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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식스

탄산 2014.01.23 00:37 조회 수 : 19



  /0.


  I was cheated by you

  and I think you know when

  So I made up my mind,

  it must come to an end

  Look at me now, will I ever learn?

  I don't know how

  but I suddenly lose control!





  /1.


  시에라는 화가 나 있었다.


  자초지총은 이렇다. 어젯밤 그리 굳게 다짐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에라는 결국 거점으로 돌아오는 도중 잠이 들고 말았다. 그녀가 눈을 떴을 때는 아침을 맞아 말간 햇살이 그녀를 따사로이 어루만지고 있었다. 지저귀는 새소리가 귀를 간질이는 것을 느끼며 시에라는 그녀에게 일어난 일을 찬찬히 되새겨 보았다. 흐드러진 꽃밭. 눈이 시리도록 빛났던 달빛. 그녀를 내려다보던 남자. 그리고 목에……. 거기까지 떠올렸을 때 시에라는 계속 나아가려는 생각을 억지로 끊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목깃에 손을 가져갔음을 깨닫고 흠칫 손을 내렸다. 툭. 손과 맞닿은 이불이 푸스스 내려앉았다.


  그 소리에 시에라는 잊고 있던 사실을 또 하나 깨닫게 되었다. 남자의 성격 상 이부자리를 깔고 그녀를 눕힌 것도 그일 것이다. 즉 남자는 그녀를 안은 채 그녀의 방에 들어왔다는 뜻이다.


  시에라는 이제는 아예 빛깔이 붉은색으로 고정되지 않았을까 싶은 자신의 볼을 어루만졌다. 시에라는 최근 붉어지는 빈도가 많으니 그렇게 되는 일도 가능하지 않나 생각하다가, 이어 떠오른 원인제공자의 얼굴에 끙 하는 소리를 냈다. 앞으로도─가까이는 바로 조금 뒤 있을 아침식사에서─ 쭉 얼굴을 봐야 할 텐데 어떻게 그를 대하면 좋을까. 남자 쪽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저를 대하리라는 사실은 굳이 '추측'하지 않아도 뻔했지만, 그건 남자 쪽에서의 이야기었다. 시에라는 정작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는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는 사실에 우울함을 느꼈다.


  결국 그런 시에라를 보다 못한 그녀의 권속들은 대리를 보내자고 제의했다.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시에라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상태로 나갔다가 남자를 마주칠 경우 어떻게 할지는 시에라 본인도 장담할 수 없었으니까. 시에라는 머릿속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며 '대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대리'가 식탁에서 시에라의 다른 일행들과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아무리 총명한 시에라라도 손에 잡힐듯 그려내지는 못했다. 다만 확실한 점은 남자는 특이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시에라의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돌아온 '대리'는 과장을 섞었음이 분명한 수다를 마구 늘어놓았으며 마지막에 남자가 평소와 다름없이 대화를 나누고는 밖으로 나갔다 덧붙였다.


  마땅히 그럴 만한 일이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그렇지만, 시에라는 화가 났다.

  짜증인지 실망인지 그렇지 않으면 순수한 분노인지는 감정의 주체인 시에라도 정의내리지 못했지만, 이것은 분명히 화였다. 거짓말이 아니라는 '대리'의 말이 그것에 장작을 더했다.


  그렇게 분을 삭이던 시에라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바람이라도 쐬어야겠구나."



  시에라는 문을 열고 밖으로 다리를 내디뎠다. 남자도 외출 중이니 나가는 도중 그를 만날 가능성은 없었다. 오히려 밖에서 마주칠 가능성이 높았지만, 시에라는 그건 그 때 생각하면 될 일이라 넘겼다. 어차피 넓은 밖에서 특정 한사람을 마주칠 확률은 매우 낮았다. 거기에 시에라는 오히려 방 안에 계속 있다가는 결국 임계점이 넘은 분노가 그녀의 인내심을 갉아먹고, 그녀가 남자의 방을 찾아가서 기다리도록 등을 떠밀 것이라 생각했다.


  복잡한 내면과는 반대로 나붓한 걸음걸이로 마당으로 내려선 시에라는 그대로 대문으로 향했다. 하늘은 높고 푸르렀으며, 바람은 시원했다.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어느 정도 나아지는 것을 느끼며 시에라는 밖으로 나섰다.





  /2.


  대부분의 서번트는 동의하지 못하겠지만 그들은 살아 있지 않다. 그들을 이룬 피와 살은 그들의 마력과 완벽하게 등가를 이룬다. 성배의 안배로 육체를 얻어 현계하였더라도 단지 그 뿐인 것이다. 그들은 실체를 할 수 있는 영체일 뿐 실체가 아니다. 실체에게는 몸을 유지할 마력이 필요 없다.


  바꿔 말하자면 서번트에게 필요한 건 오로지 마력이라는 뜻이다. 애초에 그들이 불려온 목적만을 생각하자면 생전의 자아나 개성 같은 것은 사족에 불과했다. 마술사들은 영체인 성배를 만질 수 없기에 같은 영체인 그들을 불러냈을 뿐이다. 오로지 필요에 의한 관계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관계에서 보통 주인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종속된 위치에 있는 사람이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종 된 자들이 오로지 자신의 말에 따르기를 요구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종속된 사람─ 서번트에게는 자아와 개성과 욕구가 있었다. 본디 주인(master)보다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던 그들은, 그들을 그들 자신으로써 있게 하는 자아를 박탈당하지 않음으로써 단순한 마술사들의 도구로 전락하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생전 그대로 사고하고 행동했고 자신을 도구로 사용하려는 마스터와는 대립했다. 마스터에게 절대명령권이라는 령주가 있다 하나 힘은 그들이 압도적으로 우위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모든 서번트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어떤 서번트들은 오로지 마스터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본분에 충실하게 마스터의 말을 따랐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그런 행동 역시 서번트들이 각자만의 개성을 갖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남자는 그 모든 사실이 매우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원래대로라면 필요없을 자아와 개성이 서번트들에게 깃들어져 있다는 사실도, 그 덕분에 주인과 하인이라는 명칭이 무색해졌다는 사실도, 지금 그의 육체를 이루는 것이 실제로는 피와 살이 아니라 마력이라는 사실도. 남자는 '하인'을 다루지 못해서 쩔쩔매는 '주인'의 얼굴을 보는 것을 굉장히 즐거워했으며, 그것은 그 상황 자체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남자는 오히려 영체이기에 편리한 점도 있다고 생각했다(진짜 육체를 원하는 서번트들에게는 껄끄럽게 느껴지겠지만). 실제로 그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물리적인 간섭이나 공격을 아예 무시할 수 있었으니까. 게다가 그 모든 것들은 실체가 있던 생전에는 전혀 체험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 남자로서는 일석이조나 다름 없었다.


  남자가 즐거움을 느끼는 대상은 비단 그걸로 한정되지 않았다. 남자는 그가 보는 모든 것에서 흥미를 느꼈다. 남자는 발달한 현대 문물과 사람들의 사고에 감탄했다. 질주를 멈추지 않는 문명을 찬탄했다. 또한 그와 같이 성배전쟁에 참여한 이들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다른 이들을 짓밟아서라도 성배전쟁을 바라는 그들의 모습은 남자가 보기에 매우 마음에 들었다.


  물론 남자는 그들의 그런 점만을 기꺼워하지는 않았다. 특히 근래에 같이 생활하게 된 사람들 중 한 명에 대해서는 더욱 그랬다. 이름을 시에라, 라 밝힌 소녀는 성배가 아니라 다른 것을 원하여 내려왔다고 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들었을 때 남자는 다른 사람이 보기에 '다소 정도가 지나친' 짖궂은 즐거움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왕휘를 위해 소녀─당연히 당시에는 그 사람이 이 소녀이리라고는 몰랐지만─의 위광을 이용했는데, 정작 소녀 본인은 그런 것도 깨닫지 못했다니. 아아, 신이여. 당신의 자비는 얼마나 무자비한지. 남자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매우 유쾌한 기분으로. 소녀에게 지혜를 준 것은 '신'이었다. 결코 같은 인간이 아닌. 그러니 소녀가 딜레마를 겪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남자는 생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가능성을 이 곳에서 목도한 것을 매우 즐거워했다.


  게다가 소녀와의 대화는 퍽 재미 있었다. 남자가 부러 던진 독설에도 굴하지 않는 모습은 그의 마음을 아주 만족시켜 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남자가 소녀의 다른 모습에서 덜 즐거움을 느끼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남자는 그의 말에 쉴 새 없이 변화하는 소녀의 표정을 소녀 본인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분명 그에 대한 반응 역시 매우 볼 만할 테니까. 특히 어젯밤에 소녀가 보여주었던 반응을 알려준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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