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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승달 그네 초승달 그네..(5)

오얏나무 2006.04.07 15:49 조회 수 : 636

#10.
종은과 미호는 은행에 있었다. 아침을 무전 취식이란 상상밖의 방법으로 해결한 뒤,
종은은 현금의 필요성을 절실히 꺠달은 것이다. 그래서 둘은 큰길로 나오자 마자 일
단 아무 은행에나 들어와 버렸다. 그렇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일본어를 할 줄 모르니 은행창구는 패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현금 인출기. 하지만 이
것도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았다.

'에.. 그러니까 이게 무슨 글자였더라..."

짧은 한자 지식과 동물적 감각으로 종은은 현금 인출기로부터 출금을 시도하고 있었
다. 인출기의 터치 스크린을 어줍잖게 눌러보는 종은.

삐삑.

단조로운 기계 소리와 함께 현금 인출기는 종은의 카드를 뱉어냈다.
벌써 여덟번째 실패였다. 별로 믿음직스럽지 못한 한자지식에 동물적 감각이었다.

"크읏!"

머리칼을 손으로 마구 헝클어뜨리며 종은은 얼굴을 찡그렸다.
맘대로 안되네....
그래도 현금은 꼭 필요한 것이었기에 팔전 구기의 마음으로 다시 카드를 밀어 넣었다
.

그런 종은을 바라보며 종은의 뒤에 서 있던 미호는 오랜 기다림에 지루했던지, 하품
을 길게 한번 하고서 종은의 어깨 너머로 살며시 고개를 내밀었다. 미호의 눈에 현금
인출기의 화면이 들어왔다.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음,하고 고민을 하던 종은은
어깨 너머로 느껴지는 좋은 향기에 눈을 옆으로 살짝 틀었다. 그리고 코 앞까지 다가
와 있는 미호의 얼굴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에엑!"

종은은 얼굴이 빨개진채 어쩔 줄 몰라하며 두어걸음 물러났고 그 틈에 미호는 인출기
앞에 섰다. 새침한 얼굴로 스크린을 바라보다 두어번 손가락으로 스크린 위를 꾹꾹
누른다 싶더니,

삐,삐빅

촤르르륵

덜컹!

현금 출납구가 열리며 인출기는 뱃속의 현금을 뱉어냈다. 미호는 그 돈을 꺼내 종은
앞에 내밀었다. 멋쩍게 웃으며 한손으로는 손가락으로 브이자까지 그리며....
종은은 소녀의 브이자를 만들고 있는 손가락을 어처구니 없이 바라보았다. 아직도 얼
굴이 화끈거려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렇게 종은이 움직이지
않자 미호는 종은에게 직접 돈을 쥐어주며 말했다.

"대체 일본에 어떻게 올 생각을 한거에요? 일본어도, 한자도 하나도 모르면서, 정말
대책안서는 사람이네."

무슨 말인지 알아 들을 수 는 없었지만 종은은 일단 돈을 받아 들었다.

하나..둘..
그리고 현금을 조심스레 세어보다,
아호..옵... 여,열!
열에서 종은의 손이 가느다랗게 떨렸다.
열장, 십만엔인가? 그럼.. 그럼 우리나라 돈으로 배,백만원?!
23살, 휴학생 종은, 한달 알바비가 엔화 열장으로 둔갑하는 것은 단 5초도 걸리지 않
는다는 사실에 사회의 냉담함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했다.

종은이 정신적 공황에서 허덕이고 있을때 미호는 은행 팸플릿들중 하나를 꺼내들고
있었다.
열개도 더 되어보이는 종류의 팸플릿들 중 유독 그 팸플릿 하나만 뽑아든 그녀는 팸
플릿 안의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 팸플릿 속 그림에서 무슨 좋은 추억
이라도 떠올랐는지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그 미소를 이제 막 가까스로 충격 속에서 헤어나온 종은이 바라보았다.
아니, 바라본것이 아니라 끌렸다. 언제 부턴가 종은은 이 소녀의 웃음을 쫓고 있었다.
그것에 끌리고 있었다.
왜인지는 자신도 몰랐다. 어렴풋이 마음은 그 이유를 알고 있는 것도 같았지만 머리
가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그럴리 없다고......... 그래서 종은은 애써 모른다고
여겼다.

그러다, 그렇게 소녀를 바라보다 종은은 한가지 의문이 들었다.
이 소녀는 왜 소매치기를 했을까? 그렇게 나쁜 아이 같지는 않은데.... 저리도 맑은 웃
음을 간직하고 있는데.....
가출이라도 한것일까? 그래서 갈 곳이 없는 걸까?
소녀에 대해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소녀에
대해 알고 싶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 이렇게 답답한 것일 줄은 몰랐다.

소녀를 보며 멍하게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소녀가 팸플릿을 들고 자신을 향
해 쪼르르 달려왔다. 행여나 바라보고 있었던게 들킬새라, 종은은 황급히 열장의 만
엔 짜리로 고개를 돌려 애꿎은 돈만 만지작거렸다.
미호는 자신의 행동이 그에게 방해가 될까 살짝 종은의 어깨를 손가락 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으,응?"

종은이 고개를 들자 미호는 팸플릿을 내밀었다. 요란한 색의 글자들과 보기만해도 등
골이 오싹해져 오는 거대 놀이기구들의 사진, 그리고 그 사진들 중앙에 우뚝 서있는
성처럼 생긴 건축물과 만화 같은 인형 캐릭터들......

일본어를 몰라도 그 놈의 캐릭터는 세계 어디서나 통하는 만국 공용어같은 존재였다.
제리 이전, 아이들 세계에서 가장 각광받던 최고의 스타, 월트 디즈니의 흑백 창조물
에서 시작해 태어난지 7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식지 않는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그
것은,

바로 미키 마우스였다.

"디즈니.. 랜드?"

종은은 그 사진 속에 담겨있는 곳을 쉽사리 추측할 수 있었다.

"응! 디즈니 랜드! 종은씨도 여기 알죠? 있죠, 나 여기 어렸을적에 딱 한번 가봤었어요
. 그때 탔던 놀이기구들 아직도 남아 있으려나?"

역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종은이었지만 뭔가 굉장히 기분좋은 그녀
의 표정에 찬물을 끼얹어선 안될것 같아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헤에, 그때는 사람들 눈치 신경 안쓰고 맘껏 놀 수 있었는데......"

미호는 팸플릿을 두 손으로 꼭 쥐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모자 챙을 쓱쓱 문질렀
다. 종은에게 자신의 표정을 보여주고 싶지않았다. 슬픈 표정을 하고 있을게 분명했
으니까. 어렸을적 기억이 떠오른 것이었다. 지금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 시절 항상
함께 있어주었던....... 그 사람.

종은은 갑자기 침울해진 미호의 기분을 알아차렸다. 시무룩한 그녀를 바라보다 문득
그녀의 기분을 낫게 해주고 싶다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어떻게....'

종은은 억지로 머리를 짜내었다. 어떻게, 어떻게 하면 그녀가 웃을까? 언제 그녀가 웃
었더라?
그러다 종은의 머리에 떠오른 것이 있었다.

'팸플릿!!'

종은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미호의 손을 붙잡았다. 그제야 종은은 알았지만 그녀의
손은 고사리처럼 작았고 또 부드러웠다.
갑자기 손을 잡힌 미호는 종은을 쳐다보았다. 그런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가요. 나카시마상이 다시 웃게 해줄게요."

종은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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