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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승달 그네 초승달 그네...(11)

오얏나무 2006.04.10 22:51 조회 수 : 398

#18
청코트는 버렸다. 대신 타쿠미의 봄코트를 입은 미호였다. 머리 위에는 종은의 비니를 썼고 어깨까지 찰랑이는 머리칼을 그 비니 안으로 밀어 넣었다. 차마, 청모자는 놓고 갈 수 없어 코트 주머니에다가 모셔 놓았다. 그리고 종은의 안경을 빌려 쓰는 것으로 그녀는 변장을 마쳤다.

변장을 끝낸 미호는 종은을 데리고 왈라키아 체험관의 직원용 출입문 앞에 섰다. 이미 타쿠미씨가 정문으로 나가기 전에 열어 주고 간 것이었다.
열쇠도 없이 문을 따는 타쿠미를 보며,

"어..어떻게? 여기 직원이세요?"

미호가 놀래서 묻자,

"아니, 뭐랄까. 예전의 취미 생활이랄까? 아무튼 그런거야. 너무 깊이 파고 들려고는 하
지 말도록."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면서 대답하는 타쿠미였다.

'의외로 재미있는 사람일지도.'

미호는 그렇게 타쿠미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문고리를 돌렸다.

끼이익
하며 문이 조금 열렸다. 조심스레 문 틈으로 밖을 살폈다. 드문드문 사람들이 보였지만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니었다. 대부분 이 체험관의 입구 쪽과 출구 쪽에 몰려 있을 테니까.
한편, 미호에게 안경을 빼앗긴 종은은 바로 앞도 볼 수 없었다. 흐릿한 사물의 잔상이 데칼코마니처럼, 마치 물감을 뭉갠듯 보일 뿐이었다. 종은의 팔이 허공을 더듬자 그 모습을 키득거리며 바라보던 미호가 종은의 손목을 잡아 당겼다.

"잘따라와야되요. 이게 마지막일테니까."

미호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의 손을 꼭 붙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종은도 미호가 당기는 데로 몸을 맡기고 그녀를 따라갔다. 둘은 사람들을 따돌렸다 생각했다. 하지만 둘은 알지 못했다. 달려가는 자신들의 뒷모습을 죽 지켜보고 있었던 한사람이 있다는 것을..........


◆                           ◆                             ◆


두 사람이 달려서 도착한 곳은 한적하기 그지 없는 놀이 동산의 관람차 앞이었다. 천천히 돌아가고 있는 거대한 관람차를 올려다보며 미호가 말했다.

"헤에, 아직 있었네. 종은씨, 빨리요."

미호는 종은의 팔을 잡아 당기며 재촉했다. 안전선에서 관람차를 기다리던 둘은 그들의 앞을 세번째로 지나가던 노란 관람차 안에 몸을 집어 넣었다.
관람차 안에 들어오자 마자 미호는 풀썩하고 소파에 몸을 맡겼다. 덕분에 관람차가 조금 덜컹 거렸고, 종은은 그 덜컹거림에 불안해하며 조심조심 미호의 맞은 편에 앉았다.

"하하. 이것도 무서운 거에요? 꽤나 겁쟁이네, 종은씨는."

미호는 그렇게 얘기하며 쓰고있던 종은의 안경을 벗어 직접 종은에게 씌워주었다. 안경이 씌워지자 종은은 미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이에 있었다.
인형처럼 예쁜 얼굴.... 그리고 좋은 향기가 코 끝을 간지럽혔다. 갑자기 화끈 얼굴이 달아 올라 종은은 화들짝 얼굴을 떼었다. 그리곤 곧장 창가로 시선을 돌려 버렸다. 왠지 부끄러웠다.
흠,흠.. 헛기침을 두어번하고 나서야 날뛰는 심장이 조금 안정을 되찾는것 같았다.

'너무 요란 떨었나. 그냥 안경 씌워준것 뿐인데....'

종은은 창 밖을 보는 척 하면서 흘끗 미호를 바라 보았다. 미호 역시 창 밖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과는 반대 방향의 창으로....... 어색한 침묵이 관람차의 느릿한 움직임처럼 느릿하게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미호는 빰에 손을 괴고 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왠지 창 밖의 풍경은 들어 오질 않고 달아 오른 뺨은 식을 줄을 몰랐다. 그리고 정색하며 떨어지는 종은의 반응에 괜시리 섭섭해 말을 걸기도 무안했다. 미호도 창밖을 보는것처럼 하면서 종은을 흘긋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였다. 뭘 바라보고 있는걸까?

"....................."

"............."

그렇게 얼마간 둘은 아무 말없이 천천히 움직이는 관람차의 관성 속에 앉아 있었다.

지이잉
하는 저음의 기계소리를 내며 높이 높이 올라가고 있는 관람차. 관람차는 점점 둘을 땅에서부터 떨어뜨려 놓고 있었다. 마치 둘만의 공간을 마련해 주는 것처럼............
관람차의 창을 통해 들어온 석양빛이 낡은 관람차 안에 녹아들때, 미호는 무심코 종은이 바라보고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바라보고 있던것은 이것이었나?
미호는 소리없는 탄성을 속으로 내뱉었다.
저물어가는 석양빛에 디즈니 랜드를 감싸고 도는 호수가 주홍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그 호수의 표면에 금가루를 뿌린 듯 반짝이며 흩어지는 물결. 그리고 그 물결 사이에 언뜻 언뜻 자신의 모습을 드리우며 하늘을 향해 훌쩍 솟은 마법의 성이 연보라빛 구름을 찌를 듯 빨갛게 빛나고 있었다.

성을 중앙으로 오늘 하루 자신들이 타고 놀았던 놀이기구들이 장난감처럼 옹기 종기 귀엽게 모여 있어 미호의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만들었다.
호수 바깥으로 놀이 동산의 외곽을 감싸고 있는 인공 숲도 비치는 석양빛에 반짝이는 진짜 숲이 된것만 같았다. 그리고 누구도 그려 낼 수 없는, 수만가지 반짝이는 붉은빛을 녹여낸 듯한 하늘. 태양이 만들어 놓은 한폭의 그림같은 전경이 둘의 눈에 비치고 있었다.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다웠다.

"나...."

바깥쪽을 향한 시선을 그대로 둔채, 석양빛을 받으며 종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의 볼이 발갛게 물들어 보이는 것은 비치우는 해질녘의 석양 때문일지도........

"예전에 소중한 사람이 있었어요. 정말로 소중했었던....."

미호는 그렇게 말하며 웃음짓는 종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조금은 슬퍼 보이는 미소였다.

"되게 밝게 웃는 애였어요. 그 애 미소를 보면 나도 모르게 행복해지곤 했었는데."

종은은 길게 한 호흡을 들이마셨다. 다음 말을 준비하는것 같았다.

"교통... 사고 였어요. 일요일날 약속장소에 조금 늦었었나봐요. 서둘러 오느라 빨간불에서 횡단보도를 건넜다네요, 바보같이. 난, 얼마든지 기다려 줄 수 있었는데.. 얼마든지..........."

종은의 눈동자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여 있었다. 줄 곧 창밖만 바라보던 그가 이번에는 미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벌써 일년도 더 전의 일인데, 주위 사람들은 훌훌 털어버리라고 하는데 그게 잘 안됐어요. 자꾸 그애 생각이 나서, 혼자서 계속 슬퍼만해서... 그래서 눈물을 참으려고 하늘을 봤어요. 언젠가부터, 한번.... 두번...... 나중에는 습관처럼 보고 있더라구요. 거기서 그 애를 찾고 있더라구요. 이제 그애는 어디에도 없는데, 참 바보같죠, 나?"

슬픈 얼굴. 왜일까? 미호는 알 수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지근 이 순간, 석양이 내려준 마법같이 그녀는 종은의 슬픔을, 그가 하는 말을 맘으로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친구녀석이 그런 내가 딱해 보였던지 여행을 보내 버렸어요, 이곳으로. 그리고 우연히 나카시마상을 만난거에요, 그 애 처럼 웃는 나카시마상을. 고마웠어요, 기쁘기도 했고. 그 애를 다시 만난것만 같아서 잠시나마 행복했었거든요..... 하지만, 그러면 안돼는 거잖아요. 그 애랑 나카시마상은 다르니까. 나카시마상은 나카시마상이니까."

'그리고......'

"그래도 덕분에 홀가분해졌어요. 이제는 찾을 수 없다고, 포기해야 된다고 생각했던걸 찾아 줬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그만하는게.........."

주륵,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것조차 종은은 느끼지 못했다. 미호는 그런 그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로서는 할 수 없었다. 그의 슬픈 입매는 흘러내리는 눈물과 어울리지 않게 웃고 있었으니까...

"헤헤, 나, 나카시마상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어요. 처음에는 그냥 단순히 소매치기이려나 생각했었는데, 아, 이것도 그리 단순한것은 아니구나. 아무튼 그랬는데 아까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이고 그 사람들이 다들 사진 찍으려고 하기도 하고....유명한 사람인가 싶었는데 마지막에는 왜 경찰이 온건지....아까 그 남자는 도대체 누구인지.  이제는 종잡을 수가 없네요. 나카시마상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사람인지조차.."

미호는 시무룩해졌다. 자신은 나쁜사람이 아니라고, 비록 종은을 궁지로 몰아넣은 상황이 되었지만 그것은 본의가 아니었다고, 사실은 자신이 일본 제일의 아이돌이라고, 모두 말하고 싶었다. 종은에게 얘기해주고 싶었다.
종은은 시무룩해진 미호에게 웃어주었다. 방금전의 슬픈 미소가 아닌 환한 웃음이었다.

"괜찮아요, 나카시마상이 좋은 사람이건 나쁜 사람이건... 나카시마상은 저에게 최고로 핸복한 웃음을 보여준 사람인걸요. 덕분에 나도 행복할 수 있었으니까 그걸로.... 고마워요.
응.
하다보니 횡설수설이 되었지만 사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거 였어요. 정말 고마워요."

미호는 그의 따뜻한 고마워란 말에 자신의 심장이 쿵쾅쿵쾅 울리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무엇이든지 그는 상관하지 않는다는 말에, 자신 때문에 잠시나마 행복했었다는 말에 벅차오르는 가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야 미호는 깨달았다.
조금은 슬픈 이 남자를 자신이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를 위해 뭔가 해주고 싶었다. 그의 슬픔을 조금이라도 덮어주고 싶었다. 그를 위해서 노래하고 싶었다.

노래....... 그래, 노래!
지금 미호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노래 밖에 없었다. 그를 향한 그녀의 진심을 담은 노래.

하지만..............
부를 수 있을까? 계속 실패하기만 했었던 자신이 의심스러웠다.
그 순간, 왈라키아 체험관에서 옷을 갈아입으며 장난스레 툭 내던졌던 타쿠미의 한마디가 미호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아.. 노래? 괜찮아, 까짓것. 부를 수 있어, 지금의 너라면."

"지금의 나라면?"

"그래, 눈을 보면 알 수 있지. 나나세가 예전에 그랬거든. 노래는 혼자서 부르는게 아니라고. 듣는 사람이 아니, 들려주고 싶은 사람이 있을때 진심이 담긴 노래가 나온다고 했었어. 그리고 잘부르든 못부르든 진심이 담긴 노래만한 것은 없다고도 했었지. 지금의 너는 그런 사람을 가진 눈이니까."

그런 사람..
미호는 종은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미소 하나로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

'아직 짝사랑이기는 하지만....'

"좋아!"

미호는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 벌떡 일어났다. 관람차는 어느덧 한바퀴를 돌고 땅에 내려와 있었다. 미호는 종은을 데리고 관람차에서 내렸다.
내리면서 그녀는 종은에게 말했다.

"가르쳐 줄게요, 내가 누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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