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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제목미정

2010.11.15 20:15

빨탕 조회 수:748

 

대륙력 827년,  전 대륙은 전란에 휩싸이게 된다.

베레니스와 함께 대륙의 패권을 쥐고있던 또 다른 국가, 프랑크 왕국이 공화파에 의해 둘로 나뉘게 되고, 이 일의 중심인 공화파의 반란군 세렛-사할의 수장이자 동프랑크의 아퀴나스 백작부인에 의해 온 프랑크는 물론이고 전 대륙이 피를 쏟게 되었다.

서프랑크와 동프랑크의 전쟁, 왕정과 공화정의 대립. 의미없는 학살과 사람들의 분노. 이를 보다못한 서쪽의 패권국이였던 베레니스가 동프랑크의 몇차례의 경고를 하게되지만 동프랑크는 경고를 무시하고 베레니스의 국경침탈마저 일삼게 된다.

그래.

전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몰랐던 우리 역시 그 전란속에 있었다.

우리가 살았던 마을은 베레니스의 동쪽, 대륙을 가로지르는 카르나프의 활대산맥 아래에 있었던 아주 작은 마을이였다.  사람의 출입이 뜸하고, 필요한것이 있다면 바로 아랫마을의 보따리장수가 마을에서 나는 물품이나 약간의 화폐같은걸로 교환하거나 구입하게 되있었다.  정말 평화로운 마을이였다. 하지만, 그런 우리가 살던 마을 역시 전쟁을 피해갈순 없었다.

처음으로 들린건 아버지의 고함소리였다.

반란군이다. 도망가, 멀리 멀리 도망가.

나와 여동생 페니는 어머니의 두손을 잡고 집을 빠져나와 숲으로 몸을 숨겼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비명소리, 고함소리, 말 발굽 소리. 붉게 타오르는 불꽃이 악마같아서 이곳이 지옥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우린 그런 지옥을 뒤로하고 달렸다. 등 뒤에서 남자의 고함소리가 들렸지만 무슨말인지 알수 없었다. 프랑크 어일까? 그렇지 않으면 방언이 심해서일까? 어찌됐든 난 남자의 고함치는 목소리가 무슨말을 하는것인지 알수 없었지만, 그 남자가 무엇을 하려하는지 정돈 알고있었다.

우리를 찾고있다. 그들은 우리를 찾고있었다. 우리를 죽일려고, 지옥으로 끌고가기 위해서. 사신, 악마 같은 놈들. 모든것을 빼앗아가는 약탈자놈들. 우린 필사적으로 그들의 눈을 피해 어느 바위동굴에 도착했다. 어머니는 어린 나와 여동생 페니를 그 바위동굴에 밀어넣으며 말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렴. 아빠 찾아올 테니까. 조금만 있으면 돼. 그러니까 그때까지 페니를 잘 지켜주렴. 엄마랑 약속이야.

내가 그때당시 무슨말을 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하나만큼은 기억이 선명했다.

꼭 약속을 지킬거야.

눈물을 흘리며 나는 그렇게 말했다.

이윽고 어머니는 우리 둘만을 남기고 떠나갔다. 알고있었다. 어린나이였던 나 역시 어머니가 이걸로 돌아오지 않을것이라는걸 알고있었다. 잡아야만 했다. 어머니가 가지않게 잡아야만 했다. 이미 멀어져가는 어머니… 그 등뒤로 내가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말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고개를 가로저었기 때문이다. 분명 내가 거기서 뭐라고 말했더라면, 뭐라고 외쳤더라면 우릴 추적하던 남자들에게 거기서 살해당했겠지. 그래서 잡지 못했다. 그래서… 잡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의 비명이 저 멀리 들려도,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어도 난 소리칠수가 없었다. 그저… 숨죽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어.

내 품에 안겨있던 어린 페니는… 그저 보석 같은 두 눈동자를 빛내며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시간 개념따윈 없었다. 우리가 오지않는 어머니를 기다린지 얼마나 지났을까? 바위동굴안에서 거의 다죽어가는 우리를 발견한 것은 베레니스의 왕국군이였다. 우리를 처음 발견한 몰골이 심한 갈색머리의 비쩍마른 남자는 우리를 데리고 왕국군의 막사에 데려갔다. 그때의 나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더 이상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서일까? 어쩌면 누군가가 구해주길 바랬을지도 모른다.

나와 페니는 왕국군의 조그만한 막사에서 며칠간 생활하게 되었다. 그들의 밥을 먹고, 그들의 보살핌을 받았다. 그들의 침대에서 잠이 들었지만, 난 잠들수 없었다.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고있는데, 죽은 엄마가 돌아오지 않는건 당연할텐데. 아직도 그때 어머니의 목소리가 잊혀지지 않았으니까. 곧 돌아온다, 곧 돌아온다. 곧 돌아오신다. 약속이야. 곧 조금만 있으면 되니까. 조금만 있으면 돌아오시니까…….

지금이라도 당장 내가 누워있는 막사의 천막을 걷히고 들어와서는 이렇게 말할것만 같았다.

많이 찾았어. 이런데에 있었구나. 역시 장난꾸러기라니까. 페니는 잘 지켰니? 역시 믿음직한 오빠구나. 앞으로도 페니를…….

하루하루가 지옥같다. 하루하루가 그때의 그대로다. 난 아직도 그 마을을 벗어나지 못했다. 난 아직도 그곳에 남겨진 채로다. 난 아직도… 그곳에서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다. 어머니가 오기만을. 어머니가 와서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기만을. 어머니가 와서 칭찬해 주기만을. 그리고 보여주는거다. 내가 이렇게 페니를 지켰어요. 페니는 이렇게 잘 있어요. 제가 그렇게 했어요. 그런데... 엄마는 이제 안오잖아.

그렇게 매일매일을 악몽과 환상에 시달렸다. 어머니가 돌아오는 악몽, 그리고 환상. 환청. 더 이상 버틸수가 없다고 생각했을즘에... 우릴 처음으로 발견해준 갈색머리의 비쩍마른 남자가 나와 여동생 페니를 데리고 어디론가로 향했다. 왕국군의 막사를 떠나 낡은 마차를 타고 도착한 그곳은 어느 이름도 모를 조그만한 수도원이였다.

그 수도원은 우리같은 전쟁고아를 맡아 기르는 곳이였다. 많은 수도생들이 있었고, 많은 수녀님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친절했으며, 그 수도원의 아이들 역시 전쟁이 끝나면 그 누구보다 더 열심히 살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나와는 정 반대였다.

그들 모두가 희망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 모두가 전쟁이 끝나면 행복해질수 있다고 믿고있었다. 처음에는 그런 그들이 신기했다. 무엇을 믿고 저런 생각을 하는거지? 대체 무슨일이 있었길래? 그 이유는 몇날 며칠이 가도 몰랐고, 알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 역시 그 수도원에 있는 동안에는 희망이라는 빛을 볼수가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오는 악몽을 꿀수 없었다. 마치 마법처럼, 누군가가 치유해준것 처럼. 내 몸에는 다시 살이 붙고, 활기가 돌았다.

그리고 9년간의 전쟁이 끝난것도, 아마 그때였을것이다. 모든 것은 베레니스의 승리로 끝이 나버렸고, 내가 태어나기전부터 존재했었다던 북쪽의 아멜리안 지역은 베레니스에 흡수당했다.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었던 프랑크는 이윽고 베레니스의 협력으로 통일하게 되었고, 바다 너머에 존재했던 사막국가 우다무르트는 황제가 갑작스럽게 붕어한다. 베레니스는 9년간의 전쟁 끝에 대륙의 패자로 군림하게 되었으며 남아있는 국가들은 결국엔 그런 베레니스 왕국의 눈치를 볼수밖에 없게되었다.

그 아이를 만났을때도 그쯤이였을 것이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태양같은 금발이 인상깊은 아이였다. 나보다 2년 연상인 그아이는 언제나 나와 페니를 미소로 대해주었다. 마을이 전란에 휩싸이고 난 뒤... 처음으로 사람이 내게 미소를 보여주었다. 그때의 그 모습은 잊을래야 잊을수가 없었다.

전쟁이 끝나자 모두가 환하게 웃을수 있었다. 실제로 부모님이 찾아와 가족들의 품에 돌아간 아이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 부모님은 돌아오지 않았다. 죽어버렸으니까. 그게 몇 년이 지났을까? 이제 익숙해져서일까? 나는 가족과 함께 수도원을 떠나는 그들에게 손만 들어줄뿐이지, 정작 나 자체는 아무런 구원도 받지 못했다.

그리고 어느샌가 수도원에 남은 아이들은 손에 꼽게 되었다. 부모님과 함께 돌아가지 못한 아이들도 모두 수도원을 나와 독립하거나 도망쳐 나갔다. 전쟁은 끝났으니까, 더 이상 위험한 일은 없다고 믿었을것이다. 나도 언젠가부턴 그렇게 믿게 되었다. 전쟁은 끝났다. 이젠 평화로워. 밖에 나가도 안전할꺼야.

그때도 아마 수도원에서 독립해 나가는걸 그 금발의 아이와 이야기하고 있을때였다. 이젠 나도 그저 어린애만은 아니니까, 어디가서 가만히 굶어 죽을 사람은 아니니까 더 이상 이곳에만 있을수 없다고 하자 녀석은 좋은 생각이 있으면 해보는것도 좋다고 말했다. 하지만, 녀석의 말투는 수도원에서 독립해 나가는것을 막고있었다.

그런 그 아이의 태도가, 날 가로막고 있었다.

어쩌면 그 아이를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2살 위인, 나보다 연상인 그녀를 좋아했을것이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빛나는 금발, 새하얀 얼굴. 파랗게 빛나는 눈동자.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나보다 성숙했고, 나보다 어른스러웠다. 그런 그녀에게 기대고 싶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가 데려가길 원했을지도 모른다.

수도원 밖으로.

그런 나날이 지나가고 있었다. 매일 그녀와 이야기하고, 바깥세상에 대한 상담을 하고, 부모님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그녀와 가까워지는것을 느낄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내가 13살이고 여동생 페니가 10살이 되던 해. 그것은 갑자기 내게 찾아왔다. 그 당시의 나는 그게 무슨말인지 알수가 없었다. 귀족들의 이권다툼이니, 부르주아들에 의한 정권교체라느니. 그것은 내게 과거의 전쟁과 같은 단순한 학살이였고, 소중한 사람들을 빼앗아가는 목숨의 도적질이였다.

칼과 갑옷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군가를 부르며 수도원으로 들이닥쳤다. 그리고 닥치는대로 죽였다. 원장님도, 수도생들도, 수도원의 고아들도. 남녀노소 가릴거 없이 그들의 칼에 베어져 나갔다. 창밖으로 보이는 횃불이 지옥같았고, 사람들의 말소리와 발굽소리는 악마를 연상케했다.

도망쳐야돼.

마을을 덮쳐왔던 그들이 생각났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죽이고 마음사람들 모두를 학살한 악마들이 생각났다. 나는 여동생 페니의 손을 잡고 수도원을 빠져나왔다. 뒷문을 통해, 반쯤 무너져내린 담을 넘어 숲속으로 달아났다. 그때가 생각났다. 어머니가 내 손을 잡고 도망치던 그곳, 울창한 숲. 병사들의 발소리. 그리고 오열과 비명소리. 이번에도 난 도망쳐야 했다. 그 지옥에서, 더 이상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숲을 헤치며 뛰어갔다. 등 뒤에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때와 같다, 그때와 똑같다. 횃불들이 유령처럼 스쳐 지나가고, 남자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뾰족한 나뭇가지가 내 팔을 찢는것도 모른채, 그저 여동생의 손을 잡고 숲을 올라갔다. 낙엽에 미끄러져 넘어지고, 여동생의 울음소리가 커져와도 달려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 아마 죽어버릴 것이다.

엄마처럼.

아빠처럼.

이젠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구토기가 올라왔다. 하지만 필사적으로 참았다. 아직 멈출순 없다. 녀석들이 바로 등 뒤에 있다. 1초라도 멈췄다간 죽임당한다. 나도, 여동생도. 아직은 포기할수 없다, 아직은.......

정신을 차리고 앞을보자, 그곳에는 금발의 머리를 한 소녀가 서있었다. 내가 물었다. 어서! 도망안치고 뭐해! 하지만 그녀는 나를 돌아보며 망연자실하게 서있을 뿐이였다. 내가 그녀에게 다가가자 그녀가 선곳은...

낭떠러지였다.

이 아이 역시 병사들을 피해 이쪽으로 도망쳐 왔을 것이다. 필사적으로 도망쳐 왔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힘들게 다다른곳이 낭떠러지라니... 아니, 이러고만 있을순 없다. 다시 도망가야 한다. 포기할순 없다.

나는 거의 그 아이의 등을 떠밀다시피하며 다른곳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너무 필사적으로 달려서일까? 방금까지 내손을 잡고있던 페니가 손을 뿌리치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힘들다며 울었다. 괴롭다며 울었다. 더 이상 못가겠다며 바닥에 주저앉아 버린것이다. 난 그런 여동생을 끌어당길 수밖에 없었지만, 쉽지만은 않았다. 그저, 절벽 아래의 세찬 강줄기만이 바위를 두드리는 소리로 대답하고 있을 뿐이였다.

그러던 순간, 무거운 목소리가 내 귀를 궤뚫었다.

그것은 차가울정도로 붉은 머리를 한 남자였다. 그는 뜨거운 입김을 내는 말에 탄채 가죽옷에 숄더아머를 덧댄 가벼운 갑옷을 입고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가 뭐라고 말하는것과 동시에... 옆에서 우리를 지켜보고있던 금발의 소녀는 입에서 시커먼 피를 쏟아내며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했다. 강가에 떨어지는 소리가 선명했다.

나는 페니를 뒤로 숨겼다. 어떻게든 지켜내야 하니까. 그것이 어머니가 내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니까. 여동생의 보석같은 두 눈동자에서 눈물이 흐르는것이 느껴졌다. 내 손을 맞잡은 두손이 떨리는것이 느껴졌다. 난 남자를 노려보았다. 말 위에서 위엄있듯이 내려보는 그 눈빛은 처음본 사람의 눈빛이였다. 내가 살았던 그 마을에서도, 왕국군의 막사에서도, 수도원에서도 볼수없었던 눈빛.

남자는 차가운 목소리로 냉소를 머금으며 말했지만 자세히 알아들을수는 없었다. 방언이 심했기 때문인가? 아마 그것은 외국어였을 것이다. 아마도 동쪽 프랑크 사람들이 주로쓰는 언어같았다. 난 그가 뭐라고 하는지 알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뭘 하려고 하는지는 알수있었다.

말에서 내려온 그 남자의 우직한 손이 내 뺨을 후려갈겼다. 눈이 핑 돌았다. 별이 보였다. 머리뼈가 부서지지 않은게 다행이였다. 난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남자를 쳐다볼려 했지만, 눈동자를 굴릴세도 없었다. 남자의 장화신은 발이 쓰러져있던 내 배를 걷어찼으니까.

피할새도 없었다. 난 그저 통나무처럼 맞을수밖에 없었다. 내가 한 대 한 대 맞을때마다 여동생의 비명소리가 들려왔고, 강의 물줄기 소리가 선명히 들려왔다.

이젠 끝이야, 버틸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때쯤, 또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역시 프랑크의 사람인지, 내가 알아들을수 없는 외국어로 붉은머리의 남자와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숨을 내쉬었다. 아직 살아있다. 도망칠수 있다면 지금이 기회다. 지금이야 말로, 여동생의 손을 붙잡고...... 하지만. 그건 헛된 기대였다. 내가 상반신을 드는것과 동시에, 그것을 놓치지 않은 남자는 나를 이제까지 본적이 없는 강한 힘으로 걷어차버렸으니까.

난 바닥을 굴렀다. 구르고 굴러 낭떠러지의 끝까지, 그리고 낭떠러지에서 추락하기 시작했다. 몸이 공중에 떴다. 마치 새처럼 날고있는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것이 추락하는것이라는 건 머리가 알수 있었다. 그리고 난 그때 똑똑히 들을수 있었다. 그 남자의 이름을. 절벽의 저 편에서, 울상을 지으며 절벽 아래에서 추락하고 있는 날 내려다본 여동생의 등뒤에서 들려온 그 남자의 이름을.

“아퀴나스────!!”

대륙력 830년, 난 더 이상 그때로 돌아갈수 없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악몽을 꾼거 같다. 그저 그런 느낌이 들었다. 가위라도 눌렸나? 손가락을 움직여 봤지만 아무이상없이 움직여진다. 가위는 아니다, 그저 평범한 악몽을 꾼것이다.

눈을 떠보자 밝은 햇빛이 독가시처럼 안구를 쏘는게 느껴졌다. 순간 얼굴을 찌푸렸지만 나는 햇빛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다시 눈을 떴다. 열차, 객실 안이다. 방금까지 눈을 괴롭히던 햇빛은 객실의 차창 밖에서 흘러나오는 아침햇살이였다. 아침햇살은 마치 잠꼬대하는 소꿉친구를 깨우러온 죽마고우처럼, 쉴새없이 나를 비추고 있었다. 덕분에 온몸은 땀을 범벅이지, 고맙네.

선배님. 악몽같은거 꾸셨어요?”

낯익은 목소리, 시선을 돌리자 객실 바로 마주보고 위치해있는 자리에서 낯익은 모곳리가 들렸다. 맑은 목소리자만 차분하게 가라앉아 마치 귀족을 연상케하는 그녀는 나의 세기수 후배, 엘리 위젤(Eli Wisel)이였다. 그녀는 전혀 걱정스럽지 않은 얼굴로, 오히려 비웃으려는 듯이 이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엄청 잠꼬대 했어요.”

그녀의 그런 표정에 약간은 심기가 불편했지만 무시하도록 하자. 그녀가 이런 장난스럽고 경멸스럽고 멸시하는 표정으로 대하는 것이 하루이틀일이 아니니까. ~ 얘를 처음봤을때만 해도 이런애가 아니였는데.

선배님이 말이 없으신걸 보니 속으로 험담을 하고계신가 보군요.”

, 아니입, 니다.”

들켰다. 당황해서 말을 더듬자 그녀는  그럼 그렇지 하고 거의 확신하다시피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녀석은 무슨 초능력이라도 있는것일까? 마법이라도 쓰는거야 뭐야? 내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녀를 쳐다봤지만, 쿨하고 자타공인 학원의 간판 미인에 예의까지 바르지만 자기 바로 선배인 나한테는 그저 고집불통인 애물단지일 뿐이다. 정말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5년전까지만해도 말이지…….”

뭐라고 하셨죠? 선배님.”

아니, 별거 아니야. ‘학원의 간판 스타이자 두뇌명석 예의범절한 어느 소녀가 무슨일로 5년전과는 다르게 귀염성과 결별했나 대한 나름대로의 심각한 고찰을….”

그녀가 주먹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하지 않았습니다. 결단코요.”

이렇단 말이야. 5년전 같았으면 선배님 너무해요!’라는 대사가 나왔을텐데 이제는 폭력부터 쓸려고 하잖아. 봐봐, 이래서 내가 그런 생각을 한단 말이야. 이래서 내가 학원의 간판스타이자 두뇌명석 예의범절한 소녀가 무슨일로 5년전과는 다르게 귀염성과 결별했나 대한 심각한 고찰을 하게된단 말이야. 도대체, 이녀석은 이런 선배님의 깊은 마음을 알수 있을까?

이제야 생각난거지만, 알아도 소용없을거 같다.

엘리는 이제까지도 화가난듯이 눈썹까지 찌푸리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장난치는것도 하루이틀이 아니고, 녀석이 주먹을 날리는것도 하루이틀일이 아닌데 오늘따라 녀석은 주먹을 날리지 않고 쥐고만 있을까? 마치 맛있는 반찬은 마지막까지 아껴놓는것처럼.

만약 그런거라면 위험한거 아냐?

, 엘리양. 풀고요. 화내면 엘리양의 예쁜 얼굴이 주름투성이가….”

휘익, 하고 내가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까지 토닥이며 말했지만 그녀의 주먹질은 마지막말이 모두 끝마치기도 전에 빛과 같은 속도로 뺨을 스쳐지나갔다. 식은땀이 흘렀다. 소녀의 얼굴을 확인해보자 마치 일부러 빚맞혔다는 표정으로 노려다보고있었다.

손대지 마세요. 죽여버릴거에요.”

, 그래….”

뭐야, 사춘기야? 사춘기가 온거야? 사춘기 나이는 벌써 지났잖아? 사춘기 딸아이를 아버지 마음이 이런거야? 이건너무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표정이잖아. 그럼 선배님 상처받는다고. 아니, 이러다간 상처받는걸로 끝나는게 아니라죽을거 같애. 살해당한다.

그런 살해의식을 느끼며 나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 하고 돌려버린 그녀의 옆모습을 쳐다봤다. 가지런히 정돈된 빛나는 백은빛 머리카락. 언뜻보면 날카롭고 드세보이지만 그것이 바로 장점이 되어 그녀를 엘리트로 만들어준 눈매, 오똑한 콧날. 조그맣고 새빨간 입술, 그리고 은빛 머리카락에 지지않을 새하얀 피부. 척봐도 귀품이 넘치고 계속 봐도 귀품이 흐르는 그녀는 모두가 귀족가의 영애라고 오해할만한 용모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귀족이 아니다.

상업 부르주아.

9년간의 전쟁이 끝나고, 다른 반란이 진압되고, 많은 세월동안 세력을 키워온 부유계급. 계급은 평민에 속하지만 영향력은 왠만한 귀족보다더 우세하다는 그들은 이미 신흥계급으로, 그리고 평민들의 새로운 희망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마치 왕국에 대한 평민들의 목소리처럼.

그들의 위치때문일까? 현재 나라에 있는 그들의 대부분은 왕국, 정계에 대한 진출을 꾀하고 있으며 귀족들과의 동등한 위치에 있을려는 자들이 많다. 부르주아인 그들은 귀족들만이 갈수있다는 로텐부르크 학원에 입학할수 있었으며, 그곳에서 또래의 귀족들과 친해지게 되면 정계는 물론이고 왕족과의 인연까지도 만들수 있다고 한다. 물론, 실제로 그런 관계를 만들어낸 부르주아들은 손에 꼽겠지.

그렇다. 그것이 부르주아의 목표다. 귀족들의 옆자리에 설수 있는 . 또는 귀족들을 뛰어넘을수 있는 . 그것이 바로 그들의 최종목표일 것이다. 어떠한 형태로든.

엘리 위젤도 부르주아가의 자녀다. 수도에서 유명한 위젤상가라고 하면 모르는사람이 없을것이다. 수도 시장의 대부분의 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대륙 내에, 베레니스 이외에도 종교국가나 남쪽의 사막국가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다고 들었다. 그만큼 그녀의 집안은 대단한 집안이였던 것이다. 그런 집안에서 나고 자라온 그녀에게 언젠가는 물어본적이 있었다. 그때가 아마 그녀가 델포드 학원에 온지 얼마 안됐을 무렵, 말하자면 바로 맞후배가 된지 얼마 안됐을 무렵의 그녀에게 로텐부르크가 아닌 이곳에 왔냐?’ 물었었다. 그러자 그녀의 대답이.

, 분명히 로텐부르크에 갔다면 손쉽게 출세할수 있었겠죠. 많은귀족 친구님들을 만나고, 잘만 한다면 정계에. 또는 왕족과도 관계를 가질수 있었겠죠. 하지만 그런건 싫어요.

제가 갖고싶은건 친구님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친구에요.’

아아, 그때부터였지. 내가 이녀석을 신뢰하기 시작했던게. 아이는 정말 올곧은 아이라고, 앞으로 누구보다더 큰일을 해낼수 있는 녀석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애정을 가지고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쏟아부어서 가르쳤는데. 어째서.

선배님. 기분나쁘니까 그만 봐주세요.”

어째서 애가 이렇게까지 되어버린거지….

나는 5년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고 그녀가 보고있는 창밖을 쳐다봤다. 차창밖의 풍경은 정지되어 있었다. 이상하다, 달리는 열차라면 정지되어있을리가 없는데. 그러고보니 엉덩이에서 심하게 느껴졌어야할 열차의 진동도 전혀 느껴지질 않았다. 이제서야 알았다.

열차는 멈춰있었다.

나는 바깥의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뿌연 창가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닦여있지 않은탓에 자세한건 보이지 않았지만 플랫폼에 엄청난 인파가 모여있는 것이 보였다. 기사단, 경비원, 그리고 귀족차림을 사람들. 그들의 정모에 달려있는 새하얀 깃털. 그리고 그들의 머리위에 높게 펄럭이는 푸른 깃발이 인상적이였다.

푸른깃발?

베레니스 왕국군.

도대체 무슨일이 일어난거지?”

내가 묻자 객실안에 이외에 유일하게 입이 열려있는 엘리 위젤은 아무말도 하지않고 나와같이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저런 사태였을까? 저들은 언제부터 몰려온거지? 아무리 자국의 군대라고 하지만, 군대가 민간인만 탑승해있는 열차에 볼일이 있다는 것은 대체….

, 잠시 갔다올게.”

그녀의 대답따윈 기다리지 않고 서둘러 옷차림을 정리한후 객실 밖으로 나왔다. 사람 하나 다니기 힘든 좁은 통로를 지나 차칸에서 계단을 타고 내려와 플랫폼으로 들어설려고 했다. 하지만 플랫폼으로 가는길은 수많은 인파로 막혀있었다. 나는 그들을 비집고 가까스로 플랫폼으로 내려왔고, 그곳에도 학원의 학생들은 구경꾼처럼 모여있었다. 다른 학생들도 나처럼 무슨일인지 확인하러 온것일까? 그런 왕국군의 기사들은 몸싸움을 하듯이 학생들과 뒤엉켜 있었다.

물러나라!”

남자의 말에 델포드의 학생들은 웅성거리며 양옆으로 갈라지기 시작했고, 사이를 비집고 기사들이 열차위로 올라타려는 것이 보였다. 그들의 갑옷 왼쪽 가슴에 새겨진 새하얀 한장의 깃털, 그리고 높게 올려진 푸른 깃발에 새겨진 방패와 , , 깃털. 깃털이 의미하는바는 베레니스의 국민라면 모를사람이 없을 것이다.

1왕녀의 깃발.

그들의 가슴에 새겨진 한장의 새하얀 깃발은 1왕녀의 친위대라는 것을 밝히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곳에 1왕녀가 와있다는 소리인가? 확실히 1왕녀라면 나중이 되면 신나게 만나게 될테지만 때문에 이런 이름도 모르는 누추한곳에 잘난 1왕녀가 와있다는 얘기지? 대체 무슨일로? 잘은 모르겠지만 확실한건, 이놈의 친위대가 학생들을 밀어넣고 누군가가 지나갈 길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 왕녀님이 지나갈 길이겠지.

그말은 왕녀님이 열차를 탄다고?

전용 마차가 아니라, 전용 열차를 빌려도 되시는 분이?

비켜라 비켜!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오지 마라!”

낯익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수도에서 몇번인가 들어봤던 목소리, 검까지 치켜들면서 협박아닌 협박을 하고있는 그는 1왕녀 친위대의 젊은 대장, 케네스 포메란츠 (Arthur Keneth Fomeranz). 27세라는 젊은 나이에 평민이라는 신분으로 왕국 검술시합에서 우승하고 1왕녀에게 인정받은 그는 이미 평민의 신분을 벗어난 사람이라고 할수있다. 1왕녀의 친위대에 들어가는것과 동시에 친위대장이 되었고, 그와함께 기사작위까지 받은 인생역전의 주인공이다. 거기다가 1왕녀와의 스캔들까지 있으니 어찌 진정한 승리자라고 할수있지 않은가? 스캔들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알수도 없고, 남자복이 없다고 하는 1왕녀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는 아무도 모를 테지만.

포메란츠경의 고함소리와 함께 뒷걸음질 하는 학생들을 피해 갈려고 하는 와중, 하고. 누군가가 뒤에서 머리 뒤를 손가락으로 누르는 것이 느껴졌다. 가벼운 터치였다. 나는 뒤로돌아봤지만, 머리를 터치한 사람을 보고서는 화를 낼순 없었다.

프란, 뭐하는거야.”

프란체스카 트리벨라토(Francesca Trivellato).

동기이자 학우인 그녀는 종이봉지에서 모카크림빵을 꺼내먹고 있었다. 그녀의 반쯤 감겨진 힘없는 눈은 마치 좋은 구경거리를 찾았다는 듯이 깜빡이고 있었다.

좋은구경.”

좀처럼 보기힘든 1왕녀를 만날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뜻이겠지.

그녀는 한마디를 하고선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모카크림빵을 한조각 떼어 먹었다. 입술에 모카크림이 묻었지만 신경쓰는 같진 않았다. 그러니까 내가 대신 떼어 줘야지. 내가 손을 뻗어 그녀의 입술에 묻은 모카크림을 닦아주자 그녀는 얼굴표정 하나 바뀌지않고 나에게서 한발자국 뒤로 물러난뒤 입을 열었다.

책임지기.”

네가 입술에 손을 댔으니까 입술동정은 끝이야. 그러니까 책임져, 라는 뜻이겠지.

이렇게까지 말하는건 그녀 나름의 농담이다. 그러니까 이런거에 일일히 얼굴붉힐 나이는 지났다는 뜻이야. 5년동안 함께 해왔으니 모를리가 없잖아? 나는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 그녀가 소중히 안고있는 모카크림빵을 한조각 떼어먹었다. 종이봉지 안에는 아직 먹지않은 빵이 두개는 더있었다.

무전취식.”

내꺼 뺏아먹지 말라는 뜻이겠지.

그녀는 길고 곱슬진 머리카락에 반쯤 가려진 눈을 깜빡이며 올려다 보았다. 그거 뺏어먹는다고 어떻냐.

나중에줘.”

나중에라도 뺏어먹은 대가를 치루게 하겠다는 뜻이겠지.

그래봤자 언젠가 우리집에 와서 신세지겠다는 소리겠지. 그런거야 대환영이다. 그녀가 오면 우리 어머니도 아버지도 많이 좋아하니까. 그리고 그녀역시 우리 가게의 단골이기도 하고.

그렇지, 우리 부모님은 수도에서 제과점을 하고 계신다. 고향에서 유명했던 탓인지 수도로 가게를 옮기고 나서도 입소문이 퍼져 이제는 수도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명물 제과점이 되어버렸다. 수많은 손님이 드나들며, 저녁만 되도 아침내내 만들어놓은 빵이 모두 완판될정도로 인기가 많다.

물론.

제과점 옐로우 레이어(Yellow Layer)’ 부모님은 친부모가 아니다.

수도원에서 필사적으로 도망쳐나온 나를 거두어준 두분. 두분은 나를 친자식처럼 대했고, 역시 두분을 진짜 부모님처럼 대하기로 했으니까. 지금의 내가 사랑하는 부모님은 두분이고, 사랑하는 부모님은 두분이다.

졸업식 끝나고 우리 가게에 . 네가 좋아하는 모카크림빵 배터지게 먹여줄게.”

적절한듯.”

그렇게 말해줘서 기쁘다는 말일것이다.

학원의 휴가면 매번 하루정도는 우리집에서 살면서, 저번 휴가때도 우리집에 있었으면서 매일 올때마다 우리 제과점의 빵이 질리지 않는가 보다. 그녀가 유독 모카크림빵을 좋아하는 이유도 있겠지.

말하자면 우리는 2주간의 봄휴가를 마치고 수도에서 델포드로 향하는 중이다. 있을 졸업식을 위해서다. 나와 프란, 그리고 다른 동기이자 학우인 토비아스 패러데이(Tobias Faraday) 세명의 졸업식이다. 얼마 되지않는 졸업자 수이지만 세명을 위해서 축복해주는 것이 바로 델포드의 전통이라고 들었다.

왕립 델포드 기술 교육기관은 기숙사제로 운영되는 탓에 학생들에게휴가라는 제도가 있다. 학기중에는 한달에 3일밖에 주어지지 않지만, 휴일에 이어서 쓸경우에는 연휴를 만드는것도 가능하다. 방학이 시작되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허락되는데다가 외부와의 소통도 자유롭기 때문인지 그렇게 크게 통제되어있다는 느낌은 받을수 없었다.

저것봐봐.”

그녀가 말하는것과 동시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함께 들렸다. 수많은 학생들의 웅성거림, 그리고 기사들의 고함소리. 포메란츠경의 목소리는 식을줄을 몰랐고, 쉴세없이 떠들어대고 있었다. 저러니까 수도의 국민들이 저사람의 목소리를 모를리가 없지. 아마 베레니스에서 목소리가 가장 큰남자가 아닐까 .

그리고 기사들의 행렬 , 정복을 맞춰입은 귀족들 사이에 수선화색과 같은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불쑥 보였다. 키는 생각보다 컸다. 치마속에 높은 힐을 신어서 그런걸까? 나보다 조금 커보이는 키는 만인을 압도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절대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 다물어진 입술. 그린듯이 잘빠진 턱선. 가슴 언저리까지 내려온 물결진 갈색 머리칼. 아아, 귀에는 들린다. 남자녀석들의 소리없는 비명이 들려. 가버릴거 같다는 비명이 들린다고.

저게바로?”

저사람이 바로 1왕녀가 맞냐고 묻고있는 걸테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모카크림빵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관심이 없어졌나 보다. 아마 여자인 그녀에게 있어선 1왕녀는 그저 그녀와 같은 여자일게 틀림없다. 역시, 델포드의 학생. 로텐부르크의 영애님들이였으면 아마 지금쯤 1왕녀님의 아름다운 자태를 보고 정신을 잃을 것이──잃은 것이──뻔하다.

그러고보니 프란, 왕녀님이 무슨일 때문에 우리 열차에 타는지 알고있어?”

이해불가.”

왕녀님은 열차를 타면 안돼? 내가 말이 무슨말인지 모르겠다는 말이겠지.

그러니까 저정도 왕족이라면 보통은 전용마차를 타던가 전용열차를 탈거 아냐. 이렇게 평민 아이들이 많은 열차에 같이 부대껴서 탈리가 없다고.”

내말이 끝나자 그녀는 뭔가를 생각하듯이 고개를 숙였다.

일리있음.”

그렇게 말한 그녀는 다시 왕녀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녀는 수많은 친위대의 호위와 귀족들의 안내를 받고 우리가 예상한대로 학생들이 타고있는 열차의 객차 안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모습을 보이지 않자 친위대가 따라 들어가기 시작했고, 학생들 역시 뒤를 따라 들어가기 시작했다. 출발한다는 열차의 경적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결국엔, 왕녀가 열차에 이유는 알수가 없었구나.

모두가 열차 안으로 들어간 이후, 마지막으로 나와 프란 역시 다시 열차에 올라탔다. 그녀는 자신의 객실로 돌아왔고, 역시 좁아터진 복도를 지나 내가 있던 객실로 돌아왔다. 엘리는 왕녀가 열차에 올라타는 것을 봤을까?만약에 못봤다면 나는 왕녀님 얼굴 똑똑히 봤다고 자랑하려 했지만.

객실에 돌아왔을 그녀는 이미 곯아 떨어져있었다.

 

절벽에서 떨어진 직후, 몸은 차가운 물줄기가 휘감았다. 긁히고 멍이들어 차가운 물이 닿자 심한 통증이 느껴지는것과 동시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 이대로 죽는구나. 제일 처음 머릿속으로 생각한 말이다. 그래, 나도 똑같이 되는거였다. 아빠처럼, 엄마처럼. 전쟁에서 목숨을 바친 사람들처럼, 고아원에서 목숨을 잃어간 무고한 아이들처럼. 똑같이 죽고 똑같이 그들과 같은곳으로 갈것이다.

숨이 막혔다. 당연하다. 강바닥 아래에는 공기가 없을 테니까. 폐와 뱃속은 맑고 깨끗한 강물로 가득 찰것이고, 추하게 눈을 부릅뜬채로 질식사 할것이다. 당연하다. 당연한 죽음이다. 나도 인간으로써 살아간다면 이건 당연한 죽음일 것이다.

그래, 그걸 배웠었다. 어린 나이인데도, 아직 아무것도 할수 없는 어린애인데도 알수 있었다. 전쟁과 목숨을 잃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봐오면서 그것만큼은 배울수 있었다. 죽음은 언제나 찾아온다. 내가 바라든, 바라지 않든.

강바닥에 돌뿌리가 물줄기에 휩쓸려가는 허리를 강하게 쳤다. 허리가 휘어졌다. 죽을듯이 참고있던 숨이 내뱉어지고, 코와 입과 귀와 사이로 물이 들어왔다. 죽는다, 죽는다, 죽을것이다. 이대로 아무 저항도 못하고 죽을것이다. 그남자에게 아무것도 죽을것이다.

그때까지 기다리면 .’

엄마와의 약속도 못지킬것이다.

페니를 지켜주렴.’

하지만, 그것만큼은 포기할수 없다. 신념, 의지, 정의. 어릴적 이해하지도 못할 단어들이 뇌리에 떠올랐다. 이런것이 주마등이란 말인가? 하지만 주마등은 죽기 바로 직전에 과거의 기억이 떠오를것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건 주마등인가?

눈앞에 그림자가 보였다. 수면위로 비춰진 새카만 그림자가 보였던 것이다. 엄마인가? 엄마? 그래, 엄마다. 엄마가 찾아온것이다. 수면 밖에서 어머니가 웃는얼굴로 내려다 보고 있었다. 아주 가까운곳처럼 느껴지지만, 도달할수 없는 . 마치 내가 지나온 강가처럼, 거슬러갈수 없는 . 그곳에서 어머니는 내려다 보고 있었다.

발버둥 쳤다. 저곳으로 가야돼, 엄마가 있는쪽으로 가야 . 그렇다면 편해질수 있다. 엄마의 품에 안기고 예전처럼 부리던 어리광도 피울수 있다. 언제나 행복한 그때로 돌아갈수 있다. 나는 다리를 휘둘러 허우적 거렸다. 하지만 그럴수록 물줄기는 허리를 감고 심연 끝으로 끌고갈 뿐이였다.

수면위의 엄마는 웃고있었지만, 그쪽으로 갈수 없었다. 엄마는 그런 나를 내려다보며 그저 끄덕였다. 그런거라고, 그것이 정답이라고. 이쪽에 올수없다고 말하는듯 했다. 마치 고민하고있는 친구의 등을 떠밀어 주는것처럼, 엄마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앞으로 가라고. 다시 한번더 자신을 따라오면 크게 혼낼거라고 하면서. 엄마는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엄마는 만족한듯이 미소를 지으며 물줄기 사이로 사라져갔다. 마치 환영처럼, 유령처럼. 연기처럼 나타났다 사라진 엄마의 모습을 보고 나는 팔에 힘을 주었다. 어떻게든 살려고 강바닥을 손가락으로 긁어댔지만, 무참하게 손톱만 뜯겨져 나갈 뿐이였다. 아파도 참아야만 했다. 어떻게든 엄마와의 약속을 지켜야만 했다. 페니. 나의 여동생. 하나밖에 없는 나의 사랑하는 여동생. 녀석을 찾아야만해. 녀석을 찾으러가야만 .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치 않았는지, 두눈이 크게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배가 불러왔다. 물을 너무많이 마신것이다. 이대로면죽겠지? 하지만 죽어도 할수 있는 것이 있다. 내가 죽는한이 있더라도, 찾아갈것이다.

아퀴나스.

그리고 내가 정신을 잃은것과, 수표면 위에서 팔이 뻗어 들어온건 동시였다.

 

정신이 들었을때는 머리가 깨질듯이 아팠다. 여기가 어딘지, 나는 누구인지, 나는 대체 무엇을 하다 이렇게 된건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밀려오는 두통에 나는 비명부터 질러야 했다. 비명을 들었는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얘기하지마, 머리가 아파. 그렇게 말할려고 했지만 입은 그저 비명만 질렀지, 그정도의 고급 언어를 구사하는건 불가능 했다.

목소리의 주인은 두명이였다. 한명은 남자, 한명은 여자. 여자는 아프다고 신음하고 있는 어깨를 소중하듯이 끌어안았고, 남자는 이마에  물수건을 덧대어 주었다. 그런다고 낫지만은 않았다. 두통은 여전했다. 하지만어느샌가 아픔은 참을만해졌다.

그곳은 낡은 통나무 집이였다. 나는 그곳의 빈말ㄹ도 그다지 편안하지 않는 침대에 누워있었다. 어두운 한가운데에는 벽돌로 지어진 장작난로가 있었고, 위에는 주전자가 새하얀 입김을 내뿜고 있었다. 빛은 난로에서 새어나오는 새빨간 불빛이 전부였으며, 왠지 모르게 빵굽는 냄새가 인상적인 집이였다.

그래, 살아있었다.

손가락, 발가락, 무릎, 팔관절. 모두가 이상없었다. 움직일때마다 극심하게 느껴지는 통증은 여전했지만, 모두가 멀쩡했다. 눈꺼풀도, 얼굴도 모두가. 아무런 이상없이 살아있었다. 기적이 일어난건가? 누군가가 마법을 사용한 것인가? 어린 나는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하지만 여기저기 있는 멍자국, 그리고 움직이지 않는 허리. 아무것도 할수 없는건 여전했다. 팔꿈치를 약간만 구부려도 온몸이 비명을 질렀다.

나는 방금까지 끌어안고 있었던 여자의 얼굴을 보았다. 이목구비가 뚜렷하지만 특징이 그다지 없어보이는 갈색머리의 여성이였다. 그녀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윽고 남자가 다가와 몸을 일으켜 침대위에 앉을수 있게 해주었다. 순간 허리에서 숨이 멎을정도의 고통이 느껴졌지만, 그것도 순간. 앉는것에 익숙해진것인지 나는 편안하게 있을수 있었다.

뒤이어 갈색머리의 여성이 그릇과 스푼을 들고왔다. 그곳에는 걸쭉하고 냄새좋은 스프가 있었으며, 그녀는 한스푼 한스푼 입으로 식혀주며 내게 떠먹여 주었다. 나는 군말없이 입을 열었고, 뜨거운 스프가 가득이 퍼져나갈때에는부모님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눈물을 흘렸다. 아니, 그저 울었다. 울었다. 이후로 그렇게 울어본적은 처음이였다. 마치 갓난아기처럼, 어린아이처럼. 이제 태어난것처럼 울었다. 입가로 침이 흐르고, 콧물이 흐를정도로 통곡했다. 깜짝놀란 여성은 다시 끌어안았다. 여기저기 아프다. 어깨도 아프고 목도 아프고 팔도 아프고 허리도 아팠다. 하지만 품이 너무 따뜻해서밀쳐낼수가 없었다.

맞다. 그들은 새로운 부모님이다.

새로운 어머니의 품에 안겨 울었다. 이제까지 울지 못한 , 이제까지 담아뒀던 모든 것을 담아 울었다. 그럴때마다 어머니는 아무말도 하지않고 껴안고서는 등과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때 어머니의 말을 빌리자면 내가 울지않을때는 잠들 뿐이였고, 당신이 그렇게 머리와 등을 쓰다듬어주면 나는 어린아이처럼 곧잘 잠들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어리광쟁이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후로 부모님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을수 있었다. 강가에서 구해준 사람은 노인으로, 부모님의 삼촌되는 사람이라고 한다. 노인이 강가에 낚시하러갔다가 발견하게 됐고 곧바로 응급처치를 다음에 이곳으로 데리고 왔다고 한다. 의사는 먼저 다녀간 뒤며, 온몸의 타박상 이외에는 목숨에 지장이 없다는 말을 남겼다고 말했다.

나는 두사람에게 모든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부모님이 죽었을 . 수도원에 맡겨졌을 . 수도원에 맡겨지고 다른 군대가 쳐들어 왔을 , 그리고 여동생과 사별했을 나의 모든 이야기를 아버지와 어머니는 한치의 의심도 없이 모두 믿어 주었고, 그런 이야기를 할때마다 울먹거리는 나를 다독여 주었다. 마치 진짜 가족처럼, 아니. 우리는 진짜 가족이였다. 그렇지 않으면 두사람은 내게 그렇게까지 잘해줄순 없을 테니까.

이후 나는 그들의 이름인 힐가르스(Hillgarth)’라는 성을 이어받게 되었고, 정식으로 두사람의 아들이 되었다. 내가있었던 마을은 그노우기드(Gnawgead)라는 베레니스의 작은 마을이였고, 나는 그곳에서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할수있었다. 그래, 사랑이면 충분했다. 부모님에게 받는 사랑이면 내게 충분했다. , 명예. 내게 있어선 사랑이 무엇보다더 중요했었다.

하지만 어느순간, 무엇인가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사랑받는데도, 이렇게 행복한데도 무엇인가가 어긋나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 맞다.

여동생, 페니.

내겐 페니가 없었다. 사랑하는 여동생이 없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여동생이 존재하질 않았다.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할수 없을까? 나는 여동생에 대한 것을 부모님에게 상의하게 되었고, 부모님은 그런 나의 마음을 알았는지 수소문해서 여동생을 찾아보기로 했다. 하지만그렇게 쉽게 찾을 수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내가 14살이 되고 노인의 장례가 치뤄진후 얼마 안되서. 마을의 어떤 사람에게서 왕립 정보국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곳이야말로 평민이 귀족을 뛰어넘을수 있는 곳이라는 과대포장을 해서 말이다. 그곳에서는 나라에서 모든 것을 할수 있고, 모든 권리를 가질수 있다고 했다.

나는 부모님께 말했다. 나는 왕립 정보국에 들어가겠다고. 그곳에서 사별한 여동생을 찾아내겠다고.

부모님은 그런 나의 결정을 반대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쉬지않는 지원을 해주셨다. 그곳에 왕립 정보국에 들어가기전에는 많은 공부가 필요했고, 정보국의 수사관이 되기 위해서는 수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왕립 델포드 교육기관이라는 곳에 입학해 지식을 쌓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공부하게 되었고, 델포드 학원에 입학할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수석으로 델포드에서 졸업할수 있게 되었다. 모두가 우러러보는 곳으로 갈수있게 되었다. 그들의 목표, 그들의 정점. 모든 델포드의 원생들이 원하는 하늘의 끄트머리에 있는 그곳. 왕립 정보국, 통칭 R.I.A(Royal Intelligence Agency). 그곳으로 갈것이다.

페니, 조금만 기다려.”

찾아내고 테니까.

나는 객실에서 나와 복도 끝에있는 열차의 발코니에 나와있다. 신나게 달리는 열차, 시간은 어느새 밤이 되었고 하늘의 별빛은 무수히 반짝이고 있었다. 시계는 이미 9, 하지만 열차는 델포드에 도착할 생각이 없는듯 했다. 뭐가 이리 느려 터졌어.

오랜만에 바깥바람을 쐬었더니 옛날생각에 빠져있었던 같다. 머리위에 밝은 달은 달리는 열차와는 다르게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 달을 보면 생각나는 밤이 있었다. 그때의 , 여동생의 손을 잡고 개같이 도망다녔던 시절. 그리고 남자의 이름.

아퀴나스.

파이프 난간을 쥐고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 우선은 남자를 찾아야만 했다. 모든 사건의 중심, 모든것의 원흉. 반란군의 수장이였던 남자를….

허어, 학생이 이시간에 여긴 무슨일인가?”

낮고 굵은 목소리. 낯선 목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마침 낯선사람이 서있었다. 나이는 대략 삼십대 중반정도 되는 얼굴이지만 언뜻 잘못보면 40대로도 볼수있는 얼굴이였다. 그리고 입고있는 정복으로 그가 귀족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귀족, 평민을 향한 비웃음. 귀족이 싫다. 그들은 의미없고 쓸데없는 복종을 원한다. 평민을 향한 우월감의 도취. 그것이 내게 있어선 귀족의 모든것이였다.

죄송합니다.”

그말만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그러자 남자는 아무말도 하지않고 웃고서는 담배 케이스에서 하나를 꺼내고서는 입에 물었다. 불은 아직 붙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미소는 생각보다 깔끔하게 보였다.

뭐야 기분나쁘게…….’

혼자서 그렇게 중얼거리며 객차안의 좁은 복도로 들어왔다. 그러고보니 오랫동안 열차를 타고있었더니 소변이 마려울때도 됐지. 나는 화장실을 가기로 하고 다음 열차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전쟁 초기의 열차에는 화장실이 없었다고 한다. 소변이 마려우면 참거나 다음 역에 도착했을 빠른 속도로 해치우고 오지 않으면 해결할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장시간 여행과 지루함 덕분에 객차중 하나에 조그만한 간이화장실을 만들게 되었고, 그곳에서 여행을 떠나는 사람에게는 볼일을 볼수있는 편의가 주어지게 되었다. 사람이 많이 몰리면 오랫동안 기다려야된다는 단점이 있는데 어떻는가. 기다려도. 그런데 이게 왠일? 화장실에는 아무도 기다리는 사람이 없었다. 이건 당연히 잘된일이 아닌가?

나는 객차안의 복도를 빠른속도로 지나 화장실로 향했다. 내가 화장실로 향하는 사이에 누군가가 들어가버리면 안된다. 그런 식으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방심해서 지고싶진 않다. 이래뵈도 승부욕 강한 남자니까!

승부욕 강한 남자는 힘차게 화장실 앞으로 걸어가 당당하게 문을 열었다.

드디어 도착!”

화장실 문을 열자, 안에는 사람이 앉아있었다. 나는 아무말도 하지않고 다시 화장실 문을 닫았다.

뭐지? 잘못본것인가? 문을 열자 사람이 있었다. 사람의 그림자만 확인하고 급하게 문을 닫아서 누군지 확인할순 없었다. 아니, 애초에 사람이 있었나? 그냥 그림자 아냐? 이젠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어졌다. 그정도로 눈이 나빠진건가? 거기까지 늙은거 같진 않은데?

그래, 다시 확인 해보자. 다시 확인해보고 만약 안에 사람이 있으면 급하게 사과를 하고 자리를 뜨면 . 없으면 당연히 쿨하게 화장실 이용 하는거지. 그래,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자. 분명 아무도 없을거야. 화장실안에는 예측 결과 99%이상 사람이 있을수 없다. 만약 있었다면 문을 잠궈놓거나 인기척이 들렸겠지. 그래, 그건 그림자야. 틀림없어.

나는 다시 당당하게 화장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눈썹까지 찡그리며 어두운 화장실 안을 유심히 들여다 보았다.

히익

사람소리가 들렸다. 이건 무슨 소리지? 딸꾹질 소린가? 아니면 배에서 소린가? 배에서 이런 소리는 나지 않는다. 그렇다면이고 뭐고. 봐도 보이잖아. 사람이 있다고. 사람이 화장실 안에 변기에 앉아있단 말이야. 그것도 속옷까지 발목밑으로 내리고, 치마까지 입고있고, 그런데 치마 색이 어디선가 많이본 수선화 색깔의…….

안돼, 사과하고 여기에서 빠져나가야돼. 여기에서 도망쳐야돼. 그렇게 해야되는데그렇게 수가 없었다. 시선은 화장실 안에 앉아있던 사람의 발목에서부터 무릎, , 가슴순으로 올라갔고 얼굴을 확인했을때는.

왕녀님! 무슨일 있으십니까!”

수도에서 가장 목소리가 들려와 그곳을 돌아보자, 옳거니. 때마침 포메란츠경이 오고있는게 아닌가. 정말 좋은 타이밍이다. 정말 굳타이밍이야. 목숨이 없어지기 바로 직전의 타이밍이야.

화장실쪽을 보자 이미 그사람그녀아니, 왕녀님은 깔끔하게 뒤처리까지 하신후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화장실에서 나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녀에게 빌을 비켜줘야 했으며, 그녀가 복도를 지나 자신의 객실로 돌아가는 뒷모습을 담담히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나를 쳐다보던 포메란츠경은 내게 가까이와서 물었다.

무슨일이 있었던건가 학생?”

아니, 그게 있죠포메란츠경.”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칼날이 목으로 들어왔다. 빠르다, 하지만 못피할정도는 아니였다. 하지만 공간이 협소한 나머지 좁아터져버려서 피하지는 못했다. 누군가에게 말하면 변명거리밖에 안될테지만.

무엄하다, 평민 따위가.”

이사람이 학생이라고 던지네…….

내가 평민인지 귀족인지 어떻게 알아. 아니면 얼굴에 평민이라고 씌여있는건가? 인간궁상만 보면 자체가 평민같은건가? 이래서 귀족은 싫다. 그가 아무리 평민에서 귀족이 인간역전의 주인공이라 하더라도, 귀족이 싫다.

얘길 들어보시는게포메란츠님.”

왕녀님이 용무보시는걸 옅봤단 말이냐?”

아니 그러니까 얘길 들어보라니까….”

포메란츠경의 발길질이 복부에 관통했다. 그의 징박힌 부추가 나의 별로 단단하지 않은듯한 배를 관통하는게 느껴졌고, 구토기가 올라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이거, 장난이 아니다. 이놈은 장난으로 때린게 아니다. 나는 배를 부여잡고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리고 뒤이어 들어온 것은 기사의 발길질이였다.

미천한! 평민놈이 어디서 말대답이냐! 미천한 것이! 미천한 것이!”

그런 너도 미천한 출신이였지 않았냐그렇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쉽지만은 않았다. 배가 너무 아팠다. 이녀석 장난아니게 때리고 있었다. 아침에 먹었던 것을 전부 쏟아내지않은게 다행일 정도다. 대신 미칠듯이 고통스러웠지만대체. 이게 뭐야. 귀족이라면 이래도 되는건가? 귀족이라면 가능하다는 건가? 귀족만이 인간은 아닐텐데 대체 …… 이해할 수가 없다. 이런 인간을 이해할 수가 없다. 화를 내는거지? 이렇게 심하게 때리는거지? 고작 말대답? 말대답 했다고? 나라는 평민이 자신의 의견도 피력못하는 곳이였나?

그만 하세요 포메란츠경.”

낮고 굵은 목소리. 포메란츠경에 의해 바닥에 깔린 나는 볼수없었지만 목소리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발코니에서 만난 중년남성, 그도 분명한 귀족. 쓰러져있는 탓에 고급스러운 부츠밖에 보이지 않는 그의 모습이 열차칸 입구에서 보였다.

그도 델포드의 학생이 아닙니까? 델포드의 학생이라면 국왕폐하의 가호 아래에있는 소중한 인재들입니다. 그런 젊은 인재들을 상하게 하다니 이거 집정회의 회부감이군요. 깊게 야기되면 경의 기사작위마저 박탈당할수 있습니다.”

나이든 사람치고는 젊은 말투를 사용하는듯 했다. 그것이 괴리감이 생기는가 하면 그가 말한 젊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면 좀더 친근하게 다가갈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고개를 들어 포메란츠경을 올려다 보았다. 아니, 노려 보았다.

젊은사람이 앞길이 창창한데 벌써부터 약점잡힐일 만드시면 아니되죠. 왕녀님께서 아신다면 크게 실망하실 겁니다.”

중년남자의 말에 그는 아무말도 하지않고 뒤를 돌아가 방금 왕녀가 들어갔던 객실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아, 저런 녀석이 나라 왕녀님의 친위대장인가. 나라가 대체 어떻게 될려고 이러는 것이지?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먼지묻은 옷을 손으로 털고있자, 중년 남성은 내게 와서 어깨에 있는 먼지를 털어주었다.

어떤가?”

무슨 말이지? 상태 말인가? 상태라고 한다면 최악이다. 아까부터 속이 뒤집히는 것을 억지로 참고 있으니까.

실망스럽겠군. 수도 시민들의 영웅이라고 생각했던 남자가 사실은 저런 인품이였다니 말이야.”

아닙니다….”

그의 성품따윈 이미 예전부터 알고있었다. 수도에서 목소리로 자신이 기사가 됐다느니 작위를 받았다느니 떠들때부터 이미 알고있었단 말이다. 저런 상태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저런 녀석이 왕녀의 친위대장이라니 왕녀만 피곤할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렇다고 말할수 없다. 이래나 저래나 그도 귀족이니까. 그들은 믿을수 없다. 말을 아껴야 한다.

솔직하지 못한 남자군.”

중년 남자는 특유의 담백한 미소를 잃지않고 말했다. 그리고 그걸로 끝이였다. 그는 옆을 지나 왕녀가 들어간 객실로 따라들어갔다. 저녀석들은 대체 저기에 한데 모여서 무슨 얘길 하는것일까? 갑작스런 궁금증이 생겼지만분명 시시껄렁한 이야기일것이다. 관심을 가지지 않는게 상책이다. 그것보다배가 엄청 아픈데. 이거 무사히 델포드에 도착할수 있을까?

나는 괜스레 걱정을 하며 아픈배를 부여잡고 엘리가 있는 객실로 돌아왔다. 돌아오자 그곳에는 엘리는 없고 왠 글쟁이 놈이 있는게 아닌가? 난 갑작스레 화가 치밀어 올라 그녀석에게 물었다.

"넌 뭐하는 새끼야?"

"다 때려쳐. 쓰기 귀찮으니까."

나는 그 글쟁이놈의 면상을 후려쳤다. 그러니 그 글쟁이가 엘리로 바뀌더니 엘리가 내 면상을 도리어 후려치는것이 아닌가. 나는 정신을 잃었고, 눈을뜨자 목관 안이였다. 그렇다. 난 죽은것이다. 난 엘리에게 살해당했고, 이렇게 관안에 갇혀 땅속에 묻힌것이다.

이 얼마나 불쌍하단 말인가.

나는 마지막으로 눈물을 흘릴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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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에요.

이제까지 올린다 올린다 하다가 이제야 올리네요.

 

지금 쓰고있습니다. 저렇게 끝났지만 아직 끝난건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구요.

다음꺼 계속 올리게 되겠죠?

 

간단한 설정같은건 노나메 위키에서 확인하시면 됩니다. 그럼 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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