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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이어져 있다. 적어도 소녀에게는 그랬다.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갈 수 있었고, 무엇이든 알 수 있었다. 꿈 속에서도, 현실 속에서도. 그런 그녀의 기묘한 취미 중 하나는, 정처 없이 꿈속을 헤매이는 것이었다. 곤히 눈을 감은 그녀의 모습은 마치 깨지 않는 꿈을 꾸는 듯 보이겠지만, 그녀는 사실 그리 잠을 깊이,길게 자는 사람은 아닌 것이었다.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행복한 꿈을 꾸기에는, 그녀는 듣는 것이 너무 많았고─사람뿐 아니라, 악마, 신, 천사, 요정, 심지어 동물과 숲의 식물들까지로부터─ 생각하는 것이 너무 많았으니까. ...아니면, 그것은 그저 그녀 마음이 바라는 것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비록 이 궁성 안에 자리잡은 인형처럼 나갈 수 없지마는, 이 세상 너머 어디까지고 가 보고, 그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 바라온 어린 시절부터의 자그마한 바램을, 비록 꿈으로나마 이룰 수 있도록.
하여, 그녀는 지금도 어딘가에 서 있었다. 어디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녀의 땅, 그곳의 것들보다 조금 더 묽은 녹빛, 조금 더 넓은 잎의 나무가 자리했고, 주변은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인 양 고요했다. 전란 후, 혹은 어떠한 불상사가 만든 기분 나쁜 조용함이 아닌, 평온함. 소녀는 가만히 발을 내딛어 보았다. 얇은 샌들 밖, 보드라운 발끝에 가볍게 닿는 촉촉한 흙은 폭신하고도 따스하였다. 소녀가 발을 디디는 곳마다 마치 갓 이슬비가 지난 듯 꽃도 나무도 한 모금 더 싱그러이 피어나, 소녀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그녀는 천천히, 가만히 걸음을 옮겼다. 요정의 노래는 들리지 않았다. 아아, 그들이 사라진 세상인 것일까. 그녀는 문득 생각했다. 그것은 조금 슬픈 일이었다. 그녀의 시대, 신이 말씀하시옵고, 다른 땅에서는 그들의 신과 인간이 어울리는 곳에서는 요정도 숲도 모든 것이 사람과 함께 할 수 있었지만, 그런 세상에서도 그녀는 어쩐지 깨닫고 있었다. 곧, 사람들은 요정들과 함께 살 수는 없으리라고. 어쩌면, 그 이후로 오랜 시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면 숲도 동물도 떠나버릴 지도 모르리라고. 그리고 그들은 모든 것을 잃고서야 진심으로 깨달으리라. 그것이 소녀에게는 울고 싶을 정도로 슬픈 것이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녀는 진심으로 바랐고 또 믿었음에도, 그렇게 상처 투성이인 채 끌어안는 미래라면 그저 간절히, 그 순간을 넘어 다시 그들이 함께하기를 기도할 뿐이었다.
소녀는 문득, 그녀에게 낮게 드리워진 서늘함을 눈치채었다. 살짝 고개를 드니, 외로이 서 있는 건물이 보였다. 그녀의 땅과는 전혀 다른 모양새와 전혀 다른 재료로 만들어진 것. 잠시간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보던 소녀는, 곧 천천히 발을 옮겼다. 저 곳이 어떠한 곳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곳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소녀는 그러한 생각이 떠오를 때에는 곧 그대로 옮겼다. 신께서 직접 목소리를 들려주실 때도 있었지만, 역시 이런 식의 말씀이야말로 조금 더 자주 겪는 일이었다. 무엇, 대부분의 경우는 소녀 혼자서 생각하고 또 답을 내려야 했었지만서도.
소녀는 이슬 맺힌 새싹 싱그럽게 고개 내민 땅을 사붓 디디며, 조심스럽게 건물의 문을 열었다. 아주 낡은 듯 삐걱이며 우는 바닥과, 조금 빛이 바랬음에도 어슴푸레한 새벽녘 햇살을 찬연히 내리비추는 색색의 창문. 그 색 사이로 들어오는 어렴풋한 햇빛이 부드럽게 눈이 부셔, 소녀는 살짝 눈을 좁혔다. 근처의 작은 창들은 열린 채, 자그마한 끼익 소리와 함께 살랑이는 바람을 들여보내고 있었고, 소녀의 등을 덮은 달빛과도 같은 은사가 가벼이 가벼이 춤을 추었다. 어슴푸레하지만, 아름답고, 평화로우면서도 외롭고, 조용하면서도 따스한 그 곳에서, 소녀는 가만히 서 있었다. 이 곳은 무엇을 하는 곳일까. 소녀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다가 이윽고 낡은 서책 몇 권이 놓인 것을 찾아내었다. 그 옆에는 그녀가 그녀의 시대에서 본 것과 비슷하게 생긴 , 악기로 보이는 무언가.
"... .... 성가. ...성경. 교본."
본 적도 없는 문자였으나, 소녀는 읽을 수 있었다. 아마, 그 문자의 '이름'은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되겠지만, 문자 자체를 읽고 해석 - 기분은 오히려 '해독'이라 하는 게 가까웠다 - 하는 것에는 어떠한 문제도 없었다. 조금 어색한 듯, 소녀는 새하얀 손끝으로 조심조심 종이를 넘겼다. 아. 소녀는 가만히 숨을 멈추었다. 찬가였다. 신을 경배하는. ...안타깝게도, 상당히 빛이 바래고 또 문질러져 반 정도는 알아볼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이 서책의 주인은 어떻게든 음을 이어보려 애썼던 것일까. 소녀는 눈을 내리깐 채 가만히 손가락으로 악보를 덧씌우듯 만져보았다.
소녀는, 조금 느릿하게, 마치 누군가 움직이는 듯 악기로 손을 가져갔다. 이상한 일이었다. 소녀는 '은총 가득한 마리아'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그저, 그저 노래할 뿐이었다. 이것이 성가聖歌라면. 하늘을 향해, 저 위에 계신 분을 바라보며. 그 분께 들리길 바라며, 그리고 소중하고도 소중한 어느 세상 너머 그녀의 사람들과, 그리고 이 땅의 숲과 사람들을 위해. 그녀 자신의 모든 마음 오롯이 담아내어.
희미한 아침 해에 날개짓하던 새들이 숨소리를 죽였고, 산들산들 서늘하게 흐르는 바람은 그 발을 멈추었다. 지붕 위 석조상에 숨어든 작은 꽃씨가 하늘하늘 나부끼며 창가에 내려앉고, 기지개를 펴던 고양이가 가만히 숨어들었다.
마치 여름날 시내의 흐름처럼 이어지던 손끝이 천천히 멈추었다. 꿈에 젖어들던 작은 아기새는 작은 깃털 하나 남기곤 날아올랐고, 소녀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아직도 이른, 검푸른 하늘 아래 유독 따스한 금빛 눈동자가 선선히 고개를 돌렸다. 비칠 것처럼 투명한 그 빛에, 다소 가는 인영 하나가 담겼다.
01/
"나오겠느냐."
"...그, 방해하려던, 것은 아닙니다. 너무나, 아름다워서... 만약 제가 끊은 것이라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아아니. 그다지. 이 곡을 노래한 것 또한 아니었으며, 너를 눈치채는 일은 없었느니라."
소녀는 물끄러미, 천천히 걸어 나온 사람을 살피었다. 다소 여윈 듯 왜소한 듯 가녀린 체격, 아직 앳됨이 남아 있는 금빛 머리칼의 소년이었다. 열 셋이나 되었을까 싶음직한 모습에, 소녀는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어딜 봐도 이 곳은 '예배당'의 일종으로 보였으며, 또 동시에 어딜 봐도 소년은 귀히 자란 생김이었다. 고이고이 여겨지며 사랑받고 자란 모습이 눈에 그려지는 그런 아이였다. 허나 입고 있는 것은 좋게 말하여 수수한 차림새. 그녀의 기준이 아니어도, 겨우 그리 말할 정도의 모습이었다. 전란이나 무엇인가로 가족을 잃고 신의 집에 거두어진 아이인가, 생각했었으나, 소녀는 곧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것이 어떠한 일이든, 그녀가 저 소년에 대해 어떠한 사람인지 아는 데 필요한 것은 아니니까.
"너는 이 곳의 사람이더냐."
작게 네, 하는 소리와 함께 끄덕이는 소년. 소녀는 여전히 금빛 눈을 사붓 내려깐 채 말을 이었다.
"고향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구나."
움찔. 소년의 작은 어깨가 일순 흔들린 것을 소녀는 놓치지 않았다. 연유는 모르나, 스스로 다짐하고 제 발로 걸어들어온 것은 아닌 듯 싶었다. 소녀는 서서히 눈꺼풀을 올렸다. 새벽 하늘이 빛을 머금듯, 금빛의 눈동자가 마치 별처럼 반짝였다.
"고향이 그립지는 않느냐."
"...아니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참을 수 있습니다."
"...그렇느냐. 강한 아이로다."
소녀는 진심을 담아 중얼거렸다. 아니, 그녀가 거짓을 고하거나 텅 빈 허례를 건네는 일은 없었지만. 소녀는 물끄러미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에 대답하기 위해서인지, 조금 더 가까이 온 소년을 마주보며, 소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소녀의 눈보다 조금 더 진한, 마치 꿀타래를 녹여 놓은 듯, 혹은 땅 속 깊은 곳 호박 보석을 박아놓은 듯한 금빛 눈동자가 조심스레 일렁였다. 소녀 또한 열 여섯이나 되었음직한 모습이었으나, 말투도, 몸에 휘감은 공기도, 목소리에 담긴 것도, 소년의 그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저는 강하지 않습니다."
"스스로를 다잡는 것이야말로 끝이며 시작이거늘, 겸허한 말을 하는구나."
"....."
소년은 조금 놀란 것인지 어떠한지, 잠시간 답이 없었다. 소녀는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조금 생각할 뿐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어째서 이 소년은 그녀에게, 벌써 수 년 째 가슴 깊숙이 묻은 후, 꺼내지 않았던 생각을 다시 하게 만드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소년을 탓할 일은 아니었다. 그저, 문득, 문득 조금, 아주 조금 닮았다 느낀 것이었다. 감싸안긴 공기가, 조금 떨리면서, 살짝 아래를 향한 채 곱게 휘어지는 눈이. 일순 유약하게 들릴지언정, 흔들림 없이 곧고 차분한 목소리 속 감정이.
"...아니오."
소년은 소녀의 말이 잘못되었다 말하려는 듯 싶었다.
"만약 제가 정말 강했다면...
... 죄송합니다. 이 얘기는, 할 수 없어요."
소녀는 그것에 어떠한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감정이 바뀔 이유가 없었기에, 그저 묵묵히 소년의 말을 들을 뿐이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눈꽃 같은 머리칼만이 사락이는 소리를 방 안에 채울 뿐이었다. 소녀는 천천히, 약간은 느릿할 정도로 입을 열었다.
"...그렇느냐. 허나, ... 네가 하려던, 할 수 있었을 거라던 일이 무엇이던, 그것만이 "강함"은 아닐 것이니라."
"...."
사실이었다. 적어도 소녀의 기준에서는. 살아 있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사람은 충분히 강하고, 또 존경해야 마땅할 존재였으니까. 아무리
분노하고, 절망하고, 실패하고, 슬프더라도, 그들은 살아나가니까. 끝의 끝에서, 포기하지 않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인간을 강하다 여기는
소녀였기에, 그녀는 태연히도 소년의 말에 대꾸할 수 있었다. 허나 그런 소녀의 말이 조금은 예상 외였던 것인지, 소년은 또다시 잠시 말을 잃었다.
"당신은 상냥하신 분이군요."
"그다지. 나는 그렇게 선한 사람은 아니니라."
"...?"
이것이야말로 소녀에게 있어서는 예상 외의 말이었기에, 그녀는 곧바로 소년의 말을 부정할 수 있었다. 아침 하늘 같은 눈을 곧게 마주보고,
소녀는 흔들림 없이 말을 받았다. 그녀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사실이었다. 그녀가 지금 그녀의 자리에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비탄을 무시했고
얼마나 많은 죄를 타인에게 짓게 하였으며 또 그 발은 어떠한 피에 젖어들었는가. 그녀는 결코 착한 사람 따위는 될 수 없는 존재라고 스스로를
규정하고 있었다. 허나 이것은, 소년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또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보였던 듯 싶었다. 고개를 살짝 갸웃 기울인 소년은 금빛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물었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는겁니까?"
"내가 해 온 모든 일이 있기에. 만약 누구인가 선하다 칭송받는다면, 신민이야말로 그에 걸맞도다.
땅을 가꾸고 괭이를 담금질하는 백성들이야말로 선하고도 귀한 자들이니라."
아, 그녀는 또 이상한 말을 해 버린 것일까. 소년은 눈을 두어 번 가볍게 깜빡인 후, 나이에 걸맞는 앳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당신은 모든 백성보다 낮은 이라는 뜻인가요?"
"신 아래 백성, 그 아래에서 그들을 받드는 것이, 누구보다 아래에 서야 할 나의 일이로다. 맞는 말이구나."
"...그렇군요."
소년은 잠시,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이어진 소년의 질문에, 소녀는 먼저 그것은 그녀 한 사람의 길이며 믿음이라는 것을 일러 두어야 했다. 그녀만이 옳다고 단정짓는 일은 없어야 마땅하므로.
"백성을 받드는 존재... 그것은 무엇인가요?
신의 사자, 라면 다르게 말하셨을테니 그렇게 생각되지 않습니다만..."
"백성을 받드는 것이 무엇이냐,라...
...그것에 대해서는 나만이 옳다고는 말하지 않겠노라."
"...?"
"허나 나는 그들이 웃는 것이 기쁘고, 그들이 행복하길 바라고. 이 땅에 태어나어 즐거웠다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바라고,
그것이 나의 기쁨일지니 그들을 "받드는" 것이니라."
알고 있다. 누구보다도 행복할 듯 싶었던 자신의 부모가 어떠한 고통을 겪었는지, 실감은 할 수 없으나 지켜볼 수는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하여 바란 것이다.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그들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지혜를,
부디 주시옵소서. 태어나서 돌아갈 때까지 매 순간 순간을 행복하게 살도록 해 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하다못해 한 끼
밥을 가지고도 다투고 상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일진대, 그럴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신의 곁 낙원의 땅이었겠지. 하여 바랬다.
적어도, 아무리 다투고, 괴롭고, 힘들지라도. 문득문득, 해질녘 노을을 보며, 뛰노는 아이를 보며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기를. 신의
품으로 돌아가기 전에, 그래도, 나쁘지는 않은 삶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기를. 그것만으로도 그녀에게 있어서는 다시 없을 영광이며
또 기쁨이 되니.
"애당초, ...그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없었을 테니까."
아아주 어렸을 적, 작고 작은 아이였을 때. 병에 걸려 죽어가던 때 고비를 넘기자 누군가 울며 해 준 말이 생각 났어. 눈물
젖은 얼굴로 꼭 끌어안으며 해 준 말이 떠올랐어. 살아 주어서 고맙다고. 누군가에게, 지극히 그저 당연한 이유로 손을 내밀었을
뿐인데 그는 울면서 웃어주었어. 그 웃음이, 그 고맙다는 말 한 마디가. 지금의 그녀 자신을 만들었다는 것에 그녀는 단 한 치의
의심도 미혹도 가지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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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시종은 걷고 있었다. 길고 길게 이어진 회랑성의 복도을, 뚜벅. 뚜벅. 뚜벅. 촛대에 꽂은 촛불 하나만을 들고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걸었다. 저 너머 하늘에서는 별들이 쏟아졌지만, 소년이 걷고 있는 회랑은 캄캄할 뿐이었다. 들어가고 또 들어가, 꺾고 또 돌아, 걷고 걸어 회랑 끝 깊숙한 곳 어딘가에서 살며시 발을 멈추었다. 발걸음을 멈추고, 뒤집어 써 머리를 가리던 천을 내리고서야 소년의 모습이 눈에 들었다. 달의 여신이 사랑하던 아이마저 잊어버린 채 넋을 잃고 볼 것 같은 모습이었다. 밤바람에 나뭇잎을, 덤불을 뒤흔드는 바스락 소리가 마치 요정의 키득거림처럼 들리는 밤. 별을 녹인 소년의 머리카락만이 지상에 내린 달처럼 눈부신 백금으로 빛났고, 선명히 붉은 눈동자는 타들어가는 촛불에 태양 같은 오렌지빛이었다.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 유일하게, 찬란하다, 는 말이 어울릴 법한 소년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벽에 손을 디디었다. 정확히 말해서는, 문에.
삐그덕.
아주 희미한 떨림과 함께, 천천히 문이 열렸다. 달빛이 깃든 방 안, 가장 처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커다란 침대였다. 하얀 이불이 폭신하고 부드러워 보였다. 소년은 표정의 변화 없이 아주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규중의 밀회 따위로는 결코 보이지 않았다. 애당초 소년은 아직 겨우 십 대 초반이었다. 소년의 나이에 걸맞는 곱상한 외모와는 달리 평지풍파를 전부 겪은 눈을 하고 있었을지라도. 무엇보다도, 소년이 가까이 다가간 침대 속에 파묻히듯 곤히 잠든 것은, 숲 속의 공주가 아닌 여서일곱 살이나 겨우 되었을까 싶은 작고 작은 아이.
소년의 머리칼이 달빛의 백금이었다면, 여자 아이의 머리카락은 햇빛의 그것이었다. 그것도, 아침의 옅은 투명함, 낮의 찬란함, 타오르는 해질녘의 강렬함까지 모든 색이 갖추어진 금빛이었다. 포동포동한 두 뺨에는 아이 특유의 복숭앗빛 홍조가 사랑스러웠고, 우윳빛의 피부는 보드라워 보였다. 마치 신의 아이 같은 모습이었으나, 소년은 여전히 - 평지풍파를 전부 겪은 눈을 - 살짝 게슴츠레하게 뜬 채, 미간을 한 번 좁혔을 뿐이었다.
"너, 자고 있는 게 아니지요."
"......"
대답은 없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몰랐다. 누가 보기에도 소녀는 곤히 잠든 것처럼 보였으니까. 어떤 낙원의 꿈을 꾸는 것일지 궁금해 질 정도로 달콤한 잠을.
"...착각이었나."
여전히 아이는 세상 모르고 잠든 채였다. 소년은 잠시 생각하고는, 빙그르르 뒤를 돌았다. 촛대의 불꽃이 사라지고,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10. 9. 8. 7. 6. 5. 4. 3. 2. 1. 불과 10 초 전까지만 해도 곯아 떨어져 있던 여자 아이가 반짝 눈을 떴다. 여름날 새벽, 가을 낮의 하늘과 같은 녹빛 푸른 눈동자. 사람이 홀릴 듯 빠져들 눈동자엔 이미 단 한 점의 졸음도 남아 있지 않았다. 두리번 두리번. 양 옆으로 고개를 저어 주변을 둘러본 여자아이는, 장난 꾸러기 요정마냥 씨익 미소지었다. 오늘도 계획대로, 무사 통과 만사 태평!
그 자그마한 체구에 비하면 커다란 침대에 폭 파묻힌 채, 소녀는 한 번 몸을 빙글 돌렸다. 굴렸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엎드린 자세로, 여자 아이는 그 작은 머리를 뉘이기엔 너무나 큰 베개 밑으로 손을 쏙 집어넣었다. 뒤적거리는 듯한 움직임을 보였고, 여자 아이가 꺼낸 것은 한 권의 서책이었다. 그것을 서책이라고 해야 할지, 그냥 '문헌'이나 '기록물'이라고 표현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가장 정확한 표현은 '둔기'가 맞겠지만──어쨌든.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그리고 아이는 침대 끝으로 데굴데굴 굴렀다. 아슬아슬, 떨어지기 직전 몸을 멈춘 아이는 자신의 몸만한 크기의 서책을 활짝 폈다. 자그마한 손이 더듬더듬 글자를 손으로 짚었고, 어렴풋한 달빛에 시야가 밝아졌다. 촛불을 켜면 간단한, 더 보기 쉬울 일이었겠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작은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달빛 아래 엎드린 여자아이는 눈 앞에 펼쳐진 이야기 속에 빠져들었다. 불과 삼 분 가량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어쩐지, 주변이 조금 환해진 느낌이 들었다. 조금이 아니었다. 이런, 벌써 해가 뜰 시간인가? 시간은 그렇게 빨리 흐른 걸까? 순간, 조금 빛이 흔들린 느낌이 들었다. 깜짝 놀란 아이는 휙 고개를 들어, 창 밖을 내다보았다. 아직 빛 한 점은 커녕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과 흩뿌려진 별들. 영리한 아이는 상황을 이해하고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아이는 고개를 돌렸다.
"에에에에에엘샤웨일스 지방(영국)에서 중세에 존재했다는 여성용 이름!"
"... 그렇게 부르지 말아 주었으면 합니다만, 계집애 이름 같습니다."
"그그그그그게 지금 나는 그저 조금 더워서..."
"지금이 말입니까?"
엘샤, 라 불린 백금발 소년은 여전히 무심한 듯한 붉은 눈을 향한 채 변함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직 변성기가 오기 전, 소년의 높은 미성이었지만 그 어조는 놀랍도록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여자아이는 지금이 가을이란 것을 깨달았다. 낮은 조금 따뜻할지언정, 밤은 결코 '덥다'라고 할 수는 없는 날씨였다. 남쪽 바다색 눈동자의 아이는 그야말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 그, 그. 자다 보니까.. 이불이 온 몸에 둘둘 말려서... 우우..."
"...그렇습니까? ...지금 저 쪽을 보면 결코 그랬었다 생각되지는 않습니다만."
여자 아이가 누워 있었던 침대. 유독 크고 넓던 그 침대의 반대편에는 또 다른 아이일종의 대리인.매우 귀한 아이이므로 전쟁 중인데다 스코틀랜드나 아일랜드로부터의 위험의 가능성도 있는 상황에서 만약을 위해 함께하게 둔 그나마 비슷한 용모의 아이로, 말동무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아까 여자아이의 새근거림과는 달리, 좀 더 쌕쌕거리는 숨소리였다. 머리 길이는 비슷했고, 색은 찬연한 아이의 금발보다 좀 더 탁하고 어두운 애쉬 블론드...로 보였지만 저 쪽은 촛불의 빛이 거의 닿지 않은 채 어두웠기에 확신할 수는 없었다. 이 쪽도 자고 있었기에 눈동자 색은 보이지 않는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아이야말로 온 몸에 이불을 둘둘 휘감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윽."
"너는 거짓말이 정말로 서투릅니다. 차라리 하지 않는 게 나을 정도로. 뭐, 어떤 것도 악의가 없는 것이란 사실은 그나마 낫습니다만. 그 정도면
어린 아이의 귀여운 둘러대기 정도로 대부분 생각할 테니까요."
"우우, 엘샤도 나보다 겨우 다섯 살 많으면서...!"
"..... 쉬잇. 너, 그녀를 깨우고 싶은 겁니까?"
"?! ...아,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추욱, 여자 아이의 양 어깨가 비 맞은 새끼 고양이처럼 쳐졌다. 조금 시무룩한 표정이다. 그것을 보고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엘샤라는 소년은 침대 옆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 치 흐트러짐도 없는 우아한 몸놀림이었지만, 의외로 그럴 때는 시원시원한 동작이었다.
"...엘샤...?"
"발."
"..발..?"
"두 번 말하게 할 겁니까. 빨리 내밀어 보세요."
"아, 알겠.. 그런데 어째서..?"
"아까 긁히지 않았습니까. 정말이지 곤란한 일만 벌여놓는군요. 거기서지루한 가정교사에게서 몰래 도망칠 줄이야."
"하지만, 시킨 일들과제들과 레이디로서의 연습은 전부 다 끝내 놨었고.. 그건 지루하고... 전부 다 다시 한 번 확인까지 했고..."
"전부 다 끝냈더라도 해야 하는 건 몇 번이고 다시 봐야 하는 겁니다. 너, 별스럽게 꼭 그런 것에서만 호불호가 너무 극심해요. 다른 건 다 아무런 불평도 없이 머리가 조금 이상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긍정적 낙천적으로 보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그만. 뭐, ..그마저도 하지 않는다면 네가 네 나이로 보이는 건 외모 정도 밖에 없을 테니까. 그렇지만 편 들어 주는 것도 이번 뿐입니다."
"...감사를 말한...윽,"
"아주 새빨갛게 다 까졌군요. 정말이지, 내가 네 엄마로 보입니까?"
"그렇지만 보기보다 아프지는 않... 엄마?"
이런. 엘샤는 작게 혀를 찼다. 천하의 소년조차도 종종 잊어버릴 뻔한 사실이었지만, 소녀는 묘하게 애어른스럽게 침착한, 아이답지 못한 면이 있었다.남들의 위에 서면서 책임질 것도 누릴 것만큼이나 많다는 걸 알고 있으므로 간간히 보여주는 뾰로통한 모습 같은 것을 제외한다면. 그렇기에 엘샤 또한 그녀의 여러 조금 '특별한' 점들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무심코 넘겨버릴 뻔한 적이 많았다. 엘샤 정도로 매사에 능숙하고 착 가라앉았다 할 정도로 침착한 사람마저 그럴 정도였으니,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볼 지는 뻔한 이야기였다. 말투야말로 어린 아이의 것이었을지언정, 사고 방식이나 행동은 전혀 그렇지 않다.
"──실언이었습니다. 부디 잊어주십시오.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니. 전혀.. 아무렇지도 않았다만."
소년의 달빛 머리칼이 가만히 눈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제서야 달빛으로 좀 더 밝고 눈부시게 보였던 눈동자의 색이 또렷이 보였다. 적색이 아닌 자색. 자수정 같은 보랏빛의 눈이었다. 그 눈으로 소년은 빤히 아이를 쳐다보았다. 묵묵히, 말 없이.
"그런데 엘샤.. 그런 느낌인가?원전의 에드워드는 어릴 적 우드스톡 궁에서 부모와 떨어져 자랐으며, 같이 지냈다 해도 필리파 왕비는 계속 임신중이었으므로 있어 주기는 어려웠다. 더하여 그녀는 임신중이 아닐 때에는 전장 근방에서 국민과 군을 격려하는 일이 많았다. "
그것 말이야, 그거. 아이는 더 이상 설명을 덧붙이지는 않았으나, 엘샤는 그 의미를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소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눈을 내리깔고는 중얼거렸다.
"...나도 어렴풋이 밖에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 그런가."
"그러니까 너도 조금은 신경 쓰는 편이 좋습니다. 네가 우수한 건 알고 있지만 참아야 할 건 참아야 하는 법입니다."
소녀는 대답이 없었다. 사실은 아이도 알고 있었다. 몇몇 행동에 대해서라면 동년배의, 같은 상황에 처한 다른 아이들에 비해 그녀는 훨씬 더 자유롭다는 것을.살 수 있는 것들은 전부 다 살 수 있었고, 딸을 매우 예뻐한 부왕 덕(i.e. 태어났을 당시 모피에 값비싼 요람 등을 공수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공주 근처에 다른 남성의 필요 이상 접근을 차단하는 '법률'을 만든 적이 있다, 에드워드 3세는. 더하여 영국의 풍습 자체가 본토보다는 비교적 격식이 덜했으므로.)에 다른 나라의 공주들보다는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바다란 것은 한없이 넓게, 광활하게 퍼져 나가는 것이라고 한다.바이킹한 때 영국에 있었던 노르만의 기록에서 간접적으로. 또한 바다를 본 적 없는 이 때의 마르그리트에겐 도버 해협조차 그리 보였을 것."
"──세상의 끝에는 얼음의 땅이 있다고 하더군.이미 러시아나 북유럽과도 나름대로 적지만 교류가 있었던 시대이므로"
"──저 먼 곳 어딘가에는 화려한 오색의 새가 날개짓하며,콘스탄티노플이나 그 쪽과 이탈리아를 견문했던 사람들의 말"
"──동쪽으로 계속 간다면 태양신의 궁이 나오고,그리스 신화의 파에톤 이야기"
"──해가 가라앉는 서녘으로 향한다면 별이 뜨는 곳에 닿을지도 모른다."
"자유로운 하늘 끝에. 세상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나는 보고 싶어. 어떤 것이 있을지 나는 알고 싶어.왕족이며 그것도 여자아이이므로, 시집 가기 전에는 궁 밖으로 나가는 것도 여의치 않는다아이는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곧게 소년을 마주보았다. 비취색 투명한 눈동자가 한없이 깊었다. 소녀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더 이상의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 이번에도 그것으로 충분했다. 별이 빛나는 밤하늘 아래에, 자안의 소년은 다시 한 번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묘하게 마음에 걸리는 쓴웃음 같은 미소가, 순간 입가에 스쳤다.
"자, 다 되었습니다."
"아, 응!"
"...하아."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소년은 몸을 움직여 침상에 기대었다. 한 쪽 다리는 뻗고 한 쪽 다리는 위로 굽힌 채 그 무릎에 살짝 팔을 올려 턱을 괴었다.여자 아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햇빛 머리카락이 밤바람에 조금 멋대로 춤추어 이마가 흐트러졌다. 고개를 살며시 갸웃하며 아이는 물었다.
"...엘샤?"
"...네가 잠들 때까지 여기서 감시할 겁니다."
"!!! ──역시 엘샤도 정말 좋아한다!"
"그러니까, 멋대로 그렇게 생각하지는... ...뭐, 됐습니다. 내가 포기하는 게 낫겠군요. 그렇지만 목소리는 좀 낮추십시오."
"에헤헤."
여자아이는 빙글빙글 도는 표정으로 웃었다. 소년이 잠을 잘 것을 종용하는 것이 아니란 사실쯤은 아이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에둘러 말하는 허락이었다. 거기에, 어두운 곳에서 달 아래에서 보지 말고, 제대로 촛불이 환하게 켜진 곳에서 하라고. 여전히 턱을 괸 채, 소년은 흘끗 아이를 보고는 휙 시선을 돌렸을 뿐이었다. 여전히 생글거리는 표정으로 아이는 다시금 한참간 읽던 것에 몰두했다.
"...샤? 엘샤, 지금이 언제쯤인가?"
"...어디 보자... ..이제 곧 날이 바뀌겠군요."
한동안 조용히 있던 아이는 문득 소년에게 물었고,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를 것에 잠겨 있던 소년은 하늘을 가만히 보곤 대답을 돌려주었다. 아이는 그에 환한 얼굴로 팍 몸을 돌렸다. 보송보송한 이불이 펄럭, 하는 소리를 냈고 아이의 긴 머리칼 끝자락이 엘샤의 귓가를 스쳤다.
"그럼 이제 곧 엘샤가 이 곳에 온지 이 년이 되는 날이로구나!"
".... .... 너는 또 그런 걸 계산하고 있었던 겁니까. 정말이지 할 일도 지지리 없군요."
"하지만 하지만 기쁜 날이 아니더냐! 앗, 잠시..."
소년이 깜짝 놀라 받을 새도 없이, 아이는 깡총 침상에서 뛰어내리곤 그 밑으로 반쯤 기어들어갔다. 더듬더듬, 무엇인가를 찾는 듯 싶었다. 곧, 아이가 꺼낸 것은 작은 상자. 해바라기처럼 웃으며 아이는 상자를 내밀었다.
"──선물이다, 에-르-샤!"
"... 뭡니까, 이건? ....,"
소년은 아주 약간 당황한 듯한 얼굴로 엉겁결에 상자를 받았다. 안에 든 것은 서툰 솜씨로 만든 과자. 모로 봐도 전문가의 작품은 아니었다. 소년은 곧바로 이것이 무엇인지, 누가 만든 것인지, 언제 만든 것인지를 알아차렸다.
"──이것 때문에 아까 도망쳤던 겁니까."
"어어어어어떻게.... 으, 으윽. 아,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보지 말아라!"
"...하아, 입 밖에 낸 사실은 지킨다고 믿습니다. 그보다, 시간 낭비에 기력 낭비를 했군요. 괜한 짓이었습니다. 너는 도대체가... ...그보다, 혼자 숨어들어서라도 한 겁니까?"
"음? 그, 그건 아니..."
"우우우우, 둘 다 치사해!!!!!"
무심코 너무 크게 외쳐버렸을까. 기절한 듯 잠들었던 벌꿀빛 머리의 소녀마저 잔뜩 삐친 목소리로 분한 듯 소리치며 깨어났고, 엘샤라 불린 소년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혀를 찼으며, 햇빛 머리칼 여자아이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소년은 한숨을 내쉬며 바락 바락 날뛰던 여자아이의 입에 상자에서 꺼낸 과자 한 조각을 냉큼 물려주었고, 곤란해하던 아이의 입에도 쏙 넣어주었다. 오물거리는 소리, 오독거리는 소리만이 방 안에 찼다. 다소 벙찐 표정으로 멀뚱멀뚱 눈을 마주치던 두 아이는 이윽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고, 질린다는 듯 미간을 좁히면서도 결코 싫어하는 모습만은 전혀 보이지 않던 소년이 잔소리를 내뱉으며, 그렇게 시작 되는 작은 방의 비밀 연회.
그리고 이른 새벽. 깜빡 잠이 들었던 소년이 눈을 뜬 후 제멋대로 나뒹군 채 잠들어 있는 작은 아이들을 보고 한숨을 쉬며 이불을 덮어준 것은 또 다른 이야기. 그렇게, 언제나와 같은, 상냥한 해가 고개를 들며 서서히 감싸안는 아침이 찾아온다.
흠칫.
마르그리트는 깨어났다. 무심코 깜빡 졸았던가. ...아무리 라고 해도, 이 정도로 속 편하게 행동한다니 희미하게 자조하는 표정을 머금었다. 그럼에도 그 표정이 따스했던 것은 완전히 잊고 살았던 꿈을 보았기 때문일까. 비취빛 눈동자가 조금 묽게 촉촉했다. 그러고보니, 벌써 이 시간인가. 자정이 다 된 시간이었다. ...감독관에게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어 찾아왔다, 기다리는 새 조금 벽에 기대어 앉아 쉬었을 뿐이건만. ...하늘의 별은 이미 도시의 불빛의 그림자에 가려져 빛을 잃었지만, 그녀가 생전에 보던 것과는 조금 다른 위치였지만, 그럼에도 같은 하늘에서 같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가장 어두운 때는 해가 뜨기 바로 전.
아무리 깊은 어둠도 언제인가 끝나는 법.
마르그리트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는 몸을 일으켰다. 곧, 몇 시간 후면 이 도시에도 새벽이 내리겠지. 이 시간에 방문은 무리이며, 또 반드시 당장 들어야 할 종류의 것은 아니었으니. 재방문은 추후로 미루어도 될 것이었다. 부드러운 금발이 벚꽃잎인 양 바닥에 흩날려 내려앉았다. 읏차, 하며 가볍게 몸을 사뿐 일으킨 마르그리트는, 먼저 근처에 있을 칼을 찾아 돌아가기로 했다. 그럴 예정이었다.
"───,"
도망쳐봐야 소용 없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강한 살의와 함께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곧, 기척이 멈추었고. 육중한 교회의 문이 삐그덕, 하는 기괴한 소리를 냈다. 경첩이 끼이익, 듣기 싫은 비명을 질렀다. 비릿한 냄새가 났다. 뒤를 돌아 보지 않아도, 마르그리트 또한 곧바로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것이 누구인지도.
"안녕, 마리. 좋은 밤이네. 약속대로 널 내 것으로 만들러 왔어."
마르그리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먼저 보인 것은 그녀에게 곧게 향해진, 붉은 액체를 방울 방울 떨어뜨리는 사브르였다. 그 뒤로, 성모자상을 담은 화려한 색채의 로즈 윈도우 아래, 온 몸이 핏빛으로 물든 금발 소녀가 그림과 같이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