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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폭풍의 탑-3-

2010.11.09 21:37

azelight 조회 수:671

  솔드가 침낭을 늘어놓고 필요한 도구들을 재점검한 후 난로에 불을 붙이는 동안 일행의 주문사용자들 또한 그들이 해야 할 일인 성에 제거와 결계 구축을 끝냈다. 다만 발락만은 미동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를 방해하지 않았다. 이제부터 그들은 2층을 탐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바위종족으로서 무게가 타종족에 비해 특별히 많이 나가는 발락을 2층으로 올려 보낸다는 발상을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유는 싸우다가 바닥을 꺼트리며 추락할 가능성이 너무나도 높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여기서 애던을 지키고 있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것이 묵언 속에 동의하고 있는 내용이었다. 물론 당사자인 발락 또한 포함해서.

  “우선 식사부터 하는 게 어떤가?”

  마지막에 미적미적 걸어온 베이커드가 일행에게 권해왔다. 말하는 동안에도 배에서 꾸르륵하는 소리가 나는 것이 왠지 모르게 그의 권유에 절실함을 묻어나오게 만들고 있었다.
  “하아. 분위기 깨네. 비장하게 2층으로 올라가야 하는 장면일 텐데.”

  라니아가 불만스러운 듯 중얼거리자 루시엔이 까르르 웃었다.

  “이건 노래가 아니니까요. 전 찬성이에요. 우리는 노래 속 영웅들이 아니니까요. 여유가 있을 때 먹고, 힘내서, 쓰러뜨리죠.”

  “흐응. 역시 루시. 베이커드를 닮아가고 있는 거 아냐? 왠지 먹는 이야기에 적극적인게.”

  “아니에요!”

  루시엔의 볼이 부풀어 올랐다.

  “정말? 정말, 정말?”

  놀리듯이 반복해서 질문하는 라니아를 보고 루시엔이 고개를 팩하고 돌렸다. 그리곤, “저 삐졌어요.”라는 듯 곁눈질로 라니아를 노려봤다. 반대로 라니아는 여전히 헤실헤실 웃으며 루시엔을 마주보고 있었다.

  “그쯤 해둬라.”

  딱. 딱. 하고 두 사람의 머리에 꿀밤을 떨어뜨리며 솔드가 한심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루시엔은 억울하다는 듯 맞은 곳을 감싸 쥐고 솔드를 올려보았지만 솔드는 씨도 안 먹힌다는 듯 냉정한 표정을 지었다.

  “다들 좀 더 진지하게 행동하도록. 이건 목숨이 걸린 일이야. 베이커드. 먹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세나. 안전을 확보하지 않고 여유를 부리는 일은 금물이네.”

  “버틸수가 없다만.”

  “참게나. 애도 아니지 않나.”

  “식사시간을 지킬 수 없다면 본인은 애가 되겠네. 내 생에 먹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네.”

  “이럴 경우에는 다수결이 유력한가?”

  베이커드가 때를 쓰자 솔드는 라니아와 루시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루시엔은 이미 베이커드와 같은 의견인 듯 했고. 그는 자시느이 편을 들어줄 사람은 라니아 정도라고 생각했지만….

  “그럼 배부터 채우자고. 사실 나도 좀 요기가 하고 싶긴 했거든.”

  한 번에 솔드의 기대는 무너져 내렸다.

  “어이.”

  항의를 담은 솔드의 목소리를 라니아는 대수롭잖다는 듯 대답했다.

  “걱정 말라고. 준비하는데 오래 안 걸리고 먹는 것도 금방일 테니까.”

  라니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손에서 하얀 보자기 하나를 불러내어 바닥에 깔았다. 그리고 그녀가 주문을 읊조리며 손바닥으로 보자기 위를 쓸자 손바닥 정도 크기의 빵이 나타났다. 향긋한 버터향이 물씬 풍기며 식욕을 돋우는 것이 일행들이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창조 주문 아닌가?”


  베이커드가 놀라워하며 입을 쩍 벌렸다.

  “완전한 창조는 아니지만. 어차피 여기서 오염됐을지도 모르는 도구들과 물로 조리하는 것은 찝찝하니까. 그리고 이거 생각보다 효과가 좋다고.”

  “효과라.”

  루시엔이 보자기 위에 쌓인 빵 덩어리들을 보며 흥미로운 시선을 보냈다.

  물질 창조는 효율도 나쁘면서 고난이도의 구성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사용자가 몹시 드문 기술이었다. 엘드린 처럼 타고난 마법종족이 아니라면 사용할 엄두도 내기 힘들다고 할까.

  “심력을 낭비하는 거 아닌가?”

  솔드도 창조 마법에 대해선 들은 바가 있는지 그렇게 물었지만 라니아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문제없어. 어차피 난 주문에 그렇게 의존하는 것도 아니고. 저 위에 있는 건 왠지 적대적이지 않을 것 같거든. 왠지 아까부터 꼼짝하지 않는 것 같고.”

  “흠, 근거는?”

  “그냥 감.”

  가볍게 라니아가 대답했지만 솔드는 수긍한 듯 끄덕였다.

  “엘드린은 천리를 읽는다지. 그냥 감이라도 무시할 수 없지.”

  기억을 상실하고 그 영성 또한 대부분 봉인당해 있지만 그럼에도 라니아가 엘드린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타고난 강대한 영성은 봉인당했다 해도 여전히 다른 종족들을 압도하고 있었고, 마법 종족으로서 타고난 직감 또한 예리하기 그지없는 존재였다.

  그러니 라니아가 말하는 감을 그저 감이라고 치부할 순 없었다.

  “어쨌든 이거라면 시간도 그렇게 안 걸리니까. 게다가 이건 요통이라던가 근육통에도 잘 듣고 기타 잡스런 질병도 퇴치할 수 있고, 독도 어느 정도 중화할 수 있거든. 체력도 어느 정도 회복가능하지. 나름 만능이라니까.”

  “대. 대단한 주문을 알고 있군. 그저 몸에 활력만 채울 뿐인 일반적인 음식 창조 주문과는 궤가 다른데.”

  베이커드는 연 입을 다물 줄 모르고 라니아가 창조한 빵 덩어리들을 쳐다봤다. 그래도 마법사인지 지금 그는 식욕 따윈 싹 잊고 라니아의 창조 주문에 대해서만 집중하고 있었다,
  “어디서 배웠나?”

  “응? 기억하고 있던 주문들 중 하나야. 지금까진 능력에 비해서 소모가 심해서 안 썼지만. 지금은 여독을 푸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으니. 좀 더 장기적으로 봐야지.”

  “뭐, 그렇다면 하나씩.”

  루시엔이 그렇게 말하며 라니아의 마법으로 창조된 빵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한입 베어 물자 실제 빵들과는 달리 촉촉하고 부드러워 목매임 없이 삼킬 수 있었다.

  “특이한 식감이네요. 맛도 달콤하고 부드러워요.”

  “아, 뭐. 마법으로 만든 거니까. 구성을 분석해보면 일종의 완전식품인 것 같아. 소모가 큰 값은 하는 거지.”

  “오오. 그렇군. 이거. 어음엉. 맛이응데.”

  “흐음. 확실히. 좀 다르군.”

  일행의 감탄 섞인 감상에 라니아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게다가 요렇게 작지만 포만감도 충분하지 몸을 움직이는데 방해도 없고. 만능이라니까. 저기 자고 있는 우리 리더님께도 도움이 될 거야. 자, 그럼 올라갈까.”

  라니아는 그렇게 말하곤 자신의 몫을 우걱우걱 씹으며 결계를 벗어났다. 그 뒤를 루시엔과 베이커드가 따랐고 솔드가 후미를 맡았다. 그것은 미궁을 조사할 때나 사용하는 진형이었다.

  선두와 후미에 방어력이 높고 근접 전투가 가능한 자들을 두고 가운데에 마법 능력자처럼 근접 대응 능력이 떨어지는 자들을 둬 보호하는 식의 진형으로 너비가 좁은 복도나 건물 내에서 효율적인 진형이었다.

  “이 빵. 미리 만들어 둘 수 없을까? 아주 괜찮은데.”

  계단을 오르던 중 솔드가 말하자 베이커드와 루시엔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듯으로 “응. 응.”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힘들어. 만드는데 심력 소모도 크고. 무엇보다 만들어 봤자 4시간 정도 밖에 지속이 안되거든. 이런저런 효능이 붙어있긴 하지만 개개로 따지면 좀 손해기도 하고. 시간 절약에는 좋지만.”

  “역시, 심력의 소모가 큰가 보군. 싸울 수 있겠나?”

  “그건 문제없대도. 그리고 오염된 물을 사용할 수 없으니까. 지금 상황에선 선택의 여지가 없어. 발락도 줄곧 움직이지 않고 힘을 아끼는 걸로 봐선 이 대지에서 힘을 얻어 쓰지 못하던 것 같던데. 어쨌든 먹긴 해야 할 것 아냐. 육포로 때워도 되겠지만 아무래도 지금부터 편히 쉬긴 그른 것 같고 말이야.”

  라니아의 말은 정론이었다. 아마 여유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솔드나 다른 일행들도 예측하고 있던 바였다. 아직까지 공격은 없지만 음적인 힘에 지배당한 땅은 그림자 마귀나 불사자들의 터였다. 거기다가 이 곳은 장막마저 옅어 영계과 현세의 경계가 흐트러진 장소. 그 속으로부터 나타날 그림자 마귀들이나 악마들의 숫자가 얼마나 될지 예측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솔드가 굳이 거점을 확보하려고 애쓰는 것도, 일행이 결계를 세운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만약 안전히 쉴 곳을 만들지 못한다면 밤새도록 부의 영역에서 튀어나올 영역 너머의 존재들과 싸워야 할 것이 분명했다. 더구나 폭우에 휩싸여 낮조차 밤처럼 어두운 이 곳에선 낮에도 안전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도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몰라도 본격적으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하면 쉴 시간이 없을 것이라고 라니아는 말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심력 소모가 크더라도 창조 주문을 사용해 일행의 기력을 회복시키는 방향을 선택한 것이고. 물론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이 부의 감정과 음의 원기에 오염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해서.

  “확실히. 쉴 수 없을지도 모르지. 이 곳의 위험도는 미궁이상이니까.”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고 솔드는 생각했다. 여기는 적진. 하지만 적은 물리적인 존재가 아니며 사방의 어디서든 공격해 올수 있는 비실체의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루시엔의 생각은 다른 듯 했다. 허공을 쓰다듬어 나비 같은 형태의 정령을 불러들인 루시엔은 나비를 공중에 띄워 올리며 말했다.

  “흠, 아직은 괜찮을 거예요. 이 여관은 왠지 영향에서 벗어나 있거든요. 아까도 말했지만 여기엔 시선이 느껴지지 않아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요.”

  “그거라면 나도 느꼈어. 안에 든 녀석이 우호적일 수도 있다는 발상은 애초에 거기서 나온 거니까. 하지만 확신할 수 없으니. 어쩌면 단순히 이번 일의 원인과 적대적일 가능성도 있고.”

  “어디까지나 추측이라는 말이군.”

  루시엔과 라니아의 말은 제법 많은 내용을 시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솔드는 그게 뭔지 대충 알 수 있었다.

  적어도 이 2층에 있는 존재는 저 폭풍의 탑에서 나왔을지도 모를 정체불명의 존재와 같은 것이 아닐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일행이 마음 놓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장소는 이 여관뿐이라는 말과도 동일했다.

  “추측이라도 말일세. 난 저 속에 있을 녀석이 우호적일 거라곤 죽어도 생각할 순 없군. 호밀을 쓰건 밀을 쓰건 결국 빵은 빵이고, 청어건 대구건 결국 생선은 생선이라는 사실을 굳이 상기시킬 필요 있겠나?”

  “뭐, 보면 알겠지.”

  라니아가 대답했을 때쯤에 일행은 2층 복도로 올라왔다.

  “저기네.”

  “네, 우측 세 번째 방이에요.”

  라니아는 턱으로 루시엔은 오른손을 들어 같은 방향을 가리켰다. 베이커드는 둘이 가리킨 방향을 보고서야 이상을 알아챘고, 솔드는 모험가 특유의 위기감각으로 둘이 가리킨 장소가 맞는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내가 앞장서지.”

  그렇게 말하고 가장 뒤에 있던 솔드가 나섰다. 라니아의 반사신경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탐색이라면 모험가로서 경력이 있는 자신이 나서는 것이 나을 거라고 솔드는 판단한 것이다.

  라니아나 루시엔의 감각이라는 것이 선두에 안 선다고 발현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장비를 좀 더 방어적인 형태로 구성한 사람이 선두에서 행동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었다.
  거의 발소리를 내지 않고 솔드는 움직였다.

  그의 접근에도 방 안에선 특별한 움직임은 느껴지지 않았다. 솔드는 봉으로 노크를 가장 문을 가볍게 두드려보고 반응을 기다린 후 문을 열면서 뒤로 몸을 뺐다.

  끼이익하고 경첩이 마찰음을 냈지만 어떤 반응도 없었다. 공격이건, 비명이건, 마법적인 변화건. 여관을 처음 들어왔을 때처럼 치명적인 냉기가 흘러들긴 했지만 미리 준비하고 있던 베이커드가 냉기를 상쇄하자

  어때? 라는 의미를 담은 눈길로 솔드가 뒤로 살짝 돌아보다 루시엔과 라니아, 베이커드는  아무 변화도 없다는 표시로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방안으로 들어가려는 솔드를 위해 루시엔이 정령을 날려 보냈다. 정령은 하늘하늘 날아가 솔드의 코앞에서 빛을 비췄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정령은 빛은 대낮처럼 밝으면서 전혀 그의 눈을 자극하지 않았다. 덕분에 솔드는 정령을 앞세우고도 방 안으로 상세히 살필 수 있었다.

  방은 4인실이었고 예상한대로 그리 넓지는 않았다. 하지만 깔끔하게 정리된 상태였고 손님이 있었다는 흔적은  침대 곁에 각각 놓인 네 개의 짐가방이 전부였다.

  “아무것도 없는데.”

  적어도 눈에 띄는 것은 없기에 솔드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이 방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보이진 않아도 낌새는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솔드. 조심해. 중심의 경계가 흐릿해. 그 쪽이 통로 같아.”

  라니아의 경고에 따라 솔드는 방의 중심으로 다가가지 않고 침대를 타 넘으며 바깥쪽으로 돌았다. 그리고 솔드가 지나간 자리로 베이커드, 루시엔, 라니아가 순서대로 들어오며 자리를 차지했다.

  “음, 여기 아르키아난의 마법사들이 머물렀던 것이 틀림없네. 저 가방들 속에서 희미하지만 마법적인 기운들이 느껴지는군. 익숙한 느낌이네.”

  “느낄 수 있나?”

  “아아. 희미해서 가깝지 않으면 무리다만. 게다가 여기서도 그렇게 확실치 않아. 이상하군.”
  “장막이 엷어서 그런 것 같아요. 하지만 여긴 저 탑과는 좀 다른데요. 작고. 이 위치에 집착을 가진 뭔가의 의사가 느껴져요.”

  “일종의 왜곡현상 같아. 영적으로 말이야. 하지만 방 중앙으론 가지 않는 게 좋아. 생기를 뺏길 수도 있으니까.”

  라니아의 경고가 없어도 방 중앙에서 풍기는 냉기가 주변의 접근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베이커드는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짐가방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뭐해?”

  “쓸만한 게 있나 해서 찾아보고 있네.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은 가능하면 전부 사용해봐야 하지 않겠나?”

   라니아의 질문에 베이커드는 대답한 후 짐가방 속에 몸을 쑤셔 넣듯이 해서 속을 헤집었다.

  “마법장비? 하지만 우리가 가진 것보다 더 좋은 게 있을리가?”

  “소모성 장비를 보충하려는 거네. 맛 나는 음식도 한 번 먹으면 끝인 것처럼 한번 맛보면 다신 쓸 수 없는 것들도 있잖은가.”

  “그렇군요. 아. 마법물약 같은 게 있을지도 몰라요. 저도 도울게요.”

  “그럼, 다른 걸 조사해주게.”

  “네.”

  “왠지 조사대상이 바뀐 것 같읁데. 음, 그럼 나는 어쩔까.”

  라니아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 방을 둘러봤다. 중앙에는 냉기의 근원처럼 보이는 것이 있지만 처리하기에는 왠지 곤란해 보이고 당장 위험해 보이지도 않는다.

  처음에 뭔가 있을까 싶어 불안불안하면 올라왔던 것 치곤 싱거운 결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솔드는 뭘 생각하는지 턱을 괴고 중얼중얼 말을 내뱉고 있었다. 

  “영적으로라. 그리고 의사를 가진 존재.”

  그러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루시엔. 저기 너머에 의사를 가진 존재가 있다고 했었지?”

  솔드의 물음에 루시엔은 짐가방의 내용물을 빼내는 일을 멈추고“네.”하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저 너머에 있는 존재를 소환하는 것도 가능한가?”

  “강령술을 말씀하시는 거세요?”

  “아, 그래. 그거.”

  “가능하긴 한데.”

  루시엔은 곤란하다는 듯 천장으로 시선을 보냈다.

  “영과 소통하려면 단순히 소환하는 것만으로는 안되요. 결계를 세우고, 그들의 이성을 유지시켜줄 원기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하죠. 저 혼자서는 무리에요.”

  “그건 본인이 도와줄 수 있네.”

  가방에 머리를 처박은 체 베이커드가 손만 들며 말했다.

  “강령술을 하게? 오히려 저쪽 주의만 끄는 거 아냐?”

  라니아가 반대 의견을 펼쳤지만 솔드는 손을 들어 제지했다.

  “반대로 네 말대로 협력자를 얻을지도 모르지. 여기는 마법사의 방이고. 마법사들은 정신체로 장막 너머로 가는 것에 익숙해. 어쩌면 그런 자들이 넘어가 있을지도….”

  자신이 없는지 솔드는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베이커드에겐 딱히 그렇지만도 않은 듯 “아주 무리한 생각은 아니군.”이라며 솔드의 생각에 동조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육체를 잃어도 장막 너머의 영역에서 자신을 유지하는 마법사들 또한 더러 있네. 충분히 가능하네. 시도해볼 가치가 있어. 오히려 왜 내가 그 생각을 못했는지 이상할 정도네.”

  “그런거야?”라는 라니아의 확인에 “그런거네.”라고 베이커드는 끊임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좋아요. 그럼 강령술을 시도해보죠. 베이커드도 도와줘요.”

  “나는?”

  “라니 언니는. 음. 거기서 보고 계세요.”

  “네.”

  루시엔이 생긋 웃자 라니아는 서운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벽에 등을 기댔다.

  “아아, 보고만 있으면 지겨운데.”

  “그러면, 내려가서 발락이랑 예기라도 하고 있어.”

  반대편에서 팔짱을 끼고 벽에 등을 기댄 솔드가 그렇게 말하자 라니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하는 수 없다는 듯.

  “됐어. 그냥 있을래. 그 바위, 본격적으로 일이 시작될 때까지 꼼짝도 안 할걸.”
  이라고 말하며 덤으로 손사레를 쳤다.

  “하긴. 어떤 면에선 전력 반감이야. 비까지 오고 있고.”

  솔드는 오늘 온종일 안절부절 못하고 침묵만 지키고 있던 발락을 떠올렸다. 노르위펜에게 있어 물은 천적이었다.

  대지에 풍화를 가져오는 것이 바로 물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어째서 그들은 물을 두려워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었다.

  “게다가 우리 리더님도 깨어나시지 않으시는 군. 그것들과 대면한다면 필연적으로 그는 깨어난다고 했던가?”

  “난 자세하겐 모르지만 발락은 그렇다고 했어.”

  “그렇다면 적어도 이번 적이 그들은 아니라는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군. 그 마법사놈! 역시 사기였어.”

  솔드는 분개했다. 마법사 오르젝. 아르키아난의 선임 마법사이자 이번 일의 의뢰자인 남자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솔드는 그로부터 어떤 호감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인상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마치 상쾌한 바람 같은 미청년. 그러나 그에겐 왠지 신뢰할 수 없는 면면들을 느낄 수 있었다. 그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지만 솔드는 결코 자신이 그와 친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한 순간에 알 수 있었다.

  “알 수 없어. 단지 때가 안된 것일 뿐일 수도 있으니까. 당사자와 이야기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걸.”

  “애던이 스스로 그걸 인식할 수 있다는 건가?”

  “아마도. 발락은 그렇게 믿는 것 같았어.”

  “뭐, 좋아. 이번 소환으로 어느 정도 정보를 얻을 수 있다면 아마 알 수 있겠지. 아르키아난의 마법사들은 그들에 대해서 알고 있을 테니까.”

  “동감이야.”

  라니아의 눈길이 강령술을 준비 중인 두 사람에게로 가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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