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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승달 그네 초승달 그네...(10)

오얏나무 2006.04.10 22:50 조회 수 : 391

#17

하아..하아..

"겨우 따돌린 건가?"

종은은 어두컴컴하고 좁은 복도를 뒤돌아 보며 말했다. 사람들을 피해서 일단 아무데나 들어오기는 했는데 무슨 귀신의 집처럼 음습한 분위기에 조명도 어두운것이 그리 아늑하다랄 만한 곳은 아니었다.
복도를 따라 죽 늘어선 유리창 너머에는 뭔가를 세워 두었다가 이제는 치워 버린듯 마네킹 받침대 같은것들이 잔뜩 놓여져 있었다. 작은 글씨로 글자가 적혀 있었지만 불이 어두워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여기 예전에 귀신의 집, 뭐 그런 종류였나봐요. 들어올때 봤었던 출입 금지 푯말로 봐서는 이제 안쓰는 곳 같네요."

종은은 품 안의 미호를 살짝 떼어 놓으며 말했다. 미호는 아까의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은 듯 멍한 표정으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 모습에 미호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종은이었다..

"괘, 괜찮아요. 조금 놀란것 뿐이니까."

촉촉히 젖은 눈을 하고서 억지로 웃음짓는 미호. 종은은 그런 미호의 등을 다독여 주었다.

"응. 괜찮아. 괜찮아요...여기 까지 쫓아올 사람은 없을거에요."

바작,
그때 딱딱한 무언가가 부딫히는 작은 소리와 함께 ㄱ자로 꺾인 복도 모퉁이에서 검은 그림자가 일렁였다.

부스스...
하고 몇년간 방치 되어있던 왈라키아 체험관의 천장이 그 잔해를 떨어뜨렸다.

"무..무슨 소리지?"

종은이 미호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앞은 그림자로 둘러쌓인 복도의 어둠뿐. 아무것도 없어야 할 그 어둠속에서 종은은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눈이 있다고 느꼈다.

끼...이...익.
벽에 달린 오래된 촛대가 낡은 쇳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덕분에 어슴푸레한 촛불도 흔들리고 그림자도 일렁였다. 아니, 일렁이는 게 아니라 움직였다. 그것은 검은 몸뚱아리를 천천히 움직여 종은과 미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어엇.."

종은은 아무 말도 못한 채 그림자가 다가 올 수록 뒷걸음질 쳐갔고 미호는 종은의 등 뒤에서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두눈을 꼭 감았다.

불쑥!
다가오던 그림자가 갑자기 뭔가를 내밀었다.

"으아악!"

종은은 놀래 우당탕 하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자빠졌다. 미호는 공포로 몸이 굳어 버렸다. 심장이 얼어 붙는것 같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둘을 덮쳐 올 줄 알았던 그림자가 조용하자  미호는 코 속으로 날아 들어오는 먼지 냄새를 맡으며 조심스레 감았던 눈을 떴다.
눈을 뜬 그녀의 앞에 있는 것은 큼지막한 손과 그 손에 들린 그녀의 모자였다.

"원, 모자를 보고 저리 놀래? 신종 모자 알레르기? 아님, 모자 트라우마?"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미호는 고개를 들었다.

"나나세 부탁으로 널 데려가려고 온 사립탐정, 고토다케 타쿠미다. 나카시마 미호맞지?"

그림자는 그렇게 말하며 희미한 촛불 아래로 나왔다. 깔끔한 정장에 무릎까지 오는 갈색
봄코트를 입은 남자의 형체가 드러났다.

"나나세언니....날 찾고 있나요?"

미호가 중얼거렸다.

"응, 애타게."

타쿠미가 대답했다.

"아풉풉!"

그 순간, 종은이 입 안으로 들어간 먼지를 뱉으며 일어났다. 그리고 앞의 남자를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 보았다.

'어떻게 들어 온거지? 분명 출입금지 푯말이 있는 건물이었는데...저 사람말고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나타난 사내를 경계하는 종은의 앞으로 이번에는 미호가 나왔다. 미호는 종은을 향해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괜찮아요, 내게 맡겨줄래요? 종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미호가 한번도 본 적 없었던 슬픈 표정을 하고 있었기에.
타쿠미는 조금 기다리다 미호가 앞으로 한발짝 더 나오자 물었다.

"갈거지?"

"..............."

"안갈거야?"

"..............."

미호의 대답은 침묵이었다. 답답해진 타쿠미가 미호를 재촉했다.

"어이? 무슨 말이라도 해봐. 얘기는 대강 들었어. 2집 녹음, 힘들었다는거. 그래도 니가 이러면 니 주위 사람들이 더 힘들어 진다는것 모르겠니? 나나세도 J.ROK측도 지금 곤혹 스러우니까.."

"상관없어요, 그런것."

조용히, 하지만 힘있게 미호는 말했다.

"뭐?"

"상관없다구, 그런것따위. 어차피 난 도구일 뿐 이잖아요! 노래 부르는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잖아! J.ROK에는 어차피 나같은 애들 썩어 넘칠 정도로 많을 테니까, 나는 발에 채이는 신인 가수들 중에서 운좋게 뜬것 뿐일 테니까!"

"이봐, 너.."

타쿠미가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미호가 가로막았다.

"이제 그런것 그만두겠어요. 평범하게 살겠어. 오늘 처럼. 종은씨가 보여준 오늘처럼 즐겁게... 다른 사람들 처럼 평범한 행복을 바라면서 살거에요! 어차피 노래도 부를 수 없게 되어버렸으니까. 그러니까 나 찾지 말라고 전해요. 부서진 장난감 따위 필요 없잖아요? 원한다면 얼마든지 대용품을 구할 수 있지 않나요?"

미호의 목소리는 어느샌가 격앙되어 있었다. 동굴 같은 그곳에 미호의 목소리가 메아리치며 반복되었다. 그 소리가 사그라 들때까지 셋다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더이상 아무 말도 하기 싫은 사람과,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사람과,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사람 셋이 벽에 걸린 어두운 유리창에 거울 같은 자신의 모습을 투영시키고 있었다.

어색한 침묵에 타쿠미는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그가 입에 담배를 물자 잠시후 미호가 입을 열었다.

"모자는... 모자는 감사해요. 하지만 전 돌아갈 생각이 없으니 혼자 언니에게로 돌아가 주세요."

찰칵,
타쿠미는 주머니에서 빼든 라이터를 켰다. 빨간 불꽃이 그의 입술에 물린 담배 끝을 태웠다.

"미안, 이거 한대만 피울게."

후우.. 타쿠미는 길게 담배 연기를 뿜었다. 그러더니 혼자 '좋아, 그럼.' 하고 중얼거린 다음 말을 시작했다.

"아가씨, 실례."

"네?"

미호가 미쳐 반응 하기도 전에 타쿠미가 먼저 미호의 이마를 쥐어 박았다.

"아야! 이게 무슨 짓..."

"나카시마 미호! 언제까지 어리광 부릴거야!!"

미호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 보았다.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도구일 뿐이라고? 운좋게 뜬것 뿐이라고? 그렇게 쉽게 꺼낼 수 있는 말인가, 그게? 그래, 너는 일본 최고의 여가수겠지. 하지만 그것이 나나세가, 다른 스텝들이 얼마나 노력해서 일구어낸 결과인지는 다 잊어버린거야? 너 혼자서 만들어낸 거라고 말하고 싶은거야?
모자.. 이 모자도 나나세가 사준 걸테지? 나나세가 무슨 마음으로 이 모자를 사주었는지 조차 잊어버린거냐, 넌? 내가 왜 널 찾으러 이곳에 서있는지 모르겠니?
나나세에게 있어 니가 그정도 밖에 안된다고, 그저 장난감 따위 밖에 안된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면 나도 뭐라 할 말은 없어. 그저 친동생 처럼 널 아끼는 나나세가 바보처럼 느껴져서 불쌍할뿐이야.
그리고 나나세가 말했던 너와 지금 눈 앞의 니가 달라도 너무 달라서 실망했다. 이렇게 자기 밖에 생각 못하는어린애라고는....."

그의 말을 듣고있는 미호의 손이 떨렸다.

"그게 무슨..."

"잘들어. 니가 한 생각 없는 행동 덕분에 나나세는 제쳐 놓고라도, 종은이라고 했던가,
저 남자? 아무튼 니 뒤에 있는 저 남자, 이 건물 밖에선 유괴범으로 오해 받고 있어. 이 안이 왜 이렇게 조용할 수 있는지, 이제 알겠지? 밖에는 경찰들이 포위하고 사람들을 통제하고 있다고!
거기다가 얼씨구나 하고 몰려든 매스컴들은 어떻게 할래?
보아하니 저녀석, 아무리 봐도 유괴범은 절대 아닌 듯 한데, 아무 잘못도 없는 녀석을 그렇게 몰아 세워 놓고서라도 너 혼자 편해지고 싶어? 니가 편해지면 다른 니 주위 사람들은 어떻게 되도 상관없는 거야?"

"아...."

미호는 망연자실해 멍하니 아..하는 소리만 내고 있을 뿐이었다.

지직,
타쿠미는 담배 꽁초를 발로 밟아 꺼뜨렸다. 그리고는 씁쓸히 말했다.

"나, 나나세 녀석과 고등학교 때 3년 동안 같은 반 이었지만, 오늘 같이 당황해 하던 모습은 한번도 본적이 없었다. 그 바보같은 자식은 다 자기 탓이라더라. 자기가 너무 매몰차게 굴었다고. 너에게 상처 줬다고, 미안하다고 그러더라."

"나..나세언니.. 종은씨.."

미호의 울음섞인 작은 목소리.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할게. 나나세와 같이 하면서 행복했었던 적이 한번도 없었는지 나는 네가 아니니까 알 수 없어. 하지만 난 행복은 도망쳐서 얻을 수 있는게 아니라 맞부딫혀서 얻어내는 쪽이라 생각해. 그리고 소중한 사람들을 희생시켜서 생기는 행복은 행복이 아니야.
그리고 말야. 그 녀석은 장난감이 부서졌다고 새걸로 바꾸는 성격이 못돼. 오히려 고쳐쓰는 쪽이지."

타쿠미는 그렇게 자기 할 말을 다하고서 뒤로 돌았다. 쳇, 이번 일은 실패군. 나나세에게 한소리 듣겠는데. 라 중얼거리며 그는 복도의 그림자 속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미호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는 타쿠미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나세언니..
친언니같은 나나세언니.
내 걱정때문에 자기 몸은 돌볼 줄도 모르는 언니.
'니 노래 부르는 목소리에 반했지 뭐.' 오디션 다음날 장난스럽게 웃어주며 했던 그 말.......그때 처음으로 내밀었던 모자.

'잘해보자, 우리.'
나나세의 목소리가 미호의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그 목소리와 함께한 날들은 힘들긴 했어도 불행했던 적은 없었다. 돌이켜보면 많은 추억을 만들어줬던 그녀. 같이해서 즐거울 수 있었다. 나나세언니는 언제부터인가 가족이 되어 있었다. 진짜 가족이 없는 자신에게 처음으로 생겼던 진짜 가족.

타쿠미씨, 저대로 보내면 이제 나나세 언니랑은 만날 수 없는 거겠지...........이미 타쿠미의 한쪽 어깨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그림자 속으로 잠겨들고 있었다. 그런건 싫었다.
그때였다.

".....나, 갈래요. 언니에게 갈래요."

그녀의 목소리가 타쿠미의 등을 잡아 끈것은.
미호는 땅을 쳐다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돌아갈래요. 내가 가면 나나세언니나 종은씨, 모두 괜찮은 거죠? 그런거죠?"

타쿠미는 땅을 쳐다보고 있는 미호를 바라 보았다. 작게 들썩이는 여린 어깨. 저벅저벅 걸어가 그녀 앞에 섰다. 그리고 손 안에 있던 모자를 그녀에게 씌워 주었다. 모자 챙에 가려져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미호는 울고 있을 거라 타쿠미는 생각했다.

'여린 아이지만 절대로 나쁜 아이는 아니야.'

라고 했던 나나세의 말이 떠올랐다.

"정말 니 말대로군, 나나세."

타쿠미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리고나서 흐느끼고 있는 미호에게 물었다.

"약속하지. 절대로 괜찮을거야. 너는?  돌아가면 나나세에게 엄청나게 혼날텐데."

미호는 턱을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좋아. 그럼 잘 따라와야돼."

"아! 저.. 잠깐만요!"

미호는 자신을 당기는 타쿠미의 손길에 주춤거리며 다급히 외쳤다.

"응?"

타쿠미는 미호에게 의문의 시선을 날렸고,

"저..저기. 나 이런 부탁 하면 안돼는거 알지만....."

미호는 말끝을 흐리며 종은을 바라보았다. 타쿠미는 종은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눈빛에서 아득한 뭔가를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부탁이 뭐든간에 무조건 들어주기로 마음먹었다.

"알지만? 무슨 부탁인데? 까짓꺼 나나세한테 추가수당 청구하지 뭐."

타쿠미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의대답을 듣고서 그제야 미호는 얼굴에 미소를 띄웠다. 환하게. 최고의 미소로군, 아가씨. 타쿠미는 속으로 읊조렸다. 그런 타쿠미를 바라보며 미호는 자신의 부탁을 얘기했다.

"시간을 좀 주지 않을래요? 꼭 타보고 싶은게 아직 하나 남았는데."

천장에 매달린 촛대 위의 촛불이 아주 약간 일렁였다.


◆                     ◆                      ◆


"오오! 시청자 여러분, 드디어 나오고 있습니다. 납치범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이고 무슨 목적으로 지나스를 유괴한 것일까요?"

특파원의 흥분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고 있는 가운데 카메라는 왈라키아 공포 체험관 입구에서 어슬렁 어슬렁 걸어나오는 한 남자를 담아내고 있었다. 잔뜩 긴장한 경찰들이 그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었고, 수백명의 사람들이 붉은 테이프 밖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도 사람이 너무 좋아 탈이라니까.'

종은과 옷을 바꿔 입은 타쿠미는 그렇게 생애 처음으로 지상파 TV에 데뷔하고 있었다. 유괴범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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