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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 진심~five~

크크큭 2006.08.22 05:57 조회 수 : 444

담임의 별명은 경계태세, 줄여서 경계였다. 모든 사람을 적으로 인식하고 언제나 경계태세를 늦추지 않는데서 생긴 별명이었다. 누구도 믿는것 같지 않았고, 또 누구도 믿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듯 했기에 우리반의 누구도 그에게 믿음을 주지 않았다. 나이 40이 되도록 변변한 배우자 하나 없는 그였기에 더더욱 피부로 와 닿는듯 했다.

그에 대한 일화는 매우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임팩트가 강했던 건, 그의 학창시절 이야기였다. 수석자리를 꿰차고 있었던 그는 입시시즌이 다가오고 각 학급의 담임들이 각 클래스의 학생들을 부르는 시간이 많아질 무렵에 담임과 아주 크게 싸웠다고 한다. 이유인 즉, 너 정도의 성적이면 충분히 톱클래스의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고 한 담임에게

[선생님 말 따위를 믿을까봐...]

라고 중얼거리는 걸 담임이 듣는 바람에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담임이 몽둥이를 집어들며 부모님을 호출 하라는 둥 아주 엄청난 해프닝이 일어났다고 했다. 그 때, 미친듯이 날 뛰는 담임을 붙잡고 말리느라 식은땀을 흘리는 주위 선생님들, 또 경계를 손가락질 하며 같이 욕하는 교감과는 달리,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전 원래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선생님이라고 예외일리는 없지요.]

그 정도로 사람을 원체 믿지 않는 성격인 경계가 어째서 선생님 같은 직업을 택했는지는 정말로 7대 불가사의에 플러스 알파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지만 정작 경계는 이 일을 꽤나 마음에 들어하고 있는 듯 했다.

교내에 이런 소문이 오랫동안 떠돌 정도로 이상한 성격의 소유자 였지만 하나 칭찬할 만한것은, 암기력이 너무도 뛰어나서 처음보는 반 학생들의 이름을 출석부 한번 보는것으로 외우는 것을 끝내고 각 학생들의 인적사항-집은 어딘지, 부모님의 직업은 무엇인지, 주로 어떤 과목에서 우수한 성적을 내는지-및 무엇이 특기이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같은, 어떻게 보면 자기가 살아가는데 별 쓸모 없는 것들까지 외우고 다닌다는 것이다.

"그럼, 출석번호 28번부터 마지막까지는 교무실로 오도록. 학기초엔 항상 있는 상담이니까 그리 겁먹을 필요는 없다."

경계는 HR시간이 마칠무렵 그렇게 말하고는 출석부를 들고 교실문을 빠져나갔다.

"오늘도 그 옷이었어."

창가쪽 뒤에서 두번째. 수업시간에 잠자기 딱 좋은 자리에 멍하니 앉아있는 나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어느새 옆으로 책상을 바짝 붙이며 다가오는 히로시는 오늘 경계의 옷을 보며 마치 자신이 디자이너 라도 되는 듯 옷에 대해서 주절이 늘어놓기 시작했다.

"집에 옷이 없는건가. 일주일째 같은 차림이잖아. 항상 화이트블루의 반팔 와이셔츠에 노점상들이 팔만한 가짜 필이 팍팍 풍기는 가죽허리띠 하며 바지는 정말로 빈티나는 듯한 아이보리색 골덴이냐고."

히로시가 내 옆으로 붙는걸 보며 HR에서 막 해방된 자유를 만끽하던 클래스메이트들도 하나둘씩 달라붙으며 히로시의 말에 공감하기 시작했다.

"와이셔츠에 누리끼리한 얼룩 묻어있던건 봤냐? 그건 진짜 가관이었다니까!"

"오늘의 관전포인트는 열린 바지지퍼 사이로 삐져나온 화이트블루색깔의 와이셔츠였어. 몰래 사진이라도 찍어놓을걸 그랬나봐. '한번 웃어보자 스레드'에 올렸으면 분명히 히트 쳤을걸?"

"그 스레드는 바보같은 놈들 많잖아. 어제도 들어가봤는데 두세놈들이 왠일로 의기투합을 해서는 바보같은 짓 하고 있더만. 그건 그렇고, 히데키?"

"응?"

'그 스레드건 이 스레드건 지금 삼삼오오 모여서 선생 뒷담화나 하고 있는 너희들이 가장 바보같아보여.' 라고 생각하며 자조를 띄우던 나에게 클래스메이트1이 말을 걸어왔다. 그 녀석은 나에게 얼굴을 코에 바짝 갖다대며 눈을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오늘부터 반 대항 격투게임 토너먼트를 시작할거거든? 참가할 생각없냐? 상금은 무려 5000엔!"

"안해."

"어째서!"

"격투게임에 관심없어. 아니, 애초에 게임이란걸 별로 안 좋아하니까."

상금 5000엔이라는데에 잠깐 귀가 솔깃했지만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말한 그대로 게임자체를 별로 즐겨하는 편은 아니었다. 조작이 쉽고 스토리가 탄탄한 턴RPG라면 모를까 손이 많이가고 상대방의 심리를 적절하게 이용해야하는 격투게임에 투자할 시간따윈 없다고 생각했다.

"하아─ 역시 그런건가. 그럼 히데키는 제명. 히로시는 어때?"

"나도 패스. 네놈들이랑 하면 어차피 상금딸 가능성은 제로다. 게다가 상금을 준다 라는거, 참가하는 놈들 푼돈 모아서 우승자에게 몰아서 주는 방식일거 아냐."

"응."

"그러니까 안할래. 그런데 푼돈 투자할 바엔 만화잡지를 하나 더 사 보겠다."

히로시 역시 냉철하게 현실을 파악했다. 솔직히 말하면 대회를 제의한 녀석이 우리중에서 실력이 가장 뛰어나다.

분명 용돈이 모자랐던 거겠지....

-딩동뎅동.

때마침 울리는 수업 종소리. 아이들은 분주하게 자기 자리로 돌아가려고 움직이고 있었다.















☆        ☆        ☆



방과 후, 게임 토너먼트를 개최한 얄미운 타카하라녀석은 다른 참가자들을 데리고 아무래도 게임센터에 간 듯 했다. 히로시는 언제 구입했는지 이어폰을 귀에 꽂고 CD플레이어를 감상하고 있었다. 복도 창 틀에 기대서 눈을 감고 흥얼거리는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흥겨워졌다. 이어폰 사이로 새어나오는 노래를 귀기울여 들어보니 처음 듣는 멜로디여서 따라 부르는건 포기했다.

몸을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방과 후에 하교하는 다수의 아이들과 함께 우리 학교의 몇 안되는 자랑거리인 네귀퉁이 버드나무가 보였다. 왜 네귀퉁이냐 하면 운동장의 각 모서리에 한 그루씩 커다란 버드나무가 심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점심시간의 명당이라고하면 학교 옥상이나 교내 벤치라고 대답하는게 보통이겠지만 우리 학교의 경우에는 약간 달랐다. 축 늘어진 버드나무 사이로 새어드는 따스한 햇살과 함께 어우러지는 시원한 그늘. 나는 교내매점파라서 그다지 많이 이용한 편은 아니었지만 어쩌다 그곳에 누워서 카스테라와 커피우유를 먹을때면 시원한 그늘 아래에 쏟아지는 햇살때문에 '오늘 5교시는 재껴버리자.'라는 위험한 생각을 항상 했다. '쏟아지는 햇살'이라는 표현을 이 학교에 진학하고나서야 비로소 실감할 수 있게 된것도 저 버드나무 때문이었다.

"어이, 히데키."

"응."

어느새 왼쪽 귀에서 이어폰을 빼내고 몸을 돌리며 내 옆으로 다가오는 히로시. 녀석은 팔꿈치로 내 허리를 툭 친 뒤 운동장을 가르켰다.

"상담 끝나고 오랜만에 버드나무에나 갈까? 신학기와 함께 찾아오는 봄이잖아."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나한테 조차도 먹힐리 없는 저질멘트를 날리는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

"........."

하늘을 보니 오늘은 유난히 구름 한점 없었고 햇살도 따스했다.

"미안하지만 교실에서의 약속이 있어."

그렇기에 단짝 친구에게 더욱 미안했다.

"어느정도라면 기다려줄 수 있지."

"버드나무에서 낮잠이라도 자고 있는게 어때?"

"짜아식!"

-드르륵.

'짜아식'하며 히로시가 내 목을 휘감으려는 찰나, 출석번호가 나보다 하나 앞인 녀석이 교무실에서 걸어나왔다. 척 봐도 공부만 할것 같은, 샌님같이 생긴 왠 녀석이 뭔가를 잔뜩 넣어서 보는사람이 무거워보이는 가방을 매고는 우리에게 눈조차 마주치지않고 복도를 스르르 빠져나갔다.

"뭐야 저녀석. 그나저나, 이제 내 차롄가."

나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교무실로 들어갔다.










☆        ☆        ☆








방과 후에 상담이다 뭐다 신경쓸 겨를이 없었지만 막상 교실에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뛰는건 어쩔수 없나보다.

'방과후에 교실에서 기다려!'

바람과 함께 소리가 흩어지는 바람에 제대로 들을 수 없었지만 분명 그건 교실에서 나에게 기다리라고 외친게 틀림 없었다. 확실히 부딪힌건 그녀 잘못이 컸고 들고있던 우유까지 쏟게 만들었으니 뭔가 사과의 보답으로 식사 한끼라도 대접해주려는게 아닐까. 하지만 내가 밥을 얻어먹을 정도로 그녀가 크게 잘못한게 아니니 나 역시 뭐라도 해줘야하는게 매너잖아. 영화를 보자고 하는거야. 요즘 개봉한 영화중에 멜로라던가 드라마틱한 내용의 영화는 없을까. 하아, 역시 히로시한테 조금 물어보는게 좋았을텐데...그리고 영화를 본 뒤에는 분명 늦은 시간이 될 테니까 여자 혼자 위험하게 밤길을 혼자 걷게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집에다 바래다 주자. 그리고 그녀의 집 앞에서 헤어지기 전에 Kiss.....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정신이 퍼뜩 들어버렸다. 남세스럽다. 걷고있는 와중에 바로 앞길도 보지 않고 그런 망상따위에 푸욱 빠져 있었다는게 창피하다.

나, 분명 얼굴 빨개졌을거야....

해결해야할 가장 시급한 문제는 손발이 저려서 더이상 움직일수 없을것 같다는 것. 그리고 옵션으로 맥박이 불규칙적이라 호흡조절이 되지 않는다는 것. 마지막으로 내가 수업을 받고 친구들과 함께 잡담을 나누는 교실문을 열지도 못하고 손잡이를 잡은 채 망설이고 있다는 것.

쳇. 까짓거 남잔데 확 열어재껴버리자. 그래, 그냥 교실문을 여는것 뿐이야. 뭔가 그녀의 손을 잡고 시내를 활보한다거나 늦은 저녁까지 공원벤치에서 조용하게 담화를 나눈다거나 하는게 아니잖아 지금. 문을 여는것 뿐이야 문을 여는것 뿐이야 문을 여는것 뿐이야 문을 여는것 뿐이야 문을 여는것 뿐이야 문을 여는것 뿐이야 문을 여는것 뿐이야 문을 여는것 뿐이야 문을 여는것 뿐이야 문을

"밖에 히데키야?"

사람이 돌이 된다는건 이런 기분일거다. 분명 손에서 '쩍'하고 돌 갈라지는 소리도 들리는 듯 했다. 굳어버려서 더이상 움직일 수 없을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멍하니 서있기만 하면 더욱 바보취급 받을거라고 생각하니 용케도 오기가 생겨버렸다.

-드르륵.

"역시 히데키구나."

"으, 응..."

역시 안되겠어어어어어어어어어!!!

이봐 히데키. 정신차리라구. 상대는 니가 마음속에서 간절히 원하고 있는 그 소녀, 미나미라구. 사카하라 미나미란 말야! 자, 말을 걸어! 말하는 거야! '많이 기다렸어?' 라고 물어보라구! '안녕?' 이라고 인사를 건네는건 어때?

"마...많이 기다렸냐...?"

이런 멍청이. '기다렸냐'가 뭐냐. 지금 싸우자고 시비거는거냐.

"아냐. 나도 뭔가 정리할게 있어서 조금전까지 우리 교실에 있었어."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너무나도 평범했다. 웃는것도 평범했고, 교탁위에 서서 안경을 고쳐쓰는 모습도 언제나의 모습 그대로였다. 나 혼자 굳어있는게 너무나도 추하고 창피하고 우스워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래..? 다행이네."

"내가 히데키군을 부른건 다름이 아니라....."

열린 창문으로 아직 봄이긴 했지만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휘날리는 커튼 틈새로 산을 넘어가는 태양이 만들어낸 석양이 새어 들어왔다. 불어온 바람은 그녀의 짧은 스커트 자락과 청초한 긴 머리를 휘날렸다.

그 긴 머리는 내 마음을 어지렵혔고, 그녀가 내 뱉은 말은 머릿속을 새 하얗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오늘, 데이트할 시간 있어?"







☆        ☆        ☆




"이젠 걷잡을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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