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소녀는 이 땅을 '겨울 나무의 도시'라고 부르고는 했다. 처음에는, 다소 이례적인 경우에 해당하는 그녀의 소환에 의한 사소한
시스템 에러라고 그녀의 소환자는 생각했으나, 그것은 반쯤은 맞는 말이었으며 또 그른 말이기도 했다. 『지식』이란 것으로
분류되는 것이라면, 그녀가 모를 것은 없었다. 『지혜』라는 것에도 그것은 해당되리라, 모두가 그리 말했으나 소녀 본인은
그다지 동의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아는 게 아니다. 그저 아는 것만을 알 뿐. 당연한 일이다.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더라도, 정작 다른 모두가 아는 ── 아주 사소한, 자그마한, 그러면서도 무엇보다도 큰 것. 그것을 그녀는 모르고 있었으니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소녀는 이 땅의 '후유키'(冬木) 이라는 이름이 제법 이 땅과 걸맞는다고 생각했다. 비죽비죽 솟아오른
마천루는, 밤이 되면 밤하늘의 별 대신 나름의 멋을 뽐냈지만, 낮에는 그저 바싹 마른, 생기 없는, 그러한 겨울 나무와 같다고.
── 새싹이 나뭇가지 끝자락에 잠들지 않은, 아주 오래 전부터 그렇게 피는 일 없이 서 있었던 겨울 나무 같다고.
문득, 꺄르륵 하는 어린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와 소녀는 사알짝 고개를 돌렸다. 입가에 아주 조금, 희미하게 미소가 피어올랐다.
비록 더 이상 요정의 노래도, 새하얀 눈 속 늑대도, 상냥한 웃음마저 흐릿해진 세상 같았지만, 이렇게 아직 신의 은총은 남아 있다고.
작은 아이의 눈동자에서 더없이 아름다운 빛을 본 소녀는 곧 그 수줍게 핀 미소를 머금은 채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이 사람들의 세상에는 따스함이 남아 있다는 것을 느끼고는.
01/
어떻게 걸었을까. 어디까지 걸은 것일까. 소녀가 문득 정신을 차리니, 그녀는 이미 하염없이 어딘지 모를 곳에 서 있었다. 물론
'서번트'로서, 그리고,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였기에 눈을 감고 걸어왔다 해도 그대로 되돌아갈 수 있었지만. 아마 어린 아이들의
웃음에 끌리듯 따라온 것일까. 사락이는 소맷자락을 조심스레 한 번 쥐었다 놓고는, 그녀는 가만히 발걸음을 돌렸다.
주위에서 가볍게 소곤거리는 목소리와 흘끗흘끗 - 혹은 빤히 -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소녀는 그것이 자신의 탓이 아닌 양
살랑이듯 발을 옮겼다. 물론 그 또한 남의 눈에 신경을 쓰는 유형은 아니었으나, 소녀가 본래의 모습대로, 혹은 그녀에게 익숙한 대로
다닌다면 그것은 지대한 관심과 시선을 끌 것이었다. 그것을 일찍 예상한 그녀의 소환자가 건네준 두툼한 머플러와 코트로 온 몸을 싸매었음에도,
소녀는 마치 홑겹의 비단옷만을 입고 맨발로 걷는 듯 가볍게, 나비의 날개짓처럼 움직였다. 소환자가 시선을 끄는 것을 막기 위해
준 옷이니, 이걸 입은 이상 저 눈빛들이 향하는 끝이 자신이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요정 나라에서 걸어나온 소녀는 흐리게 가라앉은 아스팔트를 홀로 걸었다. 이리도 조용한 것은 제법 오랜만이었다.
이 땅에 내린 뒤로, 거의 매일. 혼자였던 적이 없었으니까. 소환자 옆에만 붙어 있었던 것이냐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저...
소녀는 흠칫, 걸음을 멈추곤 고개를 가볍게 붕붕 저었다. 기분 탓이다. 기분 탓이다. 탐스런 입술을 작게 오므리고는, 그녀는
조금 더 빨리 걸음을 재촉했다. 늘어선 건물들 사이로 스며든 겨울 바람이 차가웠다. 그럼에도, 그 아래를 빼곡히 채운 채 이어지는
가게들은 저각기 아침 영업 준비에 바쁜 기색이었다.
이 시대에 와서, 이렇게 밖을 멋대로 다니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를 테면, 사람들 사이에 섞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주 오래 된
그 이야기 속의 세상이 지난 후 처음으로. 어쩐지 감상에 젖은 기분으로, 소녀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며 바짝 마른 가로수를
따라 걸었다. 우동이라고 씌여진 붉은 천이 펄럭이는가 싶더니, 그 뒤에는 노릇하게 갓 구워져 나온 빵이 가방을 매고 가던 어린
아이들을 끌어당겼고,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옷 가게, 아직 정리가 되지 않은 듯 산더미처럼 상자를 쌓아 둔 가게, 유리 외벽을
닦는 데 한창이던 라면 가게와 프랜차이즈 카페. 그리고... 소녀는 무언가 신기한 것을 발견한 것마냥 빤히 시선을 고정시켰다.
낡게 손때가 묻은 나무 창틀, 조금 오래 되었는지 모서리가 바랜 쇠틀. 그러나 무엇보다도 소녀가 호기심을 가지고 쳐다본 것은
무어라 무어라 마구 써 붙인 종이였다. 저 가게에서 판매하는 것일까. 생각하고는 살짝 눈을 게슴츠레 찌푸렸다. 그녀가 본 것이
틀리지 않다면, 그것은 분명히 물고기였다. 누우런 물고기. 소녀는 찬찬히 씌여진 말을 발음했다. 타-이-야-키. 타이, 라면 이 나라의
말로 도미의 일종이었을 것이었다. 야키, 라면, 아마도 '굽다' 혹은 그러한 계통의 의미. 그렇다면, 저 누우런 물고기는 도미를 구운
것이란 말인가. 허나 어떻게? 어떻게 생선을 구우면 저렇게 완벽한 황토색이 되는 것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터메릭, 색소, 떠오르는
모든 방법을 생각해 보아도. 아니, 그 전에 저렇게 자그마한 물고기를 저 정도로 양념에 푹 씌워 굽는다면 먹기 불편할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면 시대의 변화에 따라 물고기가 달라졌는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제법 신기했던지, 소녀는 차근히, 조심스레 가게에 가까이 다가갔다. 나이 지긋해 보이는 노부부 한 쌍이 바삐 움직이며
가게 안을 정리하고 조리의 준비를 한창 하는 중이었다. .... 어딜 봐도 생선은 보이지 않는다. 쌓인 밀가루와, 다른 곡물들. '팥'과
'크림'. 기름이 담긴 통. 그리고... 그녀는 아, 하는 짧은 감탄사와 함께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틀의 모양을 보았고, 저 밀가루와
기름과 '팥' 같은 것을 사용하여 생선 모양으로 만드는 빵, 이라는 사실을 이해했다. 덧붙여 안도했다. 저것이 진짜 - 만에 하나 -
살아 있는 물고기였다면 그녀가 한 순간이라도 배가 고프다는 요지의 생각을 하는 즉시 자신을 먹으라는 듯 퍼덕일 테니까.
"그랬던 것인가..."
나즈막히 내뱉고, 소녀는 호기심이 해소된 것에 마치 배부른 고양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어깨가 으쓱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오늘, 몰랐던 사실 하나를 깨달은 것이다. .... 라기에는, 곧바로 머리속에서 반 자동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떠올랐지만,
떠오르기 전에 그녀 스스로가 깨달았으니 오늘의 그녀는 무엇인가 더 '나아진' 것이었다. 적어도 소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식으로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지만, 직접 본 적도, 만진 적도, 들은 적도 없으니, 완전한 것이 아니다.
"...그럼,"
슬슬 돌아가려는 듯 새하얀 입김을 서린 하늘에 녹이던 소녀는, 누군가가 부르는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색하게 고개를 들어
보니, 주인 노인이 '오늘의 첫 아이'라면서 내민 것이었다. ...이것은 곤란하다. 소환자에게 링크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물어보는
것이 상책인가? 소녀는 조금 고민했다. 그러나 곧, 자신이 이렇게 망설이는 건 저 노인의 손을 무안하게 만드는 것이란 사실을 깨달은
소녀는 조금 어색해하며 양 손으로 조심스레 내민 것을 받았다. 이 곳에서 그녀는 더 이상 그녀 생전의 신분도 무엇도 아니니, 사람이
태어난 그대로 노인에게 공손한 것이 당연한 것이다. 뭐어, 생전이어도 그것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갓 구운 빵이 신기했는지, 소녀는 몇 번 눈을 깜빡였다. 작은 양 손에 퍼진 온기가 퍽 따뜻했고, 코끝을 간질이는 냄새는 고소하면서도
달콤했다. 가게 안에서 나는 보들보들한 커스터드, 진하고 묵직한 팥, 고소한 호두와 아몬드, 냄새만으로도 달콤함에 푹 젖는 것만 같은
초콜릿까지. 조금의 망설임 끝에, 노부부가 바삐 일을 하는 와중에도 맛있다며 먹어보라며, 따스하게 웃자 소녀는 무심코 손에 든 것을
입가로 가져갔다. 선한 사람들. 그녀가 경계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었는데. 그들이 비록 성서의 백성들인지 알 수는 없으나, 직감적으로
그들은 악도 위해도 아니란 것을 깨달은 그녀에게 그들이 그녀가 믿는 신의 백성인지는 중요치 않은 것이었다.
어떠한 신이어도, 그 백성들이 믿길 바라며 사랑하는 이치는 필경 같을 테니까.
바삭.
소녀는 조심스럽게 '붕어빵' (이라고 옆에 이 나라의 것이 아닌 말로 적혀져 있었다. 아무래도 구운 도미라고 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 소녀는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 의 한 부분을 입에 넣었다. 머리인지, 꼬리인지, 지느러미인지, 어디부터 먹어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소녀는 결국 지느러미와 머리 사이의 이도저도 아닌 부분을 사알짝 베어물었을 뿐이었다.
우물우물.
소녀의 눈이, 약간 커졌다. 빵은 폭신했고, 안은 달콤했다. 이게 커스터드라는 것일까. 그새 한 입을 꿀꺽 삼킨 후, 깜짝 놀란 눈으로
살짝 입을 벌린 채 멍하니 감탄한 것 같던 아이는 곧 한 번 더, 입에 넣었다. 조금, 뺨이 발그레해지는 아이였다. 마음에 든 것일까. 우물우물.
다시 한 번 냠. 입꼬리가 살며시, 아무도 몰래 곡선을 그렸다. 그리고는, 또 한 입. 어느새 반짝반짝해진 눈으로, 소녀는 붕어빵 하나를 전부
다 먹어버렸다. 비교적 소식하던 생전의 습관 탓인지, 배가 부른 듯한 기분이었지만, 어쩐지 소녀는 발밑마저 폭신폭신해진 듯한 기분이었다.
──이것은, 조금 가지고 돌아가 그녀의 권속들에게도 맛 볼 기회를 나눠주는 편이 좋겠도다, 고 그녀는 생각했다.
아주 유쾌하고 제멋대로인 그들은, 소란스러웠지만 동시에 상냥한 자들이었으니까.
문득 그녀는, 자신이 이 나라의 화폐를 가지고 있었던가 걱정이 되었지만 다행히도 기우일 뿐이었다. 혹은, 그녀 옆에서 머물며 그녀가
곤란할 때에는 그녀 몰래 언제든 도와주는 그 유쾌한 자들이 방금 마악 꽂아둔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자신의 외투 호주머니에서 지폐
한 장을 꺼낼 수 있었다. 10, 000 엔. 아무리 모든 것을 다 아는 그녀라 해도 2014년 동쪽 끝 섬나라의 물가 변동까지 실시간으로 알고 있을
수는 없었기에, 그녀는 이것으로 얼마를 살 수 있는지 재빨리 벽에 붙은 종이를 쳐다보았다. 100엔에서 120엔 사이의 가격들. 소녀의 얼굴이
밝아졌다. 이것이라면 약 100 개 가량은 살 수 있다. 72명에 달하는 그녀의 권속들이 모두 다 하나씩 맛 볼 수 있는 것이다.
『잠, 이 아침부터 붕어빵 백 개를 사겠다고, 아씨?』
아몬. 그녀가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어째서 안 되는 일이냐? 저 틀은 언뜻 보기에도 약 스무 개는 될 것이거늘. 아무리 오래 걸린다 하여도
한 각을 기다리면 되지 않겠느냐. 그녀는 태연스레 말했다. 물론, 소리내지 않고.
『아니, 그러니까. 아침부터 붕어빵 백 개씩 사 가는 미소녀라니 그거 뭔가 이상하겠지!』
..음, 그러한가..? 딱히 모르겠지만.. 혹여 행인의 시선을 끌 문제라면 괜찮다. 인식하지 못하게 한 뒤 가면 문제는 없을 것이니라.
소녀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아몬, 이라 불린 목소리는 답답하다는 듯 소녀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오, 이 바보야! 그러니까 우리 말고 너 먹으라고 너, 아씨. 알겠어?』
하지만 나로서 이 금액만큼의 음식을 다 먹는 것은 무리니라. 먹어 보았자 세 개가 한계일 것 같거늘, 또, 기쁨은 나눌수록 커진다
신께서 말씀하셨거늘 어찌하여 너는 거절하는 게냐? 신의 은총 내린 그 땅에서 접했던 진미와는 또 다른 맛이 있도다. 이게 '현세의
맛'이라는 것인지 싶구나.
『아오오오, 됐다. 됐어. 그럼 그건 우리가 사 먹을게. 자, 약속. 자간이 나다니기 좋아하니까 그 놈한테 사오라고 하면 천 개쯤
사 올 거야. 이러면 걱정 없지? 그러니까 아씨가 먹고 싶은 만큼만 사 먹고, 남은 돈은 갖고 있으라고.』
여전히 의문이 조금 덜 풀린 듯 곤란한 표정이었지만, 소녀는 다소 강한 목소리에 이끌리듯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잘했어, 라고 말한 목소리는 돌아간 것인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제사 여자 아이는 다시 살짝 고개를 기울이고는 눈을 내리깔았다.
내가 먹을 것. 소녀는 가만히 진열대를 쳐다보았다. 자신이 먹을 것은 많아야 두어 개. 하지만 그녀는 조금 휘파람 같은 목소리로 으음,
하고 중얼거리고는 일곱 개를 사기로 마음 먹었다. 그녀의 소환자와, 현재 같이 지내는 중인 또 다른 소환자 소녀에게 줄 것이었다.
아까 아몬,이라 불린 목소리에게도 말한 것이지만, 기쁨도 즐거움도 좋은 것은 모두 함께 나누는 편이 더 행복한 것이었다.
마악 주문을 하려고 입을 열려는 순간, 그녀는 자신의 말투가 이 세상의 기준에서는 결코 평범하지 않다고 했던 말을 기억해냈다.
어쩐다. 소녀가 진열장..계산대에 가까이 다가간 것에 노부부 중 부인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외국어. 그래, 외국어다. 영어? 프랑스어? 중국어? 그렇지만 순식간에 그 생각은 사라졌다; 그녀가 받은 이 세상의 지식에
따르면 이 나라의 사람들은 타국의 언어에 밝지 못하다. 그렇다면 이 나이 대의 노인이라면 말할 것도 없을 터였다. 그렇다고 더 이상
시간을 끌기도 곤란한 일이다. 폐를 끼치는 짓이다. 조금 당황한 소녀는 다소 경황 없이 무심코 손가락으로 진열장 속 각기 다른 맛을
가리키고는 다른 쪽 손까지 펴 일곱, 이라는 수를 말했다. 어쩌다보니 이렇게 해 버렸지만, 알아 들었을까?
다행히도, 노부인은 이해한 것 같았다. 커스터드 세 개.. 단팥 두 개.. 초콜릿 두 개.. 총 일곱 개. 그녀가 이 나라의 말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노부인은 숫자를 적어 소녀에게 보여주었다. 예상대로, 예산에 한참 미치지 않는 가격이었다. 소녀는 들고 있던 지폐를 지불했고, 어머나,
큰 돈이네. 외국 아이라 막 환전한 걸까, 라고 중얼거린 노인은 곧 진열대 아래의 서랍을 뒤적이고는 그녀에게 한 움큼의 지폐와 동전을
건네주었다. 그리고는 재빨리 그녀가 주문한 것을 마저 굽기 시작하는 부부를 보며, 소녀는 무엇인가 걸리는 기분이었다. 어째서?
생각해보니, 떠오르는 것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의문.
여우와 고양이는 생선을 좋아하지?
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떠오른 것인지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조금 곤란한 듯 입술 안쪽을 가볍게 앙다물었다. 고개를
기울이며 잠시 생각했다. 잠시, 그리고 조금 더 아주 잠시. 그리고 소녀는 작게 숨을 들이키고는, 노부부가 붕어빵을 완성하기 전 재빨리
손가락을 움직였다.
세 개 더.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공지 | 기존 기록 보관 장소 | 카와이루나링 | 2012.11.20 | 1905 |
공지 | 이 곳은 팀 회의실 입니다. [1] | 카와이 루나링 | 2012.02.20 | 1183 |
157 | 잡았다 요녀석(?) | 배고파 | 2013.11.09 | 4 |
156 | 비밀글입니다. | ??? | 2013.10.31 | 17 |
155 |
리제 토크
![]() | 카구라 | 2013.10.31 | 10 |
» | 우!냐! [1] | 우마우마 | 2013.10.28 | 14 |
153 |
냐하
![]() | Torelore | 2013.10.01 | 4 |
152 | 작성중..... [1] | R | 2013.09.09 | 3 |
151 | 작성중 [3] | 로하 | 2013.09.05 | 3 |
150 | . | . | 2013.09.01 | 8 |
149 |
츤츤
[1] ![]() | Sigma | 2013.08.30 | 3 |
148 |
수수께끼
![]() | 카구라 | 2013.08.26 | 3 |
147 | 단문 [1] | 로하 | 2013.08.26 | 11 |
146 | 0.5 ver 마지막 글인 것이다! 그런 것이다! | Crowban | 2013.08.23 | 6 |
145 | 냅킨을 집는 것이다 [5] | 흡혈귀씨 | 2013.08.19 | 34 |
144 | 오노레에에에! | AUO | 2013.08.19 | 12 |
143 | 리아님 린님 확인 부탁드립니다. | 마우얀 | 2013.08.16 | 11 |
142 | 왕왕왕 [2] | 카구라 | 2013.08.11 | 5 |
141 | 당신의 개입니다 멍멍! | 카구라 | 2013.08.10 | 3 |
140 | 웨히히히히히힣 | Torelore | 2013.07.23 | 5 |
139 |
마리 비밀일기
[5] ![]() | 로하 | 2013.07.03 | 4 |
138 | 수정본 [1] | 카구라 | 2013.06.25 | 12 |
비 갠 오후의 평화로움이었다. 가볍게 부슬비 그친 하늘 너머에는 언뜻 두 줄기의 무지개가 곱게 걸렸고, 구름 틈새에선
언제 숨었냐는 듯 햇살이 묽은 금빛으로 내리쬐고 있었다. 잠시 촉촉해진 하늘을 피해 지붕 아래 숨었던 새들은 다시 궁궐의
하늘에서 노래하였고, 창가에서 조금 떨어진 구석 웅크려 낮잠을 청한 사자는 슬그머니 일어나며 하품을 했다. 그 속을
파고들듯 웅크려 잠든 고양이의 수염을, 짖궃은 요정 몇인가가 와 살짝 건드리며 꺄르륵 웃었고, 하늘이 그대로 녹아내린 듯
시리도록 투명하게 비치는 궁 안의 연못에서는 연꽃의 봉오리가 살짝 피어나, 그 안에 나비가 내려앉는 모양이었다.
"...하, ...폐하.."
"......으음....."
담쟁이덩굴이 살짝 돌며 감싸안은 기둥, 창가에 앉아 그에 기댄 채 미동도 없던 누군가를, 깨우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마치 홀로 고요한 자연 속에 녹아든 요정처럼, 평온히 잠든 아이가 조금씩 조금씩 몸을 뒤척였다. 파르르, 나비가 날개짓한
속눈썹이 떨리며 올라갔고, 이윽고 저 성전의 황금보다도 찬란하게 빛나는 금빛 눈동자가 옆을 향했다. 신이 그 손으로 손수
만드사 선한 양치기셨던 왕께 내려주신 은총 받으신 분. 소녀의 잠을 깨운 여성은 면목 없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조아리고는
나붓이 절을 올렸다.
"술람의 샤리아가 인사 올리나이다."
"..., 샤리아, 인가. ...미안하도다. 독서를 하려던 생각이었거늘. 나를 찾아다닌 것이냐."
이 곳은 화려함과 자연이 함께하는 그 축복 받은 궁 안에서도 유독 소박하면서도 조용한 곳이었다. 이 곳이 '왕'이 어릴 적
몰래 학문을 탐할 때부터 숨어들곤 했던 그녀만의 장소라는 것을, 샤리아, 라 불린 여성은 알고 있었다. 손위의 형제들은 어린
막내 둘을 못내 귀여워하며 뛰어놀아주곤 했지만, 작은 아이는 궁 안의 장서관에서 책을 읽는 것을 조금 더 좋아했다. 그리스,
인도, 히타이트, 아시리아, 이집트. 이곳저곳의 모든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는 건, 아이가 생각하기에 왕실에서 태어나는 것의
가장 좋은 점 중 하나였을 정도니까.
"아니옵니다. 왕이시여, 그저 왕의 노래가 듣고픈 버릇없는 마음에 이리 찾아뵈어 휴식을 방해하는 죄를 저질렀나이다. 용서하소서."
"용서할 일도 뭣도 아닌 것을. 수금(Kinnor)을 준비해야겠구나."
"은총에 감사드리옵니다. 축복 받으실 분이여."
"별 것도 아닌 것을, 무에 그리 감사하느냐. 네가 지금 감사해야 할 것은 오직 신과 너를 낳고 또 기르신 양친, 그리고 너 자신 뿐이니라."
왕이라 불린 소녀는 선선히,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옛 어른과 같은 말새와 다르게, 퍽 앳되어 보이는 미모였다. 열 여서일곱이나
되었을까 싶을 정도로. 손때가 묻은 악기를 꺼내어 비단천으로 부드러이 닦는 손길을 잠시 멈춘 것은 샤리아라는 여성의 목소리였다.
"무엇을 읽고 계시었는지, 여쭈어 보아도 되겠나이까..?"
"...음? 아아, 선왕의 기록이었다."
".... 폐하의, 아, 무례를..."
샤리아는 가볍게 중얼거리다 흠칫, 놀라고는 곧 다시 고개를 조아렸다. 소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가볍게 한 손을 들어 그것을 말린다.
내리깐 눈꺼풀이 살짝 고개를 들며, 남쪽 태양과 같은 눈이 다시 곧게 여성을 향했다.
"... 암논 형님과 압살롬 형님을 생각하고 있었느니라."
"....."
샤리아는 분별 있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스스로가 대답해야 할 것과 대답하지 말아야 할 것을 상당히 잘 구분하고 있었고, 지금 이
순간이 후자라는 것 또한 깨닫고 있었다. 그녀는 묵묵히 푹신한 방석 위 나붓이 앉아, 왕의 말을 가만히 들을 뿐이었다. 본궁 하늘에서
춤추는 카나리아의 노래가 희미하게 들렸고, 방 안은 잔잔히 고요했다. 그녀는 가만히, 왕이 먼저 입을 열기만을 기다리며 검은 머리칼을
늘어뜨린 채 그저 왕을 바라볼 뿐이었다.
언제부터였는지,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 언제부터 왕이 그 이름을 잊고, 오직 찬사로만 이루어진 것이 그 자신의 이름을 먹어치우고
자리를 차지했는지. 세상에 다시 없을 은총 받은 지혜의 왕. 평화를 누리소서. 이 땅에 평화를. 모두가 찬사를 바치고 또 존경하옵고
사랑하는 작은 왕이었으나, 정작 아무도 이제 이름마저 불러주지 않는 작은 아이. 그녀의 시간이 수 년 전에 멈추지 않았다면 이제
그녀는 스물셋이 되었을 터였다. 한창 아름답게, 이제 더 이상 봉오리가 아닌 만개한 꽃처럼 피어났을 시기. 아마 누구보다 아름다웠던
부친과 누구보다 사랑스러웠던 모친을 닮아 그 이상으로 아름답게 자랐을 터였다. 그 어릴 적에도 온갖 핑계로 부친이 어르고 감싸고
숨기며 아끼며 애지중지 키운 소중한 아이였으니. 그녀보다 단지 다섯 살이 많았을 뿐인 샤리아가 보기에도, 스무 해 전의 어린 아이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귀하고 행복한 아이였으니까.
"...샤리아. 문득 떠올랐다만, 아비삭 아씨는 평안하시더냐."
"네? 예에. 아비삭 님이라면 기도를 일상으로, 베푸는 것을 섭리로 여기시며 평안하시옵니다."
"...그런가, 다행이구나."
그리고 또한, 언제부터였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그 수많은 형제들이 언제부터 한 명씩, 한 명씩 사라지기 시작했는지. 그것은 왕의
죄가 아니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왕에게 죄스런 미움을 품은 자는 없었다. ──심지어, 왕의 단 한 명뿐인 아우조차도. 그것을
모르는 것은, 이제 와서는 아마 왕 뿐일 것이다. 분명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열댓의 형제였지만, 어느새 이렇게 비어버린 것인지,
왕은 알지 못했다.
"──신께 기원하노니 수냄 여인 아비삭에게 축복 있으라."
왕이 가만히 읊었고, 샤리아는 다소곳이 절했다. 여름의 푸르른 바람에 사붓 춤을 추던 긴 소맷자락 끝이 흘러내리고, 새하얗고
보드라운 손이 드러나 천천히, 악기의 현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직 녹빛 바람이 창가에 흘러든 하늘을 채웠고, 투명하면서도
또 외로운 듯, 또 밝은 듯 노래하는 소리에 요정들조차 숨을 가라앉히곤 귀를 기울였다. 평화, 평화로다. 다윗의 아이야, 그 영광은
너의 것이니. 그 날, 신께서는 모두가 듣도록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날부터, 이 소녀 왕의, 샤리아의, 모든 백성의, 그리고
이 땅의 영화가 시작되었다. 그 감격과 황송함, 감사와 영광을 담아 다시 한 번 나붓 절하려던 샤리아는 문득 몸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녀는 문득 몸을 움츠렸다. 깨달아버린 것이다. 그녀 또한 왕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