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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환세동맹-사신의장1막

2011.02.19 12:01

사이네 조회 수:759

그것은 밤의 풍경, 빛이 자리를 내준 세계를 어둠이 채운 밤의 풍경. 하늘의 달빛도 별빛도 무색하게 만드는 형형색색의 네온사인과 가로등 불빛으로 축복 받은 도시의 야경은 하늘의 별 빛보다 많게 지상에 피어난다.

 

그렇게나 축복 받은 도시이건만 결국 자정에 이르러서의 인적은 드문드문 사라지고 넓은 도로를 헤드라이트 빛을 끌며 쏜 살처럼 달리는 자동차들과 북적거려야 할 통행로를 걷는 몇 명의 사람들로만 채워진다.

 

쓸쓸한 밤거리, 마치 주인을 잃어버린 물건처럼 덩그러니 남았다는 감상을 받을 수도 있지만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자정의 밤거리를 걷는 사람은 없다. 각자의 삶에 대한 관심 뿐...

 

그런 밤거리를 걷는 교복차림의 소녀가 한명... 동양인에게 흔한 길고 윤기 있는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색 눈동자. 비교적 흰 피부에 160cm 전후의 키. 이 지역에 사는 사람이라면 소녀가 입고 있는 교복이 [신련 고등학교]교복이라는 것을 알 테지만 모르는 사람이 본다고 해도 이상한 느낌을 받을 수가 없는 흔해빠진 디자인의 동복 차림.

 

학원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지 가벼운 걸음으로 인적 드문 인도를 걸어 나가는 소녀의 모습은 어찌보면 조금 위험하지 않은가하는 걱정도 든다. 그도 그럴 것이 여고생 혼자 밤길을 다니기에는 위험한 시간 때... 아무리 번화가라고 해도 인적이 드물기에 본래라면 학원에서 운영하는 셔틀을 이용했을 테지만 소녀의 집은 학원에서 걸어서 넉넉잡아도 15분 거리의 가까운 거리이기에 소녀는 언제나 산책 삼아 집까지 걷는 것을 즐겼고 오늘도 그런 참이었다.

 

겨울 방학이 끝나고 곧 있으면 잠시간 휴식인 봄방학이 된다. 그리고 이제 3학년 개학을 맞게 되는 시기의 소녀였지만 오히려 빨리 지긋지긋한 수능을 치르고 대학생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성적에 대해서는 아쉬울 게 없다는 이유도 있으리라. 만약 신련 고등학교 학생이라면 소녀의 이름만 들어도 [아. 전교 석차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애.]라는 건 알고 있을 정도고 무엇보다 1학년 2학년 내내 한 번도 성적으로 이겨보지 못 한 전교 1등인 학생에게 학원 모의시험이긴 해도 이틀 전 한 문제 차로 이겼다는 것도 요 몇 일 기분 좋은 이유였다.

 

모두 개학을 기피하지만 오히려 기다려졌다. 새 학기가 되면 1등이 될 수도 있다. 그 마음 때문에 너무나도 두근거렸다. 그런 마음을 품고 밤거리를 걷는다. 2월 초의 차가운 공기와 바람 덕에 오히려 선선해서 기분 좋다. 소녀는 그렇게 느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소녀는 무언가 위화감에 고개를 돌려 본다. 인적이 드문 인도, 넓은 차도를 달리는 자동차들... 어느 것 하나 평소와 다름없건만 왜 인지 모르게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한기. 그것은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2월의 공기 때문인 지... 아니면 다른 것 때문인 지 소녀는 판단할 수 없었다. 다만...

 

"기분 나빠..."

 

그렇게 감정을 입 밖에 내고 조금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돌아 본 뒤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그런데 왜 인지 모르게 자꾸 등 뒤에서 무언가 느껴진다. 그것은 시선. 마치 누군가 자신의 뒤에서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불쾌감. 그것은 한기, 마치 교복 블라우스 안에 얼음 조각이라도 넣은 게 아닐까 싶은 감각... 말로 잘 형용할 수 없지만 명백한 것은 불쾌하다는 그 느낌과 불길함.

 

다시한번 뒤를 돌아보았지만 역시나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소녀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그저 형형색색이 핀 꽃처럼 매달린 네온사인과 가로등 불빛 뿐... 그 어떤 인적도 없건만 왜 자꾸 누군가 뒤에서 바라보는 느낌이 드는 것일까?

 

기분 나쁜 불길한 기분에서 도망치 듯 빠른 걸음으로 걸어 도로 앞에서 멈춰 섰다. 4차선 도로를 가로 지르는 횡단보도 앞. 눈앞에서 막 파란불이 빨간불로 바뀌어 걸음을 멈추고 지나가는 차를 눈으로 쫓는다. 차량의 양이 적은 만큼 속도를 내며 달리는 자동차들 만약 저 차에 치인다면 무사하지 못 할 거라는 느낌에 느껴지던 한기가 더욱 강해진다. 하지만...

 

"과도한 생각이지."

 

소녀는 피식하고 미소 짓는다. 과한 생각일 뿐이다. 어차피 횡단보도만 지나면 집까지 달려서 3분도 걸리지 않는다. 이제 이 횡단보도만 지나면 집이다. 바로 코앞이다. 원인 모를 한기와 불쾌감도 시선도 이제 끝. 씻고 잠들고 다시 학교에 나가면 되는 일이다. 평소와 같은 일상이 반복된다.

 

소녀는 그런 생각에 안심이 되었다. 사실 무슨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니었다. 그저 오늘은 왜인지 민감해서, 괜한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실재로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것은 자신뿐이고 자신의 뒤에는 어떤 인적도 없다.

 

세상에서 무서운 것은 어차피 사람이다. [귀신]이니 [악령]이니 하는 것은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런 공상의 산물을 소녀는 믿지 않는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스윽...하고 사람의 그림자가 옆에 서는 것이 느껴졌다.

 

긴 검은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그냥 길고 윤기 나는 검은 머리카락이 아니다. 거의 바닥에 닿을 정도로 긴... 실재로 고개라도 숙인 다면 머리카락 끝이 바닥에 쓸 릴 정도로 긴 검은 머리카락을 지닌 사람이었다. 더군다나 그 검은 머리카락은... 가로등 불빛마저 삼켜버리는 무광택. 어둠 자체가 흘러내리는 게 아닐까 싶은 느낌이 드는 칠흑의 머리카락...

 

거기에 입고 있는 옷 또한 특이했다. 소매가 넓은 통원피스... 그나마도 역시 온통 새까만 옷. 소매와 치마 끝을 타고 자리 잡은 레이자락 역시 검정... 여성의 몸에 착 붙어서 그 라인이 들어나는 어찌 보면 다소 선정적인 디자인의 옷. 흰 부분이라고는 검은 머리카락과 옷 때문에 더욱 희게 빛나는 피부와 붉은 입술 뿐... 머리카락에 가려져 얼굴은 잘 보이지 않지만 느껴지는 감상만으로는 엄청난 미녀였다.

 

나이는 많이 잡아도 20대 중반이 되지 않을 정도. 그 검은 부분에서 느껴지는 불길함만 뺀다면 너무나 아름다운 여성, 오히려 그 검은 모습이 더욱 그녀의 매력을 받쳐 주는 지도 모를 일이다. 소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안녕하세요."

 

여성이 그렇게 먼저 입을 열었다. 흰 얼굴에 자리 잡은 붉은 입술이 움직이며 낸 목소리는 꽤 미성이라서 듣는 것만으로도 몸에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살짝 숙인 고개를 따라 사라라락, 거리며 춤을 추듯 흘러내리는 검은 머리카락 역시 왜 인지 아름답다고 소녀는 생각했다.

 

"네, 안녕하세요."

 

소녀 역시 그렇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받았다. 뒤에서 느껴지던 시선은 이제 없다. 왜 인지 모를 한기가 느껴지지만 그것은 아마 기온 탓일 거라고 치부해버리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런 늦은 밤에 고생이시네요."

"아뇨, 학원에서 이 시간까지 공부하는 건. 저만이 아니니까요."

 

소녀는 미소를 지은 체 옆에 선 여성의 말에 그렇게 답했다. 격려 받은 느낌이라 기분이 썩 나쁘지 않다. 오히려 기분이 좋다. 늦은 밤에 고생이라는 말이 왜 인지 기뻤다.

 

"그래도..."

 

그런 소녀의 말에 검은 여성은 말꼬리를 흘렸다. 무언가 딱하다는 듯... 안 됐다는 듯이... 그것은 늦은 시간까지 공부하느라 고생했다는 감상이 아니었다. 마치 그것은...

 

"이런 시간에 다니다간 큰 일 당할 텐데..."

 

무언가 전혀 다른 것을 걱정하는 기색이었기에 소녀는 살짝 긴장했다. 조금 전까지 느껴지던 오한... 아니 그건 오한 같은 게 아니라 무언가 다른... 등골을 타고 흐르는 전율. 긴장. 그리고 공포.

 

"제 이름은 [쉐더]입니다."

"쉐더...?"

 

갑작스럽게 이름을 밝힌 여성의 말에 소녀는 어찌 반응해야 할 지 몰랐다. 자신도 이름을 밝혀야하는 걸까?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선 듯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다만 입에서 나온 말은 반문 뿐...

 

"네, 쉐더. 그냥 이름이라도 알려주고 싶었어요. 그럼 저는 할 일이 있어서..."

 

그리고 여성... 쉐더는 조용히 소녀의 앞에서 등을 돌렸다. 소녀는 그런 쉐더의 행동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말을 걸고 자신의 이름을 밝히더니 자리를 떠나려고 하는 행동이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쉐더는 자리를 멀리 떠나지 않았다. 조용히 그저 조용히... 소녀의 등 뒤에 서서 소녀를 끌어안는다.

 

"무슨 짓을...?!"

"이게 제 할 일입니다."

놀란 물음에 돌아 온 대답은 여전히 기분 나쁠 정도로 평이 한 미성이 울리는 목소리 뿐...

 

"늦은 밤 다니는 건... 위험해요."

 

그리고 쉐더와 소녀는... 검은 아스팔트의 횡단보도로 뛰어 든다. 붉은 신호등 불이 켜진 횡단보도 앞... 자정이 넘은 시간에 고속으로 달리는 자동차들. 긴 도로를 따라 난 흰색 횡단보도로 튀어 나오는 것은 어째서인 지 [한 개의 인영(人影)]. 그리고....

 

끼이이이이이이익!!!!

 

날카로운 브레이크음이 도로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쾅!!하고 울리는 소음이 허공을 울린다. 그렇게 핀 것은 붉은 꽃... 검은 아스팔트 바닥에 사방팔방으로 만개하는 붉은 꽃... 흘러내린다. 그것은 피. 생명의 증거. 죽음의 그림자가... 검은 아스팔트에 스며든다.

 

-◇-

나른하다... 몸도 무겁고 머리도 무겁고 나른해 죽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컴퓨터 오른쪽 구석에 시선을 돌리니 시간은 5시 32분. 주변을 둘러봤지만 있는 것이라고는 교실처럼 넓은 공간에 줄줄이 늘어선 컴퓨터와 드문드문 보이는 사람들뿐이다.

[신련정보통신대학]이라는 컴퓨터 분야의 전문대학의 302호 강의실 지금 내가 있는 곳이다. 3분여 전까지만 해도 교단에 있던 교수는 이미 퇴실했고 그를 따라 학생들도 썰물 빠지듯 빠져 나가고 나면 남는 것이라고는 주인 없는 컴퓨터와 아직 남아서 무언가 하고 있는 학생 몇 명 뿐.

 

오늘 날짜는 3월 2일. 고등학교 때라면 야자를 했을 테고 중학교 때라면 개학식이라고 단축수업을 한다던가하는 특전이 있지만 대학교는 그런 것이 없다. 아침 9시 30분부터 지금까지 강의를 듣고 났더니 늘어진다. 개강 첫날부터 너무 빡빡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누군가 내 자리로 다가와 멋대로 내 책상위로 쓰윽하고 앉는다. 고개를 들고 올려다보니 정말 싫은 녀석이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든다.

 

"Hi."

"꺼져 양키야."

 

그것이 내 입에서 나온 첫말이다. 상대를 다시 찬찬히 바라보았다. 귀 밑으로 흘러내리는 붉은 머리카락, 형광등 빛 같은 싸구려 빛을 반사하는데도 마치 보석 같다는 착각이 들게 만드는 루비 같은 한 쌍의 붉은 눈동자. 작은 얼굴에 정말 흰 피부. 전체적으로 호리호리한 체구에 몸에 딱 맞는 검붉은색 슈트차림의 미남자다.

 

"인종차별은 좋지 못 해."

"어쨌든, 나에게 또 무슨 볼일이야?"

"경계하지 말라구 시유. 별로 잡아먹는 것도 아니잖아?"

 

친근하게 내 이름을 부른다. [시유]라고, 뭐 같은 과에 있는 친구라는 건 인정하겠지만 이 녀석 묘하게 싫다. 외국인이라 싫다거나 하는 게 아니다. 일단 잘 생기고 돈도 많고 잘났다. 어딘가 엄마친구 아들 같은 녀석이다. 단순한 질투라고 우습게보지 말아줬으면 한다. 일단 옆에 있으면 비교 되고 돈 씀씀이에서 차이를 느껴보면 한숨마저 나온다. 더군다나 매일 노는 것 같은 주제에 성적도 좋다. 여러 가지 의미로 기분 나쁘다.

 

그 뿐만 아니라 인기도 많고... 한 달에 한번 씩 여자 친구를 바꾸는 괴이한 취미를 가진 녀석이라는 점이 더욱 싫다. 2학년이 된 지금와서 말이지만 이미 같은 학번이나 그 위의 선배들을 여럿 사귄 전적이 있다.

 

그리고... 이 녀석 성별이 미묘하다. 일단 남자라는 건 맞는 것 같은데 너무 곱상하게 생긴 외모다. 여장 시키면 100%여자라고 믿어버릴 정도로. 선이 가늘고 호리호리한 것도 한 것이다. 그게 제일 싫은 점이겠지. 거기다 목소리도 미묘해서 남자 목소리인 지 여자 목소리 인지 자 구별이 안 된다.

 

"어쨌든."

 

나는 컴퓨터의 전원을 끄며 녀석을 바라보았다.

 

"무슨 용무야 카르?"

 

카르라고 그 녀석의 이름을 부른다. 풀네임은 아마... [카르네스트 피아 뮤젤]인가 뭔가 하는 이상한 이름이지만 카르네스트라는 이름은 길고 해서 부르는 별칭. 뭐, 결국 싫다 어쩠다 하지만 친구인 거다.

 

"이런 장소 말고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게 어때? 방학 중에 관리가 잘 안 됐는지 먼지 냄새 나는 것 같지 않아?"

"먼지에서 냄새도 나냐?"

 

오른손을 얼굴에 대고 휘휘 흔들며 말하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뭐랄까 잘 사는 놈이라 이러는 건가?라는 의문과 함께 왜 인지 짜증이 난다.

 

"세심하지 못 하네, 그러니까 인기가 없는 거야 시유."

"시끄러워."

"일어서 얼른, 학교 근처에 뭐 그냥저냥 나쁘지 않은 카페가 있으니까 거기로 가지."

"싫다면?"

"우리 집은 어때?"

 

붉은 입술을 움직여 미소 짓는다. 이 녀석의 집... 분명 건물만 100평이 넘는 2층짜리 주택. 부지까지 하면 약 180인가 200평 쯤 될 것 같은 흔한 말로 저택. 뭐랄까 사회적 격차가 느껴지는 것 같아서 더욱 싫다. 아버지가 뭐하는 분인 지 모르겠지만 일단 그런 집에 사는 건 확실하니 아마 외국에서 사업이나 하는 분일까? 그런 놈의 아들이 왜 한국에서 이러고 사는 지... 어쨌든 그 집은 가기 싫으니 순순히 따르기로 할까..

 

"알았어, 따라갈게."

"좋아 얼른 따라 와 줘. 나도 급한 몸이니까."

 

라며 책상에서 내려와 걷기 시작한다. 그 몸가짐에 빈틈도 없고 단정하다. 친구니까 무조건 싫어한다는 것도 그렇고 자신의 도량 작음이 탈로 나는 것 같아서 한숨이 나왔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카르의 뒤를 따르는 것뿐이다. 복도를 지나는 동안 몇몇 신입생 여자애들이 인사해 온다. 물론 대상은 내가 아니라 카르다.

"귀엽지? 올해 신입생들."

"너 디자인과의 여자애랑 사귄다며?"

"아, 그 애는 이미 해어졌어."

"....."

 

이래서 이놈이 싫다. 나도 모르게 미간이 좁아진다. 흔히 말하는 인상을 쓰게 된다.

 

"너무 그렇게 인상 쓰지마. 서로 안 맞으면 일찍 해어지는 게 좋은 거잖아?"

"넌 너무 인간관계가 가벼워."

"뭐어, 그럴 지도 모르지."

 

살짝 쓰게 웃는 것을 끝으로 매력적인 미소를 만들어 보이며 후배들의 인사를 받는다. 뭐, 경박한 것뿐이라면 이런 녀석과 친구 같은 것을 하는 것은 진작에 그만 뒀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카르의 뒤를 따랐다.

 

-◇-

카르와 함께 간 곳은 학교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의 커피숍. 학생들도 가끔 이용하는 편이지만 흔한 브랜드 커피와 다른 그것보다 더욱 고급스런 느낌이 드는 가계다. 어찌보면 패밀리 레스토랑 같은 인테리어인 주제에 정말 차 종류 아니면 팔지 않는다. 고작해야 케이크정도나 팔까?

 

카르와 가끔 찾아오는 곳으로 단가가 비싸서인 지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인 지 그것도 아니면 조금 어두침침한 조명과 흐르는 클래식이 싫은 건지 손님은 드문드문 있을 뿐이다.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자 주문을 받으러 온 여성 종업원에서 가볍게 카페오레를 주문한다. 내 주문이 끝나길 기다렸다는 듯 카르는.

 

"파르페랑 핫초코로."

 

라고 웃는 얼굴로 주문을 더한다. 한숨이 나온다. 뭐랄까 이 녀석의 독특한 점은 단 것 마니아란 점이다, 그것도 꽤나 악질적인이랄까... 일단은 남자잖아 너, 보통 그런 거 찾지 않잖아?라는 생각도 여러 번 해왔지만 개인 기호에 뭐라고 할 생각은 없으니 입 밖으로 내지 않는다. 하지만 카르는 내가 주문한 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또 카페오레야? 파르페 어때?"

"또 파르페냐? 카페오레 어때?"

".........."

".........."

 

잠시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둘 다 입을 다문다. 침묵. 뭔가 이 녀석은 나에게도 단 것을 전파하려고 한다. 난 싫다고 단 것.

 

"뭐, 좋아 개인 취향이니 존중해 주지."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관자놀이를 검지로 꾹꾹 누르며 한숨을 쉰다. 보통 다 큰 성인 남자가 파르페 떠먹는 게 더 이상하잖아 임마!

 

"그래, 개강 첫날부터 왜 날 불렀어? 아침에도 인사했고 점심도 같이 먹었잖아?"

 

결국 여기에 불려 온 이유를 듣는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남자가 단 거 좋아하는 게 이상하다고 했더니 남여평등시대다!라던가, 편협한 시각을 가진 놈! 이라거나 어째서인 지 단맛의 숭고함을 모르는 야만인!이란 소리도 예전에 들었기 때문에 괜한 소리하고 싶지도 않았다.

 

"흐음, 그보다 질문인데. 너 눈 아직 [정상]이지?"

 

라는 물음이 돌아왔다. 하아? 눈이 정상이냐고? 한숨나오네. 할 수 있다면 한숨으로 땅이 꺼지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깊은 한숨을 쉬어보이고 싶다. 갑자기 개강 첫날부터 불러놓고 한다는 이야기가 왜 하필 그 이야기인 지 따져 묻고 싶지만.

 

"말은 똑바로 해 줘. [비정상]이라고."

 

나와 이 녀석이 친구인 이유 중 어쩌면 가장 큰 이유가 있다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어떤 [특수성]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무슨 소리야. 난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 눈으로 잘만 살아왔다고."

"난 적어도 근 10년은 멀쩡히 살아왔단 말이야."

"하지만 보이잖아...?"

 

붉은 입술을 조각달처럼 일그러트리며 카르는 웃는다.

 

"귀신이..."

 

라고 키득키득거리며 경박하게 웃는 것은 아니다. 살짝 일그러진 입술로 입가에 걸친 조소로 웃는다. 하지만 왜 인지 귓가에 키득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귀신이 보인다... 그렇다 나와 이 녀석의 특수한 성질 그것은 의식하려고 하면 일반인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영혼이라거나 혼백이라거나... 흔히들 귀신이라고 하는 것이 보이는 것이다.

 

나와 카르는 그런 능력을 가졌다. 그 사실을 알 게 된 것은 신입생 환영회 때. 술을 먹고 나도 모르게 귀신을 보고 떠드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술에 취해 저런다고 웃어넘길 때... 그 때 카르가 다가와서 속삭이던 말이 떠오른다.

 

[너도... 저게 보이는구나?]라는 말 한 마디. 등골을 타고 차가운 칼날이 흐르는 기분을 느꼈던 것이다. 아니 그런 게 아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각과 소름이 돋았던 그 날이 갑자기 떠오른다. 나는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그래, 보려고 하면 보여. 그게 왜 뭐 어쨌는데?"

 

짜증이 나서 인상을 구기며 그렇게 말을 꺼내는데 종업원이 다가와 주문한 것을 내려놓는다. 카페오레, 그리고 커다란 유리잔에 든 파르페와 핫초코. 카르는 종업원이 돌아가자 눈을 빛내며 숟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단 것 마니아가 아니라 저럴 때 보면 중독자다.

 

그렇게 몇 분이고 대화를 끊고 숟가락으로 파르페를 다 퍼먹고 나서야 식기 시작한 핫초코를 쭈욱 들이키고 밝게 웃으며 잔을 내려놓는다.

 

"흐음, 맛있었다."

"단 거 먹고 또 단 거 먹으면 맛이 안 느껴지지 않냐?"

"너처럼 둔한 미각이 아니니까."

"...싸우고 싶냐?"

"야만적이기도 하지."

"하아..."

 

한숨을 쉰다. 뭐, 싸움은 좋아하지도 않고 이 녀석을 잘 못 때리면 손해배상이 더 무섭다. 아니 학교의 여학생들 사이에서 매장 당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카페오레를 한 모금 하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내 눈 상태는 왜 물어? 어차피 안과가서 나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당연히 그대로야."

 

라고 손사래를 치고 나자 카르는 손으로 깍지를 끼고 턱을 괴며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본다. 무언가 있나 싶어 돌아 봤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뭐 보냐?"

"저 쪽에 빈 테이블에 귀신. 꽤 섹시한데. 비키니 입고 있어."

"...뭐?"

"너도 보라고, 언제 없어질지 모르잖아?"

 

나도 모르게 눈을 살짝 감았다가 뜬다. 세상이 살짝 일그러진다. 그리고... 보인다. 보통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그런 세계의 풍경... 무채색의 공간 마치 흑백 TV같은 공간을 떠도는 안개 같은 혼들... 그리고... 보인다. 카르가 가르 킨 테이블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 귀신이 인자하게 손을 흔들고 계시다. 에? 할아버지? 나도 모르게 표정이 찌그러지자 그것을 보던 카르는.

 

"풉!"

"........."

 

비웃는다. 분명이 비웃었다. 얼른 눈을 감았다 뜨며 시야를 바로 잡자 다시 색이 돌아 온 세계. 테이블 너머에 앉은 카르녀석은 크크큭... 하며 웃음을 삼키고 있다.

 

"...너 오늘하고 싶은 말이 뭐야?"

"아니, 그.. 크크... 그냥 푸웁... 아, 웃겨."

 

테이블에 머리를 묻고 탁탁두드리며 웃는다. 얄미워 죽여버리고 싶다.

 

"...간다."

"아, 잠.. 크큭. 잠깐만 기다리라니..까..."

 

웃음을 참으며 심호흡하고 호흡을 가다듬기 까지 약 3분. 그리고 종업원에게 냉수를 주문하고 마시기까지 또 3분. 총 6분이 지나서야 웃음을 그친 녀석은 다시 깍지를 껴 보인다.

 

"확실히 그 눈 정상이군."

"...이렇게 확인해야겠냐?"

"남자에겐 잘 통하지?"

 

피식 웃어 보이는 카르를 보며 정말 한 대 때려버리고 싶다. 나중에 밤길에 뒤에서 후려칠까?라는 생각도 잠깐 든다.

 

"그래서 뭐야 내 눈 상태는 왜 묻는데?"

"놀려먹기 좋잖아?""집에 간다."

"농담이야, 좀 진지한 이야기라 분위기 좀 바꿨어."

 

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이야기를 꺼내려한다. 뭘 분위기를 바꿔봐. 평소에 매일 그러잖아? 날 가지고 놀잖아? 하지만 정말 무언가 이야기 하려는 지 분위기가 제법 무거워서 입을 다물고 있기로 한다.

 

"다름이 아니라, 너 방학 중에 집에 가있었지?"

"어, 여기서 할 일도 없으니까 그건 왜?"

"네게 중요한 알릴 거리가 있으니까."

 

라는 말을 하며 카르녀석은 가방을 뒤적여 검정색 파일을 꺼내보였다. 내용물은 신문기사를 모아 놓은 스크랩. 처음에는 신문지상의 작은 지면을 오려 놓은 것이었는데 장수를 넘길 수록 신문지면 공간이 늘어나고 커져만 간다. 10여 페이지 20쪽 정도 되는 스크랩을 다 넘기고 나서 파일을 덮었다.

 

"자살...?"

"그래, 2주 동안에 10건, 이 학교가 있는 신련국제시의 중앙구에서만 일어나는 자살사고지."

 

스크랩 내용을 요약하면 그렇다. 처음 시작은 고등학교 2학년 여학생이 심야 차도에 뛰어들어서 자살했다는 내용이다. 그것만으로는 그렇게 특이하지 않다. 그런데 문제는 그로부터 이틀 뒤 심야에 또 자살사고가 있었다. 역시나 차에 뛰어든 사건이었고 사망자는 30대 회사원. 그로부터 매일 같이 아니면 하루 걸러서 근 2주간 10명의 사람이 차에 뛰어 들어 자살했다. 그것도 유독 이 시의 중앙구에서만...

 

"이상하지?"

"이걸 왜 알려주는데."

"자살하지 말라고, 친구니까 죽으면 슬퍼."

"자살할 것 같아 보이냐?"

"아니 전혀. 하지만 너도 그 파일 봤으면 알 텐데?"

 

카르는 여전히 깍지를 낀 체로 턱을 괴고 말한다. 그렇다. 이상한 점이 있는 것이다. 어째서인 지 모두 자살할 동기가 도무지 없다. 뭐 9명 째 남자 회사원에게 대출금이 있었다거나 10번 째 자살한 여성이 직장을 옮긴 지 얼마 안 됐다거나 하는 매우 간접적인 자살동기가 있을 수 있지만 갖다 붙이는 것 같아서 석연치 않다.

 

"...동기가 애매하군."

"그렇지? 덤으로 그게 다가 아니라 연관성도 없어. 연속 자살사건 같은 건 있을 수 있지 자살카페라거나 어떤 종교적 이유라거나... 하지만 지금까지 죽은 10명 모두 생판 남이야. 공통점이라곤 중앙구에 직장이 있거나 중앙구에 산다는 것뿐이지."

"그걸 왜 내게 말하는데?"

"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거든..."

 

카르의 붉은 눈동자가 지긋이 나를 바라본다. 마치 빨려 들 것 같은 그런 붉은 눈으로 나를 보며 입을 연다.

 

"이것은 자살이 아니다. 귀신의 짓이다."

 

무언가 선언 하 듯 힘입게 말한다.

 

"본거냐? 귀신을...?""난 밤에는 할 일 많다고, 여자도 꼬셔야하고 피부 관리도 해야 하고 머리카락도 손봐야하고."

 

...이 녀석에게 어떤 반응을 기대한 거지? 스스로에게 자문하며 한숨을 쉰다. 뭔가 스스로가 한심해졌다. 이 이상 파고들어봤자 나만 피곤하니 화재를 바로 잡자.

 

"그런 말 누구에게 들은 건데? 귀신의 짓이라는 말은."

"뭐, 흔해빠진 도시 괴담 아니겠어? 이런 괴이한 현상이 발생하면 인간은 과학적이나 논리적인 말보다 이런 쪽을 더 신빙성 있게 보나 봐 재미있어."

 

키득키득 웃는다. 전혀 진지한 구석이 없다. 10명이라는 사람의 죽음을 내게 알려 놓고서 너무 가볍다.

 

"...농담은 그만두고 내게 이걸 알려주는 진짜 이유는 뭐야."

"뭐, 별 건 아냐. 말했다시피 네가 죽는 걸 원치 않아. 친구니까. 밤길 나다니다가 사고 날 지 모른다는 충고 그리고..."

 

말하지마. 왠지 모르게 분위기가 무거워 진다. 속으로 그 이상 말 하지마라고 그렇게 되풀이 해본다. 하지만 그 이상 말릴 수 없었다. 속에서 맴돌던 말을 꺼내기 전에 카르는 말했다.

 

"어쩌면 정말 귀신의 짓일 지도 몰라."

 

사뭇 진지하게. 장난치는 기색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이럴 때 카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근거는...?"

"뭐, 나도 정확치는 않아. 단지 귀신 짓이라는 괴담에 이런 이야기가 더 있거든. 차도로 뛰어든 사람은 언제나 둘이다. 하지만 시체는 오로지 한명. 그리고... 피해자는 모두 달라도 차도로 뛰어든 두 명의 사람 중 한명의 인상은 거의 통일성 있어."

"뭐...?"

"그러니까 괴담은 소문이야 지어내는 이야기고 사람들의 입을 타면서 변질 되지 그런데 이상하게 유독 귀신에 대해서는 변하지 않은 일관성을 보고 있어. 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여성이라고 말이야..."

 

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지닌 여성. 그것이 소문에서 일치하는 귀신의 인상, 하지만... 그런 귀신이라면 많잖아? 당장 우리나라 괴담만 봐도 흰 소복에 검은 머리카락을 풀어 헤친 처녀 귀신이라거나...

 

"그런 귀신은 많지 않아?"

"고작 2주 된 사건에 1주일도 안 된 괴담이야 오랜 민간전승만큼 일치화 된 귀신 인상이 나온다는 게 이상하지 않아? 누군가 의도적으로 정보를 조작하는 게 아니라면 말이 안 돼지."

"누가 조작한다는 거냐...?"

"그걸 모르니까, 하지만 조작을 한다면 이유는 무엇일까? 이 사건을 괴담치부하며 묻혀버리길 원하는... 그런 [존재]가 있는 게 아닐까...하고 생각지 않아?"

 

역시 진지한 말... 카르의 말에 묘하게 수긍이 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인터넷이 발달한 사회다 소문은 옛날 민간전승 따위는 우습게 여길 정도로 퍼져나간다. 당연히 획일화 되고 일치화 될 수 있다.

 

"뭐, 물론 단순 소문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거 없잖아. 우리 같은 사람... [놈들]은 좋아하니까."

 

낮게 깔린 목소리로 카르는 말한다. 우리 같은 사람을 놈들이 좋아한다고... 갑자기 한기가 든다. 물론 3월이라 춥기는 하다 하지만 난방이 되고 있는 커피숍에서 한기를 느낄 수 있을까? 이것은 한기가 아니다. 이것은... [공포] 내면 깊숙한 곳에서 가지고 있는 공포다. 등골을 타고 서늘한 것이 흐르는 기분 나쁜 감각이 든다.

 

어렸을 적 기억이 조금 떠오른다. 날 죽이려 했던 괴물의 모습이 조금씩 떠오른다.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흔든다. 하지만 뇌리에서 떠오르기 시작한 모습은 좀처럼 떨어지려하지 않는다.

 

시커먼... 시커먼 괴물... 날 죽이고 먹겠다고 하던 괴물의 모습... 그것이 계속해서 떠오르며 목을 죄는 것 같다. 그 어두운 숲에서, 있을 리 없는 모습으로 나를 쫓으며 광기에 젖어 울부짖으며 나를 먹겠다고 하는 괴물이... 숨이 막힌다. 공기가 없는 것도 아닌데... 식은땀이 흐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짝!

 

갑자기 울린 소리 정신을 차려보니 왼쪽 뺨이 얼얼하다. 눈앞에는 손바닥을 펼친 모습을 하고 테이블에서 몸을 내밀고 있는 카르의 모습이 들어온다.

 

"정신 차려, 멋대로 정신 놓지마."

"아, 응... 미안."

"또 옛날 일 떠올랐나보군. 미안, 단지 조심하라고만 하면 될 일이었을 텐데."

"아...응, 아냐... 응. 조심할 게."

 

아직도 조금 혼란스럽다. 나는... 누구지? 한시유. 나이는... 스물하나, 그 때의 여덟 살짜리 꼬마가 아니다. 그렇다 그 괴물과 만난 것은 이미 10년 넘게 흐른 일이고 그 뒤로 그런 괴물을 만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렇다. 없는 것이다.

 

"어쨌든 용건은 밤길 조심하라는 거야. 조만간 해결 될 거라고 생각하지만."

"해결 돼. [자살사고]가 해결 된다는 거야? 무슨 [사건]도 아닌데..."

"응? 아, 아니 뭐 대단한 뜻이 아니고 자살사고니까 이젠 뜸해질 거다 그런 말이지. 신경쓰지마."

 

카르는 왠일로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든다. 뭐. 그렇다 괴담 따위는 상관없다. 금방 없어질 거다. 그리고 귀신이 자살을 위장해서 사람을 죽인다니 웃기지도 않는다. 진짜 괴물은 그런 짓 따위 하지 않는다. 산 사람을 죽이고... 먹을 것이다...

 

"이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난 데이트가 있어서 먼저 나갈 게 계산은 해 둘 테니까 좀 쉬다 가라고, 밤늦게 다니지 말고 바이~"

 

갑자기 무엇이 급한 지 카르는 그렇게 손을 흔들고 자리에 일어나서는 서둘러 나가버렸다. 마치 무언가 숨기듯이 자리를 피했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과민한 걸까? 그래, 아무래도 날카로워진 모양이다. 저 녀석이 여자만나고 다니는 거 어제 오늘 일인가? 별로 대수롭지도 않은 일이다.

 

-◇-

정신을 차려보니 터벅터벅 밤거리를 걷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시계를 본 게 7시 경이었는데 지금은 몇 시일까? 괜히 시간 확인하기도 귀찮아서 그만두었다. 지금이 몇 시든 상관없다 어차피 심야는 아니니까 괴담의 희생자가 될 일은 없다. 아니지, 그건 자살사고고 난 자살할 마음이 없으니까 지금이 언제든 상관없는 것이다.

 

하늘 높은지 모르고 쌓아올린 빌딩이 넘치는 번화가 거리. 그러나 그래 봤자 하늘에 닿을 리 없는 건물들... 잠시 인도 안쪽의 난간에 앉아 숨을 골랐다. 얼마나 걸어 다닌 건지 모르겠지만 한 시간은 넘게 걸어 다닌 것 같다. 카르에게는 밤거리는 조심하겠다고 해 놓고 뭘 하고 있는 건 지 나도... 스스로에게 한숨이 나온다.

 

다행이라면 3월의 차가운 공기 덕에 그다지 땀도 나지 않은 것 정도일까? 여름이라면 이미 끈적끈적 땀이 옷에 늘러 붙고 있었을 것이다.

 

숨을 고르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교복차람의 학생들 중년 남성 젊은 여자 젊은 남자. 엄마와 아이, 연인... 많은 사람이 오가는 인도 그리고 내 앞으로 뻗어 난 흰색 차들이 밟고 다니는 흰색선... 횡단보도, 근 2주간에 10명의 사람들은 모두 횡단보도에서 투신했다고 한다.

 

그리고 심야를 달리는 빠른 차에 치여 그대로 즉사. 대체 그 사람들은 왜 자살을 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알 수 없다. 돈 때문일 지 인간관계 때문 인 지. 달리 본인만의 큰 고민이나 이유가 있기 때문인 지 사소한 아픔 때문 인 지... 나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다.

 

빨간 신호가 초록색으로 바뀌고 사람이 건너고 다시 빨간 색으로 바뀌고 차들이 달린다. 일상의 풍경. 그러나 이 일상 아래서 자살한 사람이 10명. 역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죽으려면 어딘가에서 조용히 죽는 게 좋지 않을까? 높은데서 뛰어내리는 자살은 자신의 죽음을 알리고 싶기 때문이라지만 횡단보도에 뛰어든 자살은 어떤 것일까? 역시 자신의 자살을 알리고 싶은 것일까? 그 역시 나로서는 알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왜 인지 눈이 따끔 거린다. 이따금 느껴지는 아픔. 고통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따끔 거리는 눈. 병원에도 가봤지만 지극히 정상이라는 내 눈동자. 하지만...

 

나는 천천히 눈을 감고 그리고. 다시 뜬다. 세계가 일그러진다. 그리고... 나를 맞이하는 회색 빛깔 세계. 모든 사물은 그대로 통행하는 사람들도 그대로 하지만 오로지 색깔만 빠져 나가서 회색으로 물든 세계에 안개처럼 흩어져 흐르는 새하얀 것들... 그것은 안개가 아닌 아마도 혼...

 

그리고... 회색 빛깔 사람들 사이를 태연자약 섞여 걷는 색이 입혀 진 사람들... 그들은... 존재할 리 없고 보이지 않는 유령. 지금 내 앞을 지나간 사람도 다른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통과해서 어딘가로 걸어갔다.

 

그는 어디로 향한 건지 모른다. 다만 이 눈을 뜰 때면 보이는 자들. 말을 걸어 볼까하고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무서워서 도저히 말을 걸 수 없다.

 

지금도 못 본척하고 있을 뿐. 만약 내가 저들이 보인다고 말을 걸면 어떻게 될까? 무서운 상상이다. 어렸을 적 만난 괴물이 떠오른다. 나를 먹이라고 쫓던... 새까만 괴물이. 그렇게 멍하니 횡단보도를 바라보고 있을 때...

 

나는 무언가 이상한 것을 보고 말았다. 있을 리 없는 것을 보고 말았다. 괴물과 함께... 어렸을 적의 기억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말도 안 돼. 어째서 그녀가 여기 있지? 나는 놀라서 자리에 일어서서 그녀를 바라본다.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며 날개처럼 펄럭인다. 입고 있는 옷은 수의와 같은 때타지 않은 새하얀 셔츠와 바지.

 

거기에 팔에 두른 검은색 스톨과 그 끝자락을 흐르는 붉은 색 문양은 마치 피라도 흘러 내리는 듯한 착각일 준다. 허리에 치마처럼 두른 검은색 천에도 팔에 두른 스톨처럼 붉은색으로 흘러내리는 듯한 문양이 끝자락을 따라 나있다.

 

그리고... 붉은색... 잊을 수 없는 붉은색. 마치 최고급 유리잔에 피를 채워 넣은 것처럼 진홍으로 물든 오른쪽 눈동자... 그리고 조금 색이 탁하지만 지적으로 빛나는 잿빛눈동자가 쌍을 이루는 오드아이. 잊을 수 없다, 잊을 리 없다. 어렸을 적... 나를 괴물로부터 구해 준 소녀다. 아니 이미 지금의 모습은 소녀가 아니다. 나이는 10대 후반 정도로 자란 소녀다.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지?!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옮긴다. 그녀 이외에는 아무것도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 날 밤... 나를 구해주고 사라진 소녀. 찾아보려 했지만 찾을 수 없었던 소녀가... 왜 이런 시기에 내 앞에 갑자기 나타난 거지?

 

그 때 갑자기 카르의 말이 떠오른다. 괴담의 귀신은... 검은 머리카락의 여성이라고... 검은 머리카락의 여성. 지금 횡단보도 저편에 서있는 옛날에 나를 구했던 소녀와 같은 검은 머리카락. 아니다. 그녀는 범인이 아니다. 왜인 지 확신할 수 있다. 하지만...

 

어렴풋이 생각했다. 날 구했던 그 소녀 역시 사람일 리 없다고. 귀신일 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찾을 수 없었다고... 하지만 그 소녀는 저렇게 성장해서 나타났다. 귀신이 자랄 리 없다. 그녀는 귀신같은 게 아니다. 하지만... 어째서 이 회색의 세계에서 저렇게 선명하게 빛을 띠는 걸까? 이 회색 세계에서 색을 잃지 않는 것은 오로지... 귀신뿐이다.

 

무서웠다. 갑자기 그녀가 무서워졌다. 그녀는 귀신인 걸까? 검은 머리의 귀신, 요 몇일 자살사고를 일으키고 있는 검은 머리카락의 귀신인 걸까? 도망칠까? 아니, 안 된다, 사라지기 전에 붙잡아야한다. 이번에 놓치면 영영 못 만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서둘러야 돼.

 

그렇게 한걸음 더 내 딛으려고 했을 때 갑자기 누군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돌아보니 나이를 지긋이 드신 듯이 얼굴에 주름이 그득한 노인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 푸른색이 도는 옥빛 두루마기를 입은 한복차림의 노인.

 

"아직 건너면 안 돼네 젊은이..."

 

그렇게 말씀하시며 지팡이를 뻗어 건너편 신호등을 가르켜 보이신다. 아마도 빨간색이겠지. 어렴풋이 이해하고 멈췄지만 시선을 결코 소녀에게서 떼지 않았다. 놓칠 수 없다. 10여년을 넘어서 만난 것이다. 아직 묻고 싶은 것도 많고 제대로 감사 인사도 하고 싶다... 그러나 그 때 느껴지는 것은 어째서인 지 갈증. 왜 인지 목이 탔다. 어째서인지 저 소녀가 무섭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생명의 은인이다. 어렸을 적 괴물에게 살해당할 뻔 한 나를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다. 그런데. 갑자기 왜 이렇게 한기가 드는 걸까? 왜?

 

그리고 시간이 흐른다. 얼마 안 돼는 시간인지 아니면 수 십 시간 인지 명확하게는 모르겠다. 고작 신호가 바뀔 짧은 시간이지만 시간감각을 잃었다. 다만... 주변 사람들이 하나 둘씩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했고 건너편의 소녀 역시 천천히 걸어온다.

 

이제야 만난다는... 생명의 은인과 만난다는 반가움이나 기쁨 같은 것은 없다. 내 마을을 사로잡는 것은 오로지 공포. 갑자기 뒤로 돌아서 도망치고 싶다는 공포심이 점점 커진다.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식은땀이 흐른다.

 

그렇다, 도망치고 싶다. 왜 인지 저 소녀에게 느껴지는 것은 한없는 한기. 그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이 눈은 또 보고 말았다. 소녀의 키를 훌쩍 넘는 커다란 검은 낫이 어느 세 소녀의 손에 들려있는 것을... 저것을 본 적 있다. 그 어린 날... 날 죽이려고 했던 괴물을 산산이 가른 이형 흉기.

 

어째서 그것을 갑자기 꺼낸 거지? 아니 다른 사람들은 저것이 안 보이는 걸까? 저런 무식한 낫을 들고 있는데 주변 사람들은 그 어떤 동요도 없다 마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이... 그리고 이해했다. 저 소녀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에... 하지만... 그래도 만나야한다.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과 다르게 다리는 움직이지 않고 오로지 그녀만이 한걸음... 한걸음 다가온다.

 

나를 못 알아보는 것인 지 아니면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지 사뿐사뿐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가온다. 다가오면서 팔을 치켜든다. 그에 따라 소녀의 손에 들린 흉기 역시 밤하늘로 올라간다.

 

멈춰, 하지마. 안 돼! 뭘 할 셈이야!!라고... 외치며 제지하고 싶었다. 그러나 외칠 수 없었다. 목이 바짝 말라서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다가오며 낫을 치켜든 그녀를 눈으로 쫓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다가온다. 그것도 나를 향해서...

 

어째서? 어째서 그 낫을 들고 나에게 오는 거지? 기다려 봐. 난 괴물이 아니야! 네가 구한 사람이라고!

 

닿을 리 없는 소리로 속에서 소리친다. 그리고... 소녀는 내 앞에 섰다. 거리는 불과 1m 정도... 소녀는... 그 붉은 입술을 움직여 웃는다. 미소 짓는다. 무언가 재미있는 것을 찾았다는 듯한 얼굴. 아니, 그것은 그런 얼굴이 아니다. 왜 인지 조소라고 느껴졌다. 비웃음이라고 느껴졌다. 압도적인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자가 미천한 아랫것을 보는 눈이 아닐까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자극적인 미소다. 도망치자... 도망치자... 도망치자...

 

도망쳐!! 머리 속에 시끄럽게 울린다. 마치 누군가 머리에 대고 소리치는 것 같다. 나도 모르게 뒷걸음 질 친다. 생명의 은인이었던 소녀가 바로 앞에 있는데!

그리고 내 앞으로... 좀 전에 나를 제지한 노인이 천천히 걸어간다. 그리고 그 앞에는 그 검은 이형 흉기를 치켜든 소녀가 있다. 아아... 가지마요! 가면 안돼요! 가면 죽어요!! 외치고 싶었다. 외쳐야 했다.

 

내 앞을 느릿느릿 걷는 노인의 발걸음이 마치 사형장으로 걸어가는 사형수 같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저 소녀가 노리는 것은 내가 아닌 것이었을까?

 

"멈춰요!!"

 

그리고 겨우 입을 떼고 외쳤다. 입을 떼고 외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치 그 외침을... 그 한마디가 신호라는 듯이 소녀의 낫이 떨어져 내린다. 정확하게. 한치의 오차도 없이.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노인의 목으로 떨어져 내린다.

 

끼이이이이익!!!

꽝!!!!

 

그리고 눈앞의 노인의 모습은 사라졌다. 없어져버렸다. 무슨 애니메이션처럼 노인의 몸은 수 미터를 날아 바닥에 곤두박질쳐진다. 무언가 퍽!하고 터지는 소리가 난다. 마치 수박이라도 쪼개진 소리. 하지만... 그런 게 아마 아니겠지...

 

노인의 몸 주변이... 새빨갛게 물든다... 피... 노인은 자신이 흘린 피의 웅덩이에 처박힌 체로 아무런 움직임도 없다.

 

"꺄아아아!!"

"히익!"

"사...사람이..."

 

갑자기 멈췄던 시계가 돌기 시작한 것처럼 주변에 사람들의 비명이 울려 퍼진다. 시끄럽다. 시끄럽다고!! 머리가 지끈지끈 거린다. 이렇게 사람이 치였으면 구급차로도 부르란 말이야!!

 

그런 와중에 몇몇 사람은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는 것 같다. 하아? 사람이 치였는데 사직을 찍는다고? 제정신이야? 그 핸드폰으로 구급차를 불러야 맞는 거 아니야? 제정신이 아니야... 그 와중에 못 본 척 길을 건너는 사람들도 눈에 들어온다, 나서서 뭔가 하려는 사람이 없다. 당황한 운전자만이 뛰어나와 전화를 건다. 하지만... 아마 저 노인은 죽었을 것이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 소녀의 낫에 목이...

 

그 즈음 생각이 미치자 주변을 둘러본다. 있다. 그 소녀가 있다. 노인 주변을 빙 둘러선 인파 사이로 유유히 사라져 가는 모습이 보인다. 어째서... 어째서 이 노인에게 낫을 휘두른 거지? 네가 죽인 거지?!라는 생각이 든다. 분명 어렸을 때... 날 살렸으면서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나도 모르게 인파 사이를 뚫고 나는 소녀를 따라 걸었다. 소녀의 발걸음은 조금씩 빨라진다. 놓칠 수 없다. 따라잡아서. 붙잡아서... 그래서 어쩔 셈이지? 인파를 뚫고 나가자 그런 의문이 들어 발걸음을 멈춘다.

 

그렇다, 내가 저 소녀를 붙잡아서 대체 뭘 할 셈이지? 아니 애초에 붙잡을 수나 있을까? 자칫하면 방금 살해당한 노인과 같은 꼴이 날지도 모른다. 카르의 말이 다시 떠오른다. 횡단보도에서 사람을 죽이는 검은 머리의 귀신이야기...

 

하지만 분명 그것은 차도로 사람을 미는 자살. 하지만 이번엔 그것이 아니다. 그녀의 낫을 신호로 차가 달려와 노인을 치었다. 무언가 다르다. 하지만 결론은 변하지 않는다. 그녀는... 노인을 죽인 것이다.

 

멈춘 발걸음을 다시 돌린다. 아직 그녀의 뒷모습이 눈에 보인다. 쫓자. 쫓아서 붙잡고 묻자. 왜 죽였냐고. 어째서 죽였냐고! 나는 살렸으면서 괴물로부터 구해줬으면서 나는 왜 살렸냐고... 나 역시 그녀에게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하지만 그래도 붙잡아야한다. 나를 구했던 사람이 사람을 죽인 사실이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기에... 나는 정신없이 그녀의 뒤만을 쫓았다. 그것이 평온했던 오늘을 뒤로하게 되는 전조가 되리라는 것도 모른 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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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0막 프롤로그보단 좀 길어진듯...

...댓글 엄성 ㅁ;

막 이러고(...)

어쩄든 글 남기고 갑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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