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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승달 그네 초승달 그네..(2)

오얏나무 2006.02.27 08:26 조회 수 : 417

#4.
학..학..
어렸을적부터 달리기는 자신있었다. 고향집에 내려가면 자신의 책상 머리에 학교 운동회에서 따낸 1등 상장도 여러개였다.  절대, 절대 잡힐리 없다고 되뇌이는 미호였다.
그래도 숨이 찼다. 배가 고파와서 그런것일까, 하늘이 흔들거렸다. 위태롭게........

얼마지나지 않아 장단지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아까 난간에 걸터 앉아 있을 때 부터 아파왔던 다리. 하긴, 무일푼으로 뛰쳐나와 여기까지 어제 하루를 꼬박 걸었으니 지금 이렇게 달리고 있는 것이 신기한 일일지도.......

앞에 보이는 모퉁이를 돌아 좁은 골목길로 들어가면 더이상 쫓아오지 못할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미호는 모퉁이 앞에서 재빨리 방향을 틀어 골목으로 들어가려했다.
골목으로 들어가기 직전 고개를 돌려 쫓아오는 남자와의 거리를 눈에 넣어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남자는 사람들을 헤치며 쫓아오고 있었지만 저정도 거리라면 안심이었다.
모든것이 완벽했다. 아니,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스스로는.......

하지만 모퉁이를 돌아선 다음 순간, 완전하다 생각했던 상황은 불완전 쪽으로 방향을 급선회했다.
모퉁이 안쪽에서 걸어나오던 어떤 남자와 미호가 서로를 알아채지 못한채 모퉁이를 가운데 두고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뒤엉켜 버린것이었다.
미호의 눈엔 마치 거무튀튀한 뭔가가 순식간에 자신을 덮쳐 온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몇 초간 별이 보였다............우당탕.........

"아악!"

넘어지며 무릎팍이 까진걸까, 미호는 쓰라려오는 무릎을 두 손으로 부여잡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뒤엉키며 바닥을 두어바퀴는 구른것 같았다.

"뭐야, 이건!"

등 뒤에서 같이 구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등 뒤까지 다가온 남자는 거칠게 미호의 어깨를 잡아 주저 앉아있던 그녀를 사정없이 들어올렸다.

"이런 젠장! 계집애잖아! 빌어먹을, 아침부터 재수없게."

억지로 몸이 돌려져 눈에 들어온 사내의 모습은 정석 그대로의 히피족이었다.
황갈색으로 염색한 머리칼엔 젤인지 왁슨지를 덕지덕지 발라 뿔처럼 마구 세워 놓았고 얼굴엔 언뜻 봐도 대여섯개의 피어싱이 박혀 있는 듯 했다.
귀에 두개, 코에 하나, 입술에 하나, 눈썹에 하나..
목에는 개목걸이처럼 주렁주렁 쇠붙이를 달아 놓았고 옷은 비닐처럼 반짝이는 레쟈(인조가죽)였다. 한마디로,

"아차, 잘못걸려버렸네."

미호는 혼잣말로 소근거렸다. 그러나 남자는 그 소근거림마저 들려버릴 만큼 가까이에 붙어 있었다. 그는 미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잘아네. 너 오늘 아주 제대로 걸린거야. 이 참에 그 간 쌓였던거 좀 풀어보자!!"

쫘악!
경쾌한 소리 위로 미호의 청모자가 날았고, 그녀는 고개가 돌아간 채 바닥에 내동댕이 쳐졌다.

"윽.."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볼은 발갛게 부어 오르고 있었다. 얼얼한 느낌이 느껴져 왔다. 그 부어오른 볼을 검은 머리카락이 쓰다듬으며 하늘하늘 얼굴 위로 흘러내렸다. 모자 안에서 줄곧 숨어 있었던 머리카락들이었다.
어깨까지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추스를 생각도 하지않고 미호는 곧장 바닥을 더듬었다. 손바닥으로 바닥을 더듬으며 모자를 찾고 있었다. 그 손에 어딘지 절실함이 베어 있었다.

'모자... 내 모자,어디로?'

모자를 찾으러 바닥을 기면서도 그녀는 한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마치 필사적으로 얼굴이 노출 되는것을 막의려는듯 보였다. 무슨 흉터라도 있는 것일까?
그녀가 모자를 찾고있는 동안 히피스타일의 사내는 그녀 옆에 서서 그 행동들을 모두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리고,

씨익
썩은 미소를 짓더니 오른발을 힘껏 들어 뒤로 젖혔다. 발 끝의 목표는 미호의 옆구리였다.

"죽어버려.."

라고 말하는 그의 모션을 뒤늦게야 눈치 챈 미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의 뇌가 앞으로 닥칠 코통을 공포란 이름의 감정으로 되받아 몸 속 구석구석으로 퍼뜨렸다. 순식간에 아드레날린이 솟구쳤다. 근육들이 경직했다. 몸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며 한껏 웅크려졌다. 미호는 이를 악물고 통증에 대비했다.

뻑!
귓가를 때리는 둔탁한 소리. 미호는 흡,하고 숨을 끊어 마시며 감은 눈을 찡그렸다.
그렇게하면 왠지 덜아플것 같았다.............. 어라, 실제로도 약간은 효과가 있는지 덜아픈것 같았다. 아니, 이건 아예 아프지 않았다. 이상했다.
의아함 속에서 미호는 조심스레 눈을 떴다.

눈 앞에 갈색 비니를 뒤집어 쓴 가죽자켓의 남자가 부들부들 떨면서 드러누워 있었다. 자신을 쫓아오던 그 남자였다.
히피 남자는 적잖이 당황했다.
바닥에 엎드린 여자를 발로 까대려던 순간, 어디선가 나타난 가죽자켓의 남자가 그녀 앞을 막아섰던 것이다.
이미 휘둘러진 발은 수습할 길 없이 그대로 호를 그리며 남자의 정강이로 날아 들었고 그 남자는 헛,하며 다리를 부여잡고 쓰러져 버렸다.

"뭐,뭐야."

히피 남자는 예상치 못했던 전개에 얼어붙어 아무것도 못한채 뻘쭘히 서있었다.
어느새 세 사람 주위로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있었다. 둥글게 원처럼 둘러싸 웅성이는 사람들. 그 인파 너머로 삐,삐이익! 호각 소리가 들려왔다.
경찰이었다.
하긴 이런 번화가에서 소란을 피웠으니 경찰이 출동하는것은 당연했다.

"이런 젠장. 너 오늘 재수 좋은 줄 알아, 이 계집애야!"

히피 남자는 꽁무늬를 빼며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던졌다. 그 다음 사람들을 헤치며 그가 사라지는 것은 한 순간이었다.
히피 사내가 사라지고 난 얼마후, 미호는 길바닥을 더듬다 드디어 자신의 모자를 찾을 수 있었다. 누군가의 발 아래 밟혀있던 모자를 거칠게 빼내어 그녀는 그대로 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곤란한 상황이었다.

'어쩐다........ 이대로 경찰에 잡히며언.....'

그곳으로 끌려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여기에서 벗어나야한다는 생각이 머릿 속에 가득했다. 허둥댈 시간이 없었다. 벗어나기로 결정했으면 그렇게 하자. 머리는 명령을 내려 발을 움직였다.

툭.
발을 움직이는 순간 그녀의 발끝에 물컹이는 뭔가가 걸렸다.
아까 그 갈색비니의 남자였다. 남자는 볼썽 사납게 아직도 바닥에 널부러져 있었다.
어떻게 하지, 미호는 잠깐 망설였다. 이 남자, 자신이 지갑을 훔친 남자였다. 여기서 두고 간다면 코트 주머니 안에 찔러넣은 그의 지갑은 분명 자신의 것이었다.

두고 갈까..... 그래, 두고 가자.
미호는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 뒤돌아 모여든 사람들을 향해 달려 나가려 했다.
한발짝.... 두발짝.... 왠지 발걸음이 무겁게만 느껴져 미호는 천천히 발을 멈춰갔다. 그래도......
그래도 자신을 감싸 주었는데, 자기 대신에 아파 쓰러져 있는 것인데...... 정말 이래도 괜찮은 걸까?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다시 한번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몸을 추스리며 이제 막 일어나려던 참이었던지 구부정한 자세로 서있었다. 이윽고 그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검고 맑은 눈, 미호는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 눈이 어렸을 적 아끼던 구슬을 닮아 있었다.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던 그. 그때 그 눈동자에 떠오르던 서글픈 빛.....깔.
갑자기 왜 그런게 떠올랐을까? 미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장면이 떠오르자 이제 이 남자를 그냥 내버려 둘 수 없게 되어버려서 그녀는 그에게 다가갔다.
남자는 다가오는 자신에게 알아들을 수 없는 한국말로 뭐라뭐라 말하더니 빙그레 웃어주었다.

소매치긴줄 알텐데... 내가 자신의 지갑을 훔쳤는데.....
그런데, 그런데도 웃어주었다.  거짓없는 티 없이 깨끗한 웃음이었다. 바보........ 그 미소에 뭔가 용서받은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미호도 웃었다.
그리고,

덥썩.
그의 손을 잡았다. 손을 잡고 사람들을 헤치며 둘은 달려나갔다.



#5.
소매치기를 뒤따라 달리고 있던 종은 은 자신에게 반문했다.

'왜 달리고 있는거지?'

여비는 자켓 가슴주머니 깊숙한 곳에 숨겨둔 신용카드 안에 모두 들어 있었다. 여권도 여행용 가방에, 옷가지나 다른 물건들도 가방에 들어 있을 터였다. 지갑에 들어있는 것이라고는 면허증같은 신분증과 천원짜리 몇 장 따위가 전부였다.
그런데 왜? 나는 저 여자아이를 쫓아가고 있는 걸까? 지갑 안에 들어있는 것들은 지금 당장 없어져도 그리 아쉬울게 없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아까 전, 그녀와 부딪쳤을때 무너가를 본것 같았다. 아니, 느꼈던것 같았다. 낯익은......... 또, 잃어버리면 안될 듯한........ 그걸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렇긴 하지만,

말도안돼.
라고 종은은 생각했다.
그녀는 오늘 처음, 그것도 잠시 스쳐 지나갔던 사람인 것이다. 자신의 착각일 것이다. 그리움이 불러낸 착각.......그래, 착각.

후..
길게 숨을 토해냈다. 그러자 다리에 힘이 빠져 더이상 달릴 수 없게 되었다. 이제까지 달려오던 관성때문에 달리던 방향대로 너털너털 걸어 갈뿐.
앞서 달리던 소녀는 이제 막 모퉁이를 돌아 골목길 안으로 들어갈 기세였다.
소녀가 골목 안으로 사라지면 더이상 쫓지 않으리라, 그는 그렇게 마음 먹었다. 바보같은 착각이었을테니까..

"!!!!!!!!!"

그런데 다음 순간, 골목으로 들어서던 소녀가 골목을 빠져 나오려던 어느 남자와 부딪쳐 넘어졌다. 화가난 듯 신경질적으로 일어난 남자는 쓰러진 소녀 쪽으로 다가가 소녀를 거칠게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어..."

그녀의 볼을 손바닥으로 인정사정없이 후려갈겼다. 종은은 그 모습을 어..라는 맥빠진 소리와 함께 바라 볼 뿐이었다.
양아치같은 그 남자는 이번엔 아예 발길질을 하러 한쪽 발을 높이 쳐들었다.

"....아! 생각났다."

그 순간, 뭔가가 종은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듯 종은은 생각났다. 생각나버렸다. 낯익은 느낌....... 소녀를 쫓아 달렸던 이유.
너털너털 계속 걸어왔던 탓에 종은은 어느덧 양아치 사내와 소녀 근처에 다다라 있었다. 양아치 사내는 힘껏 발을 휘둘렀다.

"아!"

생각보다 먼저 종은의 몸이 움직였다. 긴 몸이 소녀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곧바로 찾아드는 예견된 고통........
종은은 정강이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눈물이 핑 돌정도로 아팠다. 아, 제길.
아픈것도 아픈것이었지만 더 큰 문제가 있었다. 고통 때문에 도무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었다. 일어서지 않으면..... 저 남자가 다시 소녀에게 달려들지도 모르는데....

온몸에 힘을 주어 보았다. 하지만 정강이에서 등줄기를 타고 전해져오는 고통만 더해질 뿐 자신의 다리는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안돼, 일어서지 않으면.. 일어서지 않으면 또 잃어버리게돼! 제발,,, 제발 움직여. 제발!!!!

종은은 이를 악물었다. 이마 위로 식은 땀이 흘렀다. 후들거리는 다리, 거칠어진 호흡. 그 모든것을 무시하며 종은은 억지로 일어나려 했다. 덕분에 결과적으로는 구부정한 자세가 되어버렸다.

삐삐이익!
그때 어디선가 호각 소리가 들려왔다. 경찰인가보다. 양아치 사내가 도망치는 것을 보고 종은은 알 수 있었다.
다행이었다. 이제 소녀가 무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제야 종은은 안심했다. 긴장이 풀리자 지릿지릿 정강이의 고통이 두배는 아파왔다.

"아야야.."

발을 절룩거리다 종은은 소녀의 상태가 궁금해졌다. 뺨은 괜찮을까.... 심하게 맞은것 같던데...
그는 고개를 들어 소녀를 찾았다. 소녀가 걱정이었다.
하지만 종은의 걱정과는 달리 소녀는 언제 넘어졌냐는 듯 벌떡 일어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종은도 소녀를 마주 보았다. 그녀의 모습을 찬찬히 볼 수 있었다.

청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있었지만 챙이 만들어낸 그림자 안에서 그녀의 동그란 눈동자는 맑게 빛나고 있었다. 쌍꺼풀은 없었지만 크고 어쩐지 고집있어 보이는 눈, 고양이 같았다. 조그만 얼굴에 오똑한 코, 작지만 윤기있는 분홍빛 입술. 갸냘픈턱선.......그리고 빨갛게 부어오른 볼.......
아까 뺨을 맞은 자국 같았다.

종은은 소매치기 소녀가 겁먹고 또 달아날까봐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니, 그런 생각도 있었지만 마음 한편에선 소녀가 무사해 기쁜 마음에 나온 웃음이기도 했다.
얼굴 한가득 미소를 머금으며 종은은 말했다.

"뺨은 좀 어때요? 아까 무릎도 다친것 같던데, 많이 아파요?"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소녀도 같이 웃어 주었다. 그리고 소녀는 그에게로 다가와 손목을 잡고선 사람들을 헤치며 달리기 시작했다.

"어..어?"

갑작스런 소녀의 행동에 종은은 놀랐다. 그렇게 영문도 모르는 채 소녀에게 이끌려갔다.
머릿 속에선 두고 온 짐 생각과 자신이 없어져서 발칵 뒤집혔을 여행사, 그리고 그 일로 파생 될 잡다하고 복잡하며 귀찮기만한 일들이 마구마구 떠올랐지만 이내 고개를 저어버리며 털어내 버렸다.

대신, 소녀의 미소를 되새겼다. 뺨은 붓고 한쪽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 한데도 열심히 지어 보이던 그 미소.
그 미소 속에서 종은은 하늘을 바라보며 찾지 못했던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만 같아 손목을 소녀에게 내맡기고 그녀가 이끄는 대로 달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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