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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 (1)

벚꽃여우 2014.06.02 21:03 조회 수 : 1

 "그럼 이번 시험은 남녀 둘이 짝이 되서 실시하도록 하겠어요."

 "에에? 그런 게 어딨어요!"

 

 교실 안은 눈 깜짝할 사이에 불만을 토로하는 아이들의 원성으로 가득 찼다. 갑작스런 담임 교사의 말에 그들은 옆에 앉은 자기 짝꿍을 노려보며 싫은 기색을 드러냈다. 사건의 발단은 며칠 전, 몇몇 남자 애들에 의해 행해진 비밀스러운 투표가 원인이였다. 그것은 반 안에서 가장 귀여운 여자아이의 등급을 매긴다는 내용으로 이 인기투표의 결과가 우연히 여자들의 귀에 들어가자 남녀의 사이가 완전히 틀어져버렸다. 이 얘기를 전해들은 에노 선생님은 자기 학생들을 남녀별로 앉게 했으나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남자와 여자로 갈린 각 세력의 냉전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교실의 험악한 분위기를 참다 못한 에노 선생님은 일주일 뒤에 있는 리코더 시험도 남녀별로 조를 짜서 받게 한다는 강경책을 내세웠다.

 

 "우리 반은 왜 이렇게 사이가 안 좋은 거지?"

 

 에노 선생님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시집도 안 갔는데 미간에 보이는 주름이 그녀의 고생을 짐작케 했다. 하지만 에노 선생님과 옆반의 야마모토 선생님이 서로 사귀는 사이라는 것은 이미 교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공공연한 비밀이였다. 학생들은 두 사람이 언제쯤 결혼할 지에 대해 얘기하곤 했다.

 

 "선생님, 저는 마키시마 군하고 짝 시켜주세요."

 

 제일 먼저 손을 들어올린 사람이 있었다. 타키가와 크리스였다. 사실상의 선전포고였다. 타키가와는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않는 여자다. 어쩌면 그런 행동력이 반 여자아이들 속에서 군림할 수 있는 리더쉽으로 발휘되는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때로는 그런 사람이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법이다. 하루키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전원의 주목을 한몸에 받고 얼어붙은 친구, 마키시마 슈우토의 눈에 들어왔다.

 

 "안 돼. 자기 옆자리에 앉은 사람하고 조를 짜세요."

 

 다시 한번 교실을 메우는 함성. 하루키는 딱히 자기 이웃에게 원한은 없었지만, 상대방은 자신을 완전히 적으로 인식했는지 입을 다물어버렸다. 아무래도 조원의 도움을 받긴 힘들 것 같다. 별 수 없이 혼자서 연습하기 위해 가방 안에서 리코더를 꺼내려고 몸을 돌린다. 그러다 문뜩 하루키의 눈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

 

 슈우의 옆에 앉아있던 것은 버스에서 얼굴을 마주친 시라토리 유메하였다. 슈우는 타키가와의 마의 손으로부터 벗어난 안도감인지, 밝은 표정으로 유메하에게 대화를 시도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슈우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어보였다. 아니, 마치 주변의 어떤 것에도 흥미가 없는 것처럼 고개를 돌린 채 무관심한 태도로 턱을 괴고 있을 뿐이었다. 하루키는 유메하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유메하는 자신을 전학생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녀가 언제 반의 일원이 되었는지 하루키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

.

.

 

 

 수업을 마치는 종소리와 함께 아이들은 하나둘씩 집으로 돌아갔다. 그들과 작별 인사를 나눈 뒤, 청소 당번이였던 하루키는 책상을 교실 뒤로 옮기던 도중 이상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과 같은 청소 당번인 여자 아이들 그룹이 빙 둘러쌓여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녀들은 청소는 뒷전인지 때때로 밝은 웃음을 터트리며 이야기 꽃을 피우는 중이었다. 주의를 줄까 고민했지만 그 사이에 섞여 함께 얘기를 나누고 있는 유메하의 모습이 보였다. 뚱한 얼굴로 그 속에 있는 유메하의 모습은 어딘가 이질적이였지만, 그녀 역시 얘기를 터놓을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에 하루키는 내심 안도하고 있었다.

 

 "결국 유메하쨩의 성은 시구마랑 시라토리, 어느 쪽인데?"

 "출석부에는 제대로 시구마라고 적혀있었어. 왜 성이 두 개나 있어?"

 "혹시 부모님이 이혼하신 걸지도 몰라. 그래서 옛날 성이 시라토리!"

 "왜 그런 거야? 응? 왜? 왜?"

 

 아무래도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건 유메하 본인인 모양이였다. 하루키는 자신이 그녀의 성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루키가 기억하는 한, 자기 반에 '시라토리'라는 성을 지닌 친구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유메하는 자신의 성을 다르게 가르쳐준 걸까? 들려오는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자신에게만 그랬던 게 아닌 듯 했다. 쏟아지는 질문 세례 속에서 유메하는 마침내 꾹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시라토리는 전생의 이름이야."

 "............"

 

 잠시 동안 침묵이 주변을 맴돌았다. 여자 아이들은 뜻밖의 답변에 대처하지 못하고 한동안 말을 찾다가 다시금 자기네들끼리 떠들기 시작했다.

 

 "전생? 전생이 뭐지?"

 "바보, 죽어서 다시 태어난 뒤를 전생이라고 하는 거야."

 "그건 전생이 아니라 환생이겠지. 전생은...... 그거야 그거."

 "지금 모습으로 환생하기 전의 모습이라고 TV에서 그랬어."

 "그래, 그거 그거."

 "유메하쨩은 어려운 말을 알고 있구나......"

 "있잖아, 유메하쨩은 전생에 어떤 사람이였어?"

 

 한 아이의 질문에 유메하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대답했다.

 

 "나는 이 세상의 진리를 탐구하는 마술사, 시라토리 유메하였어."

 

 탄성이 흘러나왔다.

 

 "마술사? 굉장해!"

 "하늘도 날 수 있는 거야?"

 "변신해서 나쁜 녀석들하고 싸우는 거야!"

 "그건 마술사가 아니라 히어로잖아?'

 "보여줘 보여줘! 마법 쓰는 거 보여줘!"

 "아니, 마법 같은 건 영화 속에나 나오는 거야."

 "마법이나 초능력 같은 게 실제로 있을 리 없잖아?"

 "엣, 그런 거야? 뭐야, 시시해......"

 "시구마는 거짓말쟁이네."

 

 탄성은 점점 거센 비난으로 변해갔다.

 

 "거짓말 아냐. 나는 가장 진리에 근접한 마술사로 이 세상에 마지막 남은 신비를 전하는 자, 시라토리 유메하였어."

 "그럼 보여줘. 마법 쓰는 거 보여달라고!"

 "못 하잖아. 마법 못 쓰잖아!"

 "왜 계속 거짓말 하는 거야? 거짓말쟁이는 지옥에 간다고 우리 엄마가 그랬어."

 "거짓말쟁이! 시구마는 거짓말쟁이!"

 "이제 그만 자기가 거짓말쟁이란 걸 인정하면 어때?"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

 소리는 점차 커져갔다. 한명의 거짓말쟁이와 그를 비난하는 무리. 대의명분을 얻은 그들은 한명의 약자를 공격하는 것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혼자 남은 소녀는 차갑게 식은 눈빛으로 주변을 노려보았다. 마치 동정받아야 할 것은 자신이 아니라 그들이라는 것처럼.

 

 "마술은 믿음을 갖지 않은 자들 앞에서는 환영이랑 별반 다를 게 없어. 그러니까."

 

 약간의 떨림이 베어있는 목소리는 말을 잇는다.

 

 "심술궂은 너희들한테는 죽었다 깨어나도 안 보여줘."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아이들은 소녀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린 듯 일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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