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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끝에서

로하 2014.02.13 07:04 조회 수 : 6




00/





     소녀는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아이가 웃는 순간을. 울 것처럼 웃는 순간을. 아아. 그리 웃지 말아라. 그리 미소짓지 말아라.

괜찮을 리 없건마는, 어찌 그리 웃느냐. 어찌 그리 괜찮다 거짓을 고하느냐. 하얀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사랑하는 아이야, 그리

하지 말거라. 부디 나를 탓하여라. 울고 화내다오.


     우는 듯 미소짓는 고운 소년을 보며, 소녀의 눈자락에서 한 방울, 흐른 물방울이 뺨을 적셔 흘렀다. 그리고, 울 것처럼 웃던 소년이

고개를 들고, 환히 웃으며, 또 서럽게 울며, 입을 여는 순간, 암전.





01/





     ───소녀는 자신이 문득 어느새 잠들어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드문 일이었다. 지금은 시간이 어느 쯤 되었을까. 창 밖을 내다보고, 가볍게 숨을 들이쉬었다. 하늘은 아직 어슴푸레한 채. 해가 깃들기 전의 이르고도 이른 새벽녘이었다. 여름의 해는 빠르니, 너댓 시 쯤일까. 그렇다면 어차피, 일어날 시간이다. 소녀는 하얗고 폭신한 이불 밖으로 발을 쏙 먼저 빼내었다. 하얗고 보드라운 다리가, 새벽 공기에 살짝 바랜 우윳빛으로 물들었다. 



".... ,"



     언제나처럼 창을 활짝 열고, 아침의 공기를 들이쉬려 하였던 소녀는, 자신의 뺨이 무언가에 젖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얗게 말라붙은 물방울 한 줄기. 뺨을 타고 흘러내리던 그것은 어째서 자국을 남긴 것인가. 어째서 흐른 것인가. 소녀로서는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파악할 수 없었다. 눈물이라니, 유아기 후 기억이 깃든 이후로 흘린 적 단 한 번도 없었던 그것이 어찌하여 지금 이 곳에서, 이 순간에. 그것은 오히려 새로운 경험, 호기심이었다. 소녀는 눈물 자욱 남은 뺨을 조심스레 오른손으로 만졌다. 신기하긴 하나, 또 궁금한 일이다. 어찌하여, 무엇 때문에. 


     문득 소녀는 생각했다. 혹 이것, 현세의 영향인가. 특수한 방식 덕택에, 소녀는 일반 영령들과는 아마도 조금 다른 상태일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결과 중 현세의 영향을 보다 쉽게 받는다는 것 또한 없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인간의 희로애락에 소녀 또한 전혀 물들지 않을 수는 없을 테니까, 그것도 벌써 약 백 일 가까이를 이 세상에서 지내온 것이라면 더욱이.



"... 으음."



     소녀는 잠시 고민했다.  '눈물'이라는 이 미증유에 가까운 현상을 두고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할지 쉬이 결정할 수가 없었다. 일단, 밖으로 나가 조용하고, 그나마 맑은 새벽녘 공기를 마신다면 조금 낫지 않을까. 그러한 결론 하에, 소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사륵, 하는 바람소리와 함께 나붓 긴 은발이 등을 쓸었다. 달빛이 녹아내린 양 투명하고 아름다운 소녀는, 양 뺨을 가볍게 한 번 양 손으로 꾸욱, 눌러주고는 일어섰다. 


     삐그덕, 삐그덕. 가벼운 소리를 울리는 복도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녀 본인보다는 그저 바람의 장난질. 연꽃 잎을 즈려밟듯 걷는 소녀가 그런 서투름을 보일 리 없는 것이다. 허나 그녀는, 행여나 그녀의 계약자나 또 다른 소환사가 일어날까 신경이 쓰여 조금 더, 발걸음을 재촉했다. 새벽녘 공기조차 기분 좋게 서늘한 시기였다. 그리고 달그락, 작게 돌을 밟는 소리와 함께 정원으로 발을 내딛은 그녀는 깊게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서늘한 바람이 폐 깊숙한 곳까지 맑게 채워주는, 그러한 감각이었다.



"───아직 들어가지 아니했던 게냐."



     뒤를 돌아보지도, 위를 올려다보지도 않은 채, 그 자세 그대로 소녀는 누군가에게 말했다. 말을 다 뱉은 후에서야, 소녀는 천천히 몸을 돌려 시선을 위로 향했다. 지붕 위에 가볍게 걸터앉은 레이시안이, 예의 그 유려한 미소를 머금은 채 시에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02/





     "오야, 이건.. 이런 이른 시간부터 당신을 보게 될 줄이야. 이건 오늘 하루가 더없이 멋진 날이 될 거란 징조일까나?"



남자의 머리칼은, 그 투명한 햇빛 금사는 새벽녘 바람에 가볍게 하늘하늘 뺨을 스쳤고, 꿀 같은 금빛 눈동자는 오롯하고 또 또렷하게 시에라를 향하고 있었다. 뭇 소녀들이라면 얼굴을 붉히다못해 넋을 놓았을 법한 광경이었으나, 유감스럽게도 시에라는 그러한 범주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파도 거품의 아이처럼 은빛 머리칼이 탐스러이 춤을 추었고, 시에라는 가볍게 고개를 든 채 곧은 눈으로 그에게 시선을 향했다.



"이 새벽부터 그리 실없는 소리를 해야 쓰겠느냐, 레이시안."


"흐응? 몇 번이고 말하지만 진심인 걸. 거리의 행인 백 명에게 물어본대도, 당신과 같은 매력적인 사람을 하루의 가장 처음 본다면 백 명 전부가 다 내 말에 동의할 거야."


"그, 그러니까 그런 수작은 그만 두라 하지 않았더냐!"



시에라는─생전에는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건마는─최근 들어 유독 세상 만사에 자신의 생각이 통하지 않는다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혹은, 자신의 태도나 기분이 자신도 모르는 새 순식간에 바뀌어간다는, 그런 느낌. 그리고 그러한 것은 열이면 열 항상 이 남자와 함께 있을 때였다. 입에 발린 번지르르한 감상을 건네면서도, 그 말에 거짓이 없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그녀를 당황스럽게 했다. 



"수작 취급이라니... 그건 좀 슬플까나. 물론 그렇게 발끈하는 당신도 정말 귀엽지만, 시에라."


"───?!"


"그런데, 오늘은 다른 때보다도 조금 이른 기상이네? 보통 당신은 지금 이 맘때쯤 일어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오늘보다 반 시간 정도 늦게."


".... 그거야 언제든 무엇 때문으로든 바뀔 수 있는...──"


"쉬잇."



남자는 살짝 몸을 아래로 향하고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가늘고 긴, 아름답지만 여성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른 손. 그 차이를 문득 시에라는 문득 자각했다. 당황할 것 없느니. 그녀는 스스로 심호흡을 하고는, 어째서냐는 듯 - 이번에야말로 고개를 홱 들어 그를 올려보았다. 그 표정이, 그 움직임이, 혹은, 그 높이와 자세의 차이가, 어떠한 것이든 마음에 든 것인지, 레이시안은 영문 모르게도 꽤나 만족스러운 듯한 미소를 지으며 나붓 속삭였다.



"다른 두 명이, 일어나버릴지도 몰라..?"


"... ....,"



그것이 정론이며, 또 자신이 불과 수 분 전 복도에 서 있을 때 걱정하던 것이었다는 걸 알고 있는 시에라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비록 정영은 차치하고, 치아키에 있어서는 과연 이 정도 소리에 일어날 것인가, 아니, 들리기나 할 것인가 조금 확신할 수 없었지만, 어찌 되었든 예의는 예의. 지켜야 할 것은 지켜야 할 것. 배려할 것은 또 배려할 것이었다.



"에에이, 되었느니라. 허면 나는,"


"잠깐, 시에라. 그렇다면... 잠시, 여기로 올라와보지 않을래? 그 자리에서 보는 것과, 불과 얼마 안 되는 높이지만, 여기에서 보는 풍경은 확실히 다르니까. 당신이라면 꽤 마음에 들어할 거라고 생각해."



레이시안의 말을 듣고, 시에라는 잠시, 아주 잠시 생각했다. 어차피 일과가 시작되기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다. 뭣보다, 새벽 어스름조차 아직 덜 물든 시간이 아닌가. 더하여, 딱히 무엇인가 더 할 것 또한 지금은 없었다. 오히려, 지금은 - 이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울 정도로 여유 투성이인 나날이었지만. 아무튼, 그렇게 생각한 시에라는 - 지붕 위에서 보이는 풍경도 신경이 전혀 쓰이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었다 -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이윽고 소리 없이, 가볍게, 지붕을 향해 발돋움을 했다. 그리고────



"───?!"



그녀가 가볍게 뛰어오른 동시에 지붕 끝에 비스듬히 걸터 앉아 있던 레이시안이 재빨리 팔을 뻗어 그녀를 잡는다. 그 쪽으로 끌어당겼고, 소녀는 마치 인형처럼 가벼이, 허나 부드럽게 그 손에 잡혀 파고들었다. 엉겁결에 그에게 반쯤 안긴 채 주저앉아버린 시에라는 어쩔 줄 모르는, 그런 상태. 또 이 무슨 예상 외의 짓이란 말이냐. 이러기 위해, 그녀를 올라오라고 한 것이었나. 시에라가 무엇인가 말을 하려는 찰나, 먼저 입을 연 것은 레이시안 쪽이었다.



"역시.. ...울었어?"


".....아,"



빠끔빠끔, 내뱉으려던 말은 갈 곳을 잃은 채 다시 속으로 내려갔고, 시에라는 그저 복숭앗빛 소담스런 입술만을 옴짝거리며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에 그저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투명한 햇빛 같은, 아침의 햇살 같은 금빛 눈이 오롯이, 남자의 꿀과 같이 진하고 또 호박 보석처럼 깊은 눈에 그대로 비쳤다. 서로가 서로를 온전히 그 눈에 담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먼저 움직인 것은 이번에도 레이시안 쪽이었다.


처음, 시에라는 문득 뺨에 닿는 조금은 차가운, 아니, 서늘한 감촉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이 남자의 손끝이란 것을 깨달은 것은 잠시 후의 일이었다. 마치, 무엇보다 귀한 지보를 다루는 것처럼, 그는 천천히, 평소 끼던 검은 장갑을 벗고는 그 하얀 손으로 소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나."


".... ..... 그, 다지. 그러한 것은 아니니라."


"흐응."


"그저, 꿈자리가 조금 사나웠... ..... 신경 쓰였을 뿐이니."



소녀는 무심코, '사나웠다' 고 내뱉을 뻔한 것을 다시 입에 담았다. 어쩐지 그리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아이를 본 것을, 꿈자리 사나운 것이라 깎아내리고 그러한 것으로 치부하고 싶지 않았다. 하여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신경이 쓰인 것이라 둘러대었다. 아직까지, 그 마지막 표정이, 그 아이의. 또 다른 아이의. 그리고 그 사람의, 그들의 표정이 가슴 속을 짓누르듯 남아 지워지지 않고 있음에도. 그 무게가, 조금 전 꾸었던 꿈으로 다시 한가득 응어리져 있었음에도.



"...정말...?"


"...? 믿지 못하는 게냐. 내가 거짓을 말하리라 생각하는 겐가."


"아아니, 당신이 그러리라 생각하지는 않아. 하지만, 그저.. 당신 자신이 아마, 지금 당신이 어떤 표정인지, 어떤 기색인지 눈치채지 못한 것 뿐이라고 생각해. 그걸 알았다면, 그 말은 거짓말이 되었을 테니까."


"... ... ... ... ...역시, 알 수가 없느니라."


"....?"





03/





     "흐응."


"... ... 어찌하여 너는, 그러한 것을 다 알고 있지? 알 수 있는 것이지?"



시에라는 흔들림 없이, 그 맑은 눈을 곧게 향하여 물었다. 여전히 햇빛 머금은 보석 같은 눈동자. 그에 레이시안은 지금의 시에라로서는 결코 알 수 없을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누군가 들었다면 그게 무슨 대답이라 핀잔을 줄 법한 소리였으나, 시에라에게는 납득하고도 남을 이야기였다. 적어도 그 자체로는. 



"────당신이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윽, 시에라는 작게 숨을 멈추었다. 결국 또 그러한 이야기인가. 아무리 찾고 또 찾아도 알 수가 없는 것. 그녀는 고운 손을 살짝 쥐었다. 언제고 항상 빙글빙글 돌고, 같은 자리로 돌아온다. 아니, 그래도 발전한 것인가. 시에라는 가볍게 쓴웃음을 머금었다. 적어도 저러한 답이라도 들을지언정, 이제 그녀는 '자각'하고 '물을' 수 있고 또 누군가 그녀에게 '대답' 정도는 해 주는 것이니까.



"아름다운 시에라."



움찔. 가녀린 어깨가 살짝 뛰었다. 또 실없는 소리를 할 작정이라면 당장 입을 다물라 말했을 시에라조차, 그 소리에 실린 색이 그저 가볍기만 한 농이 아니란 것을 이해하고는 입술 끝까지 나온 말을 되삼키었다. 그녀는 말을 이어보라는 듯, 흘끗 레이시안에게 시선을 던졌다. 새벽녘 여름 바람이 가볍게 스쳐, 달빛과 햇빛 머리칼이 서로 멋대로 섞여 춤을 추었다.



"그 답은, 내가 알려줄 수 없어. 알려준다고 해도, 글쎄. 지금의 당신으로서는 아마 알 수 없을 거야."


"──허면 너는..."


"그렇다면 시에라, 적어도, 말해주지 않겠어..?  그냥, 떠오르는 것 그대로. 떠오르는 감정 그대로. 나는... 당신에게 답을 알려줄 수는 없지만, 들어주는 것이라면 할 수 있으니까."


"...읏."



시에라는 살짝 눈꺼풀을 내린 채 남자를 흘끔 바라보았다. 어찌하여 자신이 그에게 말해야 하는 것인가. 그러할 이유도 의무도 그녀에게는 없었다. 말하고 싶지 않다, 단지 그 말 한 마디면 충분할 것을, 허나, 그렇게 대답하고 싶지 않은 자신이 있었다. 어째서? 그의 말대로다. 이것은 결국 그녀의 문제. 그가 대신 풀어 주어서는 의미도 없거니와 그녀 자신이 이해할 수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것은 풀었다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여 그녀 역시 그러한 것은 바라지 않았다. 허나, 또. 그가 덧붙인 대로, 그저 들어주는 것만이라면 그 또한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언제나처럼 변덕스럽게 어떤 비수 같은 말을 할 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허나 필히 할 테지. 그간 보아온 그의 성품이라면. 그녀의 감각을 도려내는 것 같이, 찌르는 것 같이 날카롭고 쓰리고 또 아픈 말을 하겠지. 허나, .... 기묘하게도. 그 상처가 아물어가며, 또 다른 무언가를 알게 된다는 것을. 그녀는 서서히 깨닫고 있었다. 그것이 그의 의도였는지, 아니면 그저 그녀가 그리 받아들인 것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마치 쓰디쓴 약을 먹은 것처럼, 그리 된다. 그녀는 무의식중에도 서서히 느끼고 있었다.

   아니. 사실, 어쩌면. 어쩌면, 사실은. 그저 자신은... 누군가 들어주길 바라고 있는지 모른다.


아니. 아니다. 그건 아닐 것이다. 스스로에게 그렇게 다짐하며, 시에라는 가볍게 두어 번 머리를 흔들었다. 물결처럼 반짝이는 머리가 아름답게 춤을 추었다. 그것 또한 지고의 예술을 감상하는 듯, 레이시안은 움직임 없이, 가만히 그녀를 볼 뿐이었다. 마치, 네 대답은 어때? 라고 묻는 것처럼.


그렇다면, 시에라는 작게 숨을 삼키었다.





04/





     주르륵. 문득, 시에라는 그제서야 자신이 눈물을 똑, 똑, 흘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처럼 서러운 울음이 아니라, 그녀조차도 어찌하여 흐르는지 모르는. 언제 흐른 것인지 모르는 작은 물방울들. 보드랍고 뽀오얀, 복숭앗빛 양 뺨에 구슬처럼 또르르 굴러 떨어지는 눈물이 당황스러웠다. 어째서, 어째서. 그저, 그가 말했던 대로. 툭, 툭, 생각나는 그대로 말한 것 뿐인데. 그저 기억나는 대로, 두서 없이 중얼거렸을 뿐인데. 



"──단지 나는 그래서, 그게, 그 표정이, 보고 싶지 않아서. .... 계속, 무엇인가 짓누르는 것 같고."



그가 말했던 대로, 레이시안은 그저 가만히 들을 뿐이었다. 점점 더, 어쩐지 눈물 방울이 커져가는 듯, 빨라지는 듯한 기분에 휩싸이며, 시에라는 천천히, 무의식 속에서 읊는 양 중얼거렸다.



"어쩐지, 너무, 너무너무. 아픈데. 답답한데, 어째서인지, 알 수가 없어......"



마지막은, 차라리 속삭이는 듯 흐느끼는 것에 가까운 목소리. 길 잃은 어린 아이처럼, 시에라는 그저 아무것도 모르며, 자각하지 못한 채 그 투명한 새벽별 같은 눈동자에서 눈물 방울을 자아내고 있는 것이었다. 마치 봄의 빗방울이 도르륵 떨어지듯, 본인도 곤란한 듯, 영문을 모르겠는 듯 보이면서도 멈추질 않는 그 모양새에, 시에라는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는 상태였다. 그냥, 말을 멈추어야 했을까. 그래도, 그녀는 솔직하게, 정말로 솔직하게 그녀가 전할 수 있는 것들이라면 전부 다 이야기한 것이었다. 그렇게 아이처럼 어찌할 바 모르는 소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레이시안은, 가만히 양 손으로 시에라의 양 뺨을 만지듯 가볍게 손을 얹었다. 아름다운 손임에도, 확연히 뼈마디가 드러나는 맵시 있고 또 강한 손. 그리곤 한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하지만 가볍게 누르듯 눈물 자욱 남은 눈가를 닦았다.



"... 미안하다. 사과하겠노라. 흉한 꼴을 보였구나."


"..아니.. 이제 기분은 조금 후련해졌어?"


"... 아아, 덕분에."



그것은, 사실이었다. 애당초, 시에라가 본인이 느끼고 자각하는 한도 안에서 거짓을 고하는 일은 없었지만. 이상한 일, 마법 같은 일이었다. 그저 말했을 뿐임에도, 이리 눈물이 한가득 흘렀음에도 이상하게 속이 가벼웠다. 마치 가을 하늘에 붕붕 떠서, 맑고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마신 양. 무언가 뚫린 듯한 그런 기분. 그런 시에라를 잠시 미소 머금은 채 바라보던 레이시안은,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후후, 아름다운 시에라. 지금, 조금 전의 그 감각을 기억해...?"


"....음?"


"그 가슴 아픔, 먹먹함. 어째서인지 모르겠는 답답함. ...과연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해..?"


"......."


"당신은 그 정도에도 이렇게 눈물 흘렸지. 상냥한 당신이라면 당연한 일이야. 하지만, 이대로 가면... 미쳐버릴지도 몰라...?"



시에라는 입을 다물었다. 남자는 그녀를 걱정하고, 또 그녀의 답을 기대하고, 또 ... 시에라였기에, 볼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나, 어쩐지 즐거워 보였다. 으응, 그러한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시에라는 가볍게 머리를 두어 번 저었다. 지금 그가 말하는 것은 정론. 평생을 갖지 못한 채, 알지 못한 채 살아온 것이 한꺼번에, 바닷물이 둑을 무너뜨리고 밀려오듯 쏟아진다면 분명 말로는 다 할 수 없을 정도의 충격, 혹은 영향이 올 것이란 건 시에라 또한 각오한 일이었으며, 예상한 것이었다. 그러한 것을, 남자는 지금 다시 묻고 있는 것이었다. 네가 하고 온 것은 예상, 그리고 너는 이제 직접, 그 파편의 단면이나마 겪어보았지. 그것은 정말, 지극히도 작은 일부분에 불과해. 그것에도 너는 그렇게 울고 슬퍼했어. 그렇다면, 그 끝까지 가면 너는 어떻게 될까. 그럼에도, 

───계속, 그 답을 찾으려 할 거야?



".... 각오는 한 일이니라."



시에라는, 살짝 입술을 한 번 앙다물었다 떼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평생을 모르고 살아온 것이 한 번에 터진다면, 아무런 영향도 충격도 없는 쪽이 이상하겠지. ... 그것이 얼마나 슬프다 한들, 얼마나 고통스럽고 또 괴롭다 한들. 그것 또한 내가 모르고 살아온 것을 이제서야 겨우 알게 되는 것 뿐이니라. 어차피 겪어야 할 일."



그녀는 여전히 다소 느리게, 하지만 또박또박, 낭랑하게 울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더하여, 이것은 어차피 내가 고른 일. 내가 선택한 길. 나는... 이 땅에 내려올 때부터, 그리 정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찾아 헤매던 것이라면,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손에 넣고 알고야 말겠다고. ... 물론, 조금 이해할 수 없다던가 당황스러워 했다던가, 혹은.. 슬퍼했다던가, 그러한 것은 부정하지 않겠노라."



그녀는 시선을 곧게 들었다. 수 분 전까지 눈물 흘리던 햇빛 눈동자가, 여전히 촉촉한 채, 하지만, 이제 분명히 또렷한 빛을 담고 남자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네 말은─그것이 걱정인지, 생색인지 혹은 충고인지 모르나─감사히 듣겠느니라. 허나, 그러한 것이 무서워 포기할 것이었다면 진즉 찾으려 하지 않았어. 그 정도로 그만 둘 것이었다면, 나는 생전의 모두에게. 그리고, 뭣보다도 나 자신에게 떳떳할 수 없으니."



서서히, 대기가 바뀐다. 마치 그녀의 기분에 맞추는 듯, 당당하고 또 무엇보다 맑게. 마치 그녀의 주변만이 그 예전 깨끗한 땅인 것처럼. 청명한 대기인 것처럼. 마알간 빛과 같이, 그녀의 뜻에 따르듯.



"하여, 대답은. '괜찮느니라'. 그리 쉽게 미치고 무너져 내려주지 않을 터이니. 한 번 선택한 것이라면, 그 끝의, 그 답에 닿을 때까지. 그것이 어떠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내가 아마도,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며 또 '하고 싶어하는 것'이니까. 나는───"



포기하지 않아. 



소녀의 목소리가, 무엇보다도 맑고 또렷하게. 새벽 하늘을 울렸다.





05/





     짝. 짝. 짝. 남자는 박수를 쳤다. 그것은 조롱도, 혹은 웃음이 터져 어쩔 줄 모르겠다는 것도 아닌 나름의 찬사. ...로 들렸다, 적어도 시에라에게는. 어쩌면 그것은 마치, 드물게도, 아주 조금이지만, 경의를 표하는 것으로도 들렸다. 허나 그럼 그는 자신이 정말 허황된, 그저 달콤할 뿐인 꿈만을 상상하며 그걸 좇아 내려온 것이라 생각했던 것인가. 그것은 아무래도 조금 마땅찮았는지, 시에라는 뾰로통하게, 아주 조금 한 쪽 볼을 부풀렸다. 



"...오야...?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라도 있었던 걸까...?"


"...그건, ...너는, 내가 정말로 푹신푹신한 꿈만을 꾸며 예까지 온 것이라 생각했던 게냐!"


"후응,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 보지 않았지만... 그 전에, 그것이 그새 또 신경 쓰였던 걸까. 역시 당신은 귀엽네, 시에라."


"────?! 귀, 귀, 귀엽다니.. 어린애 취급이라도 하는 겐가!"


"아니. 그럴 의도는 추호도 없었지만... 그렇게 들렸어?"


"...읏,"



역시, 이 남자와 있으면 기분이 들쭉날쭉, 제멋대로 바뀐다. 알 수 없이 푹신푹신한 것부터, 정말이지 자신도 이유를 모르겠지만 갑자기 잔뜩 약이 올라 날이 선다던가, 그저 기쁠 때도 있고. 어쩐지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제대로 고개를 들 수 없었던 때까지. 잡념을 지우듯 시에라는 양 손을 들어 양 뺨을 살짝 감싸고는 또 아아주 조금 꼬집, 잡아당겼다. 



"믓."


"후후, 그건 또 귀여운 소리. 역시, 재미있는 사람이네, 당신은. 물론 그건 당신의 매력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지만."


"?!"



시에라는 무언가 항의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먼저 고개를 우아하게 돌리며 손을 뻗어, 옆을 가리킨 레이시안의 동작에 그만 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솔직히 말해, 아까처럼 어린 애 취급하지 말라던가, 실없는 소리를 하지 말라던가, 수작 부리지 말라던가, 셋 중 하나의 말이었을 터이지만서도. 아무튼, 그 손끝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에라 또한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어때...? 이곳에서 보는 일출은, 또 방 안 창문 너머로 보는 것과는 또 다르지 않아...?"


"......"


"...응? ....오야, 이건 또...."



시에라의 성품에, 사람이 하는 말에 대답을 하지 않을 리가 없건만, 답이 돌아오지 않는 모습에 그녀를 돌아본 레이시안은 문득 하려던 말을 멈추고, 살짝 입가에 미소를 맺었다. 달빛과 같았던 은사가, 찬란히 비추는 여름 아침의 태양에 물들어, 햇빛과 같은 옅지만 또 화려하고, 투명하나 또 따스한 금사로 일순 보였다. 금빛 눈동자에는 찬연히 빛이 퍼지는, 감색과 붉은 색이 섞인 경계의 하늘. 물들어가는 쪽빛, 맑개 갠 하늘색. 마치, 그 빛은 그녀를 위해 내리쬐는 양 아름답고, 일순 경외심마저 갖게 할 정도의 모습. 탑에 갇혀 평생을 보내 자란 소녀가, 처음으로 내딛은 바깥 세상을 보는 것처럼, 살짝 벌어진 장밋빛 입술은 가벼운 감동을 삼킨 듯 희미하게 옴짝거렸고, 아침 해의 싱그러움에 물든 듯 양 볼은 탐스런 복숭앗빛. 요정이 제멋대로 물들이고 저 자신도 설레고 부끄러워 숨었을 것 같은 생김이 하늘을, 해를, 세상을 향하여 그를 담고 있었다. 



"...그런가. ...역시, 변하지 않았구나. ....중요한 것은, 변하지 않았어."



소녀는 어쩐지, 감동에 젖은 듯, 혹은 진심으로 감격스러운 듯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허나 기쁜 듯 중얼거렸다. 주어가 없는 말이었으나, 레이시안은 그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 그는 그녀가 누구인지 몰랐으나, 아마, 영령이라 불리는 자들이라면, 무슨 의미인지 대부분은 알아들었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 말에 담긴 감정도, 그가 본 시에라라는 소녀라면 어떠한 감정으로 그것을 봤을지, 떠올리기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레이시안의 시선을 의식한 듯, 시에라는 곧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아침 이슬이 맺힐 듯 사락이는 머리칼과, 새초롬하게 다문 입술, 그럼에도 숨길 수 없이 따스한 눈동자. 그리고, 마치 서로 부러 눈을 마주하듯 그녀 또한 곁눈질을 하다가, 곧 빤히 레이시안을 바라보았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그녀를 문득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금빛 춤추는 머리카락은 바람의 노래 같은 소리를 내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시에라는 그 금빛이 좋았다. 마치 향기로운 봄날의 바람과 같은 그 빛깔이, 여름의 햇살마저 몸을 움츠릴 것 같은 그 눈부심이, 가을 밤의 바람소리 같은 그 사락이는 소리가. 


문득, 그제사 레이시안이 - 드물게도 그는 무엇인가 모를 것을 생각하느라 그간 시에라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던 듯 싶었다 - 그녀의 시선을 보았는지, 똑바로 눈을 마주했다. 시에라 자신의 것보다 좀 더 진하고, 깊은, 꿀과 같은 금빛. 그대로 보고 있으면 녹아 들어갈 것만 같은 그러한 금빛이다. 그 눈에는 자신의 금빛 - 끝없이 깊지만 또 너무나 맑아 그대로 비치는 - 눈동자가 그대로 오롯이 담기는 게 보인다. 이 세상 가장 아름다운 토파즈라 해도, 호박 보석이라 하여도 그보다 빛나고 달콤하지는 않으리로다. 금발의 여신조차 그에 비치면 볼을 붉히겠지. 시에라가 그리 생각하는 사이, 가라앉은 듯 하면서도 부드럽게 흐르는 듯한 금빛 눈동자가 곧 형태 좋은 눈썹을 휘며, 가볍게 초승달을 그렸다.


아.


너무 보아버렸다. 시에라는 방금의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곧, 형태 좋고 아름다운, 허나 여자의 그것과는 또 다른 느낌의 날렵한 입매가 또 눈을 따르듯 함께 호를 그렸다. 마치 노래를 하는 것처럼, 그는 어디까지나 부드럽고 또 우아하게 입을 열었다. 하얗고, 그러면서도 시에라의 완연한 소녀 같은 빛보다는 조금 가라앉은 색의 뺨이다. 아니, 이게 아니고, 시에라는 스스로를 다잡았다. 



"흐응, 아름다운 시에라. 드문 일이네.. 당신이 나를 그렇게 보아주다니, 조금 기쁠까나."


"?! 그, 그런 것이 아니니라! 허나.. 너야말로, 드물게도 이리 보는 것을 이제사 눈치챈 것인 게냐. 무슨 깊은 생각이라도 긴히 떠오른 것인 겐가?"


"으응...? 아니, 그런 깊은 생각..이라고 할 건 아니지만..."


"... 응...? 그러한 것이 아니라면 어떠한 것이기에.. 어째서..."


"그저... 조금, 궁금해졌달까."


"궁금...?"


"응.. ...매력적인 시에라, 당신은 괘념치 않은 걸까...? 나는 지금까지도, 방금 전에도, 당신에게 그렇게 독주를 마시게 했는데."


"...독주, 독주..인가."



시에라는 잠시,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는 숨을 삼켰다. 독주라, 그리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남자의 말은 그가 비유한대로, 그 자체만이라면 '독주' 에 가까웠으나, 소녀는 그것을 그렇게 받아들인 적 한 번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불과 수십 분 전에 생각한 그대로, 그의 말은 그녀에게 있어 약이었다. 또한, 그것이 약 아닌 그저 순수한 독설이라 하여도, 그녀가 그러한 것을 싫어할 리 만무했다. 피학적인 것을 즐기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이 무엇인지 그녀는 아마 이해랄까, 실감하지 못하겠지만. 어찌 되었든, 그녀는 오히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찌 그러한 것을 묻냐는 듯 의아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리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만."


".... 정말...?"


"아아. 네 말이 그른 말이라 하더라도, 또 악의 있는 말이었을지라도, 혹은 그저 무의미한 독설일 뿐일지라도, 나는 그러한 것을 싫어하지 않노라. 하물며 네 말은 그른 것이 없으며, 나 또한 인정하는 것들. 그렇다면 네 말과 내 생각이 다를지라도 그것을 내가 함부로 그르다 싫다 말할 수는 없는 일일 터다."


"...흐응..."


"...더하여, 네 말을 곱씹으면 나 또한 무엇인가를 알게 되는 기분이니, 그것을 어찌 밉다 생각할 수 있다 생각하느냐. 너는 의도치 않은 것들이겠지만... 네 말은 내게, 길을 열어주는 듯한 기분이 드는구나."



그리고 또... 시에라는 잠시, 말을 멈추고 머뭇거렸다. 이 말을 해도 좋은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아아니. 허나 상대가 물었다면, 그녀는 그에 합당한, 묻는 것에 대한 답변을 해 주어야 할 것이었다. 그것은 시에라라는 소녀가 계속 지니고 온 삶의 태도. 타인의 말이라면, 그를 존중한다. 답하는 것 또한 같은 맥락이었다. 그리 생각한 시에라는, 천천히, 자그맣게 입을 열었다.



"...무엇보다도, .... 네가 그러한 말을 해 준다는 것이, 너와 같은 상대로 대해 주는 것 같아. ..나로서는 기쁘구나."



그것은, 사심 없는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 소녀 본인 또한 느끼고, 더하여 '인식' 하고 있는 진심. 소녀는 베시시, 아주 살짝 미소지었다. 투명한 달빛 같던 소녀가, 순식간에 봄꽃 같은 폭신한 바람에 감싸였다. 폭신폭신, 상냥하게. 새하얗고 새하얘서 완전히 다른 곳 같은 그런 하얀 세상에서 갓 나온 소녀는, 순식간에 파스텔 같은 연약하면서도 보드라운 색을 띄었다.




06/





     레이시안은, 솔직하게 묘사하자면, 언뜻 보기에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으나, 희미하게, 아아주 희미하게 놀란 듯 소녀의 대답을 들었다. 그리고는 곧, 가볍게 미소. 그는 다시금, 살짝 몸을 비스듬히 기울인 채 나른하게 앉았다. 고양이 같다, 시에라는 생각했다. 



"... 역시, 이상하게 들렸느냐?"


"아아니. 그다지. ...오히려, 응. 역시, 당신은 상냥한 사람이네, 시에라."


"...그 영문을 모르겠는 수작이만이라도 조금 그만 두어준다면 좋겠느니라, 너는."


"후후, 수작이라니 섭섭해. 진심인 걸...? 당신도 알잖아..?"


".... 흥."



저 소녀가 거짓과 진실조차 구분하지 못할 리가 없다. 굳이 문제라면, 거짓을 고해도, 그것이 설령 악의 있는, 의도한 것일지라도 타인이 아닌 그녀 자신에게만 피해가 한정된다면 그냥 넘어가 줄 것 만 같은 성품이라 그렇지. 호인이란 말을 몇 개는 가져다 붙여도 부족할 것이다. 확실히, 이러한 성격이라면 치아키가 그녀에게 천사 운운한 것이 꽤나 잘 어울리지 않겠는가, 라 생각하며 레이시안은 재미있다는 듯 눈매를 곱개 포개었다. 흥, 하는 소리와 함께 소녀는 고개를 돌렸지만, 발그레 달아오른 귓불만큼은 숨길 수 없는 것이었다. 부끄럼쟁이 아가씨. 


허나, 확실히 그것은 예상 외였다. 소녀의 대답. 스스로의 말을 쓴 약으로, 자신에게 좋은 약으로까지 여기고 있었을 줄은 아무리 레이시안이라 하여도 약간은 뜻밖의 일이었다. 물론, 생각하는 '범주' 안에는 들어갔지만. 아무튼, 레이시안은 결국 짖궃게도 입을 열었다. 그 빙글빙글 바뀌는 표정을 보는 편이, 응, 역시 어떤 표정일지 그리는 것도 즐겁지마는, 그것보다 더 기대가 되었으니까.



"오야, 시에라. 귓불, 새빨개졌어...?"


"───?! 그그그그럴리가, "



아아, 역시 재미있어. 그는 입가에 떠오르기 시작한 웃음을 구태여 참으려 하지 않았다. 그것을 본 시에라가 더 바락바락 얼굴을 붉힌 채 따졌음은 물론이지만, 안타깝게도 그러한 그녀의 말은 그에게 어떠한 위협도 위기감도 죄책감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반대의 효과를 불렀다면 불렀지. 



"정말이지, 너라는 자는───"


"─────────────누구일까?"



그리고, 변덕스럽게도, 레이시안은 곧바로 말을 받았다. 나는, 누구일까...? 그 말이야말로 예상하지 못했던 듯, 시에라는 눈을 크게 떴다. 순간 찾아온 고요가 미풍에 춤을 추었다. 아주 잠시, 잠시일 뿐인 한 순간이었지만, 마치... 흔한 비유라면, 시간이 멈춘 것처럼. 깜짝 놀라 크게 떠 진 햇살 담긴 눈과, 알아맞춰 보라는 듯, 곱게 휘어진 오만하면서도 또 우아하고, 끝이 보이지 않도록 깊으면서도 상냥하고 짖궃은, 살짝 휘어진 채의 눈이 시선을 맞대었다.



"...그것을, 내가 어찌...."


"글쎄. 당신은 아마 알고 있겠지. 알며 또 모를 거야. 아니, 이 전쟁에 불려 온 모두가 아마 그럴 테지만."


"그럼 어찌하여...."


"(시)"



시에라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바람조차 숨을 죽인 양, 아침에 지저귀는 산새들조차 나뭇잎 뒤에 숨어 빠끔 귀를 기울이는 것처럼, 이 찬연한 아침에, 평화로운 햇살 속에, 오직 남자의 목소리만이 청명한 빛으로 물들었다. 높고도 깨끗한, 가을 하늘 같은 그런 목소리로, 마치 노래하는 것처럼 그는 읊었다. 시에라는, 마치 무언가에 못박힌 듯, 가만히 멈춘 채 그를 바라보았다. 서서히 서서히, 소리가 잦아들고, 다시금 나뭇잎 바람이 귓가에 속삭이기 시작하고서야, 그는 다시금 감았던 눈을 뜨고 소녀를 바라보았다. 



".... 이 정도면, 되었을까나?"



놀란 것은, 소녀 쪽이었다. 아니, 정정하면, '놀랐던 것'. 시에라는 처음에는, 빛을 담은 그 아름다운 눈을 크게 뜬 채 남자를 바라보았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가만히 경청했었다. 시가 끝나자, 그녀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눈꼬리에 여유가 담긴다. 아니, 여유가 아니다. 그 투명한 눈동자에 지금 비치는 것은 분명한 흥미. 즐거움. 긍정의 감정들. 픕, 하고 소녀는 가볍게 미소를 흘렸다. 정말이지 그는, 그 옆에 있으면, 시에라는 그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싫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는 이것 때문이었나. 이러한 즐거움 때문이었나. 상대가 먼저 읊어 준다면, 답가 정도는 해야 예의일 것이었다.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오랜만에, 그 오랜 시간만에, 소녀의 입매가 재치로 빛났다. 두근, 두근. 설렘으로 찬 고동소리가 들렸다. 소녀의 두 황금빛 눈동자가 기대에 찼다.



"... 그 이전에, 답례의 의미로. 답시를 나도 하나."


"답시, 라면....?"


"(시)"



이번에는, 레이시안 쪽이 놀랄 차례였다. 알고 있다. 시에라는 생각했다.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정 반대에 선 축에 속했다. 검게 보일 정도로 지독히도 뛰어난 자였다. 하여 그녀는, 참지 않고,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노래했다. 그것은 기대였다. 너라면, 이런 너라면 알아 주겠지. 알아내어 주겠지. 들릴 것이다. 금빛 눈이, 햇빛과 같은 금빛 눈이 이제는 마치 별이 박힌 양 반짝였다. 정말로 기쁜 것처럼, 세상의 아름다움을 한 데 그러모은 듯한 청아한 소리로, 시에라는 노래했다. 나는, 실망하겠느냐..? 아니면... 기대를 숨기지 않은 눈으로, 마지막 구절을 읊은 시에라는 서서히 시선을 돌렸다. 아아. 그리고, 소녀가 미소지었다. 그 눈의 반짝임은 사그라들지 않고.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레이시안에게 시선을 맞추고, 그녀는 미소지었다.



"──너, 사람을 제법 잘 이용하더구나."



그것은, 평소의 소녀가 보이던 세상 모든 것에서 벗어난 듯, 동떨어진 듯한 평화롭고 또 온화한, 하지만 인간 답지 않은 그런 미소도 아니고, 레이시안에게 종종 보이던 - 훨씬 더 생동감 넘치는 표정도 아니고, 방금 전 보였던 - 아마도 소녀의 '본성'일 법한 상냥하고 사랑스러운, 그런 미소도 아닌, 짖궃은 요정 같은, 그야말로 열 여섯 소녀의 표정. 장난기 가득 어린 그런 어림이 남는, 허나 악의 없이 뽀얗고 맑은, 그런 미소. 그와 동시에, 조금 전 보였던 것 같은 그 사랑스러운, 정말로 즐거운 듯한 그 따스하고 상냥한 미소가 겹쳤다. 그 짧은 순간, 순백의 세상에서 살던 소녀는, 파스텔 빛 꽃잎 같은 색을 입었다, 이제는 오색 찬연한 빛에 물들었다. 생기 있는 색, 그야말로 '사람'의 색. 



"....응...?"



시에라는 문득,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눈을 깜빡이며 레이시안을 향했다. 그는 드물게도, 고개를 살짝 뒤로 기울인 채 한 쪽 손으로 눈을 덮은 상태였다. 어째서인가, 의문을 가진 시에라가 레이시안..? 이라고 조용히 부르는 순간에서야, 그는 홱, 고개를 다시 앞으로 했다. 투명한 금빛 머리카락이 바람을 타고 흘러내려 이마를 덮다 못해 살짝, 귀 위에서 나붓 흔들렸다. 그리고, 그제서야 그는 눈을 가렸던 손을 다시 떼어 내렸다. 아, 그제서야 시에라는 그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어째선지 조금, 곤란해 보이는 그런 미소. 허나 부정적인 의미는 결코 아닌, 그런 표정.



"...레이시안, 너, 어째서..."


"아아, ..확실히, 시에라. ...이건 조금, 당했을지도."


"....당하다니....?"


"아니. ..이쪽의 이야기."



시에라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레이시안은 여전히 뜻모를 미소를 가볍게 삼키었다. 



"뭐어, 당신의 말은 부정하지 않겠어, 아름다운 시에라. 아니면, 사과라도 해야 할까나...?"


"흥. 되었느니라. 사과할 것도 뭣도 없느니. 애당초 신경 쓰지 않노라."


"역시 마음이 넓구나, 당신은..."


"?! 아니, 아무래도 좋으니 그 숨쉬듯이 하는 실없는 소리를 그만..!"



시에라는 입을 다물었다. 언제까지고 실없는 소리라 할 수는 없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남자의 말대로 그것은 그의 '진심' 이었으니까. 정말로 정말로,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 아니, 그 전에..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기에 더욱 매 순간마다 반응했던 것이기에, 더 이상 그걸 이리도 과격하게 부정할 수만은 없었다. 물론 그의 배부른 고양이 같은 표정으로 보아 과연 상처는 커녕 신경이나 쓰고 있을까 의심스러웠지만, 적어도 시에라 본인의 마음이 편치 않았으니까.


그런 시에라의 반응조차 예상한 것인지, 마음에 든 것인지. 레이시안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는 나붓 일어섰다. 



"이제 슬슬 시간일까나."


"...응? ...아아...."



어느새, 해는 완연히 떠올라 새벽녘 하늘은 연하늘색 아침 하늘로 바뀌어 있었다. 자신이 그것조차 눈치 채지 못하고, 그제사 알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시에라는, 조금 당황하면서도 그에게 끌리듯 따라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행여나 일어날 때, 지붕의 경사에 몸이 흔들릴까 염려한 것일까, 아니면 그저 그녀의 표현대로 '숨쉬듯이' 한 것일까 알 수는 없었으나, 레이시안은 그녀의 한 쪽 손을 잡고 그녀를 도왔다. 이제 내려가서, 정영과 치아키에게 아침 인사를 해야 할 것이다. 그녀 본인은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상관 없었으나, 그 둘의 식사 자리에는 함께 해야겠지. 시에라가 그리 생각하며 발을 허공에 내딛으려는 순간, 그녀의 몸이 붕 떴다. 허리를 가볍게 감싼 것은 남자의 팔, 그리고───



"───?!"


"후응. 역시, 시에라. 당신은 조금 더 먹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영령은 더 이상 외모의 변화가 없으니 무리..일까나. 정말이지, 바람 불면 날아갈 듯 가벼우니까."


"?! 너어, 무, 무슨 짓을.....!"


"그런 의미에서, 오늘 아침 식사는 당신을 위해 내가 만들어 볼까...?"


"사양하겠노라!"


"오야, 그렇게 매몰차게 즉답으로 거절당할 줄은..."



화려하게 춤을 추는 여름 바람 새, 목소리가 녹아 들었다. 살랑 살랑 흔들리는 여름날의 나뭇잎 틈새로, 지붕 위에 가볍게 드리운 나뭇잎 사이로 들어온 햇빛이, 아름답고 따스하게 뒷모습을 비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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