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로하로하로 비밀비밀

로하《리델》 2013.02.16 06:08 조회 수 : 39







00/





   웨이버 벨벳은 재능이 없다. 그것은 시계탑의 모두가 생각하는 사실이었다. 물론 그 가문을 참작해 본다면, 그 정도 수준은 오히려 

예외적인 것에 속했으나. 전체적으로 본다면 분명히 범재의 기준을 넘지 못하리라고,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기에 천재라

소문난 강령과의 교수, 케이네스 엘 멜로이 아치볼트가 그를 비웃었을 때, 아무도 그에게 손을 내밀어 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낮게 키득거리는 소리만이 강의실을 가득 메웠고, 웨이버는 잔뜩 얼굴을 붉힌 채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런 소년에게 누군가 무엇인가를

케이네스에게 전해줄 것을 부탁했고, 그 날로 웨이버 벨벳은 사라졌다.





01/





   "──추하네. 케이네스."



아름다운 붉은 머리칼을 숏 컷으로 정리한 여성이 무심하게 - 아니, 내심은 꼴 좋다는 듯한 느낌으로 툭 내뱉었다. 얼마 되지도 않은

집안의, 새파란 풋내기 제자에게 성유물을 빼앗기고 어수선하게 대용품을 찾아대는 꼴이라니. 사랑해야 할 약혼자에게 할 대사로는

너무나도 싸늘한 것이었지만, 솔라우 누아다레 소피아리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이야기였다. 애당초 사랑 따위 없이, 의무감으로만

된 약혼 관계였다. 의무와 이익. 그녀로서는 이렇게 될 바에야 어떻게든 집안 후계자 자리를 쟁취하는 것이 나았다는 미련 또한 있었지만,

불가능하다는 것은 그녀 자신부터가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오빠, 브람 누아다레 소피아리는 시계탑의 강사 중에서도 케이네스와

비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수재였으니.



──차라리, 자신으로서는 별다른 정도 없을지언정 피가 섞인 오빠가 참전해, 그를 보조하는 것이 더 나았겠지만.



솔라우는 싸늘하게 조소하는 눈빛을 돌리곤, 차를 홀짝였다. 똑똑, 가볍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고, 소피아리의 영애는 오만한

목소리로 입실을 허가했다.



"...음? 이건, 미스 마리온 세실리아."



마리온 세실리아 엘 멜로이 아치볼트. 조금 가까운 상대들이 부를 때는 마리, 세실, 혹은 합쳐서 마리 세실리아. 열 너댓 살 -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기에 솔라우는 그녀의 정확한 나이조차 알지 못했다 - 의 소녀로, 아치볼트의 말석에 앉은 소녀였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직계 혈통으로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가문 내의 위치도 높지 않았으며, 아직 막 시계탑에서 공부를 시작한 탓인지

본인의 실력 또한 딱히 밝혀진 바는 없었으나 그녀는 썩어도 명문 아치볼트의 따님. 그것을 자각하고 있는 솔라우가 기본적인 예의조차 

버린 채 무시하는 태도를 고수할 일은 없었다. 뭐, 미래의 인척이라는 것보다 아치볼트의 따님,이라는 걸 더 먼저 떠올린다는 것이 

그녀답다면 그녀다운 태도였지만.



"안녕하셨나요, 솔라우."



살짝 치맛자락 끝을 들어올리며, 예법에 하나 어긋남 없는 절을 하는 소녀에게 솔라우는 까딱, 하고 가벼운 목례를 건넸다. 어두운 머리카락에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가진 소녀는 앳된 미모 그대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케이네스 오라버님은 아직도 바쁘신가요...?"



"글쎄요. 본인에게 직접 묻는 편이 좋지 않을까? 뭐, 열심히 어떻게든 대용품을 구하겠다고 발버둥치고 있으니까."



─정말, 꼴불견이야. 솔라우는 싸늘하게 내뱉었다. 그런 평가를 받는 당사자의 가족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어떨까 하겠지만,

솔라우는 마리온 세실리아 아치볼트 역시 책에 써 놓은 듯한 가족. 단지 그 정도의 가치만을 케이네스에게 부여하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마도 명가에서는 오히려 그런 쪽이 더 흔하기도 하고 말이다. 기분 나빠한대도, 별로 상관은 없지만.



아니나다를까. 녹안 소녀는 약간 입술을 오므리기는 했지만 단지 그것뿐의 반응으로, 알겠습니다, 실례했어요, 라고 인사하고는

다시 밖으로 나가버렸다.



아아. 정말이지 싫다.






02/





   마리온은 적막하기 그지없는 아치볼트의 저택 복도를 걸으며, 생각에 몰두하고 있었다. 얼마 전 꾸었던 꿈을. 대강 열흘은 되었을까.

친척이자 가문의 당주인 로드 엘 멜로이. 케이네스가 성유물을 도둑맞고 피오나의 일번 창. 디어뮈드 오 디나를 소환하여 성배전쟁에

참전하고, 마술사로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방법들에 허망하게 당해버린 이야기를.



직관,예지는 드문 재능이다. 거기다 이런 레벨이라면 기적 레벨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런 것이 자신에게는 있을 리 없다. 그렇게 생각한

마리 세실리아는 그저 좋지 못한 꿈이겠거니 넘겼지만, 지금 그 꿈의 내용이 현실에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부터는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녀 자신도 케이네스에게 어떠한 애정도 없을지언정, 일단은 가족. 또 기본적으로 사람이 총알받이가 되어 죽어나갈

수도 있다는 걸 그대로 내버려 둘 만한 위인은 못 되었으니까.



물론 케이네스가 자신의 말을 믿을 가능성은 전무였다. 하지만 적어도, 성유물을 다른 영령의 것으로 바꾸길 권유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가능성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근거로는 적당히, 아인츠베른이 세이버로 '밖에' 소환할 수 없는 영령의 성유물을 웨일스

지역에서 가져간 것 같다고 댄다면, 자부심 높은 케이네스로서는 디어뮈드 오 디나 레벨의 - 그것도 적성 둘 중 하나인 세이버도

아닌 랜서로서 - 영령을 소환할 마음을 바꿀 가능성도 충분했다. 



꿈 속에서 전쟁의 모든 것을 보고, 결말까지 본 것은 아니었지만, 마리는 군데군데일지언정, 제법 키(key)가 될 수 있는 장면들만은

새겨 기억하고 있었다. 꿈 속에서 그 정도의 의지를 발휘한 것 또한 대단하지만, 본인의 자각 여부를 떠나 그 몸에 흐르는 피는 

허세가 아닌 것이다.



"..후아. 결국 찾아가야 하려나."



솔라우도 불편하지만, 케이네스 또한 불편하다. 마리온의 '유년 시절'을 알고 있었기에, 어떤 면으로는 솔라우보다 더. 마음 같아서는,

이렇게 길게 늘어뜨린 거추장스런 머리카락도 짧게 잘라 버리고, 이런 치렁치렁한 스커트 대신 짧은 반바지에 스니커즈 차림이 더 

익숙한데.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한숨을 푹 내쉬며, 자신이 어느 틈엔가 이 말투, 이 복장, 이 동작에 익숙해졌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움을 느낀 마리온 세실리아는 다시

케이네스 엘멜로이 아치볼트를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물론, 냉대와 모멸은 각오한 채였다. 



*          *          *



   "...싫다."



들어가자마자 위아래로 훑으며 "무슨 일이지?" 라니. 책상은 난잡하게 온갖 영령들에 대한 자료만이 널려 있고. 마리온은 가볍게 

혀를 내둘렀다. 폐인이 따로 없었으니까. 케이네스의 성유물을 훔쳐 간 웨이버 벨벳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그에게 심한 꼴을

당했었다는 말은 들었다. 그러니까 적당히 상대를 존중하는 선에서 멈추지. 물론 케이네스 본인도, 다른 마술사 가문 출신의 

학생들도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리란 것도,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오히려 더 특이한 케이스란 것도 그녀는 알고 있었지만.



"정말로 그냥 포기해야 하나."



물론 케이네스가 죽는대도 그녀가 그 앞에서 대성통곡을 하거나 진심으로 애도할 리는 없다. 하지만 기분이 영 찝찝한 - 뒷맛이

안 좋은 건 변하지 않겠지. 그것조차 느끼지 않을 정도로 냉혈한, 혹은 철저한 마술사는 아닌 것이다.



"...그래도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에 꼬맹이에 애송이에 입 함부로 놀리는 애 취급을 받고도 거기서 더 매달리고 싶지는 않은데."



그냥 차라리 령주,라고 하는 게 안 내리면 그걸로 깔끔하게 끝날 것 같은데. 역시 무리겠지? 마리 세실리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정말이지, 곤란한 일이다.



──아아. 차라리 꿈에서 본 모든 걸 다 기억하고 있었다면 좋겠는데.



마리는 머릿속으로 가볍게 기억하고 있는 내용들을 정리해 보았다. 1. 케이네스가 성유물을 도둑맞고 피오나 기사단-영령에겐

미안하지만 처음 들어 본 이름이었다-의 일번 창, 디어뮈드 오 디나를 소환한다. 2. 케이네스가 지명은 기억나지 않지만 일본으로

떠나고, 거기서 다른 마스터 누군가의 소행으로 호텔에 만들어 둔 공방이 건물째로 폭발한다. 3. 뭔가 총체적으로 현대 무기 같은

것에 탈탈 당한다. 4. 영령에게 반한 솔라우가 권유를 가장한 협박으로 마스터 자격을 빼앗는다. 5. 그러다가 그녀가 인질로

잡히고, 케이네스는 그녀와 그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서번트를 자결시키지만 다른 누군가의 총기 난사로 사망한다.



...차라리 다른 사람들이 누군지, 이런 걸 알고 있었다면 그걸 근거로 어떻게 좀 더 해보겠지만, 이건 무리. 무슨 싸움에 진 개마냥

설설 당하다 죽으라는 저주도 아니고.



"──아가씨. 티 타임입니다."



"...아, 응."



찾았다는 듯한 사용인의 목소리에 건성으로 대답을 한 마리온은 메이드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손등이 묘하게 욱신거리는 느낌이

들었지만, 기분 탓이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03/





   ". . . 이게. . . 뭐야. "



마리온이 케이네스를 찾아갔던 날로부터 약 사흘 후. 그녀는 케이네스가 영령 소환에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자신의 손등에 새겨진 것을 보고서는 그야말로 눈앞이 캄캄해졌다 해도 좋을 정도로 멍해졌다. 어째서. 어째서 내게.



불과 한 달 전, 케이네스가 전쟁 참전 의사를 표명하기 전까지는 성배 전쟁이 뭔지도 몰랐으며, 약 2주 전 기분 나쁜 꿈을 꾸기 전까지는

어떠한 관심도 두지 않았던 자신의 손등에 새겨진 세 획의 문장. 지식이 맞다면 이것이 '령주'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케이네스에게

말해야 할까. 아마 거의 백 퍼센트에 가까운 확률로 그는 자신의 령주를 가져가겠지. 소환에 실패했다는 사실이 바깥에 소문으로 흐르기

전에. 단지 그 뿐이 아니었다. 앞으로 이 집 안에서 자신의 입지는 어떻게 될지 몰랐다. 차라리 지독한 견제 끝에 지금보다 더한 한직,

혹은 지금 같은 대우로 끝난다면 다행인 일이고, 별로 신경 쓰이지도 않겠지만 괜스레 집안 내의 알력 다툼 따위에 휘말려들 가능성이

무엇보다도 높았다. 케이네스가 오만하고, 사람을 낮춰 보는 경향이 있으며 거기에 대해 반발심을 가진 이가 꽤 많은 건 주지의

사실이니까. 괜히 그런 복잡한 일에 말려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그리고 까딱하다간 그러다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싫었다.



"어떻게 하지."



누군가 아무라도 붙잡고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음울한 일에 휘말리는 것만은 결단코 사양하고 싶다. 물론 지인이랄까, 친척의 죽음은

매우 뒷맛이 안 좋지만, 자기가 대신 목숨 걸고 뛰어들 의리도 정의감도 없다. 기본적으로, 어떠한 애정도 없는 상대를 위해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온갖 모함과 억측을 해쳐 나갈 각오를 다질만큼 마리온 세실리아는 무르고 착한 사람은 아니었다.



". . . 친인척이라고 해봤자. . . "



일단 가문 안의 사람은 무조건 아웃이다. 소문은 생각과는 비할 바 없이 빠르니까. 가문의 사람에게 말할 바에야 케이네스 본인에게

가서 묻는 것이 차라리 낫다. 솔라우 또한 다르지 않겠지. 그녀는 자신은 커녕 아치볼트에 대해 어떠한 감정도 갖고 있지 않으니까.

마술사가 아닌 지인에게 묻는 것 또한 어리석은 짓이고. 남는 건. . . 



". . . 교수님 . . .?"



당주인 케이네스와의 연 탓인지 어쩐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시계탑에서 몇 달 전 처음으로 수업을 듣기 시작한 마리의 담당 

교수는 솔라우의 오빠인 브람 누아다레 소피아리였다. 아직은 강의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2급의 레벨이지만, 재능도

집안도, 그 모든 것이 앞으로 근시일 내 일급 강사, 그리고 출세 가도를 달리게 해줄 거란 사실은 불 보듯 뻔한 것이었다.



". . . 남매가 그렇게 다른 것도 신기한 일이지만. "



혈통이나 마술사란 사실에서 오는 오만함은 공유할지언정, 그걸 자부심으로 간직하냐, 거만함으로 내보이냐의 태도는 상당히

달랐으니까. 마리온 세실리아는 여전히 고민하는 눈치였다. 과연 말해도 되는 일일까. 가능한 일일까. 살짝 눈썹을 찌푸리고,

입술을 오므린 채 생각에 골몰하는 모습이 나이에 걸맞게 퍽 사랑스러웠다.



". . . 적어도 시도는 해 볼까. . . "



어차피 시계탑 강사에게 말할 거라면 왜 케이네스에게 말하지 않는 것인가, 라고 묻는다면 물론 소환에 실패한 이후의 케이네스는

앞뒤물불 가릴 것 없는 상태라고, 그렇게 대답하겠지. 마음을 정한 듯, 마리 세실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색에 가까운 짙은

블론드의 머리칼이 등을 덮었고, 소녀는 문 밖으로 걸어나갔다.



   시끄러운 중심부와는 다소 떨어진 저택 밖을 나와 얼마나 걸었을까. 왁자지껄한 런던 시가지가 눈 앞에 펼쳐졌다. 관광객, 직장인, 가족. 

홈리스까지.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바글대는 런던 시내를 걸으며, 마리온 세실리아 아치볼트는 일부러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화려한 

도시의 광경이 그새 조금 어색해진 느낌이었다.



집안의 사람들이라면 학을 뗄 메트로를 탈까 생각했지만,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 그저 걷는다. 걷다가 예쁜 카페에서 차를 한 잔 마시고,

다시 걷다가 버스를 잠시 타고. 분명히 출발은 오전에 했건만, 마리가 시계탑에 도착한 것은 오후가 다 되어서였다. 모처럼 나온 시내,

볼일만 휑하니 보고 들어가고 싶지 않았으니까.



똑똑.



들어가고 싶지 않았건만 들어갈 수 밖에 없던 시계탑 내부. 한 방의 문 앞에서 마리온은 가볍게 노크했다.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울렸고,

소녀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          *          *



   "──확실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시계탑의 이급 강사, 브람 누아다레 소피아리는 어디까지나 침착했다. 과연 생명을 걸고 한 가문 내의 암투에서 살아남아, 승리한

인재라는 것인가. 붉은 머리의 청년은 눈앞의 소녀를 또렷이 응시했다. 물론 그 또한 마술사로서 근원에의 길을 버릴 리 없었지만,

성배 전쟁이라는 과격한 방법은 썩 내키지 않았다. 일종의 불확실성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나 할까. 또 어지간히 재능 뛰어난 마술사들도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도박에 가까운 위험한 것. 그야말로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다. 눈 앞의 제자는 그런 것에 뛰어들게 되었다는

것인가. 



그는 가르치는 것을 천직으로 생각하는 부류는 결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첫 해로 - 처음으로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어떠한 감정도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멍청하다고 할 학생들도, 장래 유망한 학생들도 있었다. 물론 전자에게 그렇게 생각한다는 티를 내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지만. 어찌 되었든 눈 앞의 소녀는 후자 쪽에 가까웠다. 아치볼트라는 특급의 혈통을 물려받은 타고난

자질도 자질이지만, 이해하는 방식이 보통의 마술사와는 사뭇 달랐다. 예측 불가능한 방법으로 답을 내는 특이성. 그런, 마술사로서는

이질적인 면모에 성배가 관심을 가진 것인가. 



"그래서. 미스 마리 세실. 당신은 어떻게 하고 싶습니까?"



"참가하고 싶지 않습니다."



즉답이었다. 



"그럼, 곧바로 전쟁의 감독역에게 령주를 양도할 생각입니까? 아니면 로드 엘멜로이에게?"



"그건. . .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브람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설령 바로 령주를 양도한다 치더라도, 이 시기에 아치볼트의 영애가

후유키에 가는 것은 그 자체로 이목을 끌며, 다른 마스터들이 그녀를 참가자로 오해하기에 충분했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한다면 아치볼트라는 성씨를 가진 마술사가 싸워보지도 않고 포기했다는 것이 퍼지게 된다. 한 명도 모르는 것이어도 퍼지는

것이 소문. 단지 기간의 문제일지언정, 가문 전체의 이미지에 관련되는 문제인 것이다. 



후자 또한 별다를 건 없다. 단지 눈 앞의 소녀, 마리온 세실리아 아치볼트가 곤란하게 될 뿐. 어느 쪽도 소녀에게 있어서는 좋지 

못한 패. 그것을 알기에 그녀도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 것일 터다. 그러면, 어떻게 말해주는 게, 어느 선택지가 좋을 것인가. 문득, 

브람 누아다레 소피아리는 꽤 쓸만한 방법이 떠올랐다.



". . . 미스 아치볼트."



"네?"



"참가해 볼 생각은 없습니까?"



".....예?"



"표면에 나서지는 못하겠지만, 내가 도웁시다."



무슨 말을 하냐는 듯, 마리온 세실리아는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브람은 이 선택지가 잃을 것은 되려 포기한다는 두 개보다는

적으리라 판단했다. 무엇보다도- 그 또한 마술사. 근원에의 길이 탐이 나지 않을 리가 없다. 소녀를 뒤에서 돕는다면, 만약

잘 되었을 때 이룰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크리라. 심지어, 직접 참가하는 것보다 낮은 리스크로. 그것은 소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포기한다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참가한대도, 혼자서 참가한다면 위험하기 짝이 없는 건 두말할 필요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도움이 있다면, 조금이나마 그 위험은 낮아짐과 동시에 도박을 걸어볼 만한 리턴. 대가가 있는 것이다.



케이네스의 설득에 관해서는, 애당초 브람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물론 본인은 스스로의 재능을 증명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겠지만,

일단 표면적으로는 마술사로서, 명문가로서 근원에의 추구를 표명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을 아치볼트의 성씨를 가진 마스터가 이루어낸다.

속으로는 분통이 끓을지언정, 대놓고 할 수 있는 말은 없다. 그녀가 위험하다느니 어쩌느니 되도 않는 걱정하는 척을 할 가능성

역시 높지만, 자신이 돕는다고 하면 할 말은 없다. 직접적인 전투 경험이야 케이네스나 자신이나 별반 다를 것도 없으며, 무엇보다도

그는.



케이네스 엘멜로이 아치볼트가 한 눈에 반한 솔라우 누아다레 소피아리의 오빠이기 때문에.



"──어떠십니까, 미스 마리 세실."



브람 누아다레 소피아리는 싱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설령 그것이 근원이 아니더라도. 당신 또한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는

있지 않습니까──?



"도박을 해 볼 생각은 ── ?"





04/





   마리온 세실리아는 말 없이 긴 회랑을 걸었다. 구둣발 소리만이 외롭게 울렸고, 소녀는 손톱이라도 물어뜯고 싶은 심정을 가만히

억눌렀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브람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인지, 다시 생각해보면 도저히 스스로도 모를 일이었다. 아마 어쩌면,

그런 대답을 한 자신을 찢어버리고 싶은 기분이 드는 날이 올 지도 모르지. 그런 순간이 올 지도 모르지. 아니. 아마도 확실한

일...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당장 이렇게 후회, 가 되더라도. 그래도 한 번 내뱉은 말은 되돌릴 수 없는 법.



마리 세실리아는 가만히 브람의 말을 되짚었다. 소환의 진에 대해서도 착실히 암기했고, 언제 어떻게 해야 할지도 대강은 배웠다. 만약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한다면, 그 때는 스스로의 재량으로 커버하는 수 밖에 없어.



브람은 성유물이 필요하다면 자신이 구해주겠다 했다. 하지만 그걸 거절한 건 마리 자신. 꿈에서 본 내용이 미묘하게 신경 쓰인 것 또한

부정할 수는 없었지만, 또 단순히, 아무리 잘나신 영령이라도 자신을 개미 바라보듯 한다던가 할 지도 모른다는 것을 생각하면 버틸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제 슬슬 소환의 준비를 시작해야 할 때인가. 클래스라던가는 아무래도 좋지만, 역시 버서커..라던가 어새신..? 같은 조금 특수한

쪽은 제대로 함께 할 자신이 없어.



하늘은, 보름달이 밝게 비추는 만월.



뚜벅. 뚜벅. 발소리를 울리며, 마리 세실은 하염없이 걸었다. 소환을 할 곳은 브람이 미리 준비해 둔 장소. 물론 그의 사무실 따위는

아니었다. 



"아아. 춥다."



런던의 겨울을 한 번도 춥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음에도, 이렇게 느끼는 것은 스스로의 감정 때문일까. 마리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차가운 한기에 몸을 떤 것은. 겨울 공기 때문이 아닌, 소름돋는 느낌에 몸을 떤 것은.



"────?!"



부잣집 아가씨로서 받은 철저한 교육보다도, 먼저 몸이 반응한 것은 십 수년의 삶의 방식. 마리는 짐승의 그것에 가까울 정도로 재빨리

몸을 틀었다. 푸르르. 싸늘하게 빛나는 은제 단검이 박혀 있었고, 다음으로 따르는 것은 핏빛의 불꽃.



"──당신, 누구야?!"



"이런, 이런. 이건 곤란하군. 뭐, 아치볼트의 영애 - 새로운 유망주께서 이 정도도 못 피해내셨다면 그건 그 나름대로 실망했겠지만."



암살자인가. 도대체 누가──?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어째서인지 케이네스였지만, 마리온은 순식간에 그 이름을 지웠다.

지금 자신이 이렇게 당한다면 적어도 참전 사실을 아는 모든 이들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가장 유력한 범인 후보는 그가 될 것. 그 따위

모욕을 감내하면서까지 이런 짓을 벌일 그는 아니다. 명문가의 당주, 자만심 가득한 천재라는 것은 생각보다 남의 눈을 매우 의식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저 몸만을 움직이며 아슬아슬하게 불꽃을 피한다. 확실히 마리온 세실리아의 마술 실력의 발전은 놀랍다

칭해도 좋을 정도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발전의 속도'. 객관적으로 보면 그녀는, 아직 전투 경험 따위 한 번도 없는 미숙한 풋내기에

불과하다. 저것을 반격해 댈 여유 같은 건, 있지도 않은 것이다.



그걸 꿰뚫었는지, 상대는 마리온이 마치 쥐새끼마냥 재빠르게 몸을 날려대며 공격을 피하고 있음에도 여유 작작한 목소리로 천천히

움직일 뿐이었다.



"───젠장."



삼 년 전 이후로 한 번도 입에 담지 않던 욕설을 내뱉으며, 마리온은 재빠르게 몸을 놀렸다. 간격을 좁힌다. 어차피 멀리 거리를 둔다면

당장 도망치는 것은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 아마 잡힐 가능성이 훨씬 높다.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십 삼년의 세월 동안 몸에

새긴 움직임으로 제비가 날듯 가볍게 뛴 마리온은 순식간에 상대의 코앞까지 들이닥쳤다. 저게 대행자니 하는 본 적도 없는 이상한

것들만 아니라면, 재빠르게 선수를 치면 조금이나마 가능성은 있다.



"──?!"



아니나다를까. 상대는 순간 당황. 그리고 그것을 놓치는 일 없이, 마리온 세실리아는 망설임 없이 품 속의 나이프를 꽂았다. 붉은

피가 흘러나왔지만, 상관 없었다. 자신을 해치려는 상대에게 인정을 거듭하는 것은 아무리 여유가 있는 상황이었다 한들 어리석은 짓이라고,

그렇게 배워왔고 그렇게 살아왔어. 피 좀 보는 것으로 몸을 덜덜 떨 정도로 바보 같은 규중 아가씨는 아니다. 



이제 걱정되는 것은 - 후폭풍. 쳇, 마리온은 살짝 혀를 찼다. 어느샌가, 귀족 아가씨 마리온 세실리아 대신. 열 세 살까지의 그녀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써 본 적은 없지만, 차라리 총이 있는 것이 좋았을 텐데. 지금 것은 기습이라 그렇지만, 그마저도 곧 마술 회로가 상처를 치유할

것이다. 그럼 그 다음엔 더 강한 것이 돌아오겠지. 



───차라리 지금, 이 칼을 뽑아 다시 가슴에 쑤셔 박아버릴까.



순간 든 생각에, 마리온은 멈칫하며 그것을 지웠다. 시체를 본 적도 많고, 익숙해져 있을지언정, 사람을 다치게 할 지언정 죽이는 일 따위

는 결코 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맹세했으니까. 『똑같은 사람』은 되지 않겠다고, 그렇게 스스로 약속했으니까. 그렇지만 상대는 그 한 

순간을 놓치는 일 없이, 재빠르게 반응했다.



"───읏.."



콰앙, 하는 굉음과 함께 애쉬 블론드의 소녀는 벽에 쳐박혀 나뒹굴었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상대는 일어섰다. 



"──이건 방심했군. 그런 '더러운 수단'을 사용하다니. 이래서 들인 고양이는 아무리 잘 가꾸어도 그 털의 색이,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하, 하긴 네게 그런 마술사의 긍지,를 기대하는 건 무리였겠지만 말야. 처음부터."



?! 마리는 살짝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케이네스가 아닌, 다른 아치볼트 종파의 누군가인가. 자신에 대해서 아는 누군가인가. 그렇다면

납득이 갈 만했다. 자신을 죽이면 그 의혹은 케이네스에게로 몰리고. 그럼 절대적인 존재인 그와, 어쩐지 원치 않음에도 유망주 취급을 받기

시작한 자신까지 다 제거할 수 있다. 아직까지, 권력을 포기하지 못한 집안의 누군가, 가 시킨 일이란 말인가.



"젠장. 쉽게..당해 주진....."



충격을 받은 폐부를 비틀어 말을 꺼내지만, 상대는 그녀의 말이 이어지는 것은 기다리지 않았다. 그가 내뱉은 다음 말에, 그녀는 행동을

멈추어버렸으니.



"──『가족』이 걱정되지 않는 건가, 아가씨?"



어라? 뭐? ...설마. 설마. 얼굴이 보이지 않는 상대방은 그런 그녀의 표정을 비웃으며, 신나게 지껄였다. 몸이 덜덜 떨린다. 그건 안 돼.

가족만은 안 돼. 엄마만은. 동생들만은. 피조차 안 섞인 동생도 있지만, 그건 안 돼. 



흥, 진작에 그렇게 얌전한 꼴로 나올 것이지. 상대방은 내뱉었다. 그럼 난, 여기서 죽는 건가? 아니. 차라리 그것 자체는 그다지 무섭지

않았다. 하지만, 하지만. 자신이 죽는다면, 죽는대도. 그 다음에, '아는 사람'을 모조리 없애겠다며, 우리 엄마를, 내 동생들까지 없애

버리려 한다면 어떡하지? 그럴 가능성은 모로 봐도 높았다. 싫어. 그건 싫어.



"자아, 그럼 쥐새끼 아가씨. 숨바꼭질은 끝내자고."



천천히, 끝을 고하는 상대.


싫어.

싫어.

싫어.



죽고 싶지 않아.

엄마를 지키고 싶어.

동생을 지키고 싶어.

나도, 죽고 싶지 않아.



가족을 지키고 싶어.

살고 싶어.



그럴 순 없어. 여기서 끝낼 순 없어.

나는. 나는.



"── 그럴 수 없다고! ! ! "



순간, 반응이 멈추었다. 눈 앞의 현상을, 무엇이라 이해하면 좋을까. 적절한 판단을 찾을 수가 없어서. 휘몰아치는 마력을, 무엇이라

받아들이면 좋을까. 알 수가 없어서. 창조 설화의 한 장면을 보는 양, 사뿐히 땅에 내려앉은 그 미모를, 무엇이라 표현하면 좋을까.

알 수가 없어서.



순백의 소녀. 혹은 소년, 인가. 얼굴이 보이지 않았으므로, 잘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드러나는 짧은 하의로, 나풀거리는 긴 백은의 머리칼로,

자신보다도 가녀린 듯한 어깨로 소녀겠구나. 라고 지레짐작할 뿐.



『그것이 그대의 마음이라면, 나는 받자.』



흠칫, 몸이 떨렸다. 설마 이것은, 눈 앞의 존재,의 목소리인 것일까. 알 수가 없었다. 귀로 들려온다기보다는, 머릿속으로 바로 울려퍼지는,

그런 느낌에 마리온 세실리아는 흠칫 손에 힘을 주었다.



『그 마음에 거짓은 없으니. 하면 그보다 귀한 것도, 천한 것도 없으리.』



단지, 휙. 하고 가볍게 손가락을 움직여 마리온에게 날아오던 마술을 막아버렸을 뿐이었다. 그 행동에도, 폭풍우마냥 몰아치는 마력은 흔들림

이 없어서. 로브를 뒤집어 쓴 상대는 그야말로 삼류 악당 같은 비명을 내지르며 사라졌을 뿐.



그 로브의 끝자락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잠시 기다렸는지, 묵묵히. 잠시, 멈춘 듯한 시간이 흐르고서야 눈 앞의 순백은 몸을 돌렸다.



". . . . . 아."



마리온이 내뱉을 수 있는 반응은, 단지 그것 뿐이었다. 탄성을 내뱉기에도, 어떤 찬사도 부족하기 그지 없으니. 마리 세실의 눈에 비치는

순백은, 말 그대로 빛. 백옥으로 빚어 우유를 흘려 만든 듯 투명하게 하얀 피부. 길게 내리깔아 그림자를 드리운 속눈썹. 길게 물결치는

백은의 머리카락. 그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사슴처럼 새하얀 목과 흐르는 등의 곡선. 새벽 꽃의 색을 조금 훔쳐 오기라도 한 듯, 희미하게

수줍게 비치는 양 뺨의 벚꽃빛. 그리고 ─── 마치 가을 하늘을 녹여낸 것만 같은 푸르디푸른 새벽의 눈동자.



"──존귀한 분이여. 하나, 감히 묻겠나이다."



움찔. 텅 빈 복도에 맑게 울리는 청명한 목소리에, 몸을 떤 소녀는 거의 온 힘을 짜내어, 간신히 고개만을 끄덕였다.


                            마스터

"──그대가, 나의 존중받을 분입니까."







05/





   흘끔흘끔. 마리온 세실리아 아치볼트는 잔뜩 긴장한 채, 자신의 '서번트'를 훔쳐보고 있었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다는 말은,

이럴 때 사용하는 것인가. 아니. 확실히 이론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이 곧은 자세로 발걸음을 옮기는 소녀의 모습은, 확실히 '인간'과는 괴리가 있는, 전설에 구현된 존재. 문득

마리 세실은, 자신이 그녀의 클래스도. 진명도 묻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여성일까 남성일까. 그 미모만 본다면, 가타부타

할 것 없이 무조건 여성이겠으나, 묘하게 청렴한 분위기는 곧은 소년의 그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법 싶었다. 또,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묘하게 '여성' 인 것을 '알고 있음'에도, 남성이라고 '무심코' 판단하게 되어버리는 것. ...무슨 특수한 마술의 소도구라도, 지니고

있는 것일까.



"...저어. 궁금한 게 있는데..."



마리온이 툭, 하고 내뱉기가 무섭게, 소녀는 살짝 그녀를 돌아보았다. 마치 다른 적이 튀어나올까, 그녀를 지키려 하는 것인지 앞장서

나가던 그녀는 뒤를 돌아서는 동시에 재빠르게 무릎을 꿇었다.



"하문하소서."



당황한 것은 마리온 세실리아 쪽이었다. 이렇게까지 극진한 존칭과 태도 같은 건, 받아 본 적도 없다. 미묘하게 집안에서도 무시 받는

입장이었고, 대외적으로..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으니까. 더 놀랍다,고 해야 할 것은, 저렇게 극존칭을 사용하며 굽히는 태도에서도,

결코 '낮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일까. 스스로를 낮추면서도 고고하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닐 터였다.



"그, 당신..은 무슨 클래스, 인가요? ... 그리고, 저는 당신의 이름...같은 것도 아무것도 모르는데."



은발의 소녀는 눈을 내리깔며, 깊이 몸을 숙인 채 잠시 대답이 없었다. 그 침묵 후, 서서히 입을 연 소녀는 가만히 답했다.



"──이 무례를 용서하소서. ..이 몸은 죄인인 고로, 지금은 감히 귀하께 고할 만큼의 이름이 없사옵니다. '좌'(Class) 또한 마찬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본인은 광전사나 마술사가 아니며, 동시에 그를 제외한 모든 좌가 가능하겠나이다. ..물론 그 중

두 개는 조금, 억지로 맞추는 감이 있으나 나머지 셋에 대해서는 사실이오리다."



처음에는,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는 걸까,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눈 앞의 소녀의 태도는, 모로 보아도 그것은 아니었다. 

정중히 땅바닥에 무릎을 댄 채, 소녀는 가만히 마리온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이 설령 화내는 것이라도, 감내할 듯한 자세였다.



"──그럼 저는, 당신을... 뭐라고 불러야 하나요?"



그 말에, 소녀는 흠칫 놀란 눈치였다. 화내지 않은 것에 대해서일까. 하지만 마리온 역시 그것에 대해서는 그다지 화내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이 서번트가 그녀를 무시해서, 혹은 속이거나 배신하기 위해 숨긴다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았다. 오히려, 묻고 싶다면

왜 그렇게 스스로를 낮추느냐, 정도. 그것을 아는 이상, 처음부터 그런 걸 꼬치꼬치 캐물을 생각 또한 없었다. 분명, 나름의 이유가

있을 테니까. 그리고 아마, 언젠가는 말해주지 않을까란 기대도, 희미하게는 품고 있었고.



"그것은 존귀한 분이여, 귀하께서 바라시는 대로."



그럼 애칭이랄까. 호칭도 정해 두어야 하나. 마리는 곰곰히 생각했다. 잠시 고민하고서는, 무엇인가 생각났다는 듯, 살짝, 아, 하는 소리

와 함께 손가락을 튕겼다.



"...아샤."



──아샤, 라고 부를게요. 마리는 말했다. 영령을 소환하기 전, 이리저리 봐 둔 신화나 전설 관련 책에서 문득 본 것 같은, 소아시아 지역,

옛 종교의 말. 그 의미는 아마 빛, 또는 정의. 대강 그런 것이었을 터다. 은빛 소녀는, 대답 대신 또 한 번 깊이 몸을 숙였다.



"...그리고 또 하나."



몸을 일으켜 세우려던 소녀는 흠칫 동작을 멈추었다.



"당신은 여자, 맞나요? 아무리 봐도 여자..기는 한데, 뭔가 분위기가 묘하달까..중성적..이랄까..."



마리온의 말에, 아샤는 희미하게 쓴웃음을 짓는 기색이었다. 훨씬 온화한 분위기로, 아샤는 천천히 대답했다. 흔한 비유지만, 조용한

마을에 울려퍼지는 종소리마냥, 맑게 그녀의 목소리만이 울렸다.



"판단하시는 대로. 마술의 소양이 없는 이가 보기에는, 머리로는 본인을 계집이라 판단하여도, 아마 '영문을 알 수 없게도 무심코' 본인을

남자라고 생각하게 될 터입니다. 그러한 주술이 걸린 머리끈을, 하고 있기 때문이옵니다."



소녀의 말에 마리 세실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면, '영웅'들은 대부분 남성. 그럼에도 이 소녀와 같이 '여성'이

나온다면, 원래부터 여성으로 알려진 드문 경우가 아니라면 남장이든 뭐든 그런 걸 했겠지. 그녀가 누구인지 알았다면 원전과는 다른

사실에 놀랐겠지만, 그걸 모르는 이상 놀랄 것도 없었다.



"...그럼 아샤, 마지막으로."



"예."



"그..조금만 더 편한 태도로 대해 주면 안 될까요? ..저, 그렇게 지극하게 대해지는 거, 전혀 익숙하지 않아서."



마리의 말에, 아샤는 조금 곤란하다는 듯 머뭇거리는 기색이었다. 잠시 반응이 없던 그녀는 곧,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가볍게

목례했다. 



"그럼,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마스터."



정중하긴 했으나, 그래도 '일반적'인 범위 안에는 얼추 들어갈 정도의 존댓말이었다. 거기에 호칭도 얼굴이 달아오르는 극존칭이 아닌

상당히 무난해진 '마스터'. 마리 세실은 이름으로 부른대도 전혀 상관치 않았고, 오히려 그 쪽이 더 편할 것 같기도 했지만 그것까지

지금 바라는 것은 어쩐지 무리라고 생각했다.



"훨씬 편하네요. 고마워요, 아샤."



".... 마스터."



"....에?"



"그렇다면 저도 감히, 마스터께 부탁 올립니다. 부디, 말을 놓아 주십시오. 마스터께 존대를 들으면, 제가 송구합니다."



"...에. ....그렇...다면야. ....이렇..게 말하면 되..려나?"



마리는 조금 어색했지만, 어떻게든 말을 놓았다. 당연한 걸. 저런 분위기부터 다른 존재를 눈 앞에 두고 편한 듯 잘난 듯 말을 놓고

명령하고 하는 것 따위,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다. 뭐...케이네스 같은 성격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네. 감사합니다, 마스터."



그 이후로 이어진 말은 없었다. 마리 세실리아와 은발의 소녀는 천천히, 인적 드문 곳에 마련되어 있던 회랑을 빠져나왔고, 마리는

곧바로 시계탑으로 향했다. 물론 목적은 브람을 만나 보고하는 것. 마리는 문득 런던의 그 인파 사이로 아샤가 지나가면 어떻게

되지, 란 걱정이 들었지만 기우였는지, 그 회랑을 나서는 순간 아샤는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처음에는 마리도 놀라, 그녀가

다른 곳으로 가 버린 걸까, 라고 당황했지만,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를 듣고서야 그녀가 '영체화'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대영 박물관 안에 깊숙히 숨겨진, 마도의 중심에 들어선 후에야 마리는 아샤가 그녀가 어디로 가는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별 말은 하지 않았다. 굳이 소감을 생각하자면, 시대극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아무것도 묻지 않고 따르는' 유형의 사람이구나,

싶었을 뿐. 동시에, 그녀가 화려한 네온과 수십만의 인파들이 넘쳐흐르는 런던의 거리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조금 궁금해졌지만,

표정조차 볼 수 없으니 무리인 이야기였다.



그렇게 차분히, 발걸음을 옮긴 마리온은, 시계탑 이급, 담당 강사인 브람 소피아리의 방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06/





   "....그렇다면, 그녀가."



혹시 브람도 속아주지 않을까, 란 기대는 역시나 아웃이었는지. 브람은 영체화를 풀고 내려선 아샤를 보는 순간 '그녀'라고 칭함으로서

그녀의 주술에 속지 않았다는 것을 그 입으로 바로 증명해 주었다. 방 안은 다소 어두웠지만, 순백의 소녀는 전혀 시야에 거리낄 것이

없다는 듯, 차분한 표정이었다. 브람이 누구인지 묻지도 않았고 그런 내색을 드러내는 것 또한 없었으며, 그저 가만히, 마리온을 시중들듯

그녀의 세 걸음 뒤에서 서 있을 뿐이었다.



"네. ...그럼 교수님, 이제 저희...는 그, '후유키'라는 곳으로 가면 되나요?"



눈 앞에 내린 소녀의 미모에는, 그 또한 조금 놀랍다는 듯 살짝 눈을 크게 떴지만, 단지 순간의 일이었을 뿐. 마도 명가, 소피아리의 후계자란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는 어느샌가 다시 차분하고, 냉정한 마술사의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그 이지적인 표정이 잠시 마리온을 향했고,

그는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미스 마리 세실. '비행기'는 다른 이름으로 예약해 두었습니다. 준비는 만전. 그곳에서 머물 숙소는 후유키 하얏트로..."



'비행기'란 단어를 내뱉으며, 미양호가 찌푸려지는 것을 마리는 놓치지 않았지만, 그것에 대해 별 말은 없었다. 유서 깊은 집안의 마술사들이

현대 문명을 싫어하는 것은 거의 불문율이었으니까. 



"네."



"...그럼 잠시, 미스 아치볼트. 당신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지만."



그 말의 의미를 이해했던 것인지, 아샤는 가만히 마리온을 쳐다보았다. 고개를 가볍게 끄덕거린 마리를 보고서야, 약간은 마음에 걸린다는

표정으로, 그녀는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그으.. 아마 밖으로 나간 것 같아요. 방 안에서는 보이지 않아요."



마리 세실은 가볍게 말했다. 이제 말씀해주셔도 된다는 신호. 그제서야 브람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그래서, 미스 마리 세실. 그녀의 클래스와 진명은?"



"....엣, 그건. ...."



순간, 마리 세실리아는 망설였다. 적당히, 둘러대면 좋을까? 그럴 수는 없었다. 브람은 그녀를 도운다고 했고, 그렇기에 지금 자신은

여기에 서 있는 것이다. 물론 배신과 모략이 판을 치는 마술사들의 사회지만, 지금 그조차 믿지 않는다면 마리 세실은 완전한 혼자였으니까.

잠시 머뭇거린 후, 마리온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도 듣지 못했습니다."



호오, 브람은 가볍게 소리를 흘렸다. 마리 세실은 간단히, 그 때의 상황을 묘사했고,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 물론 일반적...까지는 아닙니다만, 생각해보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겠군요."



"에, 그런가요?"



"그렇지 않습니까. 생전에 그토록 빛나던 자들이 무에 미련이 남아, 바램이 남아 소원이란 것을 이루기 위해 내려왔다면, 분명 그 이유가

될 만한 것에 후회 따위의 감정이 있는 건 이상하지 않겠지요. 더군다나, "



브람은 가만히 덧붙였다.



"영웅은 불행하다. 대부분에게는 적용되는 말 아닙니까."



──그렇다면, 무엇인가 생전의 실수나 미련에 후회와 죄책감을 가져 말문을 닫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겠군요. 브람은 중얼거렸다.

오히려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마리 세실 쪽이었다. 영웅은 불행하다라니.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었건만, 그녀는

전혀 그런 것을 떠올리지 못했었기에.



"그럼 마리 세실, 그녀의 스테이터스는?"



"에? ...스테이터스...라면..."



"당신의 서번트를 보았을 때, 혹은 타 서번트를 보았을 때. 참전하는 마스터들은 그들의 스테이터스- 능력치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신이 보기에 그녀는 어떠했습니까?"



마리 세실은 생각해냈다. 아샤를 보았을 때, 희미하게 보였던 주변의 희뿌연 무언가를.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지만.



"...그게, 아마도.... 마치 무언가로 문질러 지워놓은 것마냥, 되어 있어서 종국엔 사라져 버려서..."



"....흐음."



브람은 또다시,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는 결정을 내린 듯, 조금은 단호한 목소리로 다시 말을 건넸다.



"부정적인 면을 보자면, 당신이 그녀의 능력을 모르기에 정확하게 알맞은 전략을 수립하기는 힘들다는 것. 긍정적인 면을 보자면 반대로

생각해서, 상대 마스터들도 그녀에 대해서 알 수 없기에 당신들을 상대할 계획을 확정지을 수 없다는 것. 그렇지만 그녀의 인상이랄까,

분위기를 보아하니 스스로가 전략을 짜고, 또 당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면 자신의 강약점 정도는 객관적으로 말해줄 것이라

생각되는군요."



그 점에 대해서는 마리 또한 이론이 없었다. 오히려 스스로를 너무 낮추지 않을까 싶은 걱정이 잠시 들기는 했지만, 이것이 '전쟁'에

직결되는 것이라면 어쩐지 아샤는 마리 이상으로, 차가울 정도로 객관적이지 않을까, 싶은 것이 그녀의 감상이었다.



"...어쩐지 느낌상, 그녀가 캐스터와 버서커가 아니라고 한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되고. 나머지 서번트 중에서도, 삼기사..가 아닐까,

라고 느껴집니다만."



동감이었다. 



"...아무튼, 최소한 그녀가 뒤통수를 칠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이 안심이군요. 쓸데없이 자부심만 강한 부류가 아닌 것 같다는 점도."



"네에."



"...그리고 마리 세실, 그것. 알고 있습니까? 령주의 마지막은...."



"에?"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건 조금 나중에 말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럼, 당장 내일 떠나나요?"



"...네. 아마도."



".....그렇군요. 그럼, 내일은 바쁠 테니, 일찍 돌아가도록 하세요."



"네. 교수님. ...신세 많이 졌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물론입니다. 미스 세실리아. ...당신은 제 첫 번째 제자이며, 또 '거래 상대'기도 하니까요. 너무 그렇게 인사를 반복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 교수님,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아, 마리 세실."



"예?"



"....아니, 무운을 빕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살짝 무릎을 굽혀보인 마리온 세실리아는 브람 누아다레 소피아리의 사무실 문을 닫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터질 것마냥 쿵쾅거리던 가슴이, 묘하게 조용했다.



"....마스터."



차분한 목소리가, 한숨을 폭 내쉰 마리의 귓가에 울렸다. 어느샌가 다시 나타난 백색의 서번트는, 예의 그 정중하면서도 곧은 자세로

마리를 기다렸다는 듯 가만히 서 있었다.



"...방금의 그 분이 누구신지, 제가 감히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아, 소피아리 교수님..이야. 나랑 아마 일이년 안에 인척이 되실 거고, 무엇보다도 나를 가르치시던 선생님."



".....선생님, 입니까."



그 말에, 미묘한 회한이, 애수가 서려 있었다는 것을, 그 때의 마리온 세실리아 아치볼트는 알지 못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기존 기록 보관 장소 카와이루나링 2012.11.20 1876
공지 이 곳은 팀 회의실 입니다. [1] 카와이 루나링 2012.02.20 1157
117 사랑의 보금자리 니트 2013.05.07 22
116 꽁냥꽁냥 [10] 로하《리델》 2013.05.03 4
115 흠냥흠냥 file 카구라 2013.05.01 8
114 임시 [10] file Sigma 2013.04.21 9
» 로하로하로 비밀비밀 [2] 로하《리델》 2013.02.16 39
112 01 로하《리델》 2013.02.08 1
111 얼간이와 식충이 [2] 4/INSURA/2 2013.01.24 1
110 00 로하《리델》 2013.01.13 10
109 검수용-2 린즈링 2013.01.03 3
108 1일차 낮 쿠마 2012.12.31 1
107 1일차 밤... 쿠마 2012.12.31 1
106 1일차 낮.... 쿠마 2012.12.31 1
105 수정본 쿠마 2012.12.31 6
104 2일차 밤. kisone 2012.12.30 1
103 비밀글 Reiarine 2012.12.30 4
102 호이호이 42 2012.12.22 2
101 fkjenfkef 아아아노 2012.12.08 343
100 메데군vs누님 누님 2012.12.08 5
99 흐무흐무 [5] 로하《리델》 2012.12.05 2
98 ㅇㅂㅇ- 모노쿠마 2012.12.02 1

Powered by Xpress Engine / Designed by Sketchbook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