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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째 대성배. 기동 확인.』


『── 정상 소환. ── 정상 소환. ─── 이레귤러.』


『조정 시스템 가동. 영령 검색.』


『─── 조건 충족. 적합성 93.8%』


『동의 획득. 토지 적합성 고려. 소환 개시.』




눈을 뜨고 처음 본 하늘은, 슬프도록 푸르렀다. 





00. 



   람들의 시선이 흘끔흘끔 쏟아졌다.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시선의 중심인 소년은 신이 친히 빚은 듯,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또 사람이 아닌 양 투명했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그런 아름다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가 입고 있는, 현대인이라면 할로윈이 아닌 이상 절대로 입지 않을 법한 시대 착오적인 흰색 옷 때문이었을까 - 그마저도 소년에게는 너무나 잘 어울렸지만 - , 아니면 둘 다 때문일까. 


   그러나 그런 시선은 눈치채지 못한 듯, 멍하니, 조각상마냥 가만히 서 있던 소년은 퍼뜩, 몸을 가볍게 떨고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고, 숨을 들이키고, 다시 내쉬고. 


   세상에 처음 태어난 것처럼, 다소 서늘한 아침 공기를 깊이 품었다. 살짝 뺨을 할퀴는 새벽 바람이, 마냥 기분 좋았다.


   잘 실감이 나지 않는 것처럼, 손을 쓸 수 없었던 아이가 처음으로 손을 움직여보는 것처럼, 소년은 양 손을 가볍게 쥐었다폈다. 그러다가, 양 뺨을 가볍게 툭툭, 양 손으로 두드렸다. 손의 촉감, 피부의 느낌, 바람의 온도. 모든 것이 낯설 정도로 오랜만이었다. 


   소년이 한참을 그러고 있을 즈음, 골목 어딘가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아마도 교회, 혹은 성당이나 사원의 종이리라. 그제서야 소년은 아, 하고 짧은 소리를 냈다. 투명한 가을 하늘빛 눈을 두어 번 깜빡이고는, 드디어 발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두 걸음. 마치 모든 것이 신기하다는 듯, 조심스레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길거리에서 보이는 글자는 그가 기억하는 것과 달랐지만, 멀찍이 보이는 산의 모양, 언덕의 가파름. 이 모든 것은 그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바람의 냄새조차도. 그는 정말로, 잠시나마, 돌아온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마음 한 켠이 찌르르 울리는 기분이 들었기에, 소년은 작게 기도와 같은 몇 마디를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는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보고하는 것처럼, 작게 읊조렸다.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지극히 작은 목소리였지만, 유리컵을 은수저로 톡 친 듯한 맑은 소리가 또렷했다. 


   "서번트, 룰러. 정상적으로 현계 완료했습니다."





01. 



   년, 룰러는 살짝 머리를 기울였다. 그가 성배를 통해 받은 지식대로라면, 그는 이 땅이 아닌 극동의 한 섬나라로 가야 할 것이다. 그 곳이 전장이었고, 소년이 가야만 할 장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곳으로 그가 소환된 것은 아마 그를 위한 작은 배려였으리라.


   여태까지의 전쟁에서 룰러가 소환된 것은 손에 꼽을 정도의 횟수였지만, 그들은 대부분 어떠한 편법으로 인해 정식 마스터를 가진 서번트로서 소환되거나(이 경우, 그들이 본래의 의미대로 중재자로서 기능했을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혹은 알맞은 그릇을 찾아 빙의하는 형식으로 소환되었다. 그처럼, 온전한 서번트 상태로, 성배에게 소환된 경우는 꽤나 드문 것이다. 따라서, 그의 상태를 좀 더 안정시키고 빠른 현세에서의 적응을 위한 안배였을 것이다, 라고 소년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친절한 성배 님도, 매우 사소하면서도 중요한 문제는 간과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솔직히 말해, 생전에는 단 한 번도 고민해본 적이 없던 종류의 문제들이라 살짝 신기하고 재미있기는 했으나, 그 스스로 해결하기는 너무나도 까다로운 문제였다. 당장 사람들의 시선을 회피하는 것은 영체화로도 충분히 가능했지만, 그는 지금 대륙을 횡단해야 했고, 그것에 대해 몇 가지 작은 문제가 있던 것이다.


   첫 번째로, 그는 현대의 신분이 없었다.

   두 번째로, 그는 돈이 없었다.

   세 번째로, 그는 현대 의복조차 없었다.


   즉, 전쟁이 벌어지는 곳과 지구 반 바퀴 떨어진 곳에서, 그는 이름도 없고 돈도 없는 혈혈단신 미아가 된 것이다. 





02. 



   랑스 파리 16구. 불로뉴 숲이 내려다보이는 거리에 위치한 저택은 크지는 않으나 멋스러웠다. 


   화단에는 장미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집 안 쪽의 가구와 장식품들은 지나치게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훌륭한 센스가 엿보이는 일품들이었다. 냉장고에서 꺼내둔 듯, 싱크대 위에는 햄과 치즈, 그리고 몇 종류의 과일이 놓여져 있었고, 바게트 부스러기의 흔적이 살짝 남아 있었다. 그야말로 다른 나라에서 떠올리는 소위 '파리지앵'의 이미지 그대로인 방. 그러나 방의 주인인 소년은 어디에 있는지── 그는 소파에 파묻혀, 보던 책을 얼굴에 덮어버리곤 꾸벅거리며 졸고 있었다. 은발이 흐드러지듯 반짝였고, 숨소리는 고르렀다.


   햇볕 좋은 여름날, 여유로운 오후였다.



   "──인님, 주인님."


   "아우.... 으응....? 뭐야...?"


   "손님이 오셨습니다."


   "...에에.. 손님? 잡상인은 사절인데. 사전 약속 잡은 사람 없을 거고. 국민전선이나 뭐 그런 인간들이 선거금 모금하러 온 거면 적당히 쫓아내 줘. 술이나 한 잔 주던가. 혹시 의욕 넘치는 포토그래퍼나 디자이너라면 명함만 일단 받아 둬. 포트폴리오 있으면 그거랑 같이. 엘멜로이네 멍멍이 제자라면 적당히 구슬려 주고."


    "아뇨, 그게...."



   아래층에서 총총거리며 올라온 가정부 겸 집사의 손님 보고를 심드렁한 - 정확히 말하자면 잠이 덜 깬 - 표정으로 받던 소년은 그 후 이어지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뒤, 신난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드디어! 같은 소리와 함께 단숨에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03. 



   발의 소년은 폭소를 터뜨렸다. 



   "잠...잠깐만...크흡..프하하! 지금 거기서부터 여기까지, 족히 수천 킬로미터는 될 텐데, 그 거리를 그냥 영체화한 채로 달려왔다고? 싫지 않지만, 진짜 요령 없네!"


   "하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는 걸."


   "영체화하고 올 거면 차라리 비행기 같은 거에 매달려서 오는 편이 쉽지 않았을까? 아, 아무래도 바람이 너무 센가?"


   "...아, 비행기.. 그 생각을 못 했네."


   "잠깐, 진심이야?"



   소년은 즐거운 듯 재잘거렸다. 시계탑의 정치싸움과 파벌 다툼에는 학을 떼었달까, 멍청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역사와 실력만큼은 어느 마술사 가문에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깊은, 부유한 알리스테어의 차기 당주(라고 알려진) 그가 이 정도로 즐거워한 적은 근래 들어 드물었다. 근래라고 해 봤자, 다른 사람들이 본 건 몇 개월 되지 않았겠지만. 


   그의 눈 앞에 앉아 있는 금발 소년은 서번트였다. 그것도 고귀한 중재자. 성배전쟁을 관리하는 룰러. 사용인은 그 모든 대화를 들으면서도 묵묵히 차를 따르고 간식을 내왔으나, 그녀는 이 방을 나가면 그 모든 것을 잊을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것이 필수 덕목이니까. 아무튼, 그녀는 수십 대 째 이 집안을 섬기고 모셔온 가문의 일원이었으므로 대강이나마 몇 가지 비밀을 알고 있었고, 따라서 서번트인 소년이 그녀의 주인을 찾아온 이유 또한 조금이지만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생전의 관계겠지..?'


   그녀가 섬기는 집안은 물론, 마술 명문가란 것들 중에는 짧게는 수백년, 길게는 수천년 내려온 가문도 적지 않았다. 물론 그들의 생전 신분이나 민족, 환경 등에 따라 다르겠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그 가문의 선대와 인연이 있는 서번트가 있을 가능성 또한 존재했다. 그런 그녀의 추측은, 가장 중요한 것 하나를 모르고 있기는 했으나, 얼추 비슷한 답이었다.


   "좋아, 크리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지원해줄게. 성당교회가 시끄럽게 굴지도 모르니까, 그 쪽은 미리 가능한 한 입막음을 하도록 노력해보지. 하지만 아마 시계탑 쪽은 알고 있을 거라, 꽤 번거롭게 될지도. ...물론 네게는 그런 건 상관 없겠지?"


   "으응. ...그런데 그웬, 확실히 해 두고 싶은 게 있어."


   "응?"


   "나는 물론 너를 믿지만, 나 - 룰러 - 와 함께 한다는 건 너는 마스터가 아님에도 전장에 함께 간다는 것이고, 여러 위기도, 기회도, 있을 거란 말이야. 그러나 너는 어떤 기회가 오더라도, 소원 같은 것은 빌 수 없어. ... 물론, 네게 주의 것이 아닌 성배 따위, 소원을 빌 가치도 없는 필요 없는 모조품이겠지만."


   "잘 아네. 원한다면, ── 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어머니의 이름에 걸고 맹세하지. 나는 그 따위 것에 빌 소원도, 빌고 싶은 것도 없어. 그건 내게 어떠한 의미도 없어. 네가 더 잘 알잖아, 그건?"  


   "...그건 그렇지. 미안. 혹시 기분 상했어?"


   "아아니, 전혀. 네가 뭐던지간 어지간히 교과서계란 사실은 누구던 너랑 세 마디만 얘기해보면 다 알 수 있을 걸?"



   모르는 이가 봤다면, 겨우 그 정도로 대답이 되겠냐고, 보증이 되겠냐고 물었겠지만, 그건 은발의 소년 - 그웬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일이었다. 그가 힘주어 말한 것은 그 자체로 일종의 언령이었다. 번거로운 맹세의 절차 따위 거치지 않아도, 가볍고, 빠르고도 확실하게 그 신뢰성을 보장하는. 


   물론, 그러한 것이 아니었더라도, 그웬을 조금만 잘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던 그런 것에 그가 관심을 가지느니 그 시간에 와인이나 한 잔 더 마실 거란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겠지만. "소원을 빈다고? 근원? 걔가? 차라리 마도원수가 사실 엄청 귀여운 여자애였다고 하는 쪽이 믿겨질 거야.


   그리고, 한동안 이어진 대화는 한 가지로 결론지어졌다. 그웬 알리스테어는 친구인 룰러, 크리스의 보모 겸 물주가 되었다. 





04. 



   "인님. 그럼 크리스 님의 의복과 신분을 준비하면 됩니까?" 


   "아아, 응. 생일은 적당히. 나이는 나랑 비슷하게 네가 처리해 줘. 옷..은 흐음. 쇼핑 나갈까."


   "차를 준비할까요? 아, 그러고보니 음..."


   "응? 왜? 무슨 문제 있어?"


   "아니오. 큰 문제는 아닙니다만. 크리스 님은 굉장히 마르셔서... 주인님보다도 근육이 적게 붙으신 것 같고. 제대로 맞는 남성 기성복을 하루 안에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 그러고보니 그렇네. 부티크에 연락한대도, 지금 가뜩이나 여성 패션위크고... 아, 그럼 여성복으로 할까? 분명히 잘 어울릴텐데."


   "주인님, 미치셨습니까?"








오토코노코는 아니지만 중성적인 느낌이라면 여성복이어도

진짜로 잘 어울릴 거란 게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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