가르쳐 줄 게.”
 “흥. 엔카너 선생은 수학이랑 과학 수업 따위나 하면 되는거야. 그런 것은 가르쳐줄 필요 없어. 뭐, 어쨌든 중요한건 그거야. 난 이 커피 안 마셔.”

 그 말과 동시에 커피 잔을 엔카너 선생 쪽으로 밀어 놓는다. 그에 엔카너 선생은 거칠게 커피잔을 낚아채며 퉁명스레 대꾸했다.

 “마시지마세요. 안 말려요. 누가 먹어달라고 사정했나요? 나참, 너 커피도 끓여 본 적 없지? 하긴 혼자 잠도 못 자는 꼬꼬마가 해봤을 리가 없지.”

 “누, 누가 혼자 잠도 못 자는 꼬꼬마라는거야?”

 엔카너 선생의 말에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엔카너 선생은 물러나는 기색도 없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꾸할 뿐이었다.

 “누구긴 누구야. 혼자서는 무서워서 잠도 못자니까 매일 내 방에 쳐들어오는 거잖아. 어제랑 그제는 밤에 비도 안 왔었는데.”

 “아, 아냐! 다, 단지 혼자 자는 것이 싫은 것 뿐이야.”

 그래, 절대로 그 뿐이었다. 절대로 엔카너 선생이 있으니 잠이 잘 온다든지, 따뜻한 느낌이 들어서라든지 하는 이유가 아니었다. 혼자라서 무서운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 너, 밤에 잘 때도 옆에 다른 시종이나 그런 사람들이 있어야 하는거냐?”

 “그럴 리가 없잖아. 단지 매일 같이 자던 ‘킹 그리즐리’가 없으니까 쓸쓸해서 그러는거야!”

 “... 뭡니까? 그 꼬꼬마는 한 입에 삼켜버릴 것 같은 곰스러운 이름은?”

 엔카너 선생은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킹 그리즐리’. 그 이름이 그런 표정을 지을 정도로 이상한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렇게까지 이상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름을 듣는 것 만으로도 저 둔한 엔카너 선생이 알 수 있을 정도로 딱 맞는 이름 아닌가 싶다.

 “응? 곰 맞는데?”

 “... 진짜입니까?”

 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어보는 엔카너 선생.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응, 거의 나만큼 커. 밤에 꼭 끌어안고 자면 얼마나 푹신하고 따뜻한데.”

 “... 뭐랄까. 진짜 곰?”

 “세상에 가짜 곰도 있어?”

 그 말에 엔카너 선생의 표정이 한층 더 이상하게 변한다. 그 표정을 보며 한 마디를 더 해준다.

 “믿지마. 안말려. 누가 믿어달라고 사정했나? 엔카너 선생은 친구도 없지? 하긴, 맨날 속고만 산 건지, 사람 말도 믿을 생각을 안 하는데 친구가 있을 리가 있나. 그러니까 이렇게 레이디를 납치할 생각이나 하고 있지. 이 변태.”

 “아니, 그러니까 그건...”

 어쩐지 통쾌하게 한 대 날려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참 질질 끌던 음악이 클라이막스로 급격하게 올라갔다가 시원하게 풀려나가는 느낌. 무언가 말하려는 엔카너 선생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더 이상 듣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친다. 정말이지, 언니에게 말해줄 것이 또 하나 생긴 것 같았다.

 ... 잠깐? 언니?

 “아아악! 큰일났다!”

 


 며칠간 이 곳에 와 있으면서 잊은 것이 있다면, 친구들에 대한 것. 특히나 그 아이들은 내가 하루라도 없으면 안 되는 아이들인 만큼 더더욱 문제가 컸다. 하지만 집에 연락을 해 보려 해도 엔카너 선생은 할 수가 없다는 말 뿐. 며칠 전부터 전파 장애인지 전화가 먹통이라는 말 뿐이었다.
 
 “아...”

 방에 들어오는 내내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은 뻔한 적도 있었다. 엔카너 선생이 뒤에서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무시하고 방 안으로 들어와 침대 위에 엎드려 버린다.

 “미안... 모두들 미안... 언니도 미안...”

 어째서, 짧은 기간이었다지만 난 그들을 잊고 있었을까? 대체 무엇이 날 변하게 만들었을까? 왜 난 유일하게 날 이해해 주던 친구들을, 언니에 대한 것마저 잊고 있던 것일까? 설마, 아침에 언니의 꿈을 꾸었던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자신에 대한 것을 기억해 달라는 언니의 메시지?

 “미안...”

 하지만,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집에 연락을 할 수도 없었다. 엔카너 선생이라면? 아니, 아무리 엔카너 선생이 이것저것 잘 한다고 해도 그 것에 대해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것이었다. 작은 언니가 신경을 써 주고 있을까? 하녀장이라도 그 아이들을, 큰 언니를 보살펴 주고 있을까? 킹 그리즐리는 과연 잘 있는 걸까?

 왜 저런 당연한 것들을, 난 잊어버리고 있던 것일까?
 


 
 “티아라. 문 열어봐.”

 쿵쿵 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엔카너 선생의 목소리. 아무래도 난 그대로 울다가 엎드린 채로 잠들어 버린 것 같았다. 옷이 전부 구겨진 것 같지만, 울고 있었던 만큼 얼굴이 엉망이 되었을 테지만, 아무렇게나 잠들어 버린 탓에 머리 역시 정리가 하나도 안 되어있을 테지만 이제는 전부 상관없었다.

 문을 연다.

 “... 어라?”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날 바라보는 엔카너 선생의 모습이 보인다. 내가 이렇게 바로 문을 열어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인지 벽에 기댄 채 무언가를 마시고 있는 모습. 아무래도 조금 있다가 다시 나와야 할 것 같았다.

 문을 닫는다.

 “아니, 아니, 다시 열어봐. 뭐야, 갑자기.”

 또 다시 쿵쿵 거리며 시끄럽게 군다.

 “시끄러워. 품위없게 굴기는. 그냥 평소처럼 대충 들어오면 될 거 아니야. 이 변태.”

 “난 네 방에 그렇게 함부로 들어간 적 없거든?”

 “납치할 때는?”

 “그 때도 허락은 받았어. 너한테는 아니었지만.”

 엔카너 선생은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다가 이제야 눈치챈 것인지 날 바라보며 물어보았다.

 “... 잤어?”

 “신경 끄시지.”

 “그러면 아예 처음부터 신경 쓰이게 하지 말란 말이야.”

 투덜거리는 모습. 그에 대꾸조차 하지 않은 채 몸을 돌린다. 볼 일이 있다면 안으로 들어오겠지. 하지만 엔카너 선생은 방 안으로 들어오는 대신 내 어깨를 잡아서 세웠다.

 “잠깐만. 일단 조금 정리 좀 하자.”

 “응? 무슨...”

 무언가 말을 하기도 전에 엔카너 선생은 내 머리를 잡고 다듬기 시작했다. 빗을 꺼내어 정리하고, 머리를 모아 묶어준다. 나긋나긋 하다고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세심하게 정리해주는 손길이 부드럽다.

 “일단은 이렇게 하고 있어. 깔끔하니 좋네.”

 “...”

 “왜? 마음에 안들어?”

 엔카너 선생의 말에 고개를 젓는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거울 속에 있는 나는 분명히 ‘나’였지만 평소와는 너무나 달랐다. 꾸며내지 않은, 기교조차 없는 연주. 단색으로 이루어진 평범한 선율이었지만 그 것은 평소에 보아왔던 ‘나’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어째서일까? 화장도 하지 않았고, 장신구도 하나도 없고, 옷도 제대로 입지 못했는데. 심지어 제대로 씻지도 못했는데 어째서일까? 어째서 저렇게나 빛나고 있을까?

 “뭐, 괜찮은가보네. 그럼 일단 이 쪽으로 와봐. 보여줄게 있어.”

 거울 속에서 들려오는 음악소리에 취해 있으려니 엔카너 선생이 내 손을 잡아 이끈다. 평소라면 그 손을 있는 힘껏 뿌리쳤을 것 같지만 지금의 내게 그런 힘은 없었다. 그저 하나의 선으로 이루어진 음악에 취해버려 아무런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날 데리고, 엔카너 선생은 옆에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 그 문을 열었을 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너무나 익숙한 방의 모습이었다. 익숙한 침대, 익숙한 커튼, 익숙한 친구들...

 “아...”

 “마음에 들어?”

 천천히 다가간다. 꿈은 아니다. 모두들 반갑다는 듯, 날 반겨주는 것 같았다. 왜 이제왔냐며, 잘 지냈냐며 당장이라도 내게 안겨들 것 같았다.

 “자, 이제는 혼자 지낼 수 있겠지? 저기 ‘킹 그리즐리’인지 하는 녀석도 데려왔으니까.”

 침대 위에 있는 것은 거의 내 키만큼 커다란 곰 인형. 양 팔로 안아도 한번에 감싸지 못할 만큼 커다란 친구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엔카너 선생의 한숨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지만 그 이유는 생각지도 않은 채 시선을 돌렸다.

 천천히, 한 아이의 곁으로 다가간다. 틀어 올린 금발. 곧게 뻗은 다리. 제복을 차려입고 당당한 태도로 서 있는, 이제는 더 이상 볼 수 없는 한 사람의 모습이 그 곳에 있었다. 다행히도 그 동안 관리를 잘 해준 것일까? 이전에 보았던 언니의 모습과 하나도 다른 것이 없는 모습이었다.

 “언니...”

 “그게 언니야?”

 엔카너 선생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처음 보았을 때, 그리고 지금까지 보아왔던 어떤 아이보다도 언니와 닮아있는 한 아이.

 “우리 큰 언니야. 루크레치아 크레이시니아.”

 “...”

 “예쁘지? 언니가 살아 있었다면 지금쯤 분명히 왕자님하고 결혼했을거야. 해님처럼 빛나던 사람이니까. 엔카너 선생도 만약에 언니를 보았었다면 한 눈에 반했을걸?”

 언니는 죽었다. 이야기를 듣자하니, 훈련 도중에 한 바보같은 훈련병의 실수로 발생한 사고에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수류탄인지 뭔지를 그대로 몸으로 덮어 막아냈다고 한다. 덕분에 언니를 제외한 누구도 다친 사람이 없었지만 언니는...

 “바보 같아. 왜 언니가 죽어야해? 자신이 실수한 것도 아니잖아. 다른 사람의 실수를 덮어주기 위해 왜 언니가 죽어야 하는거야?”

 나중에 몇 년이 지난 뒤에야 그 때의 장면이 녹화된 CCTV 장면을 볼 수 있었다. 당황하는 사람들. 그리고 무언가 크게 외치며 달려가는 언니의 모습. 쓰러지듯 자리에 엎드린 언니는 화면이 흔들리는 것과 동시에 들썩 하고 몸이 한 번 움직이는 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 것을 보면서, 참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심지어 아버님조차 우셨을 정도니까.

 “작은 언니가, 큰 언니가 죽은 다음의 생일에 이 아이를 선물해 줬어. 이름은 루치아. 언니와 이름도 같고, 모습도 같지. 그 때부터 이 아이는 언니가 된거야.”

 루치아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언니도 이렇게 해 주면 좋아했었다. 그 때만 해도 나보다 훨씬 컸었지만, 내가 한껏 발돋움을 해서 머리를 쓰다듬으면 함박 웃음과 함께 날 안아서 높이 들어올려주곤 했었다.

 “이제 언니에 대해 남은건 없어. 남은건 이 루치아랑, 집에 있는 사진과 CCTV 영상. 그리고 언니에 대해 기록되어 있는 문서 몇 줄 뿐이야. 바보 같지 않아? 그런다고 해서 왕자님이 언니를 기억해 줄 리가 없잖아. 차라리 살았어야 했어. 그렇다면, 언니라면 틀림없이...”

 틀림없이 왕자님과 결혼했을거야. 그 마지막 말은 결국 꺼내지 못했다. 엔카너 선생이 그대로 날 안아버렸으니까. 그 품에 안기고 나서야 난 내 얼굴이 젖어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울지마.”

 “으... 으....”

 억지로, 억지로 울음을 삼킨다. 엔카너 선생이 가볍게 등을 토닥여 주는 것에 맞추어 자신의 마음을 가라앉힌다. 이미 새어나온 울음은 쉽게 잦아들지 않는 법이건만, 이상할 정도로 가라앉는 자신을 보며 나도 모르게 팔을 들어 엔카너 선생을 감싸 안았다.

 따뜻하다...

 “난... 왕자님하고 결혼할거야.”

 “... 언니 때문에?”

 엔카너 선생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층 진정된 자신을 느끼며 가만히 엔카너 선생을 밀어냈다. 조금 더, 이렇게 있고 있었지만 그랬다가는...

 “그러니까 더 이상은 안 돼. 이 바보야.”

 그 말은 과연 누구에게 한 말일까? 자신조차 알 수 없는 한 마디를 뒤로 한 채 난 등을 돌려버렸다. 엔카너 선생이 뒤에서 무언가 말 한 것 같지만 양 손으로 귀를 틀어막아 버렸다. 누가 뭐래도 내 결심은 변하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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