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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를 기다리는 것이다, 에헴!

로하 2014.01.11 08:25 조회 수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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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는 눈을 부릅뜬 채 쓰러져 있었다. 어찌 보면 죽은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적어도 목숨은 붙어 있는 상태였다. 딱히 별달리 다친

곳...은 없었다. 타박상이 조금 심하긴 했지만, 목숨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를테면, 그는 의식만 잃었을 뿐 언제든 깨어날 수 있는

자라는 말이었다. 깨어난 후 잘 움직일 수 있을지는 둘째 치더라도.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 정도의 부상도 어떻게

하지 못할 정도로 무능력한 남자는 아니었으니까, 그는. 자아, 그럼 이제 그 남자로부터 잠시, 시선을 돌리면. 


   텅 빈 방이었다. 아니, 지하 같았다. 주차장인지 보일러실인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새까만 어둠이 가득했고, 저 멀리 어슴푸레한

도로의 빛이 위쪽 어딘가에서 스며들었다. 전체적으로 까맣고, 어둡고, 음울하고, 캄캄하고, 답답한 곳에서──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듯 보였다. ....아니, 아니었다. 순간,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 살짝, 아주 살짝 움직였다. 쓰러져 있었던 것인가, 엎드려 있었던 것인가. 그리고

어둠 속에서, 형체는 비틀거리는 듯 보이더니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순간, 어둠이 개인 듯한 착각이 들었다. 빛은 저 너머 멀리에 있음에도, 아주 잠깐, 잠깐이지만 이 곳이 밝아진 듯 그런 느낌을 줄 정도로,

새하얗고 아름다운 작은 여자 아이였다. 키는 아담했고, 언뜻 보이는 체격은 톡 스러질 것마냥 가늘었다. 물론 무예의 달인이라 하여 우락부락

한 자들만 있으리란 법은 결코 없지만, 그것을 아는 사람들조차 무심코 방심해 버릴 정도로 소녀는 무해와 동등한 존재처럼 보였다.



"...읏차." 



   소녀는 작게 소리를 내며 제대로, 곧게 섰다. 그리고는 깜깜한 지하의 상태가 곤란한 듯 조금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듯 보였다. 무엇을

찾았던 것일까, 소녀는 벽을 더듬었다. 아, 전등의 스위치를 찾은 듯 보였다. 하지만, 걱정은 언제나 예상대로 들어맞는 법. 소녀는 몇 번이고

스위치를 눌러보았으나. 아무래도 불은 켜지지 않았다.



"아....."



   여자 아이는 잠시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걸 어쩐다, 하는 중얼거림이 언뜻 들린 것도 같았다. 얼굴 생김이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마 그 얼굴에 어울릴 법한 사랑스러운 목소리였다. 그 사이에 소녀는 금방 해결책을 찾은 것인지, 아니면 뭘 하더라도 일단 실행으로 옮기고

봐야 하는 것인지 바로 짧은 고민을 끝낸 듯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쾅!



   소녀는, 벽의, 스위치 부분을, 가는 다리로, 세차게 찼다. 쾅, 하는 공허한 속 빈 철벽이 울리고. 곧 깜빡, 깜빡, 불안한 모양으로 전등불이

켜졌다. 약한 불이었지만, 아이에게는 아무래도 그것으로도 충분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소녀의 생김새는 그제사 제대로 볼 수 있었다. 허리

아래까지 내려온 길고 긴 새하얀 머리카락. 거기에 투명한 금빛의 눈동자. 신이 만든 듯 자그마하고 모양 좋은 얼굴에, 햇볕은 본 적 없는

듯, 아니면 겨울뿐인 세상에서 살다 온 듯한 투명한 피부. 흔한 비유지만 양 볼은 장밋빛에, 입술은 복숭앗빛. 나이는, 언뜻 보기에는 약 십대

중후반. 열 여섯에서 일곱 정도. 길고 곧은 은발을 늘어뜨린 채, 새하얗고 긴 원피스를 입은. 눈밭 위에 피어난 새하얀 산백합꽃.

──햇볕을 받으면, 녹아 없어질 것만 같은 그런 현실과는 동떨어진 흰 눈 아가씨.



그리고, 저 위쪽 밖의 도로에서, 트럭이 지나갔다.

환한 헤드라이트가 어슴푸레한 전깃불을 삼키듯 먹어치웠고,


빛이 지난 후, 지하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전등불만이 홀로 깜빡, 깜빡.



아아, 그녀는 정말로 눈의 아이였을까.






01/





   존 레너드 홉킨스는 이지적인 청년이었다. 엘리트의 스테레오타입이라고 해도 좋았다. 모든 사람들이 떠올리고, 납득하는,

그러한 유형의 사람. 새까만 머리카락은 단정히 자르고, 다소 날카로운 눈매에는 무테 안경을 걸쳤다. 수트의 재킷은

주름 하나 가지 않고 뻣뻣이 다려져, 삼 분 전에 막 처음으로 입고 나온 것처럼 보였다. 런던의 증권사에서 일하는 유능한

거래인인 그는, 드래곤 스쿨을 졸업하고 이튼 고교에서 수학한 후, 옥스퍼드 대학과 런던 비즈니스 스쿨을 차석으로 졸업한

현실주의자 인재의 모범 답안이었다.


   그런 그는, 생전 처음으로 눈을 멍하니 깜빡이며 가만히 안경을 닦아 고쳐썼다. 

사라지지 않는다.


   그가 러시 아워의 택시 뒷좌석에 앉은 채 그도 모르는 새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면 모르나, 그것은 분명히 현실이었다.

지독히도 공상과 꿈 같은 것과는 연관이 먼 그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니.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이곳은 그의 나라가 아니다. 극동의 끝자락, 별로 관심도 뭣도 없는 땅. 아, 환율 부문을 제외하고는.

하여튼 그는 다시 태블릿 액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곳에서 그는 이방인.

그가 모르는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세에레에. 세에레."


『.... 부르심에 받들어, 세에레가 알현합니다. 나의 왕, 주군의 왕이시여.』


"이 곳이 '겨울 나무의 도시'가 맞느냐? 동쪽 끝 섬나라의 남쪽 지방."


『여주인(DOMINA)의 말씀이 옳으시다고 감히 대답합니다.』


"그렇구나. .... 숨을 쉬기 힘들도다. 요정들이 떠난 땅이로구나. 녹색이, 시들어버렸다."


『어리석은 인간들의 한ㄱ.. 무례를. 뜻에 반하는 말을 지껄인 죄를 용서하십시오.』


".... 그다지. 나는 물론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나, 나의 뜻을 '다른 존재'인 네게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니라. 

사과는 필요치 않노라."


『자비에 감사를.』


"...아아. 헌데 세에레. 곤란한 일이로다. 나의 '현계' 자체는 문제가 없으나 이, 그... '성배 전쟁' 이란 것의

율법상으로는 허용되지 않는 일이었던가? 그렇다고 알고 있었기에 일단 현계의 방식 자체는 그 법을 이용했다만.

앞으로도 일단은 그것을 따르는 것이 좋을까 싶어서 말이다."


『... 어째서 당신께서 그러한 탐욕의 도구를 이용하실 수 밖에 없는지는, 감히 말씀드리건대 불만입니다만...』


"하지만 법은 법이지 않느냐. 오히려 그걸 사용한다 하더라도 미안할 정도구나. ....몸을 불태울 각오를 하고

간절히 바라 온 다른 자들에게."


『당신께 '마력'을 '공급'할 자에 대해서는 심려치 않으십니까.』


"우음... 뭐어, 기본적이나마 그것에 대한 '대비', 혹은 '보상'은 준비해 두었으니. 그렇다 하더라도, '마력 공급'인가.

이것은 또 재미있는 일일 것 같구나."


『답답하실 것입니다. 그 어떤 누구라도 현세에 '살아 있는 인간'과 같은 존재라면, 당신께 있어서는 불합리한

족쇄 이상의 그 무엇도 되지 않다고 고합니다. ───이 세상은, 왕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당신이 다스려야 하는 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속세의 천국.

당신이 내려서야 하는 곳은 지고의 행복이 가득한 신의 땅.

이러한 곳이 아니다.


오만하고,

천박하고,

불결하고,

무례하며,

어리석은


이 따위 벌레들의 땅이 아니다. 청년은 그리 생각했지만 말을 삼켰다. 그의 왕은 그가 그들에 대해 무어라 

생각하고 무어라 말하든 그저 다소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가만히 경청해 주었으나, 그녀는 결코 그들에 대해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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