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정도(正道)와 사도(邪道)

kisone 2015.04.05 23:38 조회 수 : 9

1.

 

숨이 가빠졌다. 이리 달려 본 것이 몇 년 만이던가. 하지만 그렇다고 뜀박질을 멈출 순 없는 노릇. 로널드는 늙은 몸을 다독였다. 봐라, 이렇게 흔적이 계속 이어지고 있지 않은가. 낯설지만, 잊을 수 없는 흔적들이 말이다. 그러니 계속 달리자꾸나.

이 흔적들의 끝에 도달할 수만 있다면, 내일 아침 근육통으로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해도 좋겠지. 거기에 더해 늘 먹던 토스트와 계란프라이를 하루쯤 거른다 해도 괜찮은 조건이라 로널드는 생각했다. 오히려, 이 정도의 대가로 정보를 얻어낼 수 있다면 싸게 먹히는 격이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역시 찾아내야겠구만. 이 난동을 부린 주인공들을.”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 그리고 사람이 다니지 않는 외진 길. 모든 것이 조화롭고 평화롭게 이루어져 있어야 할 어느 여름밤의 해안 도시. 그 조화와 평화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건 대지에 난, 기묘한 상처들이었다. 아무리 좋게 보아주려 해도 공사의 흔적이라고 보기는 힘든 자국들. 도로뿐만 아니라 수풀 여기저기를 흉측하게 할퀸 흔적들. 이를 무엇이라 비유할 있을까. 로널드는 반세기 넘게 살아온 자신의 경험에 억지로 끼워 맞추어보았다.

 

그래, 이건 마치 전쟁터 여기저기에 난 작은 폭심지 같군.”

 

하지만 그런 흔적도 일부에 불과했다. 여기저기 잘리고, 으깨지고 부딪힌 자국들. 이는 무엇이라 할 것인가? 오랜 시간 전쟁터를 뛰어다닌 군인이지만 탄흔을 본적은 없었다. 단 한번만 제외하고. 그래. 단 한번이었다. 불행스럽게도 로널드가 이러한 흔적들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로널드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10년이군.”

 

마지막이 되버린 전장. 그곳에서 산화한 부하들. 그리고 남은 의문의 흔적들. 그것들이 지금 10년 만에 그의 눈앞에서 펼쳐져 있었다. 중남미도, 영국도 아닌, 극동의 땅에서. 손을 들어 잠시 콧수염을 눅눅하게 적시고 있는 땀을 훔쳐냈다. 어디선가 폭죽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로널드는 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계속 달렸다.

 

지켜봐 주시게.”

어두운 밤길, 차갑게 식었던 노병의 회색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2.

 

보좌관은 외침은 거의 비명에 가까웠다.

 

회의 중이십니다.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로널드 대위님!”

 

판단은 내가 하네! 내 동기 놈이 안에 있는 거 다 알고 있어! 비키게!”

 

사실 로널드의 인내심은 꽤 끈덕진 편이었다. 그는 부하들에게 너그러운 편이었고, 덕분에 타 중대장들에 비해 우월했다. 비교적 최근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까지였다. 로널드는 보좌관을 밀치고 인사장교실 문을 손대신 발로 밀어버렸다. 와지끈하는 소리가 울러퍼졌고, 그와 동시에 인사장교실 내부가 인내심이 바닥난 대위 앞에 드러났다. 책상에 앉아 있던 인사장교는 덜렁거리는 나무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로니, 대체 이게 무슨 짓인가.”

 

오늘만큼은 해명을 해줘야겠네! 내 부하들을 죽인 테러리스트가 아직 멀쩡히 살아있는데, 어째서 내가 아직도 이렇게 처박혀 있어야 하는 건가! 설마 크레이브 그 노인네가 망령이 들어 벽에 똥을 칠한다는 첩보가 들어와야 나를 투입시킬 텐가!? 자네가 보기엔 내가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군인이었나!”

 

진정하게, 로니.”

 

진정!? 2년을 기다렸어! 자네가 내 동기라면, 나를 이렇게 대해선 안 돼! 죽은 내 부하들이 매일 밤 내 꿈에 나타난다고! 생존한 부하들이 복수로 이를 갈고 있다고! 그런데 왜! 우리 중대를 열외 시키는가! 우리들을 따돌리는 이유가 대체 뭐냔 말야!”

 

인사장교는 한숨을 내뱉은 뒤 가슴팍에 있는 주머니로 손을 옮겼다. 그리곤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바로 그래서일세.”

 

뭐라고?”

 

목젖을 타고 담배연기가 새어나왔다. 인사장교는 입안에서 말을 몇 번이나 굴렸다. 되도록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 역시 자신의 동기에게 가슴에 대못을 박는 짓 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 그리고 상층부에서 바라는 것은 그 누군가가 자신이 되는 것이었다. 인사장교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자넨 동기들 중에서도 제일 현명하고 똑똑했지. 명예를 알고, 충성을 알고, 약자를 지킬 줄 아는 군인이었어. 우린 모두 그런 자네를 부러워하고 따랐지.”

 

그걸 안다면 더욱이 나를...!”

 

인사장교는 로널드의 말을 끊고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하지만. 로니, 지금은 그렇지 않아.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건 복수에 미친 머저리 장교뿐이야. 지금 부하들과 나가면 딱 전멸하기 좋아 보이는군. 자넨 통제력을 잃었어. 이 상태로는 부대를 지휘할 수 없네. 그리고 그건 사령부에서도 똑같이 생각하고 있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책상 위에 있던 재떨이가 벽을 향해 날아갔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유리조각들이 튀어 올랐지만, 정작 투사체를 맞을 뻔한 당사자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로널드는 그런 인사장교를 향해 침을 뱉은 후 자리를 박차고 떠났다.

 

인사장교의 입에서 다시 한 번 긴 한숨과 함께 담배연기가 느릿하게 뿜어져 나왔다.

 

대체 언제 정신을 차릴텐가...”

 

오갈 곳 없는 담뱃재가 책상 위로 떨어져 내렸다.

 

 

3.

 

그녀와 마주친 건 길모퉁이를 돌 때였다. 아마 피하지 않았다면 로맨틱 코미디나 청춘 만화에 나오는 것처럼 부딪히고 말았겠지. 하지만 로널드는 비교적 주의 깊게 달리고 있었고, 다행히 미리 방향을 바꿈으로써 그런 불상사만큼은 피할 수 있었다. 로널드는 중절모를 바로 눌러쓰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꽤 특이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 이 지방 사람이 아닌 듯 싶었다. 그녀는 그와 같은 외국인이었다.

 

이런, 미안하네. 아가씨. 내가 좀 바쁜 일이 있어서 실수할 뻔 했구만.”

 

항상 바쁠 때에도 상냥하게. 중절모를 살짝 벗어 밤인사를 하는 그의 모습은 누가 본다면 그야말로 영국신사의 표본이라 박수쳐 줄만했다. 로널드는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 내며 빠르게 상대를 훑어보았다. 상대는 꽤나 지쳐보였다. 하지만 아무 말도 없이 고개만 한 번 끄덕인 후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로널드 옆을 지나쳤다.

그리고 그 순간. 익숙한 냄새가 그녀에게서 풍겨 나왔다.

추억 속에서 한 동안 맡지 않았던 냄새. 지독하게 눌러 붙은 비린내. 전장에서 피아를 가리지 않고 코에 눌러 붙게 되는 냄새. 바로 피비린내였다.

 

잠깐, 젊은이. 자네...”

 

로널드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정말 보였던 것만큼 지쳐있긴 했던 것이었을까? 어느새 그녀는 저만치 멀어져 가고 있었다.

로널드는 고심했다. 아까의 굉음으로 추측하건데, 분명 이 모퉁이만 돌면 이 전투의 진원지로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등 뒤로는 상처 입은 듯한 젊은이가 빠르게 멀어져가고 있었다. 10년간 찾을 수 없었던 단서를 쫓아갈 것인가, 아니면 피 흘리는 젊은이를 쫓아갈 것인가. 선택을 해야 했다.

시선이 그녀가 지나간 모퉁이로 향했다. 잠시 멈춰 섰던 그 자리엔, 꽤 많은 피가 바닥에 흥건히 고여 있었다. 로널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고 결단을 내렸다.

 

4.

 

병에 반쯤 남은 진(Gin)이 손에서 덜렁거렸다. 로널드는 미간을 찡그리며 고민하다 이내 수화기를 들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한바탕 싸운 상대에게 전화를 건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 술에 잔뜩 취한 손가락으로는 더욱이 그러했다. 몇 번이나 잘못 걸고 나서야 전화는 인사장교의 핸드폰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로니.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인가.”

 

낮에 일 따윈 개의치 않는 듯한 목소리. 그렇기에 로널드의 입은 더 쉬이 열리질 않았다. 잠시의 정적이 흐르고, 동기는 이내 그의 심정을 이해헀는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이해하게. 자네가 이해해야 해. 사령부도, 나도, 그리고 특히 현재의 자네를. 그래야만 먼저 떠난 이들을 제대로 품어줄 수 있을 걸세.”

 

“......못난 동기라서 미안하군. 낮에 부하들 앞에서 못 볼 꼴 보여서 미안하네.”

 

피식하고 웃는 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다 잊었네. 그나저나 꼬부라진 목소리가 장난이 아니군. 어디서 마시는 거지? (Bar)? 아니면 집?”

 

방에서 한 잔하고 있네.”

 

, 보나마나 싸구려 진이나 사서 그 보잘 것 없는 수염에 묻히고 있겠군. 기다리게. 내가 이런 날을 위해 준비한 브랜디가 있으니, 그거나 같이 마시자고. 곧 갈 테니 취해서 먼저 고꾸라지지나 말게.”

 

자네, 내일 근무해야하지 않는가.”

 

로널드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전화기 너머 상대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몰랐나? 현 시간부로 자네와 나. 모두 내일까지 휴가일세. 인사장교가 난데 누가 뭐라 하겠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정말 오랜만에 짓게 되는 웃음이었다. 로널드는 진이 담긴 병을 한쪽으로 치우며 대답했다.

 

그래, 기다리지.”

 

 

 

그로부터 한 달 뒤.

로널드는 소령으로 진급했다.

그리고 사관학교 생도 교관으로 발령을 받았다.

 

 

5.

 

본디 영국은 마술의 나라라 했다. 아서왕 연대기에서부터 시작해서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 피터팬 그리고 최근에 이르러서는 해리포터까지. 마술의 나라라는 영감 때문일까? 수많은 영국 작가들은 상상 속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고, 그것을 본 독자들에게 기쁨의 탄성을 내지르곤 했다. 하지만 거기엔 중요한 불문율이 있었다. 바로 이것은 이야기일 뿐이라는 사실. 결코 활자나 스크린 밖으로 튀어나와서 사람들에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환상 속의 세계. 그렇기에 아름다고 탄성이 터지는 나라. 영국.

 

분명 그러했을 터였다. 그런데 그 불문율이 깨어졌다. 그것도 자신의 조국 섬나라가 아닌, 극동의 섬나라에서.

 

다윗의 별, 아니. 마술진이라고 해야 하는 것인가?”

 

바닥에 새겨진 기묘한 문양들. 둥글고 네모난 테두리가 가득히 새겨진 읽은 수 없는 글자들. 그리고 그 위에는 누워있는 한 명의 남자. 그는 자신이 흘린 피 웅덩이 위에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끔찍하군.”

 

분명 왼쪽 팔이 있어야할 자리에선 피가 울컥울컥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오른손으론 찢어진 배를 부여잡고 있었는데, 그리 눈여겨보지 않아도 삐져나온 붉은 창자가 보일 정도였다. 로널드는 속으로 감탄했다. 그의 오랜 전쟁 경험으론 이미 치명상. 아니, 아직 쇼크사 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아직 숨이 붙어 있다는 건, 그만큼 강인한 정신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겠지.

 

기묘한 문양들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남자는 간질 환자처럼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눈동자에 한 가득 살기를 담은 채 로널드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붉은 문신이 새겨진 오른손을 로널드가 안 보이는 방향으로 슬그머니 내렸다. 마치 로널드에게 감추듯이. 덕분에 터져버린 배에선 정리되지 않은 붉은 창자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에겐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아 보였다. 곧 죽을 이 남자에게 이보게 괜찮은가?” 따위의 말을 하는 건 분명 큰 모욕이 될테지. 그리고 조금 잔혹하지만, 로널드는 그에게서 단서를 얻어야 했다. 그러기에 상냥한 말을 해줄 여유 따윈 없었다. 로널드는 마술진의 중심으로 걸어 들어갔다. 다가가는 발자국 소리에 맞춰 고여 있는 피 웅덩이에서 철벅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마술진을 중심으로 깨어지고 부서지고 쪼개진 도로 파편들이 난잡하게 널려 있는 걸로 보아 로널드가 추격해 온 흔적들의 주인공은 눈앞에 있는 이 남자가 분명했다. 로널드는 무릎을 꿇고 남자와 눈을 맞춘 뒤 질문을 했다.

 

말하게. 자네는 누구지?”

 

로널드의 질문에 잔뜩 긴장하고 있던 남자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짜증이 가득한 눈빛으로 로널드를 노려보았다.

 

“.......! 겨우, 그건가? 퀸즈, 잉글리시여서 기대했더니. 신비도, 모르는. 멍청한, 잡종 늙은이라니... 시계탑, 엘리트, 마술사가... 최후로 듣는 말이..... 이 따위 쓰레기 같은 질문이라... 남들이, 알까, 두렵군...”

 

신비. 시계탑. 마술사. 생소하지 않지만 생소한 단어들이 낯설지 않은 언어로 로널드의 귓가를 때렸다.

 

자네, 잉글랜드 출신인가? 마술사라니. 무슨 말이지? 작전명인가?”

 

남자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내 격한 기침과 함께 피를 토해 내기 시작했다. 로널드는 직감했다. 이제 정말 이 남자에게 주어진 시간은 찰나와도 같을 거라는 사실을. 초조함이 로널드를 휘감기 시작했다.

 

크레이브! 크레이브를 아는가? 이렇게 대지의 상처를 남기는, 테러범. 소년병을 키우는 노인!”

 

남자는 부들부들 떠는 몸으로 킥킥대며 웃었다.

 

“....그딴 건, 아까, . 습격한.... 빌어먹을, 년이나... 찾아가서, 물어봐라, 멍청한 노친네야.”

 

“10년 전, 중남미에서 활동했던...!

 

로널드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남자가 갑자기 하나 남은 팔을 움직여 로널드의 멱살을 거세게 움켜쥐었기 때문이었다.

 

내 앞에서 그딴 쓰잘데기 없는 말을 늘어놓지 마라! 더 이상 내 죽음의 격을 떨어트리지 말란 말이다!”

 

곧 망자가 될 남자의 고함소리에 로널드의 말문이 막혔다. 로널드와 마주친 그의 눈동자는 분노와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그를 보낼 순 없는 노릇. 아무런 단서도 없이 보낼 수는... 로널드는 이를 악물고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크레이브를...”

 

닥쳐. 엿이나 먹어라.”

 

. 하는 소리와 함께 로널드의 얼굴에 피가 가득한 침이 묻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로니의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이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남자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어 버렸다. 그는 짜증이 가득하고 불쾌한 표정으로, 로널드의 질문에는 어떠한 대답도 없이. 그렇게 떠나버렸다.

 

모든 단서가 사라졌다. 10년 만에 찾아온 천재일우의 기회가 끊겨버렸다. 부하들이 죽은 원인도 모르는 부대장이라니.

 

이렇게, 끝인가.”

 

가슴 깊은 곳에서 허무감이 올라왔다. 짧은 희망은 깊은 탄식으로 바뀌었다. 고개를 떨구자 역한 피비린내가 피 웅덩이에서 코끝으로 올라왔다. 스스로에 대한 분노와 앞으로도 알 수 없다는 사실의 절망감이 그의 몸을 휘감고 돌았다.

 

그렇게 모든 것을 포기하고 떠오를 샛별을 맞이하려 했을 때,

 

바람이 춤을 추고,

대지가 꿈틀 거리고,

소환진이 붉은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 번째 마술사가 나타났다.



6.


강렬한 빛으로 로널드는 자기도 모르게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이윽고 빛이 거두어지고 로널드가 팔을 내리자 마술진 위에는 아까까지만 해도 없었던 남자가 서 있었다.


멋지다기보다 아름답다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장금발의 남자는 척 봐도 굉장히 고급스러워 보이는 의복을 입고 한 손에는 보석이 박힌 지팡이를 들고 서 있었다. 등을 쫙 펴고 마치 세상을 다 가진 사람인 양 당당하게 서 있던 그 남자는 시체를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허어, 불경한 자로다. 경애하는 왕이 행차하는 중대사를 앞에 두고도 누워서 맞이하다니. 허나 죽음을 앞에 두고도 짐을 불러낸 그 충의를 보아 넘어가주도록 하지."


이 상황에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한 남자는 고개를 돌려 로널드와 눈을 마주쳤다. 품격이 느껴지지만 동시에 짐승과도 같은 기색이 느껴지는 그 눈동자를 정면에서 마주 본 로널드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헛삼켰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서 이 남자가 나타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오랜 세월과 전쟁동안 단련된, 몇번이고 위기에서 자신을 구해준 그 직감이 지금 최고조로 경종을 울려대고 있었다.


저것은 인간이 아니다. 더욱 위험한 무엇인가다.


메마른 목으로 침이 넘어간다. 마치 맹수를 앞에 둔 인간처럼, 본능적으로 굳어서 움직이지 못하는 로널드를 무심하게 바라보던 금색의 남자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짐의 적이 될 자인가 했더니 두려움으로 멈추었을뿐인가. 그 연로함은 지혜를 담고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죽음 앞에서도 꼿꼿이 맞서 싸우던 짐의 조언자에 비하면 결국 범부로군."


"자, 자네는...아니, 너는 뭐지?"


쿵. 남자의 손에 들려진 지팡이가 한차례 바닥을 찔렀다. 둔탁하고 무거운 소리가 로널드의 심장을 두들기는 듯 했다. 남자는 엄한 표정을 지으며 로널드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노자여, 그대는 지금 질문이 아니라 기회를 잡을 때이다. 짐은 캐스터의 좌로 현계한 왕. 그대에게 소원이 있다면 짐은 아량을 베풀어 그것을 이룰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허나 원하는 것을 이루고자 한다면 대가를 치루어야 하는 법."


발걸음이 귀를 간질인다. 남자와 로널드의 거리는 분명 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로널드는 남자가 다가오는 그 시간이 이상하리만치 길게 느껴졌다.


"짐의 도움을 받고 싶다면 짐을 섬기거라. 설령 그대가 한낱 필부라 해도 짐은 신하된 자에게 인색하지 않으니, 손이 닿는 곳까지 그대를 돕겠다. 노자여, 그대는 저 자를 대신해 신하가 되어 짐을 섬기겠는가?"


마침내 바로 앞에 선 남자는 도저히 제정신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제안을 꺼내왔다. 무거운 미성은 귀에 들어오지 못하고 그저 주위를 맴돌았다. 스스로를 왕, 그리고 캐스터라 칭한 남자의 말이 끝나자 잠시 침묵이 자리를 지배했다. 로널드는 괴상한 제안에 대한 대답을 내기 전에 눈을 감고 가만히 서 있었다. 마침내 로널드가 눈을 뜨고 캐스터를 똑바로 바라보았을 때,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나는......."


그날 밤은 로널드 오십이 세의 인생 중 가장 큰 결정을 내린 밤이었다.

Powered by Xpress Engine / Designed by Sketchbook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