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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떼

??? 2014.02.19 23:17 조회 수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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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을 따라왔던 사람이─짧은 대화를 나눈 뒤─건물 안으로 사라지자 주변은 고요함에 잠겨 들었다. 바람이 가끔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가 날 뿐이었다. 바람은 각각 낮과 밤의 빛을 담은 둘의 머리카락을 매만져 흐트러뜨렸다. 하지만 둘은 아무 말도 나누지 않은 채 각자 자리를 지켰다. 레이시안은 길목에서, 시에라는 다소 떨어진 곳에서.

  그의 마스터가 있을 곳을 살짝 돌아보았다가, 레이시안은 고개를 틀어 시선을 올렸다. 완연히 밤이 되어 하늘에는 달과 함께 별이 총총했다. 맑으면서도 흐린 풍경이었다. 그의 생전에 비하면 많은 것들이 바래어 별들 또한 빛을 잃었으니. 그러나 레이시안은 그 사실에 애수를 보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아직 낮의 뜨거움을 간직한 탁한 공기가 폐에 고였다. 가볍게 내쉬자, 여운을 남기며 사라져간다. 레이시안은 빙긋 웃었다.



  "……으응, 훌륭하네."



  조용한 목소리였지만, 주변이 고요하여 귀에 닿은 듯하다. 시에라가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에 레이시안은 눈길을 내렸다.



  "오야, 방해됐을까나?"

  "……그런 건 방해라 부르지 않느니라."



  답하는 말투는 자연스러웠다. 레이시안은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렇다면 다행이야."

  "음."



  시에라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던 조금 전과는 달리, 그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고 빤히 바라보았다. 동공이 확연히 구분되도록 맑은 금빛 눈이 달빛을 받아 고요히 빛난다.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음이 분명한 모습에 레이시안 역시 그녀를 마주 보았다. 자아, 당신은 나한테 무슨 질문을 할까. 기대 섞인 흥미 속에서 레이시안은 시에라의 말을 기다렸다.
  시에라는 그를 실망하게 하지 않았다. 그녀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너, 이곳을 퍽 좋아하는 듯싶구나."



  레이시안은 소리 없이 입술을 휘었다. 시에라의 '이곳'이 단순히 이 주변에 한정 지은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채는 건 어렵지 않았고 그 사실은 그를 즐겁게 했다. 그래서 그는 선선히 수긍했다.



  "역시 예리하네, 당신은."

  "엎드려 절 받는 기분이로다. 네게 그런 말을 듣고 싶지는 않노라."

  "오야, 진심을 담은 찬사였는데."



  레이시안은 짐짓 낙담한 듯한 몸짓을 해보였다. 당연히도 시에라는 넘어가지 않았다. 그녀는 도리어 사무적인 눈빛 속에 약간의 언짢음을 섞어 그를 보았다.

  예상했던 일이었기에 레이시안은 그것에 또다시 '낙담'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저 시에라의 표정이 변하는 모습을 재미있게 바라보았다. 그것이 또다른 언짢음을 불러왔는지 시에라는 꽁하니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그녀라고 하더라도, 그런 반응이 그를 더욱 즐겁게 한다는 사실은 눈치채지 못하는 모양이다. 혹은 눈치채었음에도 부러 눈을 감고 있거나.

  레이시안은 시에라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것이 다가 아니다. 분명히 다시 그를 돌아볼 것이다. 그는 속으로 숫자를 셌다. 셋, 둘, 하나.

  시에라의 눈이 빠끔히 그를 향했다. 유쾌함을 느꼈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대신 레이시안은 고개를 갸웃해보였다. 그 반응에 시에라의 표정이 재차 못마땅하다는 심정을 똑 떨어뜨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오래가지 않았다. 시에라는 다시 평소의 사무적인 표정으로 돌아와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질문 한가지 해도 괜찮겠느냐."

  "아아, 물론."

  "너, 이곳을 좋아한다고 했지. 만약 다른 이들이…… 아니, 멀리 갈 것도 없구나. 내가 이곳을 모욕한다면, 어찌 응대할 생각이느냐."

  "후응."



  레이시안은 빙그레 웃었다.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르게. 사소한 변화였지만 시에라는 그가 입밖에 내어 말하지 않은 질문을─어조까지도 생생히─알 수 있었다. '당신이?'라는. 질문했을 뿐이거늘, 어째서인지 말려드는 느낌이 들어 시에라는 입술을 둥글게 모았다.
  그런 시에라를 바라보다가 레이시안은 말했다.



  "당신도 거짓말을 하는구나."



  그는 갸름한 턱을 손가락으로 받쳤다.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었으며, 그 의도는 성공했다. 시에라는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어 입을 열었다.



  "거짓말이라니,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겠노라."

  "오야, 자각하지 못하는 걸까나."

  "……?"

  "하지 않을 일을 한다고 말했잖아…?"



  레이시안은 다시 손가락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시에라는 믓, 하는 소리를 흘렸다.



  "그저 가정이니라. 에에이, 너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꾸 화제가 새는구나. 아니, 더 이상의 지적은 되었다. 내가 네게 물은 건 그 질문이지 다른 것이 아니니라."



  시에라가 고개를 홱, 들자 은빛 머리칼이 일렁였다. 마치 주인의 의사를 대변하는 듯하다. 레이시안은 손바닥을 앞으로 향하게 하여 양손을 들어 보였다.



  "이건 또, 무서운 요정님이네……."

  "레이시안─"

  "으응, 화제 돌리지 말 것. 알았어."



  시에라는 반신반의하는 듯하면서도 표정을 다소 누그러뜨렸다. 레이시안은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입가에 미소를 매달았다.



  "당신의 질문에 대답하자면…… 역시 '상관없어'라고 하는 게 맞을까나."

  "상관이 없다…."

  "아아. 나나 이곳을 싫어하는 사람들이나 마찬가지야…? 내가 좋아하는 것을 그들이 싫어한다 말하고, 그들이 싫어하는 것을 내가 좋아한다 말하고 있으니까."

  "흐음."

  "입장 자체는 동등해. 그러니까 신경 쓰지 않아. 나한테는 좋아할 권리가, 그들한테는 싫어할 권리가 있어. 물론 그들이 그 사실─좋아하는지 아닌지─에 대해 내게 화를 낼 권리도. 내게 그들에게 화를 낼 권리가 있듯이."

  "……그렇느냐."



  달빛 머리칼의 소녀는 읊조렸다. 햇살을 담은 듯한 눈에 긍정도 부정도 아닌 차분한 빛이 담겼다. 생경한 느낌으로 시에라는 레이시안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권리를 일방적인 이익이라 여기고는 한다. 자신은 다른 사람을 모욕하고 괴롭혀도 되지만 다른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다. 그건 있어서는 안 될 일이고 그렇게 한다면 자신은 보복할 것이다. 그것은 '정당한' 일이다…… 같은. 하지만 레이시안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의 말을─조심스럽게─확장한다면 '물리적인 분노 표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당연한 이치이지만,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 앞에서 공언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이치다.

  그러나 시에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긍정하는 모습이 어쩐지 레이시안답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권리가 있다'고 얘기했을 뿐 권리를 행사하는 순간 가만히 있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것도 그답다고 해야 할까. 문득 든 생각에 시에라는 살풋 웃었다. 그러다가, 그런 자신에게 당황했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하지만 동시에 그녀의 의견을 알려주기 위해 시에라는 말했다. 



  "네, 네 말이 맞구나."



  시에라에게는 다행히도, 레이시안은 그녀의 표정변화에 대해 추궁하지는 않았다.
  동시에 유감스럽게도, 그 이유는 시에라를 배려해서는 아니었다. 레이시안으로서는 이유가 손에 잡힐 듯했기 때문에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을 뿐이었다. 그는 미소 지은 채 말했다.



  "당신도 마찬가지인 걸까나…?"



  시에라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니라."

  "후후, 그렇구나. 당신과 의견이 일치하다니 기뻐."



  레이시안은 좀 더 깊게 미소 지었다. 엄밀히 말하면 시에라의 동의는 '권리' 자체의 말에 대한 동의일 뿐, 그 후에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는 별개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레이시안은 짚어낼 수 있었다. 그녀의 성격을 고려했을 때── 
  문득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레이시안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당신은, 둘 중 어느 쪽을 택할까나? …물어볼 것도 아니라고 생각되기는 하지만."

  "어느 쪽?"

  "으응,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이 '권리'를 행사하게 되면, 충돌할 수밖에 없으니까. 당신이 택하는 건 칼일까, 꽃일까."



  은빛 버들가지 같은 눈썹이 섬세하게 모였다. 살짝 머물렀던 미소가 경계의 빛으로 바뀐다. 시에라는 말했다.



  "그 모습 보아하니 내 대답은 알고 있는 것이렷다. 어찌 네 말대로 물을 것도 없는 질문을 하는 것이냐."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시에라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녀는 눈썹을 좀 더 찡그렸지만 레이시안은 딱히 그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이어 말했다.



  "농담이야. 하나, 궁금해져서."

  "……무엇이, 말이지?"

  "향기만으로 꽃을 판별할 수는 없으니까."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그게 무슨 대답이 되느냐며 눈쌀을 찌푸렸을 비유였지만, 시에라는 꽃잎 같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 안에 담긴 의미를 무리 없이 이해한 것이 분명했다. 레이시안은 온화하게 눈을 휘었다.



  "비난하는 것은 절대 아니야. '꽃'은 언제나 귀중하게 생각해야 할 가치니까. 그렇지만…… 때로는 그 행동이 더 많은 '피'를 불러와. 꽃의 부드러움─상냥함이라고 하는 쪽이 나을지도─에 기대어 응석 부리는 사람도 있고, 꽃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어. 어떻게 보면 칼보다 훨씬 위험하다고 해야 할까나…?"

  "……."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당신은 의견을 바꾸지 않겠지. 다른 사람한테 당신의 생각을 강요하지도 않을 테고. 그건 틀림없을 거라고 생각해."



  시에라는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답을 알면서─"

  "묻는 까닭?"



  레이시안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받았다. 시에라는 고개를 들어 똑바로 그를 노려보았다. 레이시안은, 이번에는 살짝 눈을 감으며 그 시선을 짐짓 피했다. 그는 말했다.



  "후후, 걱정할 필요 없어. 아름다운 시에라. 본론은 이제부터."



  레이시안은 다시 눈을 떴다. 시에라는 조금 전과 다르지 않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표정에 대해 그녀를 놀리는 대신 레이시안은 말을 이었다.



  "당신 자신이 알고 있듯, 당신의 말은 지극히 당연해. 하지만 당신을 보는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어떤 식으로 생각할지는 별개의 문제야. 만약 그 사람들이 당신의 태도를 비난한다면 어떻게 대할 생각이야…?"



  질문을 들으며 마음을 가라앉혔는지, 시에라는 다시금 사무적인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생각을 말로 정리하려는 듯 잠깐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에게 '권리'에 대한 입장을 강요하지 않듯, 그것 역시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니라. 무릇 사람의 생각은 다 다른 법인데, 어찌 내 생각만을 내세워 다른 이를 강제하겠느냐."



  답하는 목소리 역시 담담했다. 레이시안은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세상에는 무수한 사람 만큼 무수한 생각이 있노라. 각 개인을 존중한다면, 그 사람이 '생각을 하는 행동' 자체를 강요할 수는 없는 법이니라. 물론 그 생각이 남들에게 해를 끼칠 정도로 옳지 않은 것이라면 용납할 수 없겠지만, 본디 사람이란 생각을 하는 생각일진대, 어찌 무어라 할 수 있겠느냐."



  시에라는 잠시 말을 끊고 레이시안을 보았다. 레이시안이 침묵을 지키자 그녀는 말을 이었다. 여유를 되찾은 듯 살짝, 아주 살짝 미소 지으면서.



  "강요할 생각은 없느니라. 그저 내 생각이 그러하다는 것이니 흘려듣거라. 그래, 네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되었는지 궁금하구나."



  레이시안은 입가에 미소가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와 그녀의 의견 자체는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부분에서는 정반대로 결론을 내리는 차이를 보인다. 그 사실에 레이시안은 대단히 만족했다. 정확히는, 어긋났기에 만족했다. 같으면서도 결정적인 부분에서 다르다니 실로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레이시안은 노골적으로 즐거움을 표현하는 대신 입을 열어 말했다.



  "물론. 충분히 되었어. 하지만 역시…… 남들의 '생각'으로 다른 사람이 피해를 받는다면 몰라도, 그 피해를 받는 것이 당신 자신이라면, 처음부터 칼을 들 생각은 없는 거구나…?"

  "없노라."

  "후후, 이타적이네, 당신은."

  "이타적이라니, 당치도 않구나. 마땅히 그러하기에 그렇게 행동하는 것일 뿐일진대."

  "세간에선 그걸 이타적이라고 부르지만."



  레이시안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노래하듯 덧붙였다.



  "아아, 하지만 그렇네……. 정도를 넘어서면, 기계라고 부를지도 몰라…?"



  그는 더 말을 하지 않았지만, 시에라는 그의 말을 들은 순간 이면에 담긴 의미를 간파한듯했다. 잠시나마 되살아났던 미소가 사라지고, 가라앉는다.



  "너, 언제부터…… 아니, 필요 없는 의문이었구나. 너라면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테니. ……그래, 내게 실망했느냐."

  "으응, 오해하지는 말아줘. 그것에 대해 뭐라고 할 생각은 아니니까. 오히려 마음에 든다는 쪽이 옳을까나…? 노력하는 사람은 싫어하지 않아."

  "……."



  시에라와는 반대로, 레이시안은 입술을 휘며 웃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넋을 놓을 만한 아름다운 미소였다. 역시 눈앞의 소녀는 그가 생각한 대로였다. 누구보다도 순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냉정하고. 그러면서도 그녀 자신의 현재에 안주하지 않으며 '냉정하지 못한' 태도를 보이고. ……정말 재미있는 아가씨. 레이시안은 문득 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레이시안은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시에라가 다시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시에라는 사무적인 표정도, 굳은 표정도 아닌, 그가 그녀에게 추파를 건넸을 때와도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언짢음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어조로 시에라는 말했다.



  "……악취미로다."



  레이시안은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손가락을 구부려 입술 앞에 가져다 대며 그는 말했다.



  "냉철한 판단이네. 사려 깊은 당신다워."



  시에라는 홱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레이시안을 차단하듯, 어깨너머로 흘러내렸던 달빛 머리칼을 앞으로 내려 시야 옆쪽을 덮었다. 그렇게 레이시안을 시야의 사각으로 보내버리고 나서야 시에라는 다시 입을 열었다.



  "듣기 싫다. 아니, 진심이라는 말은 하지 말아라. 지금까지 수도 없이 들었으니."

  "으음…… 역시 기분 나빴을까나. 미안해."

  "그러니까, 듣기 싫다고 했노라. 말을 할 때마다 독설과 찬사─네 말이 진실이라면─를 오가니 도대체가 종잡을 수 없는 자로다. 정말이지 너와 말을 하면 기분이 오르락내리락, 알 수 없게 되는구나. 그리고 진심이 담기지 않은 사과는 받고 싶지 않도다!"

  "오야……?"



  레이시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조금 전과는 다른─ 평소 시에라를 대할 때와 비슷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표정이 보일 리는 없지만, 목소리로 알아차렸는지 시에라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과 그러고 싶지 않은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는 듯 소녀의 은빛 머리카락이 흔들린다.
  그 모습을 재미있게 바라보며 레이시안은 말했다.



  "'진심이 담기지 않은 사과'라니.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과란 어떤 것일까나……?"

  "실언이었다. 신경 쓰지 말거라."

  "으응, 아무리 매력적인 당신의 부탁이라도, 이번만큼은 그렇게 할 수 없어."



  레이시안은 손을 내렸다. 그리고 시에라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뗐다. 기척을 숨기지 않았기에 시에라가 그를 눈치채는 순간은 금방 찾아왔다. 시에라는 화들짝 놀라며─ 그렇지만 여전히 그를 보려 하지 않으며 말했다.



  "어, 어째서 오느냐!"

  "당신과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고 싶어졌어."

  "그건 움직이지 않고서도 할 수 있지 않느냐!"

  "하지만 무릇 대화란, 얼굴을 마주 보면서 하는 게 제일이니까."

  "믓…… 그렇지만, 그렇지만."

  "오야, 당신답지 않네. 어째서 그렇게 긴장하는……."



  레이시안은 말을 멈췄다. 그리고 그로서는 드물게 표정을 지웠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다른 방향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러운 변화였지만, 시에라 역시 거기에 놀라거나 그를 비난하는 대신 같은 곳으로 시선을 향했다. 치아키가 있는 곳. 조금 전 그들을 따라온 사람이 그들을 지나쳐 향한 곳. 패스로 전해져 오는 치아키의 현 상황에, 레이시안의 눈이 금빛 속눈썹 뒤로 반쯤 모습을 숨겼다. 소쇄하게 웃으며 레이시안은 말했다.



  "역시 이렇게 되는 걸까나…."

  "……레이시안."

  "으응, 이건 확실히 패착이었을지도. 애초에……."



  그때, 그들이 보는 방향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소음의 주체가 누구인지 특정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직후 품에서 무게감이 느껴졌음에도 레이시안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대신 그는 손을 들어, 투다다 달려와서 품에 뛰어든 사람─ 치아키의 등에 가만히 얹었다. 그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그에게 뛰어들기 직전 치아키는 매우 겁에 질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레이시안은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미소를 지었다. 다소 걱정 섞인 미소였다.



  "무슨 일인 걸까나. 나의 주인."



  치아키는 고개를 들었다. 레이시안은 새삼 그가 본 것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알았다. 치아키는 어깨를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저는,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으응."



  레이시안은 그녀의 등을 천천히 두드렸다. 토닥, 토닥. 치아키의 부들거림이 다소 잦아들었다. 하지만 치아키는 여전히 그에게서 떨어지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를 무서워하던 치아키가 갑자기 그를 '서번트'도 아닌 '인간'으로서 의지하는 모습에, 무언가 있었음을 짐작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레이시안은 시에라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의 일은 완전히 잊은 듯(그것은 레이시안도 마찬가지였지만), 고아한 금빛 눈에는 으레 보이던 사무적인 감정이 아닌 걱정의 빛이 돌고 있었다. 그 눈이 일순 하얀 눈꺼풀 뒤로 모습을 감추었다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눈을 감았다가 뜬 시에라는 말했다.



  "……가면서 이야기해도 되겠느냐. 이 아이가 많이 놀란 듯하구나."



  레이시안은 다시 한 번 치아키에게로 시선을 내렸다. 그는 수긍했다.



  "아아, 그게 좋을 것 같네."






  /1.


  때에 따라 다르기는 해도 포만감은 대개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킨다. 긴장이 풀리고 그 아래에 묻혀 있던 공복감이 모습을 드러낸 상황이라면 효과는 극대화된다. 비록 레이시안과 시에라에게는 심문까지 하려는 의도가 없었으나, 치아키는 사건에 대해 증언하듯 조금 전의 일에 대해 그녀가 아는 한도까지 자세히 털어놓았다. 잠시 음식을 가지러 자리를 비울 때를 제외하고는.
  꿀꺽, 참치 샐러드를 목 뒤로 넘기고 치아키는 말을 맺었다. 



  "─해서, 그렇게 된 거예요."



  그녀는 레이시안과 시에라를 바라보다가 시에라의 곁에 좀 더 가까이 몸을 붙였다. 안정을 되찾자 다시 그를 멀리하는 모습에 레이시안은 짐짓 곤혹스럽게 웃었다.



  "아가씨들에게 나는 의지가 되지 못하는 것 같네."

  "그건 네가 자초한 일 아니더냐."

  "후응. 처음부터 믿음직스럽게 나타나는 편이 좋았을까나?"

  "……저 방금 소름 돋았어요."

  "오야, 만장일치?"



  레이시안은 살짝 눈을 크게 떴다. 두 소녀가 반론하지 않자 그는 말을 이었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것 같네. 아아, 이 정도로 몰리면 나도 슬퍼."



  레이시안은 침울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물론 두 소녀는 그에게 어떠한 위로의 여론도 보내지 않았다. 시에라의 말대로 '그가 자초한' 일이었을뿐더러, 그가 정말로 슬퍼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둘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그들의 예상대로 레이시안은 오래가지 않아 다시 그들을 보았다.



  "으응, 그러면 내 평판을 회복하도록 노력해볼까나. 아가씨들, 내가 어떻게 하면 당신들의 신뢰를 되찾을 수 있을까…?"



  퍽 단호한 표정에, 그에 못지않은 진지한 목소리였다. 시에라와 치아키는 곤란한 표정으로 서로 응시했다. 두 소녀 모두 말하고 싶은 건 많았지만, 오히려 너무 많았기에 막상 말로 할 열의를 느끼지는 못했다. 웨이터가 접시를 치우러 왔다가 다시 물러갔을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둘은 입을 열었다.



  "그거야,"

  "그거라면,"

  "어, 시에라 먼저 하세요."

  "아니, 네가 먼저 하려무나. 소환자 아이야."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머쓱함에 괜히 서로 바라보는 두 소녀의 모습에 레이시안은 후응, 하고 중얼거리며 양손을 깍지 꼈다.
  또다시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후에도 둘은 쉽게 서두를 꺼내지 못했고, 그래서 레이시안은 입을 열었다. 예의 미소를 입가에 매달면서.



  "뭐어, 말을 꺼낸 사람으로서 할 말은 아닌 것 같기는 하지만…… 지금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게 아니니까. 그 얘기는 다음에 다시."

  "음……."

  "어, 저기……."



  명쾌하기까지 한 결론에 두 소녀는 할 말을 잃었다. 그들이 보기에 그에게는 분명한 문제가 있었다. 아직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을 뿐이지 서두가 나오는 즉시 비판을 봇물처럼 쏟아낼 수 있을 정도로. 둘은 다시 입을 열려 했다. 하지만 레이시안이 말을 이었기에 그것은 실현되지 못했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확실히 주의를 좀 더 기울여야 할 것 같네. 우리를 따라왔던 사람도 있었고."



  꽤 극적인 화제 전환이라 할 수 있겠다.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던 달빛 머리칼의 소녀와 흑단빛 머리칼의 소녀는 표정을 진지하게 고쳤다. 그 중 흑단빛 머리칼의 소녀─치아키는 말했다.



  "전 아무것도……."

  "으응, 알아. 나의 주인. 당신은 잘못하지 않았어. 내가 말한 건 다른 이야기."
 
  "아."



  치아키는 입을 다물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깨달은 것이다. 레이시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잘 흘러간다면 다행이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 대비해두는 건 나쁘지 않을 테니까."



  당신의 의견은 어떨까나? 시에라. 그렇게 덧붙이며 레이시안은 시에라를 보았다. 투명한 금빛 눈이 생각에 잠긴 듯 허공을 헤매인다. 여러 가지를 고민하고, 고려하고. 그러다 잠시 후, 시에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타당하구나. 허나, 어떻게 할 생각인 게냐."

  "그러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나."



  화제를 이끈 당사자였지만, 레이시안의 대답은 모호했다. 그럼에도 빙긋 미소 짓고 있는 그를 치아키는 살짝 꽁한 얼굴로, 시에라는 차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두 소녀의 시선을 가만히 받던 레이시안은 결국 한숨 쉬듯 웃었다.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미리 사과할게. 기대를 꺾는 대답일지도 모르니까. 내 의견은 '적어도 지금 이 순간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야."

  "그저 주시할 따름이라는 것이냐."

  "아아. 그렇게 해야 할 필요도, 그렇게 해서 얻을 이익도 없으니까."



  레이시안은 깍지를 풀어 빈손을 두 소녀에게 보였다. 다분히 의도적인 동작이었다. 그의 행동에, 그와는 반대로 손을 모아 턱을 받치며 치아키는 말했다.



  "당연한 말 같기는 한데, 그렇게 진지하게 말해놓고서 그게 해결책이라니 뭔가 김이 빠져요."

  "후응. 좀 더 참신한 대안이 필요했던 걸까나?"

  "참신함이라면 지나치게 많은 것 같으니."



  시에라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나도 당연하여 오히려 참신함마저 느껴진다는 지적이었지만 레이시안은 반색했다.



  "후후, 그렇다면 기뻐."



  물론 시에라는 반색하지 못했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되었다. 내가 너와 무슨 얘기를 하겠느냐."

  "오야, 그렇다면 당신은 이제 다시는 나와 말을 하지 않겠다는 뜻인 걸까나. 이건 정말 즐겁지 않은 일인데……."



  레이시안은 모양 좋은 눈썹을 내렸다. 정말로 비통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가 정말로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니라고 깨달았겠지만, 상황의 특수성 때문일까, 시에라는 그만 그의 의도에 말려들고 말았다.



  "어, 어, 어째서 그런 뜻이 되느냐!"

  "하지만 당신은 방금 '무슨 얘기를 하겠느냐.'라고 했으니까."

  "그런 뜻이 아니었느니라!"

  "오야, 그렇다면 어떤──"

  "타임, 타임! 두 분 타임!"



  곤경에 빠진 시에라를 구한 것은 치아키의 목소리였다. 치아키는 단순히 목소리를 크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식탁을 탕 치는 것으로 둘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솔직히 말하면 지나친 성공이었다. 명화에서 걸어 나온 듯한 미모의 레이시안과 시에라에, 역시 특출난 외모를 가진 치아키의 조합은 그렇지 않아도 시선을 끌고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 소음이 더해지니 가히 모든 사람이 그들을 바라본다고 해도 될 정도였다.
  치아키는 갑자기 식탁 밑으로 들어가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치아키가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순전히 레이시안의 질문 때문이었다.



  "무슨 일인 걸까나, 나의 주…… 치아키."



  치아키의 필사적인 손사래에, 언제 슬픈 표정을 지었느냐는 듯, 레이시안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호칭을 바꿔 불렀다. 치아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온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 상태에서 '나의 주인'이라는 말이 나왔다가는 일파만파로 온갖 이상한 소문이 퍼질지도 모른다. 물론 그녀의 서번트는 그 상황을 재밌어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절대로.
  그의 입에서 또 예기치 못할 말이 나오는 사태를 막기 위해, 치아키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어, 말다툼……? 이건 아닌데. 뭐라고 하지? 아아아 몰라. 아무튼, 어쨌든, 그런 건 나중에 해주세요. 여긴…… 음……." 치아키는 잠시 말을 끊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온갖 상식이 공격당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간신히 덧붙였다. "밥 먹는 곳이라구요."



  사실 그렇게 소박하게 표현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지만 레이시안도 시에라도 딱히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그곳이 얼마나 호화롭건 식사를 위한 장소라는 사실 자체에는 틀린 바가 없으니까. 그리고 그들은 그곳이 작전 회의를 하기에 적합한 장소도 아니라는 사실 역시 일깨우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이네. 응, 당신 말대로."

  "믓…… 네 말이 옳구나. 알겠다. 소환자 소녀야."



  그들의 기세─그것을 기세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가 수그러들자 치아키는 조금 전의 민망함을 잊고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의 시선이야 어쨌든, 그녀가 레이시안에게 뛰어들었을 때부터 이곳에 오는 내내 고민하던 것은 해결되었다. 치아키 자신이 말했듯 '김이 빠지는' 해결책이기는 했지만 해결책 자체는 틀린 말이 아니었으며, 따라서 그녀는 거기에 반박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즉 그녀를 괴롭히는 문제는 적어도 지금만큼은 아무것도 없었다. 치아키는 의자에 등을 딱 붙이며 말했다.



  "그러니까 마저 밥 먹어요!"



  레이시안과 시에라는 눈을 깜빡였다. 레이시안은 예의 유려한 웃음을 머금었고, 시에라는 살짝 곤혹스러움이 섞인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치아키가 비운 접시만 세어도 상당하다는 사실 역시 지적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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