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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폭풍의 탑-4-

2010.11.12 18:40

azelight 조회 수:649

강령술이란 아르키아난에서도 대단히 위험하게 취급되는 주문학파다. 금지학파로 지정되진 않았지만 영을 접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행위로 그들이 더 이상 현세의 상식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이라는 이유는 아니었다.

 

이유는 단 하나.

 

주문이란, 구성이란, 마법이란 본질적으로 사용자를 그 힘의 근원으로 끌어당길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소위 악이라고 부르는 요소를 가진 근원을 사용하는 주문을 금하는 것이었다.

 

강령술이 위험한 취급을 받는 이유는 단 하나다.

 

속세에 벗어난 정신을 가진 영들과 같이 마법사가 변모하지 않도록. 혹은 그런 상황을 경계하도록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힘에는 인력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 사실을 잊지 않도록.

 

그리고 그 사실을 금기를 범한 마법사. 베이커드 소란티는 잘 알고 있었다.

 

베이커드 소란티. 전직 아르키아난의 마법사이며 전직 이단 마법사이자 현직 방랑 마법사.

 

지금 영을 제압하기 위한 방어진을 짜는 동안 그는 자신을 끌어당기는 어두운 의지를 감지했다.

 

그것은 마법사들이 응당 가지는 인격의 가면. 한 끗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정교한 주문을 완성시키고 힘이 가진 인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마법사가 소유하는 인격의 가면이 내는 속삭임이었다.

 

한 때 타락했던 자신을 지배했던 가면의 속삭임.

 

베이커드는 정신을 집중했다. 그는 방어진을 짜고 있을 뿐이지만 강령술 자체를 행하고 있는 루시엔의 존재가 그의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어찌나 그 유혹이 강렬한지. 하지만 베이커드는 자신의 의지를 붙잡을 수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저 가면을 뒤집어쓸 생각이 없었다.

 

그건 독이든 잔을 마시는 것과 같지.

 

스스로에게 경고하며 베이커드는 주문자를 새기는 일에 진지하게 집중했다. 저 루시엔이라는 이름의 계집은 그 사실을 알고 있을까?

 

베이커드는 알 수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장담할 수 없었다.

 

처음 그녀를 봤을 때는 그는 놀랬다.

 

마법사들은 칭송해마지 않는 시조마법사들이며 엘루의 선조인 엘드린인 라니아를 보았을 때 느꼈던 놀람은 이 작은 소녀가 그에게 준 충격에 비하면 하잘것없을 정도였다.

 

아미 동료들은 전부 전문적인 마법에 대해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모르겠지만 루시엔은 정말 상궤를 벗어난 괴물 중의 괴물이었다.

 

솔드가 하도 천재니 뭐니 하는 발언을 해댔지만 이건 그딴 수식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주문인격을 사용하지 않고 소환술과 강령술을 행한다는 것 자체가 마법사로서 언어도단이라고 해야 할까?

 

아르키아난에서 천재라고 불리는 마법사들을 몇몇 봐온 베이커드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전제였다. 천재란 칭호 따윈 루시엔이 보여주는 능력을 백분 지일도 표현하지 못하는 것임이 분명했다.

 

주문인격을 만들지 않는 마법사는 결코 자신이라는 주체를 존속하지 못한다. 보다 강력한 흐름, 보다 강력한 인력에 이끌려 내려가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될 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저 소녀가 가진 재능이란 얼마나 대단하고 소중한 것인가?

 

베이커드가 자신에게 스스로 질문해도 알지 못할 것이다. 저 아르키아난의 위대한 바람계곡의 샤스탄이라면 알 것인가?

 

쪼무락거리며 찬찬히 소환진을 짜는 루시엔을 보았다. 그는 가지지 못했던 재능. 타락했을 때조차 손에 넣을 수 없었던 힘.

 

루시엔은 그런 것을 가지고 있었다.

 

이 감정은 질투인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베이커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 이건 질투다.

 

왜 그래요?”

 

루시엔의 말에 베이커드는 비로서 그가 그녀를 너무 오랫동안 쳐다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답지 않은 행위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그는 어영부영 넘겼다.

 

아아. 오늘따라 자네 재능이 송로버섯처럼 빛나 보이는 건 처음이라네. 정말 눈부시군.”

 

칭찬처럼은 안 들리네요.”

 

루시엔은 피식 웃었다.

 

! 아니네. 최고의 찬사일세.”

 

양팔을 벌리며 과장된 자세로 베이커드는 호소했다.

 

송로란 귀한 것이라네. 최고급 식재이지. 가장 값비싼 보석과도 비교되는 고급 식재 또한 재능의 희소함을 칭하는 단어로서 충분히 가치 있지 않은가?”

 

그 말에 루시엔의 뒤에 서 있던 라니아가 딴죽을 걸었다.

 

비교대상이 먹을 거란 점에서 이미 에러야.”

 

먹을 거라고 차별하지 말게.”

 

그냥 평범한 비유를 들면 어때? 너 썰렁하다고.”

 

. 썰렁하다고?”

 

베이커드의 입이 쩍 벌어졌다.

 

. 그런 말은 처. . 처음 듣네만.”

 

당황한 듯이 말을 더듬거리며 베이커드는 턱밑을 손등으로 훔쳤다.

 

나도 하는 건 처음이야. 너는 그 정도로 심각해.”

 

엄청난 모욕이로군. 라니아. 자네는 본인에게 엄청난 모욕감을 줬네.”

 

모욕이라고 느낀다면 고치시지.”

 

어이 그렇게 잔혹할 수가. 그대의 잔혹함에 마치 딸기 케이크의 딸기를 빼앗긴 느낌이네.”

 

, 그건 왠지 공감 간다.”

 

저도요.”

 

그건 공감 가는 거냐?”

 

솔드는 왠지 외톨이가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세 명이 다 같이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공감하고 있는데 혼자서 이해하지 못하고 멀뚱하게 있으면 그런 느낌이 마련 아닌가? 물론 솔드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리고 현명하게 재빨리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일을 진행시키기로 했다. 진지한 표정으로 강령술을 시작할 것은 루시엔과 베이커드에게 요구한 것이다.

 

, 시작하겠어요. 물러서 주세요. 생자가 많다는 건 그들에게 불쾌할 수도 있어요. 아니면 다른 욕망을 자극하거나. 대화는 한 사람만하고 나머지 사람은 벽 뒤에 숨는 것이 났겠어요.”

 

잠깐. 그럼 대화는? 네가 하겠다는 말은 아니겠지?”

 

설마요.”

 

그렇게 말하고 루시엔은 라니아를 가리켰다.

 

그건 라니 언니가 할 일이에요.”

 

? 내가?”

 

지적당하자 놀란 듯한 라니아를 보고 루시엔 작게 웃었다.

 

그렇게 놀란 것 없는데. 누가 생각해도 언니가 적임이에요. 엘드린의 영성은 광휘 그자체이니까요. 만약 영들이 악의적이라고 해도 라니 언니를 섣불리 건드릴 수 없을 거예요.”

 

, 그건 확실히.”

 

베이커드가 끼어들었다.

 

맞는 말이네. 엘드린의 속성은 음적 존재들의 천적이지 옳은 반응이야. 하지만 자넨 어쩔 건가? 강령술을 사용하는 것은 자네다만?”

 

당연히 저도 숨어야죠. 너머의 존재들의 이목을 속이는 일은 제 전문이니까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언니 그럼 부탁할게요.”

 

쾌활하게 루시엔은 라니아에게 말했고, 라니아는 마치 허가를 구하는 듯 솔드 쪽을 흘낏 봤다. 솔드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고 라니아는 더 이상 가벼운 표정으로 루시엔을 향해 맡겨줘.”라며 주먹을 쥐어 가슴을 쳐 보였다.

 

그럼 여기 서 주세요. 저는 반대편에 가 있을 테니까요.”

 

루시엔이 지정해준 자리에 라니아가 서자 그녀는 주의 깊게 위치를 살펴보더니 소환진을 둘러 반대편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푸른빛의 투명한 월장석을 꺼내 배치하고 빛의 정령을 치웠다. 순식간에 방 안은 어두워졌지만 월장석이 내는 은은하고 약한 빛이 주변을 흐릿하게 비췄다. 한 순간 방안을 엄숙하고 무거운 분위기 속으로 몰아간다.

 

작은 손을 들고 루시엔이 나직하게 영창하기 시작했다.

 

고루하고 긴 주문을 외우며 루시엔이 손짓할 때 마다 월장석의 빛이 흔들거렸다. 마치 그녀의 손짓에 반응하듯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는 반복한다. 베이커드만이 그 속에 규칙성을 찾아낼 수 있었다. 본능으로 주문을 사용하는 엘드린이 라니아와 마법에 문외한인 솔드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실질적으로 소환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저 월장석 빛의 흔들림이라는 것을.

 

베이커드가 루시엔의 영창에 집중하는 동안 솔드와 라니아는 다른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루시엔의 영창이 고조 수록 방의 중앙. 즉 소환진의 내부에서 서서히 윤곽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월장석의 빛을 받아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윤곽은 점점 선명해지고 정교해져 갔다. 이윽고 그것은 로브를 입은 남자의 형상을 취했다. 이목구비를 확실히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흐릿하나마 인상이라는 것을 가질 수 있을 정도의 형태를 갖춘 것이다.

 

아아.”

 

루시엔의 소환에 불러내진 유령은 거칠고 명확하지 못한 신음을 흘리곤 발광하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불완전한 환영처럼 잔상을 일으키며 흔들리는 유령은 부정형처럼 뭉개지며 라니아를 공격하려했다. 하지만 결계에 되팅기며 유령은 뭉글거리다가 처음 나타날 때 보여줬던 형태로 돌아왔다.

 

그리곤 부들부들 떨면서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이상하군. 이상해. 그 빛은 정명하고 결계는 협회의 방식인데. 분명 놈들이 불렀을 거라고 생각했거늘. 묻노라. 그대는 아르키아난의 마법사인가?”

 

아니. 하지만 아르키아난의 부탁을 받고 왔어. , 이름은 라니아. 월궁 라니아야. 그대는 누구지?”

 

모험가인가? 아르키아난의 의뢰를 받은. 내가 누군지 중요치 않네. 하지만 경고하지. 어서 여길 빠져나가는 게 좋을 거라네. 더 이상 있다간 봉변을 당하게 될 거야. 그것도 아주 끔찍한. 정말 끔찍한. 죽음으로도 도망칠 수 없네. 도망칠 수 없어!”

 

처음에는 조금 침착하던 유령은 점점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비명처럼 소리쳤다.

 

아아아. 우리는 충분히 경계했네. 경계했는데. 이 건물이 영역 밖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덫이야. 걸쳐있다는 것 자체가. 어쨌든 우리는 여길 지켰네, 하지만 그게 한계네. 그게. 살육 당했을 뿐이네. 아아아악.”

 

발음은 정확했지만 유령이 하는 말 자체는 횡설수설이었다.

 

라니아가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라곤 이 지역이 위험하다는 이야기정도였다. 그거야 알고 있던 바고. 라니아가 원하는 것은 이 장소가 왜 위험한지였다.

 

잠깐 침착해. 놈들이라는 게 누구지?”

 

그게 누구냐고?”

 

유령이 놀란 듯이 발광을 멈추더니 멍한 표정으로 라니아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라니아는 속으로 으악. 완전 제정신이 아니잖아. 이런 걸 어떻게 상대하라고!’라며 비명을 질렀다. 상태가 안 좋은 게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유령은 멍한 표정을 짓고 한참을 있더니 입만 움직여 어조 없이 술술 단어들을 내뱉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어드는 혼돈. 벌레군집의 여왕. 속삭이는 모든 것의 지배자. 오오옷. 아아악.”

 

유령이 다시 발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 전과 달랐다. 진한 공포와 두려움이 꾸역꾸역 안개마냥 일행의 뇌리를 파고들기 시작한 것이다.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아악! 잡혔다. . 잡혔다. . . 발가악!”

 

동시에 거대한 검은 손이 튀어나와 유령을 붙잡았다. 유령은 발악을 하면서 주문을 영창했고 실제로 성공했다. 주문은 장막 너머의 상대를 맞추는 듯 했지만 별 효과가 없는지 마법사는 그대로 끌려가 버렸다.

 

. 뭐지.”

 

당황한 루시엔이 소환진으로 다가가려는 순간 루시엔이 저지했다.

 

멈춰요!”

 

창백한 표정의 루시엔은 재빨리 소환진을 돌아 일행이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뭔가가 저 너머에 있어요. 엄청나게 사악하고 강력해요. 이런 건. 이런건. 이런건 그때 봤, 아악!”

 

머리를 양손으로 쥐어 싸며 루시엔은 비명을 질렀다.

 

우르릉! 하고 여관 밖에서 뇌명이 울렸다. 하지만 그 외에 폭발음과 파괴음이 소환진 속으로부터 울려 퍼지고 있었다.

 

유령과 검은 손이 대결을 벌이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것도 치열하고 장렬하게!

 

대형!”

 

솔드가 소리치며 앞으로 나오자 라니아가 재빠르게 솔드의 뒤로 비켜서서 손가락으로 수호진을 겨눴다. 그리고 베이커드는 라니아의 반대편에 나란히 서서 허리춤에 두르고 있던 갈고리 달린 밧줄을 풀어냈다.

 

으아아. 제길. 뭔 놈이지?”

 

글쎄. 나로선 모르겠네.”

 

갑작스럽게 시작된 전투에 당황한 베이커드와는 달린 솔드는 침착하게 등 뒤의 봉을 빼내들며 견제자세를 취했다.

 

그 순간 결계 내부로부터 들려오던 소리가 조용해졌다. 솔드는 침착함을 잃은 루시엔을 대신해 베이커드에게 빛을 만들라고 작게 재촉했다. 베이커드는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 조심스럽게 손아귀에서 하얀 광구를 만들어냈다.

 

루시엔이 불러낸 빛의 정령처럼 눈에 지장이 없는 빛을 내는 것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밝은 빛을 냈다.

 

루시엔. 적이면 고개를 들어.”

 

라니아가 움츠린 루시엔을 발꿈치로 살짝 차면서 말했다. 제대로 돌봐주고 싶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이정도 뿐이었다. 다행이 루시엔은 알아들었는지 훌쩍이며 일어났다.

 

. 훌쩍. 끔찍해요. 너무 끔찍해요.”

 

하소연하듯이 말하는 순간 결계 내부의 공간이 찢어지듯 금이 가더니 다시 검은 손이 나타났다. 검은 손은 결계를 한번 후려쳤지만 결계가 끄떡없자 금으로 서서히 몸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자글거리는 벌레소리기 결계로부터 흘러나왔다. 수 만마리 벌레들이 모여 한대 움직이는 것 같은 소름끼치는 소리였다.

 

역시! 기어오는 혼돈의 종속인가!”

 

베이커드가 소리쳤다.

 

그렇군. 기어오는 혼돈. 벌레의 여왕. 제길. 이 놈들 묶인 신의 부하인 벌레 무리네. 재수 옴 붙었군.”

 

묶인 신이라고?!”

 

솔드는 경악했다.

 

묶인 신.

 

그것은 제3시대가 오기 전 세상을 한 번 멸망시킬 뻔 했던 여섯 외신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아아, 이로서 용의 조락과 관련 있을 가능성이 늘었는데.”

 

마음에 안든 다는 듯 애매한 어조의 라니아의 말. 하지만 솔드가 분개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망할 마법사. 이런 중요한 정보를 말하지 않다니. 돌아가면 그 자식 패줄 테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이상해. 묶인 신들과 관련된 형상인데 어째서 애던이 아직 깨어나지 않는 거지? 그가 용의 조락과 대적하는 것은 운명과도 같은 거라고 그 자가 그랬잖아.”

 

라니아의 의문에 대답한 것은 솔드가 아닌 베이커드였다.

 

모르겠지만. 아마, 용의 조락이 개입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어쩌면 저 탑에 묶인 신과 관련된 뭔가가 있었고, 용의 조락과는 별개로 깨어난 것일 가능성도 있어. 그렇다면 납득이 되지.”

 

다들 집중해. 나온다.”

 

솔드의 말이 끝나자마자 부정형의 검은 존재가 결계 속을 채우듯이 꽉 들어찼다.

 

그 순간을 노리듯. 솔드가 움직였다.

 

봉의 끄트머리를 한 손으로 잡고 온 기력을 모아 회전을 실은 찌르기를 내쏘듯이 뻗는다. 솔드의 비기인 선룡(旋龍). 막대한 회전력과 기력이 실린 봉은 부풀어 올라 깨지기 직전인 결계를 깨부수고 벌레무리의 상반부를 관통한 것도 모자라 방의 절반을 소용돌이로 뜯어 날렸다.

 

선수필승!”

 

솔드를 피해 라니아가 오른쪽으로 뛰며 손가락에서 광탄을 내쏘았다. 광탄들은 선룡을 사용하고 봉을 당기는 솔드의 곁을 거의 스치듯이 지나가며 벌레무리의 나머지 부분을 강타했다.

 

그 위를 마무리라고 짓는 듯 불타는 갈고리 머리가 달린 베이커드의 밧줄이 떨어졌다. 벌레들을 상대할 때는 불이라는 평이한 발상이었지만 효과는 발군이었다.

 

끝인가?”

 

솔드가 좀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스스로도 이렇게 쉽게 끝났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듯한 어조였다. 확실히 선룡을 맞고도 멀쩡한 상대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면하기도 전에 루시엔이 비명을 지르며 내뺀 것 치고는 싱거운 결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아니에요!”

 

비명처럼 루시엔이 경고했다.

 

무너졌다고 생각했던 벌레무리의 파편이 울렁이더니 폭발하듯이 검은 기운을 쏘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우옷!”

 

솔드는 놀라서 한 걸음 물러섰다. 그 순간 베이커드가 싹 표정을 바꾸더니 주문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주문이 완성되기 전에 검은 기운은 처음 봤던 손으로 변하더니 베이커드를 덮쳤다.

 

그러나 솔드가 손을 막아섰고 빠른 연속 찌르기가 손을 물러나게 만들었지만 손은 포기하지 않고 침대를 집어 들어 솔드에게 내려쳤다. 라니아가 옆에서 역장 화살을 발사하지 않았다면 주문을 영창하던 베이커드도, 막아서던 솔드도 둘 다 무사하지 못했으리라.

 

북쪽에서 온 자들이여! 북으로 돌아가라.”

 

솔드가 손을 앞으로 내밀러 말하자 손은 한 순간 움찔하며 물러섰다. 그러나 손은 베이커드의 주문을 저항하듯 부들부들 거리며 버텼고 갈라지듯이 촉수를 뻗어 라니아, 솔드, 베이커드를 각각 공격했다.

 

솔드는 봉을 휘둘러 공격을 퉁겨냈지만 라니아는 반격에 성공했으면서도 다리를 잡혀 여관 밖으로 내던져졌고 베이커드는 그 자리에서 바닥에 패대기쳐졌다.

 

꺄아아아악!”

 

라니아의 비명이 멀어져 간다.

 

, 제길!”

 

욕설을 내뱉으며 솔드는 공격을 피했다. 뒤의 벽이 박살나는 소리가 들리는 와중에 자세를 추스르고 다시 한 번 선룡을 날리려.

 

순간 시야가 뒤집히며 격렬한 충격이 등을 덮쳤다.

 

그림자를 타고 파고든 벌레무리의 촉수에서 돋아난 손이 솔드의 발목을 붙잡고 잡아당긴 것이다.

 

부츠가 뭉개지는 느낌이 드는 순간 솔드는 어떻게든 허리힘만으로 선룡을 날리기 위해 힘을 모았지만 끌려 올려가 휘둘리기 시작하자 두 손 놓을 수밖에 없었다.

 

공간만 충분했다면.

 

그런 생각을 할 때 솔드는 부유감을 느꼈다.

 

라니아처럼 내던져졌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그는 추락하지 않고 소용돌이치는 바람을 타고 바닥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이런 일이 가능한 사람은 한 사람 뿐이다.

 

괜찮아요?”

 

루시엔. 숨어있어!”

 

다가오려는 루시엔에게 손을 내밀며 막은 솔드는 몸을 퉁기며 일어났다. 벌레무리는 새의 수십 개의 날개를 이어 붙여 만든 듯한 루시엔의 정령 엘자와 베이커드의 협공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베이커드는 얼음 낫을 단 또 하나의 갈고리 밧줄을 꺼내 두개의 밧줄을 다루며 분전 중이었다.

 

솔드! 붙잡겠어! 결정타를.”

 

말을 채 끝내지 못하고 베이커드는 황급히 덮쳐오는 손을 피했다. 부정형으로 온갖 형상을 갖추는 벌레무리의 공격은 예측불허인데다가 속도도 빠르고 힘도 강해서 붙잡는다고 얼마나 소용있을지 알 수 없었지만.

 

솔드는 베이커드를 믿고 자세를 잡았다.

 

그 순간 베이커드가 붙잡히는 듯 했지만 인화성 물약을 던져 막아냈다. 촉수는 움츠러 들렀고 엘자가 일으킨 바람이 벌레무리를 휘감아 올렸다. 그 순간을 노렸다는 듯 베이커드는 숨을 들이시더니 입으로 불길을 뿜었다.

 

불길은 엘자가 일으킨 바람을 타고 불꽃의 소용돌이를 만들어 내 완전히 벌레무리를 감쌌다.

 

지금이에요.”

 

루시엔이 외치자 솔드는 전신전령 모든 투기를 모은 선룡을 내질렀다. 가능한 모든 기를 끌어모은 일격은 여력을 남겨뒀던 처음 공격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위력으로 베이커드와 엘자 합작인 불길의 소용돌이와 벌레무리를 그대로 쓸어 담았다.

 

그 위력은 여관 밑바닥을 뜯어내고 솔드 정면에 있던 모든 물체를 모조리 날려버릴 정도.

그러나 솔드는 자세를 풀지 않았다. 완전히 죽었다고 생각한 상태에서 부활한 처음 같은 상황을 또 당할 마음은 없었다.

 

끝났어요. 이번에는 확실해요.

루시엔이 확인하고서야 겨우 솔드는 겨우 자세를 풀었다.

 

후우.”

 

길게 숨을 들이고 쉬고 솔드는 봉을 등에 꽂아 넣었다. 그러나 아직 다 끝난 것이 아니었다. 내 던져진 라니아를 찾으러 가야하는 것이다.

 

만약 여관 앞의 절벽으로 떨어져 내렸다면.

 

소용없을지도 모른다.

 

솔드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했다.

 

라니 언니를 찾으러 가야해요.”

 

솔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베이커드.”

 

.”

 

솔드의 진지한 표정에서 뭔가를 읽었는지 그도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엔, 나와 베이커드 둘이서 가볼 테니 너는 남아라.”

 

? 이런 적이라면 제가 필요할 텐데요? 게다가 언니가 다쳤다면.”

 

루시엔이 의아한 얼굴로 솔드롤 올려다봤다. 납득이 가지 않는 다는 속내가 여실히 표가 나는 얼굴인지라 솔드는 어떻게 설득할 지에 대해서 고민했지만 생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주문 사용자가 한명은 남아야 해. 그건 이해하겠지. 그리고 너보다는 베이커드가 경험이 많아. 이 폭우 속에서 돌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것은 네가 아니라 베이커드 일거다.”

 

하지만.”

 

하지만이고 저지만이고. 넌 발락과 함께 기다려라. 베이커드. 가자.”

 

불만스러운 루시엔을 버려두고 솔드는 베이커드와 함께 서둘러 계단을 내려왔다. 부디 그가 생각하던 최악의 상황만이 아니길 속으로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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