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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엉

로하 2013.05.13 13:48 조회 수 : 0

0 : 『Trust Me! ~칼 크래프트 관찰일기~』 






/01





홀짝.


에그노그 한 잔은 굉장히 따뜻했다. 아무래도 자신의 마스터 - 칼 크래프트 - 는 요리는 영 아니라고 하였기에, 그것을 만든 것은

마르그리트였다. 만들었다고는 해도 성배가 넣어 준 기본 지식과, 수많은 서적 중 한 권에서 찾은 배합법, 그리고 섞기만 하면 되는 재료들을

구입해서 적당히 쓱싹 만들어버린 것이긴 하지만. 


마르그리트는 호기심 많은 소녀였다. 배우려는 의욕도, 도전해보려는 의욕도 가득한 소녀. 책에서 본 온갖 요리법을 시도하느라 

에그노그 뿐 아니라 니쿠쟈가 따위 이 나라의 가정식부터, 크로크 무슈라는 먼 나라의 샌드위치에, 카르파초라는 익힌 듯 익히지 않은 듯

기묘한 요리까지 시도해 보았으며, 악기에도, 서화에도, 노래에도 관심이 많아 종종 자신의 손바닥만한 두께의 책을 뒤적이곤 했으니까.


그리고 오늘, 시도한 것이 에그노그. 따스한 온기가 퍼지는 기분에 잠기며, 마르그리트는 잔을 가볍게 내려놓았다.


달칵.


그제서야, 마르그리트는 정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마찬가지로 자신을 반듯이 바라보는 새벽빛 눈동자와 시선이 닿았다. 그리고

천천히, 아침 햇살과 같은 머리칼을 늘어뜨린 소녀는 입을 열었다.



"칼. 그러고보니 돌아오기 전, 서번트를 만났다."



저녁 산책에서. 마르그리트는 가볍게 중얼거렸다. 멀리 나가지는 않았다. 그저 밤공기를 들이쉬기 위해, 잠시 나갔던 한 시간 가량의

산책. 그 때 만난, 밤하늘에 스며들 것 같은 새까만 머리카락에, 그 속의 별과 같이 - 혹은 청금석을 박아놓은 것처럼 반짝이던 

푸르디푸른 눈동자. 오만한 듯, 혹은 괴상한 듯 일견 보이면서도, 우아하게 움직이던 자세와 어조. 간단히 말문을 연 그녀는 차분히, 

동료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것은 이미 보아서 알고 있는 바라네, 아름다운 꽃이여."



그럴 줄 알았다. 지난 번과 같다. 아니, 최근 혼자 나갔다,하면 항상 드는 느낌과 비슷했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알아내겠다고 다짐하며,

마르그리트는 눈을 깜빡였다.



"..어떻게 본 것인가? ... 설마하니, 미묘하게 따라붙었던 그 기척이... 아니, 그렇다면 그대는 내가 그 자들에게 어떻게 대응할지 관찰

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칼 크래프트는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분명히 말해, 무엇인가를 숨기는 자 - 혹은 알고 있는 자만이 지을 수 있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뭣도 모르는 소녀들이 보았다면 얼굴을 붉히다못해 반쯤 멍하게 휘청일 정도의 아름다운 얼굴이었지만, 마르그리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 표정은 무슨 의미인가, 칼!"


"글쎄..."


"나는 물론 그대의 미소도 목소리도 전부 다 좋아하지만, 지금만큼은 대답을 들어야겠다!"


"나로선 아름다운 꽃을 향해 몰려드는 벌레들을 내쫓으려 했지만, 딱히 그럴 필요가 없어져서 말이네. 후후후."



속내를 도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낮게 웃는 칼 크래프트를 보며, 마르그리트가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웃음 뒤로 칼이 가볍게

중얼거린 한 마디 뿐이었다. ..그 시정잡배들에게는 영영 구실을 못하게 되는 마술이라도 걸어줄 생각이었건만... 그 말을 

놓치지 않고 똑똑히 들은 마르그리트는, 솔직하기 그지없는 그녀로서도 - 아니, 그런 그녀이기에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른다는 듯 난감한 표정이었다. 도대체 무슨 대응을 하면 좋단 말인가. 아니, 그 전에 무슨 구실? 



"읏. ...아무튼, '도움을 받은 상대에 대한 예의' 겸, 혹시 모를 가능성을 대비하기 위해 제대로 된 말투는 사용했다. ..아무래도 상대는

평소대로의 말투를 사용한 것 같았지만. 하여 묻지만, 일단은 앞으로도 또 다른 서번트나 그 마스터를 만날 경우, 어떠한 태도가

적절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대는?"



마르그리트 본인도, 자신의 어조가 상당히 고풍스럽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주어야말로 짐이니 첩이니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예스런 말투. 그렇기에 묻는 것이었다. 전략적으로, 어떠한 특징이 될 만한 것도 흘리지 않는 편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평범하기 그지없는 존댓말이나 반말을 사용한대도 그녀는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나름대로 그 쪽도 싫지는 않았으니까.

사실 그녀의 말투는 반쯤 취향일 뿐.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으니, 여기서는 동료인 칼의 의견을 묻는 것이었다. 



"그대가 원한다면 그대 외의 자들에게는 아까와 같은 말투를 사용하자. 그대가 원래대로 하길 바란다면, 이렇게 그대로 쓰겠다."


"음? 그대의 태도를 어찌하여 나에게 묻는 것인지 모르겠군, 마르그리트."



칼 로렌스 크래프트는 늘 그렇듯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운 미성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뿌리는 성실한 탓인가. 모처럼의 질문을

그렇게 넘겨버리는 대신, 그는 잠시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눈치였다.



"흐음... 그래도 나에게 그대가 조언을 구하는 일이니 무시하지 않고 대답을 하자면."


"하자면?"


"그대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그것이 가장 좋지 않을까 하네만?"


"....이끄는, 대로?"


"그대가 생전에 어떠한 삶을 살았고 어떠한 행동양식으로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마음에 들었고, 그것을 그대로 쓰길 

바란다면 나는 말리지 않는다네. 마르그리트."



마르그리트는 가만히, 눈만을 깜빡였다. 남쪽 산호의 눈동자만이, 희미하게 떨리면서도 곧게 앞을 향해, 그녀의 마스터를 오롯이 담고

있었다. 저것은 분명, 귀찮아서 적당히 대답하는 것과 일순 듣기엔 비슷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것과 '이 것'을 혼동할 만큼

그녀는 어리석지 않다. 어쩐지, 분명 '그림자 따위는 존재하지 않을 몸' 임에도 무엇인가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며, 

마르그리트는 가만히 고개를 푹 숙였다.



".....?"


"... 음, 조금 곤란하다. 으무. 음... 으으으으음....."


"후후후후, 그렇게 고민할 것 없다네. 그저 그대가 내키는대로 한다면, 그것으로 족하는 일이니까. 가련한 꽃이여."



푹신푹신한 앞머리를 해질녘 바다처럼 내린 채, 소녀는 중대한 사항이라도 결정하는 듯 끙끙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하늘이 내려앉은

바닷빛 눈동자가 조금 흐려진 채, 입은 꽃봉오리인 양 살짝 앙다문 채, 다소 발그레진 귓불만을 보이며 열심히 무엇인가를 생각하던 

그녀는, 마침내 고개를 들고는 또박또박 말했다.



"그럼 칼, 두 말투로 말해볼 테니. 그래도 그대가 조금 더 끌리는 쪽으로 골라다오! 그대가 나를 존중해 주는 것은 정말로 기쁘지만, 

나도 그만큼 그대가 더 좋아하는 쪽으로 하고 싶다! 그렇기에 ...."



가녀린 체구의 소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칼. 당신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제가 이 말투를 사용하는 쪽이 더 편안하신지."



그야말로 평상시의 행동 - 다소 제멋대로에 극히 감상적인 것 같으면서도 되짚어 보면 한 점 흐트러짐 없는, 영웅의 이미지에

걸맞는 말투였다. 톤은 다소 침착하게 가라앉았고, 열일곱 소녀처럼 가볍게 뛰어오르는 솜사탕 같은 어조는 이제 흔들림 없고 

정직하며, 담겨 있는 의지는 곧고 늠름하다. 



"흐음.. 빛나는 보석이여, 그대는 그대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나. 그대를 위한 전장은 내가 준비하고, 어떠한 무대로 구성할 것인가는 

내가 고민하겠네. ...물론, 주역이 되어 춤을 출 그대의 의견은 기꺼이 참고하도록 하지."



칼 크래프트는 말을 마친 채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길게 늘어뜨린 깊은 바닷빛의 머리카락이, 사락이는 소리를 내며 부드럽게

흐트러졌다. 



"이만하면 대답이 되었는가, 마르그리트?"



마르그리트는 변함 없이 성실한 표정으로 칼을 바라보았다. 그 표정은 무엇인가에 놀란 것 같기도, 무엇인가에 조금 기쁜 것 같기도,

혹은 무엇인가에 조금 부끄러운 것 같기도 싶은, 그러한 얼굴. 그리고, 그녀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한 눈치를 보이기 시작함과

동시에, 서서히 그 특유의 봄하늘 같은 분위기가 되돌아온다.



"───그런,가. 음, 알겠다! 그렇다면, 그대의 배려와 호의에 기대어, 신경 쓰지 않고, 내가 내키는 대로,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대로 하겠다. 칼, 그 마음에 감사한다."


"후후. 당연한 일이네."


"...헌데, 칼. 또 한 가지 더,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지난 번부터 궁금해왔던 것이지만."


"음? 뭔가, 마르그리트?"



마치 인생 최후의 결전을 눈 앞에 둔 사람마냥, 이것만은 들어야겠다는 듯 단호한 얼굴로 마르그리트는 똑바로 칼을 쳐다보았다.

이번에는, 제대로 들어야겠어.



"...엊그제는 뭉뚱그리고 제대로 대답해주지 않았더만. ...도대체 어떻게 내 움직임을 전부 다 쫓아올 수 있는 건가, 칼?"


"그것이 궁금한 것인가, 그대는?"


"그렇다! ...내 동료(Master)가 서번트의 움직임마저 완벽히 따라올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나다는 사실은 지극히 기쁘지만, 

아무래도 궁금하구나. 아니, 신경 쓰인다고 하는 쪽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래. 후자가 맞을 것이다. 물론 전자도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단순히 궁금하게 하는 것 이상의 '무엇인가'가 항상 느껴지곤

했으니까. 그저 궁금할 뿐이라면 그 실력을 이룬 방법이나 비법 정도로, 듣고 찬탄을 보내면 족할 일이다. 하지만 그 무엇인가,가

그토록 솔직한 마르그리트마저도 순수하게 경탄할 수는 없게 발목을 붙잡고는 했다.


그렇게 물으며 살짝 고개를 갸웃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칼 크래프트는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라도 된 양 양 팔을 활짝 올렸다.

양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그는 평상시보다 다소 감정이 담긴 목소리로 읊기 시작했다. 공연의 배우처럼 다소 격하게, 혹은 지휘하듯

팔을 움직이며, 빙그르르 돌 것처럼 흔들며. 물가에서 흔들리는 갈대마냥 팔을 휘젓는다.



"그대에게 설명한다 한들 그대가 이해하기는 어려울테니 쉽게 말하지."



괴짜인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좋다. 그런데 지금 이건 그냥 괴짜의 수준이 아닌 것 같은데. 그 마르그리트조차 다소 

당긴 표정으로 떨떠름하게 바라볼 정도로 칼 크래프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 혹은 흔히 볼 수 없는 행동을 선보이고

있었다. 마리가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아름다운 꽃이여, 지금 이 나의 행동에 가장 근간이 되고 중요한 것은 '흥미'라네."



어쨌든, 지금 감상과는 별개로 마르그리트는 일단 그의 말을 착실하게 경청하고 있었다. 몇 번이고 생각하지만 정말 소중한 마스터.

한 마디라도 무용으로 흘리는 일 따위 할 수 없다. 물론 그것이 그녀의 마스터의 말이 아니더라도, 당연한 예의겠지만.



"그대가 무엇을 하는지 매우 궁금하다네, 그대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매우 궁금하다네."



어쩐지 멍해지는 기분으로, 마르그리트는 반사적으로 수긍했다. 



"아름다운 꽃이여, 그대의 행동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나는 나로서 존재하는 기분을 느끼고 있다네. 아아. 그대를 소환해서

정말로 다행이다."



이제 거의 춤에 가까운 동작을 선보이고 있는 칼 크래프트를 바라보며, 굉장히 미묘한 느낌이면서도 기분은 나빠 보이지 않는다는,

적절한 묘사를 하기 힘든 표정으로 마르그리트는 당황스러운 듯 물었다.



"...그렇다면, 그대는 나에 대한 흥미..혹은 궁금증으로 그 정도의 행동을 해낼 수 있었다는 말인가?"


"말할 필요도 없는 질문이군, 마르그릿트."



즉답이었다.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당연한 사실. 그것은 분명히 기쁘지만, 지금 저 춤도 뭣도 아닌 동작을 보니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기뻐할 수만은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래도. 머릿속에 복잡하게 떠오르는 감상들을, 마리는 애써 지웠다.

그래. 이것은 호의다. 비록 기인에 괴짜라는 중복 표현을 열 번쯤 반복한대도 어쩐지 다 표현할 수 없을 것 같긴 하지만, 적어도

저 호의가 진심이라는 것은 전해졌다. 그래. 그거면 충분하다. 아니, 충분 이상이다. 더없이 기쁘고 소중하다. 그거면

이미 된 것 아닌가. ...아마도.



"... 어쩐지, 도대체 어느 정도의 흥미라면 그 정도의 행동이 가능한 것인지 나로서는 조금 어렵지만. 으무, 그래도 그대가 나에게 

그 정도의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은 무언가 기쁘구나!"


"그대가 기쁘다면 나로서도 보람을 느끼는군, 후후..."



그렇게 특유의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는 것이, 지금의 마리로서는 할 수 있는 최선이었으며, 거짓 없는 진실이었다. 

그리고 중얼거리며, 마르그리트는 방금 본 기묘한 동작은 머릿속 깊은 곳으로 가라앉혔다.



──그 쪽에 대해서는, 생각을 포기 하는 게 이롭다고 판단한다. 감이지만.







/02





칼이 마련해 준 자신의 방에 들어가, 침대에 잠겨들듯 누운 그녀는, 거위털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몸을 웅크렸다.

음. 하지만, 역시 신경 쓰인다. 아까의 말이 거짓이 없다는 건 알 수 있었지만. 생각해보니 그래도 항상 따라다니는 그

기묘한 느낌의 해답은 되지 않는 것 같다. 날 따라올 수 있었던 것이 관심과 흥미 덕분이라는 건 이해했지만, '따라올 수 있는 능력'과

'기묘한 느낌'은 직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마르그리트는 얼굴의 반만을 이불 위로 빼꼼 내밀었다. 



"으무.. 으음. 우으으."



작은 얼굴을 양쪽으로 가볍게 흔들고, 형태 좋은 눈썹을 찌푸렸다 폈다, 섬섬옥수를 오물조물 움직이고. 그녀는 마침내, 벌떡 일어나 

앉았다.



"좋아. 결정했다."



이거면 궁금증도 해결이다, 라고 자신감 가득한 미소와 함께 소녀는 어깨를 넘어 흘러내린 긴 머리칼을 가볍게 확, 뒤로 넘겼다.







/03





07 : 00. A.M.


평소보다 조금 이른 아침 - 물론 어디까지나 활동의 의미였다. 단지 눈을 뜨는 것 뿐이라면 마리는 새벽을 더 좋아했다. - 마르그리트는

영체화를 한 채, 본인이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기척을 숨기고 스르륵 움직였다. 겨울의 해는 아직 뜨지 않았다. 희미한 빛만이

미약하게 감도는 어슴푸레함 속에서, 그녀는 사뿐사뿐, 그야말로 나비가 날아가듯 움직였다.


그런 그녀가 멈춘 곳은 그녀의 마스터, 칼 크래프트의 방 앞. 살짝 열린 문 틈새로 촛불인지 전등불인지 알 수 없는 빛이 새어나온다.

그래. 지금부터 시작이다. 마르그리트는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공간에 녹아들듯 문 틈에 얼굴을 댄 그녀가 본 것은, 도저히 알 수 없는 도구들을 만지작거리는 칼의 모습이었다. 마리는 살짝, 

눈을 찌푸리다시피 힘을 주곤 찬찬히 도구를 알아보았다. 어쩐지 잘은 모르겠지만, 마치 수정구처럼 보이는 것 몇 개. 그리고

현대의 '카-메-라-'라는 도구와 비슷해보이는 것. 마치 사람의 눈과 같은 형태를 한 작은 도구들. 그 자신이 직접 만든 것들인가.

그렇지 않다면 그녀가 이리도 아무것도 알지 못할 리는 없었다. 가볍게 인상을 찌푸린 마르그리트는, 살짝 입을 오므렸다.

기묘한 것들로 가득 찬 책상에서, 칼 로렌스 크래프트는 간간히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리며 그것들을 뒤적이고 있었다.


그 중, 마르그리트는 수정구처럼 보이는 것들 중 하나에서 마치 자신의 모습 같은 걸 발견한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 순간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칼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즉시 사라질 수 밖에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영령의 전속력을 다해 그 자리에서

벗어난 것 뿐이지만.


아마도 기분 탓일까. 그래, 기분 탓이겠지. 그렇게 스스로를 다잡던 마르그리트는, 만약 그 수정구가 '문 밖에 몰래 서 있던 자신'을

비춘 것이라면 어떡하지, 란 생각에 그 고운 얼굴을 창백하게 했다.



"그래. 보였을.. 보였을 리가 없다."



영체화한 상태가, 칼 본인도 아니고 그런 유리 구슬 같은 것에 비칠 리가 없어. 응. 그렇고말고. 그렇게 스스로를 격려하고, 아니, 

자기 합리화에 가까운 생각을 되새기면서, 마르그리트는 부엌으로 향했다. 토스트나 만들자. 달걀 프라이도 하고 베이컨과 감자도

준비해야지. 아직 오믈렛을 태우지 않고 예쁘게 만들 수 있을 정도로 현대 화기를 능숙하게 다룰 수는 없지만, 자신이 하지 않는다면 

분명 칼은 또 아무것도 먹지 않고 넘겨 버리거나, 마르그리트 자신의 몫만을 건네며 가만히 바라볼 것이다. 그런 것은 싫다. 

힘도 나지 않고, 책에서도 건강에 그리 좋지 않다고 했고. 무엇보다도 혼자 먹는 건 그다지 즐겁지 않다. 그러니까. 


응. 여태까지는 빵을 구우면 가장자리를 조금 태워버렸지만. 오늘만큼은 제대로 성공시킨다. 절대로.


이리저리, 아침식사 거리를 생각하며, 마르그리트는 전력으로 노력했다. 부정하려고 노력했다. 잊으려고 노력했다.



수정구에 비친 게, 전날 밤 거리를 다니던 자신의 모습이 아니었다고.







/04





 01 : 30. P. M.


빤──


우물우물. 


마르그리트는 푹신한 소파에 안기듯 앉은 채로, 가끔 발을 몇 번 살짝 흔들어보며, 그에 따라오는 소파의 흔들림이 매우 흥미로운

것처럼 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러는 '척' 하고 있었다. 동글동글, 올록볼록한 모양의 미스○ 도넛 폰데링 하나를 입에 

문 채, 그녀는 흘끔흘끔 이곳저곳에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으음.."



새하얗고 보드라운 발끝을 꼼지락대던 마르그리트는, 곤란하다는 듯 신음을 흘렸다. 이번에는 문이 제대로 꽉 닫혔다. 령체화를 

하면 가능하지만, 어쩐지 칼이라면 뒤돌아 앉은 채로도 다 들킬 것 같았다. 그렇다고 바깥으로 나가 뛰어올라, 창으로 보기에는

칼의 서재 안의 소파는 창을 향해 놓여져 있었다. 책상도.


폰데링을 우물거리며 몸을 반쯤 소파에 눕힌 채 양 옆으로 데굴데굴 두어 번 구른 소녀는 타앙, 하고 몸을 튕겨 사뿐히 일어섰다.

그래. 이번에는 당당히 들어가도 되겠지! 아까야 이른 아침이라 확실히 실례였지만, 지금은 한낮이다. 음, 괜찮고말고.


곧바로 방을 향해 날아들듯 달려가려던 마르그리트는,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듯 재빨리 움직였다. 응, 이것이라면 구실도 확실하다!




-똑똑.



"칼, 실례하겠다. 들어가도 되는가?"



의외롭게도 - 아니, 정말로 자연스럽게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 대답은 즉시 들렸다.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간 그녀의 눈에

보이는 건 뒤죽박죽 쌓인 책더미와, 그 중에서도 그의 팔이 닿는 곳에 놓여져 있던 세 권의 책.



"아, 그. 커피란 것을 조금 더 가져와 보았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우아한 손놀림으로 잔을 채우는 그녀는 쌓여 있는 세 권의 책 - 정확히 말하면 두 권과, 칼이 방금까지

보던 것 같은 책에 시선을 향했다.



"카... 카지... 으우....카, 카미..?"



성배에게서 부여 받은 지식과 능력으로 말의 의미를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나, 다소 생소한 발음이었다. 거기에 이 나라의 문자는

같은 글자를 사용하더라도 읽는 법이 다종다양하여, 영 익숙치 않을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







/05





저녁은 평소와 같았다. 마르그리트는 아예, 예의 거적데기  - 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아, 아니지. 누더기나 넝마도

가능하겠군 - 비슷한 것을 두른 칼과 함께 다녔고, 여러 가지 의미로 수많은 행인들의 시선을 끌며 또다시 거리와 강가를 돌았다. 

바다의 파도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것 같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새벽 두 시. 서서히 거리도 조용해질 시간이었다. 겨울의 밤은 무섭도록 적막했고, 아주 희미하게 들리는 이른 송년회의

취객들과 고양이 울음소리만이 간간히 섞였다. 물론 소녀에게는 아무렇지 않았지만. 애당초 잠 따위는 일반적인 경우는

취미나 다름없는 것이다.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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