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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w!

로하 2014.01.21 03:47 조회 수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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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 갠 오후의 평화로움이었다. 가볍게 부슬비 그친 하늘 너머에는 언뜻 두 줄기의 무지개가 곱게 걸렸고, 구름 틈새에선

언제 숨었냐는 듯 햇살이 묽은 금빛으로 내리쬐고 있었다. 잠시 촉촉해진 하늘을 피해 지붕 아래 숨었던 새들은 다시 궁궐의

하늘에서 노래하였고, 창가에서 조금 떨어진 구석 웅크려 낮잠을 청한 사자는 슬그머니 일어나며 하품을 했다. 그 속을

파고들듯 웅크려 잠든 고양이의 수염을, 짖궃은 요정 몇인가가 와 살짝 건드리며 꺄르륵 웃었고, 하늘이 그대로 녹아내린 듯

시리도록 투명하게 비치는 궁 안의 연못에서는 연꽃의 봉오리가 살짝 피어나, 그 안에 나비가 내려앉는 모양이었다.



"...하, ...폐하.."


"......으음....."



   담쟁이덩굴이 살짝 돌며 감싸안은 기둥, 창가에 앉아 그에 기댄 채 미동도 없던 누군가를, 깨우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마치 홀로 고요한 자연 속에 녹아든 요정처럼, 평온히 잠든 아이가 조금씩 조금씩 몸을 뒤척였다. 파르르, 나비가 날개짓한

속눈썹이 떨리며 올라갔고, 이윽고 저 성전의 황금보다도 찬란하게 빛나는 금빛 눈동자가 옆을 향했다. 신이 그 손으로 손수

만드사 선한 양치기셨던 왕께 내려주신 은총 받으신 분. 소녀의 잠을 깨운 여성은 면목 없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조아리고는

나붓이 절을 올렸다.



"술람의 샤리아가 인사 올리나이다."


"..., 샤리아, 인가. ...미안하도다. 독서를 하려던 생각이었거늘. 나를 찾아다닌 것이냐."



   이 곳은 화려함과 자연이 함께하는 그 축복 받은 궁 안에서도 유독 소박하면서도 조용한 곳이었다. 이 곳이 '왕'이 어릴 적

몰래 학문을 탐할 때부터 숨어들곤 했던 그녀만의 장소라는 것을, 샤리아, 라 불린 여성은 알고 있었다. 손위의 형제들은 어린

막내 둘을 못내 귀여워하며 뛰어놀아주곤 했지만, 작은 아이는 궁 안의 장서관에서 책을 읽는 것을 조금 더 좋아했다. 그리스,

인도, 히타이트, 아시리아, 이집트. 이곳저곳의 모든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는 건, 아이가 생각하기에 왕실에서 태어나는 것의

가장 좋은 점 중 하나였을 정도니까.



"아니옵니다. 왕이시여, 그저 왕의 노래가 듣고픈 버릇없는 마음에 이리 찾아뵈어 휴식을 방해하는 죄를 저질렀나이다. 용서하소서."


"용서할 일도 뭣도 아닌 것을. 수금(Kinnor)을 준비해야겠구나."


"은총에 감사드리옵니다. 축복 받으실 분이여."


"별 것도 아닌 것을, 무에 그리 감사하느냐. 네가 지금 감사해야 할 것은 오직 신과 너를 낳고 또 기르신 양친, 그리고 너 자신 뿐이니라."



   왕이라 불린 소녀는 선선히,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옛 어른과 같은 말새와 다르게, 퍽 앳되어 보이는 미모였다. 열 여서일곱이나 

되었을까 싶을 정도로. 손때가 묻은 악기를 꺼내어 비단천으로 부드러이 닦는 손길을 잠시 멈춘 것은 샤리아라는 여성의 목소리였다.



"무엇을 읽고 계시었는지, 여쭈어 보아도 되겠나이까..?"


"...음? 아아, 선왕의 기록이었다."


".... 폐하의, 아, 무례를..."



   샤리아는 가볍게 중얼거리다 흠칫, 놀라고는 곧 다시 고개를 조아렸다. 소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가볍게 한 손을 들어 그것을 말린다. 

내리깐 눈꺼풀이 살짝 고개를 들며, 남쪽 태양과 같은 눈이 다시 곧게 여성을 향했다.



"... 암논 형님과 압살롬 형님을 생각하고 있었느니라."


"....."



   샤리아는 분별 있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스스로가 대답해야 할 것과 대답하지 말아야 할 것을 상당히 잘 구분하고 있었고, 지금 이

순간이 후자라는 것 또한 깨닫고 있었다. 그녀는 묵묵히 푹신한 방석 위 나붓이 앉아, 왕의 말을 가만히 들을 뿐이었다. 본궁 하늘에서

춤추는 카나리아의 노래가 희미하게 들렸고, 방 안은 잔잔히 고요했다. 그녀는 가만히, 왕이 먼저 입을 열기만을 기다리며 검은 머리칼을

늘어뜨린 채 그저 왕을 바라볼 뿐이었다.


   언제부터였는지,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 언제부터 왕이 그 이름을 잊고, 오직 찬사로만 이루어진 것이 그 자신의 이름을 먹어치우고

자리를 차지했는지. 세상에 다시 없을 은총 받은 지혜의 왕. 평화를 누리소서. 이 땅에 평화를. 모두가 찬사를 바치고 또 존경하옵고

사랑하는 작은 왕이었으나, 정작 아무도 이제 이름마저 불러주지 않는 작은 아이. 그녀의 시간이 수 년 전에 멈추지 않았다면 이제 

그녀는 스물셋이 되었을 터였다. 한창 아름답게, 이제 더 이상 봉오리가 아닌 만개한 꽃처럼 피어났을 시기. 아마 누구보다 아름다웠던

부친과 누구보다 사랑스러웠던 모친을 닮아 그 이상으로 아름답게 자랐을 터였다. 그 어릴 적에도 온갖 핑계로 부친이 어르고 감싸고

숨기며 아끼며 애지중지 키운 소중한 아이였으니. 그녀보다 단지 다섯 살이 많았을 뿐인 샤리아가 보기에도, 스무 해 전의 어린 아이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귀하고 행복한 아이였으니까.



"...샤리아. 문득 떠올랐다만, 아비삭 아씨는 평안하시더냐."


"네? 예에. 아비삭 님이라면 기도를 일상으로, 베푸는 것을 섭리로 여기시며 평안하시옵니다."


"...그런가, 다행이구나."



   그리고 또한, 언제부터였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그 수많은 형제들이 언제부터 한 명씩, 한 명씩 사라지기 시작했는지. 그것은 왕의

죄가 아니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왕에게 죄스런 미움을 품은 자는 없었다. ──심지어, 왕의 단 한 명뿐인 아우조차도. 그것을

모르는 것은, 이제 와서는 아마 왕 뿐일 것이다. 분명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열댓의 형제였지만, 어느새 이렇게 비어버린 것인지,

왕은 알지 못했다.



"──신께 기원하노니 수냄 여인 아비삭에게 축복 있으라."



   왕이 가만히 읊었고, 샤리아는 다소곳이 절했다. 여름의 푸르른 바람에 사붓 춤을 추던 긴 소맷자락 끝이 흘러내리고, 새하얗고

보드라운 손이 드러나 천천히, 악기의 현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직 녹빛 바람이 창가에 흘러든 하늘을 채웠고, 투명하면서도

또 외로운 듯, 또 밝은 듯 노래하는 소리에 요정들조차 숨을 가라앉히곤 귀를 기울였다. 평화, 평화로다. 다윗의 아이야, 그 영광은

너의 것이니. 그 날, 신께서는 모두가 듣도록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날부터, 이 소녀 왕의, 샤리아의, 모든 백성의, 그리고

이 땅의 영화가 시작되었다. 그 감격과 황송함, 감사와 영광을 담아 다시 한 번 나붓 절하려던 샤리아는 문득 몸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녀는 문득 몸을 움츠렸다. 깨달아버린 것이다. 그녀 또한 왕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노라고.





01/





     『──호오, 예까지 친히 발걸음을 옮겨 주시는 건 제법 드문 일이 아닌가, 소녀 폐하.』


"사람의 꿈까지 엿보려 드는 것이냐, 바알. 취미가 나쁘도다."


『무슨 말을. 그대 또한 나와 다르지 않으며 나 또한 그대와 다르지 않으니, 그것이 종속의 계약이었을 것이다만. 

허면 그대가 이 곳에 있는 이상 내가 여기에 또 존재한다 하여도 되지 않을 것은 없겠지.』


"......."


『헌대, 드문 일이다. 그대가 '이러한 꿈'을 꾼다는 말인가. 유독 어찌하여. ....아아, 실언이었다. 부디 잊어주길 바란다.』



──바알, 이라고 불린 잿빛 머리카락의 청년은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맺은 채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는 사람을 괴롭히기

좋아하고, 그들을 '일반적으로는' 낮게 보았으며, 오만하면서도 훌륭한 존재였으나, 결코 인간에게 진심으로 괴로움을 선사하는

자는 아니었다. 대부분의 경우, 악마가 인간을 의도하여 해하는 일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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