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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승달 그네 초승달 그네...(12)

오얏나무 2006.04.10 22:51 조회 수 : 487

"가르쳐 줄게요, 내가 누군지."

미호는 줄곧 꺼놓았던 핸드폰을 꺼내 전원을 켰다. 배터리가 얼마나 남아 있을지 걱정이었다. 화면에 불이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50통의 부재중 전화. 번호로 보아 모두 나나세가 걸었던 것이었다.

'미안, 언니. 부탁하나만 더 할게.'

미호는 나나세의 번호와 통화버튼을 차례로 눌렀다. 꾸욱..
첫번째 다이얼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나세는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미호가 눈을 찔금 감으며 수화기에서 귀를 떼게 만들어 버릴 정도의 폭격을 순식간에 쏟아 붓는 나나세였다.

"..아..아, 미안. 언니, 미안해. 진정하고. 응? 알았으니까, 진정하고.. 나중에 내가 다 설명
할게. 지금은.. 음, 좀 바쁘니까. 응..응.. 그보다 부탁할게 몇가지 있는데..."

종은은 어딘가로 열심히 통화하고 있는 미호를 방해가 되지 않게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집으로 거는 것일까? 통화하는 그녀의 얼굴은 더없이 편해보였다.

'잘됐네.'

그 다음 고개를 들어 그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하늘은 어두운 옷으로 갈아입으며 밤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이, 들려? 널 보낼 수 있을것 같아. 이제, 이제야 널 놓아 줄 수 있을것같아....."

종은은 미호를 흘긋 바라보았다. 아직도 수화기를 붙잡고 통화중이었다.
저 아이는 이제 자기가 있을곳으로 가려나봐. 그렇게 되면,

'나도 내가 있을 자리로 돌아가야겠지, 한국으로.'

부스럭,
그때였다.

"이런데 있었냐? 여유만만인데, 아주. 남의 공연을 잘도 망쳐놓고서는!"

관람파 옆 잔디밭에서 슈지가 나타났다.

"어? 너는?"

종은이 먼저 슈지를 알아보았다. 슈지는 신경질적으로 땅에다 침을 뱉었다. 퉤!

"언니, 알겠지? 최대한 빨리 부탁해. 아, 괜찮아. 드럼이랑 기타사운드가 없어도... 할 수 없잖아. 그리고 진심이면 괜찮다고했었으니까. 응? 누가 그랬냐고? 헤헤, 있어. 아무튼 최대한 빨리 부탁해, 응...."

미호는 슈지의 등장을 알아채지 못했던지 나나세와의 통화에 정신이 없었다.

"저 계집애가 정말."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슈지. 거친 걸음으로 저벅저벅 둘을 향해 걸어갔다. 사실 슈지는 직원용 문을 이용해 그들이 관람차가 있는 곳으로 이동할때 둘의 뒤를 따라 왔었다. 그들이 자신들의 공연을 망친 장본인들이었으니까.
이렇게 가까이서 드디어 맞딱뜨렸는데 슈지, 자신은 안중에도 없다는 그들의 태도에 슈지는 화가 났던 것이었다.

"뭐?"

퍽!
슈지는 가로막는 종은을 밀쳐내 덕분에 종은은 데굴데굴 바닥을 굴러야했다. 그리고 미호가 그 광경에 미쳐 놀랄새도 주지 않고 슈지는 그녀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어이, 너! 니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기는 알어?"

"컥, 왜..왜이래요.."

"왜이래요?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다끝나버렸다고. 전부다! 네가 우리 공연도, 우리 밴
드도 다 망쳐버린거야, 니가!!"

슈지는 우왁스럽게 팔을 흔들었다.

"꺅! 이거.. 놓고.... 말..해요, 컥"

팔락.
어찌나 세게 흔들었던지 미호의 머리에 씌워져 있던 종은의 비니가 벗겨져 버렸다. 찰랑,하며 그녀의 머리칼이 어깨로 흘러내렸다.
다음 순간, 슈지의 손이 멈춰 있었다. 그는 그의 눈 앞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눈 앞에 유령이라도 있는것이라 생각하고 싶었다. 그의 입에서 버릇처럼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지....나스?"

지나스였다. 자신이 멱살을 잡고 있는 사람이 지나스였다. 어떻게 그녀가 지금 여기에.... 동경해마지 않던 그녀가 왜 이런곳에...... 슈지의 팔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멱살이 풀렸다.

"어째서."

슈지는 놀라움에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된것 같았다. 이제는 화조차 나지 않았다.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걸꺼야, 분명....

"켁, 힘은 되게 세네. 도대체 무슨 얘기에요? 내가 뭘 어쩃길래요? 아침에 부딫힌것 때문에 그러는 거에요?"

몸이 자유로워지자 미호가 물었다. 종은도 어느새 일어나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내고 있었다. 슈지를 노려보면서.....

"아, 씨....."

하필이면, 젠장!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는 슈지였다. 억울하고 화가나는데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상대가 지나스여서야 슈지는 싸울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지나스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놓기로 했다. 그녀 하나 만이라도 자신들의 노력을 알아주었으면 했다.
그의 얘기를 다 듣고 나서 미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랬군요. 그래서...."

"아까 멱살 잡은것은 미안."

풀죽은 목소리로 슈지는 미호에게 사과했다. 시무룩하게 주저 앉아있는 슈지를 내려보다 미호는 손바닥을 맞부딫히며,

"아! 그럼 그쪽이 밴드라는 거잖아요. 그럼 드럼도 있고 기타도 있고 무대도 있겠네요?"

"그거야 그렇지만, 이제....."

"그럼 슈지씨. 오늘 저랑 공연하나 안하실래요? 내가 그쪽 공연하나 펑크 냈으니까 그 답례. 어때요?"

"뭐?"

놀라는 슈지 뒤로 나나세를 실은 J.ROK의 헬기가 밤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부다다다다
헬기는 무지막지한 소음과 쉴새없이 날리는 흙먼지로 횡포를 부리며 착륙했다. 그 흙먼지를 뒤집어 쓰며 지나스는 중얼거렸다.

"착륙이 꼭 나나세언니같네, 증말."

달칵!
헬기 엔진의 굉음이 잦아들 때 즘, 헬기의 문이 열리며 총알처럼 그녀, 나나세가 튀어나왔다.

"지이이이이나아스! 너어어어어!"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기세였다. 지나스는 나나세에게 앞으로 당하게될  마흔다섯가지 고문 방법들을 떠올리며 눈을 찔끔 감았다. 바람처럼 불어닥치는 나나세의 거침없는 움직임에 종은과 슈지는 어깨가 절로 움츠러 들었다.

꼬오옥
하지만 다음 순간, 무섭게 달려온 나나세는 지나스를 꼭 안아주고 있었다.

"괜찮아? 괜찮은거야? 어디 아픈데는? 밥은 꼭 꼭 챙겨먹고 다녔지? 그렇지? 대체 어디 갔던거야, 얼마나 걱정했는데.흑.."

"어..언니."

"사장님이랑 간부들이 어찌나 볶아대던지, 흐흑. 너.. 너무 힘들었다. 난리도 아니었다
구. 사무실에 서류들은 아무리 싸인해도 줄어들질 않고.흑, 죽는 줄만 알았어."

토닥토닥
지나스는 아무날없이 나나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왠지 나나세가 지나스에게 안긴 꼴이 되고 말았다.

"에이, 울면 화장 지워지잖아. 언니, 뚝, 옳지. 우리언니 잘하네."

울음을 삼키는 나나세를 두고 지나스는 빙긋 웃었다.

"언니 부탁한건?"

"훌쩍. 당연히 준비해왔지. 누가 부탁한건데."

나나세는 눈가를 손수건으로 훔치더니 뒤로 돌았다. 그리고 언제 울었냐는듯,

"어이! 스탠바이! 자자, 일 시작하자고! 무대팀, 오늘 디즈니랜드 측에서 하기로 했던 야외무대 이벤트가 취소 됐으니 거기를 이용해. 베이스없이 바로 갑니다. 20분만 버티면 되니까 최대한 빠르게. 그리고 거기! 음향팀! 기기먼저 설치하고 전력 끌어와! 사운드 조율은 나중에라도 상관없어!
어이, 조명! 지지대부터 세워! 무대랑 조금 떨어져도 상관없으니까, 모대랑 동시에 올라갑니다. 자자! 다들 스탠바이, 움직여요, 움직여!"

슈지는 그런 나나세를 바라보며 할말을 잃었고 미호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저래야 우리 언니지하고 생각했다.
종은은 다시금 부산 스러원진 주위에 적응하지 못하고 뻘쭘하게 서 있었다. 그런 그에게 미호가 의자 하나를 들고서 다가왔다. 종은의 옆에 의자를 내려 놓더니 그녀는 종은의 어깨를 지긋이 누르며 말했다.

"여기 잠시 앉아 있을래요? 곧 시작할테니까."

종은은 그녀가 누르는 대로 의자에 앉았다. 언제부턴가 서로의 눈동자, 몸짓 하나로 상대방의 의사를 알 수 있게된 두사람이었다.

"그럼 갔다올게요."

미호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종은도 따라 웃었다.
그리고나서 미호가 발길을 돌리려는데, 아차,하고 다시 돌아와 종은을 향해,

"자, 이거."

자신의 구겨진 청모자를 내밀었다.
종은은 그 모자를 받아들었다. 이걸 왜 라며 올려다보는 종은에게 찡긋 윙크를 해보이며 미호는 말했다.

"토모다찌(친구)."

그 말을 끝으로 미호는 등을 돌려 달려나갔다. 작아지는 그녀 뒤로 저 멀리 무대가 세워지고 있었다.






#19

달칵!
무대 뒤의 조명들이 일제히 빛을 뿜었다. 어두웠던 무대 위로 그 빛들이 쏟아지며 지나스와 악기를 잡고 선 도쿄 몽키즈를 비추었다. 보컬인 지나스와 슈지가 앞에, 나머지 세션들은 뒤에, 그렇게 그들은 무대 위를 채우고 있었다.

꿀꺽
지나스는 마른 침을 삼켰다. 오래간만에 잡아보는 마이크는 왠지 차가웠다. 적당한 긴장감이 허리를 꼿꼿이 받쳐 세우며 전신으로 흘렀다. 기분 좋은 긴장감이었다.
정확히 23분만에 지어진 무대는 허름한데다 좁기까지 했으며 관객은 종은 하나 뿐이었다.
여태껏 가져왔었던 무대들 중 어쩌면 가장 초라하고 볼품없는 무대 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또다시 연습때 처럼 실패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누군가를 위해서 부르는 첫노래니까........'

미호의 가슴은 그 어떤 콘서트때보다도 두근거리고 있었다.

'잘들어줘요.'

미호는 눈을 감았다. 그렇게 멘트도 시작 인사도 없이 그녀의 2집 타이틀, '초승달 그네'는 시작되고 있었다.

탁...탁..탁, 꾸궁!
카구라의 드럼 소리를 처음으로 이어 타나베의 기타 사운드와 데모테입의 베이스가 섞여들었다.

몇 십번이고, 몇 백번이고 들었던 익숙한 리듬이 다시 한번 미호의 귓속으로 파고 들었다. 잘짜여진, 달콤한 향기가 나는 따뜻한 스웨터 같은 느낌의 도입부분이 악보 위에서 튀어나와 공기중으로 울려퍼졌다.
연습하며 들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 그것은 단지 기타와 드럼 사운드가 추가되어서인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이렇게 따스한 감정을 알아버려서 인걸요.'

지나스는 가슴에 두손을 포갰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마치 처음으로 무대에 섰던 그 날처럼.......
멈추지 않는 떨림 속에서 그녀는 종은을 떠올리고 있었다.

웃는 그의 모습...
당황하던 그의 모습....
슬퍼하던 그의 모습....
샐쭉, 귀여운 그의 모습.....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봐 주던 모습......
머릿속이 온통 종은의 얼굴로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벅찬 가슴이 세차게 울리고 있었다. 그리고........
다정하게 잡아주던 그 손의 따뜻함.

미호는 입을 열었다. 마이크가 그녀의 목소리를 담았고 스피커가 증폭시켰다.
노래가 시작되었다. 그녀의 진심을 가득 담은 노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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