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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야기 (가제) 02

누굴까요 2013.06.10 16:19 조회 수 : 25






12/





지나가 버린 옛날 나는 꿈을 꾸었어

희망이 가득했고, 행복했다고 할 수 있었던 날에.

웃음은 그치지 않으리라 믿었고

운명 같은 건 없다고 믿었어


세상은 하나의 노래였고

그 노래는 나를 설레게 했어

그런 때가 있었지


그리고 어느새

모든 것은 잘못되어 버렸어





*          *          *





밤바람은 시원했다. 시에라는 커튼 밖 창가에서, 흩날리는 바람. 희미하게 담긴 바다 내음 따위를 느끼며 깊게 숨을

들이쉬고 있었다. 파도 소리가 들리는 거리는 아니었지만, 기본적으로 사막. 인공적으로 만든 호수와 기껏해야 강 정도만을

접할 수 있었던 곳 태생인 그녀는 바다를 꽤 좋아하는 편이었다. 이렇게 차가운 해안가 특유의 공기를 석조 난간에 턱을 괸 채

맞는 것도 상쾌했다. 거기에 전등불 따위는 커녕, 밤을 밝힐 것은 등불 정도인 이 곳에서는, 금빛의, 은빛의 별가루가 화려하게

흩뿌려져 수놓은 밤하늘이 펼쳐져 있고, 땅에서 울리는 건 사락이는 나뭇잎 소리. 풀 사이를 스치는 바람 소리. 그리고 언뜻언뜻

들리는 풀벌레 울음소리.



".... 음?"



멀리 어딘가에서 들린 소리 한 자락은 잘못 들은 것일까. 별바람의 소리였을까. 어쩐지, 어디선가 노래 한 가락이 들린 듯 했다.

시에라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잘못 들은 게 아니야. 투박하지만, 맑은 음색의 소리였다. 그럼에도 무엇인가 미묘하게 맞지 않는 듯

맞는 듯 싶은 '미완성'과 같은 소리. 드문드문 흘려진 과자 부스러기를 쫓아가는 것마냥, 시에라는 천천히 소리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 뭘까 , 이건. ..내가 아는 악기 중에 이런 음색은 없었던 것 같지만."



시에라는 가볍게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흐르고 흐르고, 적막한 밤의 어둠만이 내려앉은 회랑을 걷고 걷고 계속 걸어. 소리에 취한 듯

밤에 이끌리는 듯, 도착한 끝에 보이는 그림자는 익숙한 모습.



"... 왕자 전하?"



어둠 속에 녹아들 법한 검은 쪽의 머리칼이 살짝 바람에 춤추었다. 그는 시선을 돌려 붉은 눈을 잠시 향하고는, 다시금 내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까지 들렸느냐."


"...으음, 뭐. 조금 내가 이런 소리에 민감하다고 해 둘게. ...지금 무슨 일 하는 건지 물어봐도 될까?"


".....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나..."



그는 가볍게 어둠 속에서 잘 보이지 않았던 한 쪽 손을 들어올렸다. 쥔 것은 시에라의 추측이 맞다면,



"... 피리?"


"전의 것으로는 음높이에 한계가 있어서 새로 만들었노라."


"..그렇구나. 어쩐지 묘하게 음이 다르다 싶었는데. 꽤 독특한 취미를 갖고 있네. 전하는."


"검을 연습하다가 손이 비니 문득 무료해지더구나."


"그렇구나. 하지만 아직 조금 음이 불안정한 것 같던데. 아직 미완성?"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흐응. 잠깐 뜻모를 웃음을 흘린 시에라는 몇 걸음 다가가 물었다.



"조금 여기서 구경해도 돼?"


"그대가 그리 하고 싶다면."


"그럼, 잠시 실례."



시에라는 가볍게 들고 있던 등불을 내려놓고는, 조심스레 자리에 앉았다. 밤이슬은 아직 내리지 않은 것인가, 눅눅히 젖은 땅이 아닌

사각거리는 풀만이 살짝 그 몸을 숙였다. 왕자는 이미 시선을 돌린 채 피리를 깎는 것에 다시 열중하고 있었다. 세밀하고 화려한

조형의 것은 아니었지만, 소박한 미가 있는 것이었다. 마치 오랫동안 잡아서, 장식이 무뎌진 손때 묻은 악기처럼 아름다운. 조금

마음에 든 것인지, 아니면 그녀의 청각, 혹은 미적 감각이 용납을 하지 못했던 것인지, 시에라는 툭, 가볍게 중얼거렸다.



"──소리 자체는 예쁘지만, 제대로 균형을 잡고 높낮이를 맞추려면 조금 더 까다롭게 해야 할지도."


"까다롭게?"


"악기는 섬세하니까. 손끝으로 쓸듯이 부드럽게든, 조금 강하게든. 어떤 방법으로 다루든 소리를 만들 떄에는 하나하나에 굉장히 

신경을 많이 써야 해. 그렇지 않으면 언뜻 듣기에는 좋아 보여도. 계속 감상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음이 달라지는 게 느껴지거든.

그나마 여기는 합주 같은 것은 없어서 어지간히 귀가 밝거나 이 쪽에 파고든 사람이 아니라면 잘 느껴지지는 않겠지만. 

기왕 만들 거라면 완벽한 게 좋겠지."


"박식하구나."


"...에. ..칭찬 고마워."



왕자는 살짝, 잔잔히 웃었다. 밤하늘과 어울리는 낮은 목소리가 천천히 울렸다.



"하면, 연회 도중 그대가 바라보는 악사는 음이 틀린 것이라 이해해도 되겠느냐."


"..뭐, 아마도 그럴 거야."


"유념해두겠도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감안하고 있는 걸. 여기 악사들은 대체적으로 악기 하나하나에 심혈을 기울이,는 것보다는 뭐랄까. 

흥취를 돋운다거나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그런 역할 같다고."


"그 말이 맞다."


"응, 역시 그렇지?"



잔잔한 상대의 웃음에 끌리듯, 시에라 또한 베시시 미소지었다. 평상시의 속 뜻을 모를 법한 - 어떻게 보면 다소 연극적인 느낌마저

드는 것에 비하면, 놀랍도록 다른 얼굴이었다. 정확히 무엇이 다른지는 묘사하기 어렵지만. 굳이 말하자면, 그 나이에 어울릴 법한

십대 후반 소녀 특유의 싱그러운 사랑스러움에 가까운. 그것을 읽었는지 어쨌는지, 왕자는 천천히 다시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갔지만,

분명히 감기는 그 분위기는 훨씬 누그러진 상태였다.



"그런데 이 악기, 그럼 악보는 있는 거야?"


"없도다."


"으음, 그럼 그냥 끌리는 대로, 왕자 전하가 혼자 불고 싶을 때만 불 용도?"



가볍게 끄덕.



"흐응. 그렇구나."


"연회 때 연주하는 일이 없지는 않으나, 보통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불곤 하느니라."


"헤에. 한 번만 들어봐도 괜찮을까?"


"조금만 기다리거라."


"네에-"



시에라는 반짝이는 눈으로 손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손끝이 움직이는 대로, 나뭇결이 깎이고 바람이 담겨서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게 되겠지. 설레는 일이다. 두근두근, 기대되는 일이다. 악기를 만든다는 것은 굉장히 섬세한 손재주가 요구되는 일임에도,

왕자는 막히는 일 없이 슥슥 이어 깎고 있을 뿐이었다.



"왕자 전하는 그다지 안 그럴 것 같은 느낌이 있었는데, 손재주가 좋네." 


"하다보니 익숙해지더구나."


"그렇구나..."



깎여나온 조각들과 가루들을 구멍 주위에서 쓸어담은 청년은 그것을 훅 불고는 피리를 손에 들었다. 시에라는 다소 상기된 듯한

낯빛이었지만, 밤의 어둠이 드리워져 잘 드러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맞을런지."


"...기대된다."


"실망할 것이다."


"흐음. 들어 봐야 알겠지."



그녀의 말에, 베오울프는 잠시 쓴웃음을 머금은 채 대답하고는 곧바로 표정을 바꾸었다. 진지한 얼굴로, 한 음, 한 음, 찬찬히

소리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다소 다듬어지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청명한 소리가 공기를 채웠다. 시에라는 가만히, 더 이상 말을

잇거나 함부로 끊는 일 없이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한 음씩, 다 소리를 내어 보았는지, 그는 입을 떼고 조용히 물었다.



"어떠한가."


"맑은 소리네. 응. 정확도라던가, 그런 걸 전부 다 떠나서. 듣기 좋은 소리야. 역시 만든 사람을 따라 소리가 나는 걸까."


"과찬이구나. 나무가 좋은 것 뿐이니라."


"아니야. 진실인 걸. 아무리 좋은 악기에 아무리 훌륭한 곡이어도, 연주하는 사람이 무감각하거나 생각이 나쁘다면, 그건 듣기 싫어. 

잘 쳐줘도 뛰어난 기술자. 기술자와 연주자를 가르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이 어떻느냐와 무슨 감정을 담아 부느냐, 그것뿐."



──그렇지 않다면 어린 아이의 연주가 그렇게 서툴면서도 듣기 좋을 리 없잖아? 라고, 시에라는 가볍게 덧붙였다. 구슬이 굴러가듯

맑은 목소리가 재잘거렸다. 가을 바람 같은 시원한 소리가 났다.



"그러니까, 왕자 전하는 조금 자부심을 가져도 될 것 같아. 좋은 악기야."



그렇게 솔직하게 말하면서도, 그녀는 또한 숨기는 일 없이 들은 대로 덧붙였다. 이것은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는 그녀의 말을 위한

것 뿐 아니라, 음악적인 감성에 걸린 일이었으니까. 뭐, 자잘한 자존심이나 전문가 특유의 까탈스러움이라는 것이다. 거기에 그 주인이

소숫점 단위로 낮은 음까지 잡아내는 인간 같지도 않은 일을 숨쉬듯이 하는 사람이라면, 더 이상 말할 것도 없겠지.



"...하지만, 음. 그래. 나라면 그, 세 번째 음. 거기를 조금, 아아주 조금 정도 더 긁어서 구멍을 넓히겠어."


"세번째라. 알겠도다."



기분 나빠하는 일 없이, 그는 그녀의 말을 받아들여, 곧바로 다시 조각칼을 들고 구멍을 넓히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가볍게 미소지은 시에라는, 조곤조곤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그리고 연주할 때, 다섯 번째 음에서는 약간 다른 부분을 막을 때보다 좀 더 꽉 막는 게 좋겠어. 약간 바람 새는 소리가 있거든."


"여가 꽉 막으면 피리가 부서질텐데."



순간, 소녀는 다소 얼빠진 표정이었다. 그녀의 옆에서 항상 속삭이던 목소리가 보았다면, 배꼽을 잡고 나뒹굴었을 정도로. 그렇지만

잠시 그녀가 침묵한 것을 베오울프는 다른 식으로 이해했는지 조금 빠른 어조로 내뱉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무엇인가 아니었다,

싶은 그런 미묘한 음색이었다. 그렇게 그는 슬쩍 시에라에게 시선을 한 번 던진 후 다시 피리를 잡고 조각칼을 들었다. 하지만──



"...실없는 소리였다. 흘려넘기라."


"픕.. 부서...피리가, 팍. 픕..."


"...?   ... 그 말이 재미있는가."



그 말을 신호로, 시에라는 그만 폭소에 가까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녀로서는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항상 알쏭달쏭한, 그저

'예쁘기만 한' 미소가 일상인 그녀는, 최근 부쩍 자신이 잘 웃는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어쨌든 지금 재미있는 것은 재미있는 것이었다.

최고의 악기의 그것과 같은 맑은 목소리가 경쾌하게 밤의 공기를 울렸다.



"아하하하, 왕자 전하.. 으앗, 후아. 후우. 픕.. 전하, 생각보다 재미있는 분이었네. 피리가 뚝, 하고..픕... 푸앗."


"...그대, 호흡은 괜찮은가."


"응? 아아, 응.. 아하,아하하하. 응, 괜..찮아, 웃어서. 실례. 미안해."


"여에게 미안해할 것은 없노라."


"뚝,이라니..아하하. 그 정도는 아니니까..!"


"...그런데 여의 그 말이 그렇게 재밌었는가."


"그..래도.. 왕자 전하 앞에서, 실..례... 픕...."



시에라는 다소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토록 시원하게 웃어본 것은 도대체 얼마만일까. 그녀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거의

눈물이 맺힌 듯한 눈으로 호흡을 가다듬었다. 푸르디 푸른 새벽 하늘의 눈동자가, 묽은 산호빛을 띄었다. 



"후아, 이제 좀 낫다. ..응? 응. 오랜만에 덕분에 실컷 웃었어."


"흠."



베오울프는 가볍게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눈치였다. 시에라는 애써 시선을 돌렸다. 지금 그를 다시 본다면 방금의 대사가 또다시

머릿속에서 울릴 것 같았고, 그럼 웃음을 참을 자신 따위 그녀에게는 없었다. 참고 싶지 않은 것 뿐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녀는,

그 덕에 베오울프가 가만히 훗날 헤알드레드에게 같은 농담을 건네고는, "형님. 재미 없어요."라는 냉랭한 반응과 식은 눈에 좌절하리란

것은 알지 못했다. 사실 객관적으로 봐도 그리 우습지는 않은 - 오히려 상당히 분위기가 싸해질 법한 어색한 농담이었지만. 오래

산 사람이든 천재든 어느 쪽이든, 그 면에서도 아마 보통 사람과 조금 다른 것이라고 해 두자.


어쨌든 예이츠의 왕자는 다시금 피리를 잡아 입가에 대었고, 시에라는 가만히 다시 그것을 응시했다. 저 손끝이 자아낼 것이 어떤

음악일까. 두근두근, 가슴이 뛰어. 간질간질한 설레임이 흘러들어. 소리는 이어졌다. 


맑게 울려퍼지는 가락. 바이올린 같은 것의 화려한 소리와는 거리가 멀다. 비유하자면 시골의 그것과 같은, 기교와는 연관도 없는

듯 싶은 소리. 하지만 그 소박함이, 오히려 닿았다. 화려함의 극치라면 이미 맛본 그녀였다. 또한, 그러한 잔재주를 부려 언뜻 듣기에는

잘 연주하는 것처럼 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는 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어려운 것은 아무런 꾸밈 없는 소리. 언뜻 듣기에는

그저 울릴 뿐인 것 같으나, 소리 자체가 곱지 않다면 그저 추할 뿐인. 연주자가 어떠한 인간인지를 곧이곧대로 들려주는 것이었다.


평온한 밤을, 선율이 적신다.


멀리서 울리는 가락이, 풀벌레 소리와 어우러져 그리운 소리를 낸다. 가만가만, 그저 듣고만 있을 뿐이어도 무엇인가 따뜻해지는 그런

소리. 눈 앞에 반딧불의 춤이라도 보인다면, 이보다 아름다울 수는 없으리. 풀벌레 소리, 바람 소리, 사락이는 나뭇잎 소리. 달빛 그림자에

언뜻 언뜻 스치는 반디의 빛. 이런 것을 본 것은 얼마만일까. 정확히 말해, 이러한 기분으로. 이러한 소리를 들으며, 이렇게 있을 수 

있던 것은 얼마만일까.


이렇게 평화로운 밤은, 언제만일까.



가만히, 연주가 끝났다. 시에라는 잠시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푸르디푸른 눈동자가 어둠 탓에 밤하늘에 녹아든 색이었고, 그 빛에 

등불의 빛이 슬그머니 스쳤다.



"...음, 있지. 왕자 전하."


"?"


"... 지금 떠올랐지만, 3, 5, 1, 2, 5, 3, 1, 2 .. 이 순서대로 한 번만 불어 줄 수 있을까? 지금 지은 곡조일 뿐..이긴 해도."



잠시 의아하다는 시선을 향했지만, 왕자는 곧 선선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시에라는 행여나 그가 헷갈렸을까 싶어, 천천히 음계를

한 번 더 불러 주었지만. 가만히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던 소녀는, 곧 한 쪽 손을 입가에 가져다대며 조금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 정확히 말하면, 입을 열었다기보다는 무엇인가 마구 떠오르는 듯 혼자 중얼중얼 대는 것에 

가까웠지만. 



"...음, 마지막에는 2 대신 3으로 넣고... 변주로..... 사이에는 1-3-2 정도...."



베오울프는 다소 얼떨결에 부는 듯한 감이 있었지만, 역시 시에라의 중얼거림을 듣고 그대로 따랐다. 아름다운 붉은 눈을 깜빡이며

잠시 멍하니 바라보기는 했지만, 그래도 굉장히 열심히.



"...거기서는 ... 역시 악센트... 아니아니. 그런 건 오히려 분위기에 맞지 않고. ...."



소녀는 중얼거리며 재빠르게 숫자를 적어내렸다. 그녀는 이미 떠오르는 그 순간 외운 상태였지만, 제대로 보이기 위해서. 그래봤자

땅에, 왕자가 잡고 있던 조각칼로 새긴 흙글씨 정도였지만.



"저기, 이렇게는 어때?"


"?"



청년은 시에라와 그녀가 가리키는 것을 번갈아가며 빤히 보더니, 이윽고 천천히 그녀가 써 준 곡조를 불기 시작했다. 악보를 보고

분 적까지는 없어서일까,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이 다소 서툴러 보였지만. 이미 그 소리 자체가 마음에 든 그녀로서는 전혀

흠이라고 할 것도 없는 점이었다.



"천천히, 조급해하지 말고. 소리 예쁘니까, 괜찮아."



시에라는 가만히, 조곤조곤 속삭였다. 일순 듣기에는 마치 연인의 정담, 한밤 중의 밀어와 같은 달콤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참으로

오랜만이었으니까. 아이들의 단순하지만 맑은 노랫소리를 듣는 것만큼이나, 그녀는 좋은 소리를, 좋은 노래를 좋아했다. 그녀는

최대한 쉽게 설명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착각이었을 뿐인지, 아니면 그저 그가 악보를 보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베오울프는

다소 어렵다는 듯 살짝 미간을 좁혔지만 단지 그 뿐으로, 계속해서 집중한 채 곡을 이었다. 그에 화답하듯 고개를 가볍게 몇 번 끄덕이던

시에라는 이윽고 다시 가볍게 눈을 감은 채 곡에 빠져들었고.



소리가 멈추었고, 그녀는 가볍게 박수를 쳤다. 열렬한 환호- 그와 같은 소란스러움은 아니었지만 진심이 담긴 모습이었다.



"미숙한 연주였는데, 괜찮았느냐."


"아아, 오랜만에 좋은 노래 들었다. 소리도 맑았고. 응. 좋았어!"


"여가 곡을 망친건 아닌가 걱정되지만."


"아니아니. 왕자 전하가 낸 소리에 맞추어서 지은 거니까."


"...그것은 기쁘구나. 기억해두겠도다."


"영광이네. 아아, 오늘 하루가 덕분에 뭔가 뿌듯해졌어."



타의 따위 담기지 않은 솔직한 말을, 기분 그대로, 느낀 그대로 남에게 표현한 것은 얼마만일까. 그러한 대화를 남과 나눈 것은 얼마만일까.

정확히 말하면, 단순한, 표면적인 즐거움과 호불호가 아닌, 정말로 느낀대로 전부를 말한 것은. 그런 시에라의 기분이 닿기라도 한 것인지, 

베오울프는 가볍게 슬쩍 미소를 흘리곤 다시금 몇 번인가를 더 연주했다.


시에라, 그녀로서는 정확히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지만. 아마, 사람들이 '따스해지는 노래' 라던가,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그리운 노래'

라고 칭하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그녀는 멍하니 생각했다.


그녀의 말대로, 그녀는 왕자가 내는 피리의 음색에 맞추어 곡을 떠올렸다. 하지만 무심코, 실제로 들어보니.


──그려지는 것은 평화로운 해질녘 들판. 혹은 막 어둠이 내려앉고, 반짝이는 목동별이 하늘 한 켠에서 빛난다. 그건 마치 여름날 밤과

같아서. 그 예전의 여름밤 같아서, 서로 아무런 악의도, 계산도 없는 솔직한 말을 웃으며 떠들었다. 바보 같다고 스스로 웃으면서도,

모두가 함께 그렇게 웃으며 재잘대며 걸었다. 그저 함께 나누는 그 시간이,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때, 그 순간에도 굉장히 간지러우면서도

따뜻해서. 소중해서. 마치 언제나 그래왔던 듯, 언제나 그랬었고, 언제나 그럴 것만 같았던 시간. 조금은 제멋대로 떠들며 이끌어도,

결국 다 함께 웃어버리는 그런 나날. 


샛별만이 빛나는 어슴푸레한 하늘에는, 어느샌가 층층히 박힌 보석처럼 은빛 강의 별가루가 흐르고, 새로울 것도 놀랄 것도 없었던

일인데도 새삼스레 감탄하고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하늘이었고, 빛나는 별이었고, 귓가에 담아두고픈 바람소리 풀소리였고,

언제까지고 기억하고픈 아름다운 땅이었지만. 사실은, 정말은, 가장 아름다웠던 건, 문득 깨달아버렸다. 그것들이, 어떻게 보면 그저

평범할 뿐이었던 그 모습들이 이토록 아름다운 것은, 


──그 때 그 순간, 당신들과 함께 있어서였기 때문이었으리라고.



눈가가 시큰거렸다. 아릿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드러내는 일 없이, 시에라는 재빨리 그 흔적을 지웠다. 가만히 눈을 감은 채, 그 감각을

조금 숨겼다. 가만히, 말없이 눈을 감은 그녀에게 향하는 왕자의 시선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하지만 곧바로 눈을 뜨고, 화려한 박수 대신

그녀는 가만히 말했다.



"좋은 노래였어."



감히, 다른 수식어도 표현도 찾을 수가 없어. 충분하지 않아. 필요하지 않아. 언뜻 듣기에는 그저 간략한 예의상의 대답처럼 느껴졌겠으나,

담긴 것은 전혀 달랐다. 어떤 화려한 미사여구도, 장황한 수식어도 어울리지 않는다. 부족하다. 그런 그녀의 생각을 읽은 것일까.



"마음에 든 듯 하구나. 다행이도다."


"응. 전하 덕분에, 오랜만에 정말로 듣기 좋은 노래를 들었어. 고마워."



그것은 예의도 뭣도 아닌 순수한 본심. 아직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소녀가 지금으로서 말할 수 있는 것은, 겨우 그 정도 뿐이었으나,

지금만큼은.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여야말로."


"겸손하네. 전하는 조금 덜 그래도 좋다고 생각하지만."



소녀의 가벼운, 나즈막한 웃음소리가 맑게 구르는 소리를 내고, 그에 끌린 듯 청년도 따라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랬다가는 여가 거만해질까 염려되노라."


"설마. 원래 성격이 그렇다면 그럴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하지만. 그리고 약간의 거만함은, 능력이 따라준다면 거만한 게 아니라 

자신감이니까."


"여는 지금도 자신감에 넘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생각될 수도 있겠구나."


"뭐, 지금이 나쁘다는 건 전혀 아니지만."


"그렇다면 되었도다."


"그런가? 그럴지도."



소녀는 작게 키득거리고는 가만히 중얼거리는 듯 대꾸했다. 이후로는 둘 다, 잠시 말이 없었다. 할 말이 없어서도 아닌, 어색한 것도

아닌, 부드러운 침묵. 서로가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했던 평화로운 고요함 속에, 상냥하게 감싸이듯 안겨 있듯, 그러한 기분.

가만히, 청년을, 별보다 깨끗하게 반짝이는 그 붉은 눈동자를, 밤의 미풍에 가볍게 춤추는 그 머리칼을, 새하얗고 곱다고는 할 수 없어도

나긋나긋하면서도 힘이 담긴 그 손끝을, 별하늘과 풀숲과 함게 눈에 가만히 담을 뿐이던 소녀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러고보니 궁금한 게 있지만, 왕세자 전하는 생일이 언제야?"


"헤알드레드?"


"응."


"~~이니라. 그건 어째서 묻느냐."


"그 때 이후로는 또 몰래 쏙 도망치거나 하지 않고 어쨌든 나름 성실하게 하는 것 같으니까. 선물은 조금 기합 넣어서 줄 생각이거든."


"헤알드레드가 기뻐하겠구나."



──뭐, 그래봤자 진짜 성실한지는 가르치는 당신만이 알겠지만, 이라며 어깨를 으쓱하는 소녀를 보고 왕자는 살짝 빙그레 미소지었다.

그의 말에 시에라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굉장히 좋아하니까, 만드는 쪽으로서도 조금 보람 있거든."


"만든다?"


"그건 비밀. 만들고, 보여주고, 태워줄 생각. 뭔지는 추후 기대란 걸로, 괜찮아? 아니면 설마 사전 허락 받아야 할까?"


"..."



그는 잠시 생각하는 눈치였지만, 곧 천천히 입을 열었다.



"헤알드레드와 다른 사람들에게 위해를 끼칠만한 것이 아니라면 상관없노라."


"그렇다면 고마워."


"감사를 받을 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뭐, 그래도 사실 전에 말했듯이. 하나하나 감시 받아도 할 말 없는 입장이란 건 알고 있으니까."


"이런 일까지 규제할 정도로 융통성이 없지는 않도다."


"으응. 뭐, 그럴까나. ──아무튼 기대해도 좋아. 이 근방에서는 절대로 보기 힘든 멋진 걸 보여줄 테니까."


"...헤알드레드에게는 비밀로 해두지."



그 말에, 시에라는 짐짓 놀랐다는 듯, 약간은 과장해서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일부러인 듯, 살짝의 익살스런 재치를 덧붙여서.

연극 배우와 같은 그 몸짓을 풀고, 그녀는 가볍게 놀랐다는 듯, 아니면 유쾌하다는 듯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고마워. 후후. 생각보다 말이 통하는 분이네, 왕자 전하. 이런 장난 같은 것, 이해 못 하실 줄 알았거든. 지금 사과해 둘게."


"그닥 기분이 상하진 않았느니라."


"으응, 그래도. 일단 해 두는 편이 내 속이 편해. 그러고보니, 그럼 왕세자 전하는 올 해가 열 살 생일이셨나?"


"맞도다."


"아아, 파릇파릇한 나이네~ 그래도 나이 두 자리가 되는 첫 생일이니만큼 멋있는 걸 드려야지."



그녀가 『그녀』에게 거둬져, 처음으로 인간답게 대우받고, 도구도 인형도 뭣도 아닌 소중한 아이로 대해진 것이 열 두 살 때의 일. 그 때

그녀의 남동생은 약관 열 한 살. 사실은 그 아이도, 열 살은 조금 더 특별하게 해 주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부족했어. 처음으로 만들어

본 서툰, 재료도 변변한 것이 없었던 케이크에 마치 세상의 보물은 다 받은 듯 기뻐해주었고, 혼자 며칠 간밤을 새어가며 만들어 낸 

마법을 보곤 마치 제가 해낸 일인 양 자랑스러워 했어. 놀래 주었고 즐거워해 주었어. 


하지만 그런데도, 미련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모든 해 생일은 소중했지만, 모든 것을 다 해주고 싶었지만. 그래도 그것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면 적어도 '어린 아이'가 소년으로 바뀌는

그 때만큼은 조금 더 잘 해주고 싶었는데. 그 아이는 그조차도 과분하다고 말했지만, 너무나도 착한 아이다. 아무리 다른 사람 그 누구보다도

그녀에 가깝고 그녀를 이해하고 그녀의 재능을 닮은 아이라 하더라도, 과할 정도의 애어른이더라도 한 번쯤 그런 요란한 생일 파티, 

무심코라도 바란 적 없을 리가 없다. 그나마 『그녀』에게 거둬진 이후로는 그런 것이 없었지만. 그 이후는 겨우 십 년도 되지 않는

짧디짧은 시간.


헤알드레드와 그 아이를 전혀 겹친 적 없다고는 감히 말할 수 없다. 물론 그녀에게 있어 그녀의 동생은 작은 왕세자는 커녕 이 세상 무엇을

준대도 바꿀 수 없는 존재였지만, 그 작고 사랑스러운 왕자 또한 사랑 받을 자격은 충분하고도 남았다. 누군가와 겹쳐 보여진다면 

사과 받을 자격 또한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럼에도, 그녀의 기억이 열 살이란 것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녀는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얼마 안 남았는데, 왕자 전하는 연회날, 악기 연주할 생각이야?"


"그때는 그리할 생각이니라."


"흐음. 기대할게. 거기에 여기의 생일 연회란 건 처음 보니까, 조금 기대될지도."


"생일 연회라고 해서 아주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건 그대 마음에 맡겨두겠다."


"으응. 뭐, 그래도. 조금 다른 것보단 특별할 테니까."



그렇게 말한 시에라는 문득, 하늘의 별을 보곤 시간이 꽤나 흘렀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건 조금 길었을까. 그녀는 다소나마

곤란한 기분으로 툭, 내뱉었다.



"──아아. 늦게까지 방해해서 미안해, 전하."


"들어가는가."


"응. 아마 내일도 아침부터 산호와 농어와 광물에 관한 상담을 받아야 할 테니까."


"...그렇군. 수고하거라."


"네에. 전하도 좋은 밤 되시길."


"...."



우아한 몸짓으로 몸을 일으켜, 살짝 절하고 뒤를 돈 그녀의 귓가에 울리는 건 특유의 맑고 낮은 목소리. 그녀는 마악 옮기던 걸음을

멈추곤, 가볍게 다시 돌아보았다.



"베오울프."


"...?"


"그대가 내킨다면, 그리 불러도 좋도다."


"..왕자 전하 이름으로?"


"여도 처음엔 그대에게 존어를 썼노라. 그걸 역으로 바꾸는 것 뿐이다."



소녀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어째서일까, 갑자기. 아니면 이 곳은, 이름으로 부르는 것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곳일까?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미묘하게 혼란스러웠다. 약간 떨떠름하게 웃으며, 시에라는 대답했다.



"...흐응. ..그럼 이름으로, 베오울프. ...라고 부르면 될까? 아니면 거기서 무언가 다른 호칭이라던가, 원하는 것이라도?"


"그건 그대의 마음이 가는대로."


"....으음.....으으음........"



소녀는 작은 얼굴에 손을 갖다댄 채 생각보다 진지하게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드문 일이라서 그런 것일까. 알 수는 없었지만. 투명한

하늘빛 눈동자를 또르르 굴리며 생각하는 모습이 퍽 앳되게 사랑스러웠다.



"....그럼, 줄여서. 베오, 괜찮아? 너무 건방진가?"


"..."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무엇을 떠올린 것일까, 무엇을 생각한 것일까. 



"아니, 그것으로 충분히 족하다."


"..그럼, 감사히. 베오, 그럼 내일 다시 ── 평안한 밤 되기를."


"그대도."



소녀는 언제나 그렇듯 노래하는 듯한 어조로 사붓이 인사를 건네고는, 다시금 파삭거리는 풀 위를 조심스레 내딛으며 사라졌다.

연주가, 이름을 부르라는 말이, 하늘이, 풍경이, 그 모습들이 너무나 아름다웠던 탓일까.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시에라는

가만히 생각했다. 밤하늘을 그대로 한 줌 오려붙인 듯한 머리카락이, 귓가를 간지럽히며 바람의 소리를 내었다. 걸음을 멈춘 채

별하늘을 바라보던 소녀는 천천히 눈을 내리깔고는, 다시 발을 옮겼다.


─────당신이 언젠가, 내 이름을 불러주는 날이 올까. 











13/




시에라는 조금 곤란한 상황이었다. 도대체 누가 매일 같이 방 문 앞에 꽃을 두고 가는지도 알 수 없었고, 어쩐지 왕성의 회랑을
걸을라치면 쏟아지는 시선들 중 몇몇은 분명히 말해 다른 것들과 달랐다. 적의는 아니었다. 적의나 살의나 혐오감이라면 그녀가 이해하지
못할 리가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단지 그녀의 외모에 끌린 사람들이 -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길에서 스치며 넋을 놓는 시선과도 달랐다.
이것은 그래. 굳이 기억해내자면 그 옛날 고향에서, 열 여섯 살 이후부터 종종 느꼈던──


"... 방 앞에 꽃을 놓는 게 누구인지 파악하기 위해 탐색을 걸어두는 건 그다지 내키지 않는데."


이건 신종 괴롭힘의 일종인 걸까. 그녀는 한숨을 폭 쉬었다. 만약 그녀가 꽃가루 알레르기라도 있었다면 이 이상 잔인한 괴롭힘은 없었겠지.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그런 증세 따위는 전혀 없었지만, 번거로운 일이다. 가끔 그것을 발견한 성 안의 시녀들이 키득거리며 부럽다고 하는
것 또한 그녀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애당초 모든 것을, 세상을 숫자와 논리로 분석해내고 감정이라면 소설의 주인공이나 극의 인물에게
몰입하는 방식을 통해 완벽하게 삶을 '연기'하는 것에 가까운 그녀는 일반인보다 스스로의 감정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했다. 즐겁다, 지루하다,
싫다, 좋다. 단지 이 네 가지 정도를 제외하고는. 하물며 삼천의 시간을 살며 무뎌지고 무뎌지고, 미치지 않으려 발악하고, 옛날 소중한
시간의 기억만을 그 때 느낀 기분까지 완전히 기억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현재의 그녀가 그러한 것을 이해할 리 없다. 

그나마, 요즘은── 조금 다른 기분이 들게 만드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녀는 아직까지도 그것을 그냥 '좋다' '즐겁다'의 범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것이 재미있다는 것인지 그녀 옆의 목소리는 요즘 무엇만 할라치면 낄낄대었지만.


"아아. 몰라. 신경쓰지 말자."


아름다운 눈동자를 조금 흐리며,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스치듯 나부낀 밤하늘색 머리카락이 간지럽고 향긋했다. 오늘 밤은
왕세자의 생일 연회. 그녀는 이를 위해 꽤 고민해 온 것이다. 물론 무슨 선물을 할지에 대해서. 아무리 어려운 걸 하기로 계획했어도,
그녀에게는 어떠한 문제도 되지 않는다. 기껏해야 생일 선물, 억지력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할 리도 없다. 그저 첫 번째로는 이 곳 사람들-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경계심이 없는-이 위협이나 적대감을 느끼고 가지지 않을 만한 것. 두 번째로는 그러면서도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것. 마지막이 어려웠다. 열 살 짜리 소년이 좋아할 만한 것.

솔직하게 말하면, 그녀의 동생, 애칭 『키온』이라는 소년은 그녀에 비하면 아슬하게 부족할지언정 그 본인도 일반인은 가볍게 넘는
그러한 재능의 인간이었다. 그녀는 결코 모르겠지만, 그와 관련되어 이어지고 이어진 결과 왕국의 멸망에서도 수천 년이 흐른 그 땅에서도
악마의 천재란 존재들은 그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아무튼, 말하자면 그는 열 살 때에도 어린 아이라기엔 지나치게 많은 것을
이해했고, 누나를 생각했고, 어른스러운 아이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적당히 종종 놀아주곤 했던 당시의 어린 아이들 또한 환경도 혈통도
그렇다보니, 어지간한 것으로는 그리 선물이라고 할 것도 못 되는 일이었다.

왕자에게는 적당히 세 가지로 대강 둘러대었지만, 사소한 것을 정하기는 어려웠다. 으으, 일단 하고 보자. 시에라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14/




연회장은 꽤나 소란스러웠다. 아니, 이건 생일 연회인 탓이 아니라 그저 이 나라의 사람들의 특성 같았지만. 이곳저곳에서 권해지는
술이라던가 권유를 우아하고 센스 좋게 거절해가며, 시에라는 잔뜩 달뜬 표정의 왕세자 앞까지 나왔다. 흘끗, 그의 뒤를 보았지만 나이
탓인지 무엇 탓인지, 왕은 자리에 없는 것 같았다. 그래, 이게 낫지. 본심이지만, 그녀는 왕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그녀의 가치를
자신의 권위로, 자신의 세력을 뒷받침할 '방법' 으로 보는 것을 시에라가 알지 못할 리가 없는 것이다. 이 바보 같이 순진한 사람들 위에서.
아마 그녀의 능력에 대해, 혹은 마술에 대해 깊은 지식이 없는 것만 아니었다면 당장 온갖 명령을 내렸을 수도 있었을 자임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아무튼, 우울한 생각은 지우자. 그렇게 결정한 그녀는 이윽고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천사조차 질투하리란 표현에 걸맞게,
화려하게 꽃 핀 미소였다. 어쩐지 이 땅의 사람들은 그런 그녀도 그저 조금 예쁘장한 소녀 정도로 보는 것 같았지만. 나름 새로운 기분이었고
마음에 들었으니 상관 없다.


"그럼, 헤알드레드 왕세자 전하. 탄신일을 경하드리며, 선물을 발동..아니 드려도 될까요."


시에라는 고상하게 살짝 절을 올리며 물었다. 북유럽의 궁보다는 황도 로마 같은 곳에서나 더 어울릴 법한 인사였기 때문일지, 아니면 그저
그녀-여러 가지 의미로-였기 때문인지, 시선이 집중되었다.


"응, 보고 싶어!"

"일단 이게 첫 번째."


두근두근, 반짝반짝, 이러한 표현이 정말로 '그대로' 드러나는 소년의 얼굴을 보며 저도 모르게 생긋 웃은 채, 시에라는 커다란 선물 상자를 
내밀었다. 거의 그녀의 몸만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의 크기. 헤알드레드는 감탄의 소리를 흘리며 물었다.


"우와, 크다... 지금 열어봐도 돼?"

"응, 물론."

"와, 장난감...! 고마워, 누나!"


왕자는 환성을 터뜨렸다. 보기 드문, 혹은 이야기로만 들어 보았다던가 하는 온갖 희귀한 장난감들, 재미있어 보이는 알록달록한 책들,
거기에 달콤한 냄새가 나는 맛있어 보이는 과자들과 간식들까지. 그야말로 어린 아이라면 한 번쯤 꿈꾸어 보았을 것들로 가득 찬 상자였다.
그러던 중, 그는 그 신기한 장난감들 사이에서도 무언가 굉장히 달라 보이는 것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 새까만 로켓처럼 생긴 무언가였다.


"아, 그런데 이건 뭐야?"

"..흐응. 궁금해?"

"으응!"

"그럼, 이걸 저어기 밖을 향해 던져봐. 그리고 내가 막으라면, 귀를 막아. 조금 놀랄 수도 있으니까."

"알았어!"


소년은 아직도 발그스레하게 흥분한 표정으로 작은 로켓을 힘껏 던졌다. 연회장 밖을 향해 로켓은 바람을 탄 듯 날아갔고, 시에라는 
무언가 장난을 꾸미는 듯한 미소로 말했다.


"지금 귀 막아."

"엣?"


의아한 얼굴을 하면서도 소년은 착실하게 그녀의 말에 따랐다. 행여나 소리가 들릴까봐 작은 손으로 귀를 꼬옥 움켜진 모습이 퍽 사랑스러워,
시에라조차도 가볍게 쿡쿡 웃음을 흘렸다. 흘끗 둘러본 주위는 조용해서, 어느 샌가 신하들이나 사용인들마저도 귀를 막은 채. 심지어
왕자조차도 - 무려 평소의 담담한 표정으로 - 귀를 막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장면이 제법 재미있었는지, 시에라는 키득대며 수를 세기
시작했다.


"3"


아아, 반응이 너무 즐겁다. 이런 선물이라면 확실히 해 줄 맛이 잔뜩이야.


"2"


시에라는 가볍게, 조심스럽게 귀를 막은 헤알드레드의 손을 내렸다. 고개를 갸웃하며 올려다보는 모습에 가만히 쉬잇, 한 다음 로켓이
날아간 쪽을 보라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1"


자아, 그럼 이제───


퍼어어엉, 하는 굉음이 울렸다. 그리고 이어진 것은───


"오오오오오오오!"

"우와아!"

".....!"


푸른색, 녹색, 붉은색, 노란색, 온갖 종류의 불꽃이 형형색색 밤하늘에 빛을 밝힌다. 터지듯 피어난 온갖 색의 꽃, 그 뿐 아니라 마치 별똥별
처럼 흘러가는 것. 하늘을 나는 용처럼 춤을 추는 것. 별의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것. 온갖 색의, 온갖 형태의 꽃에 모두가 탄성을 질렀다.
본 적 없는 것일 터다. 당연한 일이겠지. 어렵다고 할 수도 없는 것 - 심지어 조금 시간이 지나면 마술 따위 쓰지 않고라도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것이었지만 - 그러한 반응이 묘하게 기뻤는지, 시에라는 약간 고양이 같은 입매를 띈 채 연회장 안을 다시 슬그머니 둘러보았다.
아직도 환호하는 사람들, 마치 무언가 대단한 것이라도 본 것처럼 방방거리는 작은 왕세자, 그리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조금 놀란 기색의 왕자까지. 이것은 이것은, 보람이 있네. 시에라는 살짝 어깨를 으쓱했다.


"응! 누나, 더 없어? 또 보고 싶어!"

"──으음... 이건 더 없지만... 대신, ... 베오. 한 10분 정도만 왕세자 전하를 빌려도 될까? 안전은 절대 보장할게."

"...... ...여의 눈이 닿는 곳에서는 안되는 것인가."

"... 솔직히 말해서, 당신도 함께 가도 상관은 없지만. 그거 뭔가 장면이.. ...뭐, 멀리 갈 건 아니고. 아마 보이겠지만, 당신 시력이라면."

"......"


꽤나 아리송한 말투였다. 뜻을 알 듯 모를 듯한 도는 표현에, 베오울프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서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에라는 그에
가벼운 기쁨을 담아 밝게 외치듯 말했다.


"알겠도다."

"야호! 고마워! ──그럼, 왕세자 전하. 꽉 잡아. 놓치면 안 돼? 물론 놓쳐도 다치는 일은 없겠지만!"

"응! 알았어!"


순간이었다. 소년이 두둥실, 공중으로 떠오른 것은. 깜짝 놀란 얼굴로, 아이는 손발을 움직여 보았다. 마치 파닥파닥, 날개짓하는
작은 새처럼 비틀비틀 움직이는 모습이 꽤나 귀여워 시에라는 조금 웃어버렸지만. 왕자는 깜짝 놀라 조금, 아주 조금 눈을 크게 떴다.
그걸 눈치챌 수 있었던 것은 시에라 정도였겠지만. 


"...!"

"어? 어어어어?"


그리고 소녀는 몇 발자국, 땅을 달음박질했다. 헤알드레드의 눈이 크게 떠졌다. 소년은 지금, 분명히, 날고 있었으니까. 타고 있는 것은
아마 빗자루-로 보이는 물건. 연회장의 천막 밑을 스치듯 나가, 소녀는 별하늘 속을 날았다.


"빗자루라니. 사실 내 미적 기준에는 완전히 미달이지만!"

"어, 우와아아!"


유쾌하게 말하며 소녀는 쏟아지는 별자리 한 가운데가 된 양 춤추듯 움직였다. 그런 시에라를 꼬옥 잡은 채, 헤알드레드는 온 세상에 펼쳐진
별빛을 보고 아득한 아래에 그려진 바다와 들판을 보는 데 정신이 없었다. 멀찍이서 깜짝 놀란 신하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흐릿하게지만
조금 놀란 눈빛의 왕자도 보였다. 밤바람이 귓가를 스쳤고 파도 소리가 스며들었다.

아마 평생을 이 땅에서 산 헤알드레드 왕자 본인도 이러한 풍경은 여직 본 적이 없었겠지. 높이 날아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저 너머까지
본 적은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대다수, 적어도 이 시대 대다수에게는 당연한 것. 아련히 떠오르는 옛 추억에 젖으며, 문득 시에라는 조금
바랬다. 이제는 그러한, 땅 위에서 눈 앞만을 보고 살아왔으며 그러고 살 사람들이 더이상 아니게 된 이 아이가 부디 달라지기를. 잘 이끌기를.
생각보다 넓으며, 또 넓지 않기도 한 세상에서 부디 너는──


『여태까지의 너라면 과한 참견이라고 알아서 끊었을 생각이구나.』


시에라는 무시했다. 뺨을 적시는 바람에 집중했다. 눈을 감고, 마치 노래하듯, 흐르듯. 언제나 좋아했던 하늘. 언제나 즐겼던 비행. 물론
한참 전까지의 이야기면서도. 아. 문득 자신이 너무 정신을 팔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을까. 시에라는 곧 부드럽게 방향을 돌려
연회장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즐거웠어?"

"응! 누나 대단해!"

"뭘 이런 걸 갖고. 생일 축하해. 왕세자 전하, 선물이 마음에 들었다면 기뻐."

"정말 좋았어! 지금까지 받은 것중 세손가락 안 쪽에 남을 정도로 기뻐!"

"그렇다면 다행이야. ──베오, 허락해 주어서 고마워."

"무엇을. 여야말로 헤알드레드에게 이런 선물을 준 그대에게 감사한다."

"뭐, 만약 날아보고 싶다면 나중에 언제든지 말해줘!"


말을 마친 시에라는, 가볍게 다시 한 번 절했다. 신대의 북유럽보다는 중세의 궁정에나 어울릴 법한 모습을 보이고, 서서히 다시
곧게 선 소녀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리고 왕세자 전하, 다시 한 번 생일 축하해. 멋진 한 해가 되길."

"응응!"

"──....! 어머나. ...."


시에라는 그녀로서는 보기 드물게 당황했다. 순간 할 말을 잃었으니까. 그녀에게 꼬옥 달라붙어 반쯤 매달리듯, 반쯤 달라붙은 듯한
소년은 폭 파묻었던 얼굴을 들고는 방긋 웃었다.


"헤헤, 역시 누나는 정말 좋아!"

"... ..... ...."


이유는 몰랐다. 하지만 어쩐지 먹먹해졌다,면 감히 네가, 라면서 비웃음당할까. 누나는 정말 좋아. 소년의 목소리에 그 옛날 아이의 모습이
겹쳤다. 시에라는 희미하게, 아주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나도 아직 멀었구나. 이걸로 흔들리다니. 멍하니 생각했지만,
어쩐지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말이 끝나는 것이 아쉬웠다.


"... 응. 나도 왕세자 전하가 좋아."

"정말 고마워!"


여전히 포옥 파묻히듯 매달린 채, 소년은 고개만 들고는 활짝 웃었다. 마치 해바라기 같은 그 웃음이 굉장히 눈부셔서, 그리고, 그의
미래에 대해 대강이나마 아는 그녀로서는 감히 보기 부끄러울 정도로 안타까워서, 어쩐지 애달파서, 미안해서. 그저 함께 웃어주는 대신
가볍게 쓰다듬어주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천만에. ...전하, 열 살은 .. 아니, 아홉 살도. 열한 살도 마찬가지니까,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까. 한 해를, 매일을 부디 후회하지 않게. 
소중하게, 멋지게 지내."


어떠한 시간이라도 다시 돌아오게 할 수는 없어.
아무리 행복하고 소중했어도, 그렇게 당장 느끼더라도 그 진짜 가치를 깨닫는 것은 결국 그걸 잃어버린 후.
하지 못한 일을 후회하더라도 어쩔 수 없어.
진짜로 잃어버린 것이, 놓쳐버린 것이 무엇인지는, 전부 다 지나가버린 후에 깨달으니까.

대부분은, 그러니까.

너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모두에게 사랑받는 꼬마 왕세자님께 행운이 있기를."


아무것도 모르는 채 천진하게 웃는 이 아이에게, 지금 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말 정도.


"응응!"

"... 그래, 가서 이제 맛있는 것도 먹어야지."

"응, 누나도 이쪽으로 와!"

"... 으응. 잠깐, 저것들 좀 정리하고 갈게. 먼저 가 있어."

"내가 도울건 없어? 둘이 하는 게 더 빨리 될거야!"

"으응. 아니야. 거기다가 생일 주인공이니까. 전하는 가서 즐겁게 놀고 있어. 마음만 감사히 받을게."

"우응... 알았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이해한 걸까. 헤알드레드는 조금 시무룩해진, 약간은 가라앉은 얼굴로 추욱 쳐져 뒤로 돌았다. 이걸 어쩌나. 
시에라는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논리적으로도 마술 도구들을 함부로 건드리는 건 그다지 권할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지금의 그녀는,
저 아이를 헤알드레드 본인으로, 누군가와 겹쳐 보지 않고 똑바로 볼 자신이 없다. 그렇지만 시무룩한 것도 결코 보고 싶지 않은 걸.
그리고 무엇인가를 떠올린 듯, 소녀는 재빨리 한 걸음 나아가 소년의 귓가에 속삭였다.


"왕세자 전하."

"응?"

"다음 번에는 낮에 몰래 날아보자?"

"응응!"

"먼저 가서 있어! 그리고 사실, 이거 마술 도구라서 전하는 함부로 만지면 안 되는 거였거든. 알겠지? 내 음식도 남겨두고?"

"응!"

"...그럼, 여도 먼저 돌아가겠도다."

"아아. 응."


기분이 그새, 그걸로 풀렸는지 헤알드레드는 환히 웃으며 종종거리며 돌아갔고, 베오울프 또한 그의 뒤를 따랐다. 가볍게 손을 흔들며 
인사한 시에라는 그들과는 반대로, 이리저리 잔해가 널린 쪽을 향해 걸었다. 슥슥, 몇 번 손을 움직이니 마치 아무것도 없었던 듯 

자리는 깨끗했으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마술사 아가씨가 그 날 밤 더 이상 사람들 앞에 나오고, 그 사이에 섞이는 일은 없었다.







15/




아무도 없는 넓고 넓은 세계에 나는 홀로 서 있어.

펼쳐진 하늘. 드넓은 바다. 광활한 초원. 싱그러운 숲. 험준한 산. 고요한 강. 사락이는 풀. 아름다운 꽃. 지저귀는 새들. 산을 수놓는
사슴. 언뜻 비치는 물 속 물고기의 꼬리. 세상에 다시 없을 것 같은. 말 그대로의 이상향 같은 세상에서. 나는 혼자 서 있어.

'바깥'에서는 고함이 들려와. 고함이. 간청이. 속삭임이. 문을 열어달라고. 네 속에 내가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하지만 그건
사람이 아니지. 정확히 말하면. 나 밖에 볼 수 없는 그림자들.

그리고 내가 서 있는 곳에는 아무도 없어. 멀리서 언뜻 아이들의 웃음 소리,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만 너무 멀어서 닿지
않아.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아. 분명히 전에는 이 곳에도 다른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겠지. 지금은 없고, 닳아 뭉개져 흐릿해졌지만,
분명히 누군가 있었다는 발자국이, 마셨을 것이 분명한 여러 개의 찻잔이, 내가 좋아하지 않는 레몬 파이가 남아 있었으니까.

문득 나는 내게 누군가 웃으며 말을 거는 모습을 봐. 포크로 쿡, 타르트를 찔러 내게 내밀고. 재잘거리며 방긋 웃어.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향긋한 바람에 취한 듯 춤을 추고 목소리는 봄하늘을 나는 듯 울려. 나는 그것이 어쩐지, 너무나도 기쁘고 너무나도 행복해서. 조금 눈물이
나와버려. 그리고 내가 입을 열고, 포크를 받고, 웃는 순간 나는 깨어나. 

그리고 꿈에서 깨어난 나.
내 세상에는 또 나 혼자 뿐.

어쩐지 울고 싶어졌지만. 혼자 내버려두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어졌지만. 더 이상은 싫다고 매달리고 싶어졌지만.

말할 수 없어. 
말하지 못했어.
말하지 않았어.

그렇게 그렇게. 금속 촛대에는 녹이 슬고, 찻잔은 이가 빠지고, 타르트는 색이 변하고. 나는 꿈을 꾸고 일어나는 것을 반복하고. 그렇게
언제나처럼 눈을 다시 떠 보면.

그렇게 언제나처럼 나는 다시 외톨이.




16/




시에라는 나즈막히 신음소리를 냈다. 온 몸이 불로 지진 듯 욱신거리는 기분이었다. 좋지 못한 예감이 든 탓일까. 그녀는 비척이며
몸을 일으켰다. 기절하듯 잠든 이후, 아직 새벽은 내리기 전. 동녘 끝에서 희미한 빛만이 새어나오는 검푸른 하늘을 내다보며, 그녀는
차가운 공기를 깊게 들이쉬었다. 폐부가 뚫리는 듯, 차갑지만 맑은 느낌이 들었다. 

언제나처럼, 같은 꿈.

이미 기나긴 시간 동안 색은 커녕 길이조차 변하지 않은 흑단의 머리카락이, 약간의 땀에 젖었는지, 뺨에 조금 달라붙었다. 그것이 
불쾌하다는 듯 다소 거칠게 떼어버린 그녀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정신을 차리고. 흠칫 깨어나고는. 차가운 북쪽의
바람이 멋대로 뺨을 할퀴게 내버려 두었다.

멀찍이서 떠오르는 해가, 어쩐지 평소의 찬란한 금빛이 아닌. 마치 노을과 같이 기분 나쁜 붉은 빛이라고 생각하며 시에라는 일어났다.
이상한 기분이 든다. 고대부터 내려온 은혜로운 태양의 빛이, 어째서 이토록 무서운 날일까.

기분 탓이리라.  

문득, 자신의 '예감'은 단 한 번도 틀린 적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시에라는 애써 그것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지금의 그녀에게 좋지
않은 일 - 그러한 '예감'이 들 정도의 일은 단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것은 누구에 대한──? 그런 의문이 자연스레 떠올랐으나,
그녀는 흠칫 놀라 이윽고 그마저도 지웠다.

침대에서 내려온 그녀는 새하얀 잠옷을 적당한 옷으로 갈아입었으며, 군데군데 뻗친 머리카락을 설렁설렁 두어 번 빗질했다. 얼음장 같이
차가운 물로 얼굴을 적시고 입을 헹구고. 다소 거칠면서도 폭신한 수건에 얼굴을 파묻듯 닦은 후, 그녀는 방 밖으로 나갔다. 




*          *          *




사각사각. 아침의 일과 조례와 방문자 면담을 마친 시에라는 가만히 깃펜을 들곤 서류를 확인하고 있었다. 한 쪽 턱을 괴고 지루하다
고, 나른하다고 외치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그마저도 고운 모습이라는 것에 반박할 자는 없었다. 꿈자리 때문일까, 하루 종일 조금 피곤
한 느낌이다. 펜을 내려놓고 잠시 기지개를 쭉 피며, 가볍게 하품을 한 그녀는 찻잔을 들었다. 아아. 그러고보니 벌써 이 시간인가.

헤알드레드와 잠시 놀 시간이었다. 이것저것 신기한 -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함께 과자를 구워 나눠
먹거나, 자잘한 마술을 보여주는 짧은 휴식 시간. 그녀는 미묘한 해방감마저 맛보며 가뿐히 몸을 일으켰다. 긴 머리카락이 허리께에서
살랑였다. 오늘은 뭘 하는 게 좋을까. 평소와는 조금 다르게, 오늘은 과자가 아닌 키쉬나 갈레트 같은 거라도 만들어 볼까. 마술 잔기야
어차피 한 번 보고 말 거니까. 정말이지 이 시대의 이 지방에는 카카오랄까 초콜릿이 없는 게 유감이야. 녹여서 만든 따끈한 초콜릿에
오트밀과 견과류를 넣은 쿠키, 말린 과일을 넣어 구운 비스코티, 아니면 그거에다가 치즈나 빵, 크레이프 조각을 찍어 먹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거야. 타피오카 같은 것도 미련이 남네. 음음, 일단 가서 물어보고 하는 게 좋겠다.

그녀는 언제 컨디션이 나빴냐는 듯, 가벼운 콧노래마저 흥얼거리며 회랑을 걸었다. 지나가는 신하들이나 시녀들이 먼저 인사를 건네고,
그녀 또한 특유의 경쾌한 말투로 부드럽게 돌려주었다.

그녀의 방에서 왕세자의 방까지는 꽤 되는 거리. 궁중의 보물인 만큼, 가장 깊은 곳, 가장 안전한 곳에 있으니까. 헤알드레드의 방은.
그렇게 향하는 길, 갈림길에서 한 쪽으로 꺾은 그녀는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묘하게 꺼림칙한. 이건 마치──

머릿속에서 답을 내놓는 순간, 시에라는 달렸다.

체력적으로 자신이 있는 분은 결코 아니었음에도, 달리고 달리고 계속 달려서. 열심히 달음박질을 했다. 늦지 말기를. 아니, 그저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정답이 아니기를. 

그리고 그녀는 방문을 열어젖혔다.






17/




베오울프는 가볍게 이를 악물었다. 그나마 그가 그 시간에, 제대로 얌전히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인가를 보기 위해 들렀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헤알드레드가 어떻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아무리 베오울프, 그라 하여도 눈 앞에 보이지도 않는 일 -
그것도 습격 - 을 전부 다 알고 대처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 하지만 단지 그것뿐, 상황은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가 들어왔을 때, 이미
습격자들은 헤알드레드를 기절시킨 채 데리고 있었으니까. 말하자면, 현재 소년은 인질과 같은 상태란 것이다. 거기에 적은 다수. 아무리
그가 일 대 다수도 어렵잖게 해낸다 해도, 까딱하다 저 중 하나가 헤알드레드를 해치면 의미 없는 짓이다. 무엇보다 우선해야 할 것은
헤알드레드의 안전. 

──차라리, 자신에게 검을 버리라던지 하는 쓸데없는 수작을 걸면 상황은 낫겠지만, 그 정도를 구분할 머리는 있는지 그들은 오직
헤알드레드를 데리고 도망치는 것이 나은지, 아니면 그를 - 죽이는 것이 나은지. 그것을 오직 판단하는 듯 보일 뿐이었다. 답을 정한
것인지, 아니면 아직 설전을 벌이는 중인지. 그는 순간을, 틈을 보일 것을 기다릴 뿐이었다. 섣불리 움직이는 것 따위, 어쨌든 결과적으로
현재 헤알드레드가 저들 손에 있는 이상은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시간을, 순간을 놓치지 않는 것. 그것이 급선무. 그리고.


"──그냥 죽여버리,──?!"


한 명이 풀썩 쓰러졌고, 순간 한 떼의 무리는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 틈을 놓칠 새 없이 베오울프는 사라지듯 움직여 헤알드레드를 잡아
채었다. 차라리 다행이게도 기절한 소년은 눈을 뜨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그저 늘어진 채 가만히 잠자듯 있을 뿐이었다. 헤알드레드가
이 쪽에 있다면, 이제 다른 것은 걱정할 필요조차 없다. 예상이 어긋났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는 남자들의 외침이 들림과 동시에, 베오울프는
땅을 박찼다.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지금은. 그들이 한 행동의 대가로,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아무런 반성도 없이 끝내 주는
것은 과하게 관대한 것이다. 필요 이상의 고통을 줄 일은 없지만, 필요한 만큼의 대가는 치뤄야 마땅하다.

하나, 둘, 한 명씩 쓰러져가는 자신들의 동료를 보며, 남자 중 몇 명이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었다. 뜻대로 되지 않아 그러는 것인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마술사, 였나!"


내뻗어진 검은 그림자를 간신히 피했다. 경이에 가까운 몸놀림이었다. 간드였나 무엇이었나, 마술에 대한 것은 기본적인 소양 뿐인 그로서는
알 리 없었다. 사실, 중요하지도 않은 일이었다. 계속해서 쏘아지는 검은 무언가를 피하며, 서서히 그는 그것에 대해 파악해가고 있었다.
움직임이라던가, 그 한계 따위라던가. 쾅, 근처에서 무엇인가 박차진 듯한 소리가 울렸다. 상관 없었다. 그리고, 술자의 목 앞에 검이 
들이대졌고. 얇은 피부에 한 줄기 붉은 선이 그어졌음에도, 


그는 웃었다. 


그리고 동시에, 베오울프는 자신의 손 - 검을 잡지 않은 다른 손에 끈적하고, 뜨거운 무언가 흘러내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엇인지, 굳이
쳐다볼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잘 알고 있는 감촉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고통이 없다. 그렇다면, 이것은 누구의──? 

원하던 상대가 멀쩡한 것을 깨달은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천천히 시선을 아래로 향하고, 조금 옆으로 돌린 왕자의 눈에,
밤의 베일마냥 드리워진 검은 머리카락이 들어왔다. 새빨갛게 물든, 상아색 옷자락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갓 태어난 새끼 새마냥
파들거리는 새하얗고 가는 어깨와, 평소보다 흐려져 가늘게 떨리는 묽어진 푸른빛의 눈동자. 


"시,에라."

"..마술,사, 상대로. ..방,심하면, 위험, 하다고...?"


다소 힘겨운 얼굴로 소녀는 억지로 미소지었다. 그것이 마지막. 마치 우아하게 왈츠의 스텝을 밟는 듯, 치맛자락이 가볍게 춤추었다.
실이 끊어진 인형이 떨어지듯, 가냘픈 체구의 소녀는 그대로 무너져내렸다. 그제서야 그는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이미 상앗빛보다도,
붉은 색이라고 하는 것이 알맞게 된 옷과, 스르륵 사라지는 검은 연기. 순간 멍하니 눈을 크게 뜬 그였지만, 그렇게 시간을 허비할 정도로
풋내기나 바보는 아니었다. 오히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눈 앞의 간자들이 당황하는 사이, 그는 재빨리 다시 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땅을 박찼고, 은빛이 갈랐다.






18/




"누나, 누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그녀는 뒤를 돌았다. 검푸른 머리카락이 사붓이 나부꼈다. 흠칫, 발 밑에 밟히는 돌의 감촉. 그리고 그것을
전해줄 정도로 얇은 샌들과. 가장 많이 갔던 세계의 고대 국가들에서 입었다는 의복 -튜닉 등- 과 유사한 디자인의 옷, 그 부드러운
실크의 천이 살포시 새하얀 다리를 감쌌다. 소녀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뒤를 돌아서자 보이는 것은, 약간은 제멋대로 군데군데 뻗친
은빛 도는 잿빛 머리카락의 소년. 약간은 어린 티가 남아 있고, 나이는 대강 열 여서일곱이나 되었을까. 푸르디 푸른 소녀의 눈동자보다는
다소 어두운, 저녁 어스름과 같은 군청의 눈동자. 조각한 듯한 이목구비는 섬세한 인형 같다. 탄탄한 근육과는 거리가 먼 마른 체격의
소년이었지만, 소녀가 그렇듯 지독히도 아름다운 것만은 확실했다. 차이라면 머리카락과 눈의 색. 그리고 조금 더 톡톡 튀는 장난기,
재치와 - 알 사람만 알 책임감이나 긍지 따위가 한데 모여 있는 소녀의 눈빛과는 달리, 훨씬 더 온화하지만 조금은 더 단순한 구성이라는
사실일까.


"──아아, 미안. 키온, 불렀어?"

"응. 무슨 생각을 했길래 계속 불러도 못 알아들었어?"


──설마 또 유령들이 괴롭힌 거야? 라고 걱정스레 묻는 소년을 보고, 소녀는 웃었다. 그들에게 시달리는 건 너도 마찬가지일진대. 심지어
너는 그들에게조차 명할 수 없고 휘어잡을 수 없을 정도로 상냥한데, 그런 네가 나를 걱정하는 거니. 하지만 소년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는 '잊는 것'을 할 수 없을 존재임에도, 방금 전까지의 기억이 희뿌얬다.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치, 누군가 물을 뿌린 수채화마냥 번져, 제대로 떠오르지 않았다. 그것이 영 마땅찮고 불만
스러웠지만, 동시에 꽤 새로운 기분이란 것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아무튼, 각설하고. 대답을.


"으응. ...어쩐지 흐릿하지만, 꿈을 꾼 것 같아서."

"꿈?"

"응. 기분 나쁜 꿈..이었는데 마지막에는 어쩐지 조금 마음에 들어버렸달까."

"헤에. 어떤 꿈인데? 아, 누나. 젤리 하나 먹을래?"

"쓴 맛 나는 거야?"

"아니. 으큼, 셔..."

"아하하. 하나 줘."

"응. 여기. 그래서, 그 꿈 내용이 뭐였어?"

"아, 고마워. ...으응. 그게...."


소녀는 떠올리려는 듯 작게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초반부는 마치 상상조차 하기 싫은 것이라는
듯, 흡사 지옥에 떨어진 듯, 말하는 것만으로도 절망의 끝을 보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렇게, 나는 혼자 떨어져서. 계속 죽고, 죽고. 살고, 구하고, 절망하고, 죽고. 그저 그걸 반복하게 되어버렸어. 사실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어쩐지 그냥 내버려 둔달까, 알아서 하도록 방관하고 포기할 수가 없어서, 괜스레 끼어들어버리곤. 
항상 후회하고 나 자신을 바보같다고 비웃는 것의 반복."

"... 그렇구나. 응, 누나. 그러면 그 마음에 들었다는 마지막은?"

"으음. 그게, 아. 응. 굉장히 좋은 마을이었어. 사실 나라,였지만 적어도 지금 이 우리 나라의 규모에 비하면 아득히 작았으니까. 
..그래. 예의 바르게 나라,라고 하자. 아무튼, 다들 정말로 바보 같이 상냥하고, 이기심의 이, 자도 없어서.  오히려 내가 조금 나를
이용해 먹으라고 답답해 할 정도였어. 그리고 너무 착한 것들 같아서, 조금씩. 내가 어떤 인간인지를 드러내면, 순식간에 외우고
계산하고 답을 내고 만들고 고안하는 걸 숨 쉬듯이 해내면 좀 시선이 달라질까 싶어서 슬그머니, 조금씩 해 보았는데."

"해 보았는데?"

"글쎄, 나더러 역시 마술사 아가씨는 대단하시네요! 이러는 거야. 그 말까지 들으니 그런 예상을 하고 목표를 짜고 행동한 내가
바보 같아지더라고. 정말이지, 그렇게 살면. ...손해 볼 텐데."

"바보 같다...그렇구나. 그럼 누나는 싫었어? 그 사람들."

"... 그런 걸 싫어하게 된다면 싫어하는 나 자신이 한심스러워질 거였다구."


──오히려, 너무 우직하고들 밝아서. 어처구니 없을 정도였다니까. 에라, 모르겠다 싶은 심정으로 조금 도와준 적도 있었고. 응, 
역시 위험한 늑대 사냥 때는 남몰래 방어 마술을 쳐 두길 잘 했지. 정말로 큰 일 날 뻔 했었다니까. 누구는 또 너무 열심히 무슨 
경작법을 개발하는데 근본적으로 전제에 잘못된 것이 깔려 있어서, 그걸 스스로 깨달을 수 있게 조언해주는 게 참 번거로웠지. 
하지만 응. 결과적으로는 다 잘 되었으니 좋은 일이지만.

재잘거리며 웃는 소녀를 보고, 키온, 이라 불린 소년은 빙긋 웃었다.


"누나. 그 사람들을 좋아하는구나."

"...? 키온, 무슨 말이야. 내게 있어서는 너.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랑, 이 땅의 사람들이 제일인 게 당연하잖아. 임금님은 싫지만."

"그럼 여기를 빼면. 누나가 '여행'한 곳들 중에서는."

".... ..... 뭐, 나쁘지는 않았어."


키온은 피식 웃었다. 누나는 혼자서만 자신에 대해 모른다. 다른 모두가 아는데도, 스스로만 모르고 스스로만 아니라고 부정한다. 
그렇기에 더 가련하고 사랑스러운 누이일 수도 있겠지만. 그녀에게 자신은 세상의 중심과도 같다는 것을 아는 소년은 안타까운 듯,
아련한 듯한 눈으로 소녀에게 물었다.


"다른 사람은? 혹시 개인으로 인상 깊었던 사람은 없었어?"

"──글쎄... 아."


소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재빨리, 신이 난 듯 종알거렸다. 그러고보니, '유령들이 사라지는' '목소리가 조용해지는' 사람이 있었어.
어, 정말? 응, 사실이야. 처음 봤을 때, 갑자기 주변이 고요해져서. 나, 그렇게 평화로운 조용함은 처음이었어. 정말로 너무 부드럽고
따뜻하고 좋은 공기라서. 응, 어쩐지 계속 근처에 있고 싶다고 생각했을지도. 그 때부터 조금 관심을 가졌달까. 헤에, 그렇구나.
얼굴이라던가 능력은? 그런 건 아무래도 좋지. 응, 객관적으로 봤을 때는 충분히 최상위 평가를 받고도 남겠지만 어쩐지 그 쪽은 미적
기준이 다른 것 같더라고. 하지만 사실, 응. 딱히 그런 것은 상관 없어. 능력..은, 응. 유능하기도 한데, 그 나라를 포함한 일대에서
가장 강한 검사, 라고 알고 있어. 흐응. 그렇단 말이지. 그럼 혹시 그냥 그렇게 관심 가진 게 끝?


"..아, 아니. 꽤 마음에 들었지만."

"호오, 어떤..?"

"응. 뭐랄까. 그래. 키온, 너라던가, 이 곳의 몇몇 사람들에게서 본. 그리고 '여행'을 다니면서 드물게 본. 으응. 반짝반짝함.
굉장히 맑고 반짝반짝했어. 분위기랄까, 느낌이."

"반짝반짝?"

"응. 비유하자면 새벽 종의 청아함. 잘 갈린 검의 날카로운 고결함. 그리고──응. '나'는 절대로 할 수 없는, 노력하는 사람,
나아가는 사람만이 갖는 반짝반짝함. 그런 게 너무 예뻐서, 어느 순간부터인가 시선으로 찾고 있었을지도."

"그렇구나아."

"앗, 앗. 그리고. 응. 피리 소리. 연주하는 악기 소리, 음색이 굉장히 맑고 투명했어!"

"맑고 투명한... 확실히, 음색은 그 사람에 대해 숨기는 것 없이 알려주니까. 그렇구나. 응, 누나. 대강 이해했어. 어떤 사람인지,
머리속에 그려지는 걸."

"그렇지, 그렇지? 아마 키온도 만나보면 마음에 들 거라고 생각해!"

"그렇네. 기대되는 걸. 누나가 그렇게 말한다면, 틀림없는 사실일 테니까."

"으응, 물론이지! 나, 거짓말은 하지 않으니까. 키온에게라면 특히나!"


자신만만한 웃음을 짓는 소녀를 보며, 키온은 가볍게 픽, 하고 웃었다. 마치 봄바람처럼 살랑이며 웃고 재잘대는 소녀의 표정은
빙글빙글 휙휙 바뀌었지만, 결국 너털웃음을 터뜨리듯, 해바라기가 피어나듯 환한 웃음으로 돌아왔다. 


"누나."

"응?"

"...이젠 돌아가는 게 좋아."

"..에? 돌아가다니.. 어디로?"

"...누나가 있는 지금 그 곳. 누나가 방금 즐겁게 이야기한 그 곳."

"──? 그건 꿈,이잖아. 키온, 지금 무슨 말을───. . . "

"...누나. 부정하지 말아줘."


나는 누나랑 결국 헤어졌어. 나는 남쪽 바다로 떠나는 배에 탔고, 누나는 괴물 투성이의 왕도에 남았어. 있지, 사실 나. 누나를 그런
데에다 홀로 놔두고 싶지 않았는데. 보내고 싶지 않았는데.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왜냐하면 누나가 제일 바란 건, 내가 '행복하게'
'무사하게' 사는 거였잖아? 모를 리가 없어. 난 누나에게 주어진 '선물' 중 하나. 내가 누나에 대해서 모를 리가 없어. '선물' 중 하나,
내 이름대로, 이 세상에서 누나의 단 하나뿐인 소중한 존재였던 것. 에브제니스 공주님도, 진리의 원탁의 다른 사람들도, 시민들도,
전부 다 소중했겠지만 그 누구보다도 누나를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던 것은 나. 그렇기에 프시키온(psychion;soul)이니까. 

하지만 누나라면 이해했지? 소중한 존재'였던' 것, 이라고. 

으응. 나는 말하자면 일종의 매개체랄까. 누나가 다른 '소중한 것들'을 만나기 전까지의 버팀목, 같은 목적으로 내가 주어진 거야. 처음부터
나는 알고 있었지만. 하지만 누나가 너무, 너무. 너무. 좋은 누나, 내 소중한 가족이라서. 조금 더 비밀로 하는 어리광을 부린 것 뿐. 믿을
수 없다는 듯 보지 말아줘. 

처음에, 누나는 내 손만을 꼭 잡고 있었고.
지나서, 누나는 공주님의 손도 잡고 있었고.
지나서, 누나는 다른 마법사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얘기하고 웃게 되었고.
지나서, 누나는 나라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 모두와 함께 있게 되었고.

이제 누나는, 그 말도 안 되는 불합리한 저주 같은 것에서 살아나가면서도,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났고.
또 다른 사람들을 돕고 기억하고 이야기하고.
그리고 이제는 '특별'이라고 할 수 있을 사람들까지 만났어.

그러니까 누나. 나는 이제 작별.
이 꿈도 이제 작별.
반복되는 외톨이 꿈은, 이제 끝났어.

힘 내 줘, 누나. 이번에야말로, 이기길 바래. 떠올리길 바래. 그리고 누나,


"부디 행복해지길."


풍경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빠르게 빠르게, 먼지가 흩날리듯. 모래바람에 휘날리듯.


"──걱정하지 마. 내가 '선물'이었대도, 누나의 가족이고 동생이란 사실에는 변함이 없어. 적어도 나는, 계속 그렇게 믿어."


아, 누나. 또 울 것 같아. 그것 알아? 사실 누나, 은근히 울보잖아. 그것도 절대 대놓고는 안 우는 겁쟁이 울보 아가씨.


"적어도 나. 그리고 이 나라의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확실해. 누나는 그 이름대로의 존재였다고. 말할 수 있어."


왜냐하면, 누나 본인 빼고 다른 모두가 누나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걸. 처음에는 거리를 두려고 해도, 알고 보면 결국 인정하고
좋아하게 될 수 밖에 없잖아.


"──그러니까. 이번에야말로 이기고, 떠올리고, 행복해지길."


추억은 추억으로 가져주길 바래. 누나가 '지금' 살고 있는 것은 그 쪽이니까. 


"그 이름대로, 누나에게도 축복이 함께하길."


있지. 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누나의 동생으로 만들어져서 정말로 다행이라고 생각해. 누나도 그렇게 생각해주면 좋겠는데. 응.
이별은 아니니까. 쌍둥이별이라던가, 괜히 있는 게 아니잖아? 이름의 뜻이, 괜히 있는 게 아니잖아? 난 이름대로. 떠올릴 때마다
함께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부디. 


"──항상 나를 이끌었던 밝은 빛 같은 그 모습 그대로 네가 살아갈 수 있기를."


소중한 내 누이.


"이브로시아."





19/




예의 그 건이 있었던 후, 소녀는 열흘째 잠든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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