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01

로하《리델》 2013.02.08 01:59 조회 수 : 1






   새벽 공기가 차가웠다. 우아하게 비행기에서 내린 라시아 브리아 슈타펜부르크는, 흠칫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이 라이더를 

소환한 후, 저 영령이 이리도 기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니, 속내를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항상 여유로운 태도로 자신을

부르면서도, 어떠한 감정도 밖에 드러내지 않았던 이가. 비유 그대로 환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에 못내 미심쩍음,

혹은 마음에 걸림을 느끼면서도 라시아는 슬그머니 물었다.



"──라이더. 무언가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음? 아아, 당연하지 않나. 귀여운 나의 소환자(Master)여, 세상에 다시 없을 - 그 어떤 것과도 비할 수 없는 나의

소중한 지보가 이 땅에 있거늘 어찌 기쁘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 그렇군, 그랬어. 그 사랑스러운 아이도 이 땅에

내린 것인가."



". . . 사랑, 스러운. . . "



못내 걸리는 표현이었다. 알 수 없는 의구심과 어둠이 마음 속에서 서서히 자라나지만, 그것을 눈치채거나 신경 쓰는

일 대신, 라시아는 물었다.



"그 말은, 설마 연고가 있는 영령이 현재 이 땅에 있다, 그 의미인가요?"



──그리고는 곧바로, 그 말을 내뱉은 것을 후회했다.



여전히 표정은 변화 없이 수수께끼 같은, 여유로운 미소를 띤 채였다. 하지만 눈이,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쁨과

즐거움, 애정으로 차 있던 붉은 눈동자만이 웃지 않고 라시아를 쏘아 보고 있었다. 온 몸이 긴장으로 굳었다. 내가 실언을

한 건가. 라시아는 자신을 질책했지만, 자신을 쏘아보던 라이더는 곧 피식 웃음을 흘리고서는 다시 평상시의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돌아왔다.



"글쎄.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러한 말이겠구나."



더 이상의 말은, 질문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부드럽지만 확고한 대화의 종언이었다. 말하자면, 그 연고의 상대가 누구인지,

라시아에게는 알려줄 일이 없다는 것. 또한 그것을 이용하여 라시아가 우위를 점하게 할 이유는 없다는 것.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뜻모를 생각뿐인 라이더에게서 살짝 시선을 돌려, 눈을 내리깐 라시아는 가만히 애꿎은 가방을 꽉

쥐었다.





Fate ~ Daybreak Fairytale ~

01 / How I Know You







   "..세이버, 즐거워 보이는군."



"음? 당연하지 않은가, 연주자(Master)여. 그대는 이 아름다운 노래가 들리지 않는 것인가?"



"...나한테는 적어도. 뭐, 자연의 노래라던가 그런 거라면 알 도리가 없지만....그 전에 너도 자연 속에서 살며 그 소리를

듣는 삶은 아니었을 텐데?"



"──아니, 그렇지 않다."



문득 감긴 분위기가 달라진 세이버를 의아하다는 눈초리로 바라본 파비안이었지만, 곧 그녀가 다시 밝은 목소리로 

허면 마스터여, 그대에게는 짐의 노래를 듣는 영광을 주자! 라고 외치자마자 대답이나 변명을 허용하지 않는 어조로

칼 같이, 아니, 사양할게. 라고 대꾸했다.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현대에 와서는 폭군의 대명사라고도 할 수 있을 법한 이름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파비안의 서번트. 세이버의 진명.

처음 그녀의 이름을 들은 파비안의 첫 소감은, 또 이놈의 기원이 저질렀군, 뿐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어지간한 일이 없으면 영웅 - 혹은 아예 어긋나버린 망령들만이 소환된다고 알고 있었는데, 떡하니

나온 것이 네로 황제. 폭군 네로다. 영웅...이라고 보기엔 모로 봐도 무리고, 망령이라 자살한 것에 집착을 품고 있다고

보기에도 그런 것에 미련은 없어 보였다. 무엇보다도, 그 일화로 보아 차라리 전차 경기를 좋아해서 라이더. 혹은 암살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으니 어새신. 이 정도였다면 납득할 선이었건만, 어째서 세이버로 나온 것인지는 아무리 봐도 이해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물었을 때 세이버 - 네로의 대답은 간단했다. 짐이 바랬으니까.



그 말을 떠올리니 다시금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파비안은 살짝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그것뿐. 그는 그 말을

들었을 즈음에도, 어째서 그리스도교인을 그렇게 학살 수준으로 처형했는지 따위는 묻지 않았다. 확실히 그것은 잘못된

행위였지만. 지금 와서 그런 것을 묻는다 해도 의미 없는 일이니까. 거기에 솔직한 감상을 덧붙이자면. 그래.



아무리 봐도 저 성격과 그런 행동들이 연관이 되지 않았다. 덧붙여서 어째서 여자인지도.



"아아, 기왕이면 아름다운 영령들이 많으면 좋겠구나."



"....하아."



──포기하자. 그게 마음이 편하다. 스테이터스 상으로는 흠 잡을 것 하나 없는 우수한 서번트였으니. 사실 그 점만을 보고

필요 없는 대화는 귀찮아서라도, 혹은 효율이 낮아서라도 할 생각이 없던 파비안이었지만. 어쩐지 그녀를 소환한 이후로는

세이버에게 끌려다니는 기분이었다.





*          *          *





   "저기. 일단 부탁이 있는데."



"하명하소서."



"그, 조금만 편한 말투로 해 주면 안 될까? 그으, 내가 불편해서. 나, 그렇게 모셔지면서 산 인생도 아니었고."



히카게는 약간 머쓱해하는 눈초리로 중얼거렸다. 사실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이런 아이에게 그런 극존칭을

들으면 괜히 싱숭생숭해지는 건 자신만의 탓은 아닐 테니까.



"....그럼,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이것보다 더 말을 낮춘 적은 거의 없기에, 제가 송구합니다만..."



아쳐는 약간 어색해하면서도 곧바로 말투를 바꾸었다. 적당히 평범한 존댓말. 다소 딱딱하달까, 절도 있는 어조긴 했지만

그녀의 말에 따르면 편한 - 보통의 소녀와 같은 말투는 해 본 적이 그다지 없어서라고. 히카게는 아쳐의 진명조차 묻지 않

았었지만, 딱히 먼저 캐물을 생각은 없었다. 필요하다면 그녀가 먼저 말해줄 것이고, 또 그래도 된다고 느끼면 히카게가

먼저 묻기도 할 테니까.



"..그러고보니 아쳐는 묘하게 미소년 같은 느낌이네. 신기하다. 분명히 생김새를 잘 따져보면 전혀 남자 아이 같지 않은데."



감기는 분위기 탓이라 그런 것일까? 히카게의 물음에 아쳐는 살짝 미소지으며 대꾸했다.



"아마 머리에 맨 끈 때문일 것입니다. 소년이라고 해도 의심이 가지 않도록, 상대의 감을 흐리는 효과가 있는 물건이니까요."



"엣, 그런 것도 있는 거야? ..마술이란 건 대단하다──"



별로 그렇지도 않습니다, 라며, 소녀는 조금 웃었다. 타박, 타박. 아직까지는 새벽 시간이어도 특히 이른 시간. 수산 시장에라도

가지 않는다면 행인을 별로 볼 것도 없기에-특히나 히카게가 가는 길로는- 아쳐는 가만히 히카게의 한 걸음 뒤에서 걸으며

따라왔다. 본인의 말대로라면 '영체화'란 것을 통해 타인에게 보이지 않게 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히카게는 굳이 바라지 않았다.

어쩐지 아쳐가 뺨에 닿는 차가운 새벽 공기나, 겨울 햇빛 따위를 굉장히 기뻐하면서, 굉장히 좋아하는 듯 보였기 때문에.

단지 그 뿐이었다.



"....하지만 마스터. 부디 자택 근처에서는 영체화를 허락해 주십시오."



"...어? 어째서?"



아쳐는 살짝 곤란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마스터 또한 가족이 - 마술과는 연이 없으신 가족이 계시지 않습니까. 저를 설명하기에는 어려우실 겁니다. 거기다, 비슷한

핑계를 생각해낸다 해도 새벽녘부터 들어온 생전 처음 보는 이국의 계집애, 실례. 소년,으로 판단하실 터이니. 이국의 사람이

들어온다면 환영할 이는 몇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 넌 어떻게 지낼 건데?"



소년의 분위기 속에 숨은 소녀가 살짝 생각하는 듯 하더니 말을 이었다.



"영체화를 해서 지붕 위에서 지내겠습니다."



그 말에 화들짝 놀라며 반대한 것인 히카게였다. 영체화를 하는 건 그렇다쳐도 지붕 위라니. 안 될 말이다. 히카게는 긴

설명 필요 없이, 아까의 도약 한 번으로 아쳐에게 일반 - 인간의 기준을 적용시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그건 그의 생활 상식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아쳐에게는 문제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인식적으로 자신이

불편하다. 지붕 위에서 - 아득한 과거인지 이야기인지의 사람이라도 - 여자 아이가 혼자 앉아 지내겠다는데, 그걸 편안하게

받아들인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안 돼. 그건 난 반대."



"...에? 어째서───"



"별로 아쳐..가 그 정도에 어떻게 된다던가...잘은 모르지만 네 실력을 의심한다던가 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내가 상식적으로

불편하다고. 당연하잖아?"



"....마스터."



돌아온 것은, 조금은 예상 외로. 가타부타를 말하지 않는 단호한 목소리였다. 맑은 소리가, 새벽 골목길에 울렸다. 



"배려해 주시는 것은 감사합니다. 존중해 주시는 마스터를 만난 것 또한 저의 행운. 하지만 마스터에게 저의 가치는, 장기말로

충분합니다."



"──장기말?!"



"...물론 다른 모든 이들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간혹 세상의 왕마냥 오만한 자도 있으며, 혹은 그 이하로 - 도구 이하의 취급도

신경 쓰지 않는 이도 존재하겠습니다만. 적어도 저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것이, 전쟁입니다. 아쳐는 입을 다물었다. 어디까지나 마스터인 자신을 위해, 자신이 뜻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지금 눈

앞의 소녀는 자신을 패로 사용할 것을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히카게로서는 아마 그녀가 누구인지 

알기 전에는 절대로 알 수 없는 일이겠지. 히카게는 아쳐가 거짓말을 한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아이가 거짓말을

하게 된다면 그 상황이 얼마나 위급하거나 피치 못한 것일까, 그리 생각할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모든 것을 말한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 자신이 누구인가,를 제외한 다른 것들도.



하지만, 그건 그녀만을 탓할 수는 없는 일이다. 슬그머니 떠오르는 어두운 기분을, 히카게는 곧바로 지워버렸다. 히카게 자신

또한, 숨기는 것 투성이었으니까. 비록 그녀의 것처럼 중요하거나 무엇인가 대단한 것은 아닐지라도, 그 역시 스스로에 관해서는

거의 대부분을 숨긴 채였으니까. 



그래.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당연한 것이다. 아무리 어떻게 연이 닿고 상성이 맞아 이런 기적과 같은 일에 엮였다한들, 

그래봤자 만난 지 두어 시간 밖에 되지 않은 사이다. 갑자기 흉금을 터놓을 수 있을 리 없어.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히카게는

오히려 한껏 침착해진 - 그리고 묘하게 후련해진 기분으로 차근히 말을 텄다.



"──하지만, 그게 내가 여태까지 살면서 가져 온 상식이야. 갑자기 너를 장기말이라던가로 쓰라고 하는 쪽이 나는 더 익숙하지

않아. 물론 내가 나중에 정말로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될 것 같지는 않지만 어쨌든, 그것에 익숙해진다면 또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게 내게 있어 더 이상하달까, 불편한 거야. 그러니까 그 점에 대해서는, 그냥 내 말에 따라주면 안 될까?"



소녀는 아무래도, 화를 내든 한 수 접어주든 둘 중의 하나의 반응이 돌아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희미하게 깜짝

놀란 듯한 눈동자가, 조금 토끼와 같이 동그래졌다. 그러고보니, 이 애. 표정 변화도 대부분 옅구나. 그런 감상을 가지며

히카게는 부탁한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까딱했다.



"....그렇다면,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니까, 그런 게 아니라니까──"



어지간히도 호의 받는 것. 아니, 이건 호의보다는, 편하게 대하는 것에 익숙치 못한 듯한 소녀였다. 그런 은발의 소녀를 보며

작게 웃음을 흘린 히카게는, 무언가를 떠올린 듯 가볍게 물었다.



"그러고보니 아쳐, 지금 네가 입고 있는 옷이, 네가 생전에 그... 싸울 때...? 입었던 옷이야?"



"..에? 의복...말씀입니까. 싸울 때에도 입었던 옷이긴 했으나...그보다는 좀 더 가벼운 예복에 가깝습니다."



"가벼운 예복? 그럼 나중에는 진짜 전투 복장으로 바꿀 수 있는 거야?"



"말씀대로입니다. ...제 정식 전투 의복은, 아는 이가 본다면 곧바로 제가 누구인지를 알아챌 수 있을 것이기에 - 그리고...

아니. 그렇기에 이 복장으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호, 혹시 정식적인 차림이 아니라 언짢으십니까?"



"음? 아니아니, 그런 게 아니야. 그냥 조금 궁금해서. 그런데 누군가 알아챈다면, 그렇게 큰 문제가 되는 거야?"



"...전시에 일부러 상대에게 주지 않을 수 있는 정보를 줄 이유는 없겠지요."



"....그런가.....아, 참. 그리고 또 하나 질문. 네가 아까 '마스터'가 되면 서번트의 '스테이터스'가 보인다고 했는데, 원래

자신의 서번트는 보이지 않는 거야?"



"...그것은 저와 관련된 어떠한 이유로, 지금 보이시지 않으실 겁니다."



"...어떠한 이유?"



"───부정하고, 있으니까요."



뜻을 모를 소리였지만, 히카게는 아쳐가 더 이상은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리고는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마냥 조금 쾌활한 표정으로 이것저것, 거리의 풍경을 가리키며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은빛의 소녀는, 조금

고마워졌다.







   "...다 왔다."



현관 문 앞. 히카게는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 도대체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뭐라고 설명해야 할아버지 할머니가

납득하실까. 외국에서 온 교환 학생? 아니, 무슨 교환 학생이 사전 연락도 없이 그것도 새벽 다섯 시에 들어오지. 

이건 기각. 으으. 도대체 뭐라고 하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 점장님! 점장님을 조금만... 조금만 사용하자...

윽. 아니지. 할머니 할아버지 입장에서는 그럼 이건 도대체 무슨 민폐지, 딱 그렇게 생각하실 게 뻔하잖아. 직권

남용 급으로. 으으으으으.



"...저어, 마스터. 역시 지붕 위가...."



"그건 무조건 아웃!"



히카게의 반응이 예상치 못할 정도로 빠르고 단호했던 탓인지, 아쳐는 순간 움찔했다. 그런 소녀를 가만히 보던 히카게는

문득, 소녀를 소녀로 보는 것은 자신 뿐일 거란 사실을 깨달았다.



"..저기, 아쳐."



"예?"



"그..마술이 깃든 머리끈인지로 조금 남자 아이 같은 분위기를 내는 것. 모든 사람들에게 통용되는 것 맞지?"



"....마술의 소양이 없는 일반인에게는 완전히. 마술사도 평범한 수준으로는 약간의 위화감 정도. 마스터가 보신 것처럼

소년의 분위기를 가진 계집애, 라고 보시려면 일정 수준 이상의 마술사여야 가능하겠습니다만. ...애당초 임시 방편용으로

만든 끈이니까요."



"그래? 그럼 역시. 그래, 역시...교환 학생이야. 교환 학생이 그래도 제일 좋겠어."



"마스터?!"



아직도 조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의 아쳐를 끌고, 히카게는 망설임 없이 키류 가의 현관문을 열었다. 





*          *          *





   "그래서. 알렌 군이 앞으로 2주간 머무르게 되었다, 그 말이니?"



히카게는 매우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의 아쳐를 팔꿈치로 툭툭 건드리고는,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쳐의 얼굴이

이제 거의 울기 직전까지 갔다는 건, 몰래 잘 기억해 두자. 끝까지 남은 이름 선택지 두 가지. 하나는 아쳐가 생전에

사용했다는 가명이었으나, 너무 여자 이름 같다는 이유로 기각한 히카게가 고른 것이 알렌이라는 이름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계산은 그의 머릿속에서 끝난 일이다.



"그....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염치 불구하고...."



어딜 들어봐도 매우 더듬더듬거리는, 어색한 말이었지만 오히려 외국인 학생이란 설정을 감안한다면 플러스 요소였던

듯, 키류 부부는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처음에 새벽녘에 들어왔을 때 주무시지도 않고 기다리시던

걸 보고는 깜짝 놀랐었지만, 어떻게든 해결이 된 것 같아서 다행이다. 유럽에서 와서 새벽 비행기로 도착하느라 

이 시간에 왔다고 둘러대고, 짐이 없는 것은 따로 국제 택배로 부쳤기에, 후에 도착한다고 적당히 설명했다. 약간의

죄책감은 느끼지만, 현실적인 선에서의 가장 좋은 해결책이니까. 이 어디로 봐도 특이한 옷차림은── 적당히 

전통 의상이라고 설명했다.



빈 방 하나를 금방 정리하고 오겠다며 나간 할머니-히사코와, 부엌에서 따끈한 차를 준비하는 할아버지-케이조를 보곤

어떻게든 된 것 같다며 어깨를 으쓱한 히카게는 흘끗 죄책감에 자살이라도 할 것 같은 얼굴의 아쳐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니. 아쳐, 굳이 그렇게까지 죄책감 가질 필요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끝없이 사죄를 반복하는 소녀를 보고는 한숨을 푹 내쉰 히카게는, 소녀의 입을 

가볍게 막았다. 쉬잇. 아쳐, 이건 '전략상 필요한 것'이었으니까. 어쩔 수 없어. 그렇지? 이렇게 말하면 납득할 줄

알았건만. 소녀는 거짓말은 절대 안 됩니다!고 나서는 일은 없었지만 여전히 죄책감에 몸 둘 바를 몰라하는 표정이었다.

그 즈음, 따끈한 차를 다시 우려내 온 히사코가 찻잔에 물을 따르며 물었고.



"──그러고보니 방은 알렌 군, 히카게의 옆 방을 쓰면 될까?"



"에? 아, 음... 같은 방이어도 상관은 없습니다."



그 말에 히카게는 마시던 물을 뿜을 뻔했다. 거짓말에 이렇게 죄책감 느끼는 애가 어째서 같은 방이어도 상관 없다는 말을?

아니. 아니지. 히카게는 숨을 가다듬었다. 아까의 지붕 위 운운하는 걸 들어보면 아마, 분명히 전시(戰時)니까 내 안전을

최대한 확실히 지켜야 한다, 그런 이유겠지.



하지만 그건 좀 봐 줬으면 좋겠다. 아침에 딱 눈을 떴는데 이런 애가 바로 보이면, 그거. 여러 가지 의미로 나한테 위험하다고.

나한테. 물론 사람 좋은 히사코는 손님에게 그럴 수는 없다며 그새 사이가 좋아졌구나~ 같은 말로 웃어 넘기고는 히카게의 옆

방을 준비하러 올라가버렸다.



"──그러고보니 아쳐."



"예?"



"아까 그... 타라소프...의, 그..금발 여자애도 서번트...인 거야?"



아쳐는 잠깐 골똘히 생각하는 듯 싶더니 희미하게 수긍했다. 약간 석연치 않다는 구석이 있기는 했지만, 일단은 그러하다고

대답하고 있었다.



"움직이는 몸놀림으로 보아, 어새신. 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한 무기와 방식으로 싸우는 세이버나 랜서는 굉장히 드물며,

가장 연상되는 것은 캐스터 혹은 어새신. 그 중에서도 자신을 숨기는 듯한 스킬 - 혹은 다른 무언가의 수단을 갖고 있는 듯

하니, 가장 가까운 것은 어새신이겠지요."



"...자신을 숨기는? 그..네가 스테이..터스? 를 숨기는 것처럼...?"



"──저도 확답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그것이 정확하게 제 것과 같은 것인지는 몰라도 유사한 것이다, 라고는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렇..구나...어새신...암살자, 말이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아쳐. 은발의 소녀는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그나마 어새신의 기색...혹은 그 외모라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 나쁜 일이 아닙니다만. 물론 변장 관련의 스킬이나 

보구가 있다면 조금 곤란하겠지만, 어새신은 일단 마스터에게 있어 가장 위험한 상대니까요. 특히 마스터와 같은 분께는."



"가장 위험...? 마스터를 암살할 수도 있다, 그 말이야..?"



"'수도'라는 정도가 아닙니다. 이례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정보 수집과 마스터 암살은 어새신의 가장 기본적인, 가장 승률이

높은 전법. 클래스가 어새신이라면 전면전을 해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말 그대로, 암살로서 영령의 좌에까지 오른 이들이

살아 있는 인간인 마스터들을 노린다는 것입니다."



"....그거 뭔가 엄청 무섭잖아..... 진짜 자다가 쥐도새도 모르게는 커녕, 나도 모르는 새 어느샌가 내 몸에 딱 칼이 꽂혀 있었다,

이런 게 될 지도 모른다는 거잖아?"



히카게의 비유가 조금 재미있었는지, 아쳐는 가볍게 유리잔을 울리는 듯 웃음을 흘렸다. 살짝 목을 가다듬고는, 실례했다는 듯

목례한 소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것을 막기 위해 제가 존재합니다. 마스터."



하늘이 담긴 푸르른 눈동자로, 소녀는 곧게 히카게의 금안을 응시했다. 제가 존재하는 이상,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마스터가

그렇게 당하시도록 내버려두지는 않겠습니다. 목숨을 걸고. 



그리고 이어진 잠시간의 침묵. 조금 진지해졌달까. 약간 부끄러워진 분위기를 어떻게든 돌려보고자, 히카게는 약간 얼굴을

붉힌 채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렇다면, 나한테 제일 위험한 것은 어새신이라는 거지?"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경우가 없다는 전제하에서입니다만."



"그럼 혹시 다른 클래스들은 어때──?"



"다른 클래스라면... 캐스터겠지요. 현대의 마술사라면 마법의 영역에 달한, 혹은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의 대책을 지닌 이들을 

제외하고는 진심의 캐스터를 버텨낸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혹 서번트와 떨어져 있을 경우, 서번트가 올 때까지의 그 짧은

순간이라도 버티면 상찬에 마땅할 일입니다. 하물며 마술에 관해서는 아직 소양이 없으신 마스터시라면, 더 이상 말 할 것도

없겠지요. 어새신이 암살이라면 캐스터는 일종의 - 함정, 혹은 계략을 짜고 하는 것에 적합한 클래스니까요. 그 다음으로라면..

아마도 아쳐이리라고 생각합니다만, 그것은 아시다시피. 저이기에 염려치 않으셔도 될 듯 합니다."



"그렇구나...그런데 아쳐가 위험하다는 건-?"



"..정확히 말해서는 아쳐는 그 대표일 뿐. 확실하게 말하자면 원거리 공격을 할 수 있는가, 의 여부겠습니다. 저격 따위의 것

말입니다."



".....아."



말을 마친 아쳐는 조심스레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잠깐 그런 아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히카게는 곰곰히 여태까지 들은 서번트

들에 대해 생각했다. 검의 영령, 최우의 서번트 : 세이버. 올라운드 타입의 랜서. 기병의 서번트, 라이더. 암살자의 영령, 어새신.

마술의 극에 달한 캐스터. 광전사 버서커. 아쳐는 자신의 클래스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히카게는 별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쳐는 자신의 서번트. 앞으로 알면 될 일이다. 허나 그것보다도 마음에 걸리는 것은──



"...그래도 미안해. 아쳐."



".....예?"



"그...설명해준 걸 생각해보니 보통 마술사인 마스터들은 여러 가지로 보조도 하고 그러는 것 같은데...난 그런 걸 하나도 해 줄

수 없으니까..."



히카게의 말에 무슨 일이냐는 듯 바라보던 아쳐는 곧 가당치도 않다는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런 말씀 말아주십시오. 서번트를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마술사보다도, 맑고 곧은 분이 마스터인 것이, 제겐 더없는

영광이자 행운입니다."



이번에는 히카게의 얼굴이 달아오를 차례였다. 정말이지 이 서번트는 낯부끄러운 칭찬을, 과분한 말을 너무 아무렇지 않게

해서 이 쪽이 곤란하다. 어떻게 해서든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히카게를, 아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지만.

곧 방을 정리하러 올라갔던 히사코가 내려옴으로서, 히카게는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알렌 군. 방은 마음에 들었니?"



"예. 자당께 폐를 끼치게 되어 송구스럽습니다."



히카게는 재빨리 팔꿈치로 아쳐를 톡톡 쳤다. 자당에 송구스럽다니. 이런 어휘 보통의 외국 학생은 모르는 게 대부분이다. 하지만

히사코가 신경쓴 것은 아쳐의 어휘는 아니었던 듯 싶었다.



"폐라니, 무슨 서운한 말을. 부디 집처럼 생각하고 편히 지내도록 해요. 그리고 나는 히카게의 어머니는 아니란다. 히카게는

내 손주니까요."



그 말을 들은 아쳐는 순식간에 얼굴이 창백해지며 깊이 허리를 숙였다.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죄송합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정말이지 요즘 중학생들이 좀 보고 반만 배워 주었으면, 이라고 바랄 만큼 - 아니, 조금은 과할 정도로 사과를 반복하는 

아쳐를 보고 히카게는 가볍게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후후. 예의바르기도 하지. 그렇지만 너무 그렇게 미안해하면 오히려 내가 곤란해져요. 그러니까 그건 그만하고. 이제 슬슬

아침 식사 시간이니까. 히카게, 미안하지만 가서 아이들을 깨워주련? 그리고 알렌 군은 서양식이 편한가요, 아니면 일식도

괜찮은가요?"



"..엣? 저...저는 어느 쪽이라도 괜찮습니다만....."



당황해하는 아쳐를 보며 귀엽기도 하지-라며 웃은 히사코는 음식을 준비한다며 부엌으로 들어섰고, 케이조도 그 뒤를 따랐다.

아쳐는 다소 어찌할 바를 모른달까, 속도를 따라갈 수 없는 기분이었지만. 이런 소란스러움이, 싫지 않았다.



"....바보 같은가, 나는. ...."



동생들을 데리러 간 히카게도, 부엌으로 들어간 노부부도 들릴 리 없는 작은 목소리는, 여태까지 그녀가 히카게에게 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아련하고도, 무언가 서글픈, 그런 소리였다.





*          *          *





   식사 시간은 소란스러웠다. 히카게가 그리도 예의 바르게, 침착하게 굴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데리고 내려왔건만. 나기는 

그렇다쳐도 쌍둥이는 아니나다를까, 아쳐에게 온갖 질문과 시선을 식사 내내 퍼부었다. 어디서 왔어요, 몇 살이에요, 

누나인가요 형인가요 - 이 부분에서 히카게는 아이의 직관은 무섭다는 것을 깨달았다 - 부터 시작해서 온갖 사소한 것까지.

덕분에 식사 내내 아쳐는 웃지도 못하고, 속내 그대로 울 것 같은 표정도 감히 짓지 못하고 최대한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서

또 수상해 보이지 않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 했다.



그것과는 별개로, 매우 능숙할 뿐 아니라 정확하게, 우아하게 젓가락질을 하는 모습을 본 키류 부부가 감탄사를 흘린 것.

어쩐지 아쳐 자신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것 같지만. 키류 히카게는 그저 말없이 애도만 할 뿐이었다.



"...미안, 아쳐. 많이 시끄러웠지?"



깔끔하게 정돈 된 방은 가장 기본적인 가구 몇 개를 제하면 아무것도 없었지만, 햇볕이 가득 찬 덕분일까. 텅 비었다는

느낌은 결코 들지 않았다. 햇살 가득 드는 창가에 곧게 서 있던 소녀는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마스터. 저는 오히려 이러한 분위기를, 제법 좋아합니다. ...라기보다는, 지금은 그립다,는 표현이 더 맞겠습니다만."



아쳐는 빙그레 웃었다. ..정말이지, 심장에 나쁘다. 



"그런데 아쳐. 어째서 나는 그- 머리끈?에 그렇게 속지 않고 잘 볼 수 있었던 거야?"



"...엣. 그거야 물론, 마스터의 자질이 - 마술에 대한 의식적인 소양 없이도 그 정도가 된다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만. ..혹은,

마스터는 마스터시기에 그런 자질구레한 것은 통하지 않았을 가능성 또한 있습니다."



"...그렇구나. 뭐, 그건 그렇다치고. 아쳐, 그럼 이제 옷 사러 나가야지."



".....옷...?"



"그 옷을 내내 입고 지낼 수는 없잖아. 그렇지?"



"하지만 저는 금전이..."



"아아, 괜찮아. 그 정도는 내가 할 수 있어. 으음. 역시 좋은 브랜드는 못 가겠지만...."



"아닙니다..! 저 때문에 마스터가 그렇게 번거롭게..그것도 직접 버신 돈을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쳐-."



히카게의 또박또박한, 대답 유무를 말하게 하지 않는 부름에 아쳐는 즉시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하기로 약속한 적은 없었지만,

일종의 암묵적인 분위기. 별다른 수가 없었다. 단 대여섯 시간에 지나지 않는 동안이었지만, 키류 히카게는 적어도 이 서번트가

지극히 욕심이 없고, 전투에 관련된 것 말고는 도무지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지 않고, 욕구에 대해서는 담백하다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자신이 정말로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은 조금 강하게 말해야 한다는 것까지도.



"차라리 마스터가 안 입으시는 옷..버릴 옷들이라도 주시는 것이...." 



다소 풀이 죽은 목소리로 우물쭈물거리는 소녀에게, 히카게는 조금 곤란하다는 듯 한숨을 푹 쉬었다. 자신도 딱히 그런

욕심이 많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이 정도는 아니다. 



"─아쳐. 설마 지금 돈을 쓰는 문제에서, 나를 동정하는 거야?"



은발의 소녀는 화들짝 놀라며 극구 부인한다. 예상대로다. 그럼 히카게는 이제, 계획된 그대로의 말을 뱉었다.



"그게 아니라면, 빨리 가자."



──하지만 생각해보니. 그 옷인 채로 토요일 아침에 시내에 나가는 것도 조금 곤란하기는 하겠네. 아니. 매우 곤란할

것이다. 전통 의복이라고 둘러대기는 했지만, 그건 키류 부부가 요즘 지식이나 그런 것에 무딘 나이대라 가능했던 것이고.

틀림없이 이 상태로는 나가는 순간 유튜브 직행 소재다. 그렇다고 자신의 옷을 한 벌 빌려주기에는 키 차이가 조금 난다.

머리 하나 이상 - 이라고 할 정도는 아닌데. .. 자신의 키가 177인 것을 감안하고 보면, 아쳐는 대강 165...정도일까.



"하아. 역시 그 수 밖에 없나."



히카게는 무엇인가 결심을 내린 듯, 조금 거칠게 옷장 문을 열었다. 아쳐는 멍하니, 자신이라면 영체화를 하면 될 일-

이라고 생각했지만. 자신의 마스터가 자신을 패, 혹은 사역마보다는 인간으로 대하고 싶어하고, 그걸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임을 이미 깨닫고 있었기에 더 이상의 말은 할 수 없었다.





*          *          *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처음에 본 것은 마스터. 그대 자신이 아니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그대에게 다른 누군가의 그림자를 찾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대가 마지막 순간에 바란 것이, 제가 끝까지 하고 싶었다 바랬던 것임을. 


   단지 그 뿐인 것으로 . 이렇게 모든 것을 숨긴 채 서 있음을 .


   그대는 너무 무릅니다. 첫 순간 때부터 그러했었습니다. 

   그대는 너무 곧습니다. 너무 곧은 나무는 부러지기 마련.

   그대는 너무 선합니다. 어지러운 사바를 살아가는 자면서도.


   후회할 일이 많을 것입니다. 비록 모든 이가 본디 선하다고 믿는 저도,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괴로울 일이 많을 것입니다. 살아가는 것이 힘들어서, 너무 힘들어서 그만 지쳐 쓰러지고 싶은 날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것 아십니까──?


   나의 존중받아야 할 이. 그렇기에 그대에게, 그대에게서 제가 『빛』을 보았으니까요.


   감히 여기서. 진실을 고합니다. 빛을 가진 이. 그대는 분명 ── 그 꿈을 잡으리라고. 가장 소중한 것을 잡으리라고.



   그대에게 축복 있기를. 여기서 감히 기원하나이다.





*          *          *





   카자마츠리의 번화가는 제법 인파가 가득하다. 아무렴 도쿄의 번화가에는 조금 못 미칠지언정, 주말에는 사람에 쓸려

다닌다는 표현도 과하지 않을 정도니까. 하지만 지금만큼은 그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한 군데를 향해 있었다. 물론

약속된 클리셰처럼, 그 시선을 받는 본인은 눈치조차 채지 못한 것 같지만.



"...야아. 이건 그야말로 상상 이상인데.... 무슨 모세가 바다 가르는 걸 보는 기분이야."



사람이 옷발을 받는 게 아니라 옷이 사람발을 받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 키류 히카게는 약간은 얼떨떨한 듯한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타인이 보기에는 그도 훌륭한 그 말의 예시 중 하나였지만.



보기 드물 정도로 꺠끗한 은발을 묶어, 하나로 길게 늘어뜨린 중성적인 분위기 - 성별을 단정짓기 다소 어려운 푸른 눈의

외국인과, 마찬가지로 드물 정도로 단정한 외모를 한, 모로 봐도 보통 일본인으로는 보이지 않는 혼혈의 소년. 녹빛을 

띄는 금색 눈의 소년이 입은 평범한 차림은 그렇다쳐도, 은발 쪽이 입은 옷, 무제의 하얀 셔츠에 헐렁한 저지 바지. 붉은

목도리는 정말로 옷이 사람을 잘 만났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복장이었다. 그럼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몰래몰래 핸드폰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대는 것은 명화나 옛 영화들에서나 볼 법한 인물들이 거리를 나다니는 것 같다고 느꼈기 때문이겠지.



『마스터. 여기서는 어디로 가면 됩니까?』



유석에 마스터란 호칭을 타인이 들으면 조금 곤란할 것이라고는 생각했는지, 아쳐는 가만히 히카게의 머릿속으로 말을 전했다.

아까 처음에는 이것에도 깜짝 놀랐었지. 살짝 미소를 지은 히카게는 가만히 오른쪽으로 가자,고 대답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머릿속에서.



"...음....?"



"...어,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저건 무엇입니까?"



아쳐가 가리킨 곳 - 거리의 구석에 있던 것은 작은 지갑. 분명히 지갑이 맞다. 조금 당황한 히카게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한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이건 어쩔 수 없나. 히카게는 링크를 통해, 아쳐에게 가볍게 말을 걸었다.



아무래도, 다른 곳에 먼저 들러야겠다고.





*          *          *





   이미 해는 기울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날 하루동안 키류 히카게는 아쳐에 대한 새로운 사실 하나를 알아냈다. 이 은발의 소녀,

지독히도 겸손하고 지나칠 정도로 욕심이 없는 소녀는, 정말로 행운의 여신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을. 



주워서 경찰서에 가져다 준 지갑의 주인이 알고 보니 엄청난 부자여서, 히카게가 극구 사양하는데도 몇 달 아르바이트를 해야

겨우 벌 락 말락한 액수의 사례비를 지불하고. 그 이후에 신기해 하는 듯 싶어 한 장 사준 복권은 보란 듯이 일등 당첨. 방문한

옷가게에서는 특별 이벤트로 얼마 이상 구매한 고객에게 경품 추첨 행사를 진행하고 있었고, 거기선 정말이지 갈 일도 없을

것 같지만 온천 여행 당첨. 그 후 들어간 음식점은 일만 번째 고객이라나 뭐라나, 하는 이유로 전 메뉴 무료 쿠폰 증정.

히카게와는 연이 없을 것 같던 모든 일들이 줄줄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역시 겸손하고 착하면 하늘이 도와주는 건가...."



약간은 멍해진 기분으로 중얼거리자, 그것을 또 놓치지 않았는지 고개를 갸웃한 아쳐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한다. 흘끗

본 소녀의 옷차림은 새 옷일지언정 디자인은 자신이 빌려 주었던 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저지. 그런 옷조차도 맵시 있게 -

흡사 명품 브랜드의 모델마냥 소화하고 있는 것은 감탄스러웠지만 그래도 조금 아쉬운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기왕이면

좀 더 예쁜 옷이 좋았을텐데.



"──마스터?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혹시 아까 드셨던 '규...규...동...?' 이란 것 때문에 속이 불편하신 겁니까? 자못 걱정된다는 듯 아쳐가 묻는다. 확실히 아쳐는

차 한 잔만 홀짝이고, 그 앞에서 자신 혼자만 먹기가 썩 편안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말처럼 어디가 안 좋은 것은 아니었기에,

히카게는 또다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 그냥. 아쳐 덕분에 뭔가 오늘 하루는 내내 운이 좋구나-해서."



"운..입니까...?"



아쳐는 작게 중얼거리고선 입을 다물었다. 복숭앗빛 입매가 살짝 오므라드는 게 퍽 사랑스러웠지만, 소녀는 그 화제로 계속

말을 잇는 대신 다른 말을 받았다.



"하지만 온천 여행, 이란 것은 제법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다행?"



"제가 이해한 것이 맞다면 이 곳과는 이 나라 안에서일지언정 정 반대인, 북쪽 지방으로 여행을 갈 수 있다는 것이라고

판단합니다만."



"응, 맞아. 홋카이도 눈 축제 겸 온천 여행, 이라고 했으니까. 거기다 최대 6인이라는 초 파격적인 인원수였고."



"그렇다면 마스터의 조부모님과 매제분들께 그것을 드리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할머니 할아버지랑 동생들에게..?"



"예."



"설마 안전 문제로 그런 거야..? 하지만 모두 다 일반인인 걸."



서번트는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마치, 말하고 싶지 않은 사실을 고해야 한다는 듯. 조금 내키지 않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렇기에 더욱, 위험한 것이라고.



"──어째서..?"



"...마스터. 제가 아까 서번트의 무구. 그러니까, 진정한 무기는 '보구'라고 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응."



"보구에는 종류가 있습니다. 눈 앞의 상대를 맡는 대인. 적군을 상대하는 대군. 일성을 무너뜨린다는 대성. 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다는 대국. 심지어는 차원 - 세계를 가르는 대계. ...그리고 많은 서번트. 특히 전쟁에서 그 위업을 달성한 영웅들의 경우,

대군 이상의 보구를 들고 있다는 것은 전혀 이상할 일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군, 성, 심지어 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는, 또

그리했던 무구들이 이 도시에서 화려하게 쏘아진다는 것입니다."



히카게의 낯빛이 다소 창백해졌다. 목소리가 다소 커졌다.



"뭐야..그런 것. 그래도 괜찮은 거야? 민간인이 희생되면 어떻게 하는데?! 아까 분명히 관리자가 있다고 하지 않았어?"



"네. 제가 성배로부터 받은 관련의 지식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누구인지 모를지언정 제3자의 '감독역'이라는 자가 있을 겁니다.

허나, 동시에...그가 감독하는 것은 희생되는 민간인이 아닙니다."



"....그럼....그건 대체....."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성배라는 것. 또한 다른 참가자들이 일반적인 마술사라면 그들이 중시하는 것은 시민의 죽음이 아닌."



아쳐의 눈에 슬그머니 혐오스럽다는 듯한 눈빛이 지나갔다. 동시에, 이유 모를 죄책감 같은 것도.



"그들의 길 - 마도의 은닉입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기존 기록 보관 장소 카와이루나링 2012.11.20 1876
공지 이 곳은 팀 회의실 입니다. [1] 카와이 루나링 2012.02.20 1157
117 사랑의 보금자리 니트 2013.05.07 22
116 꽁냥꽁냥 [10] 로하《리델》 2013.05.03 4
115 흠냥흠냥 file 카구라 2013.05.01 8
114 임시 [10] file Sigma 2013.04.21 9
113 로하로하로 비밀비밀 [2] 로하《리델》 2013.02.16 39
» 01 로하《리델》 2013.02.08 1
111 얼간이와 식충이 [2] 4/INSURA/2 2013.01.24 1
110 00 로하《리델》 2013.01.13 10
109 검수용-2 린즈링 2013.01.03 3
108 1일차 낮 쿠마 2012.12.31 1
107 1일차 밤... 쿠마 2012.12.31 1
106 1일차 낮.... 쿠마 2012.12.31 1
105 수정본 쿠마 2012.12.31 6
104 2일차 밤. kisone 2012.12.30 1
103 비밀글 Reiarine 2012.12.30 4
102 호이호이 42 2012.12.22 2
101 fkjenfkef 아아아노 2012.12.08 343
100 메데군vs누님 누님 2012.12.08 5
99 흐무흐무 [5] 로하《리델》 2012.12.05 2
98 ㅇㅂㅇ- 모노쿠마 2012.12.02 1

Powered by Xpress Engine / Designed by Sketchbook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