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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YAGI

??? 2014.02.03 02:18 조회 수 : 19

* (뒤에서 나올)한스는 겨울왕국 오마쥬예용☞☜
* 스압 주의. 56kb(...)
* 7파트 유혈 묘사 주의!!!!!!



  /0.

  "당신은, 무엇을 바라?"






  /1.

  며칠 동안 계속된 비가 눈을 녹이고 나무를 씻어내렸다. 이맘 때 내리는 비는 겨울이 간 뒤 찾아올 봄을 위해 길을 쓸어 내는 빗자루와 같았지만, 그 때문에 날씨는 제법 쌀쌀했다. 하늘을 바라보던 소녀─ 치아키는 하얗게 공기 중으로 부서지는 자신의 숨결을 보며 어깨를 움츠렸다. 치아키는 희고 붉은 얇은 홑옷을 입고 있었고 그 위에는 얇은 담요를 걸치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에게 썩 잘 어울리기는 했어도 보온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치아키는 작게 기침했다. 엣취.



  "아후, 추워라."



  몸을 부르르 떤 치아키는 옆에 두었던 차를 한모금 마셨다. 다소 식기는 했지만 차는 여전히 혀가 저릿할 정도로 따뜻했다.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온기에 치아키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 자리에 누군가가 있다면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길 풍경이었다. 배꽃처럼 하얗고 투명한 피부. 찻잔을 들여다보는 눈은 거울을 보는 듯 맑았다. 코는 지나치게 낮지도 높지도 않은 오똑한 모양새였으며, 다홍색 입술에는 미소가. 어둠보다 짙어 그 안에 녹아들지 않는 검은 머리칼이 날씬한 어깨를 차분하게 감싸고 있었다. 영상매체에서나 나올 법한 청초한 미모였다.



  "그런데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되지?"



  치아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랬다. 사실 그녀는 이 곳에서 이렇게 있어서는 안되었다. 학교의 문제는 아니다. 치아키는 원래 학교에 다니지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치아키가 한창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는 불량 청소년이라는 것 또한 아니다. 그녀 또래의 아이들이 미래를 위해 학교에서 공부를 하듯, 치아키는 현재의 생계를 위해 그녀의 일─치아키 본인에게는 매우 중요한─을 했을 뿐이었다. 잠깐, 그러고보니…… 치아키는 마지막으로 일이 들어온 게 언제였는지 떠올려 보았다.



  "언제더라?"



  떠올리지 못했다.



  "아아아아아아─ 몰라 몰라!"



  청초함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치아키는 모든 것을 포기한 자세로 쓰러졌다. 쾅! 손을 받치지 않았기에 그녀의 머리는 바닥과 화끈한 면담을 하게 되었다. 밀려오는 아픔에 치아키는 울상 지었다. 분명 거울을 보면 주먹만한 혹이 달려 있겠지. 치아키는 확인할 겸 뒷통수에 손을 가져다 대어 눌러보았다.



  "아야야야야."



  안하느니만 못한 확인이었다. 치아키는 황급히 손을 뺐다. 현명한 행동이었지만 문제는 그 바람에 그녀의 머리가 다시 한번 바닥과 마주쳤다는 점이다. 꽈광! 치아키의 머릿속에서 벼락이 쳤다.



  "별이 보인다아……."



  치아키는 멍하니 허공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흐린 날에 별이라니 매우 신기한 일이다. 치아키는 헤죽, 웃으며 별을 셌다. 실제로는 아픔에 의한 환각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에게 그 사실을 지적해줄 다른 사람은 없었다. 치아키는─통증이 가라앉음에 따라─별이 희미해질 때까지 그것을 바라보다가 손을 내렸다.

  텅 빈 천장이 보였다. 치아키는 미소를 지우고 한숨 쉬었다. 휑뎅그렁한 모습이 꼭 그녀의 앞날 같다. 치아키는 백번쯤은 되뇌였을 고뇌를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일 해야 하는데."



  무력감이 그녀를 엄습했다. 유사 이래 모든 사람들이 환영하는 휴식기간을 치아키는 전혀 좋아할 수 없었다. 물론 그녀가 현재 일에 치여서 숨도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면 그녀 역시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일정표는 텅 비어 있었고, 자연히 생계가 위험해지고 있었기에 그것에서 아무 즐거움도 느끼지 못했다. '일'을 찾아 직접 돌아다닐 생각도 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렇기 하기엔 그녀의 능력은 모자랐다. 조금 많이. 애초에 일이 들어오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가 그것이었지만.



  "으앙."



  결국 무력감을 이기지 못한 치아키는 머리를 감싸쥐고 이리 저리 굴러다녔다. 데굴데굴…… 쨍그랑! 문득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치아키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소리가 난 방향을 살폈다.



  "응?"



  원인은 금방 발견되었다. 그녀의 다리가 아슬아슬하게 놓여 있던 찻잔을 건드려서 떨어뜨린 것이다. 이거 오래된 건데……. 치아키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녀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경내는 아직도 조용했다. 손님은 커녕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다. 치아키는 짐짓 헛기침을 하며 파편을 주웠다.



  "몰래 처리하자."



  응, 그게 좋을 거야. 치아키는 자신의 말에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할머니가 찻잔이 깨진 것을 아시면 반드시 경을 칠 터였다. 따라서 이 일은 치아키 자신만 알고 넘어가는 것이 모두에게 이로웠다. 그녀야 말할 것도 없고, 할머니는 찻잔이 깨졌다는 정신적인 충격을 피하실 수 있다. 정말로 현명한 선택이었다. 치아키는 신속하게 파편을 숨기기 위해 움직였다.

  커다란 나무 옆에 찻잔을 묻고 치아키는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이제 증거도 인멸했으니 그녀의 범행이 들킬 염려는 없었다. 치아키는 짐짓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다가 퍼뜩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 남아있음으로써 혹시나 할머니에게 발각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였다. 치아키는 그런 자신이 정말로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치아키는 찻잔이 하나 없어졌다는 사실을 할머니께서 아신다면 모두 도루묵이 되어버린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일에 대한 생각과 생계에 대한 걱정 역시 어느새 그녀의 머리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2.

  일에 대한 생각과 생계에 대한 걱정은 치아키를 집요하게 괴롭혔다. 치아키는 앓는 소리를 냈다.



  "적자야, 적자."



  어느덧 년도가 바뀌었다. 주변에는 봄빛이 물들고 있었다. 나뭇가지의 새순, 날아다니기 시작한 벌들을 본다면 계절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봄이 오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겨울에 그랬던 것처럼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는 치아키는 봄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치아키는 입 안에 잔뜩 넣은 다과와 우울함을 우물거렸다.

  '일'은 년도가 바뀔 정도의 기간 동안 들어오지 않았다. 그 사실은 나이가 한 살 더 올랐다는 사실과 함께 치아키를 우울함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할머니가 장부를 확인하셨던 게 모든 불행의 시작이었다. 원래 장부는 제때제때 점검해야 한다는 사실은 치아키 역시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장부를 점검해야 정확한 수입이 얼마인지, 어느 정도의 지출이 적당한지 알수 있으며 쓸모 없는 낭비를 방지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수입이 있을 때의 이야기다. 들어오는 돈이 없다면 그 행동은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막대한 절망만을 가져올 뿐이다.



  "으으."



  치아키는 다과를 삼킨 다음 또다른 다과를 집기 위해 그릇으로 손을 뻗었다. 달디단 다과로 기분을 좀 전환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치아키의 손은 맨 그릇을 짚었을 뿐이다. 밑을 내려다본 치아키는 자신이 다과를 다 먹었음을 깨달았다. 치아키는 울상을 지으며 차를 마셨다. 후루룩, 쿨럭. 치아키는 사레가 들지 않게 하려 부던히 애썼다. 지나치게 우린 녹차는 엄청난 쓴 맛으로 치아키를 공격했다. 어떻게든 녹차를 목 뒤로 넘긴 치아키는 잔을 다시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깨지는 일이 없도록 좀 더 멀리.



  "어쩌지."



  치아키는 무릎을 끌어안고 이마를 기댔다. 매끄러운 흑발은, 그렇지만, 앞으로 흘러내리지는 않았다. 틀어 올려 비녀 세 개로 고정해 놓았기에 그녀의 머리카락은 주인을 감싸는 대신 경단이 되어 머리 중간 쯤에 자신을 얹었다. 추가 진자 운동을 하듯 몸을 흔들며 치아키는 중얼거렸다.



  "이건 좀 아닌 것 같아."



  모든 것이 엉망이며 그녀는 대파국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악조건들이 그녀를 내버려둘 수 없다는 듯 연속적으로 공격을 해왔다. 질풍 같은 공격 앞에서 '일'에 대해 자신할 수 없는 그녀의 운명은 바야흐로 풍전등화였다. 비축해두었던 돈은 점점 위험수치로 떨어지고 있었고 그것을 막을 더 많은 돈은 보이지 않았다.

  복권이라도 사볼까……. 치아키는 멍하니 생각했다. 복권 1등 당첨액수는 보통 억대. 당첨만 된다면 그녀가 직면한 위기는 한번에 해결된다. 치아키는 즐겁게 1등 복권 당첨자가 된 자신의 인생을 상상…… 하지 못했다. 그런 천문학적인 확률이 그녀를 향해 미소 지을 리 없으니까. 치아키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지이이이."



  그 동안 치아키는 실력을 채우기 위해 노력했다. 실제로 그 노력은 상당한 것이어서 그녀는 눈에 보일 만한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문제는 그럼에도 아직 이 난국을 타파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이었지만. 치아키는 아랫입술을 질겅질겅 짓씹었다. 무엇인가, 무엇인가 길이 필요했다. 복권처럼, 그녀가 상황을 단번에 타개할 수 있게 해주면서도, 확률은 높은…….



  "아!"



  치아키는 눈을 반짝 빛냈다. 그러고보니 어디에선가 그 비슷한 것이 설명된 책을 본 듯했다. 쇠뿔은 단김에 빼라고, 치아키는 그릇을 들고 일어서서 종종종 걸음을 옮겼다.

  치아키는 금방 그 책을 찾을 수 있었다. 그녀의 할머니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녀는 할머니가 물건을 어디에 숨기는지 훤히 꿰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책은 모습도 당당하게 그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치아키는 할머니가 갑자기 나타나시지는 않는지 충분히 주의를 기울여 주변을 경계했다. 다행히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문득 치아키는 잔을 깼을 때의 데자뷰를 느꼈다. 그 때는 결국 할머니에게 들켜버렸었지. 치아키는 심호흡했다. 찻잔과 달리 책은 깨지지 않는다. 읽고 나서 다시 갖다놓기만 하면 문제는 없다. 찢어지면…… 치아키는 그런 문제는 그 때 생각하기로 했다. 게다가 만능의 테이프도 있었다. 치아키는 살금살금, 발꿈치를 들어올리고 걸었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치아키는 재빨리 불을 켰다. 문을 잠그고, 창문도 꼭꼭 걸어잠근 다음 치아키는 책상 앞에 앉았다.

  책에서는 적당히 운치가 느껴졌다. 좋게 표현하자면 그렇다는 것이고, 사실 그대로를 말하자면 거의 누더기로 보일 정도로 너덜너덜했다. 하지만 책의 생김새는 치아키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표지에는 뚜렷하게 '기적을 부르는 만능의 잔'이라고 쓰여 있었고 저자 란에는 믿음직한 그녀의 조상의 이름이 선명했다. 치아키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아, 이거야!"



  표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헤죽헤죽, 웃음이 흘러넘쳤다. 흐뭇하게 미소짓던 치아키는 시간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치아키는 재빨리 책장을 넘겼다……가, 흥분에 찢어버릴 뻔하여 손을 덜덜 떨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만능 테이프와, 책을 '꿰맬' 실과 바늘까지 꺼내고서야 치아키는 다시 책을 보았다(물론 그녀는 그렇게 고쳤다가는 할머니에게 또다시 들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유감스럽게도).

  책의 저자가 나타내고자 하는 바는 간단명료했다. 대파국을 목전에 둔 후대가 헤매지 않도록 배려했다기보다는, 애초에 복잡한 문자로 표현할 이유가 없는 내용이어서겠지만. 치아키는 진리를 목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책장을 덮었다. 그녀는 양손을 펼쳐 그 위에 턱을 얹었다.



  "성배라아."



  한 번으로는 잘 와닿지 않는 것 같았다.



  "성배, 성배. 그리고 성배."



  치아키는 자신의 목소리를 주의 깊게 들었다. 어떠한 바람이라도 이루어 주는 잔. 소원의 선악과 가치를 따지지 않으며, 따라서 '만능'이라 할 수 있는 원망기. 책을 쓴 그녀의 조상은 그것이 진짜 성배─이상향에 존재하는 만능의 솥─가 아니라 속된 말로 '짝퉁'일 뿐이라고 신랄하게 표현했지만 치아키는 그런 현실에 굴하지 않았다. 주목해야 할 곳은 그 물건이 정말로 소원을 이루어줄 수 있는지 없는지였다. 그런 면에서 성배는 합격이었다. 성배는 원전의 만능기에 필적하는 성능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치아키는 성배의 진위여부에는 관심을 끊었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세상은 사람들에게 행운을 거저 내려주는 일이 거의 없었다. 태고 이래 유지되어 온 유서 깊은 법칙은 당연히 성배에도 적용됐다. 놀라운 성능에도 불구하고 성배가 이룰 수 있는 소원은 단 하나 뿐이었다. 그러나 성배를 원하는 사람은 당연하게도 한 사람이 아니었고 그것은 곧 갈등을 불렀다. 일곱 명의 마술사가 일곱 명의 영령을 소환했다. 그들은 계약을 맺고 각자의 적을 쓰러뜨렸다. 그 과정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말려들었고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흡사 '전쟁'과도 비슷한, 아니, 전쟁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싸움이었다. ─라고, 책에는 쓰여 있었다.



  "으으음."



  치아키는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고는 그것을 허벅지 위에 내려놓았다. 
  책의 저자는 그 외에도 온갖 무시무시한 내용들을 책에 적어두었다. 개중에는 너무 황당하여 책의 주제성을 의심케 하는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치아키는 다시 한 번 책의 제목을 보았다. '기적을 부르는 만능의 잔.' 치아키는 자신이 그것에 끌리고 있음을 인정했다.

  성배는 복권에 비할 물건이 아니었다. 복권은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힘을 가진 기적의 집합체였다. 그녀가 직면한 문제의 해결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을 넘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치아키는 고민에 빠졌다.
  잠시 후, 그녀는 결단을 내렸다.






  /3.


  치아키는 길을 걸었다. 걸음도 가볍게. 그녀는 먹으면서 걸었고 마시면서 걸었다. 중간에 손목시계를 보거나 지도를 펼치기도 했지만 그것은 잠깐이었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치아키는 앞을 보고 걸었다. 산길과 개울, 시골길과 도로의 옆길. 그녀가 사는 곳에서 버스 같은 대중 교통은 끊긴지 오래였다. 그래서 치아키는 자신의 두 다리를 믿기로 했다.

  후유키는 멀었다. 치아키는 어쩐지 세상에 자신 밖에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따금 차가 지나다니기도 했지만 그것은 아지랑이만큼도 그녀의 현실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치아키의 현실은 길, 길, 또다른 길이었다. 그것을 끝없이 걷는 것이 그녀의 일이었다. 물론 멈출 때도 있기는 했다. 막 피어나기 시작한 봄의 향취가 가득한 시기였다. 햇빛은 따스했고 꽃들은 한창 꽃망울을 터뜨렸다. 사진을 찍기에 좋은 계절이었다. 치아키는 이따금 서서 풍경을 카메라 안에 담았다. 휴대폰의 배터리는 아껴야 하니까.

  도중에 지나친 도시에서 버스를 잡아탈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치아키는 꿋꿋이 걸었다. 기왕 걷기로 한 것 끝까지 걸어볼 생각이었다. 굳게 정한 일을 똑바로 밀어붙이는 뚝심은 각박해진 현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운 정신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모든 사람이 동의하지는 않겠지만.

  그러나 꿋꿋하던 치아키에게도 슬슬 흔들릴 시점이 찾아왔다. 정말 후유키에서 성배전쟁이 벌어지는 것일까? 그새 장소가 바뀌어서 그녀가 있던 마을에서 성배전쟁이 개최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지는 않았다.

  치아키는 언제부터인가, 마력의 흐름을 느꼈다. 본디 마력은 어디에서나 미약하게나마 흐르고 있지만 이 흐름은 지금까지와 달랐다. 뭔가가 이상했다. 치아키는 어리둥절하여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도로에 후유키라는 팻말이 보였을 때도, 변두리를 지났을 때도. 번화한 도시의 모습이 다가왔을 때에서야 그녀는 걸음을 멈췄다.



  "우와아……."



  어느새 무기력한 구도자에 가깝게 행동하고 있던 치아키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치아키가 후유키 시에 대해 처음 느낀 감정은, 태어나서 처음 본 도시다운 도시에 대한 놀라움과 노을에 대한 아름다움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렇게 마력이 짙게 모인 장소를 알지 못했다. 아직은 여유가 있어 보였지만 나중에는 조그마한 충격에도 폭발할 정도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치아키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때가 곧 성배 전쟁의──



  "흠, 어흠."



  치아키의 상념은 갑작스럽게 들린 헛기침 소리에 끊어졌다. 두리번 두리번 주위를 둘러본 치아키는 그녀 뒤에 선 사람을 볼 수 있었다. 큰 키, 세련된 옷차림, 잘생긴 얼굴. 그림에 그린 듯한 외국인 남자였다. …외국인? 치아키는 자신도 모르게 빤히 외국인을 응시했다. 시골 중의 시골이라 자부할 수 있는 곳에서 자란 치아키로서는 영상 매체를 통하지 않고선 외국인을 본 적이 없었다. 그랬는데, 그 '영상 매체'에 나올 법한 외국인이 눈 앞에 나타난 것이다. 치아키는 순간 자신이 TV속에 들어와 있는 걸까, 생각했다.



  "으으음."



  치아키는 손을 앞으로 뻗어보았다. 화면이 만져지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그녀 자신도 모르게 TV 속에 '빠진' 참사는 일어나지 않은 모양이다. 치아키는 안심했다.



  "크흠, 크흠."



  그 때 남자가 재차 헛기침을 했다. 치아키는 손을 내리고 그를 보았다.



  "아, 죄송합니다."



  치아키는 사과의 표시로 고개를 살짝 숙여보였다. 그런데 왜 내가 사과하는 처지가 됐지? 문득 든 생각에 그녀는 눈을 깜빡였다. 갑자기 말을 걸어온 건 그녀가 아니라 남자 쪽이었다. 그녀가 통로를 막는 민폐를 저지른 것도 아니었는데. 치아키의 기분이 언짢아졌다. 그녀는 볼을 부풀리고 고개를 퍼뜩 들어올렸다.



  "어, 그런데 왜요?"

  "왜라뇨?"

  "저한테 말을 거셨잖아요."

  "아, 네."



  남자는 머리를 긁적였다. 미적지근한 태도에 치아키는 '존댓말'에 잠깐 상향했던 남자의 평가를 다시 끌어내렸다. 남자는 그녀의 그런 심정을 읽지 못했는지, 혹은 읽지 못한 척 했는지 여전히 미적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발밑에요."

  "발밑이요?"

  "네."



  치아키는 미심쩍인 심정으로 발밑을 내려다 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거기서 딱히 문제를 발견할 수 없었다. 다시 고개를 올리려던 치아키는 문득 발 구석에서 반짝이는 물체를 볼 수 있었다. 동전이었다.



  "아, 죄송해요."



  치아키는 몸을 숙여서 그것을 주워들었다. 순간 그녀의 손에 들린 동전이 한층 이채를 발했다. 뭐지……? 치아키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그 빛은 나타났을 때 만큼이나 빠르게 사라져버렸다. 치아키는 동전을 잠깐 손 안에서 굴려보았다. 실망스럽게도 동전은 아무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노을빛 때문인가 봐. 치아키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허리를 펴고 그것을 남자에게 내밀었다. 동전이 남자의 손에 넘어가기 직전, 치아키는 무의식적으로 현재 그녀가 돈을 얼마나 갖고 있는지를 떠올렸다. 그녀는 지금 소환을 위한 성유물과, 집에 있는 현금을 몽땅 챙겨서 나온 참이었다. 그럼에도 그 액수는 결코 넉넉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애시당초 그녀가 이 곳에 온 이유부터가 재정적인 문제도 상당히 작용한 것이었으니 당연했지만.

  치아키는 뒤이어 따라온 할머니에게의 죄송함을 잠시 미뤄두었다. 현금을 가져왔다고는 해도 아직 통장은 남아 있다. 게다가 수행을 위해 떠난다는 편지도 남겨두었으니 그녀의 할머니는 아주 크게 걱정하시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감사합니다."



  남자의 목소리에 치아키는 정신을 차렸다. 그가 지금 뭐라고 한 거지? 치아키는 한참 후에야 적당한 대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뇨, 뭘요."

  "이 도시에는 처음 오신 건가요?"



  치아키는 다시 한 번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조금 전부터 허물 없이─미적지근하기는 했지만─말을 거는 남자의 태도는 그녀를 곤란하게 했다. 도시 사람은 원래 이런가? 그렇다면 큰일이었다. 성배전쟁에 참여하기 이전에 그녀가 지쳐서 쓰러질지도 판국이다. 성배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숨어있는 게 나으려나, 그렇게 생각하다가 치아키는 남자가 점점 오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것을 깨달았다. 일단 지금은 어쩔 수 없으니 일단 말하고, 얼른 벗어나서 피하던가 하자. 피할 수 없으면 즐기는 법.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그녀는 입을 열었다.



  "네."

  "아하, 어쩐지 익숙하지 않은 것 같으시길래. 그럼 관광 차 오신 건가요?"

  "아, 음. 네."



  치아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겸사겸사 도시를 돌아보기는 해야 하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남자는 안쓰럽다는 말투로 말했다.


  "혼자서 오신것 같은데…… 힘드셨겠네요."

  "아뇨. 저, 걷는 건 잘해요."

  "네?"



  잘 나아가는 듯했던 대화가 다시 끊겼다.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남자의 표정에 치아키는 당혹을 느꼈다. 뭔가 잘못 말했나? 하지만 걸어오는 게 뭐 어때서. 그녀의 여행은 지루하기는 했지만 남자의 반응처럼 기겁할 정도로 끔찍하지도 않았다. 치아키는 손가락으로 볼을 긁적였다.
  다행히 남자는 빠른 속도로 평정을 회복했다. 그가 말했다.



  "음, 걸어오셨다고요? 다른 도시에서?"

  "네. 도시는 아니었지만요."

  "……안 힘드세요?"

  "괜찮아요."



  치아키는 어깨를 으쓱였다. 남자는 깊은 감명을 받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대단하시네요. 아,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많은 걸 여쭤봤군요."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치아키는 속으로 말했다. 그녀는 남자에게 그걸 이제야 알았냐고 묻지는 않기로 했다. 곧 해방될 것이라는 기쁨이 더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속마음이 그대로 표정에 드러났는지 남자는 미안해하는 듯 살짝 고개를 숙였다.



  "기분이 상하셨다면 사과드릴게요."

  "아뇨, 아뇨, 아뇨. 괜찮아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치아키는 속으로 예전 TV에서 보았던 나레이션을 흉내내어 덧붙였다. 그 소리가 전해졌을리는 없지만, 남자는 다시 고개를 들고 웃었다.



  "아무튼, 모처럼 오셨으니 재밌게 보고 가세요. 별로 볼 건 없겠지만."

  "헤헤, 감사해요."



  치아키는 빙긋 웃었다. 그리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도시 사람과의 대화는 처음이었지만, 이제 작별 인사만 하고 서로의 갈 길을 가면 되는 단계라는 건 그녀도 알 수 있었다. 헤어지면 곧바로 숙소를 잡고 식사를 한 뒤, 좀 쉬다가 도시를 둘러보면 될 것이다. 그 때는 누군가한테 붙들리지 않게 발밑을 주의하자. 스스로의 생각에 치아키는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치아키가 그것의 우선 순위를 소환 의식을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게 하는 일 위에 올려둔 건 아니었다. 사고 방식이 일반인에 가깝─거나 좀 더 '비범'하─기는 했지만 그녀는 엄연히 마술에 몸을 담근 사람이었다. 그리고 마술의 기본은 은닉이다. 영령의 소환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애시당초 그녀가 성배전쟁에 참여할 결심을 하자마자 올라온 것도 한참 후에 들어왔다가 다른 마술사에게 들키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후유키에 왔는데, 발을 딛자마자 위협을 받게 된다면 본말전도다.

  오늘 당장 소환 의식을 하지는 않더라도, 장소 정도는 미리 알아두는 게 낫겠지? 치아키는 계획을 잊지 않도록 머릿속에 넣어두었다. 모든 계산 과정을 마친 그녀는 안녕히 가세요, 라는 말을 할 준비를 하고는 남자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빨리 이 순간이 지나가기를 바랐다.

  손목에서 갑자기 통증이 느껴진 것은, 그 순간이었다.



  "아얏……!"



  치아키는 반사적으로 소리치며 손을 들었다. 하얀 피부에, 보이지 않는 손이 붓으로 그리듯 문양이 새겨진다. 총 3획으로 나눌 수 있을 듯한 문양이었다. 치아키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령주의 예조. 마스터의 증표다. 즉 그녀는 성배전쟁에 정식으로 참여할 자격을 얻었다는 뜻이다.



  "어……."



  하지만 치아키는 그것에 대해 기뻐할 수는 없었다. 하필 민간인의 앞에서 발현되다니! 치아키는 황급히 손등을 가렸지만, 남자의 표정을 본 순간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령주는 가릴 수 있어도 이미 한 번 그것을 목격한 남자의 기억까지 가릴 수는 없다.

  그렇다면 마술로 기억을 지우는 수밖에─



  "……하필 이런 때라니. 다른 때 발현되는 것이 당신에게는 더 좋았을 텐데."



  남자의 말에, 치아키는 얼어붙었다.






  /4.


  마술사란 마술을 탐구하는 마도를 걷는 자들이다. 그들은 근원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자신이 완성하지 못한 연구 성과를 남기기 위해 자식을 후계자 삼아 마술 각인을 물려준다. 자연히, '후계자'는 어릴 적부터 가혹하고 엄격한 단련을 거침과 동시에 마술과 그에 관련된 지식 및 연구를 이어 받는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부모─선대 마술사로부터 모든 마술각인을 계승한다. 즉 새로운 당주로써 마술로 향한 찬란한 발걸음을 내딛게 되는 것이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이다. 후계자가 되지 못한 아이는 보험이나 다름 없는 취급을 받는다. 단순하다. 후계자에게 일이 생길 경우 그 자리를 채울 예비 부품. 가문 내 암투가 너무 심하다면 기초적인 마술을 연마할 수도 있지만 그 뿐이다. 후계자가 무사히 당주가 된다면, '예비'는 다른 가문과의 정략 결혼에 이용되거나, 분가를 해서 처음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한스 폰타나는 그런 마술사였다.

  한스에게는 세명의 형제들이 있었다. 그는 후계자가 되기에 요원한 자리, 즉 막내의 위치에 있었고 큰형─ 즉 '후계자'는 그를 아예 없는 사람처럼 무시했다. 그를 제외한 일가족이 전부 죽지 않는 한 그는 결코 당주가 될 수 없었다. 물론 그가 손위 형제들을 제칠 만큼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면 형편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런 동화에서나 나올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스의 재능은 형제들에 비하면 너무 빈약했다. 한스는 이럴 것이라면 아예 마술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는 편이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날로 커지는 절망감 속에 한스는 하루에도 수십번씩 가문을 뛰쳐나가는 상상을 하곤 했다. 나가서 어떻게 할지는 한스 본인도 몰랐기에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지만.

  성배전쟁의 소식이 들려온 것은 그 즈음이었다. 만능의 잔. 어떠한 소원이라도 이루어주는 원망기. 한스는 눈을 빛냈다. 그것이 있다면 그가 엄청난 재능을 얻는 것도, 당주가 되는 것도 문제가 아니었다. 아니, 그걸 넘어서서 가장 뛰어난 마술사가 되는 일도 가능하다. 그것이야말로 그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열쇠였다. 그는 즉시 짐을 꾸려 가문을 나섰다. 

  한스의 여행은 순조로웠다. 그는 어떠한 방해도 없이 후유키 시에 도착했다. 그리고 토지관리자의 눈을 피해서 숨어드는데 성공했다. 물론 단순히 토지관리자가 부재중이거나, 외부에만 있다고 알려졌을 뿐 없을 수도 있다. 그래도 한스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이제 적당히 다른 마술사를 견제하면서 령주가 떠오르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는 사실이었다. 전자와 달리 후자는 좀처럼 기미가 보이지 않았지만 한스는 차분하게 기다렸다. 그는 기다리는 데에 익숙했다. 가문을 떠나오기 직전까지도 무언가를 얻기 위해선 끝까지 기다려야만 하는 위치에 있었으니까.

  일정량 이상의 마력을 지닌 사람을 탐지하는 동전이 소녀를 찾아냈을 때도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소녀는 정말로 '아슬아슬하게' 기준치 이상의 마력을 갖고 있었다. 만약 기준치를 아주 조금만 낮추었더라면 동전은 소녀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소녀의 행동은 정말로 도시에 처음 온 시골 사람의 그것이었다. 단순히 마력을 지닌 일반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스는 일단 조심스럽게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소녀의 반응은 그 가능성에 한층 힘을 실어주었다. 한스는 곧 그녀가 정말로 일반인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여러모로 괜한 짓을 한 것에 대해 사과했다.


 그러나, 소녀의 손등에 령주가 떠오르는 모습을 본 순간 그는 그것을 잊어버렸다.



  "……하필 이런 때라니. 다른 때 발현되는 것이 당신에게는 더 좋았을 텐데."



  그의 말에 소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이제 소녀의 반응은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그는 그토록 갖고 싶어했던 령주를 소녀는 도시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부여 받았다. 그것도 너무나 쉽게. 한스는 누르던 온갖 감정이 터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분노, 굴욕, 절망 등등. 아직 성배전쟁은 시작하기엔 멀었다.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기다린다면 그도 령주를 받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한스는 그런 자신의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그는 충분히 기다렸다.

  한스는 소녀를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각인이 없었기에 소녀를 마술로 붙잡으려면 영창을 해야 했는데, 그랬다가는 소녀가 그 사이에 도망을 칠 수도 있으니까.

   훌륭한 판단이었으나 불행히도 그의 움직임은 조금 느렸다. 퍼뜩 정신을 차린 소녀가 날쌔게 그의 손을 피했다. 깜짝 놀란 눈으로 그를 보던 소녀는 이내 등을 돌리고 다른 방향으로 달려나갔다. 물론 한스는 소녀가 달아나게끔 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곧바로 소녀를 쫓았다.

  소녀는 제법 빨랐다. 소녀의 말이 진실이라면 그녀가 살던 곳에서부터 이곳까지 걸어왔다는 뜻일 텐데, 그럼에도 지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한스는 이를 악물었다. 이미 체력을 소모한 사람, 그것도 십대 후반의 소녀를 상대로 이렇게 시간이 지체되다니. 그는 손가락을 들어 소녀를 겨냥했다. 그리고 마탄을 쏘았다.



  "꺄악!"



  마탄은 아슬아슬하게 빗나갔다. 소녀는 깜짝 놀라 진로를 틀었다. 곧바로 반격해오지 않는 것은 실력이 미숙해서인가, 그럴 틈을 잡지 못해서인가, 혹은 사람을 공격하고 싶지 않아서인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한스는 꽤 오래 전에 후유키 시에 도착했고 그 동안 지형을 잘 파악해두었다. 한스는 침착을 되찾았다. 실력 뿐만 아니라 위치적으로도 우위에 있는 사람은 그였다. 그는 자신들이 어디에 있는지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어느새 노을빛이 완연히 사라진 시간. 그들이 향하는 방향으로 좀 더 나아가면 공원이 있었다. 다른 곳에 있는 더 큰 공원 때문인지 그 곳은 낮에도 별로 인적이 없었다. 하물며 밤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바로 그 점 때문에 그가 여러 조취를 취해둔 곳이기도 하다.
  한스는 빙긋 미소지었다. 그는 소녀를 그 곳으로 몰아넣기 위해 움직였다.






  /5.

  치아키는 달렸다. 그녀는 남자의 손에 붙잡히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그녀를 둘러싼 골목이 싫었고 근처의 길도 더 이상 좋아할 수 없었다. 물론 뒤에서 추격해오는 남자도 당연히. 치아키는 끄응, 소리를 냈다. 비록 어수룩하긴 했어도 나름대로 친절하게 말을 걸어오던 남자는, 그녀의 령주를 보자마자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꿨다. 령주를 노리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즉 남자 역시 성배전쟁에 참여하려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아무 이유도 없이 전쟁에 참여할 리는 없으니 그에게도 그녀처럼 무슨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치아키는 남자에게 무슨 사정이 있는지 그다지 알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남자에게 계속해서 쫓기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치아키는 인파가 많을 만한 길로 돌아가기로 했다.

  하지만 남자의 추적은 집요했다. 날아오던 마탄들이 사라져 안심하자마자 치아키는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우위는 명백했다. 날아오는 마탄을 또다시 가까스로 피하고 치아키는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렇게, 그녀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몇 번이고 방향을 바꿔야 했다.

  치아키는 점차 호흡이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 차츰 쌓여왔던 피로감과 새로이 나타난 무력감이 그녀를 엄습했다. 인파가 많은 곳으로 피하려는 생각은 어느새 뒷전으로 밀려났다. 치아키는 그저 남자가 있지 않을 법한 방향으로 달렸다. 하지만 남자는 어김 없이 나타나 그녀를 공격했다.

  몰아넣고 있다. 치아키는 비로솟 그 사실을 실감했다. 후유키에 처음 온 그녀는 지금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지만, 상대─그녀보다 훨씬 이전에 이 곳에 왔을 게 분명한─는 그렇지 않다. 확 멈춰 볼까? 충동적으로 떠오른 생각을 치아키는 뿌리쳤다. 그녀는 지금 남자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만약 가까이에 있다면 발을 멈추는 순간 붙잡힐 것이다. 응전해볼까? 치아키는 그것 역시 뿌리쳤다. 실력차는 명백했다. 아예 기습이라도 하지 않는 한 그녀가 정면에서 남자를 이길 수는 없다.

  치아키는 입술을 깨물었다. 도움이 필요했다. 남자의 주의를 조금이라도 돌려줄 사소한 도움이라도 좋았다. 이곳만 벗어나 인파속으로 뛰어들면 남자도 그녀를 함부로 쫓지는 못할 것이다. 물론 추적을 그만두지는 않겠지만 그 때는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숨어들면 된다. 비록 남자가 도시에 익숙해졌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가 찾지 못한 곳이 하나 쯤은 없을까. 치아키는 희망을 담아 생각했다. 갑자기 누군가가 나타나서 남자를 물리쳐주는 일 같은 건 바라지도 않──



  "어?"



  치아키는 자신의 생각에 멈칫했다. 갑자기 나타나서 남자를 물리쳐줄 상대. 즉, 그녀의 '적'을 쓰러뜨릴 사람. 그녀는 비슷한 개념을 본 적이 있었다. 분명히, 얼마 전에 읽었던 책에서…….



  "서번트!"



  치아키는 탄성을 질렀다. 그 외침이 남자를 끌어당겼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치아키는 더 이상 그것에 신경쓰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부터 계속 말을 해야 할 테니까. 치아키는 말했다.



  "채워라, 채워라, 채워라, 채워라, 채워라. 반복할 때마다 다섯번. 그저 채워지는 순간을 깨뜨린다."



  도와줄 사람이 없다면 직접 불러내면 되는 법이다. 생각보다 빨랐지만 어차피 소환의식 자체는 해야 할 일이었다. 그저 조금─지나치게 당겨졌을 뿐. 마력은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고민이 스쳤지만 치아키는 그것을 곧바로 머리 뒤로 밀어버렸다. 마력에 대한 걱정도 일단 지금의 위기에서 벗어나야 할 수 있다.



  "원소는 흙과 바람, 토대는 돌과 계약의 대공. 시조는 큰 스승 쥬린. 불어오는 바람에는 벽을 치고, 사방의 문을 닫고. 왕국에서 나와 왕좌에 이르는 삼차로는 순환한다!"



  재차 마탄이 날아와 치아키는 고개를 홱 숙였다. 어느새 남자가 그녀를 따라잡은 모양이었다. 그 방향이 앞이 아니라 뒤라는 것에 치아키는 안도했다. 앞이었다면 남자의 모습에 놀라서 주문을 틀릴지도 모르니까. 그렇지 않아도 소환진도 없는 엉망진창인 소환인데 주문마저 잘못 외운다면 어떻게 될지 치아키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소환 자체가 성공할지의 여부도. 

  이제 본격적인 소환절이었다. 치아키는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고한다. 그대의 몸은 나에게, 나의 운명은 그대의 검에. 성배의 인도에 따라 이 뜻, 이 이치에 따른다면 대답하라!"



  마탄 때문에 마지막 말은 거의 비명이 되었다. 그래도 주문이 어그러지거나 하지는 않았기에 치아키는 안도했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맹세를 여기에. 나는 온 세상 모든 선을 이루는 자, 나는 온 세상 모든 악을 베푸는 자."



  공격이 더욱 거세졌다. 치아키는 탁 트인 길을 그저 달리며 말했다.



  "그대 삼대 언령을 두른 일곱 하늘."



  마지막 구절을.



  "억지의 윤회로부터 오라, 천칭의 수호자여!"



  인적 없는 골목에 치아키의 목소리가 퍼져나갔다. 치아키는 초조감 속에서, 그러나 다리를 멈추거지는 않고,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변화는 없었다.

  하긴 이게 당연한가아. 치아키는 자조했다. 애초에 소환진도 없었으며 성배전쟁 개막과도 동떨어진 시기였다. 촉매는 갖고 있었으나, 그것만 가지고 소환이 가능하다면 세상에는 이미 영령이 넘쳐날 것이다. 치아키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흔들어 자꾸만 밀려드는 암울함을 떨쳐냈다.

  마지막 희망─ 아니, 선택지가 사라진 이상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둘 밖에 없었다. 계속 도망치거나, 응전하거나. 치아키는 잠깐 고민하다가 앞 쪽을 선택했다. 그녀는 계속 달리고 있었고 그 때문에 관성은 그녀를 움직이는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갑자기 멈추거나 홱 뒤로 돈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다. 그래서 치아키는 계속 달렸다.

  치아키는 길이 사라졌음을 알았다. 어느새 그녀는 공원에 들어와 있었다.

  잠깐 동안 치아키는 기대를 품은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공원이니 사람 한 둘 쯤은 있지 않을까 하고. 그러나 치아키는 곧 자신의 기대가 무의미했음을 알았다. 공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때 그녀의 등 뒤에서 남자가 말했다.



  "그만 포기하는게 어떨까요?"



  남자는 처음의 여유를 되찾은 듯 했다. 치아키는 이 곳이 그가 그녀를 몰아넣으려고 했던 곳임을 눈치챘다.

  안 돼. 치아키는 생각했다. 남자는 믿는 구석이 있기에 그녀가 이 곳에 오도록 유도했을 것이다. 즉 이 장소는 남자가 사전에 무엇인가를 공작한 장소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 곳에 다른 마술사가 들어가는 것은 자살행위다. 나가야 해. 치아키는 방향을 바꾸려했다. 마주보게 되더라도, 남자의 옆을 잘 빠져나가기만 하면,

  몇 걸음도 옮기기 전에 치아키는 앞으로 쓰러졌다. 공원의 우레탄 덕분에 다치지는 않았지만 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듯한 충격을 받은 치아키는 그 순간 도주를 포기했다. 정확히는 포기해야만 했다. 아무리 힘을 넣으려고 해도 그녀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어째서? 그러나 다음 순간 치아키는 깨달았다. 체내 마력이 급속도로 뽑혀나가고 있었다. 소환이 성공한 것일까?



  "그러니까 처음부터 협조해 주었다면 좋았을 것을."



  하지만 치아키는 그것을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었다. 하필 이런 때……!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힘든 자신의 처지에 치아키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자책은 이 상황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치아키는 다시 눈길을 돌려 남자를 노려보았다.

  남자는 웃으면서 그녀에게 다가왔다. 조금 전 그가 한 말을 듣지 못했다면 그녀를 도와주러 오는 것이라 착각할 정도로 따뜻한 표정이었다. 치아키는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몸은 여전히 말을 듣지 않았다. 치아키는 말했다.



  "오지 마!"

  "그런다고 들을 사람이 있다면, 세상에 경찰은 없겠죠."



  치아키는 눈썹을 찡그렸다. 갑자기 몰려온 피로감에 그녀는 더 이상 말할 기운을 잃어버렸다. 대신 치아키는 아득아득 남자를 노려보았다.
  눈 앞까지 다가온 남자는 그녀의 시선이 털끝 만큼도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행동했다. 그는 엎어져 있던 그녀의 손에 제 손을 뻗었다. 령주가 있는 손이었다.



  "당신은 운이 좋아요. 팔 하나를 못 쓰는 정도로 끝날 테니까."

  "안 돼, 하지마!"

  "이런. 죽기를 바라나요?"



  싫어. 치아키는 속으로 외쳤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포기하고 팔을 내주고 싶지도 않았다. 겨우, 겨우 그렇게 도망치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움직여…! 치아키는 마음 속으로 외쳤다.

  여전히 그녀의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안 돼, 싫어, 안돼…… 치아키는 이제는 거의 공포에 질린 눈으로 남자를 바라 보았다. 남자의 손이 그녀의 손에 닿았다. 그녀는 숨을 삼켰다. 이대로 령주를 적출당하리라는 사실은 불을 보듯 뻔했다. 남자는 그녀를 살려준다고 했지만 갑자기 마음을 바꿔서 죽이려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안 돼. 치아키는 남자가 단도를 꺼내는 모습을 보았다. 예리하게 갈린 그것이 그녀의 손목을──

  그 때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야, 이건 재미 있는 상황이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남자는 움직임을 멈췄다. 부드러운 목소리는 거의 마성이라는 이름이 어울릴 정도였다. 목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주위를 둘러보던 남자는 곧 헉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남자의 시선을 따라간 치아키는 그가 어째서 그랬는지 알게 되었다.

  희고 푸른 에테르가 맺혀 사람의 형상을 빚었다. 모여든 파편이 모여들어 빛나는 육신을 맺는다. 머리가, 몸이, 두 팔이, 다리가.

  그것은 지독히도 현실감이 없는 풍경이었다. 때문에 치아키는 순간 그녀를 둘러싼 현실을 잊었다.

   차분한 금빛 머리칼이 사붓이 그림자에 어른거렸다. 고아한 금빛 눈이 그녀와 남자의 모습을 담는다. 다가가는 것마저 꺼려질 정도로 미려한 얼굴에, 모양 좋은 입가에는 가벼운 미소가.

  하지만 치아키는 자신도 모르게 남자가 그러했듯 숨을 죽였다. 상대는 지금까지 그녀가 느꼈던 무엇보다도 강대한 마력을 품고 있었다. 평범한 인간은 평생을 바쳐도 닿을수나 있을까 싶을 방대한 마력이다. 그러나 그가 사실은 영령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오히려 그 마력량은 터무니 없이 적다 할 수 있다. 서번트는 영령을 완벽하게 재현하지는 못하니까.



  "서번트……."



  치아키의 중얼거림에, 그─서번트는 온화하게 웃었다.






  /6.

  극도로 긴장된 의식 속에서 시간은 지독하게 느려진 것처럼 느껴졌다. 치아키와 한스는 서번트를 바라보았다. 서번트는 팔을 뒤로 뻗어 뒷짐졌다. 그는 우아한 발놀림으로 걸음을 옮겼다. 현대의 그것과는 다른 느낌의 옷자락이 하늘하늘 흔들린다. 서번트는 전혀 서두르지 않는 동작으로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는 그들에게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멈췄다.



  "설마 소환되자마자 이런 광경을 보게 될 줄이야."



  금빛 시선이 치아키와 한스를 훑었다.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 잠깐 고정되었을 때 치아키는 긴장감과 고양감을 느꼈다. 갑작스레 마력이 뽑혀나가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지만, 바로 그 일이 그를 소환한 사람이 다름 아닌 그녀라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의 시선은 곧 빗나갔다. 그는 미소를 띈 채 그녀의 손─령주가 있는─을, 그것을 자르려는 한스를 보았다.



  "……으응, 대단히 훌륭해."



  그는 몸을 빙글 돌렸다. 치아키는 순간 그가 무엇을 발견했나 싶어 따라서 눈길을 돌렸다. 하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공원에 있는 사람은 여전히 그들 뿐이었고, 주변에 핀 벚꽃만이 바람에 흔들리며 묵묵히 그들을 보고 있었다. 치아키는 알 수 없다는 눈으로 서번트를 응시했다. 서번트는 이번에는 그녀를 보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걸었다.



  "누가 가해자고 피해자인지는 뚜렷해 보이지만…… 령주를 누가 갖게 되는가, 그건 아직 명확해지지 않은 것 같네."



  다시 빙글. 서번트는 이번에는 조금 전과는 반대 방향에 서서 그들을 보았다. 그의 말이 품은 명백함에 치아키는 얼어붙었다. 이 상황에서 가장 일어나선 안 될 일이 그녀 앞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조금 전 그가 한 말은, 소환자의 령주를 강탈하려는 제 3자에 대한 비꼼이 아닌 순수한 감상이었던 것이다. 도와줄 생각이 없는 거야…?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를 이 세상에 불러낸 사람은 그녀였다. 그녀의 령주를 가져가려는 남자가 아니라. 감당하기 힘든 배신감─공포─분노─절망 속에서 치아키는 입술을 짓씹었다.


  서번트의 행동에 당황(그것을 당황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면)한 사람은 치아키 뿐만이 아니었다. 놀람 때문에 한스는 잠시 침묵했다. 서번트 역시 달리 말을 하지 않았기에 고요는 한스가 예상한 간격보다 길어졌다. 그 사실에 한스는 초조감을 느꼈다. 혹시 서번트가 언짢아 하지는 않을까? 서번트는 놀랍게도 지금까지 그에게 별다른 적의를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 행운이 어디까지 갈지는 모른다. 그래서 한스는 말했다.



  "그녀를 도와주지 않는 겁니까?"



  서번트는 가만히 한스에게로 시선을 틀었다. 키 차이 때문에 서번트는 한스를 올려다 보아야 했다. 한스는 문득 상대가 자신보다 눈높이가 위에 있다는 사실조차 견디지 못하는 영령도 있다는 말을 떠올렸다. 혹시 이 영령이……. 기우였다. 서번트는 재미 있다는 듯 웃었다.



  "그렇게 하기를 바라?"



  한스의 턱이 쑥 빠졌다. 놀람을 넘어 감당하기 힘든 황당함 속에서 한스는 서번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한스는 오싹함을 느꼈다. 그는 서번트의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긍정한다면 정말로 그렇게 해주겠다는 것일지, 단순한 질문일지. 고민하던 한스는 고개를 저었다. 서번트가 저 소녀를 도울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었고, 그렇다면 굳이 그에게 자신을 쓰러뜨려야만 하는 적으로 각인시킬 필요는 없었다. 령주를 가져가려는 행동을 목격한 이상 별 의미는 없겠지만. 한스는 말했다.



  "아니오, 바라지 않습니다."

  "그건 스스로 하겠다는 뜻?"

  "……."



  한스는 말문이 막혔다. 단순히 서번트의 말을 부정하려 한 말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할지는 미처 생각해두지 못했다.
  서번트는 웃었다.



  "후후, 솔직하게 말해주었어도 되는데."



  무엇을? 한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번트를 바라보았다. 이 서번트는 그가 그렇게 하길 바랐다고 생각한……
  다음 순간 그는 얼어붙었다. 서번트는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물들인 채 그를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한스는 태연하게 있을 수 없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서번트를 내려다 보았다. 그는 서번트가 '단순히 그의 말을 부정하려'했던 자신의 심정을 꿰뚫어 보았음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 한스를 바라보던 서번트는 한스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습에 한스는 물러서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의 다리는 굳어 있었다.

  서번트는 천천히 허리를 굽혀 그를 올려다 보았다. 똑바로 그를 응시하는 금빛 눈에 한스는 이제는 거의 공포를 느꼈다. 서번트는 온화하게─여전히 미소 지은 채─말했다.



  "너는 무엇을 위해 성배를 원해?"



  조용한 목소리는 그 어떤 무기보다도 강력하게 한스의 뇌리를 찔렀다. 한스는 발끝을 주춤주춤 꿈틀거렸다. 그렇지만 서번트의 질문은 그가 성배전쟁에 참여한 계기를 상기시켰고 그것은 곧 그에게 익숙한 감성을 불러 일으켰다. 한스는 자제력을 되찾았다. 그는 차분히 자신 속에 잠겨 서번트의 질문을 되새겼다. 그는 무엇을 위해 성배를 원했는가. 고민할 것도 없었다.

  한스는 말했다. 가문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서, 혹은 그걸 넘어 가장 뛰어난 마술사가 되기 위해서라고.

  서번트의 미소가 조금 다른 빛깔을 띄었다. 고개를 기울이며 그는 말했다.



  "그건 다른 모든 것을 짓밟을 수 있을 정도로 소중한 소원인 걸까나?"

  "예…?"



  한스는 당황했다. 이 질문 역시 시험일까? 그 모습에 남자는 아아, 하고 웃으며 덧붙였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이건 단순한 질문이니까."



  서번트는 빙긋 웃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서번트는 순수하게 한스가 어떻게 대답할지 기대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한스가 느끼기에 그는 그 객관성과 무관했다. 모습을 드러낸 이후 그는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언행만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한스를 혼란에 빠뜨렸다.

  단순한 질문? 어떻게 서번트가 자신의 마스터가 될 수도 있는 마술사에게 그런 것을 태연하게 물을 수 있는가? 보통 누군가가 다른 사람에게 그런 질문을 하는 건 상대의 각오를 알아보기 위함이다. 그리고 질문한 사람이 상대의 대답, 즉 각오가 충분치 않다고 느꼈을 때 대화는 급속도로 파국을 맞는다. 한스는 자신이 그 법칙에서 예외가 된다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물론 눈앞의 서번트는 이 생각 역시 읽고 있을 것이다. 혹은 그걸 넘어서서 아예 그의 생각을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를──

  한스는 강제로 상념을 끊었다. 이제는 공포를 넘어서서 절망적인 심정이었다. 이래서야 완전히 서번트가 손가락을 움직이는 대로 놀아나는 목각인형이 아닌가. 서번트가 모든 모습을 더할 나위 없이 즐겁게 지켜 보는 모습에 그는 다시 한번 절망했다. 한스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소중…합니다."

  "그래?"



  서번트는 그럼 증명해보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번에는 치아키를 돌아보았다. 한스에게 그랬듯 치아키에게 걸어간 그는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서 있었어더라도 신장의 차이 때문에 그래야 했겠지만, 한스와 달리 치아키는 그를 올려다 보아야 했다. 온화한 금빛 눈. 아름다운 얼굴.

  하지만 치아키는 순수히 감탄을 담고 그를 바라볼 수 없었다. 조금 전에 느꼈던 것처럼 소환자, 즉 자신을 돕지 않는 그의 행동에 분노하지도 못했다. 그녀는 한스와 서번트의 대화를 빠짐없이 보고 들었던 것이다. 서번트는 그녀의 생각도 읽고 있을까? 그건 싫었다. 치아키는 휙 눈을 피했다.

  서번트는 괘념치 않는 듯했다.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치아키의 귓가에 닿았다.



  "당신은, 무엇을 바라?"



  치아키는 2인칭의 변화가 서번트가 그녀에게 품은 호의의 증거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건 단지 그의 말투가 가진 특징일 것이다. 치아키는 그녀가 매달려도 서번트는 도움 대신 즐겁다는 시선만을 돌려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치아키는 덧없는 희망에 목매는 대신 생각에 잠겼다.

  자잘한 이유를 건너뛰고 핵심만 본다면, 그녀와 그녀의 령주를 강탈하려던 남자의 소원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자기 자신의 안위. 세계 평화 같은 것을 바라는 박애주의적 마음은 당연히 없으며 근원을 추구하는 마술사 다운 자세와도 한참 거리가 떨어진 소망이다.

  치아키는 알지 못했지만, 그녀는 조금 전 한스가 생각했던 것과 거의 같은 개념을 떠올렸다. 이것은 성배전쟁에 대한 그녀의 각오를 측정하기 위해서일까?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서번트는 망설임 없이 그녀를 버리는 것일까? 치아키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와 비슷한 소망을 말했던 남자에 대한 서번트의 반응을 참고로 삼기에는 알 수 있는 것이 너무 적었다.

  치아키는 눈을 꼭 감았다. 남자에게 그랬듯 서번트는 지금 그녀의 생각을─ 심리를 훤히 읽고 있음이 틀림 없다. 치아키는 조금 전과는 다른 공포를 느꼈다. 죽음에 대한 공포. 심리가 들여다 보인다는 공포. ……공포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조차 읽고 있으리라는, 무서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입을 다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나는, 나는."



  치아키는 말했다. 자신의 소망을.
  서번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걸 위해서라면,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을 정도로 소중해?"



  치아키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남자가 말한 '다른 모든 것'에 다른 사람의 생명 역시 포함된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성배전쟁에 대해 소개된 책에도 분명히 적혀 있지 않은가. 무수한 사람들이 말려들었고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었다고. 굳이 외부인을 끌어들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성배를 노리는 조가 일곱인 이상 희생은 불가피했다.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치아키는 마른침을 삼켰다. 책을 통해 피상적으로 나타났던 명제와 서번트에게서 직접 던져진 질문은 무게가 달랐다. 지나치게, 무겁다. 그것과 조금 전부터 몸을 짓누르던 공포가 결합하여 치아키는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치아키는 호흡을 위해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자칫하다간 반사적으로 거짓말을 할 것만 같았다. 어차피 저 서번트를 상대로 거짓말은 의미가 없다. 그래서 치아키는 그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다른 모든 사람들을 죽이는 일은, 할 수 없었다.



  "오야, 이건 또……."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에서는 즐거움이 묻어났다. 드리워진 그림자에 치아키는 남자가 그녀를 향해 좀 더 고개를 숙였음을 알았다. 남자는 말했다.



  "그렇다면, 그걸 알면서도 당신은 성배전쟁에 참가하겠다는 걸까나?"



  당신보다 훨씬 절박한 소원을 품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비웃음이나 조롱은 없었다. 그럼에도 치아키는 남자의 말이 거의 악몽 같다고 생각했다.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부분을 아무렇지도 않게 찌르는 잔인함. 치아키는 이번 만큼은 서번트의 의중을 파악할 수 있었다. 지금 그가 한 말은 다분히 의도적인 독설이다.

  그러나 치아키는 그가 이은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독설일지언정 사실을 담은 말이었으니까. 치아키는 버텨내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호흡이 가빠지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문득 치아키는 대답을 회피하더라도 서번트가 화를 내지는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모습을 드러낸 이래 그가 단 한번도 기분이 상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 가설을 뒷받침한다. 비록 속내를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그가 지금의 모든 상황을 즐거워하는 건 명백했으니까.

  하지만, 정말로 그녀가 대답을 회피한다면 그걸로 끝이리라. 치아키는 직감했다. 거짓말 역시.
  치아키는 입을 열었다. 그녀를 괴롭히는 온갖 상념 속에서, 치아키는 간신히 단어를 빚어낼 수 있었다.



  "……포기, 못해요. "



  그것만으로도 남아 있는 모든 힘을 다 쓴 것 같았다. 치아키는 완전히 쓰러지려는 몸을 애써 지탱했다.



  "……그래, 그게 당신의 대답이구나."



  답하는 목소리는 냉담할 정도로 조용했다. 그림자가 사라졌다. 서번트가 몸을 일으킨 것이다.
  멀어지는 발소리에 치아키는 모든 게 끝났음을 직감했다. 성배를 위해 마술사의 부름에 응하는 서번트의 입장에서 그녀를 마스터로 인정할 이유가 매우 빈약함은 분명하다. 치아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그녀에게는 마력, 소원, 성배전쟁에 임하는 마음 가짐이 부족했다. 더 절실한 소원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앎에도, 기회를 양보하지 못하는 모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치아키는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 아직. 이렇게 끝날 수는 없었다. 남자에게 무력히 쫓기기만 하다가, 그녀 자신이 소환한 서번트에게 배신당하는 최후라니 너무 비참하다. 치아키는 고개를 들어 서번트를 보았다.

  서번트는 손을 뒤로 돌려 깍지를 낀 채 걷고 있었다. 뚜벅 뚜벅. 움직이는 모양새가 단순하면서도 똑바르다. 서번트는 남자를 향해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그의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기쁨에 서서히 밝아지는 남자의 표정에 호응하듯 서번트의 입술이 호를 그렸다.






  /7.

 치아키는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는 것을 알았다. 치아키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남자와 서번트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상체가 물이 번지듯 붉게 물들었다. 남자는 입을 벌렸다. 하지만 비명은 나오지 않았다. 남자는 피가 솟아나오는 부분을 감싸며 주저앉았다. "욱……."  비릿한 냄새가 뭉실뭉실 풍겨와 치아키는 손으로 코를 막았다. 그 회피는 다시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는 반증이기도 했지만 치아키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치아키는 그저 비명이 나오려는 것을 억누르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눈을 감고 싶은데, 무언가가 억지로 눈꺼풀을 고정한 것처럼 감기지 않는다.

  남자가 물어봤음이라. 서번트가 무어라 대답했다. 서번트의 목소리에 치아키는 소름이 쫙 돋는 것을 느꼈다. 현실과 너무나도 동떨어진 그 목소리에. 내용에. 

   허공에 붉은 물방울이 흐드러졌다. 치아키는 남자의 팔이 사라진 모습을 보았다. 피가 솟아나는 모습이 격류같다. 남자는 어깨를 움켜쥔 채 사형을 기다리는 것처럼 머리를 떨구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의 입에서 왈칵, 붉은 액체가 터져나왔다.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이, 혹은 전혀 다른 곳에 서 있는 것처럼, 서번트는 움직였던 그대로 춤의 한 동작 처럼 돌았다. 크게 회전한 손이 남자의 다른 어깨 옆에 멈췄다.

  하지마.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깨달은 치아키는 외쳤다. 하지만 그녀의 입을 굳건히 막은 손 때문에 그것은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고 허공에 흩어졌다.

  남자는 피하려는 몸짓을 했지만 죽음 앞의 꿈틀거림은 아무런 저항이 되지 못했다. 끔찍한 소음. 남자의 고통성과 핏물이 흥건히 흘러 바닥을 적셨다. 그녀의 손을 자르려 했던 남자이기는 했지만, 치아키는 그가 기절했기를 바랐다. 혹은 지금의 쇼크로 절명했기를. 데굴데굴 굴러가는 나머지 한쪽 팔이 그녀의 소망에 대한 부정 같았다.

  치아키는 결국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차마 일어나지는 못했다. 주저 앉은 채 치아키는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가, 남자의 몸이 둥실 떠오르는 모습에 질겁했다. 하지만 곧 치아키는 서번트의 손이 남자의 목깃을 꾀어내듯 붙잡고 있음을 보았다. 참극에도 불구하고 새하얀, 섬세한 손. 목깃이 팽팽해졌다 싶을 때 서번트는 손을 앞으로 잡아 당겼다. 그리고 놓았다.

  분출한 선혈이 흐드러지며 억눌리고, 힘없는 신음성이 밤하늘 밑에 붉게 빛났다.

  살점과 뼛조각이 흩뿌려졌다. 폭포처럼 뿌려지는 피와 그 사이로 보이는 하얀 목뼈에 치아키는 온몸의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서번트는 다시 손을 뻗었다. 떨어지는 무언가─치아키는 차마 자세히 볼 수 없었다─를 서번트는 가볍게 잡아챘다. 가만히 그것을 들여다보던 서번트는 마치 꽃을 던지듯 손을 뿌렸다.

  목이 떨어진 시체는 그것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남자의 목은 별 다른 환영을 받지 못한 채 땅으로 떨어졌다. 그것은 비인간적인 꿈틀거림을 보여주다가 길게 늘어진 자신의 몸 옆에서 멈췄다.

  섬뜩한 음색 저 너머, 남자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세상과 이별을 맞았다.



  "……."



  치아키는 그제야 입을 막고 있던 손을 천천히 떼어놓았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내려 자신을 끌어안았다. 질식할 듯한 오한이 느껴졌다. 차마 참상과 마주할 수 없어 치아키는 눈을 꼭 감았다. 그러나 그 광경은 망막에 깊게 새겨진 듯 떨어지지 않았다. 춤을 추듯 아름다운 동작. 하지만 그것이 빚은 건 참극. 마치 공포 영화 같은, 아니, 왠만한 공포 영화에서도 과연 나올까 싶은 광경이었다. 아니야. 치아키는 고개를 저었다. 화면 너머의 영화와 달리 방금 일어난 일은 명실상부한 현실이었다. 끔찍하게도.

  역설적이게도 주변은 고요했다. 치아키는 세상이 왜 이렇게 조용한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쏴아아, 바람이 부는 소리만이 귓가에 울린다. 시각이 배제되자 나머지 감각들은 정보를 과장되게 증폭시켜 주인에게 전달했다. 치아키는 그것을 견딜 수 없었다. 그녀는 귀를 막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려면 우선 팔을 풀어야 했다. 치아키는 그럴 수 없었다. 결국 치아키는 눈을 떴다.

  서번트는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그 자신이 저지른 참상에 뒤늦게 참회를 하는 모습 같지는 않다고 치아키는 생각했다. 그럴 것이라면 애초에 저렇게 끔찍한 짓을 저지르지도 않았을 터이니. 마구 떨리는 몸을 꼭 잡은 치아키는 이 상황에서 그녀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도망? 어불성설이었다. 치아키는 처음부터 자신이 그에게서 도망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하물며 그런 광경을 본 다음에서야.

  게다가……. 치아키는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마음 속 한 구석에서는 과정이 최악이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가 그녀를 도와준 셈이라 속삭이고 있었다. 아무튼 이제 남자는 그녀의 령주를 노리지 못할 테니까.

  그런 자신의 생각에 치아키는 진저리를 쳤다. 두 번 떠올리기도 싫은 끔찍한 생각이었다.


  "윽……."


  치아키는 신음했다. 무엇보다, 그 가설들이 전부 맞다고 해도 그것이 곧 그녀 자신의 안전을 보장하지는 않았다. 치아키는 서번트가 남자를 제거(치아키는 자신이 떠올린 단어에 몸을 떨었다)했다는 사실을 곧 그녀를 마스터로 선택했다는 뜻이라고 연결하기 어려웠다. 그는 단순히 쾌락 살인마일지도 모르며, 그냥 그렇게 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남자를 죽인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치아키의 마음 속 냉정한 부분은 고개를 저었다. 서번트의 일련의 행동…… 은 철저하게 합리적이었다. 결과가 참상일지언정.
  그 때 서번트가 그녀를 돌아 보았다. 



  "놀란 것 같네."



  치아키는 당연한 소리를 하지 말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의 기분을 거스를까 무서워서가 아니라 아예 그럴 생각을 떠올리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비록 서번트가 스스로를 보호하듯 감싸 안은 그녀의 모습에 기분이 상한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런 모습은 단 한 조각도 치아키가 공포를 가라앉히는 데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의 속내를 더욱 알 수 없어졌으니까. 서번트의 시선을 받으며 치아키는 자신도 모르게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서번트는 빙긋, 좀 더 깊게 미소지었다. 치아키는 그가 그녀에게 다가오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바로 앞까지 다가온 그는 눈높이를 맞추듯 허리를 숙였다. 그는 말을 이었다.



  "미안해. 당신 같은 여자아이에게 보여줄 게 아니었는데."



  놀랍게도 그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담뿍 담겨 있었다. 목소리 뿐만이 아니었다. 얼굴의 미소 역시 정말로 그녀를 걱정하는 듯한 기색을 띄고 있었다. 쓴웃음.

  그러나 그 모습에 오히려 치아키는 조금 전과는 다른 공포를 느꼈다. 치아키는 그의 행동을 보지 못했다면 자신이 영락없이 속아 넘어갔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깨닫는다면 다행이다.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조차 모를 것이라고 치아키는 확신했다.

  생각이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난 듯했다. 남자의 미소가 조금 바뀌었다.



  "오야, 내가 당신을 속일 거라고 생각해…?"

  "……윽."



  치아키는 손에 힘을 주었다. 손가락이 살을 파고들어 아팠지만 그녀는 거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말했다.



  "다, 다다, 당연한 소리를……."



  서번트는 후응, 하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치아키는 그것이 납득의 의미인지 이해의 의미인지, 그녀에게 실망했다는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크게 뜨인 치아키의 눈을 보며 그는 조곤조곤히 말했다.



  "걱정하지 마. 거짓말은 하지 않으니까."

  "……?"

  "글자 그대로의 의미야. 난 거짓말은 하지 않아."

  "저, 정말로……?"



  서번트는 가볍게 수긍했다. 맹세할 수 있어. 그는 덧붙였다.

  치아키는 반신반의했다. 이 서번트에게 맹세가 의미가 있는 걸까?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아예 모르는 개념에서 답을 이끌어낼 수는 없다. 치아키는 처음에도, 그리고 지금도 서번트의 속내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치아키는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그녀는 물었다.



  "당신은, 누구예요?"



  그가 과연 누구인가, 어떤 사람인가. 본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이름이란 가장 근간에 있는 개념이다. 그것은 상대가 서번트라고 해도 다르지 않다. 그리고 치아키에게 그것은 좀 더 특이한 의미를 갖고 있기도 했다. 그를 불러낸 촉매는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던 보물이었으므로. 그의 진명은 높은 확률로 그녀가 생각한 사람이겠지만, 그래도 치아키는 눈앞의 서번트가 정말로 그 사람일지 알고 싶었다.

  서번트는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모습에 치아키는 초조감이 드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그의 소환자이기는 했으나, 질문에 그가 대답할지는 별개의 문제였다. 그녀의 령주에는 아직 빛이 들어오지 않았다. 계약이 완료되지 않았다는 의미다. 즉 치아키는 그에게 대답을 하라 강요할 수도 없었으며 그도 그녀에게 대답할 의무가 없었다. 따라서 치아키는 긴장하며 서번트를 바라보았다. 그가 과연 이름을 알려줄까?
  서번트는 웃었다.



  "아아, 그러고보니. 이름을 가르쳐주지 않았네."



  서번트의 금빛 눈이 상냥하게 휘었다. 거의 기대듯 고개를 숙이는 그의 행동에 치아키는 몸을 움찔했다. 그렇지만 서번트는 그 이상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 거의 속삭이듯이 그는 진명을 말했다.

  치아키는 얼어붙었다.



  "네……? 정말로?"



  서번트는 미소지었다. 긍정의 의미다.
  그렇지만 치아키는 마주 웃을 수 없었다. 서번트의 정체는 그녀가 나오리라 예상했던 영령과 전혀 달랐다. 맙소사.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지나친 놀람에 치아키의 머릿속에서 공포가 사라졌다. 그녀는 혼란 속에서 믿을 수 없다는 서번트를 바라보았다. 그런 치아키의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서번트는 쿡쿡 웃었다.



  "예상하지 못했다는 얼굴이네."

  "그…… 그야 당연하죠! 어떻게 이 촉매로 당신이 나올 거라고 생각하나요!"



  치아키는 휙 촉매를 꺼내어 서번트에게 내밀었다. 서번트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것을 받아들었다. 재미 있다는 듯 맺혔던 미소에 곧 다른 빛깔이 어린다. 그는 제법 세심하게 촉매를 살피다가 그녀에게 촉매를 돌려주었다. 미소 띤 채 그는 말했다.



  "당신의 말대로야. 이 촉매로는 내가 나올 수 없어."

  "그…… 그렇죠?"



  서번트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상황이 못내 즐거운 듯 하다. 물론 치아키는 전혀 즐겁지 않았다. 그녀는 말했다.



  "그런데 당신이 나왔잖아요! 어떻게 된 거예요!"

  "글쎄……?"



  치아키는 하고자 했던 말을 잊어버렸다. 그녀는 두통이 이는 것을 느꼈다. 눈앞의 남자는 정말이지, 결코, 좋다고 말할 수 없는 서번트였다. 그녀가 가진 촉매로 나올 리 없는(물론 이것에는 즉석 소환을 진행한 그녀의 책임도 적지 않게 있겠지만) 영령에 도통 속내를 알 수 없으며, 소환자인 그녀를 돕지도 않는──

  치아키는 잊고 있던 무서움이 다시 그녀를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분명 그러했다. 그는 소환자인 그녀를, 위기에서 도와줄 생각이 없었다.

  어쩌면 령주를 강탈하려던 남자가 아니라 그녀가 죽은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방조를 통한 간접적인 방법이든 남자의 사인과 같은 직접적인 방법이든…… 이 서번트의 손으로. 치아키는 아직도, 어째서 서번트가 남자가 아니라 그녀를 살렸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의 소환자이기 때문에' 따위의 이유는 결코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치아키는 떠오르는 붉음 가득한 광경을 애써 밀어 넣었다.  그 대상이 자신이 되는 상상은 결코 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이 구체화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치아키는 불쑥 입을 열었다. …그러나 서번트 쪽이 좀 더 빨랐다.



  "어째서 당신이 목표한 사람이 나오지 못했는가, 이건 나로서도 알 수 없어. 소환을 주관하는 건 내가 아니니까. ……하지만."



  서번트는 다시 몸을 굽혔다. 요요한 금빛 눈이 똑바로 그녀를 담는다. 잔잔한 웃음을 머금은 채 서번트는 말했다.



  "확실한 건, 당신이 소환한 사람은 나라는 사실이야."

  "……."



  치아키는 심장이 두방망이 치는 것을 느꼈다. 미려한 얼굴에 매료되어서가 아니라 두려움 때문에. 이것이 계약에 대한 마지막 관문이다. 치아키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하지만 치아키는 쉽사리 입을 열 수 없었다. 계약을 나누기에는 이 서번트는 위험했다. '서번트'로서라면 믿지 못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인간으로서는? 치아키는 장담할 수 없었다. 눈 앞의 서번트는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지 않고도 사람을 속일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며, 그는 그 방면으로 너무나도 특출해 보였다.

  그리고 그 이유 때문에, 치아키는 계약을 나누지 않겠다는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는 그녀를 죽이지 않겠다고 말한 적이 없다.

  물론 계약을 거부한다고 그가 곧바로 그녀를 죽이리라는 법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치아키는 거기에서 조금도 희망적인 요소를 관측할 수 없었다.

  ……어차피, 그녀는 성배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이 도시에 왔다. 서번트가 말했던 대로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하지 못하는 모순을 품고 있음에도. 다른 사람이 본다면 터무니 없다 말할지도 모르는 소원을 위함에도. 그녀는 성배가 필요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치아키는 다시 눈을 들었다. 서번트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치아키는 굳어버린 듯한 입을 애써 열었다. 



  "……좋아요. 당신과…… 계약, 하겠어요."

  "아아."



  서번트는 웃었다. 어느 때보다도 온화하게.
  그는 정중히 치아키의 왼손을 잡았다. 그리고 입맞춤했다.



  "윽……!"



  그제서야 비로소 흐릿했던 문양에 빛이 떠올랐다. 그것은 문양을 붉게 물들이고, 달아오르게 했고, 참기 어려운 아픔을 가져왔다. 손등이 타들어가는 듯한 통증에 치아키는 신음했다. 그녀는 곧 눈앞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맹세할게. 당신의 힘을, 곧 나의 힘으로."



  당신이 먼저 배신하지 않는 한, 나는 당신을 적대하지 않아. ……소중한 나의 주인. 스산할 정도로 다정한 미성을 마지막으로, 치아키는 의식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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