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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용의 조락-폭풍의 탑편- 1 -

2010.12.09 01:22

azelight 조회 수:619

우선 사과를 올립니다.

다신 재수정 안하겠다고 했지만 결국 하고 말았습니다.

재수정을 할 결심을 한 이유는 3갠데요.

우선 늘어짐이 너무 심했고, 인물의 개성과 인물 관계가 약한데다가, 무엇보다 재미가 없었습니다.

재미라는 관점은 상대적인 것이기에 감히 제가 판단할 수 없긴 하지만 아무래도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더라고요.

무엇보다 요즘 관점에 맞는 가벼운 글도 아니고요.

이번 건 그런 부분들을 손봤는데요. 손보다 보니 너무 손볼 것이 많아서 거의 새로 쓴게 되어...

아니 그냥 새로 썼습니다.

비참, 처연, 절망, 슬픔. 눈물 뚝.

이 다음부터 전체적으로 템포를 빨리 진행하려고 생각 중입니다. 우르하 항구편 40페이지. 폭풍의 탑 편 40페이지 정도로 잡고 있고요. 상황에 따라 좀 더 짧아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길어질 수도 있지만 길어지는 건 가능한란 피하고 싶네요.

그렇다고 해도 사실 지금가지 버릇들이 다 없어진 것은 아니라서 완벽히 변했다라고 자처할 수 없는 게 아쉽네요.

원하는 건 재미있는 걸 쓰는 건데. 제 자신의 발상의 한계와 허접한 언어능력 때문에 어찌보면 단순한 목표 하나도 이루는게 쉽지 않군요. 노력은 하지만 결실은 언제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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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우르하 항구


1.아르키아난의 의뢰


  “궁금한데 말이지. 그저 고기에 적당히 간만한 요리 따위가 왜 이렇게 완저~언 비싼 걸까?”


  은빛이 나는 블론드, 부드러운 녹안, 살짝 날이 섰지만 그럭저럭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눈매에 연분홍빛 입술과 빛이 나는 것만 같은 새하얀 피부를 지닌 아름다운 처녀는 눈썹을 살짝 일그러뜨리고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이름은 라니아.


  전생활건망증이라고 불리는 희귀하지만 마법사들에게 종종 보이는 증세를 앓고 있는 처녀로 나이와 출신지는 불명. 고귀하고 도도해 보이는 외모 덕에 고결한 혈통을 타고났을 거라고 일행들 사이에서 추측되고 있지만 하는 행동을 보면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다고 할까.


  “난 완벽히 이해가 안 가는데 말이야. 너희들 생각은 어때? 왜 비싼 걸까?”


  라니아는 그렇게 말하면 같이 식사를 하고 있는 나머지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우선 보인 것은 일행의 리더인 애던 크레이든. 나이 24세 엘루 남성. 오른쪽 몸뚱아리 전체에 화상을 입고 있으며 덤으로 온 몸에 난도질당한 흔적도 있어 어떻게 살아서 걸어 다닐 수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살아있는 기적이라고 일행들 사이에서 불리는 녀석이었다.


  왜 녀석이냐면 애던은 그녀의 역사상 유래 없는 꼴통새끼였기 때문이었다.


  나이도 이제 약관 좀 넘은 녀석이 복수하겠답시고 막무가내로 만용을 부리는 것도 모자라 목숨도 아끼지 않는데 그 과거 예기라는 건 좀체 하지 않는다.


  게다가 평소에는 입다물고 있는 울상.


  놀려먹는 재미는 있지만 이런 류의 대답을 바라기엔 그저 그런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앉아 있는 발락.


  바닥에 앉아 있지만 앉은키가 거의 애던과 동급인 그는 돌을 씹어 먹고 있었다. 겉으로 보면 그냥 갑옷을 입은 투박한 석상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노르위펜이라고 불리는 그들은 쌍둥이 세여신들 중 하나인 대지의 여신 에덴버러가 오직 자신만의 힘으로 창조한 종족들로 여타 종족들과는 달리 그들은 육으로 되어 있지 않고 대지에서 나는 광물들로 이루어진 종족이었다.


  작동원리나 구성에 관해서는 불명. 그들 자신도 제대로 모르는 것을 보면 아마 근래에 밝혀질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게다가 식사도 광물. 어떻게 소화시키는 건진 불명이지만 그들은 광물을 섭취하여 신체를 유지 혹은 강화시킨다고 한다.


  이러니 발락은 패스. 통칭 전사이자 자칭 전사인 그가 이종족의 식문화에 관심이 있을 거라고도 생각할 수 없다.


  그 다음은 루시엔이라는 이름의 엘루 소녀. 귀엽고 활달하고 성격 좋고 동글동글한 얼굴이 귀여운 일행의 막내지만 이런 비싼 요리랑은 인연이 없어 보이는 인생을 살았다는 듯 ‘저도 언니랑 같은 생각이에요.’라는 얼굴로 라니아 쪽을 보고 있으니 기대는 버리기로 했다.


  이렇게 세 명이 버림 말이고.


  반대편에 앉은 남은 두 명.


  솔드 헤이처리. 화상 덕에 인종을 알아보기 힘든 애던과는 달리 딱 남방계 테히른의 티가 나는 감색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지닌 사내. 일행 최고의 연장자이며 긴 경력을 지닌 모험가인 그는 슬슬 30대 중반으로 슬슬 은퇴를 생각할 나이지만 그런 만큼 아는 것도 많고 들은 것도 많은 유능한 모험가였다.


  마지막으로 하라드라고 불리는 소인족 출신이자 전 아르키아난의 마법사이며, 전 이단 마법사인 베이커드. 일행 내의 식신이자 마법사다운 똘끼와 삐딱한 상식으로 무장한 폭탄이며 가진 능력에 비해 형편없는 주문 수와 수준 낮은 주문을 지닌 마법사인 그는 일행내의 식신답게 먹을 것에 관해서는 방대한 수준의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루시엔은 약간의 기대를 담아 둘에게로 시선을 보냈지만 돌아온 것은 침묵 뿐.


  솔드는 생각이 없다는 표정이고 베이커드는 먹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하긴 한 끼에 금화 한 닢짜리 식사라니.


  평범한 모험가라면 꿈도 못 꿀 금액이긴 했다. 모험가란 직업이 목숨 거는 직업이라 돈은 제법 벌지만 반대로 쓰는 곳도 많았다. 장비 정비, 새 장비, 물약, 마법적 서비스, 식비, 숙박비, 정보비, 중개비. 게다가 그 중 하나도 싼 게 없으니. 괜히 사람들이 마법장비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마법장비는 그나마 정비 비용도 줄이고 새장비를 장만할 필요성을 줄여주는 고내구도의 상품이니 말이다.


  하지만 베이커드는 달랐다. 그는 꿀떡하고 씹고 있던 고길 삼키고 트림을 한 다음 입을 열었다.


  “음. 꺼억. 내 생각에는 향신료 때문인 것 같군. 아마도 여기 사용된 건 후추 같은데. 후추는 열매 한 알당 금화 한 닢에 준한다는 값비싼 향신료라네.”


  “아, 저 알아요. 정향이나 육두구랑 같은 거죠? 하~. 여기 들어간 거였구나. 그렇구나.”


  루시엔은 이제야 알았다는 듯 신기하다는 눈으로 먹고 있던 쇠고기 안심살을 내려다보았다. 가격을 알게 되니 새삼스럽게 고급스러워 보이는 그 기분. 그걸 느끼고 있는 것은 응당 루시엔만이 아니었으니.


  애던도, 솔드도, 라니아도 지금 먹는 요리가 사실 금가루를 뿌린 거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 탓인지 손길이 세심해지기 시작했다. 조심스럽다고 해야 할까 경애가 생겼다고 해야할까.


  그 심정을 여실히 표시하듯 라니아가 경직된 표정으로 웃었다.


  “하하하. 비싼 이유가 있었구나. 금가루네. 그 후추라는 거.”


  “더 비싼 향신료도 있다네. 샤프란이라고. 후추의 열배지.”


  “진짜요?”


  “금보다 비싸네. 향신료라는 건.”


  “왜 그렇게 비싼 거죠?”


  툭 내던진 베어커드의 말에 경악하는 루시엔과 라니아. 하지만 베이커드는 더 설명해줄 기분이 안 나는지 말하는 동안 잘게 썰었던 고기를 찍어 입 속으로 하나, 둘 집어넣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영 침울해 보이는 것은 이 곳이 아르키아난의 중앙탑이기 때문이었다.


  현인의 도시이며 마법의 성지, 원죄의 땅.


  본이름 보다는 여러 종류의 다른 호칭으로 종종 칭해지는 아르키아난은 이단 마법사를 용납치 않는 자들이었다. 게다가 그는 아르키아난에서 금서를 훔쳐 탈주한 마법사이며, 동시에 이단 마법사아기도 하니 지금 앉아 있는 곳은 가시방석이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루시엔의 질문에 대답하게 된 것은 솔드였다.


  “아마 무역 독점 때문이겠지. 분단의 땅에서부터 올라오는 길은 자유무역연합이 독점하고 있으니까. 수효도 대부분 귀족층이고. 그러다보니 가격도 자연스럽게 올라간 것이지 않을까?”


  얼굴에 물음표가 떠오르는 라니아.


  “그런 게 가능해? 상식적으로 무리일 것 같은데.”


  “777년 적룡 동란 때 전후 복구를 위해 이런저런 부분에 구멍이 많았지. 돈과 권력, 조직이 있다면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아. 특히 돈이 있다면 말이지. 살아남은 3국은 아직도 자유무역연합에 빚이 있는데다가 그 재력이 곧 권력이 되는 세상에서 그들을 무시할 순 없지.”


  “그렇다고 자유무역연합에 제재를 가하 거나해서 손해를 끼치면 보복이 있을 수 있다는 거네.”

  “단순히 생각하면 그렇지. 안으로 파고들면 좀 더 복잡한 내막이 있지만. 식사하면서 할 이야기는 아니군. 그보다 우린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지. 여기오고 2시간은 지난 것 같은데.”


  솔드는 투덜투덜 거리며 시계를 쳐다보았다. 솔드의 말대로 시계를 그들이 도착한 시각에서 정확히 2시간 뒤인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앉아있던 책상에 접기와 식기사 생겨나더니 후추라는 향신료와 소금으로 적당히 간을 해서 그릴에 구운 소고기 안심살이 올라온 것이 바로 20분 전이었다.


  “초대한 주제에 2시간이나 기다리게 만들다니. 우릴 우습게보고 있다는 증거라고.”

  팔짱을 끼고 의자를 비스듬히 세우며 솔드는 마음에 불평을 연발했다. 애초에 모험가라는 직업이 언제나 환영받는 직업이 아닌지라 이런저런 불상사를 겪어보긴 했지만 의뢰자격에 해당하는 인물에게 2시간이나 바람 맞추는 일을 겪어본 적은 없었다.


  방 안에는 오락시설이 충분히 갖춰져 있었지만 오히려 그 점이 더 불쾌했다.


  “애던, 자넨 여기 자주 와봤겠지. 뭐라고 항의할 수는 없나?”


  솔드의 질문에 베이커드도 기대의 시선을 보내왔다. 그로서는 이 아르키아난에 있다는 것 자체가 부담이 되는지 얼른 나가고 싶은 눈치였다.


  “이자도 좀 부탁하네. 아무래도 여기는 좀 불안하구만.”


  평소에 그렇게 먹는 것을 좋아하는 그였지만 장소가 장소다 보니 비싼 음식을 앞에 두고 맥을 못 추는 모양이었다.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다. 마법의 위험도를 생각하면 금기를 범한 자를 살려둬서는 안 되는 법. 사실 이단 마법사로 타락했던 주제에 살아있는 특이한 경우였다.


  스승을 배반하고 연구를 훔친 탈주 마법사인데다가 금지학파를 연구해 타락하기까지만 마법사를 언제까지 살려둘지 어떻게 알 것인가? 더구나 그는 지금 아르키아난의 뱃속에 와있는 것이다.


  솔드야 그저 불만스러울 뿐이었지만 베이커드는 불안해서 견딜 수 없었다. 언제 그의 스승이 나타나서 불호령을 내리고, 여태껏 유보해왔던 처형을 시도하거나 하면 어쩔지 불안스럽게 그지없었다.


  “헤에. 오지게 불안한가 보네.”


  싱글싱글 웃으며 말하자 베이커드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는 과장되게 손짓을 하며 한탄을 한 후. “그러니, 지금 내 심장이 벌렁벌렁 거리는 군. 지금 당장 저 문으로 날 처형할 자가 올 것 같아.”라고 말하며 손으로 문을 가리키는 순간.


  벌컥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문이 열렸다.


  들어온 것은 금발 벽안의 엘루 남성으로 일반적인 마법사들에 대한 편견을 부정하는 듯이 훤칠한 키를 가진 남성이었다. 동시에 유약해보이는 얼굴과 가는 체구, 급하게 왔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몰아쉬는 숨이 일반적인 마법사들에 대한 편견들 중 하나를 증명해주고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허억. 허억. 제 실험실과 바깥의 시간차에 대해서 잊고 있었던 바람에. 아아. 애던씨. 오랜만이군요. 이진즈양께도 안부 부탁드립니다. 아, 그리고 식사는 잘 하셨습니까? 일단 최선을 다해 대접하라고 해두긴 했는데. 음? 자네도 오랜만이군. 베이커드. 그런데 그 자세는 뭔가.”


  어느새 의자 뒤로 돌아가 숨어있는 그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은 마법사는  “크흠.”하고 헛기침을 한 후 몸을 추슬렀다. 반면 베이커드는 헛기침을 연거푸 하며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아, 흠. 아, 갑자기 뭔가 운동이 좀 하고 싶어졌달 지.”


  되잖은 변명을 하자 라니아가 킬킬킬 웃었다. 하지만 오르젝은 그 말을 믿는지 추궁하지 않고 “그런가.”라며 넘어가버리는 충격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과연, 마법사들에게 저건 기행도 되지 않는 다는 말이로군.”


  “그런가 봐요.”


  라니아와 루시엔이 쑥덕거렸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는 옆에서 듣고 있는 사람에게서는 실소가 나올 법한 이야기. 듣고 있던 발락이 저도 모르게 쏟아 붙일 정도의 파급력을 지니고 있었다. 아니, 루시엔은 빼놓고 생각하더라고 라니아는 결코 남에게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자네들도 만만치 않아.”


  “모함이야.”


  발락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라니아의 맹렬이 항의했다.


  “어머, 어머. 끔찍해. 어떻게 그런 매도를 할 수 있어. 와안저어언 모함이야! 나는 상식적인 인간이라고. 언제나 그렇듯 말이야. 어떻게 나처럼 귀엽고 깜찍하고 발랄하고 아름다우며 고고하고 사랑스럽고 이쁘고 지적이고 눈부시며 와안벽한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고. 이런 나는 세상의 표준이란 말야. 그렇데 어떻게 나에게 인세의 외도로 벗어나 기행자와 동급이라는 끔찍하고 저열한 모함이야. 어떻게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어. 한 번만 더 그런 소리 하면 만나는 것은 법정에서야!”

 

  라니아는 숨도 쉬지 않고 단숨에 몰아치듯 말했다. 마치 베이커드와 자신이 동급이라는 사실을 절대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어떻게 생각하면 베이커드가 불쌍해질 만큼 집요하고 강렬한 항의였다.


  그러나 발락은 한마디로 일축했다.


  “그게 다 망상이지.”


  “우기익!”


  라니아가 분노의 포효를 내뿜기 직전. “짝!”하는 박수소리가 울렸다. 그렇게 크진 않지만 이상하게 사람들의 이목을 잡아끄는 소리였다.


  “자~. 자. 자들 진정들 하시지요. 여러분들도 기다리느라 지겨우셨을 텐데. 빨리 이야기를 진행하는 편이 좋으시지 않겠습니까? 원래라면 소개부터 해야겠지만 그것도 미루지요. 제 실수 덕에 늦어지고 말았으니 면목이 없습니다.”


  시원한 목소리로 사과한 오르젝은 애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식사가 다 끝난 것 같진 않지만…. 괜찮겠지요?”


  “문제없소. 어서 말하시오.”


  애던이 대답하자 오르젝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드시면서 들으시지요. 제가 부탁하고 싶은 것은 바로 구출작전입니다. 물론 감당도 못할 정도로 어려운 일이기도 하지요.”

  씨익하고, 오르젝은 특유의 시원시원한 웃음을 띠며 설명을 시작했다.


***


  남부 코카트리스 대평원에 작은 항구마을 우르하가 존재했다.


  자유무역도시에 가깝다는 특색 덕에 소규모 상선들이 들른다는 것을 제외하곤 별다른 특색도 없는 도시였다. 항구도시라곤 하지만 구색만 갖춘 정도였다고 할까.


  그런 시골 어촌 같은 곳이었지만 다른 곳에선 볼 수 없는 독특한 건축물이 하나있었다.


  물론 저 작은 시골 어촌에서 만들어낸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 그곳에 존재했다.


  아르키아난의 마법사들의 의하면 건축시기는 아마도 2시대 말 황혼이 일어나기 전후로 추정된다고 하면 건축 양식은 고대 엘드린 식이라고.


  실제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약 120여 년 전.


  2시대가 황혼과 함께 선주 종족들을 몰락과 함께 끝나고 엘드린들이 성역에 칩거하게 됨에 자연스럽게 그 후손들인 엘루들의 틈에선 잊혀지게 되었을 거라고 추측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떠나서 탑이 출현하기 시작했던 시기가 120년 전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물론 기록의 부재로 그 부분에 대해선 어떤 확실한 결론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아르키아난은 발견보고가 있었던 때부터 쭉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다만 지어진 장소가 내세, 혹은 영계라고 불리는 경계너머였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 존재를 알면서도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을 뿐.


  경계 너머. 종교상으로는 내세 혹은 영계라고도 불리기도 하는 너머의 세계는 정상적인 방법으론 육체를 지니고 들어갈 수 없는 장소였다.


  최근 경계의 접경까지 육체를 지니고 들어갈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었고 그 덕에 폭풍의 탑에 대한 조사도 실행할 수 있게 되었가는 것이 바로 오르젝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조사단이 처음 탑을 조사하러 출발했던 것이 바로 2주 전. 조사단 12명을 이끈 자는 오르젝과 같은 선임 마법사인 그라덴이라는 마법사였다.


  “그라덴이 나갔었다고 말했소?”


  애던은 드물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화상을 입은 오른쪽 얼굴은 거의 움직이지 않아 꽤나 기묘한 얼굴이 만들어졌지만 익숙한지 일행들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애던이 적극적으로 질문하는 게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일 뿐이었다.


  “그라덴님께서 나가셨습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굳이 애던씨를 굳이 불러들일 이유가 없지요. 이번 일은 저희들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애던씨를 부른 것입니다. 특히나 가야할 곳은 경계너머에 있다는 탑이니까요.”


  경계너머란 마법의 근원이 존재하는 곳이지만 강력한 정신체들이 존재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들은 현세에 간섭하기 위해 그들 자신을 담은 그릇을 찾는데 마법사란 그런 점에서 가장 손쉽게 접촉할 수 있는 부류들이었다.


  마법사란 존재들이 마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때때로 경계 너머에 정신적인 접촉을 해야하기 때문에 그런 정신체들의 존재는 매우 위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이 아르키아난에 넘쳐나는 마법사들을 대신해 애던 일행이 가야하는 이유가 되진 않았다.

  전투마법사로서 최상위권에 드는 마법사인 그라덴에게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이유가 되진 않았다. 애초에 유적 조사에 전투능력은 별개의 이야기다.


  솔드가 이의를 제거한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아니,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쪽이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었다.


  “잠깐. 선임 마법사가 실종된 유적으로 평범한 모험가를 보낸다니. 그것도 엘드린 유적은 마법사용자가 아니면 지극히 위험한 장소일 텐데.”


  흥분해서 자리에서 벌덕 일어난 솔드를 누구도 막지 않았다. 루시엔이나 라니아는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솔드가 이유 없이 과격하게 행동할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적어도 그는 베테랑 모험가였던 것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그리고 오르젝. 우리의 계약은 그런 게 아니지 않소?”


  “물론입니다. 그런 게 아니지요. 애던씨가 저희 아르키아난과 맺은 계약은 정보 대 청부. 그러나 청부는 오직 이단자의 처형에 있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굳이 애던씨를 불러들인 이유 말입니다.”


  오르젝은 무슨 당연한 질문을 하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반면 애던은 크게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일행들도 평소에는 보기 힘든 표정을 두 번이나 보여주는 애던이 신경 쓰이는지 모두의 시선도 그에게 주목됐다.


  다만 오르젝은 애던의 그런 표정을 보며 이제야 겨우 이해했냐는 표정이 될 뿐이었다.


  “자자. 이제 깨달으셨군요. 과거나 지금이나 제가 애던씨께 부탁드릴 일은 단 하나뿐입니다. 자, 부탁드리겠습니다. 조사단을 전원 죽여주십시오. 이번에는 베이커드씨와 같은 경우가 있어서는 안 될 겁니다.”


  오르젝은 그렇게 말하고 부드러운 시선을 베이커드에게 보냈다. 베이커드는 사색이 되었지만 오르젝은 그저 말이 나온 김에 쳐다본 것뿐이라는 듯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타락했다고 생각하오?”


  애던의 물음에 오르젝은 긍정했다. 다른 가능성은 없다는 듯 단호한 표정이었지만 애던은 한 번 더 물었다.


  “그 오르젝이 타락했을 거라고 믿소?”


  “확언 할 순 없지요. 하지만 가능성을 저울질하자면 타락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겠습니다. 이미 2주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말이죠. 유적이 있는 장소가 장막 너머라는 점을 고려하면 확실한 것 같습니다.”


  2주라는 시간은 확실히 긴 시간이었다.


  아무리 뛰어난 정신력과 의지를 지녔다 할지라도 2주 동안이나 육체 없는 괴물들과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인 것이다. 비록 아르키아난에서 손에 꼽을 만한 전투마법사라고 하지만 그라덴 또한 한 명의 엘루에 불과했다.


  그라덴. 애던에게 있어 그렇게 가벼운 이름은 아니었다. 그에게서 배운 것들. 그가 가르쳐 준 것들.


  “거절하지. 아르키아난과 나 사이의 계약은 정보와 청부. 하지만 최근 정보 쪽이 부실했다고 생각지 않소?”


  하지만 인연은 또 별개. 애던은 설령 그렇다고 할지라도 아르키아난에 그 정도의 힘이 없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꼭 그라덴이 아니어도 지금 코 앞에 있는 남자 또한 방심할 수 없을 정도의 힘을 가진 남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무엇보다 애던에게는 목적이 있었다.


  은사조차 뒷전으로 미룰 정도로 추구해야할 목표. 청부를 대가로 아르키아난으로부터 얻던 정보란 바로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정보들이었다.


  “하아. 그건 이쪽으로서도 별수 없는 일이랍니다. 저희가 성의를 다하지 않았을 거라곤 생각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확신하건데 저희만한 정보 조직은 세상에 없다는 것 정도는 아시지 않습니까.”


  오르젝의 말을 애던도 부정하진 않았다.


  아르키아난은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대부분의 마법적 현상에 대응할 수 있는 조직인 동시에 가장 뛰어난 정보조직이기도 했다.
  예지와 탐지, 원견의 마법으로 아르키아난은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정보들을 모아 쥐고 있었다. 시시콜콜한 잡스러운 소문에서부터 왕가의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을 법한 번잡하고 어두운 비밀까지. 


  애던은 한번 일행들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발락은 어차피 그를 따라올 것이다. 베이커드도 마찬가지. 그의 목숨은 애던과 함께 있기 때문에 보장받고 있는 것과 같았다. 라니아는 아무래도 좋다는 표정이었고, 루시엔도 마찬가지. 솔드는 좀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끼어들 의사는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이 일행 자체는 하나의 목적을 위한 조직이었다. 동기는 다르지만 목적은 단 하나.


  ‘용의 조락’이라고 불리는 비밀결사를 괴멸시키는 것. 그렇다면 정보를 쥐고 있는 아르키아난에 협조하는 것은 필수라고 할 수 있었다.


  “좋소. 받아들이겠소.”


  “옳은 선택을 하신 겁니다. 아르키아난은 결코 은혜를 잊지 않으니까요.”


  눈을 가늘게 뜨며 오르젝은 시원스럽고 청량한 미소를 지었다.

 

2. 불길한 전조


  오르젝의 안내를 받아 일행은 ‘문의 방’이라고 불리는 층에 도착했다.


  이 층은 아르키아난이 영향력을 끼치는 모든 장소로 통하는 곳이라고 한다. 무수한 차원문들로 이루어진 장소. 아르키아난의 정보가 즉각적으로 유효화 되는 이유이기도 한 장소이기도 했다.


  이런 중요한 장소를 마법사도 아닌 외부인에게 보인 적이 몇 번이나 될까?


  일행은 자신들이 특별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실제로 이 장소에 대해서 베이커드는 들어본 적만 있을 뿐 직접 본 적은 없는 것이다. 그와 같은 말단에게는 공개조차 되지 못하는 장소임이 틀림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행은 자신들이 특별대우를 받는 원인인 애던을 새삼스럽게 쳐다보게 되었다. 뭔가 있을 거라곤 생각했지만 아르키아난에서 요인으로 대접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문의 방’은 방이라고 붙여진 이름과 달리 거대한 원형 홀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높이는 거진 10미터는 되어 보일까? 기둥 하나 없는 완벽한 원형 돔의 천장엔 커다란 구멍이 존재했고 그로부터 자색의 영기가 뿜어져 내려와 바닥의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뭐라고 형용하기 힘든 광경이라고 할까.


  홀의 벽면에 빼곡히 들어차있는 문들이 들어차있으며, 전체적으로 어둡지만 사물을 보는데 지장이 없다는 황당한 상황에, 마법과 전혀 관계없는 일반인조차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진한 마력 농도가 일행이 느끼는 위화감에 일조하고 있었다.


  “여깁니다.”


  오르젝은 일행을 이끌고 사슬과 부적을 붙여 엄중히 봉인한 문을 가리켰다. 일행의 주문 사용자 전원이 감탄할 정도로 편집적인 조치가 취해져 있었다.


  “엄청난 봉인이네.”


  라니아가 쩍하고 입을 벌렸다. 루시엔도 두 눈을 크게 뜨고 차원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불길하군.”


  노르위펜인 발락은 마법사용자가 아니지만 뭔가를 느끼는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저렇게 단단하게 봉인해둔 것을 보면 누구나 좋은 인상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실제로 솔드도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2차 조사단이 공격받은 후 봉인했습니다. 꽤나 끔찍한 일이었죠. 전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릅니다만 증언을 들어보면 비참하더군요.”


  전혀 비참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표정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오르젝은 그렇게 말했다. 솔드는 그 점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 처음부터 오르젝이 밉보였기 때문인지 그는 대놓고 오르젝에게 비난의 말을 던졌다.


  “살아있었을지도 모를 이들은 죽게 내버려 뒀다는 건가?”


  “네. 물론입니다.”


  오르젝은 평소와 같은 시원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오염은 마법사에게 있어 가장 경계해야할 부분입니다. 타락의 첫 걸음이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베이커드.”


  “음. 으흠. 그렇습니다, 선임 마법사님.”


  헛기침을 한 후 오르젝의 눈을 피하며 베이커드는 그렇게 대답했다. 오르젝은 그 대답이 마음에 든 든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저희로서도 가슴 아픈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랍니다. 저희가 스스로 나서지 않고 굳이 여러분께 부탁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 인 거죠.”


  오르젝은 해명이라도 하듯 말을 마쳤지만 솔드는 어딜 봐서 그게 슬퍼하는 얼굴이냐고 따져보고 싶었다. 실제로 거의 행동에 옮길 뻔했다. 애던이 옆에서 말리지 않았다면 기어코 한 소리 했을 것이다.


  용병질에 모험가일을 하며 이런저런 더러운 일도 해본 그였지만 동료애라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오르젝의 지금 같은 태도는 도저히 넘길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상황가리지 못할 정도로 분별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기에 솔드는 일단 애던의 체면과 목적을 봐서 참았다. 아르키아난의 조력이란 것은 그렇게 쉽게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르젝은 솔드의 그런 반감을 눈치 못 챈 건지, 일부러 무시하는 건지 여전히 바람 같은 상큼한 미소를 유지하며 일행에게 물러나라는 손짓을 했다.


  “봉인을 풀겠습니다. 혹시나 모르니 전투 준비를 해주십시오.”


  일행이 지시대로 물러서자 오르젝은 손으로 스태프를 불러들였다.


  동시에 일행들 또한 전투 자세에 들어갔다. 내키지 않는 다는 표정의 베이커드도 순순히 허리의 작은 가방에서 밧줄을 풀어냈다. 그의 특화숙련 주문은 밧줄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것이었기에 밧줄들은 마치 살아있는 것인 양 구불텅 거리며 흘러내려와 갈고리가 달린 머리를 세웠다.


  애던은 등 뒤에 메고 있던 양손검을 쥐고 선두에 섰고 발락은 아무런 무기도 쥐지 않고 양주먹을 텅텅하고 부딪치며 애던의 옆에 나란히 섰다.


  솔드는 봉을 움켜쥐고 두 전사의 뒤에, 그러면서 마법사용자 세 사람 앞에 섰다.


  특이하게도 라니아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마치 지금 이 상태로도 충분하다는 듯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필요한 도구조차도 꺼내지 않았다. 오르젝이 뒤로 돌아봤다면 뭐라고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일행들 중에선 그녀의 그런 태도를 지적하는 이는 없었다.


  그렇게 각자 스타일에 맞게 전투태세를 취하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루시엔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녀는 한 번 한숨을 쉰 후 “저는 도움이 못될 것 같아요.”라고 말하며 양 팔을 축 늘어뜨렸다.


  “여기서는 소환이 불가능하네요. 훌쩍. 저는 잉여인력이에요. 흑흑.”


  “소환이 안된다니. 이유는 알겠니?”


  “모르겠어요.”


  “그러면 일단 이 언니 뒤에 쏙 숨어 있으렴. ”


  라니아가 토닥토닥 루시엔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그때 옆에서 듣고 있던 베이커드가 잊고있었다는 듯 설명해줬다.


  “아르키아난은 외부의 침입에 민감하니 말일세. 정규 통로 외에는 공간도약이라던가 소환같은 기술은 막혀 있다네.”


  “참. 그런 중요한 건 미리 말해줘야지.”


  “나도 여기서 싸우게 될 줄 알았나. 뭐, 무사히 넘길 수도 있으니 일단 두고 보게나.”


  베이커드와 라니아가 그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오르젝은 봉인을 풀기 위한 주문을 영창하고 있었다.


  차원문을 봉하고 있던 사슬들이 풀려나고 부적들이 오르젝의 손짓에 따라 타오르기 시작했다.


  천천히 모든 봉인들이 차원문으로 부터 해제되고 소리 없이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 속엔 벽이 하나 서있었을 뿐이었지만 곧 푸르스름한 빛이 장막처럼 벽 위를 뒤덮더니 일렁이며 차원통로를 만들어냈다.


  그 순간 오르젝이 움찍하더니 이를 악물며 신음소릴 뱉었다. 마치 뭔가 알 수 없는 힘으로부터 압박을 받는 것같은 모습이었다.
  “크. 최악의 상황입니다. 아무래도 문이 열리길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렇다는 건.”


  애던이 유일하게 멀쩡한 왼쪽 눈을 가늘게 뜨며 차원문을 노려보았다.


  “네, 우려하시는 대로 반대쪽으로 통로를 타올라오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저는 손을 땔 수 없습니다. 지금 그들은 불완전한 통로를 타고 올라오고 있습니다. 잘못되면 통로가 훼손될 수 있어요.”

 

  여유가 없는지 오르젝의 미소가 깨졌다. 그는 인상을 쓰며 양소매 안쪽에 양손을 각각 집어넣더니 가루를 한줌 꺼내 차원통로를 향해 던졌다. 가루가 차원통로에 녹아들듯 흘러들어가자 곧 반응이 흘러나왔다. 눈부신 빛이 차원문에서 부터 흘러나왔고 동시에 오르젝의 외침이 들려왔다.


  “옵니다!”


  그와 함께 차원통로로부터 찐득한 검은 덩어리가 꿀럭꿀럭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흘러나온 검은 덩어리들은 곧바로 사람과 비슷한 형태를 이뤘다.


  그 순간 애던과 발락이 화살 보다 빠른 속도로 뛰쳐나갔다. 순간이동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빠른 돌진으로 움직였다고 생각한 순간 이미 둘은 적의 지척까지 뛰어가 있었다.


  순식간에 애던의 검이 나타난 괴물체의 몸을 가른다.


  본디 형체가 없는 존재들에게 이런 물리공격은 거의 통하지 않지만 애던이 지닌 검 ‘침묵’은 강력한 마법검! 검에 베여나간 검은 괴물체는 괴성을 지르며 허물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최초의 일격 때 뿐.


  하지만 그 다음 공격 때 놈들은 유연한 동작을 애던의 공격을 피했다. 마치 처음 공격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기에 맞았다는 듯 재빠르고 예측불능의 동작이었다. 그에 애던은 빠르고 정확한 검격으로 맞섰다. 특별날 것 없는 공격이지만 일격일격이 위협적일 정도의 위력을 품고 병자로 보이는 몸엔 무리라고 보일 정도의 속도로 움직였다.


  힘과 속도, 기교를 겸비한 애던과는 달리 발락은 거대한 거체에서 나오는 폭발적인 힘과 석질과 금속질을 겸비한 몸에서 나오는 방어력으로 압도하고 있는데다가 선주종족 다운 강력한 영성으로 괴물체들이 접근도 못하게 하고 있었다.


  “흡!”


  짧은 기합과 함께 주먹을 질러 넣고 어깨 힘으로 반동을 주는 것만으로 괴물체들이 퉁겨나갔다. 그 외견에 어울리는 파괴적인 힘의 행사였다.


  그러나 둘만으로 감당할 수 있는 숫자에는 한계가 있는 법. 애던과 발락이 열심히 활약했지만 덮쳐오는 괴물들을 완전히 막아낼 순 없었다.


  “솔드!”


  애던이 부르자 솔드는 봉을 휘두르며 애던과 발락이 미처 처리하지 못한 놈들을 타격하기 시작했다. 그의 봉은 딱히 마법적 힘이 깃들지 않은 평범한 무기였지만 이미 갈고닦은 무의 경지는 형체 없는 것조차 파괴할 수 있는 경지에 다다라 있었다. 게다가 뒤에 서 있는 마법 사용자들 또한 폼이 아니었다.


  “나의 대리자에게 깃들어라. 전투의 권능이여.”


  베이커드가 청색 보주를 머리 위에 띄우며 외치자 보주에서 흘러나온 빛이 솔드의 봉에 깃들었다. 봉 위로 푸르스름한 마력장이 생겨났고 마력장은 차원통로로부터 흘러나온 괴물들과 반발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베이커드가 소리쳤다.


  “역시! 이 놈들 코누곤에서 올라온 괴물들이네. 절대 놈들의 손아귀에 맨살이 닿아선 안 되네!”


  “퇴치를 시도하겠어요!”


  루시엔이 호부를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그리고 즉시 영창이 시도되자 놈들은 뭔가를 느꼈는지 루시엔에게로 몰려들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을 보고 있을 라니아가 아니었다. 세검으로 견제하듯 자세를 취하며 반대쪽 손으론 수인을 그리며 주문을 읊는다.

  “울어라, 천둥의 화살이여!”


  왼손으로부터 전광의 화살이 날아가 괴물들의 몸을 지졌다. 그 위를 난도질하듯 베이커드의 갈고리가 찢어 뜯고 지나간다

.
  한두 번의 공격은 오발이 날 법하지만 그런 공격들을 솔드는 죄다 피해내고 퉁겨내며 오히려 괴물체들에게 적중되도록 유도했다. 하지만 덮쳐오는 괴물들의 수가 범상치 않았다.


  “좀 더 버텨요!”


  루시엔이 조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들의 실력으론 수월한 적이었지만 숫자가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장소가 좁다. 무엇보다 저 괴물들이 일행이 수비하는 곳을 넘어서게 만들어선 안 되기 때문에 충분한 실력을 발휘할만한 공간이 생겨나지 않았다.


  베이커드는 밧줄을 소극적으로 다루며 광역 주문은 시도도 못했고, 라니아 또한 시간이 부족해서 인지 큰 주문은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통로를 유지하고 있는 오르젝은 두 말할 필요도 없었고, 애던과 발락은 이미 괴물들에게 파묻힌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이봐! 미친 듯이 쏟아지잖아!”


  경악해서 솔드는 소리쳤다. 처음 애던과 발락이 일격에 날려버릴 때까지만 해도 별거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십여 초도 안 되서 그딴 생각은 하늘 저 너머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말 그대로 미칠 듯이 많은 괴물들이 차원통로를 통해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다.

  ‘손에 닿지 말라고?’


  이 덮쳐져서 보이지도 않는 두 사람을 생각하니 걱정이 앞선다. 하지만 함부로 큰 기술을 사용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가 문이 파괴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말 걸지 말아주십시오. 통로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전 벅찹니다.”


  오르젝이 힘겹게 말했다. 통로를 포기하면 저것들이 더 이상 들어 오지야 않겠지만 선임마법사란 입장상 그렇게 들 수 없었다. 우선 저 차원문이 막히게 되면 우르하까지 몇 달이나 걸리는 긴 여행을 해나가야 했다. 그 사이 우르하에 무슨 일이 추가로 벌어질지 어떻게 아는가?


  거기다가 지금 차원문을 닫으면 통로로 올라오던 놈이 경계 근처에서 흩어지게 되고 그건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빙의사고를 일으킬 우려가 있었다.


  “빛이여!”


  라니아가 외치가 빛의 화살이 차원문을 향해 날아갔다. 문을 파괴해 막아버릴 생각이었던 듯 했지만 빛의 화살은 날아가던 도중에 무산되었다.


  “베이커드! 무슨 짓이야?!”


  “안 돼! 지금 막으면 저놈들이 경계 근해에 흩어지게 되네!”


  “아르키아난으로 들어오는 것보단 나아! 이러다가 애던이랑 발락이 죽겠어.”.


  “루시엔! 아직 멀었나?”


  솔드가 소리치자 루시엔은 울상이 되었다.


  “시끄러워요! 노력하고 있다구요.”


  “솔드 숙이게!”


  루시엔의 항의와 베이커드의 경고가 동시에 터졌다. 솔드는 반사적으로 몸을 숙이자 그 위를 베이커드의 갈고리가 스쳐 지나갔다. 그와 함께 솔드의 빈틈을 노리던 괴물이 반 토막이 되어 나가 떨어졌다.


  한 순간의 위기는 지나갔지만 아직 상황은 그대로였다. 지금 이때도 발라고가 애던은.


  솔드가 이를 악물며 비장의 수를 준비하려는 순간.


  “시오여!”


  굵은 외침과 함께 정면에서 폭발이 일었다. 그 속에 양팔을 높이 쳐든 발락이 서 있었다. 그의 금속질 몸에 박혀있던 구체들에서 빛이 사라져 있었다.


  발락은 지친 듯이 한 번 무릎을 꿇었지만 곧 다시 일어났다. 그런 다음 괴물체들 사이에 그는 손을 집어넣었다. 이어 애던이 괴물체들의 덩어리 속에서 끌려져 올라왔다.


  “커헉. 컥.”


  콜록거리며 애던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아무리 봐도 당장 전투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 듯 보였다. 베이커드의 말대로 썩어 내리진 않아보였지만 그림 무사해보이지고 않았다.


  솔드는 애던과 발락을 보조하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베이커드의 갈고리와 함께 라니아의 불의 비가 발락과 애던 위로 쏟아졌다. 최대한 제어에 힘을 기울여 집중시킨 공격이었다.


  그 때 루시엔이 호부를 하늘 높이 치켜 올렸다.


  “모든 부정한 모든 것들이여! 나 그대들을 부정하오니. 북에서 온 자들이여 북으로 돌아가라!”


  루시엔의 외침이 끝나자 번쩍하고 눈부신 빛이 호부로부터 뿜어져 나왔다. 한 순간 모두의 눈을 마비시킨 빛이 사라지자 일행은 그 많던 괴물체들이 모조리 사라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후우. 소환이 안돼서 퇴치도 안 되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성공했네요.”


  안도의 숨을 쉬는 루시엔. 그런 그녀를 라니아가 꼭 껴안았다.


  “잘했어요. 훌륭합니다.”   오르젝도 나이에 맞지 않게 강한 그녀의 능력에 박수까지 치면 감탄하고 있었다.


  “후우. 굉장하군요. 나이에 비해 이토록 강력한 힘이라니. 완전 일소한 것 같습니다. 아가씨가 아니었다면 매우 위험했겠습니다. 아, 그래요. 애던씨 괜찮습니까?”


  오르젝의 물음에 몸을 숙이고 연거푸 기침을 하던 애던이 일어났다. 그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고 “커흠. 콜록. 괜찮소. 후우.” 한숨과 함께 자신을 가다듬었다.


  솔드가 애던과 발락이 서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는 거의 다치지 않았지만 발락과 애던은 엉망이었다. 강력한 마법장비가 아니었다면 이미 전에 끝장나버렸을지도 몰랐을 애던을 내려다보며 솔드는 감탄하듯 말했다.


  “그 마법사들이 당할 만 하군. 숫자가 장난 아닌데. 이래서야 주문은 써보지도 못하고 박살나겠군.”


  “그랬소. 딱히 얕본 것은 아니었는데도 생각이상으로 고전했군.”


  “위치가 나빴네.”


  반성회라도 가질 것 같은 분위기의 애던에게 발락이 담담히 말했다. 그저 그렇다고 사실을 고하는 정도의 담담함이었지만 검은 찐득이 같은 놈들은 그의 강철몸에도 상처를 입힐 수 있었는지 검은 흔적들이 곳곳에 나 있었다.


  오르젝도 선두에서 물량에 휩쓸려버린 두 명이 내색하는 것에 비해 멀쩡하지 못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거 시작부터 영 불안하군요. 설마 이런 식으로 선타를 당할 줄이야.”


  “문제없소. 그보다 이제 이 문을 이용할 수 있는 거요?”


  “일단은 가능합니다. 하지만 차원통로가 완전히 깨끗한지는 확신하지 못하겠습니다.”


  평소의 미소가 돌아온 오르젝이 어깨를 으쓱이자 애던은 검을 집어 넣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내가 할 수 있소. 루시엔, 라니아, 베이커드. 이곳으로 오게. 확인 후 곧바로 출발하겠네.”


  “쉬지 않고 말인가? 자넨 지쳐 보이는데.”

 

  베이커드가 염려가 섞인 눈빛을 보냈지만 애던은 단호한 표정으로 차원관문을 향해 섰다.


  “오빠,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걱정 마렴. 저 녀석은 쓰러지지 않으면 정신을 못차리는 타입이니까. 아니, 쓰러져도 못 차리는 타입이지. 그렇지?”


  루시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라니아가 애던을 향해 윙크를 했다. 애던은 화상입은 오른쪽 얼굴을 보여주고는 고개를 돌려 차원통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라니아는 그 모습을 보고 애던의 등에 혀를 낼름 내밀곤 루시렌을 향해 베시시 웃었다.


  “삐졌어. 맞지?”


  “그런 것 같네요. 하지만 너무 그러면 안돼요.”


  “유의할게. 가능하면 말이지.”


  “항상 유의해 주세요.”


  “네. 네.”


  전혀 알아먹지 못한 얼굴로 라니아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 위로 솔드의 꿀밤이 떨어졌지만 라니아는 뒤통수를 슬슬 마지며 장난기 넘치는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방금 전까지 쌩고생을 한 것에 빌하면 지나치게 해맑은 웃음인지라 솔드는 가볍게 한숨을 쉴 뿐이었다.


  긴장감 없는 녀석.


  그가 한창 모험가로 돌아다니던 시절에도 본적 없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아, 물론 그녀는 평범한 엘루가 아니긴 했지만.


  “출발하겠소. 따라오시오.”


  조사를 마쳤는지 애던이 일행들을 향해 손짓 했다. 오르젝은 다소곳한 태도로 출발하려는 애던에게 말했다.


  “시작부터 좋지 않군요. 그곳에 가면 상상할 수도 없던 뭔가가 기다릴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걱정 하는 척 할 필요는 없소. 그렇다고 우릴 보내지 않을 건 아니잖소?”


  그 말에 오르젝은 짓궂은 소릴 들었다는 듯 놀란 표정을 지으며 능청스레 말했다.


  “아~. 물론 아니지요.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보셨다시피 도저히 저희들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서 말입니다. 아하. 자 이걸 가져가십시오.”


  생각났다는 듯 꺼낸 것은 돌을 갈아서 만든 날붙이처럼 보이는 물건이었다. 세밀한 주문자가 새겨져 있어 척보기도 마법적인 힘을 지닌 물품 같았다. 하지만 애던은 그가 지닌 능력을 통해 이 돌칼이 지닌 방대한 마력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탑으로 올라가기 위해선 이게 필요할 겁니다. 육신을 가지고 들어갈 수 있도록 경계를 찢을 수 있는 도구입니다. 뭐, 아직 이름은 안 지었으니 좋으실 대로 부르셔도 됩니다. 특허도 안 냈답니다.”


   애던은 주머니 속에 돌칼을 집어넣었다.


  “그럼, 희소식을 기다리죠.”


  애던은 대답하지 않고 차원통로로 뛰어 들었다. 이어 발락이. 솔드가 오르젝을 한 번 노려보고 차원 통로 속으로 사라졌고, 그 뒤 차례였던 루시엔은 오르젝에게 예의바르게 인사했다.


  “네, 그럼 안녕히 계세요.”


  “그러죠, 재능 넘치는 아가씨. 혹시 갈 곳이 없어지면 아르키아난에 입문을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생각해 볼게요.”


  루시엔은 그렇게 말하고 쑥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라니아가 뛰어들자 오르젝은 주문을 외워 차원문을 닫았다.


  “희소식을 기다리지요. 부디.”


 
3.
  중력이 사라지고 배구수로 흘러내려가는 물 마냥 통로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자 곧 캄캄한 공간이 나타났다.


  “빗소리가 들려.”


  속삭이는 듯 낮은 라니아의 목소리. 뒤이어 베이커드가 구성을 발동시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빛이여.”


  하얀 빛의 구체가 베이커드의 양손으로부터 생겨나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와 함께 드러난 광경은 꽤나 보는 이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지하로 추정되는 방. 정면에 올라가는 계단이 있지만 일행들은 다른 곳에 신경쓰고 있었다.


  방 전체를 온통 메우고 있는 핏자국. 마치 토막 난 시체 쪼가리를 바닥과 천장에다 질질 끌고 다닌 듯 한 자국들이 온 천지에 나있었다. 하지만 흔적은 핏자국 뿐. 싸움이 있었던 흔적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아, 젠장. 이게 뭐지.”


  솔드는 당장 욕부터 내뱉었다. 안에서 어떤 축제가 벌어졌는지 감히 상상도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솔드의 모험가 경력 20여 년간 단 한번 이런 광경을 본적 있었다. 옛 동료의 죽음. 두통이 엄습해오는 것이 느껴진다.


  이마를 매만지며 슬쩍 루시엔을 보자 그녀는 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리고 솔드에게로 시선을 돌리다가 눈을 마주치니 황급히 피했다.


  “나쁘군. 여기에는 불온한 기운이 충만하다.”

   발락은 팔과 상체를 움직이며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모습을 보였다. 게다가 그는 힘을 잃고 있었다. 자연력을 충만히 충전해놓았을 때 빛을 말하는 원기의 선이 지금은 빛을 잃은 상태였다. 평소라면 상당히 빠른 속도로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여기선 자연력의 회복이 용이치 않은 모양이었다.


  어쩌면 이번에는 그가 활약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불안을 담은 것 같기도 했다. 발락은 말할 것도 없는 전사이기에 싸울 수 없는 상황에 빠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동시에 비슷한 불안을 품고 있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루시엔은 한숨과 함께 우려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경계가 옅기 때문이에요. 그것도 하계에 가까워져 있는 것 같아요. 여기선 퇴치도 통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어요.”


  개인에 한정된 발락의 투덜거림에 비하면 루시엔의 그건 좀 영향력이 있었다. 방금 전에도 퇴치 마법이 가능했기 때문에 무사했던 것을 생각하면 말이다. 말하자면 손쉬운 수단들 중 하나를 잃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 수준이었지만 그건 말하자면 최소한의 피해로 이길 수 있는 수단을 잃었다는 말과 동일했다.


  “그건 별로 좋지 않지만. 별수 없네. 이미 이 장소는 이계화가 이뤄지고 있군. 오히려 아무런 문재가 없다면 나는 그쪽이 더 심각한 문제가 아닐지 고민했을 거네. 하지만 그걸로 상황을 가늠할 수 없다는 것은 문제로군.”


  그 말대로 였기에 일행은 섣불리 위층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발락이 그 특유의 감각으로 뭔가를 알려줬겠지만 지금 상태에서 그런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지 발락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대신 라니아가 입을 열었다.


  “위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아. 소리라곤 빗소리밖에 안 들려.”


  “빗소리라고?”


  발락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응. 그것도 꽤나 세찬데.”


  “아, 그러고 보니 아까 전에도 그런 이이야기를 했죠? 빗소리가 들린다고.”


  “응. 폭우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야.”


  라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솔드와 애던도 귀를 기울여 보더니 라니아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거기다가 우르릉하고 천둥소리가 섞여서 들려왔다. 천둥소리는 일행들 전부가 들을 수 있었다.


  “진짜로군. 하긴 이 시기면 대우림은 우기야. 비가 오는 것은 이상할 게 아니긴 한데….”


  솔드는 말끝을 흐렸다. 일행들 전부 마지막에 나와야 할 말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과연 이 비가 정말 우기 때문에 내리는 자연스러운 비일 것인가?


  우기에 폭우가 내리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일행들은 전부 그들의 목표로 하고 있는 폭풍의 탑의 출현 조건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폭풍의 탑은 그 이름 그대로 폭풍이 몰아치는 시기에 등장한다. 게다가 현재는 탑과 현세의 경계가 찢어졌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이런 가정도 가능해진다.


  탑 속에서 이번 상태를 일으킨 정체 모를 무언가가 현세에 영향력을 발휘해 폭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말이다.


  그게 사실일 경우 덤으로 알 수 있는 정보는 그 정체모를 존재가 2주 이상 기상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 정도의 강대한 힘을 가졌다는 사실이었다. 꽤나 사기를 꺾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일단은 오르도록 합시다. 다들 준비되었소?”


  애던이 묻자 일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일단 일행 내에서 가장 방어력이 높다고 할 수 있는 발락을 앞세워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리 발락이 지금 힘이 없다고 해도 그가 가장 단단한 몸체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돌계단에는 이런저런 잔해들이 군데군데 떨어져 있었다. 일행은 잔해를 밟아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며 계단을 올랐다. 위로 오를수록 빗소리가 명확하게 들려왔고 간간히 들려오는 천둥소리도 커졌다.


  잠시 동안 계단을 걸어 오르던 일행은 곧 1층으로 통하는 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문 위 파괴된  뻥 뚫린 통로라고 말해야겠지만.


  참고로 1층은 더 처참했다.


  벽의 한쪽이 뻥 뚫려 있었고 그쪽에서 비바람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가구들의 대부분이 파손되었고 벽의 곳곳에 그을리거나 녹아내린 흔적이 보인다. 일방적으로 학살당한 것처럼 보였던 지하에 비해 이 곳에는 저항의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었다.


  “일단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네만.”


  그러나 시선만큼은 느껴졌기에 일행의 신경은 날카로워져있었다. 베이커드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미 경계 상태에 들어가 있었다.


  “어떡할까? 결계를 친다고 해도 내부에 이미 들어와 있는 녀석까지 내쫓을 순 없어. 여긴 겉보기완 달리 뭐가 많은 것 같은데?”
  주변을 둘러보며 라니아가 말했다. 애던 또한 그것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무방비로 있다는 것도 말이 되진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려는데 발락이 끼어들었다.


  “애던. 2층에 뭔가 있는 것 같아.”


  “저도 느껴요. 경계에 구멍이 나 있어요. 게다가 영들의 존재가 느껴져요. 무척이나 사악하고 부정한 힘이에요.”

  소름이 돋는다는 듯 양손으로 자신의 몸을 감싸진 루시엔은 두려운 듯 천장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거점은 필요하오. 최소한 짐을 둘 곳은 말이오. 마을이 아까 전 그놈들로 가득 차있다면 함부로 행동할 순 없소.”


  애던은 그렇게 말하고는 생각해둔 바를 일행에게 알렸다.


  “그럼 일단 결계를 구축하는 건가?”


  솔드의 말에 애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거요.”


  두말할 필요 없다는 듯 대답하는 애던. 그러나 라니아가 끼어들어 반대했다.


  “하지만 2층을 내버려 두기엔 좀 그런데. 루시엔도 무서워하고.”


  “물론 내버려두지 않을 거요. 나눠서 움직여야 할 것 같소. 결계조와 조사조로 나누도록 하는게 좋을 것 같군.”


  “마법사들과 비마법사들로 나눈다는 겐가?”


  베이커드가 의문을 제기하자 애던은 고개를 저었다.


  “거의 맞지만 루시엔은 이쪽이 데려갈 거요. 2층은 목조인 모양이니 무거운 발락을 올리긴 힘들고. 루시엔은 전공이 다르니 말이오. 그 아이는 위쪽에서 좀 더 활약할 수 있을 테니 말이오.”


  “그렇다면 나와 라니아, 발락. 그쪽은 자네와 솔드, 루시엔. 이렇게 나뉘는 거로군.”


  “그렇소.”


  애던은 고개를 끄덕였다. 라니아는 그 모습을 보고 잠깐 생각을 하더니 곧바로 클레임을 넣어왔다.


  “괜찮을까? 차라리 발락에게 경량화를 걸고 2층으로 올려 보내는 건 어때? 내가 쓸 수 있는데.”


  전투가 벌어질지도 모르는 장소에 루시엔을 보낼 생각을 하니 아무래도 불안한 모양이었다. 솔드가 루시엔을 데리고 일행에 합류한 이 후 루시엔과 매우 친하게 지냈던 그녀다 보니 이해는 갔지만.


  솔드가 라니아와는 생각이 틀린지 애던의 편을 들어왔다.


  “그건 안 돼. 균형적으로도 좋지 않아. 그렇게 된다면 아랫층에는 주문 사용자 셋이. 윗층으로 전사 셋이 올라가는 것이 되는데. 상대가 마법적인 존재일 경우 마법사의 부재는 극도의 불리함을 낳을 수 있어. 물론 반대상황도 마찬가지고.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인 만큼 균형을 갖춰야 할 필요가 있다고.”


  “루시가 위험한 상황에 빠져도 좋다는 말이야?”


  “우리가 무너지면 어떻게 되든 똑같은 상황이 될 건데.”


  애던과, 발락, 솔드가 무너지고 나면 확실히 남은 셋만으로 살아남는 것은 무리였기에 라니아의 대답은 궁해졌다. 아래에 차원문이 있긴 하지만 여기 있는 셋은 문의 발동 방법을 모른다는 것도 문제였다.


  “언니. 괜찮아요. 어차피 전 결계를 만드는 일은 도와줄 수 없으니까요. 위에서 애던과 솔드를 도울게요.”  

  “힘낼 게요~♡”라는 소리가 들릴 것 같은 깜찍한 동작을 취하며 루시엔은 뭐라 반박할 말을 찾는 라니아를 말렸다.


  “루시, 위험할텐데.”


  “우리는 한 팀이잖아요. 서로 역할에 충실하면 절대 지지 않을 거예요.”


  “그렇지만.”


  내키지 않는 듯 라니아가 시간을 끌고 있자 결국 침묵을 지키고 있던 발락이 나섰다.


  “루시엔이 더 어른이군. 돌봐져야 하는 건 오히려 네가 아닌가?”


  “피~. 알았어. 알았다고. 와아~안저~언 불만이지만 별수 없지.”


  드물게 라니아는 발끈해서 대들지 않고 빠르게 항복을 선언했다. 그녀 또한 자신의 행동이 말도 안 된다고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니 계속 우길 수 없는 것이다. 마법적인 문제 대처할 수 있는 것은 마법사 뿐. 전사들을 우르르 보내봤자 불가해한 상황 속에서 위기만 맞을 뿐인 것이다.


  “루시, 조심하렴.”


  “걱정 말아요.”


  의견이 조율되자 애던은 2층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1층에 남은 두 마법사들은 결계를 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고. 발락은 쏟아지는 빗발을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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