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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 2014.02.11 22:55 조회 수 : 7



  /0.

  I am one with the wind and sky

  You'll never see me cry

  Here I stand and here I'll stay


 



  /1.


  햇빛이 투명한 손가락을 펼치는 맑은 날이었다. 막 찾아든 봄의 태양은 추위를 녹이고 땅을 따스하게 데웠다. 아이들은 밖으로 나와 친구들과 뛰놀았으며 어른들 역시 길을 걷거나 나들이를 나갔다. 도로를 가득 채운 인파의 모습은 마치 축제를 즐기고 있는 듯하다. 막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 꽃과 더불어, 이미 봄이 완연하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만큼 활기찬 분위기가 도시를 가득 채웠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 분위기를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남과 어울리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으며, 시끌벅적한 것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밖에 나가기를 꺼려하는 사람 역시 '즐기지 않는' 사람에 포함된다.

  그러나 전혀 다른 이유로…… 예를 들면 '현재의 모습'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기에 축제 분위기 역시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훨씬 아름다웠던 먼 과거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특히 그러하다. 대기도, 물도, 흙도 모두 제 모습을 잃은지 오래였다. 모든 것이 깨끗했던 시대의 세상을 바라보던 사람의 눈에는 추하다고 느껴져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분명 세상은 더러워졌으나, 아무 이유 없이 그렇게 된 건 아니다. 또한 세상이 더러워지기만 한 것도 아니다. 세상이 본래의 모습을 잃어가는 모습 뒤편에는 인류의 발전이 있었다. 자신들을 제외한 모든 것을 파괴할지언정, 그래서 그 행동이 나중에 해가 되어 돌아올지언정 사람들은 나아가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지나친 환경의 파괴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그 뿐, 사람들은 방향을 돌려 결국 또다른 발전의 방법을 모색한다. 높이, 더 높이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결코 꺾지 않고.

  이 얼마나 휘황찬란한 광경인지. 남자는 그 모두가 기꺼웠다. 사실 그에게는 모든 게 그저 '있는' 자체만으로도 희락의 대상이기는 했지만.

  하여 비록 과거의 인물이라 하여도, 그는 결코 '현재의 모습'을 싫어하지 않았다. 신토의 무수한 고층 건물들 중 하나. 남자는 그 가장 높은 곳에 서서 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늘하면서도 요염한 금빛눈이 즐거이 풍경을 비춘다.



  "모두 즐기고 있는 것 같네…."



  보통 사람들의 시력이라면 모여든 색뭉치로밖에 보이지 않을 거리였으나 서번트인 그는 무리 없이 거리의 사람들을 구분할 수 있었다. 편하게, 혹은 화려하게, 각양 각색의 차림새로 길거리를 걷는 사람들. 웃음을 터뜨리는 사람도, 누군가와 싸움이 붙어 화를 내고 있는 사람도, 심지어는 울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본인들은 의식하지 못하며 내용도 결코 통일할 수 없지만, 그들은 모두가 주인공이 되어 이야기를 만들어나간다. 손색 없는 군상극이었다. 남자는 미소 지으며 손바닥을 한번 맞부딪혔다. 짝, 하고 손에서 소리가 짧게 퍼져나왔다.



  "으응, 확실히 재미있을 거야."



  그러나 말과 달리 남자는 옥상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내려가서 사람들 사이에  섞여드는 대신 그들을 관찰하는 일을 계속했다. 엄밀히 말하면, 그가 이곳에 온 주요한 이유는 날씨를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었으니까.

  다행히 남자는 목적했던 것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그는 한숨 쉬며 중얼거렸다.



  "……아아, 역시. 미녀는 아니네."



  그 자리에 누군가가 있었다면 조금 전 남자가 지었던 즐거운 표정과의 낙차에 당혹했을 것이다. 그리 낙담한 목소리로 말했음에도 금방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는 모습에는 더욱. 물론 그곳에는 남자 밖에 없었으며, 그래서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어떤 해명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누군가가 있었다면 당혹을 넘어 기겁할 것이 분명할 행동을 했다.

  그는 망설임 없이 건물 가장자리까지 걸어가, 가볍게 땅을 박찼다.

   바람이 그를 스쳤다. 보다 하늘 가까이에서 부는 바람은 땅 위에서 불 때는 다른 소리를 냈다. 점점 가까워지는 땅. 결코 낮다 말할 수 없는 높이에서 이루어진 낙하는 빨랐다. 남자는 눈을 깜빡였다. 눈꺼풀을 닫았다 들어올리는 그 짧은 순간에도 바닥은 무서운 속도로 그에게 다가왔다. 이대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돌을 깎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몸에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지상이 몹시 가까워졌다. 남자는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의 구두가 땅을 딛었다. 그는 가볍게 무릎을 굽혀 땅을 짚었다. 그리고 우아하게 일어서서 걸음을 옮겼다.






  /2.

  남자가 내려선 골목은 조금 전 그가 보던 장소와는 전혀 달랐다. 분명 하늘에는 해가 떠 있었지만 복잡하게 얽힌 건물들에 막혀 빛은 골목에 내리쬐지 못했다. 눈이 시릴 정도로 밝은 하늘과 어두컴컴한 땅이 공존하는 역설적인 곳이다. 때문에 그 장소는 낮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위험해 보였다. 오히려 낮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밝음과 어두움이 대조되어, 보통 정도의 상식만 갖고 있다면 누구든 발길을 돌릴 장면을 연출했으므로.

  하지만 그 자신의 현재의 존재의의부터가 '보통 정도의 상식'을 벗어나는 사람(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면)이었기에 남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그 안으로 들어갔다.

  어둑한 낮이었다. 직접적으로 비쳐드는 빛은 커녕 하늘에서 반사되는 빛도 희미했다. 멀리서 들려오던 사람들의 목소리도 점점 멀어져 이제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남자는,



  "이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게 미녀라면 좋을 텐데."



  라고 아쉬운 듯 말하고는 발을 내딛을 뿐이었다. 곧은 걸음이었다.
  그렇게 걷던 남자는 머지 않아 멈춰 섰다. 막힌 길이어서는 아니었다. 왼쪽으로 돌아가게끔 된 길목이 있었으니까. 남자의 기억대로라면 그 길 너머에 그가 목적하던 것이 있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별다른 일이 없었으니 명제는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는 왼쪽으로 향했다.



  "오야?"



  모퉁이를 돈 남자는, 이번에는 다른 이유로 멈춰 섰다. 그가 목적하던 것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만 있는 게 아니었다.

  또래의 아이들과 비교해도 작을 체구. 등 너머로 길게 늘어진 은빛 머리칼이 가녀린 어깨를 감싼다. 누구라도 귀히 여길, 한번 보면 잊을 수 없을 얼굴 속, 이 곳에는 없는 햇빛 같은 금빛 눈이 남자의 눈길을 끌었다. 요정 같은 소녀였다. 빛 없는 이 어둠 속에서 고아하게 빛나는.



  "후응…."



  그 모습에 경도되는 대신, 그리고 위험하다 끌어당기는 대신, 남자는 살짝 손가락을 구부려 입술 앞에 갖다 댔다. 역시 '보통 정도의 상식'을 벗어난 사람은 그 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것은 분명히 오산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오산에 낙담하지 않았다. 이건, 이거대로. 그는 즐거움 속에서 소녀를 지켜보았다.

  소녀는 아직 그가 온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 했다. 알아차릴 수 없었을 것이다. 소녀의 앞에는 대여섯의 시체가 있었다. 정확히는 죽었으나, 동시에 살아 있는 꼭두각시라고 해야 옳다. 소녀가 어떠한 움직임이라도 취한다면 시체들은 그 즉시 손톱을 드러낼 것이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물론 소녀는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올곧은 눈으로 시체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남자는 살짝 시선을 틀어 시체들을 응시했다. 솔직히 남자로서는 어느 쪽이 먼저 스러지건 이익이었다. 시체들이 쓰러진다면 번거로운 일이 줄어드는 셈이었고, 소녀 쪽이 쓰러진다면 그 쪽도 '여러모로'……. 남자의 눈이 금빛 속눈썹 뒤로 제 모습을 반쯤 감추었다. 당연히 후자는 전자에 비해 확률이 압도적으로 낮았기에 그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신빙성이 없었지만.

  어떻게 할까나? 남자는 알싸한 즐거움 속에서 생각했다. 사실 양측 모두 그의 도움은 필요 없을 것이다. 승부는 이미 확실했다. 글자 그대로 일촉즉발, 허무하리만치 끝이──




  "……."



  ──나지는 않았다. 소녀가 문득 들어 올렸던 그녀의 손을 다시 쥐는 모습에 남자는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손을 내리지도 올리지도 않은 채 눈앞의 시체들을 바라보는 소녀의 행동에 좀 더 깊게 미소지었다. 아주 잠깐 동안, 단 한 번의 행동이었을 뿐인데. 어찌 이렇게 알기 쉬운지.

  남자는 손가락을 내렸다. 어차피 소녀가 저렇게 행동한들 저울의 높낮이는 변하지 않았다. 결정해야만 하는 시점은 곧─ 아주 금방, 찾아온다. 그러니.



  "미녀를 만나고 싶었는데, 누군가가 내 소원을 들어준 걸까나…?"



  그는 가볍게 걸어 양측의 사이에 모습을 드러냈다.

  먼저 반응한 쪽은 소녀였다.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놀랐는지 소녀는 퍼뜩 남자 쪽을 돌아보았다.



  "이 곳은 위험하다! 그대야말로 당장……."



  아름다운 목소리로 자아낸 말은, 하지만, 그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그를 본 순간 그녀도 깨달은 것이다. 소녀의 손이 일순 밑으로 떨어졌다.

  시체들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소녀에게 압도되어 공격하지 못했음이라. 일종이 균형이 깨진 순간─즉 긴장의 실이 풀린 순간, 그들은 지금까지 움직이지 못했던 원한을 담기라도 하듯 소녀에게 손을 뻗었다.



  "아아, 성급해라."



  남자는 짐짓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소녀를 잡아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며 가볍게 두어 발자국 물러섰다.
  결과적으로 소녀는 그의 품에 반쯤 안긴 자세가 되어버렸다. 위급했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이 뒤섞여 소녀는 당황했다. 소녀는 맑은 햇살 같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 무슨─"

  "설명은 나중에."


  그는 입술 앞에 손가락을 세워보였다. 소녀는 불만 섞인 눈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그러다가 그녀 자신도 놀란듯 흠칫, 동공을 늘였다. 그러나 그것은 한 순간이었고 소녀는 금방 무표정으로 돌아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소녀의 모습에 빙긋 미소짓고 남자는 시체들을 보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성한테 그런 흉악한 공격이라니. 아무리 이걸……(그는 소녀를 안지 않은 다른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쓸 일이 없어졌다고 해도, 그런 기본적인 것까지 잊어버린 걸까나?"



  기대했던 반응이 돌아왔다. 시체들의 공격에 남자는 소녀를 안은 채 가볍게 물러섰다.  그 회피는 연속적인 회피의 시발점이 되었다. 춤추듯 시체들의 공격을 피하던 남자는 그가 이 곳에 들어섰던 길에 다다르자 등을 돌렸다. 그는 소녀의 손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잠깐, 놓아라! 어째서 도망치는 것인가!"



  소녀가 소리쳤다. 남자는 가볍게 대답했다.



  "피를 보고 싶지 않으니까."

  "말도 안되는 소리를, 그들을 놔둔다면 거리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될 터다!"

  "아아, 역시 그럴까나."

  "역시라니…… 너, 방치할 생각인가!"



  소녀는 그의 손에서 손을 빼내려는듯 이리저리 비틀었다. 하지만 힘의 우위는 명확했기에 그 시도는 시도되지도 못했다. 남자는 웃었다.



  "그럼 당신은, 어째서 그들을 방치했어…?"

  "그건,"



  소녀는 입을 다물었다. 그가 말한 '방치'가 글자 그대로의 뜻이 아니라, 조금 전 그녀가 공격을 망설였던 일을 뜻함을 알았음이라. 그렇지만 그건. 소녀는 말하려 입을 열었다. 그러나 남자가 빨랐다.



  "이제 곧일까나."



  소녀의 금빛 눈이 의문으로 찼다. 남자는 그녀가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옥상에 있을 때 보았던 단 한곳, 햇빛이 들어오는 지점. 시체들이 따라오는 방향을 제한다면 모든 곳이 막혀 있었다. 굳이 제하지 않아도 그 곳엔 시체들이 있었으니 벽이나 다름 없다고 해야 맞다. 하지만 남자는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향하여,



  "자아, 붙잡아."



  소녀의 등과 무릎을 안고, 뛰어 올랐다.






  /3.

  중력이 이 순간은 작용하지 않는 듯 했다. 없는 날개에 대한 사람들의 원망을 간단히 짓밟으며, 남자는 소녀를 안은 채 하늘로 날았다. 높이, 더욱 높이. 그들의 뒤를 쫓던 시체들이 재가 되어 사라져갔다. 높이, 더욱 높이.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들은 분명히 하늘을 날고 있었다. 새들이 활공하는 궤적에 발을 내딛고 바람의 노랫소리를 헝클어뜨리며.

  놀라운 위업─보통 사람들이 보았다면─을 달성한 남자는, 침착한 미소로 다른 건물의 옥상에 내려섰다. 도약의 정점이 높이와 비슷했기 때문에 그의 발소리는 걸음 소리 정도로 가벼웠다. "읏차…." 그는 몇 걸음 더 걸어가 소녀를 조심스럽게 내려주었다.



  "갑작스러운 일이었는데, 아프지는 않았어…?"

  "괜…… 찮, 느니라."



  말과 달리, 예정 없던 도약에 귀가 멍해졌는지 소녀는 머리를 천천히 흔들었다. 남자는 미소지으며 소녀를 좀더 지탱해주다가 천천히 손을 뗐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사이에 회복한 듯, 소녀는 다시 곧게 서서 그를 바라 보았다.



  "너…… 그대, 너……."

  "어느 쪽이든 좋아."

  "……너. 전부 알고 있었느냐."

  "전부, 라는 건 어떤 걸 말하는 걸까나."



  남자는 오른쪽 뺨을 손으로 받친채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의 고운 은빛 눈썹이 살짝 모였다. 소녀는 이번에는 그녀 자신의 표정에 놀라는 일 없이 말했다.



  "글자 그대로의 의미이니라. 너,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걸 획책하고 있던 것 아니었느냐."

  "획책이라니, 아름다운 당신의 목소리로 그런 말을 듣다니 가슴 아프네. 구상이라고 해주었다면 기뻤을텐데."

  "실 없는 소리 말아라. 어찌 되었든 사실이 아닌가."



  남자는 짐짓 질문했다.



  "어느 쪽이?"

  "……?"



  소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질문인지 모르겠다는 뜻이 그대로 반영된 표정이었다. 남자는 생긋 웃었다.



  "당신의 목소리가…? 아니면 내 질문이?"



  소녀의 눈썹이 이번에는 확연하게 좁혀졌다. 소녀는,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조금 전보다 약간 높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후자를 말하는 것이니라. 너, 설마 실없는 말로써 대답을 회피하려는 생각은 아니겠지."

  "설마. 내가 당신 같은 사람과의 대화를 피할 리가 없잖아…?"



  소녀는 언짢음을 넘어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이 되었다. 남자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자꾸만 변하는 소녀의 얼굴은 퍽 재미 있었다. 아아, 하지만 자꾸 이런 반응을 돌려주면 정말로 화를 내려나. 남자는 속으로 읊조렸다. 소녀의 곤란한 얼굴을 보는 건 좋았지만 그것 때문에 대화를 끊고 싶지는 않았다. 그 쪽이 더 재미 있을 테니까. 물론 그가 재미를 느끼는 건 비단 소녀의 표정 뿐만이 아니었지만, 일단은….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당신의 추론이 옳아. 으응, '획책'했어. ……모두."



  소녀는 그렇다면 어째서 질문을 회피했느냐 묻지 않았다. 소녀는 다른 걸 질문했다.



  "하면, 알고 있었다는 뜻인가."



  무엇을? 남자는 시선으로 물었다. 소녀는 대답했다.



  "그……."



  소녀는 멈칫했다. 소녀는 여전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시선은 촛점을 찾듯 이리저리 헤맸다. 아, 이건. 남자는 즐거운 미소가 자신의 얼굴에 번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소녀가 맺지 못한 말을─ 정확히는 정하지 못한 것을 정의하기로 했다.



  "……것들?"

  "……."


  소녀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 땅에 머무르지 않았다. 소녀는 다시 고개를 들어 그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조금 전과는 대조적인 강한 시선. 남자는 가만히 그것을 받았다. 소녀가 말했다.



  "그래. 알고 있던 것인가. 알고 있었다면, 어째서 지금까지 내버려 두었느냐."
  
  "후응, 이번에는 질문이 두 가지네…."

  "말 돌리지 말아라. 긍정이나 부정 둘 중 하나로 답하면 될 것을 어찌 그렇게 비비 꼬는 게냐."



  소녀는 그를 쏘아보았다. 남자는 부러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다.



  "오야, 그렇게 느껴졌어…?"

  "……심술궂은 사람이로다."



  소녀는 볼을 부풀렸다. 그녀 자신도 몰랐겠지만. 남자는 빙긋 웃었다.



  "후후, 평판이 완전히 바닥까지 떨어져 버렸네…. 아아, 미안해. 답은, 당신 말대로."



  남자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알고 있었어. 소환된 무렵의 악연이랄까."



  소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악연?"

  "내가 소환되었을 때, 내 소환자를 죽이려고 했던 마술사가 있었거든."

  "그런…… 잠깐, 그렇다는 건 설마."

  "으응. 그는 지금 이곳에 없어."



  소녀는 살짝 숨을 삼켰다. 그가 정확히 무슨 뜻으로 말했는지 그녀는 이해한 것이다. 하지만 남자가 말하려던 사실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남자는 이어 말했다.



  "그랬는데…… 그는 사실 사령술사였던 모양이야. 꽤 오래 전부터 도시에 머무르면서 여러가지를 준비했던 것 같아."

  "조금 전의 그것이……."

  "……그 일환. 그래도 다행히 그 날 바로, 조금 전 시체의 '동료'들을 파악할 수 있었어."



  그래서 그 날 부터, 이렇게. 그는 미소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소녀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소녀는 겸양의 뜻을 나타내는 것처럼 왼손으로 오른팔을 잡았다. 데구르르, 말간 금빛 시선이 땅을 구른다. 그러다가 다시 천천히 떠올라, 그를 눈에 담았다.



  "오해를 했던 모양이구나. 사과하겠느니."



  그렇게 말하고 소녀는 얼굴을 숙여 보였다. 소박할 정도로 진실된 사과에 남자는 빙긋 웃었다. 그런 순진한 의도로 그런 일을 했던 것이 아닌데. 하지만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어째서 당신이 사과하는 걸까나…?" 진심을 알려준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생각하며 남자는 말을 이었다.



  "좋아해서 한 일일 뿐이야. 대단한 이유는 없어."



  흐르듯 변한 소녀의 표정에, 남자는 그녀가 어떻게 말할지 짐작했다. 과연 소녀는 그가 예상한 대로 곧게─ 똑바로 말했다.



  "하지만 덕분에 많은 사람이 목숨을 구하지 않았더냐."

  "아아."



  남자의 입술이 호를 그렸다. 부드럽기에 냉막한 웃음이었다.



  "다른 '사람들'을 죽여서, 말이야."






  /4.

  소녀는 눈을 조금 크게 떴다. 그리고 무엇을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사람의 범위는 어디까지 인가. 과거에 사람이었다는 사실 만으로도 조금 전의 시체들을 사람으로 인정할 수 있는가. 혹은, 이미 죽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손에 조종당하는 괴뢰가 되어버렸으니 물건이라 보아야 옳은가? 소녀가 입술을 깨무는 모습에 남자의 금빛 시선이 유려하게 휘었다. 그는 명쾌하게 정의했지만, 그녀는 그렇게까지 할 수 없다. 그렇기에 공격을 망설였고 물건을 지칭하는 말─이를테면 '것' 같은─을 쓰기를 꺼려했으리라.

  소녀가 그에게 조금 전 '그것들'이라 지칭했지 않느냐 물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묻는다면, 그 순간 소녀 역시 그와 똑같은 정의를 내리게 된다. 그에게 시체들에 대해 질문하기 직전 그녀는 '그래'라고 운을 뗐으므로.

  하여 소녀는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아직 결정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등을 밀어볼까, 잡아당길까…… 생각하다가, 남자는 웃었다. 그는 좀 더 걸어 소녀의 앞까지 다가갔다.



  "다른 얘기를 해볼까."



  소녀는 고개를 들었다.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시선이었지만, 남자는 설명하는 대신 질문했다.



  "살아 있는 건 무엇이라고 생각해…?"

  "……."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단순히 질문을 위해 던진 질문이 아님을 깨달았을 터이다. 남자는 말했다.



  "혹시 해부에 대해 알아? 인간에 대한 해부는 말고."

  "……들어 안다."

  "그렇구나. 그렇다면 이야기가 빠르겠네…."



  남자는 손을 들었다. 검은 장갑에 감싸인 손가락이 무언가를 가르는 시늉을 했다.



  "해부를 할 때는…… 아아, 당신에게는 자극적이려나. 그렇다면 자잘한 과정은 생략하고……."



  남자는 손가락을 빙글 돌렸다. 익살스럽다고도 보일 수 있을 동작이었지만 소녀는 웃지 않았다. 남자는 말을 이었다.



  "……최후에는, 심장만이 남아. 그 때쯤 되면 약효가 풀린 동물이 움직이고,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느낀다고 해. 심장만 뛰고 있으면 생명은 살아 있는 거라고."



  남자는 다시 손을 내렸다. 그리고 뒤로 돌려 깍지를 끼며 말했다.



  "당신이 보기엔 어떨까나…?"

  "……그것은, 사람이……."

  "아니다. 후후, 타당한 지적이야. 실제로 사람은 그렇게 될 경우 살아 있을 수 없으니까. ……하지만 그 이상이 되어서도, 멀쩡하게 움직이는 '사람들'도 있어. 당신도 보았으니 잘 알 거라고 생각해."

  "……."

  "어떨까나. 그런 사람들도 여전히, 사람이라고 생각해…? 아니면, 사람이 견딜 수 없는 일을 겪고도 그렇게 움직이니 사람이 아니라고 봐야 할까…?"



  남자는 허리를 굽혀 소녀를 응시했다. 소녀의 얼굴이 마치 정교한 조각처럼 굳었다. 소녀는 소담스러운 손을 꼭 쥐었다. 하얗던 섬섬옥수가 더욱 창백해지는 모습이 마치 백랍 같았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소녀는 그렇게 침묵했다.

  바람이 불었다. 바람은 소녀의 은사를 매만져 흩날리게 했고 남자의 금발을 흐트러뜨렸다. 땅을 스치고, 그들을 세상으로부터 동떨어뜨린다. 정적을 그 자리에 붙들어매듯 바람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불어 왔다. 문득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나부끼는 은사가 이따금 소녀의 눈앞을 가렸다. 하지만 소녀는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소녀의 투명한 금빛 구슬은 남자의 같으면서도 다른─ 호박 같은 금빛 눈을 오롯이 담았다. 피하지 않는 남자에게 소녀는 말했다.



  "……그들은 사람과는 지금은 다르나 사람이었던 자로서, 또 어쨌든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으로서는 무가치하다 할 수 없다."



  소녀는 잠깐 말을 끊었다. 눈 깜박임. 한순간 그들의 연결이 끊겼다. 그 단절의 순간 몸을 돌릴 수도 있었으나 남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가만히, 미소를 머금은 채 소녀가 다시 눈을 뜨기를 기다렸다. 소녀는 그렇게 했다. 그들은 다시 서로를 보았다. 소녀가 입을 열었다.



  "일반인과 저울질한다면 분명 의식 갖고 살아가는 쪽을 비교우위에 놓고 중히 여겨야 할 터다."



  그렇다 하여도. 소녀는 읊조렸다. 작으면서도 또렷하게 들리는, 기묘한 울림을 담은 목소리였다.



  "그들을 무조건적으로 해충 같은 것이라고, 나는 할 수 없다."



  남자는 빙그레 웃었다.
  그는 허리를 폈다. 깍지낀 채 남자는 노래하듯 말했다.



  "그게 당신의 뜻이라면."

  "……?"



  소녀는 의아해하며 남자를 바라 보았다.



  "비난하지 않는 것이냐."



  남자는 한쪽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어째서?"

  "조금 전, 내가 둘 중 하나를 택하지 않아 그리 말했던 것이 아니더냐."

  "으응, 아니야."



  뜻밖의 말이었는지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자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내가 듣고 싶었던 건 당신의 진심. 당신이 그렇게 말한다면, 그걸로 됐어."

  "……."



  소녀는 한순간 꿀을 먹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미간이 섬세하게 패이고, 입술이 앙다물어져서.



  "……역시 심술 궂은 사람이구나, 너는."

  "후후,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도 아름다워, 당신은."



  소녀의 볼이 부풀었다. 남자는 즐겁게 웃고는 빙글 돌았다. 빌딩의 가장자리로 걸어가는 그의 귓가에 소녀의 목소리가 닿았다.



  "돌아가는 것인가."

  "아아, 일단은. 일이 끝났으니까."



  그리고 남자는 다시 몸을 돌려 소녀를 바라보았다. 순간적으로 그의 오른쪽 눈을 거의 가리던 금발이 흘러내렸기에 그는 짧은 시간이나마 처음으로 온전히 소녀를 마주볼 수 있었다.



  "시간이 남는다면, 함께 해도 나는 상관없지만…?"



  아니, 오히려 그렇게 해주면 좋을 거야. 그렇게 덧붙이며 남자는 빙긋 웃었다.
  소녀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거절하겠노라. 그런 말을 하였음에도 내가 네 말을 따르리라 생각하느냐."

  "오야…… 이건 매몰찬 거절이네. 하지만 그런 단단한 면이 당신의 고아한 매력이겠지."

  "또 실없는 소리를!"



  소리친 소녀는, 그러나 곧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의 입을 막았다. 지금까지의 어떤 행동보다도 격렬한 반응에, 소녀 자신이 오히려 놀랐음이라. 남자는 즐겁게 웃었다. 아하하, 하고 퍼져나간 웃음 소리에 소녀는 다시 한번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지금……?"

  "아아, 당신과 함께 있으면 정말로 재미 있을 것 같아. 또 만나게 될 날이 기다려지네."



  한 걸음, 또 한 걸음, 남자는 뒤로 걸었다. 옥상과 외곽과의 경계선을 자연스럽게 올라서 그는 재차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그렇게 말했음에도 혹시 떨어지지는 않을지 걱정하는 눈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다시 미소가 흘렀다.

  마지막 한 걸음. 허공과 빌딩과의 경계선에서.



  "그럼 안녕히. ……."



  마지막 말은 거의 속삭이듯 말했음에도, 분명히 알아들은 듯 소녀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 모습에 만족스럽게 웃고 남자는 가볍게 발을 뗐다. 깜짝 놀란 소녀가 다가오는 모습이 보이고. 살며시 미소 지어주며, 남자는 바람에 몸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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