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아아아어어어브어어어어어어어....”
더럽게 더운 날이다. 그러니 이 좁은 병실을 식혀주는 하나뿐인 선풍기 앞에서 누군가 얼굴을 들이밀고 땀을 식히고 있다 한들 그 누구도 죄를 물을 순 없을 것이다. 간호사들이 병실 앞을 지날 때마다 혀를 찼지만, 난 신경쓰지 않는다. 이봐, 아가씨들. 그렇게 뜨거운 시선으로 바라봐도 난 끄덕 없다고. 절대로 이 냉방기구 앞에서 머릴 치울 일은 없을 테니까, 그만 포기하시지. 솔직히 말해봐. 시원해 보이지? 당신들도 나처럼 하고 싶잖아?
튼튼하게 여며졌어야할 군복 앞섶을 풀자 바람이 가슴팍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 좋아. 이 쾌감. 비록 에어컨은 없지만, 이 정도면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입에서 절로 경구가 새어나왔다.
“너희 중, 덥지 않은 이만 내게 돌을 던지거라.”
“불경죄로군. 지옥 갈 걸세. T 소위.”
기대도 않았던 대답에 놀라 움찔 어깨가 튀어 올랐다. 고개를 돌리자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는 노인이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위. 무슨 논리로 그런 말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좀 그 선풍기 바람을 맞을 수 있을까? 좀 덥군, 그래. 아니, 사실 아주 많이.”
뛰어난 군인은 자고로 스스로의 판단보다는 상관의 명령을 우선시 하는 법이다. 그리고 난 항상 나 자신이 뛰어난 훌륭한 군인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몸은 머리보다 재빠르게 들은 명령에 대해 수행했다. 선풍기 머리가 노인 쪽으로 돌아가자 노인, 아니 VIP님은 덮고 있던 이불을 한쪽으로 치웠다. 눈만 껌뻑거리고 있던 나는, 그래도 여전히 덥다는 VIP님의 투덜거림에 간신히 말을 꺼냈다.
“지, 지옥은 어땠습니까?”
“무슨 말인가?”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교관님. 너무 크게 다치셔서 영영 못 깨어나시는 줄 알았습니다. 돌아가시면 장례식은 일본식으로 할지 영국식으로 할지 검토할 정도로요.”
“고맙군. 언제 깨어날지 모를 송장 옆을 지켜주고 있어서.”
“아뇨, 아뇨. 천만의 말씀을. 근데, 로버트 대령님은 어디로 가신 겁니까?”
“안 계시나? 그러면 영국으로 돌아갔겠지.”
어깨를 으쓱이며 그것도 모르냐는 식의 대답에 왠지 지금까지 걱정한 게 바보 같아서 약이 올랐다.
“...교관님을 챙기는 게, 저라는 사실을 구지 다시 한 번 알려드릴 필요는 없겠지만요. 적어도 들어오고 나갈때만이라도 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군에는 병가로 올려뒀습니다.”
“상급자를 배려할 줄 아는 훌륭한 소위로군. 고맙네. 휴가 낸 거에 이어서 병가까지 붙여 쓴 게 됐으니, 돌아가면 할 일이 태산이겠구만.”
“아뇨. 뭐, 다칠 걸 예상해서 휴가내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누구도 뭐라고 하진 않을 겁니다. 근데, 그것보다..”
침을 꿀꺽 삼키며 VIP님을 바라봤다. 노인은 어쩐지 후련하면서도 텅 빈 듯한, 그러면서도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즉 한마디로 멍 때리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분명 넋이 나간 게 분명했다. 표정만 봐서는 일반병동이 아닌 정신병동으로 보내야 할 것 같았다. 달리 말하면 기회는 바로 지금. 그동안 그토록 궁금했던 걸 알 수 있는 건 바로 이 순간이다.
“로니(Ronny) 교관님. 3일 동안 정신을 잃고 계셨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VIP님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잠깐의 공백의 시간이 지난 후. 바람빠진 풍선처럼 그의 입속에서 중얼거림이 새어나왔다.
“...그러게 말일세.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기대를 저버리는 대답에 맥이 빠졌다.
능구렁이 같은 양반 같으니라고. 오늘도 안 알려줄 게 분명하군.
땀이 삐질삐질 나오는 어느 여름 날.
난 오늘도 변함없이 통역장교로써 로널드 중령님을 모시고 있다.
불행히도, 무사히 그가 깨어난 걸로 봐선 한동안 업무가 바뀔 일은 아무래도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