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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

로하 2014.03.09 04:53 조회 수 : 2




00/



     시에라는 고민하지 않는다. 신중의 신중을 기해, 수백 수천 수만 번의 생각을 반복한 뒤 결론을 내렸으나, 한 번 무엇인가를 결정한 이상 그것을 추후의 진행에 따라 조절하는 일은 있을지언정 번복하는 일은 없었다. 그것은 지금 또한 마찬가지였다. 몸이 애달프게도 희미하게 떨리고, 잔뜩 긴장한 손끝은 희고도 희어 눈과 같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가 외출한 것은 이미 확인한 후였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어떠한 결과가 나올지언정, 받아들일 각오는 되어 있다. 

어떠한 대답이 나올지언정, 받아들일 준비는 되어 있다.


아마도, 지만. 그래도,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더 이상 그녀 스스로가 못 버틸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답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는 희미하게 후들거리는 다리에 애써 힘을 주었고, 방문을 열었다. 새빨갛게, 잘 익은 토마토마냥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지 못한 채, 그녀는 왼손에 꼬옥 펜을 쥐었다. 그리고는, 그리고는. 깊게 다시 한 번 크게 숨을 들이쉬고,


마치 철문처럼 무겁고도 단단해 보이는 맞은 편 방문의 손잡이를, 가볍게 돌렸다.





01/



     언제나처럼, 나긋한 말씨의 인사와 함께 귀가한 남자는 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문을 닫았다. 꽤 빽빽하게 찬 서가 - 이 저택의 주인 소녀는 서적 취미가 정말로 좋았다 - 옆, 따스한 햇빛 아래의 책상에 놓여져 있던 책을 들고는, 살짝 몸을 돌려 몇 걸음을 걸어, 희미하게 숲내음이 감도는 듯한 마호가니 의자에 우아하게 앉았다. 사람의 앉는 자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일지도 모르겠으나, 적어도 그의 행동을 묘사하는 것에 그 외의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꽤 나름대로 편안한 각도로 기대어 다리를 꼬고 앉아, 남자는 책을 펼쳤다. 적당히 책갈피로 표시해 둔 장이었다.



   『... ... 나는 아가씨에게 우리 안에 들어가 쉬게 해 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새로운 볏짚 위에 새로운 깨끗한 양가죽을 깔고, 아가씨에게 '편히 주무세요' 라고 말한 다음 나는 밖으로 나와 문 앞에 앉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증인이 되어 주십니다. 마음에 불길이 타오를 듯 했지만, 불순한 생각은 티끌만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한 구석에, 나의 보호 아래에 편히 주무시고 계신다 생각하니 커다란 자랑스러움만 느껴질 뿐이었습니다. ... ... 』



   도데의 글 속 소년의 마음은 남자로서는 매우 즐거울 정도로 깨끗하고 순수한 것이었다. 형태 좋게 타이핑 된, 이 나라의 것이 아닌 문자를 읽으며 남자는 곧 다시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유려한 문장은 마치 시와 같아서, 꽤나 아름답다, 남자는 생각했다.



   『... ... 만약 당신이 노천에서 밤을 지새었던 일이 있다면, 사람이 잠들고 있는 시간에 어떠한 신비스러운 세계가 고독과 고요 속에서 눈을 뜬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겁니다. 그 때, 생물은 한층 더 맑게 갠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눈에서는 작은 불꽃이 여러 개 빛을 냅니다. 산에 사는 모든 정령들이 자유로이 오가고, 대기 속에는 희미한 음향과 가볍게 스치는 정도의 희미한 울림이 들립니다. 그것은 마치 나뭇가지가 자라고 풀이 돋아나는 소리처럼 들립니다. 낮은 생물의 세계지만 밤은 무생물의 세계랍니다. ... ...』



   신비스러운 세계. 정령들이 춤추는 밤. 나뭇가지가 자라고 풀이 돋아나는 소리. 밤의 노래. 남자는 문득 소녀가 지나가듯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요정이 노래하는 세상. 나뭇가지가 자라고 풀이 사각거리며 돋아나는 소리. 소녀는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것이 어떠한 음악인지, 어떠한 순간인지를. 그에게 지나가듯 말한 것 뿐이었으나 그는 문득, 그녀가 이 구절을 듣는다면 무슨 기억을 떠올릴지, 무슨 말을 할 지 조금 알고 싶어졌다.



     『... ... 그리고 내가 별의 결혼이 어떠한 것인가 설명해주려 하였을 때, 나는 무엇인가 상쾌하고 부드러운 것이 내 어깨에 기대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리본과 레이스와 물결치는 머리카락을 곱게 누르며 내게 기대온 아가씨의 잠든 머리였습니다. 아가씨는 하늘의 별들이 햇빛 속으로 희미하게 사라질 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나는 가슴을 약간 두근거리면서, 나에게 여러가지 아름다운 추억을 안겨 준 이 청명한 밤의 신성한 보호를 받으며 아가씨의 잠든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 ...』



     그는 문득 이러한 구절을 소녀에게 들려준다면 어떠한 반응을 보일지 그려보았다. 분명히 재미있는 반응을 돌려줄 것이었다. 기대대로, 혹은 기대 이상으로. 한 번 말해 볼까. 그는 선선한 입매를 살짝 끌어올렸다. 그렇다면, 부디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 물론 기회라는 건 핑계일 뿐, 언제라도 가능한 일이었지만 - 말해보는 것도 즐거운 일일까. 그리 생각하며 눈꼬리를 휘던 남자는, 문득 그의 손에 가려져 마지막 구절을 읽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가끔 나는 별들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하나의 별이 길을 잃고 나의 어깨에 기대어 잠들어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 남자는 한 번 눈을 깜빡였다. 유려한 필체로 씌여진 그것은, 누가 한 행동인지 모를 리 없는 것이었다. 이 집 안의 '그 외'의 누구도, 할 리가 없으며 할 수도 없는 일이었을 테니까. 쓴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한 번 글자 위를 쓸어본 손가락 끝에 희미한 잉크 자국이 남았다. 깃펜으로 쓴 듯 남은 글을 읽고, 남자는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이 어떠한 목적으로 씌여진 것인지까지는 아직 알 수 없었으나, 그는 그것을 그냥 넘길 생각 따위 추호도 없었으니까. 그는 책을 내려놓았고, 서가로 걸었다. 


     그가 남겨 둔 책장 마지막 귀퉁이에 적힌 건, 짤막한 구절 - 바뀐 구절이었다. 





운명과 감정은 한 명의 사람에 대한 다른 이름이다 Schicksal und Gemüt sind Namen einer Person   





02/



     남자는 서가의 조금 오른 쪽 끝, 약 세 번째 줄에서 책장을 훑었다. 그가 기억하는 것이 맞다면, 그 책은 분명 여기 즈음에 있을 것이었다. 아, 책장을 가리키며 훑던 남자의 손가락이 멈추었고, 그는 곧 팔을 뻗어 다소 낡고 작은 책을 꺼내었다. 조금 오래 된 듯 빛바랜 누런 종이의 책은, 옛 책 특유의 기분 좋은 종이 내음을 흘렸다. 데미안. 헤르만 헤세. 그는 파라락, 책장을 넘겨 제일 끝을 보았다. 음? 예상 외의 일이었다. 끝에는 아무것도 적히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하는 수 없다. 물론 그저 그녀가 도데의 책에만 유독 남겨둔 것일 가능성 또한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그녀의 성격상 그럴 사람이 아니란 걸 그는 이미 너무나도 잘 이해하고 있는 상태였다. 



     "...당신은 나와 술래잡기라도 하고 싶은 걸까나, 귀여운 시에라."



     그렇게 중얼거리며, 남자는 의자에 앉는 대신 그대로 서가에 기대어 곧바로 책의 첫 페이지를 펼쳤다. 꿀과 같은 금빛 눈이 빠르게 문장을 훑었다. 에밀 싱클레어. 데미안. 아브락사스. 사랑 속에서 밝게 자랐으나 자신의 길에 대해 고민하는 소년. 소년 옆에 나타난 악마 (Damon) 의 이름을 가진 또 다른 소년은 그 이름대로 '에밀 싱클레어가 생각하는 밝은 세상'에 어울리는 자는 아니나, 항상 그를 돕고 또 이끈다. 그리고 아브락사스. 세계라는 알을 깨고 나오는 새.



     『... ... 처음엔 이토록 갑작스러운 개심에 나 자신이 우습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사랑하고 존경할 무엇을 가졌고 이상을 되찾았으며, 생은 다시 새벽에의 예감으로 감싸인 신비스러운 어둠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의 비웃음에 무감각할 수 있었고, 다시 나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 ...』



     책장을 넘기며, 파르륵 넘기며, 주인 없는 방, 왼손에 펜을 쥔 채 팔락 넘기며 시에라는 또렷 생각했다. 이토록 갑작스럽게 변화한 스스로가 우스울 정도다. 아니, 솔직하게 말해 자신이 그른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사실이었다. 그녀는 그것이 그르든 옳든, 스스로가 생각해 내린 답이고 결론이라면 한 점 의심조차 갖지 않고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그 또한 이유가 있을지어니, 그녀는 믿고 따를 뿐이었다. 어떠한 결과를 불러오든, 스스로가 판단한 것이라면 그 후는 더 이상 의심하지 않는다. 망설이지 않는다. 



     소녀가 넘기던 책장을 계속해서 빠른 속도로 따라 넘기며, 남자는 휙휙 문장을 읽어내렸다. 



     『... ... 불을, 구름을 들여다봐. 그래서 예감이 떠오르고 영혼의 목소리가 말을 시작하면 그것에 몸을 맡겨 버려. 그것이 선생님이나 아버지 또는 어떤 신의 마음에 들까 어떨까를 물어선 안 돼. 그런 물음은 널 망쳐 놓을 거야.  ... ... 』



     그녀는 충동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결단코. 허나 그녀는 스스로가 결정한 것에 흐림 없는 존재였다. 그것이 설령 신이라 하여도, 그녀는 스스로 믿는 길에 대해 안타까워 하면서도, 송구해 하면서도 그것을 포기한 법 없었다. 지금 또한 마찬가지다. 그녀 안의 작은 목소리가, 조금 간질간질하고도 푹신한 그 목소리가 말하고 있었다. 지금 네가 내린 답, 그것이 옳다고. 그것이 사실이라고. 푹신푹신한 기분. 그리고 그것을 아늑히 뛰어넘는 - 마치 장님이 처음으로 눈을 떠 보게 된 태양빛처럼 찬란한 그 기분을, 그 순간을. 그 감각에 온 행동과 믿음을 맏기면서도, 그녀는 그녀인 채 있을 수 있었다. 그녀는 파라락 책장을 조금 더 빨리 넘겼다. 분명, 이 즈음 어딘가.



     남자는 순간 눈에 들어오는 구절에 익히 동의하는 바였다. 그런 물음은 사람을 망친다. 물론 그 또한 인간의 모습일지니 즐겁지 아니할 것 없고 당연하지 아니할 것 없었으메, 적어도 그 자신이 가진 의견은 구절과 같았다. 스스로가 말한다면 그것에 따라 멋대로 하면 그걸로 좋다. 그 뿐인 일이다. 



     『... ... 그 무엇도 두려워해선 안 돼. 영혼이 원하는 것은 그 어떤 일도 금지해서는 안 돼! ... ... 』



     시간은 촉박했다.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 시에라는 문득, 너무 많이 그녀가 넘겨버린 것을 깨닫고는 다시 책장을 앞으로 넘기려 했다. 그러나 문득 꽂히듯 눈에 든 그 구절에, 무심코 순간 손을 멈추었다. ... 살짝, 살짝 꽃잎 같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여직 경험해 본 적 없는 '감정'. 알 수 없는 '미지'. 전혀, 전혀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리라. 오히려 그녀이기에 그러한 사소한 것이 두려웠다. 여직 안 적 없었던 그것이 못내 몸에 떨렸다. 하지만 분명히 스스로는 알고 있다. 그녀 자신이 '의식'하지 않아도 그 속 어딘가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으니까. 바라고 있노라고. 그렇다면, 그렇다면. '마음'이, '혼'이 오롯 원하는 것을 그녀 '의식'이 막아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막아서는 아니 되며 또 막을 수도 없는 일. 그녀는 다시 한 번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펜을 잡은 손가락 끝에 살짝 힘을 주었다.



     문득, 남자는 빠르게 책장을 넘기던 중, 그가 이 책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 하나를 건너뛰어버렸다는 - 동시에 두 장을 넘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시 책장을 앞으로 넘기기 전, 문득 눈에 든 구절을 그는 가벼이 훑었다. 그 무엇도 두려워해서는 아니 된다. 영혼이 원하는 것은 어떠한 것이라도 금지해서는 안 되는 것. 과연, 그와 술래잡기를 하는 소녀는 이 구절을 알고 있을까. 아니, '받아들이고' 있을까. 그리고, 그는 단번에 확, 앞을 펼쳤다.



     『... ... 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 』



     그녀는 페이지를 날듯 넘기던 손을 멈추었다. 지금, 비록 자그마한 그녀의 것일지라도, 그녀는 여직 살아 온 세상을 깨뜨리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세계를. 믿고 알고 바라고 살아온 세계를. 과연 그녀의 행동은 어디에 도달할까. 이 깨진 세계 밖으로, 그녀는 어디에 닿을 수 있을까. '지금'의 그녀로서는 아직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펜을 든 손을 살짝 들어올렸다. 매끄러운 잉크가 종이에 닿아 적셨다.



     남자는 구절을 읽었다. 문장 속의 작은 새가 마치 새하얀 소녀와 같다는 감상을 하며, 그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직감적으로, 만약 또 한 번 무언가 적혀 있다면 그것은 이 곳일 거라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순간에 그래왔듯, 그는 이번에도 옳았다.





아저씨. 전 행복의 참된 비법을 찾았어요. I've discovered the true secret of happiness, Daddy,

그 비법이란 바로 '현재'를 사는 거에요. and that is to live in the now.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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