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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하《리델》 2013.01.13 16:27 조회 수 : 10









                                                             마스터

"───령주를 걸고 명한다. 나는 너의 주인. 너의 동료. 너의 신하. 그렇기에 나는 바란다. 네가────"



"...사실, 모르겠어요. 어째서, 무얼 하면 좋을까. 알 수가 없어요...."



"헤헤. 맛이 어때요?"



"──부정은, 하지 않습니다. 저는 최악의 죄를 지었다고, 그리 믿고 있습니다."             



"괜찮아. 그럴 자격은 충분해. 그러니까, 행복해져."



"──싫다. 싫다. 싫다. 싫다. 네놈 같은 것들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흐응. 그것 또한 유흥 아니겠는가. 한 번 보자꾸나, 사랑스럽고도 가련한 아이야."



"후회를 하며, 동시에 후회하지 않다...라, 그게 어째서 잘못되었다는 말이지?"          



"....그렇다면, 나는....───"




           귀하     본인       마스터
"──하여. 묻습니다. 당신이 저의 『존중받을 자』입니까."










Fate ~ Daydream Fairytale ~

00. Prologue






     런던. 한 때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중심이었으며, 여전히 그 위용이 낮다고는 할 수 없는 대도시. 또한, 일반인들은 결코 모를

마도의 중심지. 그리고 대영 박물관 아래 깊숙한 곳, 관광객들도, 박물관의 직원들도 존재조차 모를 곳에서 한 무리의 소년들은 

쑥덕거리고 있었다. 60년 전에나 썼을 법한 낡은 전화기를 중심으로 모여앉아.



"──어떻게 해...이거 뭐야..... 우리... 정말로 성공한 거야?"



"오오, 그런 것 같은데?"



"이거, 교수님들께 알려드려야 하는 것 아니야...? 우리 설마 퇴학은 아니겠지."



"설마. 나라면 오히려 칭찬해 주겠다...!"



어쩔 줄 몰라하는 듯 보이면서도, 묘하게 뿌듯해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들. 긴장하면서도 무언가 자신감 가득 찬 목소리. 결론을 냈는지,

소년 중 두 명이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몇 시간 후. 시계탑은 발칵 뒤집혔다.





*          *          *





   성배(聖杯). 예수 그리스도가 최후의 만찬에서 사용했다고 하는 잔, 혹은 그의 피를 받았다고 하는 잔. 그리고 마술사들에게는,

비원을 이루는 절대의 원망기. 본디라면 그것의 존재는 마술사라면 누구나 들어는 보았을지언정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독일의

마도 명가, 아인츠베른 뿐이었을 터다. 하지만 어떻게든 다른 이들은 그것을 따라잡고 싶어했고, 비원을 바랬고. 그 결과 수많은

레플리카가 탄생하게 되었지만, 그것들은 원망기라고 하기조차 어려운 수많은 문제들을 지니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 

시계탑 강령과의 학생들 중 일부가 726번째 성배를 모방하는 것에 성공했다고 했을 때만해도, 교수진들은 다소 놀랍다는 

반응이면서도 그 역시 무언가 중대한 에러가 있는 많은 실패작의 시도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형식상으로나마 확인을 위해 

물었던 아인츠베른에서, 진짜와 9할 이상 일치──아니. 거의 동일하다고 볼 수 있을 정도다, 라는 답변을 듣기 전까지는.



그 사실과 함께, 약속이나 한 듯 마키리, 토오사카, 아인츠베른에서는 항의가 빗발치듯 쏟아져 들어왔고 마술사들 사이에서도 

다른 유사 성배의 등장 시와는 차원이 다른 반응이 돌아왔다. 강령과의 담당 교수인 로드 엘멜로이 2세는 책임지고 사태를 해결하라는

내부의 요구에 따라 온갖 욕설을 내뱉으면서도 여태까지 한 번도 한 적 없었던 제자의 인맥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결국 협상에

성공했지만. 세 가문이 복제된 성배를 파괴하지 않는 대신, 다시 한 번 신화 속의 싸움을 일으키는 대신 조건으로 요구한 것은

강령과의 소년들이 만들어낸 성배의 술식에 대한 절대적인 함구, 그리고 '대가도 바라지 않지만 구원도 하지 않는 절대의 방관자적 입장'.

후자의 것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오히려 좋지 않은가, 라고 할 수도 있을 법하건만. 1%의 차이라도 어떠한 결과를 불러일으킬지

완벽한 미지수인 상황에서는 결코 좋다고만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허나 그렇게라도 세 가문과 합의를 본 시계탑 측은 그것에 대해 정식적으로 공표했으며, 세간의 이목은 극동의 도시 카자마츠리(風祭)

시로 향해졌다. 오리지널의 726번째 성배가 존재했던 후유키(冬木) 시와 비교했을 때, 그 영맥의 질은 미묘하게 떨어지는 장소였으나 그

외의 조건은 거의 완벽하게 일치하는 도시. 동아시아 끝의 국가, 일본의 남쪽 섬에 위치한 제법 규모가 큰 항구 도시로, 외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며 오래 전부터 교역이 있었다는 점까지.



"──이상의 이야기는, 너도 알고 있겠지. 라시아."



"네. 숙부님."



백야의 태양마냥 흐린 금발을 늘어뜨린 여성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리게 보면 소녀, 조금 다르게 보면 여성에 가까운 미인은,

살짝 내리깐 눈으로 표정을 숨길 뿐이었다. 라시아 브리아 무지크 슈타펜부르크. 독일과 헝가리에 걸쳐 몇 세기를 내려온 명문의 아가씨. 

그녀는 숙부──슈타펜부르크의 현 당주이자 공식적인 자신의 양부가 이러한 말을 꺼내는 저의를 곧바로 이해했다. 



"숙부님. 아니, 당주께서는 제가 참전...하기를 바라시는 건가요."



이해가 빠르다는 듯, 그녀의 말에 감탄이라도 하는 얼굴로 중년의 남성은 큰 목소리로 수긍했다. 아아, 역시 그랬구나. 이미 조금 전,

말을 듣던 순간부터 확신하던 일이지만 직접 듣는 것은 느낌이 다르다.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고 선언한 것과 마찬가지니까.

라시아는 살짝 손끝에 힘을 주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거부할 수 없는 일이다. 선택지 따위는 있을 리 없어. 



"음? 조금 긴장한 것 같구나. 당연한 일이겠지만.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어요. 너는 긍지 높은 우리들 슈타펜부르크에서도 유례

없었던 재능. 네가 해내지 못할 리 없을 터다. 아무렴, 그렇고말고. 그리고 우리 집안의 명예를 드높일 미래가 눈 앞에 선하구나.

그래, 그 다음 일은 다음에 마저 하고. 아무튼 그런 것으로 알고, 오늘은 들어가 쉬거라. 출발은 열흘 후다. 사용인들은 네가 직접

몇 명 고르고, 성유물도 네게 어울리는 훌륭한 영웅의 것으로 그 때까지 준비해 두겠다."



".....네."



역시나 끝까지 일방적인 명령. 아직도 가문의 영광이라는 것과 권력 따위에 저리도 집착할 것이 남아 있었단 말인가. 라시아는 꼬옥

쥐었던 손의 힘을 살며시 풀었다. 식은땀이 찼는지, 끈적한 느낌이 조금 불쾌했다. 잘 해낼 수 있을까. 날이 갈수록 높아지는 기대를,

자신은 잘 해낼 수 있을까. 몰락해가는 이 집을, 빛바랜 영광만을 뒤쫓는 이 집을, 저 집착을. 과연 자신이 이루어줄 수 있을까. 라시아

브리아 슈타펜부르크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며칠 뒤, 이미 한 물 간지 오래인 줄 알았던 가문에서 나온 몇 세기만의 수재, 미스 라시아 슈타펜부르크가 『또다른 공식의

성배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극동의 섬나라로 떠났다는 소식이 시계탑을 한가득 채웠다. 그렇다해도 이미 한계가 가까운 집안으로서

뛰어난 성유물을 구할 확률이 높지 않다는 것은 대강 예상할 수 있는 사실이었기에, 그녀가 끝까지 도도한 체 떠날 수 있었던 

배후로는 그녀의 담당 교수인 광석과의 스클로도프스키 교수가 자신의 파벌을 위해 뒤를 밀어 주었다는 말부터 좀 더 깊고 어두운 쪽의 

이야기까지, 멋대로의 추측과 호기심, 매도, 온갖 상상이 꽃을 피웠으며, 그렇게 가득 떠오른 분위기에 젖어 황급히 전화를 거는 소년이 

여기 또 하나.



Pronto(여보세요)?



"Hello? 파비안! 파비안! 소식 들었어?"



『...뚜....뚜......뚜.....』



"어, 어? 어어?! 파비안? 파비안?! 끊어어어?! 끊은 거야?!"



제이미 왓킨스는 대꾸나 인사는커녕 무심하게 전화를 끊어버린 친구에 대해 신나게 궁시렁대며 다시금 휴대폰의 숫자판을 눌러댔다.

명가, 혹은 제이미처럼 10대 가량 내려온 가문 출신의 마술사들은 대부분 무엇인지도 모를 '스마트폰'이란 것을 그렇게 익숙하게 다루는 

것은 결코 그가 괴짜여서는 아니다. 괴짜라면, 오히려 제이미보다는──



『...왜.』



"아우, 파비안. 사람 말 좀 들어!"



『들었으니 끊는다.』



"아오, 잠깐만!"



『무슨 중요한 용건이라도 있어?』



 "초 대단한 일이라고! 물론 알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파비안 너는 어차피 저택 구석에 박혀서 나오지도 않잖아? 그런 Geek 친구를

위해 내가 직접 말씀해주시겠다, 이 말이야!"



『..하아. 그래서. 뭐. 강령과가 복제했다던 성배의 건?』



"..어? 어어...? 아, 알고 있었어? 젠장, 분명히 모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카스틸리에는 보잘 것 없이 문드러졌어도 데스테는 그렇지 않으니까. 그런데 뭐, 나가 볼 생각이야? 아니면, 네 집안 노인네들이

너더러 나가보라고 하던?』



"푸하하하! 우리 집 할아범들이 그럴 리 없잖아! 내 잠재력을 알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물론 나는 도전해 볼 생각도 의욕도

만만이지만! 그런데 너는 그럴 생각 없어? 우리 둘이라면 일단 서로 동맹을 맺고 함께 계략을 짜고, 일단 나는 세이...."



『아, 그래. 알겠어. 자칭 수재. 그럼.』



"어, 어어? 파비안?! 파비안?!?!"



새하얀 아이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통화의 종료를 알리는 신호음 뿐. 정말이지, 어쩔 수 없을 정도로 특이한 녀석이다. 그럼에도

나쁜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제대로 알고 있는 제이미 왓킨스는, 지금쯤 이탈리아 북부 어딘가의 저택에 틀어박혀있을 자신의

친구를─물론 그 쪽에서는 그저 지인 정도로만 생각할 가능성이 농후했지만─ 떠올리며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리고, 싸늘할 정도로 전화를 단칼에 끊어버린 소년, 파비안 미켈레 카스틸리에 데스테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휴대폰을 소파 한

구석에 던져버리고는 그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마구잡이로 뻗친 잿빛 머리카락에 아슬아슬하게 코 끝에 걸친 뿔테 안경. 어지간한

일로는 햇볕 아래 나가지 않아 다소 창백할 정도의 인상을 주는 소년, 파비안은 여전히 무뚝뚝한 무표정인 채 차디찬 물을 한 모금

가득 들이켰다.



          그대여 멈추어라

"───Siste, Viator."



삐걱거리는 소리를 울리며 방 안을 쪼르르 달려다니는 생쥐에게 가볍게 마술을 걸어보지만, 역시나 예상대로.



"...더 빨라졌군."



모터라도 단 것 마냥 순식간에 쏘다니는 생쥐를 보곤 다시 한 번 한숨을 푹 내쉰다. 그래, 긍정적으로 자신이 못 움직이게 되지 

않은 게 어디인가. 애당초, 기대 따위는 하지 않는다. 짜증나기는 매한가지지만, 생활 속에서 마술을 사용하는 마술사만

존재하리란 법은 없고, 실제로 마술은 연구의 길로만 걷는 이들도 상당수. 귀찮다는 듯 머리칼을 쓸어올린 파비안은,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휘어진 장대마냥 비틀거리면서도 민첩하게 일어선 마른 소년은, 코트 하나만을 걸쳐 입고는 가볍게 집을

나섰다. 



"...음? 에고, 도련님.  어딜 가시나요?"



외가-데스테의 저택이 아닌 카스틸리에의 저택이니만큼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 쓰는 사용인들이 있을 리 없고,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묻는 것은 파비안이 아주 어릴 적부터 그를 기르다시피 한 노부인. 자주 까먹는 습관이 있지만, 아마도 부모님 이상으로

자신을 챙기는 유일한 이라는 걸 알고 있는 소년은 귀찮다는 듯한 얼굴로, 하지만 희미하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로마 좀 다녀올게."





*          *          *





   "──키류 군, 키류 군."



"음..? 카스가 양. 무슨 일이야?"



"타라소프 선생님이 찾으셔. 키류 군의 러시아 어 과제물에 대해 뭔가 하실 말씀이 있으신 것 같던데?"



"아, 알겠어. 고마워."



세이소(星奏) 학원. 카자마츠리 시에 위치한, 근방 최고의 명문이라 불리는 곳으로, 중등부와 고등부의 에스컬레이터식 학원. 덧붙여 편입

시험은 센터 시험 레벨 이상이라는 소문이 있지만, 그것에 성공한 극소수의 본인들이 언급조차 하지 않으므로 알 수 없는 일이다. 교육의

목표는 올마이티를 기본으로 특기 분야를 한 가지 이상씩 기르는 것. 그것이 타고난 재능이든, 노력의 결과든, 어느 쪽이든 성과만

낸다면 지원은 아낌없이 해 주겠다는 이사회의 방침 하에 따라 학생들은 근방 현에서 제일 가는 시설, 또 제일 예쁘다는 교복 따위를

누리며 학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특히, 사립 학교에 다닐 만큼 가정이 여유롭지 못하지만 성과가 훌륭한 학생들을 대상으로는 파격적일 

정도의 장학금을 지원하는 제도가 있었고,  키류 히카게(桐生日影) 또한 그 소수 중 한 명이었다.



"안녕하세요, 타라소프 선생님.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아아. 키류 군. 그래. 자네가 지난 주에 제출한 구소련 시대의 예술에 대한 페이퍼 건으로 할 말이 있어서 불렀네. 아, 흠을 잡거나 야단

을 치기 위해 부른 것은 아니니 걱정 말도록. 잠깐 앉게나."



"──아,네."



아무렇게나 기른, 흑색에 가까운 짙푸른 색의 머리칼 끝에 창가의 햇살이 내려앉는다. 조용히, 곧은 자세로 강사의 말을 경청하던

키류 히카게는 선생이 말을 마치자 공손하게 대답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문득 시야에 들어오는 건, 그의 책상 한 구석에 놓인 작은

액자. 열 서너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예쁘장한 금발 소녀의 사진이었다. 히카게의 시선을 눈치챈 듯, 타라소프는 아무렇지 않게

중얼거렸다.



"딸아이라네."



역시,라고 할 것도 없었다. 눈 앞의 교사와 사진 속 소녀는 머리색도, 어쩐지 드는 느낌도 비슷했으니까. 그렇군요, 라고

싱긋 웃으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 소년은 곧 공손하게 인사를 건네곤 교무실 밖으로 나갔다. 아침 햇살이 내리쬐는 평온한

날이었다. 



교실로 돌아와서는, 무슨 일이었냐고 묻는 친구들에게 숙제의 피드백이었다고 적당히 대답한다. 수업에는 성실하게 임하고, 체육

시간의 운동 경기도 집중. 교우 관계와 사람들의 평가도 극히 좋은 편이며, 부활동은 본의는 아니지만 귀가부. 온전한 동양인의 것으로는 

결코 보이지 않는 수려한 외모가 조금 눈에 띄는 편이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주변에서 바라보는 키류 히카게는 장래가 유망한

평범한 소년. 단지 그뿐이었다.



"다녀왔습니다───"



"앗, 앗, 히카게 형이다! 혀엉, 나루미가 내 쿠마 군 가져가버렸어!"



"나, 난 아냐, 형! 나기가 시킨 거야!"



어디에라도 있을 것 같은 평범한 주택의 문을 열고 들어오자,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어린 아이들 특유의 따끈한 온기. 물론 몸집

자체는 한 번에 안아올릴 수 있을 정도로 작을지라도, 마루 끝에서부터 전력으로 달려오는 아이를 정통으로 받은 히카게가 옆으로

가볍게 휘청일 정도의 충격이었다. 



"나기사. 나루미. 나기. 할머니 할아버지 말씀 잘 듣고 있었어? 그런데 쿠마 군을 가져가버렸다니, 나기. 정말이야?"



새하얀 토끼 인형을 안은 소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도리도리 저을 뿐이다. 거기에 흠칫 놀라는 다른 소년. 히카게는 금빛 눈동자를

몇 번 깜빡이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나루미. 이달 말에 다른 것──음, 쿠마 군 같은 곰돌이 인형보다 네가 더 좋아하는 로봇 사 줄 테니까, 쿠마 군은 나기사에게 돌려

줘. 그리고 그걸 나기 핑계로 돌리면 안 되는 것, 알고 있지?"



"...응."



약간 시무룩해졌던 소년은 곧 언제 그랬냐는 듯 활기찬 걸음으로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곧 예의 곰인형을 가져오겠지. 쌍둥이 형제,

나기사와 나루미. 그 여동생 나기. 히카게의 외숙부 댁 아이들이다. 외국에서 꽤나 유명한 오케스트라의 단원인 숙부 부부는 녹음이니

공연이니 하는 것들 따위로 밤샘이나 해외 출장을 밥 먹듯이 하고, 순회 공연 등으로 인해 그나마 어디에 머물기는 커녕 주 간격으로

이동하는 것이 많았다. 즉, 일곱 살과 다섯 살짜리 아이들을 종일 돌보아 줄 여건은 아무래도 되지 않는다는 것. 물론 일을 포기하고 

아이를 키운다는 부모의 수 또한 상당하지만, 자기 일을 너무 좋아해서 어쩔 수 없다는 것을 뭐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나름 유명한 오케스트라여도 뻔한 일개 연주자의 봉급으로나마 양 손 가득 선물을 사 들고, 일본에 올 때마다 아이들에게 온갖 애정을 

쏟아부으며 예뻐하고 어쩔 줄 몰라할 정도로 그들을 사랑하는 부모니까.



"할아버지. 할머니. 다녀왔습니다."



"어머나, 오늘은 일찍 왔구나."



"네. 아르바이트가 있으니까요."



"어머, 내 정신 좀 봐. 그럼 이제 조금 있다 다시 나가야겠네. 빨리 이리 오렴. 뭐라도 좀 먹고 가야지."



"아...괜찮...아니. 네... 그냥 냉장고에 있는 것 적당히 꺼내 먹을게요."



아침에 자신이 만들어놓고 나간 샌드위치 한 조각을 냉장고에서 꺼내어 먹는 손자를 보며 노부부─케이조와 히사코는 도쿄와 해외만을

왔다갔다하는 딸을 원망할 수 밖에 없었다. 어미 없이도 저리 반듯하게, 자랑의 손자라고 해도 부족할 정도로 잘 자라 주었는데 그 애는

그런 사실 따위 전혀 알지 못하겠지. 솔직히 말한다면, 아이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지조차 의문이었다. 그나마 명절이나 신년 때나

인사치레를 위해 전화하지만, 어디까지나 자신들과, 동생 부부, 그리고 그 자식들의 안부를 물을 뿐, 히카게의 일을 입에 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물론 자신들도 딸-나데시코가 처음 히카게를 낳아 데려왔을 때에는 고아원에 맡기라는 말은 하지 않았을지언정

영 탐탁찮은 눈초리로 본 것이 사실이었지만, 혈육의 정은, 매일같이 얼굴을 맞대고 살며 그 손으로 키운 정은, 어린 아이의 기특함은

이미 그런 것 따위는 씻은 듯 없애버리기에 충분하고도 남은 것이었다.



"..나데시코가 저 아이만큼만 철이 든다면 좋으련만..."



안쓰럽다는 듯 중얼거리는 남편의 말을 히사코는 그저 못 들은 척, 밝게 손자에게 이것저것을 더 챙겨다 줄 뿐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주가 이렇게 잘 자라준 것에 대해, 언제나 그렇듯 내심 고마워하면서.





   그럼, 다녀오겠습니다──늘 해오던 대로,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는 교복 차림 그대로 몇 칸 되지 않는 계단을 달리듯 내려온

히카게에게, 누군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야아, 히카게 군. 아르바이트 가니?"



"아, 메브 형. 네, 뭐. 그렇죠."



타 지역이었더라면 이웃집에 외국인이 사는 것에 불만을 가질 이웃도 분명 있을 것이고, 그 전에 일단 눈에 굉장히 띌 일이지만 이 도시,

카자마츠리는 그렇지 않았다. 바람의 축제라는 뜻 때문인지, 외국인이 옆 집에 살아도, 길에서 몰려 다녀도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흔한 도시. 따라서 키류 히카게 역시 메브란 이웃집 청년에 대해 별다른 의문도 감상도 갖고 있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히카게

본인부터가 반은 서양인이었으니까. 아마 이 도시가 아니었다면 이지메라도 당했을지 모를 일이다.



"─이건 미안하네. 내 카페가 조금 더 컸더라면 히카게 군이 그렇게 멀리까지 번거롭게 일을 나가지 않아도 될 텐데."



"아하하. 괜히 그런 말씀 마세요. 지금 사장님도 충분히 좋으신 분이니까. . . 윽, 늦겠다.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30분 밖에 남지 않은 시간에 맞추려면, 조금 발걸음을 빨리 움직여야 한다. 오늘의 샌드위치는 생각보다 맛있어서 먹는 데 시간을 조금

더 오래 써 버렸다면서 살짝 후회한 히카게는, 평소와는 달리 해가 기울어져 가는 도시의 풍경에 어떠한 감상을 보낼 겨를도 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기껏해야 기억나는 것은 평상시에도 어린 여자아이들로 가득한 키티 매장 앞에 어쩐지 홀로 서 있던 금발의 아이가 아기 천사마냥

굉장히 귀여워서, 풀려버린 고양이의 방울을 묶는 것을 도와주웠던 일, 카자마츠리 하야트 근방에서 아무리 부유한 이 도시라도 보기 

드문 롤스로이스를 보았다는 점, 요즘 한창 잘 나가는 밴드의 새 앨범 한정판을 사기 위해 선 줄이 한 블럭을 넘어서 길게 늘어져 있었다는 

것과, 꽤 인기가 많은 카페가 내부 공사로 가게를 막아버렸다는 것, 그 정도였다.



"──후아. 이제야 한 숨 돌리겠네요."



저녁 식사 시간의 음식점은 대부분 붐비기 마련이다. 가게가 나름 맛집으로 근방에 소문이 난 곳이라면 더더욱. 키류 히카게는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손님의 테이블을 정리하며 중얼거렸다. 주방의 조리사 두 명 말고는 별다른 직원이 없었기에 말을 받는 것은 언제나

그래왔듯 가게의 점장.



"뭐, 저녁 시간이 언제나 다 그렇잖냐. 아, 히카게. 잠깐 이리 와 봐라. 어차피 지금은 손님도 없으니 대충 저녁이라도 같이 때우자고.

사사키 씨랑 타네시마 씨는 도시락 싸 오신 걸로 나눠 드시니 우리끼리라도 먹어야지."



"아, 네. 잘 먹겠습니다."



점장은 꽤나 호쾌한 사람이었다. 직원 대우도 좋고, 본인도 시원스레 대하기 편한 성격. 인상이 다소 험악하긴 했지만─선글라스를

끼고 있으면 야쿠자의 무리라고 해도 위화감이 없을 정도다─히카게는 이만한 아르바이트 장소를 구한 것에 대해 다행이라고 생각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확실히 말을 걸어올 때마다 흠칫 긴장했지만, 일 년째 일을 하니 이젠 그런 기색은 미진도 들지 않았고 말이다.



두서없는 이야기가 이어지는 10분 가량의 짧은 식사 시간. 카레라이스 한 입을 삼킨 히카게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툭, 가볍게 말했다.



"그러고보니 오늘, 롤스로이스를 봤어요. 이야, 확실히 비싼 차는 분위기가 다른 건지, 멋지더라구요. 왜, 안에 막 어느 나라에서

오신 국빈이나 초 유명한 외국 재벌이라던가 타고 있을 것 같고."



"흥, 그래봤자 시시한 세단이지. 난 이제 삼 년만 더 돈을 모으면 드디어 무르시엘라고를 살 수 있을 거라고."



"아아, 네. 당연히 그러시겠죠-"



"뭐야아? 어이, 키-류-우 군. 말투가 묘하게 헤실헤실이다?"



"어라. 헤실헤실한 말투라니, 그런 걸 제가 쓸 리가 없잖아요, 점장님."



아버지인지, 삼촌인지, 형인지는 잘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히카게는 분명히, 단순히 '좋은 일자리'를 넘어선, 이런 가족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게 해 주는 것. 그것에 대해 무엇보다도 감사할 뿐이었으니까. 약속이라도 한 듯 너털웃음이 이어지고, 점장은 아아, 하며

떠올랐다는 듯 소곤거렸다.



"그러고보니 하야트 주방에서 일하는 내 친구가 해 준 말인데. 정말 부자가 지금 거기에 있기는 한 모양이던데?"



"네?"



"그, 왜. 미국에...그, 석유 사업으로 유명한 데 있잖아. 이름이 뭐더라... 하여튼 거기 도련님이 지금 하야트의 프레지덴셜 스위트에

있다더라고."



"우와아, 프레지덴셜...? 그거, 제일 비싼 방 아니에요? 그, 하룻밤에 몇 십만 엔은 족히 한다는..."



"몰라. 그게 얼마인지 내가 어떻게 알겠냐. 아무튼 그만한 데 도련님이라면 롤스로이스가 아니라 롤스로이스 사촌을 끌고 다닌대도

뭐 가능하겠지. 아무튼 네가 본 게 걔 차 같지 않냐?"



"그렇네요... 그런데 여기엔 무슨 일일까."



"기분 전환이랄까 바람 쐬고 싶어서 나온 거겠지. 뻔하잖아."



"그런가요? 솔직히 여기...좋은 도시긴 한데 그만큼 관광할 게 있으려나...? 아, 어서오세요!"



짧은 휴식은 가게 문이 열리는 삐걱 소리로 끝났고, 찬기운과 함께 걸어 들어온 손님에게 히카게는 메뉴판을 들고 재빨리 움직였다. 다소

매콤한 카레라이스는, 언제나 그렇듯 정말 맛있었다. 





*          *          *





   "형(Hey). 저녁에는 뭘 먹을까? 아니면 그냥, 으음. 버틀러에게 말해서 여기다가 뷔페를 차리라고 할까?"



카자마츠리 시에서 가장 훌륭한 야경을 볼 수 있다는 하얏트 호텔의 최상층, 프레지덴셜 스위트. 엄밀히 말해 그 위에는 최고급

레스토랑과 루프탑 바가 있기는 했지만, 창의 위치상 이 방만큼의 값어치는 하지 못했다. 그리고 현재, 그 방에 기한 없이 머물고

있는 금발 소년. 니콜라스 티모시 엔트워프 힌들턴은 잔뜩 들뜬 목소리로 자색 머리카락의 소년에게 열심히 말을 붙이는 중이었다.

그는 소년...이라기에는 조금..상당히 모호한 외모였지만.



"...니키. 숙제는?"



겨울 방학을 맞아 이렇게 비교적 자유롭게 나올 수 있었지만, 소년은 애당초 대기업의 외동아들로 학교에 가지 않을 때 더 바쁜

부류의 인간이었다. 온갖 악기와 미술에 대한 교양, 댄스, 화술, 웅변 실력, 수학, 고어(古語), 정치학, 경제학, 지리학, 심지어 운동까지

보통 학생들은 이름만 들어도 머리를 감싸쥘 온갖 것들을 배워야만 했으니까. 거기에 학교는 보스턴 교외의 최상급 보딩 스쿨. 

할 일이 없다는 건 불가능한 삶이었다.



"헤헤. 오면서 비행기에서 다 했어!"



보스턴에서 카자마츠리까지. 열 네 시간은 족히 걸리는 비행 시간동안 잠을 한 숨도 자지 않고, 심지어 제대로 밥도 먹지 않고

숙제를 했다는 것은 분명히 어떤 의미로는 칭찬 받을 만한 집중력이었으리라. 그것이 본인이 해야 한다는 책임감과 그 이유를

알고 있어서인지, 공부가 좋아서인지, 아니면 '어찌 되었든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살아온 삶으로 각인시키고 있어서인지,

그것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렇다면, 오케이."



다소 무뚝뚝한 듯, 약간은 붙임성이 없는 것 같기도 한 말투로 가만히, 억양 없이 중얼거린 보라색 머리카락의 소년은 다시금

흥미 진진한 듯, 손에 쥔 게임기로 시선을 옮겼다. 붉은 모자의 배관공이 바쁘게 왔다갔다 하는 게임에 막 다시 몰두하려던

소년은, 조금 삐친 듯한 니키의 표정은 눈치채지 못한 듯 싶었다.



우우. 내가 소환한 건데, 니콜라스는 남몰래 입을 비죽였다. 태어났을 때부터 모든 것을 갖고 태어난 그였다. 흔히들 말하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레드 카펫 인생. 못 가질 것이 없었고 못 할 것이 없었음에도, 소년은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다른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저 웃으며 살 나이에조차도. 그럼에도 자신이 그러한 것들을 전부 다 해야 한다는 사실만은 숙지하고 있었다. 하고 싶지 않다고도

생각했지만 동시에 이것이 아니라면 무엇을 해야 할 지 알지 못했다. 그러던 소년이 우연히, 모친이 아버지와 결혼할 당시, 친가인

영국에서 가져온 물건들 속에서 찾아낸 것은 한 권의 낡은 마도서. 처음에는 그저 어딘가의 판타지 소설에 나올 법한 외관에 이끌려

반 호기심으로 읽기 시작한 것 뿐이었지만, 헛소리인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사실 같은 내용에 신경이 쓰였다. 그 책이 뭔지

모친에게 물어보아도, 그녀의 할아버지 대부터 내려온 책들 중 하나로, 자신도 잘 모른다는─사실 니콜라스가 묻기 전까지는 있었는지도

몰랐음이 분명한 그런 것이었다는 대답이 돌아올 뿐이었다.



결국, 니콜라스 티모시 엔트워프 힌들턴은 책 속에 나온 무언가를 한 번 옮겨 보기로 결정했고. 그 결과가 지금 이것이었다. 

성유물이란 것이 무엇인지는 잘 알 수 없었으나, 유명한 영웅과 관련된 것,이란 말을 보고는 적당히 예술품이나 고대 유물 수집을

취미로 삼는 작은 아버지의 저택 창고에서 적당히 발견한 것을 졸라서 받아내곤 사용했다. 



‘에에또. 어디 보자. 그림...? 같은 건 이 정도면 된 것 같고. 으음. 그럼...채워라, 채워라, 채워라. 반복할 때마다 다섯 번. 그저

채워지는 순간을 깨뜨린다. 녹빛 버들꽃의 잎은 나무가 되노니───"



단순한 옛 영어라면 배웠기에 알 수 있겠지만, 이것은 조금 다르다. 이유를 묻는다면 대답할 수 없지만, 그저 느낌일까. 아리송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니콜라스는 일단, 책에 씌인 철자를 따라 천천히 읽었다.



"고한다. 그대의 몸은 나에게. 나의 운명은 그대의 검에. 성배의 인도에 따라, 이 뜻. 이 이치에 따른다면 대답하라..... 여기에 맹세한다.

나는 온 세상 모든 선이 될 자. 나는 온 세상 모든 악을 물리칠 자. 그대 삼대의 언령을 두른 일곱 하늘. 억지의 윤회로부터 오거라,

천칭의 수호자여───?!"



차분하게 끝내는 것 따위 불가능했다. 도저히, 실제라고는 믿기지 않는 일이 니콜라스의 눈 앞에 일어났으니까. 할리우드의 CG를

그대로 옮긴 것 같은──아니,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것이 지금 현실이란 이름 하에 빛을 발하고 있었다. 복잡하게 얽힌 알

수 없는, 뜻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를 기호들. 그림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서번트, 랜서. 소환에 응하여, 여기에 참전. ...네가, 내 마스터?"



가볍게 내려선 보랏빛 머리카락, 보랏빛 눈동자의 사람. 소년인지 소녀인지 구분하기는 조금 어려웠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니콜라스는 그저 이, 과학적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현상에 눈을 빛내며 달려들 뿐. 어른들의 세상도 알 만큼, 아니, 보통 아이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깨닫고 있었고, 돈과 권력으로 어지간한 것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또 실천해보기도 했을 만큼 어른들의

'사회'에 깊숙히 발을 들여본 적도 있는 소년이었지만, 지금은- 정말로 드물게도, 모처럼 제 나이에 맞는 열 너댓살 소년의 눈동자로

잔뜩 들떠 있었다.



"저기, 저기. 네가 그럼 내 '서-번-트-'야? 책에서 읽은 게 전부라 잘 모르겠는데."



"네가 날 소환했고, 령주가 있다면."



"에─령주? 아, 와아, 이거구나!"



니콜라스는 깡총깡총 방 안을 뛰어다녔다. 건장한 서양의 소년과는 다소 거리가 먼, 좀 더 어려보이는 외관의 소년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런 소년을 인형과 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쳐다보던 서번트 랜서는, 특유의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가볍게

입을 열었다.



"졸려."



고매하신 영령께서 소환 되어 마스터를 확인하자마자 한 첫마디가 졸립다,라니. 아마 어지간한 마술사들의 예상을 산산조각 내고도 남을

말이었지만, 니키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다. 새하얗고 폭신폭신한 거위털 이불이 깔린 침대, 널찍한 방으로 안내 받은 그 순간을

시작으로, 니콜라스 티모시 엔트워프 힌들턴과 서번트 랜서는 통칭 '다른 성배 전쟁'에 참가하는 주종이 되었다.





   "...니키."



뉴욕 같은 세계구급 대도시에 비할 바는 못 될지언정 나름대로 화려함을 자랑하는 밤의 빌딩숲, 그 너머의 밤바다를 내다보던 랜서는

갑자기 입을 열었다. 무엇인가를 찾기라도 한 듯.



"응? 왜?"



"...앞으로는, 조심해."



갑자기 어째서 그런 말을 하냐는 얼굴로, 니키는 갸우뚱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물론 랜서는 더 이상 입을 여는 일 없이 가만히 다시

게임기를 만지작거릴 뿐. 어차피, 말을 해도 실감은 하지 못할 것이다. 이미 빌딩 너머 그림자 아래에서 춤추기 시작한 그림자가 있다는

것은, 실감도 하지 못할 뿐더러 현재의 이 소년이 알아도 그리 좋은 일은 되지 못하겠지.



서늘한 겨울 바람이, 창문 사이로 가늘게 새어들고 있었다.





*          *          *





   "...'카자마츠리'인가. 놈이 있는 곳이. ...말 그대로 세계의 동쪽 끝까지 기어들어가셨군."



마지막으로 잡았던 흔적은, 1년 전의 것. 온갖 수단, 모든 상식과 가능한 연줄을 전부 동원하여 정보를 캐낸 끝에 알아낸 것.

그리고 그──류 샤오위엔, 혹은 샤오 클라인이 소식을 입수하지 못할 리 없었다. 카자마츠리라는 섬나라의 도시에서, 곧

무엇이 일어나는지. 



"이 놈이라면 태연하게 어디 가서 직장 잡고 뻔뻔하게 일이나 하고 앉아있겠지."



그 표정에서 뭘 읽는다는 것 자체가 어려우니, 과거 정도야 적당히, 깔끔하게 숨기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이것이 단순하기 그지없는,

예상이 쉬운 보통 마술사의 관념을 가진 인간이라면 생활 방식이야 뻔히 보이니 암시를 걸고 숨은 곳을 찾아내야 하겠지만, 애당초

자신이 쫓고 있는 놈은 일반인들의 틈에, 비마술사들의 사이에 끼어들어가서 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전부터 그랬으니까.

그렇기에 보통 마술사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십 년 전 형이 죽기 전까지만 해도 일반인이었던, 10대 초중반까지 마술의 마,자도

모른 채 평범하게 살던 그였기에 파악할 수 있었던 것.



잊지 말아라. 뼈에 각인시켜. 이 놈은 내 부모를 죽이고, 형을 죽이고, 종국에는 샤리아마저 죽인 놈이다. 그 순간부터, 다른 여지는 없었다.

가족이 죽고, 그 피 자체는 마술사가 아니었으나 그들에 대해 알고 있던 클라인 가에서 자라나며 갈아낸 칼날이다. 그것을 위해 

집행자가 되었고, 계속 쫓는다. 



"남들이 보기엔 멀쩡한 모습으로 사회 생활 하면서, 감히 그 낯짝을 치켜들고 전쟁에 나오시겠다?"



지옥에나 떨어져라, 아니. 그것도 과분하다. 샤오위엔은 으득, 이를 악물며 부츠에 발을 구겨넣었다. 그래. 그렇다면 쫓으면 되는 거다.

여태까지 그래왔듯이. 어차피 협회에게 예속된 일반 집행자는 아니다. 일 따위 받지 않아도 전혀 상관 없는 것. 그 놈이 뭘 가져올지

모른다. 아니, 오히려 서번트는 단순히 도구로 여기는, 혹은 인형이나 자랑거리로 여기며 실제로 암약하는 것은 그 놈일 확률도

상당하다.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압도적인 힘이다. 그 놈이, 그 시침 뚝 뗀 얼굴로 부리는 잔꾀 따위, 애당초 통용되지 않을 정도로, 차원이 다른 

능력. 우승까지는 바라지 않아. 아니. 바란다. 바래서, 어떻게든 '잘못된 모든 것들'을 다시 바로잡으리라. 남자는 손을 꽉 쥐었다. 

짧은 손톱이 손바닥에 흔적을 남겼고, 그는 일어섰다.



무조건적인- 최우선 목표는 그 놈의 말살. 그 다음의 일차 목표는 이기는 것 : 정확히 말해 원망기를 손에 넣는 것. 바램을 이룰 힘을

얻는 것. 기적을 일으킬 기회를 잡는 것. 그렇다면, 지체할 시간 따위는 없다. 이미 머릿속에, 소환해야 할 것이 누구인지는 곧바로

정해놓았다. 남은 것은 그를 위한 준비 뿐. 마력의 보급 따위, 집안에서 내려온 방식을 알고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다. 



"...기다려. 형, 아버지, 어머니...샤리아───"



옮기려던 발걸음을 멈춘 채, 그는 가만히 테이블 위에 놓인 액자를 바라보았다. 마치 햇살과 같은 금빛의 소녀가, 아름답게 미소짓고

있었다. 





*          *          *





   "──London Bridge is Falling down, falling down, falling down- London Bridge is falling down, My Fair Lady~"



기묘한 풍경이었다. 아니, 장소 자체는 어느 곳에서나 도시라면 충분히 볼 수 있는 곳이라 해도 무방했다. 빛 뒤에 그림자가 있듯,

화려한 대도시도 한 발자국만 안쪽으로 깊숙히 들어간다면 보는 것은 쓰레기장, 혹은 비밀스런 전쟁터, 혹은 다른 무언가, 밖의 사람들은

결코 모를 그런 곳들. 그렇기에 흐린 잿빛의 벽을 따라 이어진 이 뒷골목 틈새에 쓰레기 더미가 하나쯤 있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뒷골목과 뒷골목이 엮여들어 만난, 조금 더 넓은 틈에 온갖 것들이 쌓여 있다해도, 밖의 사람들은 아무도 신경쓰지 않고,

아무도 알고 싶어하지 않고, 또 아무도 알지 못할 테니까. 우중충하다,는 말이 어울릴 그 골목, 그 공터, 그 더미 위에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맑고 푸른 하늘이 비치고 있었다. 그리고 타박, 타박. 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어오는 소녀가 한 명.



소녀라고 하기에도 부족할 정도로, 그저 '어린 아이'에 가까운 연령이었다. 물론 보이는 나이가 제 나이일까는 알 수 없지만. 그 소녀야말로,

기묘한 풍경을 이루는 중심. 마치 동화 속에서 걸어나온 것 같은 외모였다. 꿀을 녹여낸 듯한 진한 금빛 고수머리, 사랑스러운 옅은

푸른색 눈동자. 거기에 조화를 이루는 푸른 에이프런 드레스와 좋은─비유하자면 베이비 로션이나 갓 빨아낸 듯한─향기가 날 것

같은 뽀얗고 깨끗한 레이스와 귀엽게도 만들어진 앙증맞은 커프스. 바람이 불면 가볍게 나풀거릴 법한 짙은 푸른색의 리본을 황금빛

머리카락에 장식한 소녀. 그리고 동화 속에서 걸어나온 그 소녀는, 마치 오려 붙인것마냥 이 쓰레기더미 위에 걸터앉았다. 



루벤스가 보았다면 이상의 어린 천사라며 감탄사를 내뱉을 정도로 고운 눈동자를 살풋 휜 여자아이는 계속해서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 팔 안에는 새하얗고 윤기 흐르는 털을 뽐내는 새끼 고양이. 목에 황금빛 방울을 묶은 흰 고양이를 안아든 작은 한 쪽 손등에는, 

이건 또 알 수 없는 그림. 붉디 붉은 자국으로 그려진 이상한 그림은 거울을 바라보는 토끼로 보이기도 했으며, 또 어떻게 보기에는 

하트 모양 시계처럼 보이기도 했다.



옆에 늘어진 것은 눈만이 퀭하게 남은 먹고 버린 생선 뼈, 누군가 샌드위치를 만들었었는지, 식빵에서 잘라낸 모서리, 반쯤 썩어

문드러지다 만 바나나 껍질, 개미가 꼬인 사과 껍질, 그나마 추워서 아직 별 냄새가 나지 않는 듯한 알 수 없는 고기 찌꺼기. 

망가진 인형은 사랑스러운 표정을 그대로 가진 채, 얼굴 반이 부서진 모양으로 달걀판에 머리를 박고 있었고, 또 다른 나무 

장난감은 사지가 기묘하게 휘어진 채 실타래에 엉켜 있었다. 다 헤어져 너덜너덜해진 셔츠와, 구정물이 묻어 잔뜩 더러워진 신발

한 쪽. 종이 봉투, 종량제 봉투, 그저 검은 봉투, 두껍고 딱딱한 명품 브랜드샵의 봉투, 새하얀 일회용 비닐봉지까지. 온갖 봉투들이

쓰레기 더미 군데군데서 어수선하게 나뒹굴고 있었다. 아무것도 담지 않고 그저 겨울 바람에 흔들흔들 휘날리는 것부터, 꽉 

차다 못해 구멍이 나 그 틈으로 먹다 남은 음식물을 쏟아내고 있는 것까지. 깨진 술병 위로 흘러내리는 것을 보니, 아마도 

컵라면이었던 듯 싶었다. 혹은 야키소바나,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캘린더에서나 볼 법한 푸르고 맑은 하늘과 내리쬐는 햇빛, 오래 된 명화 속에나 나올 것 같은 동화 속 소녀, 그리고 쓰레기더미. 

앨리스가 떨어진 이상한 나라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기묘하고, 지저분하고, 어색한 곳이었지만 소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혹은, 어쩌면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Humpty Dumpty sat a well- Humpty Dumpty had a great fall- ...."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소녀는, 마더 구즈가 마음에 든 것인지 조금 전부터 계속 같은 가락만 흥얼거리고 있다. 작은 두 손은 고양이의

두 손을 맞잡은 채로, 귀여워 못 견디겠다는 듯 육구를 만지작거리고, 털을 쓰다듬고, 포옥 끌어안고. 그러다가도 또 무어가 그리

즐거운 것인지 꺄르륵 웃는다. 껴안지 않고서는 못 버틸 정도로 사랑스러운 웃음에, 주변마저 밝아지는 착각이 든다. 



문득 소녀는 무엇인가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천진한 눈동자를 크게 뜨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그리고는───



푸드덕. 뒷골목 담벼락 위에 조곤조곤 앉아 지켜보던 까마귀들이 날개짓한다. 소녀의 햇살 같은 머리칼에 이끌려 찾아온 듯한

다른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털을 곤두세우며 재빨리 달아난다. 날카로운 소리만이 길게 남았고, 햇볕마저 움츠린 것 같았다.



소녀는,  고양이의 한 쪽 다리를 잡아 찢었다.



형언할 수 없는 소리로 짐승이 울부짖는다. 소녀는 그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입을 뾰로통하게 내밀곤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우으, 하는 작은 신음소리를 내고는, 이윽고 망설임 없이 그 작은 손으로 고양이의 머리를 잡는다. 고양이는 빠져나가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이상하게도 그 작은 손아귀는 미진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 상태로 소녀는, 아무렇지 않게 손가락을 고양이의 머리에

넣었다. 말 그대로, 박아 넣은 것이다. 스너프 필름도, 이만큼 잔혹하지는 않겠지. 거기에, 어떤 이유에선지, 고양이에겐 

죽는다는 자유조차 존재하지 않았기에. 



머리 안쪽을 그대로 드러낸 채 아직까지도 헛된 희망을 품고 바둥거리는 고양이의 목을, 소녀는 가볍게 잡고 비틀어 돌렸다. 돌려서,

뽑아버렸다. 황금빛 방울이 검붉게 물들어 끈적한 소리를 냈다. 여전히 마더 구즈의 노랫자락을 흥얼거리며, 소녀는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남은 다리도 하나, 둘, 셋. 



이미 조각이라고 부르는 편이 좋은, '고양이었던 것'에게 소녀는 마악 생각이 났다는 듯 태연히 묻는다.



"아아. 키티. 어쩌면 좋을까요? 배가 고픈데 먹을 게 없어요."



──뭔가 먹고 싶어요. 그런데 저는 돈이 없어요. 그럼 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마지막 남은 다리 한 쪽을 비틀어 뽑아내며, 소녀는 이미 분리된 머리 쪽에 살짝 귀를 가져다댄다. 무엇인가를 들은 것인 양,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잇는다.



"그렇군요. 그렇게 하면 되겠어요. 키티는 정말 멋진 고양이에요. 체셔가 당신을 보면 푹 빠지고 말 거야."



소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발딱 자리에서 일어섰다. 불쾌한 공기가 차오르는 쓰레기더미를, 냄새에도, 밟는 촉감에도 아랑곳않고

가볍게 타고 올라간다. 무엇인가를 찾는 듯 뒤적거리고, 새하얀 에이프런에 슬쩍 닦아내는 것은 어린 아이가 들기에는 너무나

무거워 보이는 식칼.



이젠 콧노래마저 흥얼거리며, 소녀는 토막 옆으로 돌아왔다. 나비가 앉는 모양으로 살포시 앉고는 연분홍빛이었을─지금은

시뻘겋게 변한 배에 칼을 박아넣는다. 쭈욱, 쭈욱. 가죽을 자르는 소리만이 울려퍼지고, 우그으. 하며 소녀는 조금 곤란하다는

듯 울상을 짓는다. 칼이 생각보다 잘 움직이지 않는 것일까.



낑낑대며 움직이지 않는 칼을 겨우 뽑아낸 소녀는 한참을 고민하는 듯, 이리저리 기웃거리더니 딱, 무엇인가 생각이 난 듯 다시

예쁘게 웃었다. 피가 묻어 조금 무뎌진 칼날을, 소녀는 더 위쪽에 박아내렸다. 반대방향에서, 이번에는 천천히 아래로 움직인다.



"키티 씨. 당신은 정말 멋진 고양이에요."



또 무언가를 생각한 건지, 이번에는 낯빛이 조금 어두워진다. 



"하마터면 고양이를 먹어야 했을지도 몰라요. 고양이를 먹다니, 끔찍한 일이에요. 체셔가 싫어할 거야."



소녀는 식칼을 집어던지곤, 맨 손으로 고양이의 갈라진 배를 쭉 열었다. 붉은 핏덩이와 함께 내장이 쏟아졌다. 채 녹지 않은 

음식물들이 위액과 함께 쓸려나왔고, 질걱질걱, 철퍽철퍽, 끈적한 핏물을 헤집어대는 소리만이 고요히 울렸다. 아앗, 무엇인가

찾은 듯, 환한 기쁨의 환성이 울려퍼졌다. 그리고 소녀는, 핏물이 뭉쳐 형태조차 잘 구분히 가지 않는 무언가를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고, 씹고, 삼켰다. 위액이든 다른 무언가든, 분명히- 거부감의 문제를 떠나 최소한 입 안이 쓰릴 텐데도

그런 기미조차 없었다. 오히려, 어색하리만치 태연하게, 살짝 손가락을 입가에 가져다대곤 알았다는 듯 감상을 내린다.



"이건 마치 스프 같네요."



탐스러운 과일을 먹는 것처럼, 소녀는 작은 입을 열심히 오물거렸다. 혼잣말이 많은 아이는 이제 기운이 난 듯, 잠시 쉬더니

다시 일어선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될 거에요. 얼른 끝내고 씻고 싶어요. 키티, 당신은 그런 저를 이해하겠죠?"



마치 동의를 구하듯 일그러진 토막에 말한 소녀는, 다시금 콧노래를 부르며 조물조물 손을 움직인다. 대장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창자를, 고양이의 뱃속에서 꺼내어 쭈욱 짜버린다. 무엇인가를 그리는 것인 양,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그 다음에는

들고 있던 것마저 던지듯 바닥에 내려놓는다. 그리고선 휘휘,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리저리 쓰레기 더미를 헤집으며 도무지

연관 따위는 없어 보이는 것들을 늘어놓는다. 그런 소녀는 다리를 흘끗 쳐다보더니, 그마저 무언가의 그림 한 가운데로

던져버렸다. 마지막으로 무엇인가, 뭔가가 하나 더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아앗, 저기 있다. 소녀는 작은 탄성을 내지르며,

용케도 무사한 채 바닥에 굴러다니는 달걀 하나를 마지막으로 내던졌다.



"──Couldn't put Humpty Dumpty together again!"



탁, 하는 소리와 함께 계란이 깨지며 흰자와 노른자가 주루룩 흘렀다.



"완성이야!"



소녀는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눈초리로 함성과 함께 발을 콩콩 굴렀다. 기쁘다는 듯 빙그르르 한 바퀴 돌자, 치맛자락이 뒤쫓아

원을 그렸다. 그러나 왠걸. 시간이 잠시 지나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실패인걸까."



소녀는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차고는 다시 폭 주저앉았다. 배가 고프다는 듯 배를 슬쩍 문질렀다. 꼬르륵 소리가 나자, 소녀는

배고파, 라고 칭얼거리듯 중얼거리고선 바닥에 나뒹구는 고양이 머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 정도라면 체셔도 용서해 줄 거야. 뭐, 안 해준대도 상관 없지만."



푹, 하고 섬뜩한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소녀는 노란 눈을 뽑아냈다. 보기에도 역겨운 것이었다. 허나 아무렇지 않은 듯, 소녀는

곧바로 그것을 입에 넣었고 오물거렸다. 들리는 것은 톡,톡 무엇인가 터지는 소리. 알 수 없는 액체의 소리. 끈적한 소리.



그 순간, '그림' 한 구석에서 빛이 환히 터져 나왔다. 눈알을 씹던 소녀는 내심 그걸 마음에 두고 있었는지, 얼굴을 환하게 피며

벌떡 일어섰다. 탁탁, 손으로 치맛자락을 몇 번 터니 묻어 있던 모든 먼지며, 쓰레기며 하는 것들이 날아간다. 심지어, 피와

구정물조차도. 



순식간에 다시 아기 천사로 되돌아온 소녀가 시선을 향하는 것은 어른거리는 그림자였다. 처음에는 그저 흐느적대는 무엇인가로

밖에 보이지 않던 그것은, 점차 형태를 갖추었고, 사람의 모습이 되어 나타났다. 움직이는가 싶더니, 나온 것은 한 명의 남자. 



남자는, 비유하자면 마른 고목이란 표현이 어울릴 것 같은 인간이었다. 다갈색의 머리카락은 희미하게 부스스한 것 같기도, 살짝

뻗친 듯 싶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자연스럽게 아래로 흘러내렸다. 머리칼과 같은 색의 눈동자는 그 속을 비추지 않았지만, 범인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지식으로 가득 찬 것 같았고, 각진 턱을 감싸며 잘 정돈된 수염이 턱선을 타며 아랫입술 쪽으로 내려와 있었다. 

키는 크고 호리호리했으며, 마찬가지로 짙은 고동색의 코트와, 낡은 목도리를 한 채였다. 이렇게 보기에는 그저 삼사십대 가량 되어

보이는, 남루한 차림새의 옛 지식인과 같았으나, 무엇인가 말할 수 없는─기묘하고 끈끈한 것이 마치 그 주위에 휘감긴 듯 보였다.



"……그대가 나를 소환했나?"



 소녀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물거리느라 말은 여전히 할 수 없었다.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말했다.



"맛있는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소녀는 옆에 던져둔 고양이의 눈알을 하나 더 뜯어내 내밀었다. 남자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받아들이고는 천천히 

입에 넣었다. 아까 소녀의 입에서 나던 소리가 작게 퍼졌다. 맛을 음미하던 남자의 목울대가 꿈틀댔다. 조용히 감상을 내놓았다.



"미식가들이 좋아할 맛이군."



"전 잘 모르겠어요."



 마침내 입 안의 음식을 꿀꺽 삼킨 소녀가 말하자 남자도 대답했다.



"바로 그런 게 미식가들이 좋아하는 맛이다."



"그렇군요. 당신은 아주 똑똑한 분이신 게 분명해요. 험프티 덤프티보다도요."



"칭찬 고맙군."



"별 말씀을요."



 소녀는 마치 저 옛날의 귀족 아가씨처럼 치맛자락을 살포시 쥐며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번 성배 전쟁의 서번트 캐스터, ……다. 그대는 나와 계약하겠는가?"



"저는 이번 성배 전쟁의 마스터 중 하나, 앨리스 플레델이에요. 잘 부탁드립니다."



"좋아, 이것으로 계약은 완료되었다."

 

 

순간 소녀, 앨리스의 왼손에 새겨져 있던 문양이 빛났다. 앨리스는 손등을 신기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예상하고는 다르네요. ...여기서는 온갖 멋진 말 같은 게 나올 줄 알았거든요."



"형식 따위는 불필요한 것에 지나지 않아. 중요한 것은 알맹이다. 너의 소환진처럼."



 앨리스의 눈이 둥그레지더니 곱게 휘었다.



"아저씨하고는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요."



"나 또한 그러하다."


 

앨리스는 어린 천사마냥 꺄르르 웃었다. 그들은 그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굳이 서로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캐스터는 그의 어린 마스터를 가볍게 앉아 올렸고. 앨리스는 중얼거렸다. 아저씨를 좋아하게 될 것 같아요. 그것도, 굉장히요.

캐스터는 여전히 별다른 표정 없이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메마른 발소리를 울리며 그들은 사라졌고, 남은 것은 쓰레기 더미와

시체가 된 고양이 한 마리. 그리고, 불과 몇 시간 전 한 소년이 묶어 주었던 고양이 목의 방울 뿐이었다.





*          *          *




   어딘지 모르는 곳. 언제인지 모르는 시간. 아니, 언제고 어디이고 알기 전, 뚜렷하게조차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소년은 서 있었다.

주변에 안개가 낮게 깔린 것도 아니었다. 그저, 꿈 속의 꿈을 보는 양, 눈 앞에 불투명한 유리벽을 하나 더 둔 것마냥 흐릿하고,

멀리 멀리, 그렇게 보일 뿐. 



축축한 느낌이 들어 흘끗 내려다 본 자신의 몸은 피투성이였다. 피를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서야, 그는 온 몸이 가라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평소처럼 가볍게 움직이고 싶어도,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었다.

아프다고, 멈추어 달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그렇게 하면, 그렇게 하면 절대 안 된다고, 쓰러져 버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그런 생각이 들었고, 누군가가 머릿속에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눈 앞에서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누군가. 제대로 구분할 수도 없었지만, 무어라 떠드는 목소리를 들으니 남자, 같았다.

내용도 알아들을 수 없었고, 그 전에 제대로 분간할 수조차 없었지만. 시선을 돌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영문도 모르는 채 

그저 앞만을 힘겹게 바라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것일까. 3분? 3시간? 감조차 오지 않았고. 소년은 손가락 끝을, 희미하게 

움직였다. 순간 발밑이 무너져내렸고──눈 앞이 새까만 무언가에 뒤덮인다. 마치 늪에 빠진것처럼 말을 듣지 않는 다리.

천천히 그를 '빨아들이던' 땅은 이윽고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리며 갈라졌다. 어쩔 도리도 없이 떨어져내리던 소년의 눈동자가

스치듯 본 것은 새까맣고,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아래의 세상. 몸이 허공에 둥실 뜨는 느낌이 들었다. 본능적으로, 

끝이라고 느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보자. 질끈 감는 대신, 소년은 곧게 눈을 떴다. 

죽어서도 잊지 않도록 이 눈에 새기자. 무엇을? 이 세상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는 이 마을을. 언제부턴지 항상 좋아했던

푸른 하늘을. 그리고─── 



그리고, 누구를? 



누구를? '누구'는 '누구'지? 아니야. 분명히- 분명히, 보고 싶은. . . 



마지막까지도 해답을 찾아내려 애쓰던 소년이 완전히 디디던 대지에서 떨어졌고, 텅 빈 기분이 들었다. 두둥실 뜨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떨어지는 바람이 몰아치려던 순간──



누구───?



누군가의 손이, 소년을 잡았다. 촉각은 시원하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소년은 이것을 따뜻하다,고 받아들였다.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 사이에서, 그 목소리만이 또렷이 들렸다. 아까의 웅웅대던 남자의 목소리와도 다르게, 마치 둘만이 같은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톤이 높고 가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오히려, 맑고──듣기 좋은──



태어나 첫 걸음을 옮기는 것처럼 온 힘을 주어, 간신히 고개를 든 소년의 눈동자에 하늘빛 파아란 눈이 담겼다. 그리고 끝이었다.





*          *          *





   "..으으......"



히카게는 알 수 없는 욱신거림에 눈을 떴다. 아아. 통증 탓만은 아닌 건가. 시간을 보니 여섯 시. 아직 해조차 뜨지 않은 겨울의

아침이었지만, 소년은 항상, 습관적으로 이 시간에 일어나곤 했다. 



"..아으, 어제는 뭐 별 것 한 것도 없는데 왜 손이......어?"



키류 히카게는 잠깐 눈을 깜빡이고는 팔을 뻗어 침대 옆의 스탠드를 켰다. 어슴푸레한 주황빛이 어두운 방 안을 희미하게 밝힌다. 

살그머니 찌르는 듯한 통증에 눈을 찌푸리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고는, 살짝 눈을 크게 떴다.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왼쪽 손등에

새겨진 건 알 수 없는 붉은 문양. 문양인 것인지 무엇인지 잘 알 수도 없긴 했지만.



".....이건 또 뭐지......"



어디선가 긁혔나, 싶기도 했지만 이윽고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뭘 어떻게 긁히면 이런 식의 자국이 남는지 알 리가 없었다. 아, 어딘가에

눌린 자국인가. 자면서 손을 누르기라도 한 건가. 하지만 그래도 몰랐다. 화장실에 들어가 뜨끈한 물로, 차가운 물로 아무리 씻어봐도

사라지지 않는 것. 사실, 직감인지 무엇인지는 몰랐으나 이미 소년은 이것이 무엇인지 모를지언정 이렇게 사라질 것은 아니라고 깨닫고

있으면서도 지우려고 애썼다. 



"...에라, 모르겠다."



히카게는 서랍을 뒤적여 붕대를 꺼냈다. 할머니나 할아버지, 동생들이 보면 걱정할 게 뻔하지만, 이런 원인불명의 자국보다야 나을

것이다. 붕대를 든 채 피곤한 몸을 일으킨다. 가뜩이나 몇 시간씩 일하고, 동생들과 놀다 재워주고, 그 이후엔 과제물까지 끝내는 일상

을 마친 후 기절하듯 잠들었음에도, 영 개운하지 못한 건 이것 탓일까. 아니면, 간밤에 꾸었던───



아오. 난 뭘 신경쓰는 거야. 개꿈이야, 개꿈.



그런 비현실적인 게 꿈이니 일어날 수 있었던 거지, 더 이상 깨어나서도 신경 쓸 이유 같은 건 없잖아. 으랏차, 하면서 가볍게 기지개를

쭉 펴고, 언제나처럼 샤워를 하고 교복으로 갈아입는다. 묘하게 아른거리는 꿈 속의 광경을 털어내듯 두어 번 살짝 머리를 젓고, 창문을

활짝 연다. 차가운 겨울 아침 바람이 방 안으로 확 밀려오지만, 그다지 춥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깊게 숨을 들이키고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하루의 시작이었다.





*          *          *





     여성은, 가만히 섰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막연하게만 알고 있을 뿐 실감하는 것은 없다.                        

그럼에도, 자신이 이것을 해야만 한다는 것은 인정하고 있었다.                        

완성된 진 앞에서,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청년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무엇을 위해 여기에 서 있는지, 뼛속 깊이 새기고 있었다.     

망설임의 여지는 없다. 이걸로 모든 걸 되돌리고 말 테니.     

방 가운데의 '그것'을 보며, 남자는 혀끝에 힘을 주었다.     



"채워라, 채워라, 채워라, 채워라, 채워라.

반복할 때마다 다섯 번. 그저 채워지는 순간을 깨뜨린다."


──괜찮아.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그저 잘 하게 되고, 그저 그렇게 끝날 테니까.



"대지를 적신 철의 은총을 밤의 어머니께 바치며      

그 토대는 하늘의 아버지의 핏줄일지니"     


한 시도 잊지 않겠어. 샤리아. 아버지. 어머니. 모두들. 잊을 리 없고 잊지 않겠어──     



"고한다. 

그대의 몸은 나에게.

나의 운명은 그대의 검에. 

성배의 인도에 따라, 이 뜻.  이 이치에 따른다면 답하라.

여기에 나 맹세하노니,

나는 온 세상 모든 선이 될 자.

나는 온 세상 모든 악을 물리칠 자."

  서번트

영웅이라면, 분명 나를 이끌어 줄 테니까───



"허나 그대의 눈은 혼돈에 흐려질지니,     

그대는 광란의 감옥에 갇힌 자. 나는 그 사슬을 손에 쥔 자."    

  

미쳐버린 혼이여, 내 검이 되어라. 방패가 되고, 모든 것을 부수는 폭풍이 되어라.  








"그대 삼대의 언령을 두른 일곱 하늘.

억지의 윤회로부터 오라.

천칭의 수호자여!"







*          *          *





     히카게는 살짝 미간을 좁혔다. 한낮이 다 되도록 이상한 자국은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정말이지 병원에 가 봐야 하나? 간다곤

해도 가서 뭐라고 말하지? 자고 일어나봤더니 손에 이상한 무늬가 생겨서 사라지질 않습니다? 어쩌라는 것인가. 그렇다고 지금 아프거나

하지도 않는다. 전혀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아. 오히려 꼭, 무슨 타투라도 넣은 것처럼 보이는 걸.



".....하아. 모르겠다──"



쪽지 시험을 보는 내내 신경이 쓰여서 집중도 못 했어. 정말이지 꿈자리가 뒤숭숭한 거랑 무슨 상관이라도 있는 건가. 히카게는 한숨을

푹 내쉬며 기지개를 폈다. 거기다가 만나는 사람들마다 손 어디 다쳤냐고 물어보고...똑같은 대답만 스무 번은 했다고. 



"어이, 히카게──"



"...음? 테츠야...?"



클래스 중에서도 특히 히카게와 사이가 좋은 편인 남학생, 센도 테츠야는 다짜고짜 허리를 푹 숙이며 합장 자세를 취했다.



"어..야, 갑자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부탁이다. 교무실에 좀 같이 가 줘....!"



고개를 갸웃한 히카게에게 한 설명에 따르면, 테츠야는 어쩌다보니 운 나쁘게 복장 불량으로 걸렸다. 하지만 다행히도 학생 주임은

아닌, 그저 까탈스러운 교사인 이시카와였고. 거기서 그나마 처벌을 안 받는다는 점에 안도했지만, 대신 처벌과는 다른 의미로 절대로

사양하고 싶은 온갖 잔소리의 퍼레이드가 이어졌고. 마지막에 나오는 소리는 그런 복장이니까 공부에 집중을 못하지 운운하는 내용.

거기서 반발하며 아니라고 항변했고, 그렇다면 이번 시험으로 증명해 보기로 약속했는데, 시험은 약속된 패망의 답. 그러므로 자신이

공부는 열심히 했는데 그 날 몸이 안 좋아서 집중을 못한 것 뿐이라고 옆에서 좀 거들어 달라는 요지였다.



"그럼 넌 지금 나한테 거짓말을 해달라고...?"



"이시카와 아줌마가 널 예뻐하는 건 우리 반이 다 알고 있잖아! 랄까, 눈에 못 넣어서 안달인 자랑의 제자니까 네가 딱 세 마디만

해 줘도 난 무한 잔소리의 루프에서 해방이라고! 응?"



"아니, 그렇게 예뻐하는 것도 뭣도 아니라고 생각하지만...그 전에 그렇게 해도 별 의미 없지 않을까?"



"아오, 이 착해 빠진 놈! 친구를 위한 선의의 거짓말은 절대로 나쁘지 않다고! 후아, 아무튼 좋아. 그럼 최소한 같이라도 가 주라. 아마

이시카와는 네 얼굴만 봐도 기분이 나아질 걸? 내가 장담하지."



"영문을 모르겠지만, 아무튼..같이 가 주는 거라면야."



"오오, 땡큐!"



환호성을 지르며 달라붙으려고 하는 친구를 한 걸음씩 슬쩍슬쩍 피하던 히카게는 남몰래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문득 눈에 담긴

창 밖의 푸른 하늘에, 꿈 속에서 본 소녀가 다시 떠올랐지만. 그는 곧바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이, 이시카와 선생님 계신가요오?"



"...테츠야. 그냥 똑바로 들어가서 찾지. 너,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엄청 당당했잖아."



"웃, 히카게. 차가워...! 우리 그이가 아까 부탁했을 때부터 묘하게 차가워서 나 슬퍼...!"



"기분 나쁜 소리는 그만 하면 안 될까. 지금 순간 몸에 소름 돋았거든?"



"센-도-우-군-? 언제까지 거기 서 있을 거니?"



소소한 티격태격을 주고 받던 소년들은, 이윽고 울린 목소리에 뚝 행동을 멈추었다. 하나는 공손히 인사하기 위해, 하나는 온 몸이 경직된

채로.



"헤...헤헤. 이시카와 선생님, 오늘도 아름다우셔요-"



"어머나, 이게 누구야. 자칭 놀면서 공부도 잘 하신다는 센도랑...세상에, 키류 군도 있잖아?"



것 봐. 너 보면 기분이 바뀐댔잖아. 저 아줌마. 팔꿈치로 툭툭 히카게를 치며 입 모양으로 말하는 테츠야를 보며 히카게는 시선을 회피했다.

소란스러운 것을 딱히 싫어하지는 않지만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다소 부담스러운 건 어쩔 수 없다. 거기다 저 선생과 센도는 히카게가 아는

사람들 중 가장 텐션이 높은 부류. 솔직하게 말하자면, 쨍쩅하게 울리는 목소리와 통통 튀는 목소리들이 머릿속을 뒤죽박죽으로 하는 

기분이다.



"아, 타라소프 선생님. 사토 선생님. 스미스 선생님, 나카이 선생님. 안녕하세요-"



이시카와를 따라 들어간 교무실, 그녀의 자리 옆 쪽에서 몇 마디 말을 나누며 근무 중이던 다른 교사들에게도 공손하게 꾸벅 인사한다. 

비교적 소수 정예라고 할 수 있는 학교이므로 대부분의 교사와는 적어도 한 학기의 수업이라도 안면이 있으니까. 고로 수업을 오래, 혹은

자주 들은 교사와는 꽤나 친해지는 것도 이곳에서는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어머나아, 키류 군은 확실히 예절도 바르구나. 안 그러니, 센도 군? 심지어 복장도 단정하고 말이야. 으응?"



"하, 하하. 그러게요, 선생님. 제가 친구 하나를 잘 둬서...."



 "하하. 이시카와 선생. 센도를 너무 괴롭히지 말아요."



"들으셨죠, 선생님? 저 이래봬도 요 근방 국립대 정도는 걱정 없이 들어갈 성적이라구요! 일반..평범한 공립 고등학교 가면 초 우등생

모범생이니까요!"



"하지만 여기는 일반 평범한 공립 고등학교가 아니잖아, 센도 군?"



"윽..."



센도가 매우 우울해하는 얼굴로 무언가 변명할 거리를 찾는 동안, 이시카와 선생의 근처에 앉아 대화 중이던 사토 선생은 히카게를

보고는 살짝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키류. 손은 어쩌다 그렇게 된 건가? 다치기라도 했나?"



"아, 아아. 그게, 저도 잘 모르겠는데. 아마 자면서 어디 배겼거나 일하다가 다친 걸 눈치 못 챘던 것 같아요."



으으. 역시나 또 이 소리구나.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히카게는 속으로 폭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신경 써주는 건 정말로 고맙지만,

그래도 고등학교 남학생이 손에 붕대 한 번 감은 것 정도는 그냥 넘어가 주어도 괜찮을 텐데. 하지만 그런 히카게의 속마음 따위는

전혀 깨닫지 못한 채, 대화 중이던 선생 넷은 일제히 히카게의 손으로 화제를 돌렸다. 물론 평상시라면 이시카와 역시 열성적으로

떠들기 시작했겠지만, 지금은 그나마 다행히도 테츠야에게 한창 잔소리의 비를 퍼붓는 중이었으니까.



"보건실에는 갔다 왔었나요?"



"아, 아뇨... 뭐랄까, 자국이 사라지진 않는데 딱히 아프거나 하진 않아서요. 그냥 일단 내버려두다가 계속 사라지지 않으면 병원에

가 보던가 해야죠. 하하."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되죠. 아프지 않다면 보건실은 차치해도, 학교가 끝나면 바로 병원에 가 보도록 하세요. 아프지도 않는데 사라지지도

않고, 뭐가 묻은 건 또 아니라면 좀 이상한 거잖아."



"아, 네.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카이의 말을 기점으로 선생들은 저각기 히카게에게 한 마디씩을 건네기 시작했다. 아니, 한 마디가 아니었지만. 자신도 고등학교 때

비슷하게 뭔가 영문 모를 상처 같은 것이 난 적이 있다던가, 잘 사라지지 않는 눌린 자국에는 어떤 연고가 좋다던가 따위의. 물론 히카게는

그저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지만, 가만히 향하는 시선에 그는 입을 다물었다.



"──키류 군. 자네, 혹시 최근 별 일은 없는 건가?"



"엣. 별 일이라니...하하. 그런 건 없습니다. 뭐, 이상한 꿈 같은 걸 꾼 적은 한두 번 있는데 그거야 흔히 있는 개꿈이었으니까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꿈...인가....."



타라소프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히카게 또한 갑자기 그러한 것을 묻는 선생을 다소 의문을 담아 쳐다보기는 했으나, 단지 그 정도

였다. 이윽고 무한할 것 같던 잔소리의 행렬에 당하던 센도가 울상을 지으며 마침내 해방되었고, 히카게는 꾸벅 인사를 한 뒤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반쯤 징징대는 그를 이끌곤 밖으로 나갔다. 창문 틈으로 들어온 햇살이 너무나 눈부셔, 그의 뒤에서 향해지던 

빛바랜 푸른 잿빛의 눈동자조차 눈치챌 수 없었다.





*          *          *





     어둑어둑한 하늘이었다. 노을이 내려앉은 무렵. 낡고 오래 된 건축물 안에, 소년은 서 있었다. 가라앉는 해를 받은 그 그림자는

그야말로 지고의 제국의 흔적. 파비안 카스틸리에 데스테는 살짝, 안경을 고쳐 썼다. 잿빛 머리카락이 묘하게 반짝거렸다. 경비원들이

순찰을 돌 법도 하건만, 그렇지는 않았다. 자신의 마술이 제대로 발동할 확률은 지극히 낮으므로, 믿을 만한 자를 사용해 일단 재워두었으니까.

그다지 힘든 일이 아니었기에 금전적으로 무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차라리, 이런 게 낫겠지."



섣불리 촉매를 정한다면, 아마 그것으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커녕 어떻게 운 나쁘게 휘말려버린 누군가가 불려 나오거나, 잘 알지도 못했던.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이가 불려 나올수도 있다. 그런 괜한 도박은 하고 싶지 않다. 그 전에 특별히 골라 촉매를 공수해 올 만큼 

바라는 영웅이 있는 것 또한 아니었으니까. 허나, 그렇다고 성유물 없이 소환을 한다면 애당초 소환 자체가 제대로 될까도 알 수가 

없다. 보장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고른 것이 이것. 아니, 이 곳.



제국의 투기장(Colosseum)



장소 자체를 이용한다니, 누군가 들으면 미쳤다고 할 수도 있을 법한 발상이었지만 파비안은 그리 생각하지만은 않았다. 범위를

줄이는 역할 정도야 충분할 것이다. 대강 예측되는 것은 이 곳에서 순교한 사도, 혹은 검투사일까. 그 정도면 나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아예 정 반대로 어긋나버릴 확률이 지극히 높은 것에 비해서는 감사하고 싶을 정도의 결과이겠지. 기원 레벨의 문제니까,

어떻게 고칠 수도 없는 일이고. 아니, 고칠 수가 있다면 적어도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었겠지. 이 것을 하려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애당초, 그 해결 불가능한 문제가, 다른 모든 일들의 근원이었으니까.



파비안은 마지막 남은 파니니 조각을 입에 쑤셔넣었다. 규모가 규모인지라 진을 그리는 것은 굉장히 오래 걸리고, 조금은 다리까지

아플 정도로 수고로운 일이었지만. 파비안은 그런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페트병 속에 든 레몬 소다를 벌컥 들이키고, 빈 봉투와

병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강한 인간들도 있을 것이다. 정말로 정말로, 죽을 만큼 간절한 놈도 있을 것이다. 그냥 미친 놈도 있을 것이고, 예상은 잘 되지 않지만

어쩌면 재수 없게 휘말려버린 인간도 있을 수 있겠지. 또한, 이 정도로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곳에 뛰어든다면 바보라고 할 사람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아. 자신은 이겨서, 이루어서, 바꾸어야만 한다. 그렇게, 약속했으니까.



모두 스스로의 삶 나름. 그저 재미를 위하든, 바램을 위하든. 그 기도의 가치는, 그 목적의 옳고 그름을 감히 내릴 수는 없겠지. 뭐,

적어도 상식적인 선에서는.



채워라. 채워라. 채워라. 채워라... 파비안은 천천히 첫 소절을 읊기 시작했다. 나른한 듯한 음색이 다소 쉰 듯한 소리를 냈다. 아.

이것은 나름대로 긴장하고 있는 건가. 성공과 실패에. 그래. 단 한 번 뿐인 기회를, 말 그대로 다시는 존재하지 않을 기회를 눈 

앞에 두고도 전혀 아무렇지 않다면 자신이 더 이상한 놈이겠지. 



"고한다."



다른 이들의 목적이 어찌 되었든, 비웃거나 얕보지 않는다. 반대로, 내가 그런 꼴을 당할 이유도 없지. 스타트 라인은 동일하다. 

주어진 기회는 동일하다. 목적도 소원도 그런 부차적인 것이 어떻게 되든간, 결과는 아직 아무도 알 수 없는 일. 파비안은

쉬지 않고 읊었다.



"그대의 몸은 나에게."



──여기서 명하노니. 그대의 검에 나의 축복을.          



"나의 운명은 그대의 검에."



──여기서 말하노니. 그대의 방패에 나의 영광을.          



"성배의 인도에 따라 이 뜻. 이 이치에 따른다면 답하라."



──여기서 바라노니. 그대의 바램에 나의 기원을.          



"여기에 맹세하니."



──여기서 고하니. 나의 기적은 그대의 영원이 되어.          



"나는 만상의 선을 베풀 자."



──여기서 맹세하니. 이 땅에 깃든 기도로 말한다.          



"나는 만상의 악을 물리칠 자."



──오랜 약속 아래에, 내게로 오라.          



"그대 삼대의 언령을 두른 일곱 하늘. 억지의 윤회로부터 오라. 천칭의 수호자여!"



──여기서 나 감히 소리 높여 외치리라.           

──그대의 검은, 승리하리니!           





붉은 노을이 세상을 채웠다. 



파비안 미켈레 카스틸리에 데스테는, 틀림없이 담대하다,고 평할 수 있는 소년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저 세상사에 무관심하여, 반응이

옅은 것일지도 몰랐지만. 적어도 표정이 바뀌는 일이 자주 있지는 않았고 무엇인가에 놀라거나 하는 일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세 가지. 이 의식이, 눈 앞의 존재가 무엇인지 모르는 자이거나.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위험하다 할 정도로 침착하고 뛰어난 상대이거나. 아예 바보 혹은 광인이겠지.



분명히, 수천 년 전의 낡은 건축물이었다. 그 당시에는 댈 것 없이 뛰어난 업적이었어도, 지금 남은 것은 단지 그러한 역사적인 가치일

뿐. 아치형 기둥의 곡선은 물론 감탄해야 마땅하지만, 결국 그 정도 뿐이었다. 그런 것들을 제하고 본다면, 그저 반쯤 무너져내린

석조 건축물. 그런데, 어째서-? 풍경이, 모습이 바뀌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순간적으로 눈에 들어온 광경은, 스쳐나간 모습은

황금으로 장식된 호화로운 모습. 화려하게 꽃이 뿌려진 경기장의 한복판. 깃발은 높이 세워지고, 군중의 환호가 귓가에 울린다. 

향긋한 와인의 향이 희미하게 맴돌고, 승리를 고하는 검이 태양 아래서 빛난다. 흠칫 놀라는 소년의 눈동자. 



역시, 착각이었나. 그렇지만, 어째서-? 소년의 시선이 헤매이던 끝에 눈 앞에 닿는다. 그리고는, 경직. 



파비안은 아직도 경악스런 얼굴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유 그대로, 소용돌이마냥 몰아치는 것 같은 마력의 흐름에 손 끝이 떨렸고.

범인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알 수 없는 위압감에 똑바로 고개를 마주하고 있는 것이 다였다. 그리고, 눈 앞의 존재가. 말 그대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외모를 하고 있었기에 사태를 따라잡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말문을 닫고 있을 뿐이었다.



올려 묶은 금빛의 머리카락. 보통 사람들보다도 훨씬 작은, 십 대 초반 소녀라 해도- 아니, 그 중에서도 작다고 할 법한 체구. 해질녘

노을을 담은 에메랄드의 눈동자. 고고한 왕의 지팡이마냥 땅에 짚은 것은 거대한 대검. 흩날리는 붉은 옷자락. 어쩐지 조금, 고양이를

닮은 느낌의 입가에 깃든 웃음. 자신감이 찬 미간. 소녀는 도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것으로, 서번트 세이버. '같고도 다른 성배 전쟁'에 여섯 번째 서번트로 참가.

──이제 남은 것은, 단 한 기 뿐.






*           *          *





   "으아아...오늘도 길었다───"



벌써 깜깜한 한밤중. 아니, 새벽이 가까워져 올 시간이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거리, 화려하게 장식된 일루미네이션도 슬슬 꺼져갈

시간. 원래대로라면 열 시 즈음에는 일을 마치고 이미 집에 들어왔어야 했지만, 슬슬 연말이라 그런지 이리저리 모임이 많았고,

열 한 시 조금 넘어서, 가게 문을 닫을 때가 다 되어 나간 마지막 손님들의 자리까지 정리하고 보니 어영부영 자정. 점장은 물론

데려다 주겠다고 했지만-그 전에 그냥 자진해서 늦게 남은 것은 히카게였지만- 그것은 거절했다. 여성 아르바이트생이라면 확실히

그 쪽이 당연할 테지만, 나이도 먹을 만큼 먹고, 키도 클 만큼 큰 남학생이 조심할 건 강도 정도 밖에 없을 테니까. ..희귀한

취향을 가진 치한 따위, 없다고 믿고 싶다.



히카게는 멍하니 조금 시선을 올렸다. 별이 보이지 않는 하늘을 보곤 다시금 시선을 정면으로 향한다. 어째서일까, 문득 여러 단상이

밀려오지만 아직까지도 불이 환하게 켜진 몇 안 되는 가게, 편의점을 지나 골목길로 발을 옮겼다. 작게 한숨을 내쉬자, 눈 앞에 뽀얀

김이 두둥실 떠오른다.



"이제 좀 있으면 새 해인가..."



벌써 그렇게 되었네. 오늘이 10일이니까...딱 3주 남았다. 그 전에 크리스마스가 있으니까... 기말 고사야 뭐, 어떻게든 되겠고. 일단

할아버지 할머니 드릴 선물하고...나루미랑 나기사...나기...으으, 역시 단기 아르바이트 뭐 하나 찾아봐야 하나..? 확실히 교통비는

걸어다니면 아낄 수 있고. 학교는 장학금..이니까 학비는 괜찮고. 생활비나 세금은 할아버지가 내시니까 괜찮지만... 애들 유치원

학비 말고 이리저리 내는 돈은... 그렇다고 사실 그 돈까지 내야 한다고 할아버지께 말씀드리고 싶지는 않으니까. ... 역시 장학금

못 받으면 대학은 패스해야 하려나...



아아. 모르겠다. 나중에 생각하자.



지칠 대로 지친 소년은 아무래도 집에 가서 우유라도 마셔야겠다고 생각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타박, 타박, 타박. 인적 드문 한밤중의

주택가에, 아스팔트를 딛는 발소리만이 울려퍼진다. 그리고 뚜벅. 뚜벅. 뚜벅. 또다른 발걸음 소리가 있었으나, 히카게는 관심을 두지

않고 계속 길을 걸었다. 말 그대로 길. 다른 사람이 걷는대도 이상해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단순한 행인의 발소리가

아닌 듯 하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세 번의 골목길을 돌고 나서도 계속 따라오는 것을 듣고서야.



히카게는 발을 멈췄다. 



어떡하지. 강도인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싸움은 딱히 자신이 있지도 없지도 않다. 어지간해서는 그런 일에 말려들고 싶지 않았으니까.

아니, 그 전에 애들 싸움의 경험이 도움이 될 만한, 그 방식을 써도 먹힐 만한 상대인가? 사고(思考)의 속도를 높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그냥, 그냥 달릴까? 확실히 행인은 아니다. 우연히 같은 방향에 가는 것도 아니다. 그랬다면 어째서, 그가 

발을 멈추자 소리도 똑같이 멈춘 것인가──



뒤를 도는 것이 나은가? 전력으로 달리는 것이 나은가? 



──그래. 정했다. 



히카게는 땅을 박찼다. 몸놀림이 가벼운 편이라고는 스스로도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전력으로 달린다면, 대로로 빠져나간다면. 소년은

쉴 새 없이 뛰었다. 몇 분이나 달린 걸까. 작은 골목이지만 몇 블럭이나 지난 걸까. 계속해서 쫓아오던 발소리는 어느새 들리지 않았지만,

히카게는 멈추는 대신 더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마지막 골목, 저기만 꺾는다면 대로는 코앞이다──!



소년이 오른쪽으로 몸을 홱 트는 순간, 그림자와 부딪혔다. 설마, 설마. 어째서? 설마 자신이 여기까지 오리란 걸 예상하고 이리 

온 건가? 도대체 무얼 위해서? 수만 가지의 생각이 머릿속에 쏟아지는 것을 막은 건, 익숙한 저음이었다.



". . .키류 군?"



"..... 타라소프, 선생님?"





*          *          *





     "이제 좀 진정이 되는가?"



"아, 예. 감사..합니다."



히카게는 가만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약간은 착란 증세까지 보인 듯한 자신을 타라소프 선생이 이 곳으로 

데려온지 약 반 시각. 이미 자정은 지나, 하루가 넘어간 시간이었다. 대로변에서 바로 내려온 강 둔치의 공원. 공원보다는 그저 산책로에

가까운 곳이었지만, 벤치도 자판기도 오히려 공원의 그것에 가까울 정도였다. 타라소프가 자판기에서 뽑아 온 페트병의 물을 

단번에 들이킨 히카게는, 그제서야 호흡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히카게가 조금 진정한 것을 확인하고서야, 러시아인 교사는 늘 그렇듯 무뚝뚝하고, 변함 없이 침착한 목소리로 가만히 물었다. 

푸른빛 도는 잿빛 눈이 언제나처럼 무감정한 표정으로 보는 것을 눈치 챈 히카게는, 조금 멋쩍어하는 듯 어색하게 대강을 설명했다.

자세히 설명하고 싶었어도, 히카게 자신도 아는 것이 없으니 그것은 불가능한 것.



"──아무래도, 그냥 강도나 뭐 이상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가."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말 없이 손에 든 페트병을 쳐다보던 히카게가, 더 이상 폐를 끼칠 순 없다고 생각하며 슬슬 입을

열려는 때, 말없이 있던 교사가 갑자기 물었다.



"키류 군. 괜찮다면, 자네 손의 그 상처란 것. 한 번 봐도 되겠나?"



"에...? 에..별로 상관은 없습니다만..."



영문은 모르겠지만, 일단 반드시 숨겨야 할 이유도 없으니까. 굳이 말하자면 아무리 봐도 일부러 새긴 것 같은 모양새란 점

정도 뿐이니까. 히카게는 약간 의아해하면서도, 천천히 손등에 맨 붕대를 풀었다. 뚫어질 듯 히카게가 움직이는 양을 바라보던

타라소프의 표정이 희미하게 굳는 것을, 그가 눈치채는 일은 없었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런 게 생긴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색한 공기를 어떻게든 무마하려는 듯, 서투르게 두서없이 중얼거리는 히카게의 말을 가로막은 건, 쉰 듯 가라앉은 타라소프의 

목소리였다. 



"──키류 군. 묻고 싶은 것이 있다네."



"...네?"



"아비가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에."



히카게는 말문이 막혔다. 그로서는 기껏해야 책에서 읽은 내용 정도로밖에 대답을 하지 못할 질문이었다. 영화나 드라마 따위에서 

나온 정도의 대답밖에 할 수 없는 그였다. 부친도 모친도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었고, 부친에 이르러서는 이름조차, 국적조차

알지 못했으니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어쩌면, 그의 바램이었다. 평상시에는 한 번도 생각한 적 없었고, 현재에 감사하며 사는 소년이었지만. 그런 생각 한 번 정도

해보지 않았을 리가 없다. 사이 화목하게 웃는 숙모 가족을 보며 그런 부러움을 한 번도 가슴에 앉은 적 없을 리가 없다. 그렇기에,

가끔은. 아주 가끔은. 내심은. 아주 깊은 내심에서는. 본인도 모르는 새, 그것을 바랬고 단지 포기하고, 혹은 잊으려 애쓰고 있을

뿐이라고. 



빛 바랜 금발 남자는 가만히, 미동도 없이 히카게에게 시선을 향하고 있었다. 고개가 희미하게 상하로 움직인다.



"...선생님...?"



키류 히카게가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은 것도 그 순간. 그는 실례가 된다는 걸 알면서도 벌떡 일어섰다. 잘 표현은 할

수 없지만, 무엇인가가 분명 이상한 느낌이다. 무언가, 꺼림칙하고── ... 그런데 어째서. 왜 이렇게 조용하지?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차들이 달리는 소리 정도는. . . 



"──그것이 자네의 대답인가. 그래. 맞는 말이지. 나 또한 그렇다네."



무슨-? 그걸 어째서 내게? 이유를 더 이상 생각할 시간 또한 없었다. 그저 직감이 내린 명령에 따라, 히카게는 냅다 뛰었다. 점점 텅 

비어가는 생각 속에서, 오늘은 액일이라는 것만이 간신히 떠오를 뿐이었다. 어디로 가야 할 지 알 수도 없었다. 어째서 달리는지도

알 수 없었다.



"──!!!"



그저 달리고 달리고 달리고. 그러다가 눈 앞에 사뿐히 내려앉은 그림자에, 히카게는 미끄러지듯 땅에 굴렀다. 분명 어디선가 본 듯한-

타라소프 선생님의, 책상 위 사진-?



길게 늘어뜨린 백금발의 소녀는 초점이 흐린 멍한 녹청색 눈을 하고 있었다. 입은 옷은, 방금 저 소녀가 어딘지도 모를 곳에서 도약해서

내려왔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치렁치렁한 옷자락. 거기에 한 쪽은 맨발. 한 쪽은 굽이 부러진 샌들. 춥지는 않을까, 따위의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저 어떻게 하면 이 자리에서 도망칠 수 있을까, 그 방법에 온 몸의 신경을, 온 생각을 쏟아붓는다.



"──키류 군. 이렇게 된 것이 원망스럽지 않나? 나 또한 안타깝게 생각한다네.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뚜벅, 뚜벅. 구둣발 소리를 울리며 다가온 큰 체구의 남자는 여전히 무심한 표정, 하지만 무언가 안쓰럽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이건 뭔가 아니야. 이것도 꿈인가? 아니. 어째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하지? 아무것도 아무것도, 전혀 하나도 모르겠다고!



"이유를 모르겠다는 얼굴이군. 그래. 모르겠지. 또한, 엄밀히 말해 자네의 탓은 아니니."



그렇다면 어째서- 어째서!!! 반쯤 쉬어버린 목소리는 그 짧은 마디를 내뱉는 도중에도 완전히 잠겨, 히카게는 맨 입을 움직여 댈

뿐이었다. 



"하지만, 자네가 말했듯이, 나는 딸아이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생각이네. 그리고, 자네는 정말로 . . . 운이 나빴어."



싸구려 악당의 협박이니 설명 같은 건 집어 치우라고! 히카게는 손바닥이 콘크리트에 쓸려 갈라지는 것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금발의 소녀를 지나 다시 전력으로 달렸다. 뭐야, 이건. 이 기분 나쁜 건──! 



꼴불견이고 자시고를 따질 문제가 아니었다. 피하지 못하면 죽는다. 근거조차 댈 수 없었지만 감은 확실하게 고하고 있었다. 전력으로

땅을 박차던 소년의 뒷모습을 변화 없는 눈동자로 바라보던 남자는, 옆의 소녀에게 조용히 말했다.



"...미안하지만, 좀 더 수고해야겠구나."



끄덕. 여전히 인형과 같이 표정이 담기지 않은 얼굴이 희미하게 상하로 움직이고, 소녀는 '날아올랐다'. 정말로 하늘을 난 것이 아닌,

그저 높이 도약한 것 뿐이었지만 그 높이도, 화려함도, 날아올랐다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릴 터이다. 



그렇게 사라지는 소녀의 뒤를 이어, 발걸음을 옮기는 타라소프 - 례프 니콜라예비치 이바노프는 진심으로 소년을 가엾이 여겼다. 또

동시에, 상대가 소년이라 다행이라고도 생각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혈육은 끔찍이 사랑할지언정 타인에 대해서는

가치를 두지 않는 자였지만, 근래에는 이만치도 무르게 되어버렸다. 스스로가 자신의 딸아이로 인해 그리도 슬프고 괴로웠으니, 

아마 다른 누군가가 자식을 잃는다면, 그것과 같은 심정이겠지. 하지만 소년은, 그 가여움 속에서도 다행히도 부모가 없었다. 

교사는 언젠가 다른 선생들이 잡담한 몇 마디조차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으며, 그것이 유독 눈에 띄는 소년의 일이라면 더 잊을

리가 없는 이야기다.



"...싸구려 협박은 할 생각이 없지만."



링크를 통해 흘러들어오는 소녀의 움직임을 따라, 남자는 천천히 움직였다. 눈이 내릴 것처럼, 구름이 내려앉은 밤하늘이었다.








   "───!"



숨이 가빠온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도대체 어디일까. 얼마나 달렸을까. 어디를 달리고 있는 것일까. 뒤에 따라오는 흔적 따위 들리지

않음에도, 히카게는 계속해서 발을 놀렸다. 숨이 넘어갈 것 같은 기분을 억누르며, 온 힘을 다해 발을 땅에서 뗀다. 



"....어?"



한 번 숨을 들이키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차가운 공기가 기도를 막을 것처럼 몰아친다. 켁,켁. 잔기침을 하며 가쁜 숨을 고르면서도,

키류 히카게는 눈이 고정된 것마냥, 단 한 곳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분명히, 아까. 교사와 앉아 있던 곳. 그 곳이 멀찍이 보일 정도의

거리. 손끝이 덜덜 떨려온다. 분명히 다른 곳으로 달렸는데. 어째서. 어떻게 다시 이 쪽으로. 



다리에 힘이 풀린다. 털썩 주저 앉은 소년은 그제서야 한 쪽 팔에 은빛의 칼날이 박혀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툭, 툭.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시작으로 축축하게 젖어오는 팔을 보며 히카게는 멍하니 생각했다. 이것은 꿈인가? 꿈이라면 부탁이니까. 이제 그만 끝내 줘. 

다쳤다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몰려오는 고통에 무얼 해야 할지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한 채 그저 한 쪽 팔을 다른 쪽 손으로 꽉 쥘 뿐

이었다. 어떻게든 흘러내리는 피를 막아보려는 무의식의 발버둥.



"키류 군."



천천히 다가오는 그림자에, 마지막을 깨닫고는 눈을 감는다. 아아. 내가 여기서 죽는다면, 할아버지 할머니는 어떠실까. 슬퍼하실

것이다. 동생들에게는, 거짓말을 하실지도 모르지. 형은 여행을 갔다고. 포기하는 순간, 공포는 사라졌다. 그러니까, 나는 괜찮아.

괜찮으니까, 슬퍼하지 않으셨으면, 울지 말아주면 좋겠는데. 



──정말로 괜찮습니까?          



무엇인가를 들은 듯 호박(瑚珀)의 눈동자가 크게 떠진다.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은── 어딘가,였는지 찾아내지 못한 채, 히카게는

천천히 다가오는 금발의 소녀.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한 떄의 교사를 쳐다보았다. 지금 설마, 저 여자애의 목소리...일 리는 없겠지.

도대체 누구-? 어째서 그런 말을-?



"...그것만을 강탈하고, 기억을 말소시키는 것으로도 나는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입장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라, 여러 가지 때문에 그렇게는 할 수가 없겠군. 진심으로 미안하네. 안타깝다는 듯 무어라무어라 말하는 교사의 목소리는

분명 뚜렷했건만, 머리는 그것에 대해 단 한 가닥의 주의도 기울이지 않았다. 그저 툭, 한 마디. 젠장, 이라고 욕설이 흘러나올 뿐.

그 외의 다른 모든 것은, 이유조차 알 수 없지만 순간 들렸던 목소리에 향해 있었다. 어쩌면, 환청인지도 모르지만.



──당신의 가족이... 조부모가, 형제가 슬퍼할 겁니다. 그래도 괜찮습니까?          



정말로, 포기할 겁니까? 목소리는 물었다. 동시에 또 한 번, 만에 하나라도 도망칠 가능성을 배제하려는 듯 다리에 칼날이 꽂혔다. 

이젠 통각조차 먼 나라의 이야기 같다.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다. 히카게는 신음 소리 한 번 흘리지 않고, 멍하니 생각만을 계속했다.

어쩔 수 없잖아. 이 상황에서, 저런 것한테서 도망친다니, 그런 거 불가능이라고.



──불가능이 아닙니다. 시도조차 해 보지 않는 겁니까?          



시끄러워!!! 목소리는 잠깐 말을 멈추었지만, 이윽고 히카게의 생각에도 아랑곳않고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단 한 가지를 묻겠습니다. 당신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소중한 것──... 우스운 질문이었다. 죽기 전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게...당연히....가장....소중한.....



유치원에서 넘어졌다며 울음을 터뜨리며 교실에서 나온 나기. 축구 하다가 골을 넣었다며 기뻐하던 나기사. 뻔한 스토리의 애니메이션을

흥미 가득한 눈동자로 눈을 반짝이며 보던 나루미. 자신이 언젠가 먹어 보고 싶다고 접어두었던 페이지의 요리를 하시고는 깜짝 놀래켜

주고 싶었다며 웃으셨던 할머니. 어릴 적 머리칼을 쓰다듬어주시곤 했던 할아버지. 조금은 소란스럽지만, 싫지 않았던 같은 반 학생들.

모르는 척 했지만, 항상 자신을 챙겨주곤 했던 아르바이트의 점장님. 시원한 강바람. 차가운 겨울 아침 공기. 유난히도 눈이 부신

겨울의 햇살. 피곤했어도 항상 그대로 화려했던 건물들의 조명. 



가족이었고, 세상이었고. 그저 모든 것에──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살고 싶습니까?          



코 앞까지 다가온 금발의 소녀가, 흐릿하게 보이는 무엇인가를 치켜든다. 드디어 끝인가. 그 사실을 자각함과 동시에, 수많은 목소리가

파도치듯 흘러든다. 온 몸을 가득 채울 정도로, 수많은 목소리들이.



"──여어, 히카게! 오늘 같이 농구라도 하지 않을래?"


"에휴. 너도 참 고생이다. 흥, 오늘 특별히 만든 스페셜 메뉴니까. 후딱 먹어보라고."


"히카게. 할애비가 이 정도밖에 해 주질 못해서 미안하구나."


"앗, 고맙습니다, 착한 오빠!"



"형, 그럼 정말로, 쿠마 군 같은 인형, 나도 주는 거지?"



아. 그래. 약속. 약속을 지켜야... ──톡. 톡. 손끝이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꼭 지키기로 한 약속이 있어. 돌아갈 가족이, 장소가 있어.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간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 해 보고 싶은 일이 있어. 나는. 나는. ...않아... 나는...



살고 싶다고──! ! !



금발 소녀의 팔이 내리쳐짐과 동시에, 히카게는 눈을 질끈 감았다. 예상했던 통증은 - 오지 않았다. 뭐지. 어떻게 된 거지? 소년은 살그머니,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크게 떠진 황금의 눈동자는 경악에 찼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춤을 추듯 나부끼는 달빛의 머리칼이었다. 아마도- 태양 아래서 본다면 조금더 푸르를 백은의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어 길게 늘어뜨린 뒷모습. 조금이지만 하늘빛을 띈 머리와는 달리, 새하얀 의복. 목을 타고 날갯죽지까지, 옷이 감싸지 않은

곳에서 유연하게 흐르는 곡선. 지금 주저앉아 있는 채로는 제대로 볼 수 없지만, 키는 히카게보다 한 뼘 정도는 작을까. 가늘가늘한  

체구지만, 히카게로서는 뭐라 표현할 길이 없는 분위기. 그렇지만, 단 한 가지. 정면을 보지 못했음에도, 그저 처음으로 본 것 뿐임에도.

'청명하다'는 인상을 주는 존재가 그의 눈 앞에 서 있었다.



움찔. 여유롭게 그를 뒤쫓던 금발의 소녀가 재빨리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뭐지──? 어째서 갑자기...? 



"──소환, 한 것인가."



이를 악문 채, 한 때의 교사는 쥐어짜내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소환이라니 그건 무슨──? 지금 이 모든 상황의, 저 말의 해답이 될

것 같은 눈 앞의 존재는 여전히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아무런 말이 없다.



". . . 돌아와라, 일단은 돌아가자꾸나."



끝까지 히카게를 쫓을 것만 같았던 선생이 나즈막히 읊조리고, 금발의 소녀는 튕기듯 그 말에 응했다. 어째서. 갑자기 무슨 변덕으로-?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선생이 사라지자마자, 완벽한 정적에 묻혔던 자동차의 경적 소리, 취객들의 웃음 소리가 눈에 띄게 가까워졌고.

키류 히카게는 이 꼴을 누군가 본다면 결코 간단히는 끝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직감했다. 그것은 눈 앞의 존재도 마찬가지였는지,

들릴락말락한 목소리로 짧게 실례하겠습니다──고 중얼거리고는. 그래.



히카게를 잡은 채. 냅다 뛰어올랐다. 



일순으로 멀어져가는 도시의 거리. 벤치. 강물을 바라보며 멍하니 어, 어..? 란 짧은 신음만을 흘리던 히카게는, 가볍게 내려앉고서야 

자신이 근처의 고층 빌딩 옥상에 앉아 있다는 - 혹은 앉혀 졌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리고, 은빛은 가볍게 뒤를 돌았다. 



──아마, '소녀'는 히카게가 여태까지 본, 그리고 앞으로도 볼 존재 중 가장 아름다운, 아름다울 사람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티 한 점 없는 푸른 눈동자에, 긴 속눈썹이 그늘을 드리우고. 초승달을 그리는 눈썹은 부드럽게 눈꺼풀을 위를 지나고

있었다. 손바닥으로 가리고도 남을 법한 얼굴은, 우유를 녹인 것마냥 투명했고, 양 뺨에는 복숭앗빛 생기가 옅게 자리하고 있었다. 

형태 좋은 콧날 아래에는, 흔한 비유지만 장밋빛 입술. 하지만 무엇보다도, 무엇보다도 시선을 잡아끈 것은 새벽 하늘색과 같은

눈동자로── 거기까지 멍하니 생각하고서야 히카게는 자신이 정신 없이 사람의 얼굴을 감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건 무슨 실례를... 아니, 누구지? 윽.... 



실례를 저질렀다,와 소녀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마음과, 상처로부터 기다렸다는 듯 몰아치는 고통에 히카게는 절로 눈을 찌푸렸다.

상처 하나 났다고 질질 짜는 도련님은 아니지만, 유석에 이건 상처 하나, 의 레벨이 아니잖아... 일반인이 이런 거라면 뉴스 기사

직행이라고... 



그런 히카게의 표정은 안중에도 없는 듯, 은발의 소녀는 주위를 가볍게 훑더니 재빨리 다가와 나이프에 꿰뚫렸던 팔을 살짝 잡았다.



"──우왓?!"



"....보구, 도 아닌...그저 진짜 단검,인가. ...다행, 이다."



"...보구...?"



들리는 것은 분명한 소녀의 목소리였지만, 톤 높은 고음보다는 오히려 맑게 울린다,는 비유가 어울릴 법한 느낌이었다. 진심으로

듣기 좋은 음색이었지만, 그 말 속에는 도저히 영문 모를 단어가 숨어 있었기에, 소년의 신경이 그리 쓰인 것은 당연지사. 

히카게가 작게 중얼거린 말에, 소녀는 놀랍다는 듯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다.



"──정말로, 모르셨나이까. 하오면, 후에 말씀드릴 터이니, 부디 조금만. 조금만 참아 주시옵소서."



맑은 목소리의 소녀가 빠르게 말하자, 오히려 벙 찐 것은 히카게 쪽이었다. 오늘따라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마구 생기고, 신경

쓰이는 것도 수십 가지로 바뀌어대는 것 같지만 어쩔 수 없지 않는가. 아무리 봐도 일상과는 백만 광년쯤 떨어진 일들이다. 

칼에 팔다리가 뚫린 채로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에 스스로 신기해했지만, 그 전에 히카게는 소녀가 사용한 극존칭에 어쩐지

몸 둘 바를 모르고 있었다. 분위기로 보나 뭐로 보나, 저런 말을 쓴다면 그건 자기가 써야 할 것 같지 않은가.



하지만 소녀에게 그런 것은 당연한 일인지, 그녀는 히카게의 팔을 잡은 채,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무엇인가를

외우는 듯 싶기도 하고. 어쨌든, 히카게로서는 무슨 뜻인지 모를 말이었다. 그러기를 잠시. 문득, 키류 히카게는 팔이 더 이상

떨어져 나갈 것처럼 아프지 않다고 느꼈다. 살짝 내려다보니, 희미한 핏자국만이 남아 있을 뿐, 그것이 끊임없이 흘러내리던 

상처는 언제 그랬냐는 듯 깨끗하게 아문 채.



"...어떻게....?!"



"잠시, 다리도 바로 치유할 터이니, 외람된 말씀이지만 조금 자세를 바꾸어 주실 수 있으오리까."



고풍스런 말투의 극존칭을 그대로 사용하며, 소녀는 히카게가 다리를 뻗자마자 또다시 알 수 없는 소리를 읊었다. 그리고, 방금

보았던 대로. 다리 역시 팔처럼 깔끔하게 상흔 하나 남기지 않고 언제 다쳤었냐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건....."



"제가 부족하여, 이 정도가 한계인 것을 모쪼록 용서하소서. 의복은 어찌할 수 없었나이다."



"아, 아니. 정말로, 괜찮...그런데, 이건 대체 뭐 하는 거야? 너는 대체 누구지? 방금 보구 어쩌고라던가, 타라소프가 한 말이 무슨

뜻이야? 대답해, 넌 알고 있지?!"



실례가 되는 말투였다. 자각은 하고 있었다. 하다못해 초면의 상대에게 경어 정도는 사용해야 했지만. 그렇지만 지금 모든 것이,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다 상황을 알고 있는 것 같은 감각에 히카게는 쏟아져 나오는 의문들을 그대로 부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 히카게의 고함, 혹은 약간은 신경질에 가까운 말에도 소녀는 기분 나쁜 표정 한 점 띄우지 않은 채, 차분히 대답했다.



"──귀하께오서는 성배 전쟁의 마스터,가 되신 것이옵니다."



"...성배.....전쟁....그건 또....."



"천천히, 제가 아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고하리다. 아마도 의문을 푸실 수 있을 설명을 지금 올릴 터이니, 조금만 더 들어주소서."



거기서 더 다그쳐봤자 바뀌는 것도 없고, 그렇게까지 하고 싶은 마음은 어쩐지 들지 않았기에, 히카게는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천천히, 맑은 목소리가 뽑아낸 내용은 그로서는 도저히. 아무리 생각해도. 절대로 믿을 수가 없었던 것들. 마술. 마술사.

소원을 들어주는 원망기. 전쟁. 영령. 사역. 마력.



"...지금, 그걸...믿으라고..하는 거야...?"



여전히, 온화한 무표정을 띄운 소녀는 그저 묵묵히 대답할 뿐이었다.



"...제가 무어라 더 말하지 않아도, 이미 귀하께오서도 그 질문의 답을 아시지 않사옵니까. ...답을 알면서도 반복해 묻는 것은,

그리 좋은 습관이 되지 못하리라고. 감히 말씀 올리나이다."



"──하지만 난 그런 거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고! 난 이런 거, 하고 싶지 않아!"



다소 막무가내에, 공격적이라고까지 느껴질 수 있는 히카게의 반응이었지만, 소녀는 눈을 내리깐 채 조용히 대답했다. 



"...그것이 진심이시라면, 아마도 이 전쟁을 관리할 - 아마도 '교회'란 곳의 관계자에게 가서 그 의사를 밝히시면 생각대로 하실

수 있으오리다."



"....정말...?"



소녀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락, 하고. 파도치는 은발이 바다거품이 사그라들듯 자그마한 소리를 냈다. 그런 소녀를 보며,

히카게는 문득 자신이 무언가. 굉장한 실례를 범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떠올렸다. 지금 저 설명에 따르면, 자신에게 이 '령주'란 걸

부여한 것은 '성배'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자신의 태도는, 어딜 봐도 이 소녀에게 화풀이하는 것 밖에 되지 않아. 그렇게

생각하자 소녀에게 미안해진 히카게는, 곧바로 숨을 가다듬고는 꾸벅 사과했다.



"──미안. 지금 조금 혼란스러워서, 말이..좀 거칠게 나왔어."



그런 반응에, 오히려 의아해한달까, 희미하게 당황스러워하는 듯 보이는 소녀. 처음으로 '부드러운 무표정'외의 다른 감정이 소녀의

얼굴에 스쳤다. 



"...감히 제게 사과하실 필요는 없나이다. 귀하의 상황이었더라면 이보다 더 당황하셔도 무리 없는 일."



"...그래도. 잘못한 건 잘못한 거니까. ...그런데, 내가 가서 '마스터'자격을 포기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 거야?"



"아마도 령주를 예의 관리자에게 양도하게 되시리라고 사료하옵니다. 그 이후에 귀하의 기억을 지우고 민간인,으로 돌려보낼지, 

그것에 대해서는 그대로 방치할지. 그것까지는 저도 알 수 없습니다만."



"....양도.....손등을 짼다던가 하는 건 아니지?"



"그런 물리적인 것은 필요치 않사옵니다."



"....그렇구나."



히카게는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아침보다 훨씬 더 뚜렷해진 것 같은, 어둡고 짙은 홍색의 문양. 세 획의 령주. 그것을 빤히 바라보던

소년은, 만약 자신이 이것을 양도하고, 이 자리를 포기한다면 소녀는 어떻게 되는지 묻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럼 너는? 너는 어떻게 되는 거야?"



".....에?"



"내가 만약 이걸 그, 관리자라는 사람한테 양도한다면. 너는 어떻게 되는 거야?"



"....명확히는 알 수 없사오나, 아마도 저 또한 이 세계에 더 이상 있을 이유가 없게 되리라고 봅니다만..."



살짝,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자초지종이 어찌 되었건, 이 소녀는 자신의 '부름'에 답했으며. 자신을 '살려' 주었고. 자신에 의해

결국 이 땅에 내려선 것이었다. 그걸, 시작부터....이렇게....



히카게가 자신의 생각을 하는 것을 눈치챈 듯, 소녀는 재빨리 무마하듯 입을 열었다.



"..혹여라도 제 생각을 하신다면 그러지 마소서. 귀하께서 령주를 양도한다 하셔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 아니. 당연하다고 볼

수 있는 일. 그저, 귀하가 결정을 내리시기 전, 단 하나 여쭙고 싶은 것이 있다면..."



"있다면...?"



"귀하는 진심으로,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셨나이까?"



곧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과연 자신이 바라는 게 뭘까. 아니, 단순히 바라는 것 뿐이라면 그거야 많다. 부모님을 만나 보고 싶다. 혹은

동생들이 하고 싶은 걸 다 하게 해 줄 수 있으면 좋겠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잘 모실 수 있으면 좋겠다. 장래 희망을 이루면 좋겠다. 

그래, 많지만. 목숨을 걸고 싸워서, 불가능한 것까지 이루어 준다는 것에 빌 소원인지, 그런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저런 것들은 스스로

해야만 할 문제들이니까. 동시에, 적어도 어린 아이들은 행복한 세상이 되면 좋겠다- 따위의 바램 또한 갖고 있었지만, 이런 걸 

소원으로 빈다면 너무 어거지겠지. 지나치게 범위가 넓은 것이다. 그렇지만, 정말로, 나 자신도 모르고 있는 바램. 그런 것 또한 없는

걸까.



"...솔직히, 잘 모르겠어."



번지르르한 말 대신, 히카게는 생각한 것을 그대로 입에 대었다. 



"바라는 게 없는 건 아니지만, 기적을 이루어준다는 것에 빌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달까. 나 스스로 노력해서 해야 하는 일의 범주라고

생각하고 있어. 다른 소원은...너무 포괄적이기도 하고- 나도 실현 방법을 잘 모르니까. ...그리고 정말로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을 이겨내서

라도 거기에 빌어야만 하는 것인지 의문이 가서. 난 그런 소원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할 정도로 성인은 아니니까."



"───그렇나이까. 있을 수 있는 일이옵니다. 허나, 귀하는 귀하의 바램을, 너무 낮게 보고 계신 것은 아닌지?"



"......어?"



"주린 이에게 한 조각의 빵은 어느 것과 비할 수 없는 가치 있는 것. 그것과 마찬가지, 라고 사료되옵니다만. 귀하가 무엇을 바랬든,

그것이 다른 이의 것에 비해 격이 낮다고, 혹은 빌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이는 아무도 없사옵니다. 또한,

방법을 모른다 하여도, 그것은 서서히 알아가면 될 일. 귀하가 언급하신 예들은, 현자라도 정확히는 알 수 없는 것. 귀하가 모르는 것은

어떠한 오점도 되지 않으리오."



──혹여, 제 말이 참전에 대한 강권,으로 들리셨다면 용서하소서. 소녀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키류 히카게는 꽂힌 듯, 멍하니 생각했다. 과연 자신이 바란 것은 무엇이었을까. 소녀의 말을, 믿어도.. 저대로 해도 좋은 것일까.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지금 자신의 마음 속에서, 어째선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을 이대로 날려버리면

안 된다고. 그렇게 말하는 소리였다. 히카게 본인도, 그 의지도 이유조차 알 수 없지만 깨닫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냥,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히카게는 그렇다면, 소녀의 바램은 과연 무엇일까, 다소 궁금해졌지만 소리내어 묻지는 않았다. 남의 소원을 함부로 캐묻는 건 

볼 만한 일이 되지 않으리라 생각했으니까. 



"──...저기..."



히카게는 마침내 결심을 내린 듯, 작게 소녀를 불렀다. 예의 그 하늘빛 눈동자가 소년의 쪽을 다시금 곧게 향했다.



"그..뭐랄까. 굉장히 애매하달까, 모호한 태도여서 나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



일단은 해볼게. 내가 바라는 게 뭔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서. 이런 모호하고 목적도 불분명한 태도, 라서 미안하지만...

히카게는 두서 없이 중얼거렸다. 조금은 자신이 없다는 듯한 그런 느낌이기도 했지만, 소녀에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은 듯 싶었다.

분명 히카게가 마스터 위를 포기하리라 생각했었던 것인지, 소녀는 투명한 눈동자를 몇 번 깜빡이며 실감하지 못하는 눈치더니,

수 초가 지나고서야 이해했는지 꾸벅 고개를 숙였다.



".... 홀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자신이지만, 전심 전력을 다해, 귀하를 지키리라고. 감히 맹세하겠나이다."



"엑, 아니아니. 나야말로... 이런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못 하는 '마스터'라서 미안해."



 푸른 눈동자와 황금의 눈동자가, 잠시 마주보았다. 소녀가 히카게의 눈으로부터 무얼 읽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히카게가 

느낀 것은 곧고, 바르고, 흔들림 없이 반짝이는 눈빛이라는 것. 그리고, 어쩐지, 근거 없는 예감이었지만, 히카게는 소녀와 

잘 지낼 수 있으리라고, 그런 확신이 들었다. 다시 반복하지만, 근거는 없어도.



다행한 일인지. 그것은 소녀도 크게 다르지 않은 일이었는 듯, 그녀는 살짝,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물론 그 작은 변화에 또 한 번

히카게가 벙 찐 얼굴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직 면역력이 없는 걸까. 스스로를 다그치는 히카게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녀는 다시금 곧게 일어섰다. 어느 새 시간이 지난 것일까. 사라졌던 바깥의 소리가 다시 조금씩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여기에, 서번트 아쳐(Archer), 부름에 응하여 내려왔사오니 감히 묻겠나이다."



희미하게, 빛이 내려오고 있었다.



"귀하가, 저의 『존중해야 할 자』(Master) 입니까."



대답 대신, 히카게는 살짝 손을 뻗었다. 황송하다는 듯 가볍게 목례한 소녀의 손끝이 스치듯 닿았다. 겨울의 새벽 찬 공기 속에서도,

먼저 입을 여는 이는 없었다.



먼 동이 터오고 있었다.








──서번트 아쳐. 일곱 번째 서번트로 '같고도 다른 성배전쟁'에 참전.

──이걸로 모인 이는, 전원.



남은 것은, 화려하게 춤추는 것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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