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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3월. 스웨덴 고틀랜드 비스뷔(Visby)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여느 때나 다름 없는 평온한 오후의 풍경. 드문드문 오는 관광객들이 기웃거리며 사진을 찍고, 별난 이들은

아직 채 녹지도 않은 북쪽의 바다에 뛰어들었고, 장을 보는 여인네들과 뛰어노는 아이들이 있고, 노인은 햇빛 아래에 비스듬히

누워 담배를 입에 문 채 돋보기 안경으로 신문을 보는.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일상의 모습. 동화 속 삽화마냥 따스하고 아름다운 그 그림 속에서, 봄햇살을 받는 사람들을 지나. 한 집의 문을

열었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전혀 다른 붉고 붉은 자국들. 비릿한 냄새. 


그것은 차라리, 초현실주의 화가의 그림처럼 보이는 광경이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 바로 앞은 금빛 햇살이 비추는 꿈과

같은 아름다운 마을, 평온함에 젖은 노랫자락이 간간히 섞이고, 웃음의 추임새가 드문드문 함께 울려퍼지는 곳. 그렇지만 지금

발이 닿는 곳, 갇혀버린 듯한 상자 안에서는 정반대의 의미로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법한 흔적들.


올라오는 피 냄새에, 코 끝이 마비되는 것 같은,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아아. 물론 기분 탓이지.



이런 걸로 냄새를 맡지 못하게 될 리가 없고, 구토를 할 리가 없다. 당연한 일이었다. 사락, 부러질 듯 마른 아이는, 톡, 하고 가볍게 발을

내딛었다. 바닥에 튄 자국이 새하얀 발에 묻었지만, 아무렇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틈엔가 아이는 사라져 있었다. 


남은 것은 오직 침묵뿐. 

마당 구석 멀찍이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가볍게 울었다.







01/





미하엘 구스타프 슈나이더는 스물 다섯 살의 청년이었다. 아주 뛰어난 미남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웠지만, 적어도 호인상을

줄 정도로는 적당히 단정한 외모였으며, 석 달 전까지만 해도 사귀던 연인이 있었고,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역사학 박사 과정을 

밟는 중이었다. 



"오오. 제법 멋있네."


"아, 저기 또 해골 찾았다."


"우웩, 넌 어떻게 그런 것만 눈에 들어오냐."


"어쩔 수 없잖아~ 네가 이해해라. 잘나신 박사.. 아니지, 예비 박사신데."



점성술사의 시계탑. 메멘토 모리의 심볼. 미하엘은 한창 주말을 끼운 휴일을 프라하에서 즐기는 중이었다. 고등학교 동창 셋과

함께 온 짧은 여행. 뭐, 대학생 남자 넷이 연인들이 수두룩한 낭만적인 도시 해질녘을 거니는 것은 여러모로 조금 울적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좋은 게 좋은 것이다. 적어도 면세점에서 베르사체 클러치에 샤넬 립스틱을 고르는 걸 한가득 짐을 든 채 기다릴

필요는 없으니까. 



"으으. 그러고보니 이제 내일은 부다페스트로 떠나잖아."


"그렇네. 거기서 이틀 밤 있으면 또 돌아가나. 거 참 시간 한 번 빠르네."


"그렇지. 마감 한 시간 전의 과제를 할 때에는 못 이기지만, 노는 건 원래 휙휙 지나가니까."


"아오, 이 가방끈 긴 것들이. 그럼 오늘은 숙소에서 맥주나 좀 마시고 짐 챙기고 일찍 마무리할까."



미하엘은 가볍게 미소짓고는 말했다. 그럼 내가 잠깐 가서 맥주랑 요깃거리 좀 사올게. 아아. 다녀와라. 또 뭐 앤티크 샵이나 고서점

같은 거 찾았다고 딴 길로 새지 말고. 그 말에 대답 대신 가볍게 아하하, 웃고는, 미하엘은 옆 골목으로 틀어졌다. 서서히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중세의 거리는 꽤나 운치 있는 모습이었다.



"으-음. 아직 연 가게가 어디 있을까..."



동유럽은 편의점 같은 24시간 이용 가능한 시설이 비교적 적어서 조금 불편하다. 뭐, 이 아름다운 도시에 새벽 내내 네온 조명을 켜 두는

가게가 있는 건 역사학도로서 썩 좋아할 풍경은 아니었지만, 미하엘은 어깨를 으쓱하곤 가볍게 미소지었다. 


그렇게 군청색 하늘이 드리우기 시작한 한적한 골목을 걷는 청년의 뒤로 따라붙은 것은, 매끄러운 곡선의 그림자 하나.







02/





로벨리아는 집시 무리에 끼어 사는 아가씨였다. 그녀가 집시 혈통인지, 라틴계의 미인인지, 중앙 아시아 쪽의 서구적인 황인일지,

혹은 그저 수십 가지의 피가 섞인 사람인지는 아무도, 그녀 자신도 몰랐다. 아무도 묻지 않았고, 이 무리는 그래서 좋았다. 비록

정부 측에서는 상당히 곯머리를 앓고, 대체적으로는 호의적인 시선 따위 기대할 수 없는 무리였지만. 여기서는 - 혹은 적어도 지금 그녀가

머무르는 무리는 - 아무도 그녀에게 어디서 왔냐던가, 어디서 태어났냐던가 따위의 바보 같은 질문을 묻지 않았다. 아마도 같이 

사는 그들 모두가, 설령 거기서 함께 태어나 자랐든 다른 무리를 떠나 합류했든, 남들에게 자랑스럽게 밝힐 일 따위는 없어서인지도 

몰랐다.


그녀는 다른 이들처럼 빌어먹고 살지 않았다. 몸을 내어주는 일도 하지 않았다. 도둑질과 비슷한 맥락..일지도 모르지만, 몰래

가방끈을 끊는 것 따위의 좀도둑질은 아니었다. 그녀는 이것을 정신 노동의 대가라고 불렀다. 그런 그녀가 오늘 발견한 것은 여행을

온 듯 어리숙해 보이는 청년.


로벨리아는 자신의 '일'에 있어서는 꽤나 베테랑이었다. 원하는 것만 빼내었으며, 흔적은 남기지 않았다. 정식으로 교육을 받거나

전수받은 방법이 아님에도 이 정도로 능숙히 해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녀는 꽤 재능이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거기에, 여직 붙잡히지 않고

요리조리 잘 빠져나가 왔다는 점에서도. 오늘 또한 여태까지처럼의 성공을 자신하며, 그녀는 재빨리 몸을 놀렸다. 



"아, 실례할게요. 안녕, 관광 오신 분인가요?"



집시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유창한 영어로 재잘대듯 물은 그녀를, 검은 머리칼의 청년은 본체만체하더니 결국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쩐지 이상한 느낌이었지만, 뭐, 상관 없어. '계획 대로' '의도한 대로' 보게 만들었으니까. 꽃 같은 어두운 피부의 미인은

십대 소녀가 말하는 양 톡톡 튀는 어조로 내뱉던 중, 팔에 벌레가 문 것 같은 자국을 발견했다. 모기인가, 이 계절에? 하지만 굳이 모기가

아니더라도. 집시굴은 지저분하다. 모기가 아니라 진드기든 무엇이든에게 자는 새 물렸대도 너무나 당연할 정도로. 그렇기에 로벨리아는

거기에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와 대화를 나누며, 점차 점차 그녀가 자신하는 예의 암시가 먹히고 있음을 확인하다, 순간 온 몸이 마비되어 휘청 쓰러질 때까지.



"──어, 째. ...서?"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그런 의문. 그리고, 그것이 그녀가 기억하는 마지막이었다.







03/





불과 반 시간 전까지만 해도 미하엘이라 불리며 떠들던 청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다음은 마치 비웃는 것 같은 미소를

지은 채 눈 앞에 쓰러진 여성을 내려다보았다. 한심한 년이군.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녀가 사용하던 암시의 마술. 뭐, 그럭저럭

괜찮은 수준이었지만. 상대가 나빴다. 그것은 과한 자만심도 뭣도 아닌 사실이었다. 그가 여직 '잡히지 않고' 다닐 수 있는 것은

그만큼의 실력이 보장되기 때문이니까.



알프레히트 슐츠. 그것이 그의 이름이었다. 그는 가볍게 손을 뻗었다. 모기-로 보이는 날벌레가 손가락 끝에 앉았다. 모기라기에는,

그것은 그의 손가락 끝에서 어떠한 체취도 맡지 못하는 양 반응이 없었다. 그것이 모기가 아니던, 혹은 그가 그렇게 특수한 사람이던,

어느 쪽이든 범인과 다르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아아. 역시 모기...는 계절이 너무 한정되나."



청년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혹시 모를 스페어 수단. 만약 필요할지도 모르는 추가적인

샘플을 얻기 위한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 정도였으니까. 그런 그의 귓가에 울리는 것은 오래 된 돌바닥을 디디는 발소리. 이런, 행인인가.

재빨리 눈 앞의 널부러진 여자를 보고 손목시계를 흘끗 보았다. 아직 행인이 있는 것이 어색한 시간은 아니었다. 어떡할까. 소리의 크기로

보아, 이 여자를 치울 만한 시간은 되지 않는다. ...내키지는 않지만, 그렇다면.


청년이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 발소리가 사라졌다. 정확히 말하면, 타앙, 하는 경쾌한 - 마치 총을 쏘는 것 같은 소리를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그제서야 그는 상황을 인식했다.



"이런, 들켰나?"


"꽤 재밌는 삶을 살고 있었던 것 같은데. 아니면, 정말로 필요에 따른 연기였어?"


"아아니. 꽤 즐거웠어. 대학 생활이란 건 그럭저럭 재미 있더군."


"응. 그렇구나. 기왕이면 그냥 그런 삶을 계속 즐기는 편이 당신을 위해서라도 나았을 텐데."



들린 목소리는 아름다운 소녀의 그것이었다. 존댓말도 형식상의 인사도, 심지어 경계심의 파편도 없이 자연스러운 대화였다.

서로가 질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 자들의 이야기. 그는 소녀를 보지 못했지만, 그녀가 대강 무슨 이유로 여기에 왔는지는 이미 십분

이해한 상태였다. 여유롭게 대답하는 그에게, 말을 거는 소녀 또한 마치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한 말투로 말을 했다. 연기도 뭣도

아닌 진심이었다.



"당신은 그다지 저지른 일이 없었으니까. ..잠재적 위험,이라고 하면 별도겠지만."


"이런, 이런. 난 내 발전을 위해 스스로 탐구하고 노력한 것 뿐이니까. 남에게 위험한 일은 하지 않았어. 의도적으로는."


"그랬겠지. 대부분 다 같은 말을 했으니까."


"..그런가? 내가 흔하다니, 그건 좀 기분 나쁜 말이군."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마술사들 - 그것도 당신 같은 괴짜 마술사..위험 요소들이 생각하는 것은 대강 비슷하니까."


"그런가? 그것 참 유감이군. 그래서, 보이지 않는 아가씨. 이제 슬슬 용건을 말해주지 않을까? 체코 맥주라도 한 잔 함께 할 게

아니라면."


"상관 없지만. 이미 답을 알고 있는 것을 묻는 건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아무튼, 그럼. 좋아."


"그런가. 그렇다면, 좋다."



무엇인가 깨지며, 몰아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마치 그 사이에 벽을 세워둔 양, 근처 주택가나 가게의 사람들은 눈치조차

채지 못한 듯 싶었다. 그것에 신경쓰는 새도 없이, 청년과 소녀는 어지러이 춤을 추었다. 후드가 달린 케이프 같은 의복을 깊이 눌러입은

소녀의 외모는 잘 보이지 않았다. 마치 솜사탕 위를 뛰어다니듯, 소녀가 가볍게 몸을 날렸다.


그리고 일순, 깊이 눌러쓴 후드의 틈 사이로, 보랏빛 수국을 물들인 듯한 자색의 눈동자가 언뜻 비추었다.







04/




A letter telegram to London: 

   『Ab dafür. Albrecht Schultz. E.C.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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