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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폭풍의 탑-2- 수정

2010.11.07 00:25

azelight 조회 수:539

마을은 황량했다.

 

항구도시가 가진 특유의 발랄함이야 이렇게 폭우기 치는 시기에 볼 수 없다고 쳐도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생활음이 전혀 들리지 않는 걸.”

 

라니아는 방수포로 가려진 귓가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와우. 이 폭우 속에서 그런 것도 알 수 있는 건가?”

 

대충은.”

 

베이커드가 감탄하자 라니아는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폭우와 천둥이 내는 요란한 소음 속에서 건물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구분해 잡을 수 있다는 것은 엘루들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하지만 엘드린의 감각이 흔히 용에 비유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확실히. 불빛도 전혀 없는 것이 이상하군. 사람이 산다면 이렇게 될 순 없는 법인데.”

 

솔드도 이상을 느끼는 듯 했다.

 

슬슬 저녁 식사 기산이 다되어가고 있는데도 지붕 위로 연기가 올라오는 집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데다가, 이렇게 어두운데 불을 켠 집도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대놓고 이상을 드러내면 누구라도 의심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고양이 앞의 쥐 기분이 드는 것 같은 것은 무지 이상할 것 같나? 지금 고양이가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꼭 그런 기분이 드네.”

 

시선 같은 게 느껴지긴 해요. 부담스러운데요.”

 

루시엔의 말에 일행은 공감했다.

 

마을 전체가 알 수 없는 기운에 휩싸여 있었고, 그 기운은 적어도 일행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것이 틀림없었다. 때문에 일행은 모두 감시받는 기분에 휩싸여 있었다. 그건 결코 잘못된 생각이 아니었다. 실제로 뭔가에 감시받고 있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일행은 걷는 것을 멈추고 잠시 멈춰섰다.

 

정체를 알아낼 수는 없을 건가?”

 

솔드의 물음에 베이커드는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저었다.

 

무리네. 이 주변 공간은 적어도 그 존재의 지배를 받고 있거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네. 그 속에서 감지 주문들은 대체로 힘을 못 쓰지. 적어도 내가 아는 상식으로는 그러네.”

 

맞나?”

 

솔드의 시선이 라니아에게로 옮겨가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좋아. 발락은? 자네의 감각으로 뭔가를 분별할 수는 없나?”

 

지금은 무리다.”

 

짧은 부정이 돌아왔다.

 

그럼, 질문을 바꾸지. 우리를 숨길 수 있는 방법은 있겠나?”

 

없네.”

 

베이커드가 빠르게 부정했다.

 

이 공간 자체가 이미 아가리 속이네. 여기선 뭔 짓을 해도 우리는 감시당하는 수밖에 없다네. 굴려지는 혀로 이빨을 향해 몰리는 것만을 피하는 수밖에 없다네. 하지만 너무 신경 쓸 필요도 없다고 말해주지. 우리는 말하자면 장막 너머의 차원에 대해서 주시당하고 있는 거라네. 그 영향력이 당장 나타나진 않을 거야.”

 

당장은 아니지만 ** 나타나겠지. 주의하는 것뿐이라면 서두르도록 하지. 저 언덕 위에 보이는 건물이 여관이네. 일단 그곳으로 가서 쉬지.”

 

솔드가 결정을 내리자 일행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여관으로 향하기 위해선 낮지만 긴 경사로를 걸어 올라가야 했다. 도중에 4채 정도의 집이 나란히 서 있었지만 해안쪽은 뻥 뚫려 있었기에 일행은 경사를 오르며 탑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비로 젖은 진흙길을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며 걸으려고 했지만 탑이 가진 강한 현혹력은 일행을 붙들고 한시도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덕분에 일행은 몇 번이나 미끄러질 뻔했고, 세차게 흐르는 흙탕물이 실어 나른 돌덩이에 발끝과 정강이를 채였다.

 

넘어지지 않은 것은 그저 운이 좋았거나, 결코 넘어지지 않는 다리를 지닌 노르위펜 발락과 엘드린의 탑에 현혹되지 않는 라니아가 도와줬기 때문이었다.

 

바닥에 신경을 곤두세우기에는 탑은 너무나 존재감 있었고, 매혹적이었다.

 

후아.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눈을 땔 수가 없어요.”

 

그렇구나.”

 

저런 걸 보지 못하다니. 애던 오빠가 불쌍하게 느껴지는데요.”

 

루시엔의 말에 라니아가 깔깔깔 웃었다.

 

깨어나면 볼 수 있을 거야. 이 폭풍은 그리 쉽사리 그치지 않을 것 같은 걸.”

 

루시엔에게 해주는 말이었지만 반응한 것은 그 영민한 소녀가 아니었다. 가장 선두로 걷고 있던 발락이 멈칫하면서 멈춰선 것이다.

 

사실인가?”

 

. 이 비는 일종의 마법적인 거라서. 뭐라고 해야 할까. 징조라고 해야 할까? 탑의 이변과 밀접한 연결이 되어 있어. 그런 흐름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 거야.”

 

그 말은 저 탑의 이상이 계속되는 한 이 비는 계속 된다는 거군.”

 

솔드가 끼어들자 라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난리가 나지 않는 것은 이상하군. 전체적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긴 하지만 물이 괴는 곳은 없진 않을 텐데. 파도도 만만치 않고. 하지만 아래쪽이 침수된 것처럼은 보이지 않는군. 수량이 불어서 해수면도 올랐을 텐데. 이상한 일이야.”

 

착각인지 아닌지 알 순 없지만 파도는 아무리 높이 솟아올라도 결코 마을까지 닿지 않았다. 파도가 닿는 끄트머리는 항상 같진 않았지만 결코 제방을 넘어 건물까지 닿는 일 또한 없었다.

 

그런 식이라면 이 곳은 이상한 일 천지네. 상식으로 생각해선 안 돼. 장막이 옅은 지역에서는 온갖 이상한 일이 생가니 말이네.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 말게. 어서 여관으로 올라가서 쉴 생각이나 하세나.”

 

베이커드는 마법사답게 말했다. 그러자 걸음을 멈췄던 발락이 다시 걷기 시작했고 일행의 일부는 여전히 탑에 시선을 뺏기고 있었지만 더 이상 멈추지 않고 여관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여관이 아니라 흉가로세.”

 

베이커드가 운율을 넣으며 그렇게 말했고, 옆에 서있던 루시엔이 드물게 멍청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그녀의 시선은 지금 여관의 지붕으로 향해 있었다. 처마 끄트머리가 썩어서 떨어지려고 한다는 사실이 제법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라니아 또한 루시엔을 따라 처마 끝을 쳐다봤다.

 

이 여관만 이상하게 허름한데. 마을의 다른 건물들에 비하면 말야.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아?”

 

동의하네.”

 

어쩌면 이 장소만 다른 영역에 속할지도 모르겠어요. 엷은 경계에 의한 위화감이 이 장소에선 특히 드문데요.”

 

마치 정상적으로 시간이 흐른다는 느낌일까? 비어있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이 장소만 마을 전체를 뒤덮은 끈적거림이 느껴지지 않아.”

 

가장 안전한 장소라는 예긴가?”

 

솔드가 끼어들었다.

 

그렇다네. 그러나 어디까지 상대적인 의미에서 일세. 방비하지 않는다면 여기도 다를 바 없을 거네. 여긴 뭐라고 해야 좋을까. 그래. 우리에게 특별히 불리한 요소가 없는 장소? 그 정도가 어울리겠군.”

 

말하자면 혹시나 있을지 모를 위험을 차단하고 방호 주문 정도는 쳐야 한다는 거야.”

 

라니아가 거들었고 솔드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간단하군. 그럼 여길 거점으로 삼도록 하지.”

 

등에서 봉을 뽑아 들고 물러날 수 있는 공간을 만든 후 솔드는 여관의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안으로부터 냉기가 확하고 풍겨져 나왔다. 순식간에 방수포에 성에가 낄 정도의 냉기에 솔드는 재빨리 옆으로 비켜서자 빗물이 순식간에 얼어붙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방수포 위가 아니라 맨몸 위를 덮쳤다면 동상 정도는 장난이었을지도 모를 부상을 입어야 했을 것이다.

 

정말 안전하군.”

 

침을 탁 뱉고 솔드는 불평했다.

 

내부는 격리되어 있는 거였나?”

 

베이커드가 추측을 내놓았지만 솔드는 손을 흔들어 그만두게 했다. 슬슬 위험한 국면이었고 그의 수다를 들어줄 여유는 없었다. 대신 베이커드는 약간의 보호 주문을 솔드에게 걸어 주었다.

 

온 몸을 감사는 후끈한 열기와 함께 솔드는 여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뽀드득하고 눈을 밟는 듯한 소리가 바를 디딜 때마다 들려왔지만 솔드는 개의치 않고 걸었다. 여관 안은 어두웠지만 아주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가장 먼저 카운터의 윤곽이 보였다. 2층 여관답게 1층의 일부는 선술집으로 사용되는 듯 카운터 앞으로 탁자들이 서 있었고 복도로 통하는 듯한 시커먼 구멍도 보였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알 수 없었다.

 

루시엔.”

 

호명 하자마자 루시엔이 양손바닥을 마주 댄 상태로 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손바닥을 펼치자 그 속에서 빛을 내뿜는 나비가 피어났다. 나비는 하늘하늘 날아 솔드의 머리 위로 날았다.

 

나비의 불빛 속에 여관의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관은 온통 서릿발이 들어차 있었다. 벽이고 천정이고 탁자 위고 성에가 들어차 여관 내부를 하얀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습기 찬 우기인 밖과는 이계라고 칭하고 싶을 정도로 대조되는 환경이었다.

 

우웃, 여기가 제일 비정상인데.”

 

베이커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계화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몰랐다니.”

 

라니아도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건 나머지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문을 연 순간 예상하긴 했지만 여관의 내부는 밖에서 눈치 채지 못한 것이 이상할 정도로 딴판이었던 것이다.

 

공간적으로 격리 된 듯해요. 음적 원기가 느껴지는 군요. 발원지는. 저쪽이에요. 게다가 가깝군요.”

 

머리를 왼손으로 짚고 집중한 루시엔이 숙박시설로 통하는 문을 가리켰다. 그러나 그 손에 비스듬하게 위로 솟아 있는 것을 봐선 2층에 있는 방이 틀림없다는 것 또한 짐작할 수 있었다.

 

그건 나중에 살펴보도록 하지. 일단 이 곳을 쉴만한 장소로 만들어 둘 필요가 있어. 애던이 이 이상 체력을 뺏기면 정말 위험한 상태가 될 거야.”

 

내게 적합한 주문이 있네, 맡기게.”

 

베이커드가 나섰다.

 

우선 여기 다들 모여 서게. , 다들 얼굴 가리는 거 잊지 말게나.”

 

시키는 대로 서자 베이커드가 나직하게 제법 긴 주문을 외웠다. 팍하고 열기가 일며 수증기가 치솟았다. 다들 깜짝 놀란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우왁! 뭐야!”

깜짝이야.”

 

당황하는 일행들의 반응이 만족스러웠는지 베이커드는 웃으면서 혼자 좋아했다.

 

! 무슨 장난이야!”

 

라니아의 섬전 같은 펀치가 베이커드의 정수리에 작열했다. !하고 큰 소리와 함께 베이커드의 몸이 그대로 바닥에 내려 꽂혔다. 나무 바닥이 부러질 듯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이.”

 

보기에도 심했다고 생각했는지 솔드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베이커드는 벌떡하고 일어섰다.

 

으음. 점점 더 손이 매워지는 군.”

 

자네, 괜찮나?”

 

옷과 머리를 툭툭 털고 있는 베이커드의 모습에 솔드가 정색을 하고 질문했지만 베이커드는 손을 휘저어 괜찮다는 표시를 해보였다.

 

아아. 걱정 말게. 현명하게도 본인은 이런 일에 대비하고 있었다네.”

 

이런 일에 대비하지 말고 장난을 치지 않으면 되지 않을까?”

 

도끼눈으로 라니아가 말했지만 베이커드는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마치 범인은 이해하지 못 한다는 듯한 건방진 태도였다.

 

무리라네.”

 

한 대 더 때려주고 싶다.”

 

때려봐야 주먹만 아플 거 같네만.”

 

주먹을 쥐어 올리는 라니아를 솔드는 말렸다. 애초에 저런 성격이라는 것을 잘 아는데다가 적어도 베이커드가 장난만 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베이커드가 사용한 주문이 무슨 작용을 했는지 모르지만 일행의 옷을 전부 말린 것이다.

뭘 한 거예요?”

 

옷을 만지며 루시엔이 물어보자 베이커드는 건방진 태도 그대로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잖게 말했다. 하지만 내용은 듣기엔 별로 대수로운 내용이 아니었다.

 

간단한 요술이야. 빨래를 말릴 때 자주 사용했던 거지. 한 고온의 열을 한 순간에 준 거라고 할까. 지금 같은 경우엔 옷도 마르고 몸도 훈훈해지고 일석이조의 주문이지.”

 

위험한건 아니고?”

 

엘루나 하라드에게도 약간의 마법 저항력은 있다네. 미미하지만 눈만 보호하면 그럭저럭 무사할 수 있네. 물론 만일을 대비해서 주문을 걸었으니 걱정 말게. 이런 시시한 주문차고는 영창이 제법 길지 않았던가? 보게나.”

 

베이커드가 손가락을 들자 라니아와 루시엔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솔드는 의아해 했다. 그가 지금 한 일은 주문의 구성을 공개한 것이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주문 사용자들만이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솔드는 공감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발락은 볼 순 있었지만 인지가 곧 이해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진리를 체감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루세인과 라니아는 그가 말하려고 하는 바를 이해했다. 대단한 것이 아닌 저 주문을 사용하기 위해 베이커드는 먼저 일행에게 보호주문을 건 것이었다. 단지 주문이 거의 틈을 주지 않고 연속적으로 발동했기 때문에 대상자인 자신들이 그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뿐이었다.

 

잠깐. 그 주문을 사용하며 성에를 몰아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 일단 쉴 장소를 확보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 물론이네. 당연히 그렇게 사용할 생각이었지. 하지만 일단 우리 몸부터 어떻게 해야 하지 않겠나? 몸이 젖은 상태에서 이런 추위 속을 거닐고 싶은 마음이 내겐 없다네. , 그럼 작업을 시작하지. 우선 이 자리에 애던을 내려두는 게 좋을 것 같군.”

 

베이커드가 일행에게 물러서라는 손짓을 하자 모두들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들이 서 있던 자리에는 두텁게 쌓여있던 서릿발이 날아가고 없었다.

 

그럼 성에를 제거하는 작업은 맡기겠네. 나는 짐 정리나 해야겠군.”

 

발락이 조심스럽게 바닥에 애던을 내려놓는 사이 솔드는 야영 준비를 시작했다. 여관 안이었지만 그는 여관의 물건을 사용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이 지역은 음적 원기로 충만하며 이계화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일행의 마법사들은 말했다. 그리고 이 음적 원기라는 것이 불사자들이나 그림자 괴물 같은 사이한 것들을 유지하는 힘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신체에 좋은 영향을 끼칠 리도 없었다. 베이커드 식으로 말하자면 땅에 떨어진 사탕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솔드가 짐을 풀고 야영 준비를 하는 동안 라니아와 루시엔은 베이커드로 부터 간단한 강의를 받은 후 빨래 건조용 마법으로 성에들을 제거해 나가기 시작했다.

 

성에를 제거하면서 일행은 이상한 점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마치 사람들이 이 장소에 있다가 사라진 듯 탁자 위에는 음식을 벗던 흔적,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비스듬히 놓여진 의자, 마시다 만듯 반쯤 차 있는 맥주 잔, 먹다 남은 음식과 찌꺼기가 남아 있는 식기들.

 

소란이 있었던 흔적은 일절 없이 그저 그 자리에서 사람들만 사라진 것처럼 식당은 텅 비어 있었다. 더구나 사람이 일어났던 흔적조차 없으니 기이하다 못해 괴이할 지경이었다.

무슨 수단을 사용했건 이런 일이 가능한 존재는 절대 범상한 존재가 아니었다.

 

흔적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뿐?”

 

라니아가 불안불안 한 얼굴로 운을 때자 성에를 제거하고 슬슬 결계를 치려던 루시엔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 . 저도 그 생각 했어요.”

 

꽤나 불안했는지 루시엔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루시엔에게 흔적을 읽을 수 있는 기술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총명한 그녀는 식당의 광경이 뭔가 어색하다는 것 정도는 잡아냈을 것이 분명했다.

 

정말 이상해요. 불안한 느낌이 자꾸 들어요. 분명히 뭔가 놓치고 있는 게 있어요.”

 

어쩌면 이 공간의 불길함을 감지해낸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라니아는 생각했다. 정령술사인 루시엔은 마법사라고 할 수 있는 라니아와 마법사인 베이커드보다 훨씬 더 장막에 대한 감각이 뛰어났다. 그건 마치 계시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는 강력한 능력이지만 그걸 구체적인 형태로 인식할 수 없는 것이 루시엔의 단점이었다. 아마 경험 부족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맞아. 루시.”라니아는 식탁을 가리켰다. “이걸 봐. 식사를 하던 흔적이야. 하지만 일어난 흔적은 없어. 이게 네가 놓친 거 아닐까?”

 

그렇군요. 자리에서 일어났다기에도 애매하고 넣었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위치. 식사를 하던 도중에 갑작스럽게 사라졌다는 걸까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겠지.”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는 완전히 수수께끼였다. 강제 공간이동이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다수의 인간들을 인식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동시킨다는 것은 그야말로 신이나 가능할 법한 능력이었다.

 

잔존 사념을 읽어 봤어?”

 

. 하지만 마치.” 루시엔은 혀로 입을 핥으며 날카로운 눈빛을 지어 보였다. “누군가가 먹어치운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잔존 사념이란 그렇게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닌데 깨끗하달 까.”

 

흐음.”

라니아가 손으로 턱을 괴며 고민했지만 답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너도 요즘 베이커드의 영향을 받는 것 같구나. 하필이면 먹는 것에 비유하다니.”

 

? . 그랬나요?”

 

루시엔이 깜작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그런 식으로 말했다는 것을 깨닫지 못란 모양이었다.

 

아아. 이거 병이로구나. 베이커드 증후군이라고 명할까. 나도 감염되는 거 아냐?”

 

월척을 잡았다는 듯 라니아가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오자 루시엔의 볼이 부풀어 올랐다. 불만과 오기가 부풀어 올라 터지려는 것 같은 귀여운 모습을 보며 라니아는 루시엔 속에서 베이커드의 위상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루시엔이 품은 베이커드에 대한 단상은 그녀의 입으로 빠져나오지 못했다. 잡담하고 일은 안하는 두 사람에게 솔드의 불호령이 떨어졌던 것이다.

 

 

거기. 둘이서 잡담하지 말고 일하지 않나? 베이커드도 성실히 하고 있는데.”

. .”

, 죄송해요.”

 

 

대조적인 반응을 보이며 두 사람은 잽싸게 결계를 치는 일로 돌아갔다.

 

솔드는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둘이 사담을 하는 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가 섬뜩하게 느낀 것은 루시엔이었다. 어째서 그렇게 느낀 것일까?

 

스스로에게 자문하며 솔드는 이마를 쓸어 올렸다. 라니아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 일인데 왜?

 

솔드는 이해불가능의 감정을 자신이 라니아와는 달리 루시엔이 그 곳에 서 있는 장면을 봤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출처 불명의 피로 범벅이 된 장소에서 끔찍한 표정으로 죽어있던 전 동료 마리엘과 그 옆에 멍청히 서 있던 루시엔의 모습을 솔드는 목격했던 것이다. 그리고 왠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방금 루시엔의 모습이 피바다 위에 서 있던 그녀의 모습과 일치되어 보였던 것이다.

 

분명 그 때 루시엔은 목이 쉴 정도로 펑펑 울었었는데. 그리고 솔드는 마리엘에 대한 감정과 약간의 동정심, 강한 책임감으로 루시엔을 데리고 다니기로 결심했었다.

 

그런데 왜 그런 것을 연상했을까 생각하던 솔드는 곧 이 항구에 깃든 부정함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사악한 음적 원기가 부정적인 기억을 끄집어내는 일이 종종 있었다. 음적 원기가 부의 감정 자체에 작용하기 때문이며 동시에 감정의 그림자와 상통하기 때문이다. 솔드에게 있어 마리엘의 죽음은 나쁜 의미에서 그에게 특별한 기억이었고, 그 일을 목격한 또 한명의 인물인 루시엔을 통해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린다는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가끔 그럴 때가 있기 때문이다.

 

루시엔으로부터 마리엘의 모습을 보는 일이. 가끔 전투를 하다보면 뒤에 서 있는 루시엔에게서 마리엘이 서 있을 때와 같은 존재감을 느낄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만큼 루시엔에은 마리엘을 떠올리게 했다. 얼굴은 닮지 않았지만 루시엔은 그녀의 제자이자 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하필이면 마리엘의 죽음을 떠올린다는 것은.그만큼 그 일이 솔드의 뇌리에 깊이 각이되어 있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제법 좋은 추억들도 많은 데 문득 떠올리는 것이 그녀의 죽음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 것인가? 솔드는 손을 움직이고 있었지만 의식은 자신의 내부로 수렴하고 있었다.

 

물론 그 사고의 대부분은 과거에 대한 것들이었으며 마리엘에 관한 것들이었다.

 

마리엘.

 

과거 솔드와 함께 했던 3명의 동료들 중 한명으로 은회색 머리카락과 창백한 회백색 피부, 정령술사의 자질로 선조인 엘드린의 영성을 일부 개화했을지도 모른다고 불리는 여성이었다.

 

내심 솔드는 그녀에게 호감이 있었지만 스스로 그것에 대해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깨달았을 때 그는 자신의 감정에 쑥스러워 했고, 같은 모험단의 일원과 연애한다는 것은 그의 방침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여러모로 어색해지기 마련이고 결과적으로 모험단을 위태하게 만들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어영부영하는 사이 마리엘은 용과의 전투에서 파괴된 마을에서 고아들을 돌보겠다면 은퇴를 선언했고, 솔드는 그 때 같이 나겠다는 식으로 말하지 못했다.

 

자신이 마리엘에게 품은 감정이 훨씬 큰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기회가 지나간 뒤였다.

 

그는 한 6년을 더 떠돌았고 제법 큰일을 몇 번 겪었다. 그 와중에 동료들을 잃거나 헤어지거나 하며 혼자가 되었고 마리엘을 만나자고 결심을 했다. 가능하면 그는 은퇴할 생각이었고 만약 마리엘이 아직 그 장소에 나아있고 아직 고아들을 돌보고 있다면 그녀를 도와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마리엘은 제자로 삼은 루시엔만을 데리고 도시를 떠난 상태였고, 그녀의 고아원은 다른 사람들이 대신 관리하고 있었다.

 

잠깐의 수소문 끝에 그녀가 도시에서 좀 떨어진 외진 숲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고 루시엔이 지닌 정령술사로서의 자질과 그녀를 제자로 삼으려고 했다는 마리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녀를 만날 수 있다는 약간의 기대와 그녀에게 품은 감정으로 인한 강한 긴장으로 품고 솔드는 사람들이 알려준 장소로 떠났다. 하지만 솔드가 본 것은 죽은지 아직 반나절도 안 되어 보이는 마리엘의 시체였고 그걸 멍청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루시엔이었다.

 

그 사실이 어찌나 충격이었는지.

 

루시엔 못지않게 솔드 또한 혼이 나가 넋이 빠져 버렸고, 정신을 차릴 때까지 사실 루시엔이 있는지도 몰랐을 정도였다. 여태까지 죽었던 동료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리 모험가로서 산전수전 다 겪은 솔드라도 이런 상황은 예상 밖이었던 것이다.

 

만약 자신이 하루만 더 먼저 왔더라면. 아니, 최소한 반나절만이라도.

 

그런 자괴감을 느끼며 솔드는 내부로 침전했다. 만약 루시엔이 없었다면 한 몇일은 멍청하게 보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루시엔이 있었고, 솔드는 그녀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녀는 말하자면 마리엘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영민하고 총명하며 뛰어난.

 

마리엘 이상의 천재성을 타고난 소녀.

 

루시엔을 데리고 그 곳에 머무를 수도 있었지만 마리엘이 죽은 장소에 머물고 싶진 않았다. 그보다 마리엘을 살해한 자들을 찾고 싶어 했고, 복수를 원했다.

 

척 봐도 마리엘의 사인은 자연사가 아니었다.

 

뭔가 마법적인 작용이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물론 마리엘이 정령을 다루는 일에 실패했던가 루시엔이 소환한 정령이 소란을 피웠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됐다면 난동이 일어난 장소는 초토화되었을 것이고 루시엔이 멀쩡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한없이 영에 수렴하게 된다.

 

게다가 루시엔은 마리엘의 죽음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었던 듯했다.

 

솔드는 단서조차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그녀의 죽음의 원인을 캐기 위한 모험을 떠나려고 했다. 하지만 신경 쓰이는 것이 하나 존재했다. 그것은 바로 루시엔.

 

원한다면 원래 그녀가 있던 고아원에 맡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솔드는 그보다는 그녀를 자신의 여정에 데리고 가는 것을 선택했다. 이유는 그녀가 바로 마리엘의 후계자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약간의 동정과 책임감, 마리엘에 대한 애정과 연민, 말 못한 감정에 대한 후회.

 

이런 저런 감정들이 어우러져 그는 그다지 현명하지 못한 판단을 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루시엔은 솔드를 따라가는 일에 동의했다. 특별히 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루시엔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거의 말이라는 것을 하지 않았으니까.

 

그녀 나름대로 마리엘의 죽음은 충격이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루시엔을 저렇게 발랄하게 만들어준 라니아의 존재는 솔드에게 있어 은인 같았다.

 

너무 풀어지는 경향이 있는데다가 왠지 정서 교육에 안 좋은 소리도 종종하는 듯싶었지만.

 

표정이 만변하는 군.”

 

발락의 목소리에 솔드는 생각을 멈췄다. 돌아보자 책상 다리를 하고 앉아 있는 거구의 바위인간의 모습이 보였다. 돌 같기도 하고 철 같기도 한 애매한 피부질감과 강철로 뒤덮인 몸에는 푸른빛 선과 문양이 들어가 극도로 신비하고 위압적인 외양을 만들고 있었다.

 

표시가 났나?”

 

그래.”발락은 긍정했다. “안색이 창백해지더군. 뭔가 깨달은 거라도 있는 건가?”

 

아니. 그냥 옛날 일이 떠올라서.”

 

안 좋은 일이었나 보군.”

 

아아. 그랬네. 근래의 일이지만.”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솔드는 난로를 향해 걸어갔다. 떠오르는 기억이라는 것이 그 대상을 미화하는 좋은 추억이 아닌 비참한 죽음이라는 사실은 자괴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솔드가 고체연료로 불을 피우고 난로 옆에 세워진 장작을 하나 둘 집어넣으며 불길을 키우는 사이 발락은 조용히 앉아서 명상에 들어갔다. 음의 영역에 오염된 땅이었지만 발락은 대지와의 연결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 곳이 외곽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충분한 힘을 비축해둬야 한다.

 

대지와의 연결이 끊어진 노르위펜은 그 힘을 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저 중심에 들어간다면 발락은 땅으로부터 힘을 얻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힘을 모아두는 방향으로 가려하고 있었다.

 

장막 너머는 노르위펜인 그로서도 미지의 세계인 것이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으며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도 알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수밖에.

 

어차피 먹지도 않고 투박하고 거친 손 때문에 인간들의 도구를 다루기도 싶지 않은 노르위펜은 솔드를 도와 짐 정리를 할 수도 없었고, 마법적인 능력을 지니지 않기 때문에 라니아들을 도와 결계를 칠 수도 없었다.

 

대신 그 개인은 방어자인 락수로서 어느 정도 완전무결하다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게 육을 가진 자들과 조화로울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발락은 모두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동안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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