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당신을 위한 이야기 (가제) 01

누굴까요 2013.06.08 15:14 조회 수 : 42






00/





풀벌레 울음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조금 차가운 무언가가, 뺨에 톡, 떨어지고서야, 소녀는 나비가 번데기를 찢고 파들거리듯,

아주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푸르른 보석과 같은, 빨려들어갈 것만 같은 하늘의 눈동자가 세상을 담았다.



"───밤,이슬...."



그녀는 서서히 자신의 목에 손을 가져다대었다. 역시, 아니나다를까. 상흔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히 찢겨져나갔을 것은, 

어떠한 흉터 한 자리도 없이. 어떠한 통증의 흔적도 없이, 그저 하얗고 고운, 사슴 같은 목이었다. 소녀는 천천히, 손을 목에서 떼었다.

섬섬옥수란 표현이 마치 그것을 위해 만들어졌다 해도 믿을 법한, 날씬하고 가늘가늘한 손끝이 지쳤다는 듯 털썩, 땅에 떨어졌다. 

아프지는 않았다. 현대 문명의 콘크리트 바닥 따위가 아닌, 궁정의 대리석 같은 것이 아닌. 푹신하고도 부드러운 대지가 받아 주었으니까.


소녀는 지쳤다는 듯, 한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잠들기 위해 애쓰는 것마냥, 혹은 아무런 의욕도 없는 것마냥 그저 가만히 눈을 감고,

그렇게 있을 뿐이었다.


풀벌레 소리. 바람 소리. 사각이는 풀과 나뭇잎 소리. 산새의 노랫소리. 그리고───



"...시끄러워."



──오, 알겠어. 예민하구나. 특별히 너를 배려해서 입 다물어 주지. 소녀 밖에 듣지 못할 대답이 돌아왔다. 지쳐 쓰러지듯, 소녀는

마치 기절하는 것처럼 눈을 감았고. 미동도 없었다.


아파. 아파. 아직까지도, 욱신거려. 


바보 같은 일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그런 마지막 순간을 겪은 것이 총 몇 번 째인지는, 긴 양피지를 한가득 채워도 다 쓰지 못할

정도일 터였다. 그럼에도, 어떠한 흔적도 상처도 남아 있지 않음에도. 그저 조금, 피투성이였을 그 자리가, 아주 조금 아릿했다.

... 항상 있는 일이었다. 바보 같게도. 


그냥. 일어나지 말까.


이렇게 가만히 있다면, 알아서 끝날 것이다. 여기가 어딘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며칠을 이렇게 여기서

누워만 있는다면, 얼어 죽든 산짐승에게 물려 죽든 죽을 곳이라는 건 이미 파악이 끝난 상태였다. 그녀가 파악하려 의도한 적 없었음에도.

──아, 빌어먹게도 『운 좋게』누군가에게 구해지지 않는다면 말이지.


정말이지 나쁜 취미였다.


결국은 죽게 되면서, 그 전까지는 온갖 사람들을 휘말리게 하고서는 혼자서만 신의 축복이라도 받은 양, 행운의 여신이 따르는 양

어떻게든 다 잘 빠져나가고 잘 되어버려.


특별히 배려해서 입을 다물어준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는 듯, 모처럼 귓가는 울리지 않았다. 평소라면 아직도 그걸 새삼스럽게

생각하고 있냐며 비웃었을 소프라노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지쳤다니. 우습지도 않아. 소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온 몸을 감싸는

탈력감. 무기력함. 어색하지는 않은 일이었다. 마지막이 『그러한』 곳이었을 경우, 대부분 비슷한 감각을 겪었으니까.


──정말로. 이대로 가만히 있어버릴까. 그냥 이렇게, 이 곳에서 떠나버릴까.


그렇지만. 정말이지 항상 그렇게도, 웃기지도 않은 타이밍이다. 취미 나쁜 장난질이다. 소녀의 귓가에, 멀지 않은 곳에서 울려퍼진

비명 소리가 내리꽂혔다.







01/





프로디는 올해 일곱 살 난 어린 소녀였다. 어쩐지 남자 아이 같은 이름이었고, 실제로도 남자 아이인가? 라고 착각할 정도의

짧은 머리카락에 씩씩한 성격을 가진, 꼬마 대장부 같은 장난꾸러기 소녀였지만, 제법 제 부모와 가족을 생각하고 동생과 친구를

소중히 여기는 약간은 철 든 면도 가진 아이였다. 


어른들은 위험하니, 산에 깊숙히는 오르지 말라고 했다. 커다랗고 무서운 늑대가 산다고. 신수라고 할 것은 못 되는, 그저 조금 - 

조금 많이, 크고 흉폭한 것이었지만, 산 아랫쪽, 사람들 마을로 나오지 않는다면 굳이 다치거나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잡으러 갈 이유는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그저 깊이는 들어가지 않고, 늑대는 가끔 겁없이 들어간, 혹은 운 나쁘게 길을 잃은 자들을 삼키며 나름대로 

기묘한 공존을 하고 있었다. 서로서로,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만 않는다면 스스로도 넘지 않으리라고. 


프로디 또한 처음에는 여기까지 들어올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 감히 하지도 못했다. 그녀는 분명 장난꾸러기에다가 대담한

아이였지만, 어른들도 피해를 계산해서 잡지 않는 늑대를 자신이라면 잡아보이겠어, 라고 외치는, 그야말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바보짓을 하는 사고뭉치 허풍쟁이는 아니었으니까. 


그저 못 보던 과일이 굴러온 것을 발견하여, 슥슥 닦고는 한 입 먹어보았다. 굉장히 맛있었다. 그래, 그렇다면 가족끼리도 나눠 먹자.

굴러내려왔다는 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나무가 있다는 말일 테니까. 신화와 역사가 공존하던 시대의 시골 마을. 여자 아이는 

어려울 것 없이 날렵하게 산을 탔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어느샌가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짙게 내려앉은 안개 속에서 길을 제대로

찾아 돌아갈 재간은 없었다.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확신할 수는 없었고, 어쩐지 서늘한 한기에 몸을 떨면서도 소녀는 차근차근 자신이 아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가며 길을 찾기 위해 애썼다. 제대로 돌아가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이 날씨에 가만히 있다가는 정말 큰일 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조금씩 조금씩 발을 옮겼다. 조금 긁히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지만 그럭저럭,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다.


바로 앞에서 빛나는, 커다란 금빛 눈을 마주치기 전까지는.



"으, 으으.. 히, 히익.. 히이이이익──!!!!!"



바지춤이 축축해졌지만 그런 걸 눈치챌 겨를은 없었다. 프로디는 볼 것도 없이, 야생 동물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가르침 따위는

모조리 새하얗게 잊어버린 채 곧바로 뒤를 돌아 달렸다. 뒤를 돌아서. 달렸다. 동물이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리라. 그리고 희뿌연 안개 너머를 제대로 볼 수도 없이, 뻔하다면 뻔한 전개겠지만, 어린 아이는 걸려 넘어졌다. 

흔한 깊은 산의, 조금 무성할 뿐인 나무가 마치 신화나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귀신 들린 나무마냥 무섭게 발목을 옭아매었다.



"으..으으...아우....으......"



엉금엉금. 프로디는 눈물인지 콧물인지 무엇을 흘리는지 구분조차 할 수 없는 얼굴로 어떻게든 기를 쓰고 있었다. 주저 앉은 채

뒤로 슬금슬금, 어떻게든. 하지만 이미 프로디 자신조차 알고 있었다. 곧 끝나리라고. 아픈 것은 무서웠다. 이런 것은 무섭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축축해져, 원래의 표정 따위는 흔적도 찾지 못하게 되는 순간, 그르릉, 거리는 소리와 함께 새하얗고 커다란

물체가 달려들었다. 그것이 프로디가 인식한 마지막 장면으로, 그와 동시에 그녀는 눈을 꼭 감았다. 뜨지 않았다.


예상했던 고통도. 감각도. 아무것도 다가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정말이지. 번거롭잖아."



자아, 얌전히 있어야지.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지독히도 이 장소에 어울리지 않을 법한, 그리고 프로디가 마을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팔랑거리는 새하얀 짧은 옷과, 햇볕에 닿지 않고 걷지 않고 한 번도 다치지 않은 것마냥 매끈하고 형태 좋은 다리.

뽀얗고 고운 발. 그리고 그 등을 길게 덮은, 밤의 하늘과 같이 물결치는 머리카락. ──마지막으로, 이야기 속에서만 들었던 

숲 속 요정님의 것 같은 맑은 목소리만을 인식할 뿐이었다.


그 다음, 눈에 들어온 것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 같은 모습으로 잔뜩 움츠러든 하얀 늑대. 요정님은 더 이상 그것을 공격하는 일 없이

가볍게 말했다.



"──이제 돌아가 줄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그저 겁에 질렸을 뿐이었을까. 늑대는 마치 작은 강아지인 양 천천히 뒷걸음질치고는 이윽고

시야에서 사라졌다.



"괜찮니, 꼬마 아가씨?"



그 '꼬마 아가씨'가 자신을 지칭하는 것이란 걸 프로디가 이해하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렸다. 평상시였더라면 여자 아이 취급 해 준 

것에 대해 기뻐했을 테지만, 지금은 아직도 이것이 현실인지 꿈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자신에게 말을 한 것이다. 그것 하나는

어떻게든 인식한 프로디는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에, 아. 네. 응..."


"그렇구나. 뭐, 보아하니 안개 때문에 헤맨 것 같지만. ──으응, 이름을 물어도 될까?"


"그, ...아, 프...로디. 프로디. .."


"──흐응. 프로디, 인가. 예쁜 어감이네."



요정님은 조금 특이한 - 굉장히 맑고, 경쾌한 - 어조의 미성으로 프로디의 이름을 칭찬했다. 어쩐지 예의상 - 인사치레로 한 말은

아닌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한가한 감상일지도 모르지만.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그리고, 요정님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와아."



프로디는 툭, 무심코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 전까지는 주변 마을에서 가장 예쁜 건 대장장이 아저씨 댁의 노라라고 생각했었지만.

지금 그런 생각 따위는 한 가닥의 흔적도 남지 않았다. 정말로, 요정님. 


밤바다의 파도마냥 바람에 춤추는 머리칼이 살짝 이마를 덮었다. 등허리께를 부드럽게 감쌌다. 북쪽 끝, 사람이 한 번도

닿지 못했다는 이야기 속 땅에 내린 눈마냥 새하얀 피부는 부드러운 우윳빛. 드물게나 먹을 수 있었던 귀한 과일인 복숭아, 를

한 번 먹어 보았을 때 기억한 그 빛깔과 같은 양 볼의 빛깔. 아주 가끔 피어나는 분홍 장밋빛의 입술이 형태 좋은 곡선을 그렸고.

살짝 누군가가 집어놓은 듯한 콧날은 인형의 것마냥 예쁘고 오똑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눈에 띄었던 것은, 아버지의 일 덕분에

온갖 보석과 광물을 몰래 볼 수 있었던 프로디로서도, 무슨 보석이라 감히 비유할 수 없는 빛의 눈. 새벽 바다 같기도 하고,

맑디 맑은 가을 하늘 같기도 하고. 빨려들어갈 것처럼 빛나는 푸른 보석 같기도 하고. 햇빛이 막 내리쬐기 시작한 새벽녘 별하늘

같기도 하고. 표현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감상으로서도 어떻게 느끼는지 정리할 수가 없었다. 그저 멍하니 생각하는 것은,

아. 정말로 요정님이었다고. 아니, 요정님도 눈을 내리깔 것 같은 - 여신님이든 무엇이든, 적어도 사람은 아닐 거라고.


프로디가 정말로 얼빠진 표정을 지었을 무렵, 눈을 몇 번 깜빡이며 그런 그녀를 신기하다는 듯 바라본 요정님은 살짝 미소지었다.

시리도록 푸른 눈이 순간 밤하늘의 달마냥 곱게 휘었다.



"───안녕, 프로디. 나는, ...그래. 시에라. 시에라, 라고 불러."







02/





소녀는 다소 지친 기분이었다. 전에 별 생각 없이 구해준 프로디라는 소녀가, 신신 당부를 해 두었음에도 마을로 돌아가 온갖

감상을 이야기하며 떠들 것이 눈에 보였으니까. 아무 생각 없이 지어낸 말이, 그나마 이 지역이 아닌, 아마도 이 시대, 이 곳 사람들이

모를 먼 남쪽 문명의 이름이라는 것이 다행이었지만. ..그래, 이제부터 할 연극에 대해서는 정말로 다행인 일이다. 뭐, 어차피 그렇대도

그 아이를 다시 볼 확률은 매우 낮겠지만. 


──그래. 이렇게 붙잡혀 버린 이상은.


정말이지, 염치 없는 족속이네. 목숨 살려주고 작물들이 다 죽을 뻔한 걸 살릴 법을 알려주었더니, 수상한 자라고 압송이야?  귓가에

자그마한 목소리가 속삭였다. 쓸데 없는 친한 척은 그만 두어주면 좋겠지만. 소녀는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머릿속으로만.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아서 다행인 일이다. 멀리 보아서는. 모 아니면 도의 도박이지만, 지배층, 혹은 하다못해 집정관이든 무엇이든 권한이

있는 상부를 설득하기에 성공한다면 앞으로는 훨씬 수월할 것이다. 물론 '설득'이 아니라 그저 '믿게 만드는 것' 또한, 손끝 하나 까딱

하면 이루어낼 수 있는 일이다. 자신이 다녀 본 수많은 장소들 중, 가장 마법 - 심지어 마법도 아닌 마술, 이 있던 세계에서조차

일반인에게 암시를 하는 것 정도는 삼류 마술사라도 가능한 잔재주였으니까. 그야말로 기적의 범주에 드는 일들을 실현시킬 수 있는

그녀에게는 숨 쉬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굳이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사용하고 싶지 않았으며,

굳이 사용하지 않아도 해낼 자신이 있었다. 


물론 설득에 실패한다던가, 그런 수월한 길을 만들지 않고서 적당히 죽어버리는 선택지 또한 존재했다. 그리고 분명, 얼마 전, 이

곳에 처음으로 도달한 그녀는 그럴 작정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조금, 어쩐지. 영문 모를 기대감을 갖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헛된 기대감 따위는 주어지지 않는다. 그녀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이유가 있는 것이다.


변명하기는. 사실은 그저, ... 해주고 싶었잖아? 목소리가 키득대었다. 다 알고 있다는 듯. 모든 세상을 통틀어 소녀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 적어도 현재까지로서는 - 존재는 시에라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소리 높여 웃었다. 시끄러워. 시에라는 싸늘하게

그 웃음을 잘랐다.


적어도. 마녀 사냥의 시대는 아니어서 다행이네. 화형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작별이니까. 병사들에게 손목이 묶여 끌려가는 와중에도,

그녀는 어디까지고 태연스러웠다. 뜻대로 된다면 좋은 것. 어떻게 죽게 된다면 그걸로 어쩔 수 없는 것.


의도적으로 붙잡혔다고 해도 좋은 상황이었지만, 시에라는 잔뜩 긴장한 듯한 연기를 잊지 않았다. 그녀가 프로디라는 소녀에게 들은 것과,

한 마을에 머무르는 와중에 보고 들은 것을 머릿속에 넣고 종합하자면, 이곳은 마법도 아닌 마술이 존재하고, 그 존재를 모두가 알되. 

정작 그것을 사용하는 자는 보기 드문 지역이다. 그나마 그 사용하는 자, 라고 해도 아주 기본적인 - 그녀의 고향에서는 갓 태어난 아기조차 

사용할 수 있을 - 것들만을 간간히 어떻게든 하는, 그 정도의 수준. 오히려 검과 도끼, 창과 활로 단단해진 이들이 사는 곳이었다. 마술을 

알되 사용할 수 없다. 그러한 이들이 마술사에게 갖는 감정은 경계일 것이다. 자신들이 무엇인지 모를 것을, 언제든 사용할 수 있다. 

그나마 그녀가 있던 마을은 그러한 경계심의 파편도 없는 순박한 농민들과 기껏해야 마을 자경대들이 살아가는 땅이었지만. 하지만

이 병사들은 다르다. 이 병사들을 불러온 귀족, 혹은 누구든 지배층으로 추정되는 자 또한 다를 것이다. 경계하고 있다. 그런 것쯤,

표정을 읽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응. 안다고는 해도, 내가 당장 현혹을 시키든 무엇을 하든 속임수로 넘겨버릴 수 있다는 정도, 혹은 그런 마술이 있다는 것까지도

모르는 것 같지만. 


또, 그녀의 입장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겠지만, 그녀는 이 병사들이 꽤 마음에 든 상태였다. 제대로 군기가 잡혀 있다. 잘

훈련받은 병사들이구나. 계속 흘끔거리기는 해도, 소녀의 용모에 넋을 놓고 방심하거나 근거 없이 편을 드는 바보들은 없는 것 같았기에.

손목을 약하게 묶어주는 일도 없었다. ...손수건을 사이에 댄 후 밧줄로 묶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뭐, 적절한 배려심이라고 생각해 두자.



"───폐하께서 행차하십니다!"



자신을 보며 수군대고, 멍하니 감탄하고, 온갖 감정이 담긴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 틈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울렸고. 시에라는 천천히

바닥에 주저앉았다. 일어날 힘이 없는 양, 혹은 어떠한 처분을 당해도 감히 거부할 생각이 없는 양. 그 모습마저 가련하다고 여겼는지,

군중 속에서 또 한 번 술렁임이 일었다. 소녀는 어떠한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것처럼, 가만히 눈을 감은 상태였다. 


자아. 이제 막은 올랐어.


시에라, 라고 칭한 소녀는 서서히 눈을 떴다. 아름다운 심청의 눈동자만이 오롯이 빛났다. 극의 시작이었다.







03/





아아주 오래 전, 하얀 분과 까만 분이 있었습니다.

하얀 분은 말했습니다. 내기를 하자. 너는 틀리다. 내가 믿는 것은 다르다.

까만 분은 말했습니다. 내기를 받자. 너는 틀리다. 내가 믿는 대로 되리라.


그들은 함께, 작은 것을 만들었습니다.


하얀 분은 말했습니다. 너에게 목소리를 주자. 

이 세상 누구보다도 청아하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빛을 주거라.

까만 분은 발했습니다. 너에게 아름다움을 주자.

세상 너머 천사들조차도 감히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질투하도록 빛나도록.


하얀 분은 말했습니다. 너에게 마음을 주자.

이 세상 누구보다도 널리 보며, 생명을 아끼고 세상을 사랑해 다오.

까만 분은 말했습니다. 너에게 재능을 주자.

이 세상 누구보다도, 신조차 넘보고 악마를 이길 만물의 재능을 가지거라.


하얀 분은 말했습니다. 너에게 가족을 주자.

소중하디 소중한 이 작은 아이가, 네 삶의 빛이 되기를. 너를 이끌기를.

까만 분은 말했습니다. 너에게 행운을 주자.

어떠한 일이든, 그 무엇이든. 그 앞길에 네가 바라는, 그리고 바라지 않더라도 그 모든 것들이 너를 위하리.


부러울 것 없는 이상의 아이였습니다.


하얀 분은 중얼거렸습니다.

비록 네 앞이 머나먼 길일지라도. 네가 이기기를. 나의 승리를, 말해 주기를.

까만 분은 중얼거렸습니다.

나는 너와 어느 순간에도 함께하리니. 나는 너를 나의 승리로 이끌 것이다.


언제나 함께 한다. 

그것은 하얀 분으로서는 할 수 없는, 까만 분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내기라면, 불공평할 정도의 개입입니다.

그렇기에, 까만 분은 말했습니다.


마법을, 걸어 주자.

마법의 말을 해주마.


네가 이것을 떠올린다면.

네가 이것을 노래한다면.


너의 승리다. 

너의 기적이다.


                     저주

내가 내린 모든 축복들조차, 

그 순간이 지난다면 너의 것이 되어 네 영광이 될 테니.


그리고 그 순간이,

그대들의 승리다.


까만 분은 웃었습니다. 

내기라면, 이길 자신이 있었으니까요. 

하얀 분은 빙그레 미소지었습니다.

그 마지막은, 두고 보아야 하는 일입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다 하더라도.


그리고 두 분은 손을 놓았습니다.

그리고 작은 아이는, 더 작은 아이의 손을 잡고 서 있었습니다.


그것이, 시작이었습니다.







04/





"───시에라, 라고 불러주시옵소서."



흑발의 소녀는 어디까지고 공손했다. 조금 당황스러워하는 듯 보였지만, 그만큼서도 극존칭을 사용하며, 적어도 자신의 처지와

상대의 위치에 대해서는 분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해는 몇이지?"


"열 여덟이라 아뢰나이다."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지만. 출신지는 어디인가."


"──머나먼 곳이옵니다. 황금이 나는 라인 유역, 거칠지만 풍요로운 갈리아, 늑대의 후손들이 자리잡은 남녘의 포로 로마나를 지나,

더욱 그 너머 멀리 가야 겨우 도달하는. 닿기 어려운 곳이옵니다."


"그러한 곳에서 너는 어찌하여 이 곳까지 오게 된 것인가?"


"본디 저는 여행자. 이곳저곳을 다니며 견식을 넓히는 중이었나이다. 허나 이동 도중, 누군가가 건 주문으로 인해 의도치 않게

이 땅에 도달하게 되었나이다."


"허면 어찌하여 바로 돌아갈 궁리 없이, 또 보고 없이 허가도 받지 않은 채 짐이 다스리는 땅에 머무른 것인가."


"──바로 신병에 대해 보고하지 않은 것은 백 번 사죄드리나이다. 허나 돌아가지 않은 것은, 않기 이전에 할 수 없었던 것으로.

마술이 이리저리 복잡하게 꼬여 버린 상황에서, 방금 아뢰었다시피 그대로는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옵니다. 

또한, 때마침 약간의 동정을, 먹을 거리와 잠자리를 구하기 위해 들어간 마을이 시달리던 경작의 문제를 해결할 법을 알고 있었사옵기에,

돌아갈 방도를 찾을 때까지 숙식을 도와주신 것에 대한 답례로 조금 아는 것을 감히 뽐내 보았을 뿐이옵니다. 부디 관대한 살피심으로

이해를 청하나이다."


"───허나 너는 마술사. 우리가 모르는 것들을 알고 있다. 허면 네가 그 잔재주로 우리를 속이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느냐.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느냐."


"──증거는 없사옵니다."



소녀는 즉답했다. 소녀에게 동정론, 혹은 자비를 내리자고 흘러가던 주변의 수군거림이 일순 멈추었다. 남들이었다면 칼등 위에서

춤추는 심정이었겠으나, 시에라라 스스로를 소개한 소녀는 아무렇지 않았다.



"하지만. 대신 모든 분들이 증인으로 서 계신 자리에서, 마술로서 계약을 걸겠나이다."


"──계약?"


"제가 이 땅에 있는 동안, 폐하. 혹은 관련된 권한을 가진 분의 '허가', 혹은 관련되어 내려진 '명령'이 없다면 마술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만약 사용할 경우, 계약의 효력으로 저는 죽습니다."



가볍게 주변이 술렁거렸다. 시에라는 곧게 시선을 올렸다. 여태까지 겪은 바. 이곳은 유럽의 북쪽. 험난한 땅이다. 여성도 아이도

가릴 것 없이, 훨씬 더 치열한 자연 속에서 싸워가며 살아가는 곳. 여성으로서, 혹은 아직 소녀로서의 가련함 따위를 이용하고

그것이 먹혀 들어갈만한 남쪽의 풍요로운 땅이 아니다. 오히려, 효과가 좋을 것은 당당하게. 공손하지만 곧게 행동하는 것.



"──또한, 제가 마술을 사용하지 않음에도 수상쩍은 기미가 보인다 판단하옵시면, 부디 그 자리에서 포박이든, 구형이든, ..즉결

처형이든. 내리시는 그 뜻에 따르겠나이다."


주변이 조금씩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스스로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괜찮지 않을까. 어린 여자애 혼자서 저렇게 똑바로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난 믿어 봐도 된다고 생각하지만. 응, 자고로 당당한 사람 치고 진짜 나쁜 놈은 없지. 뭐, 여차할 경우의 대비책도 저 정도까지

한다면야. 오히려, 들었잖아. 저 아가씨가 있던 마을의 작물이 유례 없이 잘 자라고 있다고. 마술사에 여행도 많이 다녔다면 아는 것도

많겠지. 그렇지. 그리고 우리도 마술사 한 명쯤은 두어도 되지 않을까.


소녀는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아무도 보지 못했겠지만. 



솔직히 말해, 정말로, 진심으로 이들을 해할 작정 따위는 있지도 않았다. 이유도 없거니와, 번거롭기만 하다. 쾌락이라던가 순간의

충동으로 대형 마법이든 마술이든을 난사하다니. 정신줄 놓은 행동도 정도껏이다. 하다못해, 그녀가 '미쳐버려'도, 오히려 아무도

미쳤다는 사실을 모르게 행동하겠지만. 그녀는 그런 존재니까. 아무튼, 자아. 대사는 끝났다. 


술렁이는 군중을 한 쪽 손으로 제지하고, 왕의 주변에 몇 명의 신하들이 모여 소곤거린다. 그리고, 천천히 왕은 입을 열었다.



──언제나 그래왔듯.

나의 뜻대로.







05/





시에라는 피곤하다는 듯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예의 '계약'을 한 이후로, 온갖 일의 더미에 치여 살고 있었으니까.

이것은 그녀 '생전'에 비할 바는 못 될 지언정, 그 이후의 삶 중에서는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의 일이었다. 거기에 견문이 많다고,

단순히 마술 관련이나, 마술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이 아닌 기타 수많은 문제들 - 심지어 그 차가은 북쪽 바다에서 무슨 물고기를

어떻게 하면 더 잘 잡을 수 있는지, 뒷마당에 무슨 작물을 키워야 더 잘 자랄지, 심지어는 자기 부인이 가진 애가 " 딸인지 아들인지 "조차

물어보는 것이다. 거기에 어떤 아이일지까지. 그리고 더욱 매우 미묘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떤 아이일지' 혹은 그와 비슷한

종류의 답변에 "훌륭하게 될 겁니다" "잘 될 거에요" 따위의 답변을 돌려주면 어쩐지 모두 매우 흡족한 표정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이었다.


한숨을 내쉰 소녀는, 자신에게 인사하는 궁 내의 시녀들에게 가볍게 미소지으며 인사를 돌려주었다. 반 가량은 존댓말, 나머지 

반은 반말을 사용한다는 뒤죽박죽인 인사들이었지만. 그것을 허락한 것은 시에라 본인이었으니까. 쓸데없이 존댓말이라던가 그런

직위 따위에는 구애 받지 않고, 거기에 어지간한 일로는 기분 상하는 일도 없는 제법 담백한 성격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다소

보통 사람과는 기준이나 시야가 다르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지만서도.


소녀는 조금은 지쳤다는 듯 방문을 닫았다. 살풍경한 방이었다. 처리해야 할 일들이 담뿍 적힌 서류와, 몇 가지의 마술 서적. 깃펜.

찻잔. 침대. 책상. 그 정도가 전부였다. 아무래도 좋은 이 방에서, 시에라가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점이 있다면 테라스마냥 뚫린

한 쪽 창 너머로 보이는 너른 바다와 끝없는 하늘이었다. 식사도 저 아래 로마가 이루고 있을 호화롭기 그지없는 것에 비하면

좋게 봐주어도 소박하다는 표현 정도였고, 이불은 비교적 거칠다. 하지만──


그러한 영광이라면 질릴 만큼 보았다.

그러한 영광이라면 그 끝까지 보았다.


그렇기에 오히려. 다소 이질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상황이 그녀는 제법 마음에 들었다. 아니. 어쩌면 상황 자체보다도 여기서

그녀에게 웃고 재잘거려 주는....


설마, 정들기 시작했니?


움찔.


시에라는 아무렇지 않게 천연덕스레 대답했다. 그럴 리가. 그러자 목소리가, 다소 기분 나쁘게 - 시에라의 표현에 따르면 능글거리는 -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너, 내게 숨길 수 있는 게 있다고 생각하──


목소리의 말은, 환희에 찬 시녀의 말과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깨지듯 끊겼다.



"──아가씨, 아가씨 ! ! ! 시에라 님, 부디 나와주셔요 ! ! 귀환이십니다 !"



그러니까, 누구의? 라고 무심코 생각할 만큼 빠르고 정신 없는 말이었지만. 시에라는 이윽고 근처 나라의 바다 괴물을 없애러 갔다는

왕자의 이야기를 기억해냈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이 누구인지도, 한 번도 이름을 직접 들어본 적 없음에도 '지식으로서' 알고 있었다.

같은 신화, 이야기, 문화를 공유하는 곳이라면 시대가 다를지언정 가 본 적이 있으니까. 예이츠의 왕자. 약관 열아홉에 이미 인외의

생물을 죽인 영웅. 


응. 그다지 관심은 없지만. ...어쩔 수 없나, 인사 정도는 해 두어야 할 것 같기도 하지만.


시에라는 미간을 좁혔다. ... 그녀가 걱정하는 것은, 이 땅의 사람들에게 품은 몇 안 되는 피하고 싶은 점 중 하나. ...전쟁이 많은

땅이라면, 다른 곳도 마찬가지였지만. 


전쟁에서 싸운 이들에겐, 그들이 벤 자들의 유령이 따르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런 경우는, 특히나 더 시끄러워서. 온갖 원망하는

말이 들려와서. 기분 좋을 리가 없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한 쪽 머리가 욱신거리기 시작한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결국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그냥 인상 한 번 찌푸리며 호불호의 문제로 취급할 만큼. 닳아 헤져버렸을 정도로, 너무나.


시에라는 천천히, 쓰러지듯 안겨 있던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만약 그녀가 왕 옆이든 어디든 공식적인 입장으로 서서

맞이해야 하는 것이었다면 왕이나 다른 신하가 불렀으리라. 그것이 아니라면 아마 적당히 보고와 축사, 그리고 연회가 한창이겠지.

그렇다면 천천히 나가도 상관 없을 일. 어떻게든 인사만 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너무 늦게 나가서 잔뜩 술을 마신 상대에게

하는 것은 안 될 일이지만.


슬슬, 뉘엿뉘엿 해가 기울기 시작하고 있었다. 



"앗, 시에라 님...!"



순식간에, 장내가 조용해졌다 곧바로 다시, 배 이상으로 소란스러워진다. 그다지 의식해 본 적은 없지만, 그렇게 눈에 띄는 용모라던가

분위기일까. 사실 타인이 느끼는 자신에 대한 감상 따위, 알 수 없으니까. 온갖 묘사하는 말, 수식어를 들어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기에,

시에라는 심드렁한 기분이었다. 


떠들썩한 환성이 자신을 반기었다. 이리 와 보세요, 시에라 님. 이 쪽이에요. 왕자님───


그리고 몇 걸음 더 가, 정면을 마주하는 순간.



주변이, 조용해졌다.


아니. 연회는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조용해진 것은, 끝까지 그녀 혼자에게만 들리고 끊임없이 달라붙던 수많은 목소리들. 유령들.

혼의 흔적들이, 지금만큼은 마치 존재조차 하지 않는 것처럼 고요했다.


평온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 정말로, 비유적 표현도 뭣도 아닌 『처음』으로 느껴본 고요함. 유령들이, 혼들이 멋대로 지껄여대는 소리는

누군가가 귀를 대신 막아 주기라도 한 듯 들리지 않았다. 귀를 아무리 막아도, 막아 비틀어도, 소리를 질러도 파도치듯, 물밀듯이

흘러드는 목소리들이 낡은 라디오를 끈 것마냥 조용했다. 


온갖 집착, 원망, 분노, 흥미, 호기심, 관심, 증오 대신 느껴지는 것은, 한없이 청아한 공기. 마치 깊은 숲의, 아침 산의 그것과 같은,

맑디맑은 기운. 소녀는 멍하니, 못이 박힌 듯 서 있었다. 물론 얼빠진 표정을 짓지는 않았다. 적어도 남들이 보기에는. 하지만 그녀를

매우 잘 아는 이 - 예를 들면 그녀의 동생. 그녀 '생전'의 친우. 그녀 '생전'의 은인이자 언니와도 같았던 이 - 들이 보기에는, 깜짝

놀라는 것 이상으로, 신기해하며 웃음을 터뜨릴 만큼 볼 수 없었던 표정이었다. 그녀가 진심으로 놀란다는 것 따위, 확률적으로는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으니까.


"──, 처음 뵙습니다. 시에라, 라고 불러주소서."


"말씀은 익히 들었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 땅의 왕자, 베오울프라 합니다."


그리고 시에라는, 그제서야 청년을 곧게 올려다보았다. 그녀보다 - 적어도 그녀의 '향년'이나 '신체'보다는 - 한두 살 위일까. 전승을

생각해 본다면 지금이 열아홉 즈음일 것이다. 그렇다면 정답이겠지.


살짝, 가볍게. 하지만 예의에 어긋나는 일 없이 절도 있는 태도로 목례한 청년 또한 그녀의 시선에 답하듯 마주보았다. 단 한 번도

사람의 손이, 아니, 티끌 따위도 섞여들어가지 않았을 법한 깊고 맑은 물빛의 눈동자에, 타오른 노을과 같은 붉은색이 오롯이 담겼다. 

생전 처음으로 겪는 낯선 고요함 속에서, 시에라는 놓치는 일 없이 재빨리 그를 읽었다. 기억했다, 라고 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물론 단순히 뇌에 저장해두는 것 뿐이라면 의식 따위 필요 없이, 숨을 쉬는 것과 동시에 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아로새긴다, 라는 의미에

가깝겠지. 


'고요함'을 제쳐두자면, 그 다음으로 먼저 떠오른 것은, 그의 전승으로부터 대다수가 연상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용모라는 감상이었다.

시에라와 대강 한 뼘 정도나 차이가 날까 싶은 키에, 그 주변의 비슷한 연배보다도 다소 가녀린 듯한 체격. 하지만 사람을 용모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 쯤은, 교과서에 나오는 교훈 정도가 아닌, 그녀 본인이 그 살아 있는 예시였으므로 별다른 감흥을 주지 않았다.

햇볕이 구름 틈새에서나 겨우 흘러드는 날이 많은 북쪽 추운 땅의 사람답게, 하얀 피부는 다소 창백한 듯 하면서도 군더더기가 없다. 

밤중 요정이 몰래 장난을 치며 만들어주었대도 믿을 법한 콧날과 입술은 보기 좋은 형태를 그리고 있었고, 아마 이 나라에서는 그만이

소유했을 것 같은 두 가지 색의 머리칼은 각각 밤하늘과 북쪽 바다 끝의 얼음과 같은 색으로 흐르고 있었다. 살짝 귓가를 덮고 이마에

그림자를 드리운 머리칼. 하지만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피와 같이 붉으면서도, 어떠한 어둠도, 비릿한 향기도 남지 않은 투명하디

투명한 선홍의 눈동자. 


하지만 그런 외모 따위는 오히려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다. 그녀 본인은 아무래도 좋달까, 전혀 신경쓰지 않았지만 - 거만함도 뭣도 아니고,

아름다운 생김새가 보고 싶다면 그저 거울을 들여다보면 될 일이었다. 오히려 그녀가 지금, 못 박힌 듯 쳐다보고 있는 것은 그 고요함

때문. 평온함 때문. 그리고, 청년이 가진 특유의 청아함이었다.


어떠한 원한의 목소리도 어깨에 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풍기는 것은, 흔한 비유이지만 잘 갈린 칼과 같은 날카로운 고고함. 동시에 

마치 어느 때의 기사왕 같은 맑은 예리함. 청명하다, 는 표현이 그 이상 어울릴 수 없을 법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는 직감했다.

그녀와는 정 반대의 사람이다.

항상 빛 속에서, 이끌어 나아가는, 포기하지 않고, 헤쳐나가는, 이루어 나가는.


그래, 마치. 그 옛날, 고향의 - 소중한....



"──그 이름 높은 무용, 들었 바 있나이다. 영광스러운 귀환에, 축복을 올립니다."



시에라는 한없이 감상에 젖는 부류의 인간이 아니었다. 아니, 드물게 감상에 젖는다 하더라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 만큼 태연스레

움직일 수 있었다. 그것이 그녀였으니까. 이어진 대화는 대화라고 할 것도 없는 흔하디 흔한 의례적 이야기였다. 말씀을 놓아 주십시오.

그렇다면, 호의에 응석부려서. 적당히 실례되지 않을 정도로 말을 마치고, 한 잔 하라며 만류하는 손길들을 정중히, 하지만 단호하다는 

솜씨 좋은 표현들로 거절한 후, 그녀는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그 순간, 둑이 터지듯, 순식간에 다시 소리가 밀려들었다. 온갖 감정들이 그녀에게 소리치고, 저주하고, 빌고, 속삭인다. 그런 말 따위를

모조리 무시한 채, 그녀는 자신의 방문을 쾅 닫았다. 침대에 쓰러지듯 엎드렸다.


어째서, 어째서. 지금 이럴 때.



지독히도 바보 같고, 지독히도 무르고, 어쩔 수 없을 정도로 감상적이구나. 스스로를 조소하며, 그녀는 웅크렸다. 가련한 체구가, 밤의

어둠에 덮여 점차 작아지는 느낌이었다. 보고 싶다고, 그리 생각했다. 얼마 만인지도 모르겠지만. 물론 항상 마음속에 미친 듯이 그려오기는

했으나. 이 밤만큼은 특히, 이상할 정도로, 몸이 떨릴 정도로.


예전이, 그립다고 생각했다.







06/





그 이후로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간간히 궁의 복도에서 마주친다면, 사무적인 인사와 의례 정도만을 두어 마디 건넬 뿐. 사실,

어떠한 말을 하면 좋을지 시에라 본인으로서도 알 수가 없었다. 단순히 대부분의 호의를 얻는 일이라면 숨쉬듯이 해낼 수 있다. 하지만

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건 그에게 그다지 통하지 않을 거라고. 그것이 아니어도, 시에라 본인 또한 그러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이, 혹은 처음으로 '평온함'이란 것을 경험하게 해 준 이에게 대한 나름대로의

존경이나 존중의 표시일지도 몰랐다. 마지막으로, 그런 '호의를 부르는 태도'가 통하지 않고, 사용하지 않고 대해야 하는 상대, 그러면서도

적의도 없으며 예의도 지켜야 하는 상대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 시에라는 알지 못했다. 기억을 거슬러올라간 끝, 그녀의

시작에서는 그러한 이들이 몇 있었지만. 이미 아득한 옛날 이야기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신문을 읽듯이 알 수는 있어도 그 때 어떠한

기분이었는지, 어떠한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까지 긁어낼 수는 없다. 


그나마도, 그 약간이나마 남은 감정을 기억하고, 보존하기 위해 그녀는 그 머리의 일부를 몽땅 투자해가며 무진 애를 쓰고 있었지만서도.


비유하자면, - 아마 데모닉이 무엇인지 아는 이들은 마치 거짓말을 하냐는 듯한 얼굴로 보겠지만 - , 그녀가 대하기 서투른 타입,

이라는 것이다.


물론 학문적이랄까, 본능적인 호기심은 있었다. 어떠한 이유로 그 주변에서는 유령들이 사라지는가. 입을 다무는가. 천재 특유의, 자신이

모르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약간의 오기와, 과연 그 자신도 모르는 것은 무엇이기에, 하는 호기심. 하지만 그럼에도, 무심코 대하기가

어렵다는 것은 자각하고 있었으므로 반쯤은 의식적으로 그녀는 그와의 접촉을 피했다. 


무엇, 서로 산더미 같은 일에 쫓겨 바빴으므로 애쓸 필요까지는 없는 일이었지만.


단지 그 특유의 능력으로 어떠한 일이든 순식간에 끝낼 수 있었으므로, 절대적으로 시간이 많이 남을 수 있어 한가해 보이는 것 뿐이었지만.

시에라는 적어도 자신의 일은 완벽하게 끝내는 인간이었다. 그럴 수 있었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고, 자신이 그러지 못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생각 또한 약간은 있었다. 어릴 적 함께 해 준 이들의 영향으로, 그 사고 방식이 어찌 되었든 뿌리만은 성실한 성품. 


그러한 그녀가 '바쁘다'고 느낄 정도라면, 보통 사람으로서는 철야가 기본에 가까울 정도의 업무량이겠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현재 '제대로' 마술을 사용할 줄 아는 사람으로서는 나라 안에 유일했으며, 그녀만이 소유한 지식 또한 압도적이었다. 후자는

단지 독서나 여행 탓이 아닌 그녀라는 개체 : 데모닉이란 것으로의 특성과 여태까지의 인생 역정 또한 매우 큰 공헌을 하고 있었고

'압도적'이란 단어 따위로는 감히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양이었지만, 어쨌든.


서류 작업을 하면서, 무심코 약간 그 옛날. 왕 이하 국가 최고의 마법사 단체의 일원 ; 사실상 수장에 가까웠던 ; 으로서의 기억이 스치듯

지나갔으나, 그녀는 의식하는 일 없이 계속 깃펜을 놀렸다.


그녀는 완벽하게 모든 일을 처리했고, 본인이 그다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평판은 그 끝을 모르고 올라갔다. 

왕 또한 제법 만족스러운 기색이었고, 처음 그나마 그녀에게 의심을 품던 이들도 이젠 모두가 입을 다물고 호의적으로 대했다. 궁 안의

시녀들은 뭐라도 만들었다치면 피곤하실 텐데 드시라고 몰래 한 접시 가득 달콤한 과자를 담아 넣어주었고, 복도를 지나갈 때라면

호의병들 또한 웃는 낯으로 먼저 인사를 건넸다.


높은 직위는 그것만으로도 호의를 살 수 있다. 단, 그만큼의 질시 같은 것도 받겠지만. 하지만 그것뿐이 아닌, 누구나가 감탄할 용모와

목소리, 재능, 능력이 있다면 그런 부의 감정 따위는 봄눈 녹듯 없앨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 항상 일할 때만큼은 진지하고 성실하게

하는 자세와, 차별을 두는 것 없이 모두를 편하고 유쾌하게 대한다면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는 일. 뭐, 마지막 둘의 경우, 시에라 본인은

그다지 의식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만족과 자기 기준을 위해서 하는 행동 정도로 생각할 뿐이었지만.


오히려 이 땅이 어색하달까, 새로운 것은 시에라 쪽이었다. 단순히 호의를 사는 것은 어느 정도는 그녀도 편안히 지내기 위해 의도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들은 그 이상. 적당히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의도치 않았던, 예상치 못했던 반응이 돌아오는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마치, 계산하지 않은 호의. 악의도 계획도 없는 순수한 마음.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자신이 계획해서 이끌어 낸 상냥함이라면 아무렇지 않다. 동경도 조금 쓴웃음 지을 뿐 그것 뿐이다. 적의나 

질시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편안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런 것은. 이런 것은. 도대체 얼마만이지? 마치 세상에 첫 발을 내딛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순간순간, 종종 '당황'하고 마는 자신이 있어. 그럴 때마다 목소리는 비웃거나, 키득거리거나, 혹은 아예

입을 다문다. 마지막의 이유는 알 수가 없다. 그저 자신을 향한 웃는 낯에, 무어라 대꾸해야 할지 종종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버려서

멍하니 바보 같은 말이나 내뱉어버린다.


──말도 안 돼. 미치고 있다.


기분 탓이야. 시에라는 중얼거리며 살짝 입술을 악물었다. 저들 또한, 자신이 무엇인지 안다면 괴물 보듯 바라볼 것이다. 뻔한 일이었다.

그래, 그래도 미워하지는 않을게. 싫어하게 되지는 않아. 그녀는 그런 의미로는 굉장히 평등한 인간이라고 자부하고 있었고, 또 상당히

그렇게 행동했으니까. 


도저히 알 수가 없어.

생각하고 싶지 않아.


그냥 잠깐 눈이나 붙일까. 시에라는 한 쪽 손으로 눈을 덮으며 생각했다. 홀을 달려가는 병사의 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자신의 방문을

두드리는 다소 강한 노크에 한숨을 지으며 몸을 일으킬 때까지는.



──적이 나타났다. 바다 너머에서.



이미 지도는 커녕 나라 안의 골목 하나하나까지 전부 다 외워버린 시에라에게는, 순식간에 쳐들어왔다는 그 해적 - 아마도 노르만이겠지 -

의 이동 경로와 방법 따위가 순식간에 눈에 그려지며, 본국을 친다던가 따위의 온갖 대응책과 그 전략이 떠올랐지만 그녀는 입 밖으로는

내지 않았다. 자신은 적당히 예의가 될 정도로만 나서며, 기본적으로는 내려오는 일들만 하면 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웃는 낯 따위,

알 게 뭐야. 그녀는 어차피 떠날 자다. 이방인. 외부인. 언제든 당장 잡혀 처형당해도 할 말이 없는, 내부 분쟁의 가장 만만한 희생양 포지션.


믿으면, 결국 손해를 본다.

웃으면, 결국 배신당하고 끝날 뿐.


뼈에 새긴 것마냥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시에라는 무심한 표정으로 보고를 듣고 있을 뿐이었다. 왕자는 자신이 가겠다고 나섰다.

그래. 아마 일당백 그 이상일 것이다. 배 세 척 정도의 적들이라고 했으니, 그가 가는 것이 오히려 아군의 희생 따위 만들지 않고 이기는 

길이다. 거기에 실력이 보장된 몇몇 군사라면 충분할 것이다. 적 - 해적 같은 놈들을 격퇴하는 것쯤. 하지만,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폐하! 놈들이 마을을 약탈하고 있습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들끓는다. 적의 격퇴만이,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필요한 것은, 백성의 보호. 하지만 아무리 잘나신 왕자 전하래도

혼자 날뛰며 그 마을 안의 백성들까지 전부 보호하는 것은 어딜 봐도 무리였다. 데리고 가는 군사들의 실력이 아무리 탁월하다 해도

그 수가 압도적으로 적었다. 하지만, 지금 또 부대에게 출정 준비를 시키기에는 시간이 너무 소모된다. 그쯤 된다면 아마 마을 하나 둘쯤은

황폐화 된 이후일 것이다.


여기 있는 자들이라도 그것 정도를 예상 못하는 이는 없었다. 젠장, 욕지거리가 군데군데서 터져나온다. 이들에게는 차라리 마을

몇 개를 버림패로 던지고 오히려 전혀 대비하지 않고 있을 본국을 친다던가 따위의 계산은 없는 것일까. 아니, 없겠지. 여태까지

보아온 바로는, 어떻게서든 그 하나의 마을을 구하기 위해 당장 더 애쓸 자들이 맞겠지. 냉정한 계산 따위 진즉 잃어버리고, 당장

눈 앞의 것들을 어떻게 하려 애쓰는 자들이겠지.


바보 같다. 바보 같이 착하다.

그래서는, 항상 손해만 본다고.

결국 고생하는 것은, 당신들 쪽이야.



"──고마워요, 언니! 이거, 언니가 도와 주어서 수확한 곡식으로 만든 빵이야!"



착한 사람은 복을 받는다고 하더군.

난 착한 사람이 아니라서 실감은 못하겠지만,

적어도 여태까지 본 바로는 오히려 열 중 여덟은 고생만 실컷 했어.



"시에라 아가씨, 시에라 아가씨, 이것 좀 드셔 보세요. 아가씨는 좀 드시고 더 쪄야 해요!"



도대체 왜 그렇게 바보 같이 사는지 알 수가 없어.

바로 밑에 로마만 봐도 온갖 영화를 다 누리고 있잖아?

그런 것, 욕심도 들지 않는 거야? 아니면, 무지 때문일까?

이용하면 돼. 난 명령을 듣기로 되어 있으니까.

그런 번영을 가져오라고, 내게 말하면 돼. 

농어나 산호 따위 문제가 아니라. 끝없는 부귀를, 영광을 누리고 싶다고.



"그, 시에라 님. 이것, 어울리실 것 같아서 조금, 가져와 본, 꽃..입니다만..."



왜 자신들 앞에 있는 것조차 이용하려 들질 않아?

내가 착한 척 이용하고 있다는 건 예상도 하지 않아?



"예전에 이 병이 돌았을 때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는데. 전부 다 마술사 님 덕분이세요."

"──감사합니다."

"──여기 와 주셔서. 도와주셔서, 정말로, 고맙습니다."



──어떤 일이든, 네가 바란다면, 바라는 대로 해. 목소리가 속삭였다. 멋대로 몸이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의자에서

일어나서, 아무렇지 않게 제멋대로 입이 움직인다.



"──제가 가겠나이다."



바보 같아.







07/





멀찍이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밥을 짓는 뽀얀 연기가 아닌, 살아가는 곳이 타는 검고 탁한, 보기 싫은 것. 시에라는 순식간에

그 거리를 읽었다. 촌스럽게 원경의 마술을 쓴답시고 무언가 부산한 준비를 할 것은 없었다.



"배는 정확히 세 척. 척당 300석 가량의 규모. 그리고 아직까지는 추가 병력이 올 기미는 없음. 수평선 너머까지 포함해도 아직 보이지

않아. 그리고 현재 피해를 본 것은 저 마을만. 전쟁이고 뭐고 할 의도는 없어. 그냥 약탈이야. ...빨리 가는 게 좋을 것 같네."



시에라는 말을 재촉했다. 마치 아무것도 태우지 않은 양, 말은 땅을 박차고 가볍게 달려나갔다. 승마 정도는 문제도 아니었다. 확실히

검술이라던가 무술 쪽은 깊이 손대 본 적 없었으므로 레이피어 정도를 휘두르는 것이 전부였지만──물론 배우자고 한 번 마음 먹으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말을 타는 것쯤은 그녀에게도 아무렇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그녀 조금 앞쪽을 달리는 왕자는 말을 들었는지, 곧바로 속도를 올렸다. 그리고 연기가 점차 가까워지고, 비명이 귓가를 찢는 순간,

시에라는 손가락을 튕겼다. 쏘아져 날아가는 화염이 시작이었다.



소녀는 눈을 찌푸리고 있었다. 옷이 더러워진다던가, 손끝이 쓸린다던가 하는 것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이 장면만은 항상 구토가 났다.

그나마 마수 같은 것이 나와서 인간을 잡아먹어대는 쪽이 아니라 다행이지만. 마치 일부러인 듯 그 장면은 고향을 떠나게 된 이후로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그 장면을 보고 무심하게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시에라 본인조차 감히 장담할 수 없었다. 뼈에 각인되었을

정도의 생리적 거부감이라는 것일까.


마을로 뛰어든 시에라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높은 나무 위로 날듯 올라가 멀찍이 마을 끝 바닷가에 보이는 배를 쏘아 침몰시킨 것이었다. 

도주할 길을 잘라버린다. 당연한 일이다. 그 다음부터는, 정신 없이 다니며 구하고 공격하고 치료하는 것 뿐. 그녀는 살짝 욕지기를 

내뱉었다. '제한'이 걸린 곳만 아니었다면, 원래의 그녀였다면 이러한 것 쯤 대상을 추적 지정으로 한 순간에 끝내고 지금쯤 느긋하게,

다친 사람마저 한 번에 치유하고는 돌아가는 길일 터였다. 아니, 어쩌면 직접 올 필요도 없었겠지.


창에 찔려 피투성이가 된 아낙을 한순간에 회복시킨 후, 그녀는 재빨리 다시 움직였다. 왕자를 찾는 것이 먼저다. 물론 그가 이런 

잡졸도 못 되는 해적 따위에게 당하리란 생각 따위는, 그럴 가능성 같은 건 단 1%도 없었지만. 소규모의 인원이라면 너무 떨어져

있는 것은 좋지 못하다. 그리고 달리던 그녀의 귓가가, 어느 순간 서서히 고요해지기 시작하더니──


검은 옷의 청년은 아무 것도 아닌 양 어려움 없이 적을 베어 넘기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도 조용해진 공기가 너무나 평온하다는

한가하고 이기적인 감상을 갖는 자신을 한 번 혐오스럽다는 듯 쓴웃음을 한 번 지은 시에라는 재빨리 몸을 날렸다. 어디로? 왕자 쪽으로?

아니...





*          *          *





프로디는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인식할 수 없었다. 아, 몇 달인가 전에도 이랬던 것 같은데. 웅웅 울려대는 귓가와, 누군가가

자신을 조심스럽게, 반쯤은 끌어안듯 잡고 있다는 것만을 이해하고 있었다. 누, 구...? 


기억하는 마지막 순간은 쏟아져내리는 화살비. 그리고 이미 다친 어머니를 막아선 자신을 향해 날아오던 몇 줄기 뿐이었다. 지고 싶지

않아서, 눈을 감지도 않고, 무진 애를 써서 똑바로 보았지만. 지금 자신 앞을 막은 것이 누구인지는 그림자 탓일까. 역광 탓일까. 잘

보이지 않는다. 



"───시에라 님! ! !"



그 부름에 응하듯, 시에라, 라 불린 이는 가볍게 기침을 내뱉으면서도 손을 휙, 내뻗었다. 마치 필요 없다고 치우라는 것처럼. 그리고

동시에, 반쯤 무너진 주택의 잔해 사이에 숨어 있을, 화살이 날아오던 방향으로 번개인지 무엇인지 하는 것이 내리꽂힌다. 단말마 같은

것이 울리고, 재빨리 날붙이 특유의 빛이 섬뜩한 소리를 내었다.



"──뭐,야. 이제 봤더니. 전의 그 꼬마 아가씨잖아? 그 땐 무서워서, 우느라 그런 줄 알았는데. 항상 그렇게 음울한, 표정이야?"



얼마 전 보았던 하늘빛 눈동자가, 똑같이 휘었다.







08/





시에라는 아무렇지 않게 화살을 뽑아내었다. 피가 기다렸다는 듯 쏟아졌지만, 아무렇지 않았다.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것쯤. 버티지 못할 리가 없다. 팔에 하나, 어깨 쪽에 하나. 그래도 그 화살비에 길 잃은 것이 단 두 발 뿐이었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직도 멍한 것 같은 어린아이를 보곤 한숨을 가볍게 내쉬고는, 제정신이 있지만 올라오는 피 때문에 옴짝달싹 못하는 여자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빨리 가도록 해. 휘말릴지도 모르니까. 마을 광장 쪽으로 가면 사람들이 몰려 있을 거야. 여자는 일순, 피투성이가

된 시에라의 몸 한 쪽을 보고 깜짝 놀라고는, 신경이 쏠린 얼굴이었지만 그녀의 말 한 마디 재촉에 곧 망설임 없이 딸을 일으켜 세우고는

비척거리면서도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시에라 님,    ...."



당장 앞에 있던 적을 가볍게 베어버리고 달려온 왕자는 살짝 미간을 좁혔다. 꽤 보기 흉한 꼴일까, 시에라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욱신

대던 것이 곧 후벼파는 느낌으로 바뀌니. 그냥 화살이 아니라 독화살이었던 듯 싶었다. 무슨 독인지는 당연히 알 수 있었지만. 그래도

다른 처치 없이 바로 화살을 뽑았을 뿐이니 다소 흉하기는 할 것이다. 피가 멈추지 않고 흐를 테니까. 하지만 그대로 내버려두었을 경우에는,

피를 최대한 적게 흘리겠다고 몸에 독을 푸는 꼴이니 할 수 없었다.



"자살할, 생각입니까?  .... 아니, 남의 마음을 억측하는 것은 실례이지요. 부디 잊어 주십시오."


"...그다지 자살할 생각은 없지만. 만약 그 정도로 위급하다면, 무의식적으로 알아서 치유가 발동될 테니까. ..그런데 혹시, 단도 있어?"



시에라는 어디까지고 태연했다. 목이 베이고, 불에 타는 고통마저 한 점 흐림 없이 기억하는 그녀다. 독화살 두 대를 맞는다고 해서

어떻게 되고 쇼크를 먹는다던가 하는 일은 없었다.



"....."


"..아, 고마워."



먼저 독을 처치할 요량으로, 시에라는 단도를 빌릴 수 있냐고 물었다. 보통은 주 무기가 아니더라도 호신 겸으로 하여 하나쯤은 들고

다닐 가능성이 높기에. 아니나다를까, 순간 묘하게 못마땅한 표정이 스쳤지만, 베오울프는 그녀의 부탁대로 곧바로 짧은 칼을 내밀었다.

손잡이가 그녀 쪽으로 가도록. 가볍게 예를 표하며 단도를 받아든 시에라는, 숨을 가다듬는 일 따위 없이, 곧바로 팔에 난 상처를

먼저 칼로 찢었다. 슬그머니 퍼진 독 탓인지, 검붉게 변한 피가 왈칵 터지듯 흘러나와 땅을 적셨다. 



"으으, 쓰라려."


"....."


"..그럼 이제 어깨... 엇?"


"..주십시오. 이 쪽이 더 빠릅니다."



그 말과 함께, 왕자는 가볍게 시에라로부터 단도를 빼앗아 들었다. 그녀가 의식하지 않음에도, 상처 탓에 희미하게 파들거리는 가는

어깨를 붙잡고, 그는 익숙한 솜씨로 흰 피부를 찢고는 독을 빼내었다. 팔 쪽의 독까지 빼내는 것을 끝내고는, 천을 꺼내 찢고는

상처를 살짝 누르며 피를 멈춘 후, 빠른 손놀림으로 묶어주었다.



"...굳이 그렇게 번거로운 일, 해 주지 않아도 좋은데."


"생명이 걸린 일을 번거롭다 하십니까."


"일단 독만 빼낸다면 해독약이야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어."


"이곳은 성이 아닙니다."


"..그리고 나도 할 수 있었던 거니까. 굳이 왕자 전하께서 해 주실만한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것에 지위고하를 따집니까?"



그는 조금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의 말이 지나치게 태평하게 들렸던 탓일까. 그것에 신경 쓰는 일은 없이, 시에라는 가볍게 말을

받았다. 마치 종이에 베인 정도의 상처를 대하는 말투였다.



"그다지 따진 것은 아니야. 그저 의문이 들었을 뿐. 생각해보면 금방 나오는 답인걸."



솜씨가 확실히 좋구나, 익숙한 탓일까, 같은 한가한 생각을 하며, 시에라는 덧붙였다.



"말했듯이, 정말 위험하다면 나 스스로 치유를 사용하면 될 일. 그게 아니라면 오히려 무슨 꿍꿍이인지 의심해보거나 할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제 나름의 판단에 따랐을 뿐입니다. 월권이었다면 사과드리지요."


"──...으응, 그다지 그렇게 생각한 적은 없어. 당신이 사과할 일도 아니야. 그냥 순수하게 조금 궁금해진 것은 있지만."


"...그 의문은 나중으로 미뤄주실수 있겠습니까?"


"...?"



문득, 반대편 - 즉 시에라의 뒷쪽으로 노려보는 듯한 시선을 향한 예이츠의 왕자는 빠르게 칼을 바꾸어 들었다. 그제서야 그를 따라

고개를 돌리고, 그 쪽에서 닥쳐오는 적을 발견한 시에라는 선선히 대꾸했다.



"....아아. 그렇네.     .... 으응, 있지. 혹시 자신 있는 것 있어? 필요하거나, 해 주었으면 하는 거라던가."



험악한 인상, 무엇보다도 '추한 기운'과 온갖 원망 따위로 뒤덮여진 자들을 보며, 시에라는 가볍게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저런

것들한테, 사람들을 당하게 해 줄 이유 같은 건 없어. 딱히 선인이라던가 그런 게 되고 싶어서는 아니야. 그냥, 전혀 즐겁지 않아.

볼만하지 않아. 기분만 나쁠 뿐이니까.



".... 어디서 바닷속에서 막 기어나온 밥상에도 올리지 못할 것 같은 것들 때문에 조금 짜증나 버려서. 약간 조금 더 강하게 나가 줄지도."



하지만 그런 그녀의 표현이 조금 우습기라도 했는지, 베오울프는 아주 잠깐, 살짝 웃음을 흘렸다.



"제 등 뒤를 바람으로 받쳐주십시오."


"어렵지 않지."


"세기나 방향은 당신에게 맡기겠습니다."


"신뢰라면 감사를."



담백한 대화였지만, 그 밑에 깔린 것은 굳이 찾자면 신뢰였다. 인간 대 인간의 '신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서로가 서로를 뒤에서

공격하지 않으리라고, 또한 서로의 실력은 인정한다는 그러한 '신용'은 확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중얼거린 시에라의

말에, 베오울프는 더 이상의 대답을 돌려주지 않았다. 시에라 또한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눈 앞, 멀찍이서 다가오는 자들을 보며

단 한 순간으로 궤도와 각도, 속도, 위치 따위를 전부 다 계산했을 뿐. 좋아. 끝났다면 기다릴 것은 없다. 더 이제.



"──그럼, 지금 ! ! !"



왕자가 튕기듯 뛰어나간 것은 시에라가 짧게 내뱉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동시라고 해도 좋을 법한. 마치 그의 속을 읽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예상이라도 하고 있는 것인지. 왕자가 생각하는 족족 그대로 바람은 등을 밀었다. 발을 감싸고 땅을 박찼다. 그 바람을 탄 것처럼

움직이던 청년의 검이, 마지막으로 화려하게, 큰 호선을 그렸다.



끝이었다.







09/





"아아, 멋졌어. 과연, 과연. 시녀들도 신하들도 입을 모아 침이 마르게 칭찬할 만하다고, 방금 실감했는 걸."



태평스럽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시에라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까딱한 왕자는 곧이어 모여든 군사들을 수습하고는

천천히 다가왔다. 피곤한 것일까, 어쩌면 아까 한꺼번에 피를 많이 흘린 탓으로 조금 어지럼증을 느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으나, 시에라는

군사들이 수습될 동안 가만히 나무 그늘에 앉아, 방금 전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전사는 검이라 했다. 


항상, 어떠한 곳에서도, 활이나 창을 숭상하는 곳에서도 대부분 비유하자면 그랬다. 예리한 검. 지키기 위한 검, 혹은 어떠한 수식어가 붙든.

그리고 방금 자신이 본 그 모습은, 그러한 표현에 더없이 어울리는 장면이었다. 날카롭고 아름다우나, 결코 먼저 밖을 향하는 일 없고.

주인을 역으로 해하는 일도 없이, 청명하게 빛나는 날선 검.


들고 있는 것이 어딘가의 명검이라던가 성검이라던가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 자신이──





감싸안는 바람을 밟고 디딘 채 화려하게 움직인다. 약간이지만, 검무를 추는 것처럼 보였다면, 시에라가 너무 감상적이었던 것일까. 

대단할 것도 없는 흔하디 흔한 양손검이었지만, 가볍게 한 손으로 들고 휘두르는 청년은 아무것도 아닌 양 내려앉아 휘몰아치는

바람을 타고 움직인다. 가볍게 빛이 일었다고 생각하면 어느샌가 그 앞을 막은 것은 양단. 핏방울조차 흩날리지 않으며, 질퍽한

소리 한 자락조차 남기지 않으며, 그는 춤을 추듯 움직이고 있었다. 


챙강.


하지만 검은 그 위력을, 그 힘을. 혹은 그 가벼움과 아름다움을 버틸 수 없었던 것이었을까. 박살이 나는 것도 아니고, 아쉬울 정도로

가늘게 부러져버린 검을 내려다보며, 가볍게 숨을 한 번 몰아쉰 청년은 재빨리 눈을 돌렸다. 당장 무기로 쓸 만한 것을 찾는 것일까.

시에라가 검을 다시 잇기 위해 - 혹은 새로 만들어내기 위해 손을 움직이려는 순간, 그 틈을 놓치는 일 없이, 머릿수만이라도 믿고 버티던

적이 귀가 울리는 기세로 다시 덮친다. 소녀가 반사적으로 방어를 위해 손을 뻗었고, 그것은 바로 동시에 일어난 상황이었다.


나뒹구는 적의 허리춤에 걸려 있던 검을──

단 한 번의 유려한 동작으로───


다시 한 번, 날붙이의 은빛 푸른 섬광이 스쳤다. 밀려들었던 자들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던

것이었으리라. 어지간히 노련한 전사가 아니라면, 혹은 시에라 본인처럼 '어떠한 연유로' 이미 아늑히 다른 사람과는 다른 그러한

자가 아니라면. 저들의 입장이었더라도 자신이 베인 것 조차 인식하지 못했을 테니까.


내리쳐오는 공격을 피하며 살짝 무릎을 굽히고, 옆으로 몸을 날리듯이 피함과 동시에 검을 뽑아 막으며 벤다. 정확히 말하면, 그저 

베었을 뿐이다. 그들의 공격이 통하지 않았고, 그의 것은 여지없이 적들이 든 것을 갈랐을 뿐. 공격은 최선의 방어.


그리고 가장 앞에 섰던 자들이 스러지고서야, 사태를 인식한 것인지. 다소 겁을 먹은 것인지, 그제야 현실을 똑바로 마주한 것인지.

천천히 뒷걸음질치기 시작한 몇몇. 아예 이판사판의 각오인지 괴성을 지르며 돌격한 몇몇. 그리고 아예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도주하는 몇 명. 


가볍게 웃음을 흘리며 시에라는 손가락을 튕겼다. 몇몇이 도망친 방향에서, 무엇인가를 토하는 듯한 비명과 히이익, 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더 이상 왕자의 쪽은 볼 필요도 없었다. 이미 서 있는 자가 그 혼자인 시점에서, 아름다운 연무 한 곡은 끝이 났으니.



그들이 군을 정리하고 마을에 정비 명령을 내리는 동안, 그 장면을 멍하니 떠올리며 시에라는 살짝 쓴웃음지었다. 비록 나에게는

원수나 다름없는 물건이지만 -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어도, 멸망을 부른 원인 중 하나였으니. 물론 그걸 부른 왕이란 놈이야말로

악의 근원이었지만 -, 당신에게 겨울의 검을 보여 주고 싶구나. 분명히 미친 것이지만, 응. 당신이라면 이겨낼지도. 굉장히 아름다울

거야. 겨울을 내리는 은빛의 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베오울프를 눈치채고서야 시에라는 그를 올려다보며 빙긋이 미소지었다. 거기에 중얼거린 말은 비꼼도

뭣도 없는 진심이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예이츠의 왕자는 다시금 살짝 목례하고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뭇잎 

틈새로 걸렸던 햇살이 가려지고, 하늘빛 청명한 푸른 눈동자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고마워."



살짝 답례를 하고 일어선 시에라는, 태연하게 자신을 잡은 채 걷는 왕자를 보고 잠깐 의아했지만 그 이상 말할 것은 없었다. 그녀를

이끌고 간 앞은 그의 말. 그녀 정도의 가벼움은 아무것도 아닌 양 그는 가볍게, 거의 안아든 것에 가까울 정도로 부축하여 시에라를

말에 태웠다. 마지막에는 제대로 발까지 안정적으로 자세를 잡도록. 곧바로 휙, 하는 바람소리와 함께 말에 올라탄 그를 돌아보며,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중얼거렸다.



"엣. ..저기, 내 말 있는데."


"그 상태로는 힘들 겁니다."


"......"


"전속력으로 달릴 테니, 잘 잡으십시오."


".. .... 확실히. 그 거리 승마는 조금 과할지도. ...그럼 호의에 응석부려서 감사히."



시에라는 가볍게 손에 힘을 주었다. 순간 눈 앞이 아찔하게 돌고는, 스치듯 깜깜해졌다. 확실히, 이 상태로 혼자 말을 타고 달리는

것은 조금 무리일지도. 원래부터 체력적으로 자신 있는 부류의 인간은 아니었다. 그녀 뒤에 올라탄 청년은 다시금 마을 복구의

명령을 확인시키듯 내리고는 곧바로 달리기 시작했다. 한 번 높게 운 말이 흙먼지와 함께 땅을 박찼고. 마을의 풍경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이제 시야를 채우는 것은 심록의 들판과 멀찍이 보이는 짙푸른 바다. 푸른 하늘과 드문드문 핀 색색의 꽃. 북쪽 지역 특유의 날카롭고

차갑지만 상쾌한 바람이, 귓가를 파고들어 조금 시린 기분이었지만. 깊은 숨을 들이쉬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말 특유의 흔들림조차

한 가락의 리듬으로 보는 시에라에게는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다. 어쩌면, 지금 그녀를 붙잡아주고 있는 뒤의 사람 덕분일지도 모르지만.



"──있지. 아까 궁금했던 것, 물어봐도 돼?"


"하문하십시오."


"당신은 이 나라의 왕자님. 그리고 나는 출자불명의 인간. 아무리 지금은 여기에서 일하고 있어도, 결국 출신이 그런 이상 나는 외부인이야. 

거기다, 내가 말한대로 정말 위험하다면 난 내가 스스로 치유할 수 있었을 테고. 그렇다면 나보단 죽을 뻔한 그 백성의 아이랑 그 주변을 

먼저 돌봐 주는 쪽이 낫지 않았을까?"


"그 사람들은 당신 덕분에 무사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살아있는 게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도움이 될 겁니다."



듣기 좋은 저음이 선선히 대답했다. 여전히 조금은 고지식하다 싶을 정도로 절도 있는 자세였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라.

어떻게 보면, 확실히 그렇겠지. 시에라는 조금, 뜻모를 미소를 흘렸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무사하지 못했다면, 그래요. 전 그들을 먼저 살폈을지도 모르겠군요."


"... 그런가. ...으응. 뭐, 그렇구나."



그다운 답변이었다. 어느 정도는 예상한 것. 시에라는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긴 속눈썹이 가라앉아, 푸른 눈동자에 그늘이 졌다. 

그녀는 살짝 몸을 돌리고, 고개를 들어 청년을 바라보았다. 다시 한 번 똑바로 눈을 맞댄 채 가만히 중얼거렸다. 붉은 눈동자에

자신의 푸른 눈이 담기는 것을 보는 건, 제법 새로운 느낌이었다. 보라색으로 보일까, 라는 되도 않는 호기심이 있었지만 역시

그런 일은 없었다.



"... 뭐, 그래도. 확실히 나는 직접 손을 쓰고 단도라도 칼 같은 걸 다루는 덴 썩 익숙하지 않으니까, 덕분에 깔끔하게 된 것 같기도.

약을 만든다면 효과가 더 빠를 테니까. 고마워, 신세를 졌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니 했을 뿐입니다."


"... 사람이 고맙다고 하면 그냥 기쁘게 받아주어도 될 것 같지만... 아, 그리고 말투는 굳이 그렇게 존댓말을 고수하지 않아도 좋아.

... 응. 오히려 전하가 나한테 존댓말을 쓰고 내가 반말을 쓰는 건 조금 어색하니까."


"...?"


"그냥 당신이 더 익숙한 쪽으로 하는 게 나아."



아무래도 안 될 일이었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괜찮겠습니까? 그래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아."


"존칭을 듣다가 하대를 들으면 이상할것 같습니다만."


"중요한 건 말투 같은 것보다 그 본심이잖아? 태도라던가, 진심이라던가. 그리고, 나도 반말인 걸. 아니면 존댓말, 써 주길 원해?"


"그다지.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이 다음 말부터 놓도록 하지요."


"으응. ...그런데 의외로, 당신은 나한테 아무것도 묻지 않네? 사무적인 것은 그렇다쳐도, 처음에 만났을 때도 의문을 가질 법한데 자기 

소개만 간단히 하고 끝이었으니.""


"... 폐하께서 보증하셨고, 그대도 긍정했다. 여가 의문을 가질 여지는 없도다."



순식간에 전혀 달라진 말투에, 시에라는 피식, 하는 웃음을 흘렸다. 임금님 말투 같다고 중얼거렸다, 물론 속으로만. 하지만 그다지 불편한

느낌은 받지 않았다. 시에라 본인이 저런 말투를 사용하는 것은 연극이라도 하는 게 아니면 없을 테지만. 고향에서 명령을 내릴 때도

평소와 같은 말투, 혹은 무엇 하는 것인가, 정도의 어조였으니까. 뭐, 왕을 대면하거나 공식적인 행사 때는 아니었지만, 그건 귀찮은

연례 행사 정도의 일이었으니까. 



"...흐응. 그런가. 생각보다 담백하구나. 수상쩍은 사람 취급으로 내심 경계 잔뜩 당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 여가 그랬어야 했나."


"딱히, 그랬어야 한다기보다는. 그냥 어느날 갑자기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열여덟살 여자애가 떡하니 한 자리 잡고 있으면 그러지 

않을까, 보통은?"


"말했잖나. 폐하께서 보증하셨고 그대가 긍정했으니 여가 의문을 가질 여지는 없노라고. ... 거기에 과장된 것이었다면 모르나, 

그대의 실력은 그 위치에 걸맞는다. 딱히 다른 나라와 내통하는 혐의도 없다. 신민들에게 위해를 끼치는 일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여가 그대를 의심하는 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되지만."


"..어머나, 그것은 영광. ..아무튼, 그렇구나. 응. 뭐, 그렇다면 좋은 거지만."



시에라가 예상했던 그대로의 답이었다. 그럼에도 지루하지 않았고, 싫증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의 근처에서만 누릴 수 

있는 고요함에 안긴 채, 그녀는 문득 떠올렸다. 아아, 닮은 탓일까. 하지만 실례인 생각이다. '그녀'에게도. 뭐, 일단은 그에게도. 

그리고, 그 이상으로── 오랜만, 이었다. 마치 꿈 속의 꿈 같은 예전 일이 지난 후로, 누군가에게 이렇게 곧게, 저러한 말을 

듣는다는 것이. 



"...응. 믿어 주어서 고마워."



대답은 없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조금은 씁쓸한 표정을 머리칼로 가린 채, 그렇게 말하는 것이 지금의 시에라로서는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10/





예의 마을 약탈 건 이후 약 2주. 이제 몸을 다 회복한 시에라는 다시금 햇볕이 잘 드는 자신의 방에서 사각거리며 서류를 처리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유감스럽기 그지없게도, 궁에 도착한 직후 말에서 내려 몇 걸음 걷자마자 빈혈인지 무엇인지로 픽, 하고 쓰러져 버렸고, 

사람들은 난리가 나서 그녀에게 반 강제적인 일주일의 휴가를 주게 되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그 거짓말 못 하는지 안 하는지 둘 다인지 - 그래, 둘 다일 것 같다 - 하는 성격의 왕자는 경과를 보고하면서, 그녀가

한 것에 대해서도 하나 빠지는 것 없이 : 배 침몰. 공격. 치유. 방어. 자신의 보조. 마지막에는 그 여자 아이 대신 화살을 맞은 것까지

읊었고, 거기에 대해서 이 곳 사람들은 이제 그녀를 완연한 여기의 사람으로 생각하는지, 그야말로 경계심의 조각도 없는 태도로 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정말이지,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다가 정말 자신이 배신이라도 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물론 할 생각 따위는 전혀 없지 않아, 너? 그냥 지금 걱정하는 것 뿐이잖아.

옆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시에라는 한숨을 쉬며 과자 한 조각을 입에 던져넣었다. 오도독, 하는 소리와 함께 달착지근한 맛이

혀끝에 감돌았다.


옆에서 계속 조잘거리는 목소리를 반쯤 무시하고 흘려들으며, 시에라는 멍하니 자신의 방 안을 쳐다보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책상과 침대. 테이블. 의자. 그것이 전부였을 살풍경한 방인데. 그 짧은 시간, 그녀의 기준으로서는 순간이나 다름없는

그 짧은 시간 안에 어째서 이렇게 너저분해져 버렸을까. 책상 위에는 온갖 서류가 쌓여 있고, 테이블 위에는 책들이 펼쳐져 있다.

매일매일 누구인가 가져다 주는 덕분에, 꽃병의 꽃은 오늘도 싱그러우며 시녀가 부르지도 않았음에도 가져다 준 과자는 그 구석에서 

달큰한 향내를 풍기고 있었다. 



"──어라?"



시에라는 문득 들어온 기척에 살짝 형태 좋은 눈썹을 찌푸렸다. 창가 쪽이다. 여기 사람들은 마술사도 감지 같은 것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몰랐는지, 그녀가 처음으로 사용했을 때 굉장히 새로운 반응을 보였지만,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경우에는, 마술을

쓰지 않고서도, 그저 눈치채는 것이 더 많았지만.



"어머나. 너는 누구니?"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비춘 것은, 그녀의 창가 앞 나무에 매달려서, 오르며 방에 들어오려고 하는 위태위태한 상태의 어린 소년이었다.

누구인지 알 수는 없으나, 입은 옷을 보아 좋은 댁 아드님이다. 저 소년이 누구던간, 그녀의 머리칼 한 올 해칠 수 없으리란 걸 보는 순간

파악한 시에라는, 오히려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어린 아이를 바라보았다.



"앗. 마술사 누나!"


"으응, 너는 누굴까... 아, 네가 폐하의 아드님.. 왕세자 전하?"


"응, 맞아!"


"그런데 왕세자 전하가 내 방, 그것도 나무를 타고 들어와선 무슨 일이실까?"


"아, 그게..."



다소 긴 듯 짧은 듯한 머리칼을 포니테일로 동여묶고, 동그랗고 앳된 얼굴에는 호기심이 반짝인다. 생기가 도는 장밋빛 뺨과, 선해 보이는

부드러운 눈망울. 약간 장난기 어린 입매. 귀여운 얼굴을 찬찬히 뜯어본 시에라는 소년이 여지껏 본 적 없는 왕세자 - 왕의 늦둥이 

아들이라는 결론에 도달했고, 정답이었다. ..아무리 봐도 부자지간이라기보다는 조부 손자에 가까워 보이지만. 늦둥이라니 그러려니 

해야지. 하지만 시에라처럼 그런 태평한 생각은 아무래도 들지 않았는지, 소년은 그 사이사이에도 무언가를 찾는 듯 고개를 두리번 

두리번 거리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게?"


"그.... 나 좀 숨겨줘!"


"...어째서? 습격자라도 있니?"



결계는 멀쩡했는데. 시에라는 중얼거렸다. 내부에서 사용인으로 변장해 숨어들었던 자가 행동했을 가능성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새들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시에라 본인이 길들인 하얀 새들도. 무엇보다도, 이 아이의 행동은 목숨을

위협받은 자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소년은 마치 눈치를 보듯 눈을 데굴데굴 굴리면서 망설였다.



"습격자는 아닌데..."


"날 붙잡으려는 사람이 있어. 그래서..."


"... 흐음. 좋아, 알겠어."



시에라는 상황을 이해했다. 덧붙여서 이 왕세자 소년이 피하고 있는 대상이 누구인지도. 그 장면을 떠올리니 조금 우스워져, 가볍게

새어나온 웃음을 약한 헛기침으로 지운 소녀는 팔을 뻗어 소년이 들어오는 것을 도와 주었다.



"아, 혹시 폐를 끼치는거면 미안해. 다른데로 갈게."


"아, 아니야. 있어도 좋아. 과자 구운 게 있는데, 먹어 볼래?"


"!"



순간 소년은 눈을 반짝 빛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흘끔거리며 문 쪽을 쳐다본 아이는, 여전히 머뭇거리는 듯 하다가 조금 당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일단 나 숨겨준다고 약속해주면!"


"내 방은 결계를 쳐 두어서, 대부분은 들어오지 못해. 내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정말?"


"응."


"정말 못들어오는거지?"


"그럼 계속 그렇게 바쁘게 뛰어다니는 편이 좋니?"



태연하게 정곡을 찌른 것일까. 시에라의 질문에 소년은 순간 말문이 막힌 듯 하다가 곧 조금 울상인 얼굴로 힘없이 대답했다.



"...아니. 사실 점점 힘들어..."



예상대로인 대답에 살짝 웃은 시에라는, 몇 걸음 움직여 책상 구석에 놓여 있던 과자 접시를 꺼냈다. 딱히 음식 맛에 집착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투박하다고 할 정도로 소박한 이 곳의 요리만 먹다보니 가끔 섬세하게 입 안에서 녹아내리는 온갖 쿠키들이

조금 생각나서, 주방 한 구석을 빌려 만들어 본 것. 과일 조각이나 말린 것을 넣어 구운 것. 부드럽게 갈아서 함께 반죽했던 것.

잼처럼 만들어 꿀과 함께 넣은 것. 본 적 없는 모양과 처음 맡는 달콤한 향기에 소년은 눈을 빛냈다.



"...여기에선 못 보던 과자지?"


"어? 정말이다! 누나, 이거 어디서 난거야?"


"만들었지만?"


"누나가 직접?"


"응. 주방을 빌려서."


"우와... 대단해!"


"나중에 주방 급사들에게 조리법을 알려둘 테니까, 해 달라고 해."


"진짜? 진짜진짜? 만세!"



시에라는 가볍게 웃었다. 쫑긋쫑긋 춤추는 짧은 은빛 머리카락이, 잠시 스치듯 누군가와 겹친다. 그것을 자각한 순간, 소녀는 웃는 것을

잊고, 눈을 크게 떴지만. 소년이 그것을 눈치채는 일은 없었다. 역시, 생각해오던 대로다. 느껴오던 대로다. 이곳은 나를 미치게 한다.

수천 수만의 시간을 기억에 새기고, 앞으로도 -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영겁을 헤쳐나갈 그녀를 미치게 한다. 흐트러져 버린다. 

보통이었다면, 그 대상을 배제하든 그녀 스스로가 물러서든 둘 중 하나의 방법을 취했겠지만. 그럴 수가 없어. 이들을 해친다는 선택지

따위, 하고 싶지 않아. 그럼 자신의 손으로 스스로를 끝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두렵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떠나고 싶지 않다, 고 멍하니 생각하는 자신이 있어.


그녀는 가볍게 이를 악물었다. 버텨내. 괜찮아.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아무렇지 않을 일이다. 바로 전에 있었던 곳과, 유독 대비되어 

보여서 이렇게 느낄 뿐이야. 재빨리 머릿속을 비우기 위해, 시에라는 적당히 떠오르는 말을 아무 것이나 입에 대었다.



"...그래서, 누구에게 쫓기는 거야?"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과자를 맛있게 바삭바삭 먹던 소년은 순간 움찔했다. 그 모습에 또 한 번 가벼운 웃음소리가 입가에 맺힌다.

휙, 가벼운 손짓 하나로 소년의 앞에 차를 한 잔 놓으며 시에라는 피식 미소를 흘렸다.



"비, 비밀이야."


"어째서 쫓기는지도?"


"응."


"... 뭐, 그렇다면 묻진 않을게. ..아, 다 먹었니?"



빨갛게 달아오른 소년의 얼굴을 보고서도 더 캐묻을 생각까지는 시에라에게도 없었다. 어린 아이를 울리는 건 취미가 아니다. 특히, 

이런 아이라면. 맛에 감탄한 듯 입가에 부스러기를 묻힌 채 열심히 작은 얼굴을 끄덕이는 소년을 보며, 시에라는 가볍게 입가에 묻은

가루를 닦아 주었다. 그것에 소년은 살짝 눈을 가늘게 뜨더니 끌린 듯 웃는다.



"맛있어!"


"..입에 맞았다면 다행이네."


"...그럼 이제 뭘 하면 좋을까.. 마술이라도 보여줄까?"


"마술? 여기서 보여줄수 있는거야?"



시에라는 대답 대신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었다. 팡, 하는 소리와 함께 반짝이는 불꽃이 일더니, 곧 별가루를 뿌린 것처럼 바람에 흩날리며

사라졌다. 그것에 깜짝 놀란 듯, 소년은 동그랗게 뜬 눈을 빛내며 열렬히 환성을 내뱉었다. 얼굴이 슬그머니 붉게 달아올라, 누가 봐도

두근두근 거린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법한 모습이었다. ..조금 미안한 기분도 드는 걸, 시에라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방금 불꽃의 흩날림은,

바깥에서도 보였을 테니까.



"와!"


"이번에는... 뭔가 보고 싶은 게 있니?"


"아무거나! 뭐든 괜찮아!"


"..흐응.... 그럼───"



시에라는 우아하게 손바닥을 휙 펼쳐서, 마치 날아앉은 나비를 쫓는 양 가볍게 흔들었다. 곱디고운 섬섬옥수가 유려한 곡선을 

그린다. 그리고 그 선에 맞추듯, 동시에 화려하게 만개한 꽃병의 꽃들. 



"──! ! !"



소년은 이번에는 정말로 믿을 수가 없었는지, 재빨리 일어나 종종걸음으로 꽃병 앞에 가서 코를 박듯 쳐다보았다. 정말로 피어난 것이

맞을까,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찾아본다. 살짝 꽃잎을 만져보며 신기해하고 있었다.



"신기해?"


"응응! 어떻게 한거야?"


"마술이지. 어려운 건 아니야."


"나도 배우면 할 수 있게 될까?"


"───그 전에 여의 손에 잡히지 않는다면."



탕, 하고 문이 열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언제 들어도 듣기 좋은 저음. 또한 동시에 주변에서 맴돌던 소음이 단 한 순간에

사라진다. 그 짧은 시간에 편안함을 느낀 시에라와는 달리, 소년은 눈에 보일 정도로 - 조금 과장하면, 펄쩍 뛰었다시피 - 깜짝

놀라고는 입을 벌린 채 갑자기 들어온 방문객을 보았다.



"어머나. 생각보다 빨리 왔네."


"신호를 보았도다."


"?!"


"응. 그럴 줄 알았어."


"누, 누나?"


"...응, 왜?"


"살려주세요!"



담백하게 이어지는 대사를 끊은 것은, 애처로울 정도로 하얗게 질린 소년의 말이었다. 살려달라니,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던 시에라는 소년의 말에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단 하나뿐인 왕세자 전하, 뭘 해도 저 청년이 소년을 죽인다던가

할 리는 없지만. 자신이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일까. 아니면 적어도 이 소년에겐 죽음과 비슷한 정도로 생각되는 무엇인지도

몰랐다. 아니, 어느 쪽이든 어린 아이의 과장이다. 쓸데 없이 깊이 생각하지 말자. 



"어머나. 왕세자 전하.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대충 왕자 전하를 피한다는 건 알았지만. 뭔가 국가 기밀 서류라도 찢어버렸니?"



빠르게 도리도리 고개를 젓는 소년.



"...그럼?"


"고, 공부를..."


"...공부? 아아. .... 그렇게 많이 어려워?"



시에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항상 그랬다. 조금은 동경해버릴 정도로. 노력해서 성취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점차 점차 알아나간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배우기로 작정한 순간 한 번에 모든 것을 익혀버리는 그녀로서는, '어렵다'던가 '노력한다'던가, '배워나간다' 따위의

표현은 사전 속에만 등장하는 단어와 다를 것이 없었다. 말하자면, 어째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어째서 어렵다는

것인지 알기 어렵다. 적어도 그러한 어려움에 관련된 문제에서, 그녀는 항상 그 마음을 '이해하는 척' 밖에 해줄 수 없는 것이다. 사실,

감정적인 무언가에 관련된 것들에서는 대부분 그랬지만. 이렇게 해 보면 바로 답이 나오잖아. '과정'을 생략하고 알아버리는 그녀로서는,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그것을 익혀야 한다는 기묘한 상황에 항상 처하고는 했으니까. 물론, '익힌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다시 한 번,

초시계로 재도 잴 수 없을 짧은 시간에 '과정'을 한 번 머릿속에 정리해 본다는 것 정도지만.



"어렵고... 지루하고... 으으..."


"그런데 어른들은 훌륭한 임금님이 되려면 해야 한다고 하고?"


"응."



소년은 정면에 서 있는 베오울프의 붉은 눈에 한순간 움찔하고는 천천히 대답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않을까. 음, 나는 잘 모르겠지만. 해야 하는 일이라면 열심히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 그렇게 해서 빨리 끝내면 더 

놀 수 있고. 그리고 좋은 결과를 얻으면 기쁘지 않을까? 응. ... 내가 왕세자 전하라면, 얌전히 지금 가서 다시 책을 펴겠어."


"그...렇지만, 힘든걸... ......."



왕자는 일단 상황을 보기로 한 듯, 별 말 없이 가만히 시에라와 소년의 대화를 듣고 있을 뿐이었다.



"...대신 오늘치의 공부를 다 끝내고 오면, 다른 과자를 구워줄게. 아니면 함께 만들어 보는 것도 난 상관 없고."


"....정말?"



시에라의 등 뒤에서, 그 말에 고개를 쏙 내민 소년은 그새 또 반짝거리는 눈으로 되물었다. 그럼에도 왕자 쪽은 감히 아직 쳐다보지

못했지만. 표정이 빙글빙글 빠르게 바뀌는 아이구나. 그녀는 희미하게 미소지은 채 수긍했다.



"응. 그리고 열흘씩 얌전하게 공부한다면, 그 때마다 새로운 마술을 보여줄게. 훨씬 더 넓고 신기한 걸로. 궁 앞 정원이 순식간에 

만개한다거나 하는 것, 보고 싶지 않니?"


"보고 싶어!"


"아니면 얼음 썰매를 탈 수 있게 연못을 얼려버린다던가."


"! 알았어, 약속!"


"그렇지? 응. 약속. 나는 거짓말은 하지 않으니까. 믿어도 좋아."


"응!"


"그럼 왕세자 전하, 열심히 힘내."



방긋 웃는 낯으로 약속하고는, 시에라는 살짝 몸을 옆으로 비켰다.



"...얘기는 끝난 듯 하군."


"...자아, 그럼 전하. 왕자 전하께 가야지."


"아니, 그럴 필요 없노라."



고결한 자 특유의 절도 있는 걸음새로 성큼성큼 다가온 예이츠의 왕자는, 짤막하게 내뱉고는 가볍게 왕세자를 안아올렸다. 아니. 정정.

정확히 말하자면, 짐을 드는 것처럼 어깨에 들쳐업었다고 하는 쪽이 옳으리라.



"어머나."


"수고 많았도다, 시에라."


"별 말씀을. 그럼 왕세자 전하, 이따가 다시 보자?"


"네에..."



그래도 조금 하기 싫은 것인지, 소년은 다소 시무룩한 안색으로 손을 흔들었다. 약간 힘이 빠진 것처럼 보인 것은 기분 탓일까. 그런

소년을 흘끗 본 채, 베오울프는 가볍게 고개를 까딱했다.



"그럼."



잠시나마 소년에게 손을 흔들어 준 시에라는, 책상 위에 마구 흩뿌려진 과자 부스러기를 가볍게 치워냈다. 막상 있을 때에는 소란스럽다고

생각했지만. 또 사라지니, 어쩐지 텅 비어버린 느낌이 드는, 그런 봄바람 같은 자리.


아스라한 햇살 한 줌이 남아 있는 그런 봄날이었다.







11/





그녀는 최근 늘어난 일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불평 불만 없이, 완벽하게, 기한 내에 업무를 처리해대니

실수를 종종 하는 다른 신하보다 그녀에게 시키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인지, 최근에는 마술이나 지식 관련이 아닌 자잘한 세무 서류

까지 그녀가 보게 되었으니까. 이래도 되는 건가, 이 나라. 란 생각이 문득문득 들었지만. 아무리 봐도 자기 체구에 비하면 쥐꼬리만한

깃펜을 들고 일하는 것보다는 도끼를 들고 싸우는 게 어울릴 법 하고, 또 본인들도 그 쪽을 선호하는 자가 많은 신하들의 구성을 생각해보면

고개만 절레절레 저을 일이다. 사실 세무라고 해도, 시에라는 그저 큰 표든 빽빽한 서류뭉치든 한 번 스윽 훑는 것으로 계산을 

완료하니. 시간적인 의미에서 효율은 급상승하는 것이다. 거기에 이제 왕세자 - 헤알드레드라는 이름의 소년 - 와 틈틈이 놀아주는

것에, 마술사로서의 기존 업무, 아무리 생각해도 백과사전 취급 당하는 듯한 기분이지만 그 외 지식 관련의 일, 그리고 기타 등등을

전부 다 해내려면 아마 보통 사람의 경우 하루가 48시간이어도 모자랄 터였다. 물론 그녀가 일 중독자의 부류였다면 환호했겠지만.



"...하암."



어쨌든 대충 절반은 끝냈으니, 잠시 숨을 돌리자. 이렇게 생각하며 기지개를 쭉 펴며 걷던 그녀가 도착한 곳은 궁 뒤편의 조용한 그늘.

커다란 나무가 햇살을 적당히 가리고, 성내의 시끄러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거기에 있는 사람들 또한 드물고. 그렇지만 오늘은──



"───..낮잠 중? 은 아니고, 휴식 중?"



긴 검은 속눈썹이 그림자를 드리운 위로, 가만히 붉은 눈을 가린 채 나무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던 청년은 그제서야 으음, 하면서 

대꾸했다. 나뭇잎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에 드러나는 이목구비가 퍽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음. ...관찰력이 좋구나."



반쯤 누운 듯한 자세를 바꾸는 일 없이, 청년은 드물게도 약간 나른한 듯 조금 느린 어조로 중얼거렸다. 홍옥의 눈동자만을 떠서

그녀를 올려다보는 상태로.



"그 정도는 알 수 있는 걸. ...그나저나 선객이 있었을 줄이야."


"이 곳을 즐겨 찾았는가."


"──뭐, 조용하달까. 좋은 그늘도 있고. ..아, 미안. 나, 방해였을까?"


"아니. 여야말로 방해인건 아닌가 싶노라."


"...그다지. 그런 건 전혀 아니지만."



사실이었다. 그의 곁에 있으면 세상이 평온해진다. 그 의미는 아마 시에라 본인만이 알 터이지만. 그렇기에 그가 근처에 있다는 것은

시에라로서는 전혀 싫은 점이 되지 않았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호감은 제쳐두고, 그가 그 본인도 모르게 선물해주는 고요함은

그녀로서는 환영할만한 일이었다.



"그런가."


"으응."


"서 있을 생각이 아니고, 여 옆에 앉는 것이 싫지 않다면 앉으라."


"...아, 고마워."



일단 시에라는 자신의 입장과 해야 할 행동에 대해 자각하고 있었으므로, 애당초 허락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앉지 않을 생각이었다.

높은 신분 앞에서 멋대로 앉아 버리다니. 더군다나 그 정도로 가까운 사이도 아니라면 예의에 어긋나는 짓이다. 아무튼 말을

들었으므로, 그제서야 그녀는 살짝 자리에 앉았다. 나비가 꽃잎에 앉듯, 사붓이 내려앉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왕자 전하는 괜찮은 걸까? 이렇게 혼자 계셔도. 위험할 지도 모르고, 신하들이 찾을지도 몰라?"


"검은 갖고 있다. 지금은 휴식시간이고. 여도 언제나 일만 하는 것은 아니니라."


"으응, 그렇구나. ..뭐, 확실히 적절한 휴식은 효율적이지."


"그대도 그런 연유로 이곳에 온 것인가."


"으응. 나, 이래봬도 바빴지만. 그냥 좀 조용히 바람 쐬고 쉬고 싶었으니까."


"그렇다면 그리 하라."


"..아아, 고마워."



베오울프는 대답 대신 고개를 한 번 가볍게 까딱하고는 시선을 위로 향했다. 정확히 말하면 나무 윗부분 같은, 말 그대로의 '위'가

아닌, 좀 더 멀리, 보이지 않는 것을 내다보는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 여기 혼자 앉아서, 무언가 깊은 생각이라도 하고 있던 걸까, 왕자 전하? 그다지 아무 생각 없이 쉴 뿐, 인 표정은 아닌 것 같지만."


"생각이라, 그리 보였더냐. 부정해 봐야 무의미하겠지. 그대가 본 것이 맞다."


"흐응. 물어보면 실례일까?"


"..."



시에라라는 소녀는 애당초 그렇게 남의 생각에 깊게 관심을 가지는 부류가 아니었다. 설령 묻는대도 예의상 묻는 경우가 많았고,

그것이 아니라면 본인이 지루할 지경인 때 정도였다. 또 어지간한 것이라면 그녀는 대강 읽어낼 수 있었다. 사람의 눈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담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는 여러가지로 특이한 경우. 그녀가 호기심을 가진 대상. 따라서 그녀는 흘끗, 지나가는 듯한 어조로 

가볍게 물었다. 파고들 생각은 없지만, 일단은. 아무튼, 왕자는 잠시 입을 다물더니 곧 중얼거렸다.



"...그렌델 모자와 싸웠을 때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도다."


"...그렌델이라면, 그 바다 괴물, 같은 것?"



그는 가볍게 수긍했다. 마수인가. 야수인가. 알 수는 없었다. 아무리 그녀라 해도, 본디 그녀의 땅이 아니었던 세상에서, 본 적도 없고

이름만 아는 생물체에 대해 알 수 있을 리는 없었다. 그녀는 보는 순간 알 수 있었지만, 보기 전에도 알 수 있는 그런 존재는 되지 못했

으니까.



"흐응. 왕자 전하의 이름을 드높인 것,이었던 걸로 알고 있지만. 무슨 특별한 일이라도 도중에 있었던 걸까?"


"글쎄."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도로 떴다. 선명한 붉은 눈동자가 다시 빛을 담았다.



"여의 이름을 드높였다.... 라. 과분한 일이구나."


"하지만 그 이후로 주변 국가들에게 당신의 이야기가 쫙 퍼졌다고 들었지만? 왜, 무용담이라던가. 이 지역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런 전설 

같은 이야기로."


"그럴 정도의 명예로운 싸움은 아니었다만."



솔직히 말하면 이 지역 한정이 아니게 되지만. 먼 먼 미래에는. 시에라는 가볍게 미소지었다. 보는 사람을 홀릴 법한 표정을 머금은 채,

그녀는 가만히 청년에게 시선을 향했다. 그는 가볍게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지만.



"사람들을 해치는 괴물이 있다기에 찾아갔고, 실제로 그러했기에 없앤 것 뿐이다. 거기에 명예도 긍지도 들어갈 여지는 없도다."


"뭐, 어쨌든 보통 사람들은 할 수 없었던 일이라고 들었고, 그렇게 생각하지만. 결론적으로 당신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살 수 

있게 된 것 아니야?"


"그래. 여는 그들의 목숨을 구했지. 하지만 여는 그 이상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


"...글쎄. 그러면 그것 자체로도 찬사 받을 행동으로는 충분하다고 보지만."


"그러한가."


"상당히 이상론적인 이야기지만, 당신 덕분에 살 수 있었던 사람 중 누군가가 후에 무언가 큰 일을 해낸다거나, 남을 또 돕는다던가 하면, 

그건 단순히 몇 명의 목숨만 구했다,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


"....."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는, 툭, 하고 내뱉었다.



"...여가 그들의 은인으로써 무엇인가를 요구해야 했을까."


"...요구하고 싶었어?"


"..."


"──구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훨씬 많을 텐데. 도운 후 대가를 요구했어야 하나 말았어야 하나는, 조금 사치스런 생각일지도."


"사치."



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상처를 회복하는 것은 그들의 몫이다. 계속 도와주다 보면 스스로의 발로 일어서는 법을 잊어버리겠지. 그러다보면 남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게 될 것이다. 그것은 간접적인 살인이도다. 그 괴물이 한 것과 다름없는 짓이 아니겠느냐. 하여 여는 그들에게 

그 뒤로는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아무 것도 도와주지 않았다.      ...그리 생각했거늘."


"──그다지. 그 말에 대해서는 절대 동의. 아이의 힘으로 해쳐나갈 수 없을 때 한 번은 도와주어야겠지만, 그 이후로는 자기가 어떻게든 

하려 들지 않으면, 결국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응석받이에 쓸모없는 사람밖에 되지 않을 거야."



시에라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특히나 그가 지키는 입장, 끌어나가는 입장, 다스리는 입장이라면 더 할 것도 없는 이야기다. 그 자리를

부모라고, 지켜지는 이들을 아이라 비유한다면 쉽게 이해될 말이다. 아이가 도저히 혼자 힘으로 해내기 어려운 것이 있을 때는

물론 도와 주어야 한다. 하지만 그 이후는 가르쳐주든, 부모가 하는 모습을 본 아이가 어떻게 혼자 해내는지 지켜보든. 지켜봐주는

것이 역할. 스스로의 길을 찾을 수 있도록, 꿈을 가질 수 있도록, 제대로 노력하고 배울 수 있도록 그것을 그져 '보여'주는 것이

역할로. 입에 떠먹여 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조금은 구르더라도, 조금 다치더라도. 그것이 결국 아이를 위한 일.


──그조차도 해낼 수 없어 망가지는 모습을, 그녀는 몇 번이고 지겹도록 보아왔다.



"...하지만, 당신 말은 뭔가 다른 이유 같은 게 있는 것 같은데. 왕자 전하, 내 추측이 맞는 걸까?"


"정곡이구나. 그게 마술사의 능력이라는 것인가."



내용과는 달리, 표정만은 담담한 왕자의 말이었다.



"그다지. 마술사라기보다는, 그냥 '내'가 그런 거야. ──별로 좋지 않은 일이었나 봐? 지금 생각하고 이유란 게."


"옳으나, 또한 그르다."


"흐응. 좋지 않은데 좋은 일이라...   ...누군가에겐 나쁜 일이고, 누군가에겐 좋은 일?"


"그건 명확하게 가를 수 없도다."


"..흐음... 그대로 물어보는 건 실례일 것 같고. 적당히 비유나 예시를 들어줄 수는 없을까? 말문을 꺼내버렸다면,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는 걸."



그는 잠시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것을 재촉하는 일 없이, 시에라는 가만히 너른 하늘과 멀찍이, 희미하게 보이는 검푸른 북쪽의

바다를 내다보며 기다릴 뿐이었다. 그녀는 일견 활달하기 그지없고 나이대에 맞게 약간은 소란스러운 밝음이 있는 소녀였지만,

어디까지나 타고난 여배우일 뿐이니까. 이 고요함이, 그녀는 좋았다. 무엇, 재촉하면 안 될 때를 알고 또 그 정도의 여유가

있기도 했지만.



".... ...혹한의 평원에서 길을 헤매는 여행자에게 주어진 금과 같도다."


"...어머나, ...이건 제법 시적인 비유네.  .. 흐음.... 그래서, 왕자 전하가 여행자라면, 저 금을 어떻게 할 생각? 짐만 되고 불필요하니, 

버릴 거야?"


"...... 일반적으로는 그리 하는게 맞겠지. ..허나 여라면, 그것을 함부로 버릴수는 없도다."


"──그런가? ...으음, 그럼 질문. 저 평원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금을 받지 못하는 걸까?"


"...."



대답은 없었다. 



"...뭐, 왕자 전하가 왜 버릴 수는 없다고 했는지 나로서는 모르겠지만. 응, 나도 버리지 않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해."



순간, 시에라는 자신이 방금 말을 '방금' 입 밖에 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그녀는 그 비유 안에

숨겨진 내용을 이해했으니까. 단 한 순간이라도 늦었다면, 그녀는 거짓말을 한 꼴이 될 테였으니까. 눈 앞의 왕자는, 훗날

왕이 된다. 그렇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그 작은 어린아이가 왕이 되기 전, 혹은 왕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젊어 죽는다는

것을 뜻하리라. 만약 자연사했음에도 자식이 없어서 그가 왕이 된다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일 것이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는가."


".... 만약 저 혹한을 헤쳐나간 대신 받게 된 거라면, 저걸 버리는 순간 온갖 고생을 다 하며 얼음 눈밭 속을 헤쳐나간 의미가 없어지잖아."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나라면 죽어라고 살아 나가서. 무거워도 지고 나가서,"



살아 남는다. 그 이름대로. 축복인 척 하는 저주일지라도. 그녀는 살아 남는다. 그리고 어떠한 행동을 하든, 어떠한 말을 하든, 그 

밑에 깔린 것은 그 시절의 그녀에 대한, 그녀를 믿어주고, 함께 해 준 이들, 그녀의 소중한 이들에 대한 긍지. 그것만큼은 아무리

괴로워도, 아무리 미치는 기분이어도, 아무리 썩어들어가고 있어도 잊은 적이 없다. 그것을 배반하는 행동은 한 적이 없다. 



"저걸 잘 사용해서, 기술을 개발해서 다시는 저런 혹한에 시달리는 사람이 없도록 따뜻하게 눈을 녹이던가. 사람을 고용해서 지도를 

만들어서, 여행자처럼 고생하는 사람이 없도록 만들던가."



그렇기에 그녀는 비슷한 꼴을 눈 앞에서 보지 못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마녀 사냥을 당해도, 악마라 손가락질받아도, 어떠한 결과를

불러오든. 그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만큼은, 그녀는 결국 내버려두지 못했다. 사람들이 다 죽어나가는 것만큼은, 자신이 강제적으로

그 세상에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결국 자신이 떠난 후에는, 그곳의 섭리에 따라 결국 죽었겠지만. 그 짧은 시간

만큼이라도, 안간힘을 썼다.


제발, 그렇게 되지 말아달라고. 

그렇게만은 되지 말아달라고.


능력도 지식도 필요하다면 전부 줄 테니까.


버티는 것을, 이겨내는 것을 보여 달라고.



"아니면 적어도, 그 고생한 몫만큼, 그만큼 보람 있게? 랄까, 유용하게, 사용하겠지만."



순간, 아주 희미하게, 그녀 자신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 할 정도였지만 분명 목소리에 힘이 깃든 것을 깨닫고 가볍게

흠칫한 그녀는 곧 평소대로 맑은 목소리로 재잘거리듯 말했다. 



"그대다운 대답이로다."


"어차피 헤매인 거라면, 적어도 금이라도 갖고 나와서. 그 헤매인 걸 헛고생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으니까."



이 또한 사실이었다. 만약 그녀가 연상한 장면이 아니더라도. 그녀는 순순히 헤맨 것을 그저 '헤매었다' 따위의 기억으로

남길 수는 없었다. 그럴 생각 따위 없었다.



"──그리고, 만약 '내'가 저 입장이라면.."



아아. 정말이지 난, 또 쓸데 없는 참견인가. 속으로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며, 그럼에도 그녀는 말을 이었다.



"...응, 역시 혹한에 헤매인다는 가정 자체를 하지 않겠지만. 갑자기 바다가 무너지든 산이 무너지든 유성이라도 떨어지든, 

뭔가 말도 안 되는 강제적인 상황이 발생한 게 아니라면. 혹한의 평야란 게 갑자기 생길 리는 없잖아?"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는 법. 천벌..같은 것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적어도 준비가 덜 되어서 실수로 헤매이거나, 지도를 잊거나, 방심하거나."



왕자는 쓴웃음인지, 미소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는 게 아니라면, 충분히 대비할 수 있고 저런 데 들어가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난 금덩어리는 연금술로 만들 수 있고, 겨울의 허허벌판 같은 곳에서 생고생 하는 건 영 취향이 아니라서."


".... 그것이 최선이겠지."


"어쩐지 어조가 최선이지만 할 수 없다고 하는 것 같이 들리는 걸?"


"...아니."



'할 수 없다고 들린다'는 말에, 그는 가만히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그리할 것이다. 반드시."


"──음, 뭐. 잘 되길 빌어. ...그리고 지금 당신이 하는 말로 추측해보건데. 저 '혹한'이 뭘 비유하는 거든, 당신은 지금 저 혹한이 있으리란 

걸, 아니면 최소한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게 된 거네."



그녀는 재빨리 말했다.



"응, 그럼 정말로 더 볼 필요도 없겠네. 가볍게 사뿐하게 피해버릴 수 있을 테니까. 아는 일이라면 정말로 불가능이고 뭐고 그런 것도 

아니니까."



사실이었다. 방금 생각했듯, 천벌에 해당하는 그 따위 억제력이나 세계 질서 레벨의 문제가 아니라면. 알게 된 이상 해결책을

찾는 것은 불가능이 아니었다. 특히나, 그녀에게는. 전혀 모르는 일일지라도 닥치는 순간 어떻게든 해 낼 수도 있는 그녀 같은 인간에게,

예고가, 정보가 들어왔다는 것은 이미 끝난 이야기란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격려해 주는 것인가. 고맙도다."


"... 격려라니. 난 그렇게 남 걱정까지 다 해주는 사람이 아니야. 그냥 사실을 말한 것 뿐."



──네가 모르는 거짓말이구나. 너는 또 네가 '모르기' 때문에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거짓말을 했어. 귓가에서 중얼거렸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수없이 많이 봐 왔는 걸. 왕자 전하는 그런 걸 해낸 사람들보다 대체적으로 대단하면 대단했지 부족하지도 않으니. 응, 문제 없겠네."


"그렇느냐. 그렇다면 오히려 더 든든하구나."


"아아. 왕자 전하는 이제 휴식 시간 끝? 하루도 수고하세요-"



잔잔한 웃음을 흘리고, 왕자는 일어섰다. 시에라 역시, 순간 흐려졌던 표정을 언제 그랬냐는 듯 재빨리 지우고는, 평소의 알듯 모를듯한

미소를 띤 채 밝게 올려다보았다.



"휴식을 위해 온 그대에게 도리어 귀찮을 법한 얘기를 했군."


"───아아니. 전혀. 오히려 즐겁달까, 마음에 드는 이야기였어. 그리고 이러고 있었던 것만으로도 굉장히 많이 쉰 기분인 걸."



그녀는 시리게 푸른 눈을 곱게 휘며 말했다. 그렇지만 바로, 그 눈은 똑바로 떠져, 오롯이 청년을 향한 채. 끝을 알 수 없는 푸른 잔향을

남기듯 가만히 소녀는 중얼거렸다.



"...하지만, 정말이야. 위로도 격려도 아니고, 정말로 사실이니까. 정말로 , 해낼 수 있어."



마치 그 목소리가, 그 떨림이. 그에게 하는 것 뿐 아니라, 소녀 스스로를 마치 다잡는 것처럼,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것처럼 들렸다면

너무 과한 반응일까. 하지만 분명히, 무엇인가가 묘하게 달랐다. 또박또박 내뱉은 소녀는, 가만히 덧붙였다.



"나는 거짓말은 절대 하지 않으니까, 왕자 전하. 이건 믿어도 괜찮아. 보장하는 거야."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그 표정은 순식간에 물에 탄 듯 사라지고, 소녀는 평소의 미소를 지은 채 나무에 비스듬히 기대었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말이 어쩐지 마음에 들었는지, 왕자는 처음으로 선선히, 약하게, 지만 입가를 끌어올렸다.



"그대를 믿는다."



차분히, 말을 잇는다.



"그대의 말을 믿는다."


".. ... ..... ..... ..... 어머나, 그 말은. 조금 기쁠지도."


"여 역시 사실을 얘기하는 것 뿐이니라."


"응. 그러니까, 당신이 거짓말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기쁘다는 거야."


"...그럼, 여는 이만 가보겠도다. 그대도 수고하거라."


"...네에, 왕자 전하. 그럼 안녕히-"



소녀는 가볍게 손을 몇 번 흔들었다. 그 또한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고는, 뒤를 돌았다. 그의 뒷모습이 점차 사라져, 건물 안으로

들어가버리자. 그제서야 소녀는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고요하던 귓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금 온갖 목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울기 직전의 어린아이처럼, 양 다리를 오므리고 팔을 걸어, 손을 깍지 낀 채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는, 그녀는 중얼거렸다. 희미하게

떨림이 담긴 목소리였다. 내가 할 생각은 없어. 그것은 과한 참견. 알고 있으니까, 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런데도.



"... 싫어. 그런 건."



───당신들이, 그렇게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런 것이, 당신들의 끝이 아니었으면 좋겠어.



마지막은 언제였는지도 기억 나지 않는 시간이 지나, 소녀가 처음으로 순간 바랬던, 것이었다. 그리 생각한 것이었다.





──당신들의 이야기가, 그렇게 끝나지 않기를 바래.





Powered by Xpress Engine / Designed by Sketchbook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