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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승달 그네 초승달 그네..(1)

오얏나무 2006.02.27 08:24 조회 수 : 434

#1.
사각형의 좁은 창문 밖으로 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몇 십분째 구름 아래로 펼쳐지고 있는 바다, 바다는 비행기의 선창 아래에 그 모습을 나타낸 이후로 줄곧 같은, 변함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움직이듯, 움직이지 않는 듯 작게 넘실거리는 파도와 파도 사이 사이 금실로 수놓은 듯한 태양빛...

왠지 지루하게 느껴져서 종은은 시선을 창 밖에서 거두어 버렸다. 지루한 바다 풍경보다 더욱 낯익은 앞좌석의 좌석 베개가 대신 시야를 채웠다.

눈 앞에 보이는 좌석 베개 뒷면의 중앙, 'Dont`t Smoke'란 문구와 함께 붉은 사선에 가려진 담배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감옥의 쇠창살처럼 붉은 원안에 담배를 가두어 둔 듯한 그 사선을 바라보다 종은은 문득 그녀를 떠올렸다.
자신이 담배를 꺼내어 들때면 정색하며 코 끝을 찡그리던 그녀.

'으구~ 그만 좀 피워. 나 담배 싫어하는거 알면서........'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종은 자신의 착각일 것이다. 그녀는 이제........
그래도, 착각이라도 좋으니 다시 한번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종은은 그랬다.

두근
갑자기 가슴이 비어버린 듯, 심장이 빠져버린 듯한 공허함에 종은은 머리에 쓴 비니를 눈 밑깨까지 덮어 써버렸다.

'자버리자..... 자고 일어나면 너와 다른 하늘 아래 있을테니까.'

종은은 기내의자에 몸을 묻으며 억지로 잠을 청했다. 그 모습이 마치 마음속의 빈자리를 잠으로 채우려는 것 처럼 보였다.



#2
나카시마 미호는 챙의 가죽이 튿어진 청모자를 눌러썼다. 모자를 눌러쓰는 것은 곤란한 일이 닥쳤을때 그녀가 하는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이거, 곤란한데......."

손바닥에 놓여진 백엔짜리 두개와 십엔짜리 세개를 바라보다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이럴줄 알았으면 나올때 돈이라도 두둑하게 가져나오는 거였는데......."

때 늦은 후회를 하며 미호는 거리의 난간에 걸터 앉았다. 도로와 인도를 구분하기 위해 인도의 끝자락에다 줄지어 세워놓은 난간은 쇠붙이 특유의 차가움을 그녀의 엉덩이에 전해주었다. 남들같았으면 벌떡 일어날 법도 했으나 미호는 그 차가움을 애써 무시했다.

'곧 따뜻해지겠지,뭐.'

지금 그녀에게 엉덩이보다는 지끈거리는 장단지의 근육이 더 시급한 문제였다.
난간에 걸터앉아 미호는 거리를 빙 둘러보았다.
아침 아홉시의 햇살과 그 햇살을 눈부시게 반사시키는 높은 유리빌딩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그 보다 더 바쁘게 움직이는 자동차들....

하나,둘,셋..
미호는 자신의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숫자를 세어보았다. 몇 초 되지 않아 여섯이나 지나갔다.
저 사람들은 전부 어디로 가는걸까, 자문해보지만 답은 나오지 않는다.

'나 자신도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걸......'

피식,하고 미호는 웃었다.

"이런 생각이라니, 배가 고파서 머리까지 이상해지려는걸까, 나?"

꼬르륵
하고 뱃 속에서 죽끓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지나가는 사람 그 누구도 그 소리에 신경쓰지 않았지만 왠지 부끄러워져서 미호는 입고있던 코트로 앞섶을 여미었다.
펑퍼짐한 청코트는 몸을 가리고도 남을 정도였다. 2년 여간 지내왔던 보금자리를 떠나오며 가지고 나온 봄코트. 무릎까지오는 그 청코트 덕분에 어젯밤은 따뜻할 수 있었다. 가져나오길 잘했다.
그러고보니 하루가 지났다. 혼자서 밤을 보낸지 하루가 흐른것이다.

"지금 즘 난리 났겠지? 에휴.... 뭐, 이제 상관없나? 그나저나 하루가 흘렀다는건 어제 아침에 먹은 김밥 이후에 하나, 둘, 세엣...세끼나 굶은거네."

'하나,둘,셋'에 맞춰 손가락을 구부리다 손 안의 이백삼십엔이란 전재산이 너무 가볍게 느껴져 미호는 한숨을 쉬었다.
길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구걸이라도 해볼까, 생각해보는 그녀였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랬다간 들통나서 다시 그곳으로 끌려가게 될거야. 그런건 안돼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답답한 상황이 신경질이나 미호는 두 손을 거칠게 코트 주머니 안으로 쑤셔박았다.
그때였다.
태극기를 손에 든 여행가이드 뒤로 줄지어선 한 무리의 관광객들이 미호 앞을 지나쳐 가는것은.

'뭐 볼게 있다구.'

미호는 그 관광객들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삼삼오오 짝지어 떠들기에 여념없는 관광객들 앞에서 일본인인듯한 가이드는 미호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관광객들에게 뭔가를 연신 전달하고 있었다.
아마도 한국말이겠지, 미호는 그들에게서 고개를 돌리려는데 문득 무리의 제일 뒤쪽, 사람들과 꽤 떨어져서 걷고있는 남자에게 눈이 갔다.

오른손으로 끌고가고 있는 여행가방이 아니었다면 같은 여행객이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남자는 관광객 무리보다 한참 뒤쳐져서 걷고 있었다.
여행사에서 짜놓은 관광프로그램들은 자신에게 아무 상관없다는 듯이.... 멍하게 하늘만 바라보면서 .

"저 사람은 하늘 관광이라도 온건가?"

미호는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눈을 반짝였다. 그렇게 하늘만 올려다 보던 남자는 결국 마주 걸어오던 사람과 부딪쳤다. 당황하며 그가 내뱉은

"스...스미마센."

어색한 일본어. 미호는 쿡,하고 웃어 버렸다.
부디친 탓에 남자와 관광객들은 이제 정말 멀리 떨어져렸다. 그래도 남자는 하날을 올려다 보았다. 따라갈 생각이 없는 걸까? 아니, 그 보다 방금 부딪히며 자켓 안주머니의 지갑이 비져 나온것은 알기나 하는 걸까?
남자는 이제 아예 걸음을 멈추고 하늘만 바라보고 있다. 마치 하늘에 자신의 보물이라도 두고 온 사람같았다.

"이상한 녀석."

이라고 내뱉는 미호의 눈은 자기도 모르게 계속 비져나온 남자의 지갑으로 향했다. 두둑해 보이는 가죽 지갑.
머리를 흔들며 '안돼!'라고 해보지만 다음순간 자신의 눈은 남자의 지갑을 쫓고있었다.
미호는 두손을 맞잡고 꼭 쥐었다. 안돼, 안돼 라고 자신을 추싀려 보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자꾸 돼, 뭐가 어때서 멍하게 정신 팔려 있는 여행객인걸. 식은 죽 먹기야.라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래도... 그래도..
미호는 망설였다. 그런 그녀의 망설임에 종지부를 찍은것은,

꼬르르륵
그녀의 마음에서 들려온 소리가 아니라 그녀의 뱃 속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3
종은은 낯선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파란 창공에 솜털같은 흰 구름. 비슷하지만 어딘지 낯설은 하늘. 그 하늘에서 자신은 그녀의 흔적을 찾고있는 것일까? 모르겠다.
그래도 지금은 마냥 이렇게 하늘을 바라보고 싶었다.

퍽,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다 마주오던 사람을 미쳐 보지 못했다. 그 바람에 부딪치고 말았다.
와르르, 부딪친 사람이 들고있던 종이 봉투에서 알수없는 서류들이 마구 쏟아져 나와 거리에 흩어졌다.

"스.. 스미마센."

종은은 당황하며 허리를 굽혔다. 고개를 두어번 조아리고 흩어진 서류들을 주워 모았다. 조금 구겨진 종이 서류들을 잘 추스려 정장을 입은 그 남자에게 건내자 그는 뭐라뭐라 서너마디 던지고선 빠른 걸음으로 종은의 곁에서 멀어져 갔다.
주위를 둘러보니 같이 온 사람들은 이미 저기까지 가있다.
아무래도 상관없나, 종은은 이제 따라 걷는것도 포기하고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툭,
또 누군가와 부딪쳤다. 거리에 사람들이 많으니 이렇게 부딪치는 것은 어쩔수 없는것이다. 전부 무시해 버리고 하늘만 바라보고 싶었다. 아직, 그녀의 흔적을 찾아내지 못했기에....
하지만 지난 23년간 몸에 밴 습관이 부딪친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종은의 고개가 돌아갔다.

"아리가또!"

청모자에 얇은 청코트를 입은 소녀다.

"스미..."

스미마센이라고 종은은 말하려했다.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 얼마입니까?'정도가 그가 말할 줄 아는 일본어의 전부였으니까. 하지만 다음순간, 종은은 몇마디 알지 못하는 그 간단한 말들조차 늘어놓지 못했다.

소녀의 손에 들려있는 그것.
원래 자신의 자켓 안주머니에 있어야할 그것.
자신의 지갑이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빙긋, 상큼한 미소를 지어보인 청모자의 소녀는 몸을 돌려 사람들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소매치기...........
종은의 머리는 그녀의 정체를 단정지었고,
그것보다 더 빨리 종은의 다리는 이미 그녀를 쫓아 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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