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그랬다고 합니다

로하 2013.06.13 23:00 조회 수 : 0






00/





──세계가 통곡한다. 아비가 자식을 베고, 자식은 아비를 베려 들고. 결국 그 심장에 시퍼런 창날을 꽂아넣은 왕은, 그저 하릴없이

멍하니. 비척이며 쓰러지는 아들 : 언제나 충실했고, 남모르는 곳에서도 성실함을 잃지 않았던, 사랑스럽고 사랑스러운 단 한 명의 아이는

원망하는 빛 한조각 남기지 않은 채 서서히 무너져내렸다.


무엇보다 소중한 그의 기사들을 잃었다.

무엇보다 소중한 그의 왕국이 휘청였다.

이제는. 결국은.


아비의 손으로 자식을 거두게 하는구나.


울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왕이었고, 눈 앞의 청년 - 오히려 소년에 가까울 정도로 곱상하고 아름다운 - 은 왕국의 반역자였다. 그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늠름한 모습으로,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심한 상처에도 굴하지 않고 곧게 눈 앞의 역신을

내려보았다. 애간장이 녹아내렸고 숨이 가빠오고 귓가에는 비명만이 울린다. 그러한 그의 심정을 이해한 것일까, 보지 못한 것일까.

부모의 심정을 이해하는 자식은 없다. 그것을 알고는 있으면서도, 왕은 우뚝 선 채 땅 위에 바스라지는 검은 머리칼을 바라볼 뿐이었다.

제 어미를 닮아 흐르듯 반짝이는, 마치 갓 번데기를 찢은 나비인 양 파들거리는 붉디 붉은 눈동자를 볼 뿐이었다.


그리고──


왕은 분명히 보았다. 아이의 입가에 걸린 희미한 미소를, 안도한 듯 살짝, 아주 살짝 휘어진 홍옥의 눈매를. 그리고 그는 이해했다.

어째서 그는 창을 들어 아이를 거두었는가. 어째서 아이는 이러한 비극을 일으킨 것인가. 모든 것을, 이해했다. 그리고 그는, 이번에야말로

손끝을 떨기 시작한 그는 재빨리 힘을 주었다. 떨림을 지우고, 흐느낌을 잠그고 다시금 모두가 바라마지 않는 이상의 왕, 그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아주 살짝이었지만. 몰래 눈물이 맺힌 소년의 입가에 미소를 들려주기에는, 그걸로 충분했다.


그렇게. 마지막이 울렸고. 


비로소 왕의 발밑이 젖기 시작했다. 흔들림 없이 서 있었건만, 쉴 새 없이. 비는 내리지 않았음에도, 촉촉하도록. 



『후회하는가, 왕이여?』


그렇다. 그렇지 않을 리가 없다.


『바꾸고 싶은가, 왕이여?』


바꿀 수 있다면, 묻는 것은 우문.


『설령 그대가 이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처음부터 모든 것을 해야만 한다고 해도?』


바꿀 수만 있다면.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성배의 왕은 바랬다. 그대의 행복을.』

『승천의 기사는 바랬다. 그대의 영광을.』


『그대의 소망은 이루어지리니.』



마치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그것이 끝이었다.







01/





한 여자아이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자. 나이는 올해로 열아홉. 생일은 얄궂게도 성탄절. 키는 약 5피트 9인치. 다소 마른 듯 야윈

듯 하지만, 적당히 가녀릴 정도로 붙을 곳의 살은 붙은 소위 여성들이 동경하는 체형. 백금발이었던 머리카락은 열 살이 되기 전 색이

빠져 잿빛이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우아한 은발로 보이게 된 경우. 북쪽 지역 사람 특유의 흰 피부는 조금 창백할 정도. 거기에

옛 켈트의 피가 섞인 사람들에게만 드문 확률로 나타난다는 투명한 자수정의 눈동자. 이목구비는 유리 인형을 빚은 양 오목조목 예쁘고

섬세하고, 손은 하얗고 손가락은 가늘다. 말하자면, 소녀는 사람들이 말하는 미인이라는 범주에 충분히 들고도 여유로 남는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인생에 관해서. 마악 다섯 살을 넘긴 나이에 부모와 하나뿐인 오빠가 살해당했고, 삼 년간을 모르모트로 수많은 다른 아이들이

옆에서 죽어나가는 걸 보며 어떻게든 버틴 삶. 반짝반짝 빛나던 머리카락의 금빛은 이 때 잃었고, 매일 밤마다 누군가가 사라지는 것이

익숙해진 후, 홀로 살아남게 된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 배우고 노력하고 극복하고 살아남아, 온 몸이 아픈데도 그것이 아무렇지 않게

될 정도가 되어, 그 결과는 햇빛보다 달빛 아래에서 살아가게 되는 일. 두려움 받는 일. 사람과 깊이 알 수 없으며 친해질 수 없고

다가갈 수 없고. 스스로도 한 발자국씩 뒷걸음치는, 결국 외톨이.



그리고 소녀는, 피투성이가 된 채였다. 멀어져가는 의식 속에서 그녀가 느낀 것은 한 가지.

그녀가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Powered by Xpress Engine / Designed by Sketchbook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