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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폭풍의 탑-6-

2010.11.18 23:00

azelight 조회 수:631

  타오르고 있다.

 

  마을은 타오르고 재는 흩날리며 불길은 치솟아 오른다.

 

  평원의 작은 시골마을. 지도에는 그려지지도 않을 것이 분명해 보이는 작은 촌 동네.


  애던은 그 곳이 불타오르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불길은 흉터로 가득한 그의 반신을 달아오르게 하고 육체를 고통으로 채웠지만 그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이것은 그의 업이었다. 절대 눈을 돌릴 수 없는 업.

 

  그러나 그의 눈길은 지극히 무심하다. 아무 감정이 담기지 않은 듯 무기질적인 시선이 불타는 마을을 향하고 있었다.

 

  “뭘, 그렇게 보지?”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리자 그는 몸을 돌렸다. 그 장소에는 일렁이는 검은 그림자가 있었다. 존재 그대로 불길같고 목소리는 칼날 같아 듣는 이에게 상처를 입힌다. 오히려 마을을 태우는 불길보다 위험한 것 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넌가? 언제 날 해방시켜 줄 거지?”

 

  애던은 지금 갇혀 있었다. 그것도 그가 가장 꺼내고 싶지 않은 기억 속에 강제로 감금된 상태였다.

 

  “곧. 아직은 아니야.”

 

  단조로운 어조로 말하는 그림자. 그게 진짜 모습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애던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수면 위에 비친 그림자와 같은 것. 하지만 그런 그림자라도 평범한 인간의 의지 따윈 가볍게 압살할 수 있다. 저건 그런 것이 가능한 존재였다.

 

  “왜 이러는지 모르겠군. 네 말대로 이곳에 묶인 신이 있다면 어서 날 풀어주는 쪽이 이득 아닌가?”

 

  “아직은 안돼. 아직은. 기다려. 때가 되면 깨워 줄 테니.”

 

  “웃기지 마! 우리의 계약에 자유의지를 제한다는 항목은 없었어!”

 

  “호오. 자유의지라. 제법 유식한 말도 아는데? 한 때 그것을 추구하던 신들이 격변의 시기에 사라진 후로 소실되었다고 여겼것만.”

 

  “단어가 사라질 일은 없을 텐데.”

 

  “신학적으로는 그러하지.”

 

  유쾌하다는 듯이 그림자는 말했다. 말이란 신이 만들어 낸 것. 그렇기에 단어란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그가 출신대로의 삶을 살았다면 알 수 없을 지식이었지만 아르키아난에서 보낸 5년은 그에게 온갖 지식들을 부여했다. 어디까지나 지껄이기 좋아하는 마법사들을 대하다보니 간접적으로 얻은 지식이었지만….

 

  그림자가 유쾌하게 웃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애던이 실제로 그 단어를 쓰긴 했지만 정말 자유가 무엇인지 그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걸 비웃는 것이 아니다.

 

  그림자의 주인은 삶을 살아감에 있어 무지 또한 무기가 된다는 사실을 잘아는 자이기도 했다.

 

  무지하기 때문에 맹신할 수 있고, 무지하기 때문에 저돌적일 수 있으며 그로 인해 기적을 일으키기도 하는 법이다.

 

  그게 무지한 자의 힘이다. 앎이 반드시 힘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일맥상통이랄까.

 

  “걱정 마. 그대와 내가 바라는 것은 일치한다. 그대가 내게 치르기로 한 대가 또한 내가 바라는 일. 믿으라곤 안하겠지만 내 성의를 무시하진 말아줬으면 하는군.”

 

  듣는 이를 갈기갈기 찢어 버리는 잔혹한 목소리로, 별거도 아닌 시시한 신뢰를 원한다고 검은 그림자는 유쾌하게 말했다.

 


  그것을 보게 된 것은 그저 호기심이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해방된다.

 

  사람은 누구나 잠들 때 때때로 내세라고 할 수 있는 장막 너머를 거닐 수 있었고, 장막 너머의 공간이 만들어낸 초현실성과 그들이 가진 기억의 편린들이 얽힌 광경들을 체험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잠은 죽음의 대리체험이며 그 영역은 밤의 여신이며 죽음이 내려오는 북쪽의 여신 실렌스티에게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법사들은 조금 다르다.

 

  마법은 장막 너머의 세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내세 혹은 영계라고 부르는 장막 너머의세계로부터 어떤 방식으로든 힘을 끌어낼 수 있는 자들을 마법사라고 불렀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 꿈은 또 다른 의미를 가졌고, 결과적으로 진정한 마법사가된다는 것은 잠을 잃게 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동시에 마법사가 세상의 순리에서 벗어난 존재가 된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소녀는 마법사와 일반인 어느 쪽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타고난 재능과 교감능력은 꿈속에서야 완벽하게 발휘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이 곳에서야 말로 마치 고향에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을 가지곤 했다.

 

  “후후후.”

 

  작게 미소지으며 성큼성큼 녹옥빛 이끼가 가득힌 계곡의 유사 위를 뛰어다니던 소녀는 현세의 영역 가까운 곳에서 독특한 영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평범한 마법사라면 몰라도 소녀는 그 영역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마치 과실을 따듯, 한 걸음이면 넘을 수 있을 듯한 작은 개울을 건너 듯. 소녀는 꿈과 꿈을 뛰어넘어 그곳에 도착했다.

 

  인지 부재의 결계와 봉인이 채워져 있었지만 이 영역 속에서 소녀에게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장벽 자체는 동질의 것들로 이루어져 있기에 소녀는 수월하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호기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소녀는 거기서 봐선 안 될 것을 봤다.

 

  그 곳에 불타는 마을과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에 대해선 잘 알고 있다.

 

  소녀가 따르는 일행을 이끄는 자. 그러나 길잡이가 될 성품은 못 되는 남자였다.

 

  사소한 존재. 단지 그뿐인 존재.

 

  소녀가 주목한 것은 다른 것이었다. 남자의 등 뒤에 나타난 것. 검은 그림자의 형상을 한 화신.

 

  뒤에서 이를 가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아니면 비웃는 소리던가.

 

  소녀는 뚫어지게 그 존재를 노려보았다.

 

  그림자는 남자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내용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들렸다한들 귀에 들어오진 않았으리라. 그만큼 소녀는 검은 그림자를 향해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알 수는 없었다.

 

  다만 소녀는 지금 상황이 뭔가 위험하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그. 러. 나. 시선을 땔 수 없다. 

 

  그 순간 그림자의 머리가 움직였다.

 

  끼이익 거리는 소리가 날 것처럼 부자연스럽고 기이한 동작으로 천천히.

 

  소녀는 깜작 놀라 물러서려고 했지만 이미 자신이 포착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리날 같은 날카로움이 그녀의 몸을 덮치고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오려는 찰나.

 

  그림자는 소녀를 보고 빙긋 웃었다.

 

  소녀의 의식이 산산조각나기 시작했다.

 


  “왜 그러지?”

 

  그림자의 시선이 움직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개를 돌렸지만 애던은 그림자가 봤던 것을 볼 수 없었다.


  “아니야. 뭔가가 들어왔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어.”

 

  시치미를 때는 듯 아닌 듯 기묘한 어조로 그림자는 말한다.

 

  “자, 이제 깨어날 시간이야.”


 

  애던은 눈을 떴다.

 

  안은 몹시 어두웠지만 빛과 온기가 한 쪽에서 쏠리듯이 흘러나오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바깥에는 폭우가 쏟아지는 소리와 간간히 우르릉 울리는 천둥소리가 귓가를 흔든다.


  잠시 주위를 둘러본 애던은 일행의 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들은 대부분 열린체였다. 안의 내용물은 빠져 나왔는지 빵빵하던 짐가방들은 대부분 찌그러져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한 것인가?

 

  자신이 제법 오랜 시간 잠들어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기억하고 있다. 그 빌어먹을 것이 계속 깨어나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고소한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애던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무심결에 창밖을 보자 고고하고 불길한 탑의 모습이 보였다.

 

  저것이 오르젝이 말하던 탑인가.

  “일어났나.”

 

 

  발락의 목소리에 애던이 고개를 돌렸다.

 

  “그렇소. 발락. 너무 잔 것 같군.”

 

  “맞네. 거의 16시간을 잤지.”

 

  16시간이라는 말에 조금 화가 치미는 애던이었다. 대체 몇 시간을 잔건지. 그의 기억에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마지막 때가 저녁이 다 되갈 때쯤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 쯤 정오를 지났거나 되기 직전쯤의 시간일지도 모른다.

 

  그 정도의 시간을 낭비하게 하다니.

 

  지금쯤이면 벌써 배를 구해 탑으로 올라갔어야 했었어야 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애던은 울화통이 터질 것 같았다.

 

  물론 그걸 표정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어차피 일행 안에 그 분노의 대상이 들어있지 않았고, 그는 괜한 곳에 화풀이 하는 성미도 없었다.

 

  아르키아난에서 보낸 5년은 인고의 시간이었다. 그 속에서 그는 인내를 배웠으며 그 가치 또한 알았다. 성급함이 가져온 여러 종류의 파멸을 보았으며, 그 중 하나를 가까이에 두고 있기도 했다.

 

  시간을 허비했다면 그에 맞는 준비를 할 뿐이었다. 침착하고 꼼꼼하게 가장 필요한 것 들 부터.

 

  “다른 이들은 2층에 있소?”

 

  “그들은 이 여관을 완전히 제압하기 위해 올라갔다. 장막을 복구할 것이라고 하더군.”

 

  “장막을 말이오?”

 

  “그렇다더군.”

 

  발락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애던도 더 묻진 않았다. 그는 일행이 2층에 있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었다. 마법사 살해자로서 그는 마법 자체를 감지할 수 있는 그의 능력은 2층에서 벌어지고 있는 의식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의외로군. 베이커드가 그런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니.”

 

  입으로 말하는 것에 비해 표정의 변화는 없었다. 오른쪽 얼굴의 흉터와 함께 표정이 굳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감각한 모습이었다.

 

  “베이커드가 아니다. 라니아가 기억을 일부를 회복했다고 한다.”

 

  “흠.”

 

  처음으로 그가 표정다운 표정을 지었다. 흉터진 얼굴이 한층 흉측해졌다. 일반인이라면 한 눈에 생리적 혐오를 느낄만한 모습이었지만 둘 다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발락이야 노르위펜이라서 모른다지만 애던은 애초에 흉터를 감출 생각도 없어 보였다.

 

  “직접 듣는 게 좋다. 올라가 봐라.”

 

  “그러겠소.”

 

  애던은 그렇게 말하고 발락이 시선으로 가리킨 방향으로 걸어갔다.

 

  결계로 추정되는 저항을 넘어서자 확하고 냉기가 덮쳐왔지만 애던은 무시했다. 그 정도의 냉기는 그에게 문제가 아니었다.

  계단을 올라 2층으로 올라가자 솔드가 복도애서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그는 애던을 보더니 손을 들어 가볍게 인사를 해왔다.

 

  “여, 일어났소?”

 

  “그렇소.

 

  “몸은 괜찮아 보이는 군. 당신이 기절해있는 사이 좀 일이 있었소. 듣겠소?”

 

  애던은 고개를 끄덕였다.

 

  솔드는 간략하게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별 이야기는 아니었다. 여관에 장막이 옅어진 부분이 있었고 그를 통해 아르키아난의 2차 조사단원으로 추정되는 마법사의 영을 소환할 수 있었지만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기 전에 난입한 괴물 덕에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부상만 얻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괴물은 바로 지금 애던이 추적하고 있는 비밀결사이자 사이한 괴물들의 조직인 용의 조락이 숭상하는 묶인 신 라나가하사의 손이라고 불리는 벌레무리였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결정적인 단서는 아니었다. 애초에 이번의 경우 용의 조락을 쫓아 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궁금해 하는 것은 바로 저 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는 것이었다.

 

  아르키아난의 마법사들이 들어가서 단 한명도 돌아오지 못한 것이다.

 

  물론 이번 일이 용의 조락과 관련있다면 애던으로서는 환영할만한 일이지만 아르키아난의 의뢰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장애요소가 늘어났다고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주 없은 것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나는 저 탑을 만들었던 사람들 중 하나였던 모양이야.”

 

  솔드로부터 이야기를 듣는 사이 장막의 복구를 완료한 라니아는 직접 그 수확에 관해서 말했다.

 

  수확이라는 것은 라니아의 기억에 관한 거였다.

 

  벌레무리의 촉수에 붙잡히는 순간 그녀는 자신의 과거 일부를 떠올리게 되었고 그 충격으로 기절해버린 것이었다.

 

  “흥미로운 이야기지 않나? 나는 마치 이국의 음식을 본 것 같은 기분이네. 고대 엘드린의 지식을 엿볼 수 있는 기회 아니겠나?”

 

  흥분한 베이커드가 호들갑스럽게 말했지만 라니아는 안타깝다는 “그건 무리야.”라며 부정했다. 아무래도 떠오른 것은 자신이 탑을 만드는 데 개입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을 정도의 기억을 단편적으로 획득한 것뿐인 것 같았다.

 

  베이커드는 매우 실망한 표정을 지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심지어 그가 가엾게 느껴질 정도였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그럴 것이라는 말로 라니아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있는 3명은 베이커드에게 시선조차 보내지 않았다.

 

  “그렇다면 좋소, 라니아. 우리가 가야할 탑에 대해서 알아낸 것이 있다면 말해주시오.”

 

  애던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고 라니아는 대답했다.

 

  저 탑에 대해서 그녀가 아는 것은 많진 않았다. 그저 저 탑은 봉인을 목적으로 만들어 졌으며 그 대상이 묶인 신과 관련 있다는 정도였다. 그리고 그 묶인 신의 이름이 라나가하사이며, 저 속에 봉인된 존재는 라나가하사의 손이라 불릴 정도로 강력한 불멸자라는 것이다. 이름은 아르크르스. 파괴자라고도 불리던 것이었다.

 

  “말하자면 지금 이 상태는 벌집을 들쑤셔 놓은 것과 비슷한 상황이라는 말이오.”

 

  솔드가 부연하듯 애던에게 말했다.

 

  제법 상황에 맞는 비유였지만 이 상황에서는 가볍다고 할 수 있는 비유였다. 상황은 그보다 훨씬 끔찍했다.

 

  한 때 제 3시대를 살아가던 대부분의 선민종족들을 멸망시켰던 존재들 중 하나가 깨어나고 있다는 말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분명 벌레들 중 하나였지만 벌처럼 하찮은 것이 아니었다.

 

  벌떼도 엘루나 하라드 따위야 그 날카로운 침으로 우습게 해치운다지만 저 속에 든 존재는 엘드린과 노르위펜같은 고대종족들도 짓밟아 없애 버릴 수 있는 진정한 괴물이었다.

 

  물론 그런 무서운 괴물이 그냥 봉인되어 있을 리가 없다.

 

  탑을 세운 엘드린들은 침입자를 막을 함정정도야 세워뒀을 것이다. 아르키아난의 마법사들이 그 함정에 당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지금 상황을 봐선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막대한 음의 영역이 펼쳐져 있었고 장막은 붕괴하다시피 무너져 있었다.

 

  엘드린이라면 결코 이런 현상을 유도하지 않을 것이었다. 묶인 신들을 데려온 자들은 먼땅에서 온자들이었고 그들은 침략자였다.

 

  엘드린과 다른 선주종족들은 그들로부터 자신들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말하자면 묶인 신들은 침략자들의 신이기도 했다. 엘드린이 묶인 신들의 종복이 활성화되는 영역을 이용하는 함정 따윌 만들 리가 없었다.

 

  “그라덴이 그런 실수를 했다곤 생각하기 힘든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듯이 애던은 자신의 생각을 내뱉었다.

 

  아르키아난에서 지냈던 5년간 마법사 살해자로서의 기술을 가르쳐 준 인물이 셋 있었다.


  한명은 이름 모를 자였으며, 한 명은 오르젝이라고 하는 자였고 마지막 인물이 바로 그라덴이었다.

 

  그는 흑의 칭호를 지닌 마법사로 아르키아난에 있는 모든 선임 마법사들 중에서도 특출나는 강력함을 지닌 인물이었으며, 마법사인 동시에 이단마법사를 처단하는 마법사 살해자이기도 한 자였다.

 

  그리고 신중하다.

 

  애던은 그에게서 인내하는 법을 배웠고, 적을 치는 법을 배웠다.

 

  평범한 사냥꾼이 암살자로 거듭나는 데 필요한 모든 지식을 그로부터 배웠던 것이다. 그런 자가 실수를 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 단순한 희망상황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거요.”

 

  솔드는 말을 이었다.

 

  “엘드린의 유적은 강력한 마법적인 힘이 상시 통용되는 장소요. 구체적으로 강력한 마법사용자가 아니면 그 안에서 자유로이 활동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자네도 알다시피. 현세에 가장 강력한 마법사도 가장 나약한 엘드린 마법사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하다오. 아무리 조심하더라도 문제는 생길 수 있소. 안 그러나? 베이커드.”

 

  “맞네.”

 

  베이커드도 동의한다는 듯 끄덕였다.

 

  “그렇군. 인정하겠소.”

 

  애던이 그렇게 말하자 베이커드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그것은 설득이기도 하고 애던이기도 한 말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슬슬 물러설 때라는 것도 인정해주게. 아무리 자네나 발락이라고 해도 그런 괴물과 싸울 수 있겠나? 적어도 우리에겐 지원이 필요해.”

 

  “그건 아니네. 베이커드.”

 

  솔드는 말도 안 된다는 듯 부정적인 어조로 말했다.

 

  “이미 충분한 시간이 지났네. 아르키아난에 지원을 요청하러 갈 시간은 없어. 내 생각에는 지금이 기회 같네. 놈이 완전한 상태라면 이미 저 탑에서 빠져나왔겠지. 하지만 그러지 않고 있는 것은 아직 완전한 각성이 이뤄지지 않은 것일지도 몰라. 어쩌면 지금이 놈을 조기에 저지할 수 있는 최후의 기회일지도 모르지. 거기다 말이야.”

 

  솔드는 조금 뜸을 들이고 말했다.

 

  “돈을 받았지 않나? 응당 돈 받은 만큼 일하지 않은 면 안돼. 신뢰란 성의만큼 나온다네. 친구. 알겠나?”

 

  “알겠네, 친구.”

 

  베이커드는 마지못해 말했고 라니아는 그 모습을 보고 쿠쿠쿠하고 웃었다.

 

  “현직 모험가다운 말인 걸. 하지만 그런 이유만이 아니지. 우리 리더께선 임전무퇴가 신조잖아. 안 그래?”

 

  “그렇지. 확실히.”

 

  “으음, 내가 어리석었네.”

 

  베이커드마저 애던을 설득하려던 자신이 어리석었다고 시인하자 애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물론 별 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저기요.”

 

  루시엔의 목소리가 방에서 들려오자 다들 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창밖을 보고 있던 루시엔은 어서오란듯이 손짓을 하며 말했다.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아요. 저기 우리. 포위된 것 같거든요.”

 

  수척한 얼굴로 루시엔은 창밖을 가리켰다.

 

  “포위당했다고?”

 

  솔드가 즉시 다가왔다. 그러나.

 

  “어디 어디.”

 

  재빠른 동작으로 늦게 출발한 라니아가 새치기라도 하듯 달려와 창문에 들러붙었다.

 

  “어라. 진짜네.”

 

  창밖을 보자 라니아는 재미있다는 듯 싱긋 웃었다.

 

  밖에는 사람들이 모여 서 있었다. 하지만 정상적인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의 육체는 기이하게 변형되고 뒤틀려있어 원형이 사람이라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더 이상 사람이라고 부를 수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손가락이 거대한 낫처럼 변한 이도 있었고, 관절이 뒤틀려 역관절이 된 자도 있었으며 배가 갈라져 입이 된 자에, 얼굴이 하나 더 돋아난 이도 있었다.

 

  그렇게 뒤틀리고 변형된 인간들을 보는 것은 애던의 화성흉터를 보는 것보다 더 역겹고 거북스러웠다.

 

  “시귀로군. 숫자는 대략 음.”

 

  “680정도야.”

 

  라니아가 알려주자 솔드는 인상을 팍 썼다.

 

  “거의 항구의 인구와 일치하는 군. 마을 사람들 전체에 빙의 한 건가.”

 

  솔드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시귀라면 시체에 저급령이 빙의되는 현상을 말하는 걸로 빙의 현상의 가장 저급한 형태였다. 게다가 마을의 총 인구와 거의 일치하는 수로 생각해 보건데 저 탑에서 기어 나왔을 벌레무리 같은 상급령들이 마을 사람들을 전부 죽이고 저급령들을 빙의시킨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상한데.”

 

  베이커드가 지적했다.

 

  “벌레무리라고 현세에 활동하기 위해선 육체를 취하는 법이라네. 그런데 저렇게 많은 재료들을 놔두고 저급한 것들을 빙의시키다니 이상하군. 그러고 보면 어제 상대한 놈들도 껍질을 쓰지 않았었는데. 이상하지 않나?”

 

  대답한 것은 루시엔이었다.

 

  “장막이 붕괴돼서 그래요.”창밖을 내다보며 루시엔은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저 장막이 엷은 정도였는데 이젠 완전히 붕괴됐어요. 저 항구마을은 이제 이계나 마찬가지에요. 장막 너머처럼 현세의 개념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거죠. 빨리 수습하지 않으면 더 큰 일이 일어날 거예요.”

 

  “어떤 일들이 벌어진다는 거지?”

 

  “경계가 파괴된 영역들이 확장되는 것이 시작일 거예요. 하지만 그 이상은 모르겠어요. 저, 어떡하죠?”

 

  식은땀을 흘리며 루시엔은 일행을 올려다 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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