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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홋

로하로하냥냥 2012.09.30 10:55 조회 수 : 1








01.





     리제 맥시아는 마도의 길보다는 현실적인 면을 중시한다는 점 외에는 어디 하나 남다를 것도 없는, 평범

을 그려놓은 듯한 마술사라고 스스로 자부하고 있었다. 최소한 실력으로는 말이다. 딱히 낙제점을 받을 만큼

못난이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주목받는 인재 따위는 더더욱 아니다. 타고난 이능이나 소질도 없어서, 어느

방면으로도 모난 것 없이 무난하기 그지없는. 말하자면, 『집행자』이며 『로드』이며 마술사 사회 밖에서까지

『귀족』인 이 쌍둥이가 자신에게 관심을 가질 이유는, 용무를 가질 이유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저, 저기."



아무렇지 않은 듯 헤실헤실 웃는 고양이 얼굴로 길을 걷는 소년. 언뜻 보기에는 전혀 이상한 점 따위는 없었지만,

리제 맥시아는 분명히 그 위화감을 눈치채고 있었다. 빨라지고 있다.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전자는 소년의 속도를

뜻하는 말이었고, 후자는 그 주변의 모든 것에 대해서였다. 인파 사이로 길이 보이는 것처럼, 소년은 슥슥 아무렇지

않게 사람들 틈새를 헤쳐나간다. 퇴근 시간의 번화가를 아무렇지 않게 역행하지만, 주변의 그 누구도 그를 알아채는

이는 없다. 시선을 던지는 이는 없다. 심지어, 런던의 아스팔트 길가 위에 고인 흙탕물조차, 소년은 밟되, 밟지 않으며

지나간다. 즉, 분명히 딛고 지나갔는데, 물방울조차 묻어있지 않아.



어떻게 한 거지? 자기 자신한테만 범위를 한정해 인식 저해의 결계를 건 건가? 하지만 저건 오히려 결계라기보단,

그래. 소년이라는 존재 자체만이 인식되지 않는 기묘한 느낌이다. 사람이 존재하긴 존재하기에, 아무도 소년의

발을 밟는다거나 하지는 않지만. 단지 그 뿐. 아니. 저것이 무엇이던간, 정신 바짝 차려. 리제 맥시아! 가는 손가락을

한껏 모으고 몇 번 고개를 흔든다. 편을 들어주고 뭐고 해도, 그게 저들의 목적이었다는 보장도 없잖아!



"저기, 지금 어딜 가는 건지는 말 해주어야 하는 것 아냐?!"



처음치고는 조금 어조가 강하게 나온 것 같지만, 애당초 문답무용으로 자신을 이끈 건 저 쪽이다. 실례는 저 쪽이

한 거란 말씀. 무, 물론 거기에 끽소리 못하고 끌려온 건...아니...니까. 애써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며 리제는

갑자기 발걸음을 재촉해 은빛 머리칼의 소년을 잡았다.



"쉬잇, 미스. 조용 조용. 사냥꾼들이 냄새를 맡고 뒤쫓고 있어. 이상한 나라의 입구를 들키면 곤란하겠지?"



이건 무슨 헛소리란 말인가. 사냥꾼? 이상한 나라? 순식간에 자신의 귓가에 속삭이고는, 다시 '멈춘 적도 없었다'는

듯 걸어가는 소년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리제는 그제서야 눈치챘다.



───쫓기고, 있어...?



대체, 누구에게? 아니. 쫓길 거라면 어째서 자신을 말려들게 한 것이란 말인가? 그보다, 상대방이 어지간한 마술사라면

더 볼 것 없이 끝낼 수도 있을 터다. 그런데 어째서. 그리고, 리제의 머리는 한 가지의 가설에 닿았다.



타겟이, 나?



"네가 지금 타겟이 자신이란 것을 인식했으면 좋아. 대단하다고 칭찬해 줄게."



여전히 기계로 잰 것 같은 속도, 하지만 마치 애니메이션 속 춤을 추는 주인공과 같이 경쾌한 느낌의 스텝을 밟으며

소년이 말했다. 뒤를 돌아보는 일도, 시선을 던지는 일 따위도 없었다. 목소리를 죽이는 일조차 없었지만, 어째서인지

방금 이후로 자각한, 뒤따라오는 시선은 어떠한 변화도 없다. 어째서지? 정말로, 자신을 지워버리기라도 한 걸까?



"그저 조금, 장난을 쳤을 뿐이야."



생각을 읽힌대도, 믿을 수 있을 법한 타이밍이었다. 손끝이 떨린다. 뒤로는 추격자, 앞으로는 완전히 수수께끼의

집행자. 진퇴양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세상 모든 것이 모노톤으로, 소년만이 채색된 기분이다.



"걱정 마. 위해를 가할 생각은 없어. 뭐, 사실 아무래도 좋은 일이지만. 로안이 널 그럭저럭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으니까.

참고로, 네 머릿속을 내가 죄다 읽어내는 일 따위는 불가능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만두도록 해."



소년은 중얼거렸다. 언뜻 들으면 보이 소프라노처럼 예쁜데다가, 쾌활하기까지 해 호감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그런 목소리였지만 무언가,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느낌. 그건 지금의 상황 때문일까. 따끈한 물에 탄 코코아처럼,

순식간에 퍼져가는 의문과 불길함에 리제는 자신을 훨씬 앞장서버린 소년을 쫓아 구르듯 달려야만 했다. 여전히

신기하게 인파 사이를 흐르듯 헤쳐가고, 오른쪽으로 한 번 꺾어. 골목길로 들어간다. 굽이굽이 계속되는 

런던의 오래된 골목들. 햇빛조차 제대로 새어들지 않는 곳에 이르러서야, 소년이 덧붙이듯 말했다. 



"그런데 그것 알아? 이것까지 눈치챘다면, 정말로 훌륭하다고 인정. 뭐냐하면 음...나는 말야, 로안이 좋아하지

않는 일은 어지간해서는 하지 말자는 주의야. 그런데, 또 나는 로안이 다른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싫어. 또, 나를 

방해하는 게 정말 싫어."



소년은 가만히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말하자면, 거슬린다는 말이야."



몸을 돌린 소년은, 더없이 아름답게 웃고 있었다. 이상한 일, 정말로 이상한 일. 시리도록 푸른, 네온과 같은 반짝이는 눈이

순간 붉게 보인다. 그리고, 눈매가 초승달로 휘어지고. 무엇인가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예상했던 충격은, 각오했던

아픔은 돌아오지 않는다. 빼꼼, 살짝 눈을 떠보니 소년은 여전히 웃는 낯. 명화의 한 장면처럼 아름답게, 영화의 한

장면처럼 여유롭게.



"──너도 그렇지?"



파직거리며 산산조각 나, 서서히 사그라드는 사역마들과 의식을 잃은 추격자들을 뒤로 한 채. 








02.





     "아아. 이걸로 파리들은 처리 끝!"



한없이 지루했던 공부를 끝내어 속이 시원하다는 듯한 얼굴로 소년은 밝게 내뱉었다. 여전히 여유 가득한 채 웃는다.

듣는 입장에서는 전혀 그럴 기분이 아니었지만,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태평스레 '너도 싫었지?' 따위의 말을

묻는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눈치 챘으니까. 방금 한 말 중에, 거짓은 없다고. 그렇다면 그건......



"어째서, 나는, 가만히. 내버려 둬?"



그에 소년은 의아하다는 듯, 왜 그런 당연한 것을 묻냐는 얼굴이었다. 어째서 저런 걸 묻는 것일까, 라는 듯 한 쪽

검지 손가락을 입가에 가져다대며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은 남녀노소 끌어안고 머리칼을 쓸어주지 않고는 못 배길법한

인상이었지만, 그리 여유로운 상황은 절대로 아니니까.



"으─응. 당연하잖아? 확실히 나는 로안이 다른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썩 내키지 않지만, 그것보다는 로안이 좋아하는

걸 그대로 따르는 게 훠얼-씬 더 좋은 걸? 로안한테 미움받는다니, 으으. 그거야말로 최악이야...상상하고 싶지도 않아..."



이 쪽이 죄책감을 느낄 정도로 우울해하는 얼굴. 소년의 스피드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아, 아무튼. 저 말은 일단

지금은 아무렇지 않다는 뜻으로 봐도 되는 거겠지. 그래. 그럼 된 거다. 이제 구해 주어서 고맙다고 인사하고

집으로 가면 다사다난한 하루, 수고하셨습니다!



"뭐, 뭐. 좋아, 그럼 도와줘서 고마웠어. 괜찮다면 먼저 실...."



"흐응. 괜찮지 않은데?"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질렸다. 저저저저저게 지금 뭐라고 했지? 괜찮지 않다니 그건 도대체 무슨 의미지? 아니, 왜

나는 여기까지 따라온 걸까! 생각해보니 설령 저 추격자들에게 위험한 꼴을 당할 뻔 했어도 버서커를 불렀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주변이 요란해지는 것 빼고. 그런 리제에게 소년은 조곤조곤 속삭이듯 말했다.

하나 하나 설명하는 듯한 어조였지만, 꿀같이 달콤한 목소리.



"난 로안에게 너를 데려갈 거니까. 걱정하지 마. 티 타임을 즐길 뿐이야. 말했잖아, 로안은 네게 관심을 갖게 된

것 같다고. 정확히 말하자면, 너라는 인간의 품성과 재능에 대해."



품성과 재능? 그건 또 무슨 말인가. 남의 눈에 띌 정도로 성자 같은 성격도, 성격파탄자도 아니다. 재능은 두말하면

잔소리인 일. 그렇지만 그런 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소년은 웃었다. 



"걱정 마. 걱정 마. 해가 지기 전에 무사히 자택으로 모셔다 드릴 테니까. 원한다면 맹세를 해도 좋아."



"아, 아니. 그럴 필요는──"



"그래? 와아, 허락 받았다! 있지, 절대로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 안 돼? 뭐, 별 일이 생기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응? 딱 세 걸음만."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 새하얀 손이 자신을 붙들었다. 그리고, 평범하기 그지없는 잿빛 건물의 창고 문을 열었고.

깜깜한 어둠 속으로 끌려가듯 발을 내밀었다. 도대체 여기는 왜──고개를 돌려보려다 '옆을 보지 말라'는 말을

간신히 떠올리고는 반쯤 움직인 고개를 멈춘다. 그리고 어쩐지 숨을 참고,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자아, 먼 길 오셨습니다! 레이디, 헤이스팅스 타운하우스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03.




     

     리제는 상인으로서, 자신이 '구매'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하지 않는 부잣집 나리들의 저택에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아니, 꽤 많았다. 그럼에도 이 저택이, 여태까지 그녀가 보아온 것들 중 가장 아름답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단순히 속빈 강정마냥 비싼 졸부의 천박한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정말로 유서 깊은 집안이란

걸 곧바로 나타내주는 건물 내부와 취미 좋은 장식들. 벽에 걸린 르네상스기의 명화와 옆에 놓은 스탠딩 램프의

조화는 인테리어 디자이너라면 누구든 감탄치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아니, 아니. 정신 차려, 리제! 넌 지금 

호랑이 굴에 끌려들어온 거라니까? 『집행자』는 위험해.



"뭐 해, 맥시아 양? 언제까지 창고 문 앞에서 서성일 생각이니? 지금 응접실에 가기 전 미리 저택 안내 정도는 해

줄 테니까. 그만 이동하지 않을래?"



그래. 지금은 별 수가 없다. 어떻게든 도망치려 해도, 수백 수천 개의 결계와 트랩이 분명 완벽하게 설치되어 있을

거야. 버서커라도 부르지 않는 이상 나갈 방도가 없어. 결, 결코 보는 순간 씀씀이가 분석되고 자동적으로 손님

후보라고 생각하는 것 따위는 아니니까 말이야!



아무도 믿지 않을만큼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리제는 스스로 잘 버티고 있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물론,

앞을 걷는 노아는 히죽 웃으며 재미있다는 생각이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그리고, 버티기의 승자는 물론 노아 

플란델 헤이스팅스. 거울의 방과, 복도의 갑주들, 대연회장, 테라스, 그리고 마침내 온갖 문화재나 다른 재보를 

모아둔 보관소에 이르러서 리제 맥시아는 본능에 무릎 꿇을 수 밖에 없었으니까. 스스로 그런 자신을 원망하며,

리제의 태도는 그녀 본인도 어쩔 수 없을 정도로 낮아져 있었다.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또각거리는 발소리의

주인을 만나기 전까지는.



"──네놈, 이제야 기어오는 게냐."



언뜻 보고는 굉장히 예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허리 조금 위까지 늘어진 진한 꿀타래와 같은 금사의 머리칼, 

요정의 실로 만든 것 같은 새하얗고 하늘하늘한 쉬폰 블라우스와 보기 좋은 다리를 감싼 블랙 진. 거기에 우아한

장식이 된 스틸레토 힐까지. 칙릿 드라마의 여주인공처럼 능력 있고 아름다운 사람이란 건 이런 타입일까, 라고

생각했다. 제대로, 고개를 들어 얼굴을 마주치기 전까지는.



"───! ! !"



움찔. 몸이 굳는다. 멋대로 움직일 수도 없어. 자신이 눈치조차 챌 수 없을 정도의 무언가가 아니라면, 마술적인

무언가 따위도 아니다. 그저, 중압감. 딱히 싸늘하지도, 무례하지도 않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오만함을 담은 눈동자는

토파즈를 녹인 빛깔. 어떠한 외압도 담지 않은, 그저 그녀 스스로가 가진 분위기. 단지 그 뿐은 아니었다. 자신이,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서....번트....."



그렇다면 이 쌍둥이도, 아니. 이 소년만인가? 알 수는 없었다. 허나 확실한 것은 방금의 말로 미루어볼 때 이들

역시 성배전쟁에 참가한 마스터란 것. 리제 맥시아는 순식간에 상황을 분석했다. 손해득실과 확률의 파악은 당연한

일. 굳이, 세밀한 계산이 필요치도 않았지만. 각오는 한 일이었지만, 이건 너무나 상황이 다르다. 누가 마스터로서의

자질이 더 뛰어난지는 명명백백. 저 서번트가 규격 외의 약체라는 말도 안 되는 가정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면, 

승률은 낮다. 운을 기대하거나 버서커가 저 여성을 압도하길 바라는 것 밖에 답은 없다. 여전히 덜덜 떨리는 손끝을

간신히 숨긴다. 그다지 통할 것 같지도 않지만. 어떻게 해서든 숨을 들이킨다.



"도련님, 아가씨는 아직 안 오셨는데요. 이런이런, 설마 손님을 홀리느라 아가씨를 놓치신 건 아니죠?"



또다른 흑발 소년의 등장. 이 쪽은 소년인지 소녀인지 분간하기 조금 어렵지만, 찬찬히 뜯어보니 소년에 가까운 인상이다.

호칭(My Lord)으로 보아 아무래도 사용인. 물론 평범한 사용인인지는 파악 불가. 복숭앗빛 눈동자의 소년 집사는

리제를 흘끗 보고는 휘어지듯 싱긋 웃으며 목례한다.



"어서오세요, 미스. 예송나무 저택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저는 이 댁에서 로안 아가씨와 노아 도련님, 그리고 이 쪽의

아씨를 모시는 집사랍니다. 호칭은 아무래도 좋지만, 굳이 이름으로 부르시겠거든 '페이'라고 불러 주세요."



얼떨결에 끄덕이는 고개. 



"──시종. 아직 계집애가 온 것이 아니라면 나는 그 전까지 조금 더 티 타임을 즐겨야겠다. 요깃거리를 가져오너라."



"어라어라, 누님. 너댓 시간 전에 그렇게 상다리 부러지게 차린 아침 식사를 드시고도 벌써 배가 고픈 거야? 뭐,

상관 없지만."



"흥. 그야말로 노닥거리다 온 주제에 말이 많구나. 계집애가 오늘 보인 태도는 예외였건만, 네놈에게 그러함을 기대할

수는 없었던 것이냐. ──무엇, 어린애가 어린애 같은 면을 보이는 건 책 잡힐 일이 되지 않지만."



"아하하. 들켰네? 일부러 좀 빙 돌아오기는 했어. 자꾸 꼬이는 파리떼가 너무 귀찮아서, 오히려 한 번에 잡아버리기는

조금 싫더라고. 아무튼, 찻잔이나 찻잎의 선택은 네게 맡길게. 원한다면 이야기 속 칸타렐라라도 가져와 보던가."



"이런, 무슨 말씀을. 아, 그 쪽의 미스는 혹시 딱히 선호하시는 게 있으신가요?"



"..아, 아니."



"흐응. 그럼, 그래. 찻잔은 로열 알버트의 레이디 칼라일(Lady Carlyle), 찻잎은...니나스의 떼 드 방돔으로 하죠. 

에디아르도 무난하겠지만, 역시 찻잔과 정원에 어울리는 게 좋을 테니까요. 아, 정원에서 드실 것 맞죠?"



"아아. 그리고 로안이 오면 안내 부탁해."



"네입. 그럼 먼저 아씨께 내드리고 가져가겠습니다."



비틀릴 것 같은 공기는 금발 여성이 사라지고서야 조금 풀어졌다. 티를 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다소 가쁜

숨을 몰아쉬며, 리제는 작은 손을 꽉 쥐었다. 머리칼조차 굳은 느낌을 받을 정도로 잔뜩 긴장했지만, 져서는 안 된다는

각오로 입을 열었다.



"너도 마스터야?"



"응? 아아. 그렇지. 그러고보니 너와 네 서번트의 무용은 잘 보았어. 멋지던걸. 가엾게도 공무원들은 예산 때문에

고생 좀 하겠다만."



"──뭐?"



지금 말은, 설마. 자신이 마스터라는 사실도. 버서커를 소환했다는 사실도. 다 알고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어째서? 설마, 이것 또한 전부 함정?



"아아, 너무 그렇게 적대시하지 말아줘. 긴장할 필요도 없어. 말했잖아? 아무 일 없이 집으로 돌아가게 해 준다고. 

성배전쟁이라는 '일' 하나만이 중요한 거랄까 모든 것은 아니잖아?"



"그, 그건......"



자신 또한 여전히 상인이라는 본업을 잊고 있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지만, 지금 소년의 말은 상당히 다른 느낌으로 들렸다.

남들은 목숨을 거는 싸움이, 이들에게는 그저 '일'인 것 뿐일까. 자신들이 패배하리란 가정은 눈꼽만치도 하고 있지

않는 걸까.



"아, 혹시라도 우리가 자신감에 넘쳐 흐르는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면 그만두는 게 좋아. 우린 우리가 이길 거란 생각은

딱히 하고 있지 않으니까. 모든 변수를 계산한다는 건 어려운 걸."



"그렇다면,"



그렇다면, 어떻게 그렇게 태연할 수 있어? 각오 따윈 보이지 않는다. 아니, 그 전에 그것은 속마음을 전혀 읽을 수

없으니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리제는 물었다.



"글쎄. 태연하다, 라면... 그래. 나도 로안도, 이미 한 번 죽었으니. 그렇다고 해 둘까."



어쩐지, 피노키오의 가면을 뒤집어 쓴 것 같으면서도. 어쩐지, 사라질 것 같은 인상이었다.







04.





     "──와아...."



그 뒤로 소년에게 이끌려 걸은 리제가 도착한 곳은 정원이었다. 실내의 정원. 어떻게 한 것인지 런던의 정경이 내려다

보이고, 흐린 하늘이 아닌, 그저 조금 낀 구름 사이로 햇빛이 내리비추는. 말 그대로의 공중 정원.



"이, 이건 뭐야? 어떻게 한 거야?"



리제 맥시아는 불과 몇 분 전까지의 긴장감마저 잊고 잔뜩 달뜬 얼굴로 종종거렸다. 분명히 저택 문을 열었을 뿐인데──

그래. 이걸 잘 응용하면 틀림없이 대인기의 기획이 되지 않을까? 와앗, 저기 저건 어떻게 된 거지? 저것도! 이런

구조물이 가능하다니 전혀 짐작도 못 했어..! 응, 그래. 지금 잘 기억해 두었다....아.



리제는 그제사 떠올렸다. 마술은 은닉. 비-마술사에게는 마술의 존재를 은닉. 타 가문의 인간에게는 가문의 마술을

은닉. 알려줄 리가 없었다. 바보같은 꼴만 보여주었던 것 뿐. 들뜬 기분이 가라앉고, 살짝 시무룩해진 리제의 귓가에

맑은 웃음소리가 울려퍼진다.



"아하하하. 너, 생각보다 재미있구나!"



"뭐, 뭐? 지금 사람 비웃는 거니?"



"아니아니. 전혀 그런 게 아니야. 진심이라고. 아, 저건 400년 전부터 있던 거지만, 나랑 로안이 틀만 놔두고

거의 새로 만들다시피 했으니까. 자아, 잠시만. 보여줄게."



이렇게 되자, 당황한 것은 리제 쪽이었다. 숨기지 않는 건가? 그리고 어설프게도, 생각한 것을 그대로 입 밖으로

내어버렸다.



"으응? 은닉..? 흐응. 글쎄, 우린 그다지 그럴 필요성을 못 느껴서. 우물 안 개구리만 되어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잖아? 그리고 이 정도를 알려준대도 우리에겐 별로 상관 없는 일이고. 왜, 싫어?"



즉시 고개를 젓는다. 다시금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흩날리고, 소년은 미소지었다.



"──그러고보니, 맥시아 양의 서번트는 버서커던가? 굉장히 화려한 싸움이라 기억에 남았어."



"....뭐. 어차피 보았었다면 별다른 변명도 없으니까. 창피하지만."



"에에, 그다지. 굳이 창피해할 만한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겨우 한 번의 일, 끝은 아니지. 요는 말하자면,

중요한 건 네가 이후로 어떻게 행동하냐니까."



"...흥. 아는 체 하기는."



"아, 혹시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사과할게."



"뭐, 됐어. 확실히 어제 그건 짜증났지만, 내 탓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니까 말야."



"헤에. 생각보다 깔끔하구나?"



"거기서 남에게 전가해봐야 나중에 생각했을 때 자신만 더 비참해질텐데, 뭐. 그러고보니, 그럼 아까 그 사람은

네 서번트?"



"아, 응. 일단 가명은 아이린 씨라고 하고 있지만. 난 그냥 누님이라고 불러. 솔직히 좀 예외였달까. 난 처음에

우리 집안이 집안인만큼 지크프리트 정도가 나올 줄 알았거든. 그렇지만 피보다 더 진한 무언가의 공통점이

따로 있었으려나. 우음, 아직 잘 모르겠지만."



소년은 거리낌없이 이야기했다. 지크프리트라니, 자신은 다른 명문가들의 집안 내력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소년의 외가 쪽이라던가는 거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말일까.



"아, 저 꽃 뒤의 장식물은 따로 응용해서 만든 거긴 하지만 그다지 어렵지 않아. 이따가 제조법을 알려줄게."



"이따가?"



자신과 비슷한 높이에 있는 푸른 눈이 초승달마냥 곱게 휘었다. 구름 속에서 비친 달마냥 희미한 빛을 띄고.



"응. 로안이 왔거든."









05.





     달칵.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이 소녀는 아까의 서번트와는 다른 의미로 고고한 분위기다. 리제

맥시아는 꿀꺽 홍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입가에 닿는 페이스트리의 맛이 퍽 달콤했다.



"미스 맥시아."



움찔. 어째서 자신보다도 조금 더 어려보이는 소녀에게 긴장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작은 꼬마

여왕님은 아무래도 어른들 따위 가볍게 휘어잡는 듯한 분위기로 이미 이 공기를 다스리고 있었기에, 정말이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도 될까요. 그러니까, 조금 실례가 되는 내용이나 말투일 수도 있어요. 괜찮은가요?"



"어, 얼마든지."



"──그럼, 리제 맥시아. 그대에게 묻지. 헤이스팅스는 그대를 후원하자."



리제는 그만, 들고 있던 딸기 무스 한 조각을 떨어뜨렸다. 아, 하면서 여러 의미로 당황하는 틈을 타, 페이라는

소년 집사가 흔적도 없이 깔끔하게. 단 한 번의 유려한 동작으로 치워 버린다.



"후, 후원이라니. 그건 무슨──"



"말 그대로다. 그대를 돕자. 어리석은 이들 사이에서 배경도 연륜도 없다는 약점을 지고도, 가장 현실을 직시하고

어긋나지 않는 그대의 성격을 사고, 또. 남들이 보지 않는 그대의 재능을 사들이겠어."



"재능이라니, 그건 무슨 의미일까?"



"...정말, 모르는 건가. 모른 체 하는 거라면 관두는 편이 좋아. 아니, 실제로 모른대도...무엇, 조금 있으면

알게 되겠지. 잠재력이 개화하는 순간은 그 무엇보다 아름다우니."



"....그럼..지금 나를 돕겠다는 말이야?"



"그래. 글쎄, 이 전쟁의 문제까지는 들고 오지 말아주었으면 좋겠군. 확실하게 정해둔 선 따위는 없으니. 하지만

그대가 지금 그대로 있는 이상,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앞으로 그 누구도 그대를 비웃지 못하게 해 주지. 연구도,

일도, 어떤 것도 원한다면 도와주겠어."



"하, 하지만. 그래서 너희들이 얻는 게 없잖아? 무슨 꿍꿍이야?"



"응? 말했잖은가. 조건은 '그대가 지금 그대로 있는 것'. 말하자면, 난 그대의 잠재력을 보고 이 거래를 제시하는 게다.

그다지 손해볼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대도, 나도."



손해볼 것? 전혀 아니다. 정 반대다! 저 로안슈피엘이라는 소녀가 말한 대로다. 헤이스팅스가 그녀의 배경이 되어

준다면, 모든 것이 확연히 달라질 것임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뒤에서 수궁댈지언정 그녀 앞에서 무어라

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헌데 어째서. 잠재력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믿으라고?


"아무래도 영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군."



"당연하잖아! 그건 너무, 너무 나에게만 좋은 조건 아냐? 너희들이 얻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잖은가. 그대의 성품과 미래를 보고 사들인다. 일종의 투자라고 보면 되겠지. 당장 눈앞의 것에 현혹되는 그런

머저리들을 모두에게 적용하지 않기를 바란다."



딸기 잼과 생크림을 듬뿍 바른 스콘을 한 입 베어물며, 로안슈피엘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만약 정 믿지 못하겠거든. 이 자리에서 맹세를 하자꾸나.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바라는 것은 그 뿐이라고."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몸이 떨린다. 어쩌면, 어쩌면 말이야. 이건 정말 좋은 기회가 아닐까? 솔직히 부잣집 나으리들의

취미 생활 따위, 온갖 기괴한 게 다 있잖아. 어쩌면 이 정도는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닐지 몰라. 어떨까. 한 번 해 볼까?

말한 대로니까. 내게 손해는 없어. 설령 그들이 무슨 꿍꿍이가 있대도, 그걸 알아낸다면 이 전쟁이란 기회를 틈타

역으로 이용해버리면 간단한 일이야. 아니, 물론 간단하지는 않겠지만. 그리고, 그래. 지금은 전쟁중이니까. 저들은

언뜻 보기에는, 성배에 딱히 욕심도 없는, 그냥 취미로 나온 것 같으니까. 잘하면 아군 하나를 늘릴 수 있는 길이야.



무엇보다도, 리제 맥시아의 수 년간 상인으로서 단련된 안목은 가만히 고하고 있었으니까. 지금, 소녀가 말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그렇...다면, 받아들이겠어. ..."



햇빛 머리칼 소녀의 얼굴이 확 피어난다. 믿지 못했던 조금 전의 자신을 책망할 정도로 밝은 웃음. 



"그리 생각해주었다니 기쁘구나."



소녀는, 천천히 손을 내민다. 로안슈피엘 크로아 헤이스팅스가, 먼저 손을 내민다. 잠시 그 손을 응시한 리제는,

크게 숨을 한 번 들이켰다. 그래, 과감한 선택. 미래를 위한 선택. 그리고, 그녀는 그 작은 손을 맞잡았다.



"부디, 나를 실망시키지 말아주었으면 좋겠어."



"신뢰에는 언제나 보답합니다, 투자자님."



──그것 참 믿음직스럽군, 로안슈피엘이 웃었고. 리제 또한 끌리듯 웃었다. 그래, 전쟁 한정이 아닌 진짜 후원이라면.

앞으로의 길은 달라질 테니까. 리제는 살짝 손끝에 힘을 주었다. 힘내는 거야, 리제 맥시아. 이젠 정말로 어디 원망할

것도 없어졌으니까. 할 수 있어. 해내고 말 테니까──







06.





     리제와 노아는 저택의 지붕 위에 서 있었다. 티 타임만 즐기고 돌려보내 준다는 것이 어느새 흘러흘러, 저녁 식사

까지 마친 깜깜한 밤이었다. 화려한 런던의 야경이 보이는 장소에서, 리제는 오늘 하루를 곰곰히 되짚고 있었다. 

정말이지, 꿈과 같은 하루. 어제 밤부터 이어졌던 안 좋은 일들은 정말 오늘 오후를 위해 존재했었던 걸까. 쌍둥이가

집행자이기 때문에, 또, 자신 같은 괴짜를 선뜻 돕겠다는 이가 나타났다는 사실이 실감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쉬이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적어도 반나절을 지켜본 바, 쌍둥이에게는 그러한 악의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집행자라는 사실도 일종의 반-프리랜서인 파트 타임 직업이고. 무엇보다도 로안슈피엘이란 소녀의 말은 완전한

진심이란 것이 곳곳에서 드러났으니까.



"헤에, 뭘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맥시아 양."



갑자기 들려온 낭랑한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코앞에서 웃는 새파란 눈동자. 너무나 가까운 거리였기에

흠칫 놀랐지만 역시, 가까이서 보니 정말로 예쁘게 생긴 얼굴이다. 신이란 게 존재한다면 정말 손수 세공을 했대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말하자면, 감탄이 나올 것 같은 인형의 생김새? 



"설마, 오늘 일이 꿈 같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렇다면 꽤나 귀여운 생각이네."



"누, 누가 그렇대?!"



"아아. 역시, 착각인가. 그렇다면 조금 슬프다. 기뻐해준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기뻐..하지 않는 건, 아니니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환하게 바뀌는 얼굴. 정말이지 이 쌍둥이는 사람 기분을 갖고 노는 데 일가견이 있다! 시무룩한

고양이들마냥 축 쳐져 있다가도 한 마디만 하면 이렇게 확 피어나니. 아, 아니. 그다지 그런 것이 좋다던가 하는

건 아니지만, 역시 우울해 있으면 걸리는 건 어쩔 수 없다고!



"뭐, 아무튼. 이미 꽤나 늦었으니까 빨리 출발하자."



"출발?"



"음? 아까 약속했잖아? 바래다 준다고."



"그거야 빗자루를 타고 가면 되니까 괜찮아."



"빗자루...흐응. 맥시아 양, 혹시 너는 바람 위를 걸어본 적 있니?"



"바람 위? 빗자루를 타고 난 적은 있지만 걸어본 적은 없어."



"그래? 그렇구나아.."



"갑자기 그건 왜 묻....?!"



두둥실, 다리가 지지대를 잃고 떠오르는 느낌에 순간 말문이 막힌다. 아니, 단지 그 느낌 뿐만은 아니었다. 빗자루를

타고 날 때와는 또 다른, 새로운 밤하늘이 눈앞을 수놓고 있었으니까. 소년이 말하는 대로, 밤바람 위를 살짝

걷듯 발을 내딛는다. 불안하지만, 어딘가 푹신푹신한 느낌. 봄의 바람은 밤하늘에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부드럽고

선선하게 세상을 적신다.



"자아, 미스. 어떠신지, 공중 산책의 소감은?"



멀찍이 보이는 버킹엄 궁전, 그 반대편. 더 작게 보이는 빅 벤의 황홀한 금빛 조명을 보며 노아 플란델 헤이스팅스가

유쾌하게 물었다. 



"...나쁘지 않네, 생각..보다는."



그래. 대단한 후원자. 맛있는 에프터눈 티. 달콤한 초콜릿. 아홉 가지의 코스 요리. 푹신푹신한 의자. 아름다운

저택. 멋진 소장품들. 그리고, 별빛 반짝이는 밤하늘의 산책까지.



정말로, 나쁘지 않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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