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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하 2013.06.08 15:11 조회 수 : 1







15/





아무도 없는 넓고 넓은 세계에 나는 홀로 서 있어.


펼쳐진 하늘. 드넓은 바다. 광활한 초원. 싱그러운 숲. 험준한 산. 고요한 강. 사락이는 풀. 아름다운 꽃. 지저귀는 새들. 산을 수놓는

사슴. 언뜻 비치는 물 속 물고기의 꼬리. 세상에 다시 없을 것 같은. 말 그대로의 이상향 같은 세상에서. 나는 혼자 서 있어.


'바깥'에서는 고함이 들려와. 고함이. 간청이. 속삭임이. 문을 열어달라고. 네 속에 내가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하지만 그건

사람이 아니지. 정확히 말하면. 나 밖에 볼 수 없는 그림자들.


그리고 내가 서 있는 곳에는 아무도 없어. 멀리서 언뜻 아이들의 웃음 소리,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만 너무 멀어서 닿지

않아.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아. 분명히 전에는 이 곳에도 다른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겠지. 지금은 없고, 닳아 뭉개져 흐릿해졌지만,

분명히 누군가 있었다는 발자국이, 마셨을 것이 분명한 여러 개의 찻잔이, 내가 좋아하지 않는 레몬 파이가 남아 있었으니까.


문득 나는 내게 누군가 웃으며 말을 거는 모습을 봐. 포크로 쿡, 타르트를 찔러 내게 내밀고. 재잘거리며 방긋 웃어.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향긋한 바람에 취한 듯 춤을 추고 목소리는 봄하늘을 나는 듯 울려. 나는 그것이 어쩐지, 너무나도 기쁘고 너무나도 행복해서. 조금 눈물이

나와버려. 그리고 내가 입을 열고, 포크를 받고, 웃는 순간 나는 깨어나. 


그리고 꿈에서 깨어난 나.

내 세상에는 또 나 혼자 뿐.


어쩐지 울고 싶어졌지만. 혼자 내버려두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어졌지만. 더 이상은 싫다고 매달리고 싶어졌지만.


말할 수 없어. 

말하지 못했어.

말하지 않았어.


그렇게 그렇게. 금속 촛대에는 녹이 슬고, 찻잔은 이가 빠지고, 타르트는 색이 변하고. 나는 꿈을 꾸고 일어나는 것을 반복하고. 그렇게

언제나처럼 눈을 다시 떠 보면.


그렇게 언제나처럼 나는 다시 외톨이.





16/





시에라는 나즈막히 신음소리를 냈다. 온 몸이 불로 지진 듯 욱신거리는 기분이었다. 좋지 못한 예감이 든 탓일까. 그녀는 비척이며

몸을 일으켰다. 기절하듯 잠든 이후, 아직 새벽은 내리기 전. 동녘 끝에서 희미한 빛만이 새어나오는 검푸른 하늘을 내다보며, 그녀는

차가운 공기를 깊게 들이쉬었다. 폐부가 뚫리는 듯, 차갑지만 맑은 느낌이 들었다. 


언제나처럼, 같은 꿈.


이미 기나긴 시간 동안 색은 커녕 길이조차 변하지 않은 흑단의 머리카락이, 약간의 땀에 젖었는지, 뺨에 조금 달라붙었다. 그것이 

불쾌하다는 듯 다소 거칠게 떼어버린 그녀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정신을 차리고. 흠칫 깨어나고는. 차가운 북쪽의

바람이 멋대로 뺨을 할퀴게 내버려 두었다.


멀찍이서 떠오르는 해가, 어쩐지 평소의 찬란한 금빛이 아닌. 마치 노을과 같이 기분 나쁜 붉은 빛이라고 생각하며 시에라는 일어났다.

이상한 기분이 든다. 고대부터 내려온 은혜로운 태양의 빛이, 어째서 이토록 무서운 날일까.


기분 탓이리라.  


문득, 자신의 '예감'은 단 한 번도 틀린 적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시에라는 애써 그것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지금의 그녀에게 좋지

않은 일 - 그러한 '예감'이 들 정도의 일은 단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것은 누구에 대한──? 그런 의문이 자연스레 떠올랐으나,

그녀는 흠칫 놀라 이윽고 그마저도 지웠다.


침대에서 내려온 그녀는 새하얀 잠옷을 적당한 옷으로 갈아입었으며, 군데군데 뻗친 머리카락을 설렁설렁 두어 번 빗질했다. 얼음장 같이

차가운 물로 얼굴을 적시고 입을 헹구고. 다소 거칠면서도 폭신한 수건에 얼굴을 파묻듯 닦은 후, 그녀는 방 밖으로 나갔다. 





*          *          *





사각사각. 아침의 일과 조례와 방문자 면담을 마친 시에라는 가만히 깃펜을 들곤 서류를 확인하고 있었다. 한 쪽 턱을 괴고 지루하다

고, 나른하다고 외치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그마저도 고운 모습이라는 것에 반박할 자는 없었다. 꿈자리 때문일까, 하루 종일 조금 피곤

한 느낌이다. 펜을 내려놓고 잠시 기지개를 쭉 피며, 가볍게 하품을 한 그녀는 찻잔을 들었다. 아아. 그러고보니 벌써 이 시간인가.


헤알드레드와 잠시 놀 시간이었다. 이것저것 신기한 -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함께 과자를 구워 나눠

먹거나, 자잘한 마술을 보여주는 짧은 휴식 시간. 그녀는 미묘한 해방감마저 맛보며 가뿐히 몸을 일으켰다. 긴 머리카락이 허리께에서

살랑였다. 오늘은 뭘 하는 게 좋을까. 평소와는 조금 다르게, 오늘은 과자가 아닌 키쉬나 갈레트 같은 거라도 만들어 볼까. 마술 잔기야

어차피 한 번 보고 말 거니까. 정말이지 이 시대의 이 지방에는 카카오랄까 초콜릿이 없는 게 유감이야. 녹여서 만든 따끈한 초콜릿에

오트밀과 견과류를 넣은 쿠키, 말린 과일을 넣어 구운 비스코티, 아니면 그거에다가 치즈나 빵, 크레이프 조각을 찍어 먹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거야. 타피오카 같은 것도 미련이 남네. 음음, 일단 가서 물어보고 하는 게 좋겠다.


그녀는 언제 컨디션이 나빴냐는 듯, 가벼운 콧노래마저 흥얼거리며 회랑을 걸었다. 지나가는 신하들이나 시녀들이 먼저 인사를 건네고,

그녀 또한 특유의 경쾌한 말투로 부드럽게 돌려주었다.


그녀의 방에서 왕세자의 방까지는 꽤 되는 거리. 궁중의 보물인 만큼, 가장 깊은 곳, 가장 안전한 곳에 있으니까. 헤알드레드의 방은.

그렇게 향하는 길, 갈림길에서 한 쪽으로 꺾은 그녀는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묘하게 꺼림칙한. 이건 마치──


머릿속에서 답을 내놓는 순간, 시에라는 달렸다.


체력적으로 자신이 있는 분은 결코 아니었음에도, 달리고 달리고 계속 달려서. 열심히 달음박질을 했다. 늦지 말기를. 아니, 그저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정답이 아니기를. 


그리고 그녀는 방문을 열어젖혔다.







17/





베오울프는 가볍게 이를 악물었다. 그나마 그가 그 시간에, 제대로 얌전히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인가를 보기 위해 들렀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헤알드레드가 어떻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아무리 베오울프, 그라 하여도 눈 앞에 보이지도 않는 일 -

그것도 습격 - 을 전부 다 알고 대처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 하지만 단지 그것뿐, 상황은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가 들어왔을 때, 이미

습격자들은 헤알드레드를 기절시킨 채 데리고 있었으니까. 말하자면, 현재 소년은 인질과 같은 상태란 것이다. 거기에 적은 다수. 아무리

그가 일 대 다수도 어렵잖게 해낸다 해도, 까딱하다 저 중 하나가 헤알드레드를 해치면 의미 없는 짓이다. 무엇보다 우선해야 할 것은

헤알드레드의 안전. 


──차라리, 자신에게 검을 버리라던지 하는 쓸데없는 수작을 걸면 상황은 낫겠지만, 그 정도를 구분할 머리는 있는지 그들은 오직

헤알드레드를 데리고 도망치는 것이 나은지, 아니면 그를 - 죽이는 것이 나은지. 그것을 오직 판단하는 듯 보일 뿐이었다. 답을 정한

것인지, 아니면 아직 설전을 벌이는 중인지. 그는 순간을, 틈을 보일 것을 기다릴 뿐이었다. 섣불리 움직이는 것 따위, 어쨌든 결과적으로

현재 헤알드레드가 저들 손에 있는 이상은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시간을, 순간을 놓치지 않는 것. 그것이 급선무. 그리고.



"──그냥 죽여버리,──?!"



한 명이 풀썩 쓰러졌고, 순간 한 떼의 무리는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 틈을 놓칠 새 없이 베오울프는 사라지듯 움직여 헤알드레드를 잡아

채었다. 차라리 다행이게도 기절한 소년은 눈을 뜨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그저 늘어진 채 가만히 잠자듯 있을 뿐이었다. 헤알드레드가

이 쪽에 있다면, 이제 다른 것은 걱정할 필요조차 없다. 예상이 어긋났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는 남자들의 외침이 들림과 동시에, 베오울프는

땅을 박찼다.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지금은. 그들이 한 행동의 대가로,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아무런 반성도 없이 끝내 주는

것은 과하게 관대한 것이다. 필요 이상의 고통을 줄 일은 없지만, 필요한 만큼의 대가는 치뤄야 마땅하다.


하나, 둘, 한 명씩 쓰러져가는 자신들의 동료를 보며, 남자 중 몇 명이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었다. 뜻대로 되지 않아 그러는 것인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마술사, 였나!"



내뻗어진 검은 그림자를 간신히 피했다. 경이에 가까운 몸놀림이었다. 간드였나 무엇이었나, 마술에 대한 것은 기본적인 소양 뿐인 그로서는

알 리 없었다. 사실, 중요하지도 않은 일이었다. 계속해서 쏘아지는 검은 무언가를 피하며, 서서히 그는 그것에 대해 파악해가고 있었다.

움직임이라던가, 그 한계 따위라던가. 쾅, 근처에서 무엇인가 박차진 듯한 소리가 울렸다. 상관 없었다. 그리고, 술자의 목 앞에 검이 

들이대졌고. 얇은 피부에 한 줄기 붉은 선이 그어졌음에도, 



그는 웃었다. 



그리고 동시에, 베오울프는 자신의 손 - 검을 잡지 않은 다른 손에 끈적하고, 뜨거운 무언가 흘러내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엇인지, 굳이

쳐다볼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잘 알고 있는 감촉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고통이 없다. 그렇다면, 이것은 누구의──? 


원하던 상대가 멀쩡한 것을 깨달은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천천히 시선을 아래로 향하고, 조금 옆으로 돌린 왕자의 눈에,

밤의 베일마냥 드리워진 검은 머리카락이 들어왔다. 새빨갛게 물든, 상아색 옷자락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갓 태어난 새끼 새마냥

파들거리는 새하얗고 가는 어깨와, 평소보다 흐려져 가늘게 떨리는 묽어진 푸른빛의 눈동자. 



"시,에라."


"..마술,사, 상대로. ..방,심하면, 위험, 하다고...?"



다소 힘겨운 얼굴로 소녀는 억지로 미소지었다. 그것이 마지막. 마치 우아하게 왈츠의 스텝을 밟는 듯, 치맛자락이 가볍게 춤추었다.

실이 끊어진 인형이 떨어지듯, 가냘픈 체구의 소녀는 그대로 무너져내렸다. 그제서야 그는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이미 상앗빛보다도,

붉은 색이라고 하는 것이 알맞게 된 옷과, 스르륵 사라지는 검은 연기. 순간 멍하니 눈을 크게 뜬 그였지만, 그렇게 시간을 허비할 정도로

풋내기나 바보는 아니었다. 오히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눈 앞의 간자들이 당황하는 사이, 그는 재빨리 다시 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땅을 박찼고, 은빛이 갈랐다.







18/





"누나, 누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그녀는 뒤를 돌았다. 검푸른 머리카락이 사붓이 나부꼈다. 흠칫, 발 밑에 밟히는 돌의 감촉. 그리고 그것을

전해줄 정도로 얇은 샌들과. 가장 많이 갔던 세계의 고대 국가들에서 입었다는 의복 -튜닉 등- 과 유사한 디자인의 옷, 그 부드러운

실크의 천이 살포시 새하얀 다리를 감쌌다. 소녀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뒤를 돌아서자 보이는 것은, 약간은 제멋대로 군데군데 뻗친

은빛 도는 잿빛 머리카락의 소년. 약간은 어린 티가 남아 있고, 나이는 대강 열 여서일곱이나 되었을까. 푸르디 푸른 소녀의 눈동자보다는

다소 어두운, 저녁 어스름과 같은 군청의 눈동자. 조각한 듯한 이목구비는 섬세한 인형 같다. 탄탄한 근육과는 거리가 먼 마른 체격의

소년이었지만, 소녀가 그렇듯 지독히도 아름다운 것만은 확실했다. 차이라면 머리카락과 눈의 색. 그리고 조금 더 톡톡 튀는 장난기,

재치와 - 알 사람만 알 책임감이나 긍지 따위가 한데 모여 있는 소녀의 눈빛과는 달리, 훨씬 더 온화하지만 조금은 더 단순한 구성이라는

사실일까.



"──아아, 미안. 키온, 불렀어?"


"응. 무슨 생각을 했길래 계속 불러도 못 알아들었어?"



──설마 또 유령들이 괴롭힌 거야? 라고 걱정스레 묻는 소년을 보고, 소녀는 웃었다. 그들에게 시달리는 건 너도 마찬가지일진대. 심지어

너는 그들에게조차 명할 수 없고 휘어잡을 수 없을 정도로 상냥한데, 그런 네가 나를 걱정하는 거니. 하지만 소년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는 '잊는 것'을 할 수 없을 존재임에도, 방금 전까지의 기억이 희뿌얬다.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치, 누군가 물을 뿌린 수채화마냥 번져, 제대로 떠오르지 않았다. 그것이 영 마땅찮고 불만

스러웠지만, 동시에 꽤 새로운 기분이란 것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아무튼, 각설하고. 대답을.



"으응. ...어쩐지 흐릿하지만, 꿈을 꾼 것 같아서."


"꿈?"


"응. 기분 나쁜 꿈..이었는데 마지막에는 어쩐지 조금 마음에 들어버렸달까."


"헤에. 어떤 꿈인데? 아, 누나. 젤리 하나 먹을래?"


"쓴 맛 나는 거야?"


"아니. 으큼, 셔..."


"아하하. 하나 줘."


"응. 여기. 그래서, 그 꿈 내용이 뭐였어?"


"아, 고마워. ...으응. 그게...."



소녀는 떠올리려는 듯 작게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초반부는 마치 상상조차 하기 싫은 것이라는

듯, 흡사 지옥에 떨어진 듯, 말하는 것만으로도 절망의 끝을 보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렇게, 나는 혼자 떨어져서. 계속 죽고, 죽고. 살고, 구하고, 절망하고, 죽고. 그저 그걸 반복하게 되어버렸어. 사실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어쩐지 그냥 내버려 둔달까, 알아서 하도록 방관하고 포기할 수가 없어서, 괜스레 끼어들어버리곤. 

항상 후회하고 나 자신을 바보같다고 비웃는 것의 반복."


"... 그렇구나. 응, 누나. 그러면 그 마음에 들었다는 마지막은?"


"으음. 그게, 아. 응. 굉장히 좋은 마을이었어. 사실 나라,였지만 적어도 지금 이 우리 나라의 규모에 비하면 아득히 작았으니까. 

..그래. 예의 바르게 나라,라고 하자. 아무튼, 다들 정말로 바보 같이 상냥하고, 이기심의 이, 자도 없어서.  오히려 내가 조금 나를

이용해 먹으라고 답답해 할 정도였어. 그리고 너무 착한 것들 같아서, 조금씩. 내가 어떤 인간인지를 드러내면, 순식간에 외우고

계산하고 답을 내고 만들고 고안하는 걸 숨 쉬듯이 해내면 좀 시선이 달라질까 싶어서 슬그머니, 조금씩 해 보았는데."


"해 보았는데?"


"글쎄, 나더러 역시 마술사 아가씨는 대단하시네요! 이러는 거야. 그 말까지 들으니 그런 예상을 하고 목표를 짜고 행동한 내가

바보 같아지더라고. 정말이지, 그렇게 살면. ...손해 볼 텐데."


"바보 같다...그렇구나. 그럼 누나는 싫었어? 그 사람들."


"... 그런 걸 싫어하게 된다면 싫어하는 나 자신이 한심스러워질 거였다구."



──오히려, 너무 우직하고들 밝아서. 어처구니 없을 정도였다니까. 에라, 모르겠다 싶은 심정으로 조금 도와준 적도 있었고. 응, 

역시 위험한 늑대 사냥 때는 남몰래 방어 마술을 쳐 두길 잘 했지. 정말로 큰 일 날 뻔 했었다니까. 누구는 또 너무 열심히 무슨 

경작법을 개발하는데 근본적으로 전제에 잘못된 것이 깔려 있어서, 그걸 스스로 깨달을 수 있게 조언해주는 게 참 번거로웠지. 

하지만 응. 결과적으로는 다 잘 되었으니 좋은 일이지만.


재잘거리며 웃는 소녀를 보고, 키온, 이라 불린 소년은 빙긋 웃었다.



"누나. 그 사람들을 좋아하는구나."


"...? 키온, 무슨 말이야. 내게 있어서는 너.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랑, 이 땅의 사람들이 제일인 게 당연하잖아. 임금님은 싫지만."


"그럼 여기를 빼면. 누나가 '여행'한 곳들 중에서는."


".... ..... 뭐, 나쁘지는 않았어."



키온은 피식 웃었다. 누나는 혼자서만 자신에 대해 모른다. 다른 모두가 아는데도, 스스로만 모르고 스스로만 아니라고 부정한다. 

그렇기에 더 가련하고 사랑스러운 누이일 수도 있겠지만. 그녀에게 자신은 세상의 중심과도 같다는 것을 아는 소년은 안타까운 듯,

아련한 듯한 눈으로 소녀에게 물었다.



"다른 사람은? 혹시 개인으로 인상 깊었던 사람은 없었어?"


"──글쎄... 아."



소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재빨리, 신이 난 듯 종알거렸다. 그러고보니, '유령들이 사라지는' '목소리가 조용해지는' 사람이 있었어.

어, 정말? 응, 사실이야. 처음 봤을 때, 갑자기 주변이 고요해져서. 나, 그렇게 평화로운 조용함은 처음이었어. 정말로 너무 부드럽고

따뜻하고 좋은 공기라서. 응, 어쩐지 계속 근처에 있고 싶다고 생각했을지도. 그 때부터 조금 관심을 가졌달까. 헤에, 그렇구나.

얼굴이라던가 능력은? 그런 건 아무래도 좋지. 응, 객관적으로 봤을 때는 충분히 최상위 평가를 받고도 남겠지만 어쩐지 그 쪽은 미적

기준이 다른 것 같더라고. 하지만 사실, 응. 딱히 그런 것은 상관 없어. 능력..은, 응. 유능하기도 한데, 그 나라를 포함한 일대에서

가장 강한 검사, 라고 알고 있어. 흐응. 그렇단 말이지. 그럼 혹시 그냥 그렇게 관심 가진 게 끝?



"..아, 아니. 꽤 마음에 들었지만."


"호오, 어떤..?"


"응. 뭐랄까. 그래. 키온, 너라던가, 이 곳의 몇몇 사람들에게서 본. 그리고 '여행'을 다니면서 드물게 본. 으응. 반짝반짝함.

굉장히 맑고 반짝반짝했어. 분위기랄까, 느낌이."


"반짝반짝?"


"응. 비유하자면 새벽 종의 청아함. 잘 갈린 검의 날카로운 고결함. 그리고──응. '나'는 절대로 할 수 없는, 노력하는 사람,

나아가는 사람만이 갖는 반짝반짝함. 그런 게 너무 예뻐서, 어느 순간부터인가 시선으로 찾고 있었을지도."


"그렇구나아."


"앗, 앗. 그리고. 응. 피리 소리. 연주하는 악기 소리, 음색이 굉장히 맑고 투명했어!"


"맑고 투명한... 확실히, 음색은 그 사람에 대해 숨기는 것 없이 알려주니까. 그렇구나. 응, 누나. 대강 이해했어. 어떤 사람인지,

머리속에 그려지는 걸."


"그렇지, 그렇지? 아마 키온도 만나보면 마음에 들 거라고 생각해!"


"그렇네. 기대되는 걸. 누나가 그렇게 말한다면, 틀림없는 사실일 테니까."


"으응, 물론이지! 나, 거짓말은 하지 않으니까. 키온에게라면 특히나!"



자신만만한 웃음을 짓는 소녀를 보며, 키온은 가볍게 픽, 하고 웃었다. 마치 봄바람처럼 살랑이며 웃고 재잘대는 소녀의 표정은

빙글빙글 휙휙 바뀌었지만, 결국 너털웃음을 터뜨리듯, 해바라기가 피어나듯 환한 웃음으로 돌아왔다. 



"누나."


"응?"


"...이젠 돌아가는 게 좋아."


"..에? 돌아가다니.. 어디로?"


"...누나가 있는 지금 그 곳. 누나가 방금 즐겁게 이야기한 그 곳."


"──? 그건 꿈,이잖아. 키온, 지금 무슨 말을───. . . "


"...누나. 부정하지 말아줘."



나는 누나랑 결국 헤어졌어. 나는 남쪽 바다로 떠나는 배에 탔고, 누나는 괴물 투성이의 왕도에 남았어. 있지, 사실 나. 누나를 그런

데에다 홀로 놔두고 싶지 않았는데. 보내고 싶지 않았는데.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왜냐하면 누나가 제일 바란 건, 내가 '행복하게'

'무사하게' 사는 거였잖아? 모를 리가 없어. 난 누나에게 주어진 '선물' 중 하나. 내가 누나에 대해서 모를 리가 없어. '선물' 중 하나,

내 이름대로, 이 세상에서 누나의 단 하나뿐인 소중한 존재였던 것. 에브제니스 공주님도, 진리의 원탁의 다른 사람들도, 시민들도,

전부 다 소중했겠지만 그 누구보다도 누나를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던 것은 나. 그렇기에 프시키온(psychion;soul)이니까. 


하지만 누나라면 이해했지? 소중한 존재'였던' 것, 이라고. 


으응. 나는 말하자면 일종의 매개체랄까. 누나가 다른 '소중한 것들'을 만나기 전까지의 버팀목, 같은 목적으로 내가 주어진 거야. 처음부터

나는 알고 있었지만. 하지만 누나가 너무, 너무. 너무. 좋은 누나, 내 소중한 가족이라서. 조금 더 비밀로 하는 어리광을 부린 것 뿐. 믿을

수 없다는 듯 보지 말아줘. 


처음에, 누나는 내 손만을 꼭 잡고 있었고.

지나서, 누나는 공주님의 손도 잡고 있었고.

지나서, 누나는 다른 마법사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얘기하고 웃게 되었고.

지나서, 누나는 나라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 모두와 함께 있게 되었고.


이제 누나는, 그 말도 안 되는 불합리한 저주 같은 것에서 살아나가면서도,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났고.

또 다른 사람들을 돕고 기억하고 이야기하고.

그리고 이제는 '특별'이라고 할 수 있을 사람들까지 만났어.


그러니까 누나. 나는 이제 작별.

이 꿈도 이제 작별.

반복되는 외톨이 꿈은, 이제 끝났어.


힘 내 줘, 누나. 이번에야말로, 이기길 바래. 떠올리길 바래. 그리고 누나,



"부디 행복해지길."



풍경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빠르게 빠르게, 먼지가 흩날리듯. 모래바람에 휘날리듯.



"──걱정하지 마. 내가 '선물'이었대도, 누나의 가족이고 동생이란 사실에는 변함이 없어. 적어도 나는, 계속 그렇게 믿어."



아, 누나. 또 울 것 같아. 그것 알아? 사실 누나, 은근히 울보잖아. 그것도 절대 대놓고는 안 우는 겁쟁이 울보 아가씨.



"적어도 나. 그리고 이 나라의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확실해. 누나는 그 이름대로의 존재였다고. 말할 수 있어."



왜냐하면, 누나 본인 빼고 다른 모두가 누나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걸. 처음에는 거리를 두려고 해도, 알고 보면 결국 인정하고

좋아하게 될 수 밖에 없잖아.



"──그러니까. 이번에야말로 이기고, 떠올리고, 행복해지길."



추억은 추억으로 가져주길 바래. 누나가 '지금' 살고 있는 것은 그 쪽이니까. 



"그 이름대로, 누나에게도 축복이 함께하길."



있지. 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누나의 동생으로 만들어져서 정말로 다행이라고 생각해. 누나도 그렇게 생각해주면 좋겠는데. 응.

이별은 아니니까. 쌍둥이별이라던가, 괜히 있는 게 아니잖아? 이름의 뜻이, 괜히 있는 게 아니잖아? 난 이름대로. 떠올릴 때마다

함께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부디. 



"──항상 나를 이끌었던 밝은 빛 같은 그 모습 그대로 네가 살아갈 수 있기를."



소중한 내 누이.



"이브로시아."






19/





예의 그 건이 있었던 후, 소녀는 열흘째 잠든 상태였다. 마치 죽은 것마냥 미동도 없이 누워만 있었으나, 분명히, 약하기는 해도 

확실히 심장은 뛰고 있었고 끊어질 듯 하면서도 호흡은 이어졌다. 상처는 급소를 정확히 뚫렸지만, 마술사라는 특성 덕분인지 무엇 덕분인지

어떻게 죽지는 않고 버티는 것을 의료반이 달려들어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치료해두고 처방했지만, 마술 공격에 입은 상처인 탓인지

피가 멈추고 상처가 아주 미약하게나마 아물기 시작해도 소녀는 의식을 차릴 기색이 없었다.


그런 소녀에게는, 문병객이 끊이질 않았다. 신하들, 시녀들, 마을 사람들. 왕자를 구했다는 말은 제쳐두고라도, 평소에 이것저것 신세진

것들 투성이인 것 때문인지, 호감을 잔뜩 사 둔 탓인지. 그리고 그런 문병객의 행렬이 조금 드물어질 시간대에, 아무도 모르게 종종

찾아오고 했던 남자 - 베오울프는 지금도 가만히 앉아 인형마냥 가만히 누운 소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온. 키, 온. ....."



어떤 이유였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베오울프가 있을 때에만, 소녀는 간간히 잠꼬대 같기도 하고, 헛소리 같기도 한

말을 뚝뚝 흘렸다. 알 수 없는 이름들. 상황을 모르는 말들.



"...미,안.해...."


"..... 아파, 싫.어. ...."


"더, 이상. ..."



그 중에는 드문드문, 그가 신경이 쓰일 법한 내용 또한 섞여 있었지만, 그는 어떠한 반응도 드러내지 않은 채 그저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그가 가만히 그 곁에 그저 함께 있어주었던 어느 날. 그녀가 의식을 잃은 지 열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파들파들. 흔한 비유지만 마치 나비의 날개처럼, 눈가에 그림자를 드리운 속눈썹이 흔들리고.

조금씩, 조금씩. 떨리면서 가려졌던 푸르름이, 수면에 일렁인 잔물결처럼 다시 빛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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