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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너츠

로하 2014.02.19 12:45 조회 수 : 0






00/



하늘하늘. 하늘하늘. 나뭇잎 어지러이 춤추는 하늘 아래, 남자는 가만히.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얼굴을 알고 있는 소녀. 

그리고 또 한 명 더. 모를 리 없는─── 꿈에서마저 그릴 정도로, 그립고 또 그렸던 소중한 그의 아이. 

그는 그저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입을 열 수도, 움직일 수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겠지.

왜냐하면─────





01/



     시에라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무래도, 꿈 속에서 그 경계를 넘은 듯 싶었다. 금빛 머리칼과 또 금빛 눈동자. 아름답고 또 상냥한 눈의 소년이었다. 그러나 방금 전, 아이와의 대화를 통해 그가 적어도 어떠한 아이이며, 어떠한 연유로 이리 외로운 곳에 있는지 이해한 그녀는 그저 묵묵히 눈을 내리깔았다.



   "고향이 그립지는 않느냐."


   "... 아니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참을 수 있습니다."


   "... 그렇느냐. 강한 아이로다."


   "저는 강하지 않습니다."


   "스스로를 다잡는 것이야말로 끝이며 시작이거늘, 겸허한 말을 하는구나."


   "... .... 아니오, 제가 정말 강했다면..... ... 죄송합니다. 이 얘기는 할 수 없어요."



   소녀는 가만히, 그저 어디까지나 평온한 어조로 잔잔히 말할 뿐이었다. 언뜻 보기에, 소년과 소녀는 그리 차이가 나지 않는 연배로 보였으나, 하여 동년배라 간주하기에 두 명이 몸에 감싼 공기는 너무나도 달랐다. 소녀의 은발이 사락이며, 해질녘 햇살에 찬연히 물들었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은 그런 아름다움.      덧없음. 눈부심. 소녀는 아랑곳않고, 곧게 소년을 마주보았다.



   "그렇느냐. 허나, ... 네가 하려던 , 할 수 있었을 거라던 일이 무엇이던, 그것만이 "강함"은 아닐 것이니라."


   "... 당신은, 상냥하신 분이군요."


   "... ? 그다지. 나는 그리 선한 사람은 되지 못하느니."



     그것은 소녀의 본심이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자신은 그리 선량한 인간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누구에게도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면 말이 될 법한, 그런 사람이었다. 죄인이라 몰아세워져도 할 말이 없을 터인데, 하물며 선인이라니. 그것은, 그저 소년이 호인이기에. 그 본인이 너무나 상냥한 아이로      그러한 눈으로 세상을 보기에 그녀 같은 사람마저 그리 여기는 것이라 소녀는 생각했다. 아니면, 적어도. 그녀가 무엇을 과거에 저질렀는지 안다면 그러한 말은 내지 못했으리라. 허나 소년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눈으로 살짝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는겁니까?"


   "내가 해 온 모든 일이 있기에."



     즉답이었다. 간단하고도, 또 슬픈. 소녀는 그저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이 그녀가 지금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허나 소년의 의아한 듯한 얼굴을 보고, 그녀는 스스로의 말이 부족하다 여기었는지 천천히 입을 열어 덧붙였다.



   "땅을 가꾸고 기구를 담금질하는 이들이야말로 선한 자들이니라."


   "그럼 당신은 모든 사람들보다 낮다는 뜻인가요?"


   "... 이 세상에 사람이 있으니 그 아래에서 그들을 받드는 것이 나의 일이로다. 옳은 말이로구나."


   ".... 그렇군요."



     고개를 갸웃한 채 눈을 깜빡이던 소년은 잠시 생각하는 기색이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소년은 물었다. 사람을 받든다는 것, 그것은 무엇인가, 라고.  그것은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허나, 그것은 소녀에게 있어 숨 쉬는 것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 태어나서 기억을 가진 이후에는 항상 생각해 오던 것이었기에 답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은 되지 못했다. 그녀는 먼저, 양해를 구하듯 가볍게 입을 열었다. 그것에 대한 생각에 있어, 그녀의 것만이 옳다 말하지는 않겠노라고.    그러나, 그녀는 곧, 숨을 깊게 들이쉬고 곧게 말했다.



   "허나 나는, 그들이 웃는 것이 기쁘고. 문득 떠올렸을 때 행복하기를 바라고. 이 땅에 태어나 즐거이 살았다 말할 수 있기를 바라고, 하여 그리 된다면 그야말로 나의 기쁨이고 또 보람일지니. 나로 인해 그들 웃으나 또 그들의 은혜로서 내가 존재하니까."



     소년은, 그러한 말은 처음으로 들은 양 눈을 깜빡였다. 소년은 천천히 중얼거렸다. 이국의, 분이시군요. 그른 말은 아니었다. 어찌 되었든. 하여 소녀는 사알짝, 고개를 위아래로 저어 수긍했고, 그는 물었다. 이 땅의 사람들은 어떻더냐고. 또 그녀의 땅의 사람들은 어떠했냐고. 후자는 차치하고, 전자는 소녀가 대답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가 이 땅에서 본 것은 소년이 유일했기에. 하여 소녀는 솔직하게 그리 답하고는, 천천히... 천천히. 다시 중얼거렸다.



   "...너의 기준을 내 알 수 없으나, 또 그들이 어찌 생각했을지 나로서는 모를 일이건만.... 그렇군. 적어도... 적어도 내게는 과분한 자들이로다."



     모두가 선하고 또 귀한 자들이거늘 이 어찌 과분하지 않을소냐. 소녀는 희미하게 덧붙였다. 지금 그녀가 어떠한 표정으로 말하고 있는지는, 그녀조차 몰랐다. 허나.. 소년의 눈이 무심코 커진 것으로, 아마 그녀 본인을 제외한 모두가 알았겠지. 저 숲의 새들도 하늘의 바람마저도. 그것이 소녀의 말 때문인지 무엇 떄문인지는 모르나, 그 표정이 바뀌었다 눈치 챈 소녀는 무슨 의문이 있노라 물었다. 그렇지만, 소년은 곧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도 당신이 말하는 사람들도, 모두 좋은 사람이군요. 그런 사람들이 있는 나라는 어떤 나라일지... 조금, 가보고 싶어졌습니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본 것은 소녀 쪽이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저러한 표정을. 저러한 웃음을. 어떠한 자가, 어떠한 기분으로 저러한 표정을 짓는지, 너무나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저, 그저 떠올리기만 하여도, 영문조차 모르는 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은 그 모습을, 표정을, 그녀 눈 앞의 소년은 지금 머금고 있었다. 같은 색의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소녀는, 자그마한 손끝에 살짝 힘을 주었다.



   "귀한 아이야, .. 힘겹고 어려움을 털어놓는 것은 약한 것이 아니니라."


   "....?"


   "슬픔도 기쁨도, 입에 담아 나누면 반이 되고 배가 되느니라. ..네가 앞으로 어떠한 삶을 살지 나는 모르나, 네가 행여나 홀로 쌓아갈까 걱정이 되는구나."



     말할 것도 없이, 진심이었다. 그녀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악의를 말하지 않는다. 그러한 것을 가진 적도, 한 적도, 또 할 생각조차 한 적 없었으나. 지금의 그녀는 오히려 빌고 싶은 심정이었다. 제발, 그리 되지 말아 달라고. 어쩐지 다시, 눈물이 넘쳐 흐를 것만 같은 눈가를 애써 잠재우며 그녀는 잠잠히 덧붙였다.    살짝, 아주 조금. 잠긴 것 같은 목소리였다. 



   ".... 상냥한 사람들은, 많은 자가 그러하니까."



     사락, 상냥한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었다.





02/



     짧은 시간이었다. 동시에, 무엇보다 긴 침묵. 그 고요함마저 잦아들 즈음에야, 소년은 희미하게. 아주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소녀는 여전히, 투명한 아침 햇살 같은 눈으로 소년을 가만히, 그저 가만히, 허나 온화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조금 조금, 가늘게 울음 섞인 목소리로 아이는 중얼거렸다. 마치, 무엇인가 익숙하지 않은 호칭을 부르듯 입가를 옴짝거리다가, 천천히. 



   "아버지, .... 께선."



     살짝, 고개를 숙인 탓인지 소년의 눈은 보이지 않았다. 흘러내린 금빛 머리칼이 시야를 가리었다. 허나 고개를 들라는 말도, 조금 더 크게 말하라는 말도, 재촉하는 것 한 마디 없이 소녀는 그저 묵묵히 기다렸다.



   "...절 그분의 곁에 두고 싶어 하셨습니다."



     살짝, 소녀는 지그시 눈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어요. ...아버지,도, ...저도."


   "...그렇구나."


   "제가 강하다 말씀하셨지요."



     소녀는 대답 대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뭇잎 소리와 함께, 달빛 같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뽀오얀 양 뺨을 덮었다. 소년은, 여전히 울 것 같은 목소리의 소년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만약 제가 정말로 강했다면, 그분의 눈물을 닦아드릴수 있었을 거예요."



     아직도, 기억나는 걸요. 아이는 툭, 툭. 끊어질 듯 중얼거렸다. 그것은 어쩌면, 묘하게도 소녀에게 하는 말이 아닌, 스스로 그저 듣는 이 없이 홀로 중얼거리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스스로, 자꾸 자꾸 입으로 다시 중얼거리는, 스스로를 다잡는 것처럼. 혹은 나무라는 것처럼. 그렇게 떨리는 목소리로 그저 중얼거리는 아이에게, 가만히, 줄곧 듣던 소녀는 조용히 물었다.



   "...손을 잡아드리지도 못하고...."


   "... 너는, ... 그 때 무서웠느냐. 홀로 떨어지게 되고 그 이후의 삶이. 아니면, .. 무슨 생각을 했느냐?"


   "저는, 괜찮습니다. 이 곳에 있는다면 그 누구도 절 해치려 하지 않을 테니까. ...세상에서 멀어져, 평온한 일상을 보낼 수 있을 테니까."


   "... 하여, 괜찮다 말하였느냐."


   "...예."



     소녀는, 이제 자신이 어쩐지 울고 싶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지금 눈 앞의 소년과 같은 표정으로, 같은 목소리로 말한 사람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여직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 아이가 이 아이와 같은 - 분명히 같은 맥락의 마음으로 그 말을 입에 담았었다는 것쯤은 '감성'이 필요치 않아도 '이성'으로 알 수 있는 사실들이었다. 소녀는 슬쩍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그녀에게 지금, 소년을 똑바로, 곧게 마주볼 수 있는 자격이. 그러한 다부짐이 있었을까. ───솔직히 말하여, 자신할 수 없었다. 허나, 무엇인가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마치, 한 걸음만 내딛으면, 무엇인가 너르고 또 너른, 보지 못한, 가지 못했던 그러한 시야가 펼쳐질 것만 같은. ..아니, 아니다. 아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다시금 똑바로 시선을 올렸다. 그녀보다 조금은 키가 작은 소년이었다.



   "어째서? 너는 어째서 그런 말을 했느냐? 스스로 다잡았던 것도 있을 것이다... 

... 허나 뭣보다도. 네가 그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네 아비를 더 괴롭게 만들 것 같아서, 가 아니었느냐?"


   "....."



     소년은 또다시, 말을 잃었다. 허나 이번에는, 소녀 또한 고개를 숙이거나 시선을 돌리는 일 없이, 그저 바르게 그러한 소년에게 시선을 향한 채였다. 떨리는 목소리로, 아이는 천천히 물었다.



   "어찌 그렇게, 잘 아십니까...?"


   "....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느니."



     소녀의 답은, 아마 답이 되지 못할 것이다. 하여 소년 역시 고개를 살며시 갸웃했다. 허나 소녀는 더 이상 설명하는 일 없이 그저 씁쓸한 상냥함만을 눈에 담았다. 한숨과 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허나 네가 스스로를 참고 그리 말할 수 있었다면, 그건 결코 강하지 않은 게 아니니라."


   "......"


   "... 나로서는 어쩐지 실감할 수 없으나. ... 부모자식을 떨어뜨린다는 건, ...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라고 보았기에. ...너는 잘 이겨내었다."


   "... ... ... 감사, 합니다..."


   "....."


   "역시 당신은, 상냥한 분이시네요."


   "아마도 네가 그러하기에 그리 보는 게 아닌가 싶느니라."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아니더라도, 당신을 본다면 누구든 그리 느낄 것입니다."


   "과찬이로다."


   "어찌하여 자신을 인정하는 것에 그리 야박하십니까."


   ".... 그것이야, 스스로가 어떠한 자인지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어서가 아니겠느냐."


   "....."



     소녀는 쓰게 웃었다. 이 상냥한 아이는 지금 자신에게 어떻게든 무엇이든 말해 주기 위해 당황스럽게도 고민하는 참이리라. 그 또한 눈에 보이는 듯 또렷하니 어찌하여 선한 아이가 아니겠느냐. 소녀는 눈을 가볍게 내리깔고는, 선선한 미소를 입끝에 살며시 머금곤 말했다.



   "... ..... .... 아이야, 비록 괴롭고, 어렵고, 힘겹고 슬프더라도. ...아직 너는 같은 하늘 아래에 있느니라. 

     그 하늘 아래, 네가 맞는 바람 끝에선 분명 네 소중한 사람들도 너를 생각하며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그것만큼은 잊지 말고 살아다오."



     어쩌면, 그것은 단순히 아이에게 하는 말이 아닌, 소녀가 오히려 붙잡고 부탁하고 싶을 정도의, 그러한 '기원'이었지만, 그녀는 구태여 입에 담지 않았다. 소년에게 그를 생각하여 말하는 것 또한 분명한 진심이었으니까, 또. ...그녀가 아는 대로라면, 사실일 테니까. 그녀가 아이를 생각하는 마음은 마치 숨쉬는 것과도 같은 그러한 마음의 자세에서 나온 것 뿐이었다. 허나 소년은, 그것을 그저 그리 받아들이지는 못하였는지, 깊이, 허리를 숙였다.



   ".... ..... 과분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정말, 정말로 감사합니다."


   "... 되었느니라. 인사를 들을 만한 것이 아니었느니."


   "제게는 감사한 말씀이기에 그리 했을 뿐입니다."


   "...그렇느냐. ...네게 무엇인가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이겠지만..."


   "충분히, 차고도 남았습니다."


   "...아아, 그렇더냐."



     ───다행인 일이로다, 소녀는 소리 없이, 가만히 중얼거렸다.





03/



     잠시간, 소년도, 소녀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머얼리 작은 새 노래하는 소리와 나뭇잎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만이 평온히 공기를 적셨고, 낡은 서책과 놓인 악기를 투명하고 눈부시며 또 어쩐지 아릿한 서쪽 햇빛이 부드러이 감싸안을 뿐이었다. 달빛 머리칼이 하이얀 시내처럼 물결쳤고, 그 흔들리는 양을 문득 내려다 본 소녀는 잠시, 아아주 살짝 손끝에 힘을 주었다. 본래라면, 해서는 안 될 일이지만. ...이 정도의 자유는, 괜찮을 테니까. 그녀가, '하고 싶은' 것이니까. 머릿속 떠오르는 그 아이의... .... .... 누이로서도.



   "..... ..... 아이야."


   "예."


   "....나는 듣지 않겠느니라, 그러니, ... 네 소중한 사람들. 그것이 누구든, ... '괜찮다' '고맙다', 그리고 어떤 말이든. 

전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지금 저 바람을 향해 외쳐 보겠느냐."


   "...에?"



     소년은 나이에 어울리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연한 반응이다. 예상했던 일. 소녀는, 이유 모를 안타까움을 희미하게 눈동자에 녹이며 소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애잔하고, 또 한없이 상냥한 목소리로, 그녀는 조곤조곤 속삭이듯 말했다.



   ".... 이 땅의 끝까지라도 향해 전해져 닿을 터이니."


   "........  ....... 정말, 그럴수 있는 겁니까?"


   "... ...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정도 뿐이다만.."


   ".....?"



     소녀의 말에, 소년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믿기지 않는 듯 보였다. 앳된 용모가 퍽 순진하고 또 맑았다. 그런 소년을 보며, 소녀는 작게, 깊고 깊은 산중 새의 지저귐 같은 웃음소리를 가볍게 흘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 아아. ...거짓은 말하지 않느니라. 허나 강요하는 것 또한 아니니."



     소녀는 곧게 소년을 향했다. 『너는 어떻게 하고 싶으냐』고 묻는 것. 네가 바란다면 나는 하자. 바라지 않는다면 구태여 억지로 해 주지는 않아. 그것은 너의 선택. 소녀는 소년의 입이 열리길 기대하며, 가만히 말했다.



   "... 네게 달린 것이다."



     소녀는 결코 강요하지 않는다. 또 원하지 않는 자에게까지 부러 한가득 선물을 안겨주지는 않는다. 원하면 들어주는, 단지 그것뿐.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소년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작은 손끝에 살짝 힘을 주었고. 울음을 참으려는 듯, 혹은 힘을 내려는 듯 살짝 입술을 물었다 곧 풀었다. 깊게 숨을 들이쉬고, 고개를 들었다. 



   "... 저는."



     또렷한, 벌꿀 같은 금빛 눈이 마알간 빛을 담았다. 여신의 사과 같은 아름다운 금빛.



   "저는, 괜찮습니다. 그러니 아버지,께서도.. 부디 저를 잊고..... 당신의 길을, 걸어가시기를."



     그리고, 소년은 손끝에 주었던 힘을 풀었다. 소녀는 선선히 중얼거렸다.



   "... ... ... 좋은 아이로구나."


   "..... ..... .....  닿았, 겠지요...?"


   "닿았느니라. ─── 맹세컨대. "



     일순 듣기에는, 조금 단호하다 느낄 정도의 깨끗한 울림으로 소녀는 말했다. 흔들림 없는 목소리. 한 점 미혹조차 깃들지 않은 별빛 눈이 오롯 소년을 담아 곧게 향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그 올곧고도 고아한 표정이 부드러이 흐르며, 소녀는 물었다.



   "... ... 조금쯤은, 나아졌느냐?"


   "...예 ... .... 당신에게는, 이 짧은 시간 안에 평생 갚지 못할 신세를 졌군요."


   "어찌하여 그것을 내게 갚겠다 말하는 게냐."


   "하지만 이리 은혜를 받았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네가 지금 그 마음 오롯 그대로, 변치 않은 채 살아나가 준다면 그것으로도 더없는 보은이니라."


   "... ... 정말, 정말 그런 것으로..?"


   "...... 아아. 그 마음 그대로, 변치 않도록. 상냥함 그대로, 잊지 않도록."


   "... 예에, ...힘내겠습니다."


   "아아, 너라면 그리할 수 있노라 믿고 있느니. ...그럼, 나는 슬슬 '깨어날' 시간이로다. 아마도 이제, 헤어질 시간이니라."


   "...아."



     소년은 잠깐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는 누구보다 따스한 목소리로, 아직 어리고 티없는 소리로 가만히 읊었다. 말을 들은 소녀는 더 이상 부정하는 대신, 그저 빙그레 웃었다. 베시시 올라간 표정이 마치 나잇대의 소녀와 같았다. 그런 웃음에 끌리듯, 소년 또한 따라 미소지었다. 그런 소년은 따스히 잠시 내려보던 소녀는, 곧 가볍게 손을 뻗었다. 귓가에서 바람에 사락이는 소년의 금빛 머리칼을 행여나 다칠까 살짝 스치듯 손을 대었다. 그리고는, 가볍게 중얼.



   "... 안녕히, 자애롭고, 은혜로운 분이여."


   ".... 상냥한 아이야."


   "....?"


   "───────"



     아주 자그마한 한 마디였지만, 소년의 귀에는 또렷 담긴 것일까. 소년은 잠시 두어 번, 더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는, 곧 방금 전과 같이 살포시 앳된 미소를 품었다. 그리고, 화려한 예법도 절차도 없지만 진심 가득 담아, 소년은 나붓 허리를 숙였고, 그런 소년을 바라보며 소녀 또한 웃었다. 

   그리고 잠시 후, 소년이 천천히 몸을 올렸을 때, 그의 눈 앞에 남은 것은 사락이는 봄의 녹빛 나뭇잎 소리와 상냥하게 어루만지는 햇살 한 줌 뿐.





04/



     나뭇잎 바스라지는 아침이었다. 맨 땅을 촉촉히 밟으며 새벽 공기를 깊게 들이쉬던 시에라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가만 물었다. 익숙한 분위기, 익숙한 공기. 그녀가 아는 한 이러한 바람을 휘감은 자는 단 한 명 뿐이었으니까. 이 때 그녀 주위에 있을 수 있는 자라면 더욱이. 무슨 일이더냐, 소녀는 물었다. 아직까지 전날의 그 쿵쾅거림이 완연히 가신 것은 아니었으나, 그녀는 그래도 어떻게든 평정을 되찾아 유지할 수 있었다. 새벽의 고요는, 그녀를 맑게 되돌리니까.   

   그러나 그녀의 물음에 되돌아온 답은, 그녀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짤막한, '고마워'.


     그녀는 빙글 몸을 돌렸다. 그녀를 따르듯, 넘실거린 은빛 물결이 한 바퀴 곡선을 그렸다. 그리고, 눈을 크게 뜨고 끔뻑하고는 곧 희미하게 미간을 좁혔다. 언제나 생글생글, 알 수 없을 것만 같은, 진심인지 아닌지도 제대로 판단할 수 없는 그러한 미소만을 담뿍 흘리던 그는 살짝, 살짝, 아주 희미한 웃음만을 삼키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깜짝 놀라게 된 것은 그 휘어진 눈가에 섞인 울음이었지만. 


     시에라는 곧바로, 그가 어째서 그러한 표정을 짓는지 이해했다. 그를 알고 또 그것이 그녀의 기억이었던 이상, 그가 그 중 무얼 보고 저러한 표정을 짓는지 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는 나즈막 중얼거렸다.



   "... ... 바보 같을 정도로 닮은 부자父子로다.  그리 참는 것도 어찌 그리 똑같은 게냐."



     그녀는 가만히, 팔을 뻗어 톡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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