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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조각

시그마 2013.05.31 00:02 조회 수 : 3


* 캐붕 주의

* 고증 안드로메다 주의

* 로하님께 슈퍼 트리플악셀 점핑 도게자ㅠㅠ

* 제게 돌을 던지셔요






  /1.


  에르웬은 눈을 떴다. 그리고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본 적 없는 들판이 그녀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자라난 초록빛 풀잎들은 지금 그녀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는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바람의 방향에 따라 몸을 눕히기도 서기도 하는 풀들의 움직임이 마치 파도 같다. 넓은 녹색 바다 너머에 있는 것은 나무들의 울창한 군집이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에르웬은 천천히 호흡했다. 코끝을 간지럽히는 공기는 절대 도시의 그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맑았다. 아니, 시골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청량한 공기가 있었을까. 다시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며 에르웬은 눈을 깜빡였다. 시야가 잠시 검게 닫혔다가 트였다. 풍경은 변하지 않았다.

  에르웬은 생각에 잠겼다. 하룻밤 사이에 땅을 뒤엎는 대공사가 일어났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대피령이 떨어졌을테니까. 누군가의 손에 의해 아무도 모르게 지형이 바뀌었을 '가능성'도 있기는 했지만, 에르웬은 그것이야말로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한창 성배대전을 치르는 도중이었다. 아직 적의 진영도 흑의 진영도 완벽히 패퇴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갑자기 성배가 나타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명백했다. 그녀는 지금 시기쇼아라가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 이곳이 어디인지, 어째서 갑자기 이 곳에 왔는지는 미지수였지만.

  거기까지 생각한 에르웬은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 앉아있어봐야 갑자기 벼락처럼 해답이 떠오를 리 없었다. 에르웬은 우선 주변을 둘러 보고 그녀가 정확히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부터 알아보기로 했다. 근처에 사는 사람─혹은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아 이곳이 어딘지 질문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에르웬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2.


  결론부터 말하면, 에르웬은 그녀의 계획을 달성하는 데에 성공했다. 에르웬은 조약돌로 정비된 땅과 동화속에서나 나올 법한 집들을 바라보았다. 시기쇼아라, 즉 동유럽과는 상당히 다르지만 어쨌든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그런 에르웬의 생각이 옳다고 증명하듯 그녀의 눈앞에서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매우 '민족적'인 의상을 입고.

  판타지 영화에 나올 법한 옷이긴 했어도, 에르웬은 그것이 무엇인지 한번에 알아보았다. 하지만 그 이유 때문에 에르웬은 혼란스러워 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고트랜드─ 즉 그녀의 고향 사람들이 가끔 입곤하던 고트족의 전통의상이었다. 설마 영화 촬영 중일까? 순간 그렇게 생각한 에르웬은 곧바로 자신의 의문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떠오를 수밖에 없을 정도로 눈앞의 광경은 비현실적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현실이었다. 슬프게도.

  일단 정보를 모아야 했다. 조금 전 생각했던대로 이 곳이 어디인지 물어보자. 에르웬은 그렇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리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 정확히는 나서려 했다.



  "누구냐!"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에르웬은 뒤를 돌아보았다. 무장을 한 한무리의 남자들이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똑같은 무기와 옷을 갖춘 것으로 보아선 아마 이 곳의 경비대 비슷한 사람들인듯 하다. 그들에게 질문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던 에르웬은, 하지만 남자들이 창을 꼬나드는 모습에 그 선택지를 없앨 수밖에 없었다. 가운데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군. 어디에서 왔지?"



  에르웬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어디에서 왔냐니…… 저, 원래는 시기쇼아라에 있었어요. 그런데 눈을 뜨니 갑자기 이곳에 있어서……."

  "시기쇼아라? 들어본 적이 없는데. 어디의 마을이지?"

  "마을이 아니라 루마니아의 도시……."

  "루마니아…… 도시?"



  에르웬은 입을 다물었다. 남자들의 눈에 명백히 적의가 떠올랐던 것이다. 남자가 말했다.



  "네 놈, 다른 나라의 사람이군! 간자인가!"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에르웬에게 창을 들이대었다. 남자의 양옆에 있던 동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에르웬은 황급히 말했다.



  "잠깐, 간자라니…… 오해예요. 아까 말한대로, 정말 눈을 떠보니 이곳에 있었을 뿐─"

  "변명이 서툴군.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정말이예요. 당신들이야말로 어째서 느닷없이 무고한 사람을 간자로 모는건가요? 일단 제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그러고보니 그 옷도 억양도 수상하군. 미안하지만 네놈을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다. 구속하라!"



  남자가 외치자 그의 뒤에 있던 경비대원들이 일제히 에르웬에게 달려들었다. 어쩌지. 에르웬은 갈등했다. 마술을 쓴다면 이 위기를 벗어날 수는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수상하다는 혐의가 더욱 짙어질지도 모른다. 어떻게 해야…….



  "……!"



  순간 팔에서 올라온 아픔에 에르웬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고민한 시간은 매우 짧았지만, 그 사이에 남자들이 그녀의 등 뒤까지 당도했던 것이다. 에르웬의 저항도 부질 없이 남자들의 억센 손은 사정 없이 그녀의 팔을 등 뒤로 묶어버렸다.



  "끌고 가라!"

  "이것 놓으세요! 억지로 묶지 않아도 걸어갈 테니까……!"

  "에에이, 성가시군!"



  순간, 에르웬은 목 뒤에 수도가 내리꽂히는 것을 느꼈다. 그 아픔을 마지막으로 그녀의 의식은 바닥 없는 굴 속으로 떨어지듯 멀어졌다.

  ……혹시 다시 눈을 뜨면, 시기쇼아라로 돌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식의 끈을 놓기 직전, 그런 희망이 그녀의 머릿속으로 어슴푸레하게 떠올랐다가 사라져갔다.






  /3.


  "이 자입니…… 마을에서……."

  "……믿을 수 없는 주장을……."

  "아직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에르웬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깨어나지 않았다는 말에 깨어나는 경험은 나름대로 인상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에르웬은 절대로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고, 따라서 그 경험을 반추해보는 대신 그녀가 처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에르웬은 금방 그녀의 상태를 돌아볼 수 있었다. 그녀는 밧줄에 결박되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팔을 움직이려던 에르웬은 금방 그것을 포기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는 밝고 웅장했다. 섬세하지는 않지만 진취적인 느낌의 문양이 수놓아진 천들이 횃불의 빛을 받아 벽을 장식했으며, 크고 엄숙한 모양새의 기둥들이 중간중간에 늘어서서 천장을 받쳤다. 돌로 만들어진 바닥 한 가운데에는 시선을 끌어모으는 회색빛 카펫이 있었다. 천천히 그것을 따라가 본 에르웬은 그것이 단 위를 올라 옥좌 밑을 받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옥좌. 놀란 에르웬은 위로 올라가려던 시선을 황급히 끌어내렸다. 이 곳은 그녀가 붙잡혔던 마을을 통치하는 사람의 홀이 틀림없었다. 아니, 그들이 그녀를 간자라고 불렀던 것을 생각해보면 더 높은 사람의 앞일지도 모른다. 또다른 목소리가 에르웬의 의문을 해소해주었다.



  "그녀를 깨울까요, 폐하?"

  "아니다. 일어난듯 하군."



  에르웬은 다시 시선을 올렸다. 옥좌에는 오육십대쯤 되어보이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비록 늙었지만 강건한 체구나 형형한 눈빛은 전사의 그것이었다. 에르웬은 식은땀 한방울이 타고 볼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남자─ 왕이 입을 열었다.



  "짐의 병사들이 마을에서 널 체포했다고 들었다. 그 말이 사실인가?"

  "사시……."



  에르웬은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두어번 헛기침을 하고 에르웬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이예요."

  "어떻게 그곳에 들어왔지?"

  "그건…… 저도 몰라요. 눈을 떠보니 벌판 한가운데여서, 이곳이 어디인지 물어보기 위해 사람을 찾으러 갔을 뿐이예요."

  "폐하, 이 여자는 거짓말을 하는것이 틀림없습니다!"



  그 때 단 위에 있던 남자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왕은 에르웬에게서 시선을 떼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왕에게 한번 고개를 숙여보이고 남자는 다시 입을 열었다.



  "마을의 병사들은 저 여자를 본 적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항구에서 검문을 담당하는 병사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여자는 병사들의 눈을 피해 감히 저희의 땅에 잠입한 것이 분명합니다!"



  에르웬은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대놓고 수상한 방법을 쓰는 간자가 무슨 간자인가요? 제가 정말 간자라면 일부러 신분을 확실하게 해서 의심을 더는 방법을 썼을 거예요!"

  "시끄럽다. 어느 안전이라고 입을 함부로 여느냐!"



  남자는 험악하게 표정을 굳혔다. 주변의 다른 대신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에르웬은 자신의 말이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필사적으로 무죄를 호소해도 모자랄 판국이다. 그런데 변호를 하기는 커녕 상대방을 자극하는 발언을 하다니. 에르웬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떨궜다. 그런 그녀의 귓가에 대신들의 목소리가 웅웅거렸다.



  "폐하, 저 여자의 말은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택도 없는 방법으로 우리를 설득해보려는 게지요."

  "심지어 자신의 입으로 다른 곳에서 왔다고 자백했다지 않습니까?"

  "왕자님께서 곧 돌아오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경사스러운 일을 앞에 두고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지요."

  "흠……."



  왕은 대신들의 말에 고민하는 듯했다. 잠시 뒤 왕이 신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분을 증명할 물건이 있는가."



  에르웬은 희망을 품고 고개를 끄덕이려 했다. 하지만 에르웬은 자신이 아무것도 갖고 오지 않았다는 사실과, 설령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녀의 소재를 증명해주기는 커녕 상황을 더욱 안좋게 몰고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루마니아라는 말에 그녀를 외국인─ 간자로 판단했던 이들에게 루마니아 지폐를 보여주는 것은 그녀의 사형선고서에 몸소 도장을 찍는 짓이다.

  그러나 에르웬은 차라리 잘 된 일이라고 좋아할 수도 없었다.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녀가 간자라는 의심을 더욱 굳힐 터였다. 상대가 전혀 다른 의복을 입고, 전혀 다른 말투를 쓰고, 거기에 신분을 증명할 물건이 없다고 한다면 에르웬 자신이 대신들이라도 그 사람을 수상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실로 진퇴양난의 순간이었다.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나간 후 에르웬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것 보십시오! 역시 간자임에 틀림없습니다!"

  "도망치려고 하기 전에 어서 없애야 합니다."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정보를 빼갔을지 모릅니다."

  "폐하,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폭발하듯 터져나오는 대신들의 말에 에르웬은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팔은 단단히 결박되어 있었고, 주변에는 대신들뿐만 아니라 많은 병사들이 있었다. 이제와서 도주를 시도한다고 하더라도 몇 발자국 뛰기도 전에 제지당할 것이 틀림 없었다.

  이런 영문 모를 곳에서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 것일까? 에르웬은 자신의 생각에 전율했다. 허무하게 죽는다. 그것은 그들이 그녀를 죽이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스스로가 불러일으킨 깨달음에 에르웬은 무릎이 꺾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녀를 위해 변호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디에도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에르웬은 왕이 근처의 병사에 손짓하는 모습을, 그리고 그 병사가 다가오는 모습을 공포를 느끼며 바라보았다. 병사는 칼을 뽑아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것을──



  "폐하, 왕자님께서 오셨습니다!"



  ──내리치려다, 문 앞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움직임을 멈췄다.



  "……!"



  홀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에르웬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를 죽일 것을 소리 높혀 종용했던 대신들의 얼굴에 전혀 다른 감정이 떠오르는 모습을 보았다. 반가움. 기쁨. 환희. 심지어 그녀의 목 바로 위까지 칼을 떨어뜨렸던 병사마저 '왕자'가 오는 모습을 보기 위해 칼을 거두는 모습에 에르웬은 죽음에서 벗어났다는 안도보다는 당혹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당혹은 곧 분노로 변했다.

  대체 어떤 왕자길래 그가 오기 전에 그녀를 죽이려 했나. 그가 오는 것이 얼마나 경사스러운 일이길래 그토록 빨리.

  우르릉 하고 무겁게 문이 열렸다. 분명히 방음이 되어있겠지만, 일순 찾아온 고요 속에서 돌바닥이 울리는 소리는 똑똑히 홀 안을 울렸다. 당당하고 곧은 발걸음. 둔중하지 않으며 지나치게 가볍지도 않게, 머뭇거리지 않고 한걸음 한걸음 확실하게 발을 내디딘다. 분노를 참으며 가만히 그 소리를 듣던 에르웬은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이 발걸음, 어디선가…? 점점 커지던 소리는 이윽고 울림을 줄이고 차츰 실제 음으로써 그녀에게 다가왔다. 에르웬은 곧 실제로 바닥을 밟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바로 옆에서 들린 소리에 반사적으로 그쪽을 향한 에르웬의 눈에 거의 흰색에 가까운 회색 깃이 보였다. 움직임에 따라 조금씩 펄럭이는 그것은 상의에서부터 쭉 이어져 그것을 입은 사람의 거의 발목 위까지 내려왔다. 그 위로는 어깨 부분을 덮은 방어구. 목 전체를 가리고도 조금 위까지 올라간 목깃.

  전체적으로 보면 모를까, 세세하게 보면 마치 구속복 같은 갑옷이었다. 그녀를 제외한 홀 안의 누구보다도 작은 체구를 감싼 그 갑옷을 에르웬은 본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럴리가 없어. 에르웬은 지금까지 느꼈던 것중 가장 큰 당혹을 느끼며 그 사람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리고 에르웬은 분명히 보았다. 누구보다도 눈에 띄는, 그 사람의 특징적인 머리카락을.



  "송구하옵니다, 폐하. 항해 도중에 역풍을 만나 늦어져버렸습니다."



  성배 대전을 통해 만난 서번트── 붉은 세이버가, 그녀 앞의 왕에게 고개를 숙이며 예를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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