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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무흐무

로하《리델》 2012.12.05 05:37 조회 수 : 2






Prologue.   A command







     고요한 오후였다. 아니. 오전이었을까. 시계조차 보지 않고 멍하니 있었을 뿐이니, 알 수가 없었다. 창 밖을 내다보던 시선을

조금 올려, 그 눈에 담긴 눈부신 태양빛으로 그저 짐작이나 할 뿐.



햇볕이 내려앉은 궁성의 안쪽. 누가 설계했는지, 취향 좋게 꾸며진 방의 창가에서, 소녀는 가만히 앉아 창 밖을 내다볼 뿐이었다.

멀찍이서 언뜻 본다면, 사람이 아니라 인형이라 해도 믿을 만큼, 숨을 쉬는지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대어 볼 만큼, 외모도 분위기도

무엇인가가 굉장히 다른 느낌. 어쩐지 적막하다는 느낌마저 줄 정도로 널찍한 방에 혼자 앉아 있는 인형 아가씨. 허리께, 아니. 그

밑까지 길게 흘러내린 금빛 머리카락과, 바깥을 하염없이 담는 묽은 녹청의 눈동자. 



움찔.



소녀는 창문으로 뻗던 손끝을 살짝 멈추었다. 무엇인가를 느낀 듯, 살짝 움츠러드는 흰 손가락. 아아. 또 무슨 일일까. 돌아서 볼

필요 따위는 결코 없었다. 이 궁 안에 존재하면서도 다른 공간에 있는 것과 다름없는 그녀의 방에 『허락』없이, 이 상태 그대로 들어올 

수 있는 이는 그야말로 극소수. 그 중에서도 예고도, 알림도 없이 들어오는 이라면 이 궁 안에서는 한 명 밖에 없을 것이다. 



"『조화의 노래』로렐라이 양. 황제께서 찾으십니다."



남성의 목소리치고 톤이 낮은 편은 아니지만, 듣기 좋게 울리는 미성에 로렐라이,라 불린 소녀는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은둔자, 혹은

은막의 현자라고도 불리는 남자가 특유의 뜻모를 온화한 표정을 지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마치 꿈에서 깨어난 듯, 투명한 눈동자를

몇 번 깜빡인 소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 . . 폐하, 가. . . ."



정무 시간도, 회의 시간 따위도 아니지만 이상할 것 없다는 듯, 소녀는 당연스레 몸을 일으켰다. 폭 안기듯 앉아 있던 벨벳 의자가

부드럽게 흔들렸다. 제복의 재킷도 걸쳐 입지 않은, 그야말로 블라우스에 스커트라는 지극히도 가벼운 차림새였지만, 소녀는 물끄러미

옷걸이에 걸린 제복을 보고는 이윽고 그 대신 옆의 망토를 꺼내 몸에 걸쳤다. 공무 시간이 아니라면, 단정하고 예의에 어긋나지만

않는다면 그다지 흠 잡힐 것은 아닐 테니까. 무엇보다도, 사실 그녀가 뭘 입고 간다 해도 그런 걸로 문제가 되는 일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녀는 또각, 한 걸음을 내딛었다.



──이렇게 불린다는 것은, 분명히 무언가의 다른 일이 있다는 것.



"이번에는 무슨 일이실까요. . ."



부드러운 갈색 머리칼의 남자 쪽. 정확히는, 그 뒤의 문을 향하며 소녀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일순 듣기에는 무심하다 할 정도의

느낌. 대답을 요구하는 것인지 그저 혼잣말인 것인지도 분명하지 않지만, 현자라 칭해지는 남자는 그 사소한 한 마디에도 온화하게

대답했다. 누구에게나 신뢰 받고 있다, 존중 받고 있다, 안심해도 된다, 그런 느낌을 주는 미소를 은은히 담으며.



"글쎄요. 저로서는 알지 못하겠군요."



". . .그렇군요."



어차피. 그것이 혼잣말이 아닌, 진짜 질문이었더라도 그다지 확실한 대답을 기대했던 것은 아닌 것일까.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변함 없는 표정으로 소녀는 가볍게 대꾸했다. 



그 푸른 눈동자는 어디를 담고 있는 것일까. 누구를 향하는 것일까. 그녀 자신 말고는 아무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마치 먼 곳을 보는

듯한 얼굴로 소녀는 말없이 잠시, 눈을 감았다.



무엇인가를 결심한 어린애마냥, 가는 손가락 끝에 살짝 힘이 들어간다. 그리고 소녀는 천천히, 지그시 감았던 눈을 뜨고는 다시

발을 옮겼다. 서두르는 일 없이, 가만히 문을 열었고. 햇볕 탓인지, 바닥을 가득 채운 대리석 탓인지. 눈부시게 빛나는 바깥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궁성의 깊은 곳. 그 심부까지 천천히 걸어간 소녀는, 문 안 쪽에서 『허락』의 말이 들리고서야 그 안으로 들어갔다. 온갖 세공이 화려하게, 

하지만 결코 과하지 않으며 오히려 진중하고도 기품 있게 장식된 옥좌에 앉아 있는 이는 타오르는 홍련과 같은 붉은 머리칼. 눈에 띄는 

외모의 남자. 겉으로 보이는 연령은 분명 젊은 청년이건만, 숨 쉬는 것마냥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위압감은, 아마 그 자체만으로도 대부분의

사람들을 굴복시키기에 충분하겠지.



"왔나."



위압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그 또한 타인과 상당히 다른 분위기(감각)의 소유자인 탓일까. 그저 익숙해진

탓일까. 별다른 감상을 떠올리는 일 없이 변화 없는 고요한, 맑은 음색으로 소녀는 고했다. 무례를 저지르는 일 따위 없이, 완벽하고

자연스럽게, 하지만 동시에 어쩐지 인형과 같은 느낌으로 절하며.



"... 지고의 분을 클레르 세레스타인이 감히 알현하나이다."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절을 마치고, 살짝 고개를 들며 가만히 묻는다. 조용한 홀 안에, 아름다운 목소리 한 가닥만이 울려퍼진다.



"...찾으셨다는 말씀을 전해 받았사오만...."



적발의 남자. 『황제』는 그다지 격식을 차리지 않는 말투로 대답했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본인의 태도일 뿐. 그 밑의 이들이

말투 하나로 그 압도적인 분위기를 어떻게 더 부담 없이 받아들인다거나 하는 것 따위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아아. 뭐, 제안을 하나 해 볼까 해서 말이지. 다른 사람이라도 상관은 없지만, 이왕이면 평소에 잘 움직이지 않는 녀석 쪽이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명령이 아닌 제안. 이렇게 말한다면 그 일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완벽한 그녀의 자유. 거절한대도 무슨 명령 불복종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소녀가 신경쓰는 것은 조금 다른 것인가. '평소에 잘 움직이지 않는 녀석'이라니. 인형만 같았던 복숭앗빛

입매가 희미하게, 아주 희미하게 샐쭉, '인간답게' 반응하지만, 그 이상 드러내는 일 없이 소녀는 입을 열었다. 



"...제안이라니. 과분한 말씀입니다만..... 무례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면, 부디 어떠한 일인지 먼저 여쭈어도 되겠나이까."



"사람을 하나 찾아 주었으면 한다."



사람? 소녀의 미간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보통 사람일 리는 없겠지. 찾을 이유도 없겠거니와, 사람을 풀어서 못 찾는다면 탐색의

마술이라도 펼치면 되는 일. 그런 것이 통용되지 않기에, 이렇게 자신이 여기에 불린 것일 테니까.



"워낙 수시로 거주지를 바꾸고 다니는 녀석이라 한동안 행방이 묘했지만, 이번에 녀석을 찾아냈다. 아무래도 무법지대의 일각에

자리를 잡은 것 같더군.  ...『마법사』라고 한다면 누군지 알겠지?"



순간 흘러나온 무법지대,라는 단어에 움찔. 표정이 바뀐다.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장면들. 수많은 기억들. 피투성이가 된 자신의 

다리. 매맞는 소리. 훔쳐야만 했고. 시체는 흔했고. 순간이지만 스쳐지나간 혐오. 불쾌. 공포. 하지만, 어디까지나 말 그대로 '스쳐지나간' 

것일 뿐, 그 다음의 호칭을 듣고는 가만히 읊조린다.



"...『마법사』입니까...."



들어본 적은 물론 있다. 어떠한 존재인지도 대강, 소문 반, 사실 반으로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별다른 반응 없이 소녀는 다시금 눈을

내리깔았다. 설령 이것이 '제안'이 아닌 '명령'이더라도 자신이 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으리라.



"조금이지만, 들어본 적이라면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그를 폐하 앞에 '데려오길' 바라시는 것이시온지, 아니면 . . . . ."



이미 승낙은 반 전제로 하고 내뱉는 말들. 허나 말꼬리를 살짝 흐리는 소녀의 태도에, 황제는 흥미롭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되묻는다.

마치, 소녀의 대답을 꽤나 기대하는 것처럼.



"아니면? 죽이라고 하면 죽이기라도 할 텐가?"



"...제가 그를 죽일 수 있다고는 저 또한 그다지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만약 바라시는 것이 그것이라면, 되지 않아도 되게 해야겠지요.

허나, 죽이길 바라신다면 그 전에 감히 황공하지만, 어째서 그래야 하는지, 그 이유를 듣고 싶다 한다면 지나친 무례가 되겠습니까."



소녀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생각한 것, 그 사실대로 말했다. 어차피 숨기고, 거짓말한대도 통용될 것도 아니거니와, 여기서는 그래야 할

이유도, 그러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별달리 눈에 띄는 활동도, 별다른 위해도 주지 않는 상대를 죽이는 취미는 없다. 오히려, 가능하다면

기피하고 싶은 것. 소녀 자신의 성품도 그랬고, 그녀의 능력 또한 그런 것과는 그리 어울리지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무엇보다도,

그 는 그것을 바라지 않을 테니까.』



그렇기에, 소녀는 살짝 내리깔았던 눈을 곧게 뜨고는 말을 이었다. 붉은 머리칼이, 푸른 눈동자에 흔들림 없이 담겼다.



". . .그리고, 저는 분명히 사람을 하나 '찾아 주었으면'이라 들었사옵기에 '전해야 하는 것'이 있는 것인가, 생사나 정보 같은 어떠한,

'그에 대한 사실의 확인'을 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를 '데려 와야' 하는 것인가, 를 여쭙고 싶었던 것 뿐입니다. 길게 대답한

무례를 용서하소서."



다시 한 번, 치맛단을 잡고 가볍게 허리를 숙이는 인사를 하고는, 곧 몸을 세운다.



"[조용한 것은 미덕이나, 해야 할 말도 하지 않아서야 단순한 인형이다]. '녀석'의 말이다만, 그 기준 대로라면 너는 합격, 이라는

것인가."



누구에게랄 것 없이 그리 중얼거린 황제. 소녀 또한 자신에게 대답을 요구한 것이 아님을 알았기에 가만히, 그저 조용히 서 있을 

뿐이었다. 다음에 이어질 말을 기다리며.



"『마법사』를 찾아서 데려와라. 수단과 방법은 네게 맡기도록 하지. 방금 전, 네가 말한 대로 쉽사리 죽을 녀석은 아니다만. 정 방법이

없다면 그 역시 허락하겠다."



물론 소녀는 죽인다는 것 자체는 기본 선택지에서 배제하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 선택지까지 가면 그것은 최악이라고 해도 될 테니까.

자신이 당할 확률도 높으며, 또, 해낸다 해도 『마법사』에게서 그가 바라는 무언가를 얻을 수도 없고, 자신 또한 만신창이가 될 것이

눈에 빤히 보이는 최악의 책. 그렇기에, 소녀는 그것을 제외한 수십, 수백 가지의 방법과 예상을 머릿속에서 그리기 시작한다.



"그래서, 대답은?"



소녀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담겼다. 우아하고, 공손하게 다시 한 번 절한다. 당연한 일이다. 죽인다,는 선택지는 과연 없지만,

정말로. 어떻게 해서든 절대로 해내겠다고, 그리고 그러리라고 스스로 다짐하고. 곧게 대답한다.



"바라시는 대로."



지금, 눈 앞의 군주가 어떠한 표정을 보일지, 어디를 보고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아마, 눈으로 본다 해도 결코 진정으로 알 수는 없겠지.

천천히 몸을 세운 소녀에게, 명령이 이어진다.



"녀석이 발견 된 장소에 대한 것과, 그 밖의 필요한 지원에 관해서는 『현자』에게 말하도록."



사실상, 용무가 끝났음을 알리는 한 마디. 그것을 이해한 클레르 세레스타인은 다시 한 번 흐르는 듯 절을 한다. 마지막, 퇴실의 인사.

변함 없이 고운 미성으로 마지막 대답을 건네고. 그래. 이것은 어디까지나 '해야 할 일'일 뿐이다. 마법사를 찾아가는 것도, 

무법 지대에 간다는 것도. 그러니까, 그 곳으로 간다는 사실 따위에. 신경을 쓰면 안 된다. 스스로 되새긴다.



"분부, 받들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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